록과 당신의 이야기, 그 8번째.

핑크 플로이드, 예스, 제네시스와 함께 프로그레시브 록밴드의 대표격인 밴드, '킹 크림슨'이야.

(1970년 당시 멤버들)

60년대 후반 비틀즈를 비롯한 블루스 록과 사이키델릭 록의 시대던 영국에서 블랙 사바스, 레드 제플린과 함께 등장한 하드록/헤비 메탈과 함께 새롭게 등장한 장르 '프로그레시브 록'의 양식을 다졌다 볼 수 있는 밴드지.


-시작

1967년, 마이클 자일스와 피터 자일스, 로버트 프립 셋은 '자일스, 자일스 앤 프립'이라는 밴드를 만들어 'The Cheerful Insanity of Giles, Giles and Fripp'라는 음반을 냈고, 폭망했지. 어쨌든 이 음반은 초기 킹 크림슨에게 어느정도 영향을 줘. 이후 자일스 형제는 이언 맥도널드와 주디 디블을 데려왔는데, 주디 디블은 오래지 않아 밴드를 탈퇴하지. 직후 작사가 겸 로드 매니저, 문화 평론가 피터 산필드가 이언 맥도널드의 소개로 들어와. 그렇게 이 두 사람이 가장 처음으로 쓴 곡은 바로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이 즈음해서 로버트 프립은 몇몇 밴드를 둘러보았는데, 그 중 '클라우즈'라는 밴드에게 재즈 적인 스타일이나 멜로디 메이킹 같은 곳에서 영향을 받아. 곧이어 보컬 자리에 자신의 동기 그렉 레이크를 추천하면서, 베이시스트=보컬리스트인 킹 크림슨의 공식도 시작이 되지.


-킹 크림슨 1기

1968년 11월 밴드가 공식적으로 결성되고, 다음해 1월 리허설을 준비했어. 피터 신필드가 그때 밴드 이름을 제안했는데, 바로 고대 가나안 지역의 신이자 성경에 등장하는 우상, 악마 '바알세불'의 동의어, '킹 크림슨'이야. 그리고 이때, 이언 맥도널드는 밴드 '무디 블루스'의 영향을 받아 당시 첨단 음향 장비 멜로트론을 제안했고, 이는 밴드의 스타일에 엄청난 영향을 주지.

그렇게 1969년 4월 9일, 밴드는 롤링 스톤스의 자선 공연이 펼쳐지던 하이드 파크에서 라이브 데뷔를 하게 돼.

그해 10월, 킹 크림슨의 대표작이자 전설적인 데뷔엘범,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이 발표돼.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의 앨범 커버. 편집증적 피해망상과 정신 분열을 표현했다.)

참고로 이 앨범이 처음 나왔을 때 영국 앨범차트 1위는 그 유명한 비틀즈의 'Abbey Road'로, 킹 크림슨의 앨범은 영국 멜로디 메이커 지 앨범 차트 5위, 빌보드 200 차트 28위를 차지해. 참고로 1970년 멜로디 메이커 앨범 차트 1위는 비틀즈, 롤링 스톤스, 사이먼 앤 카펑클, 무디 블루스, 레드 제플린, 블랙 사바스가 나눠먹었지.

물론 이 앨범은 충분히 걸작이야. 더 후의 기타리스트 피트 타운젠드는 이 앨범을 일컬어 "불쾌하리만큼 완벽한 걸작"이라고 평가했지.

수많은 커버곡을 자랑하는 대표적인 명곡, '21st Century Schizoid Man'

8분이 넘는 길이에도 불구하고 국내 라디오 방송에 수없이 신청된 명곡, 'Epitaph'(묘비명)

어느 만화 MAD로 자주 쓰인다는 명곡,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


앨범 발매 이후 밴드는 미국 투어를 떠나며 호평은 늘었지만, 어두운 음악을 원하던 프립과 로맨팀 팝 계열 음악을 원하던 자일스/맥도널드의 노선 차이가 있었고, 마이크 자일스와 이언 맥도널드는 2집 'In The Wake Of Poseidon'을 끝으로 탈퇴하게 되지. 거기에다가 그렉 레이크도 1970년 중반 키스 에머슨의 꼬드김에 '에머스 레이크 앤 파머'로 떠나게 돼.

(2집 'In The Wake Of Poseidon'의 앨범커버. 타모 드 종의 1967년 그림 'The 12 Archetypes'를 사용했다.)

이 앨범을 녹음할 때, 무명이던 엘튼 존을 보컬로 영입하려 했지만 엘튼 존의 거절로 무산되지. 결국 그렉 레이크가 보컬을 맡아. 앨범의 8개의 곡들은 그 구조가 1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와 흡사하게 구성되어 있지. 때문에 당시에는 첫 앨범의 명성에 묻어가려 한다는 혹평을 받았어.

수록곡 'In The Wake Of Poseidon' 

곧이어 밴드는 고든 하스켈, 앤디 매컬로크, 멜 콜린스를 영입해 투어를 돌며 3번 째 앨범, 'Lizard'의 세션에 들어가야 하지만 써놓은 곡이 없으니 결국 프립과 신필드가 앨범의 곡들을 모조리 쓰면서 온갖 재즈 뮤지션을 세션으로 초청해 도움을 받았고, 이 중 한 곡은 '예스'의 보컬 존 앤더슨이 참여하기도 했지.

(3집 'Lizard'의 앨범커버)

이렇게 내놓은 3집은 "짜집기"라는 혹평만 받았어. 게다가 밴드의 창작에 별 참가할 게 없다는 것을 깨달은 하스켈은 밴드를 탈퇴하고, 뒤이어 매컬로크도 탈퇴하자 프립과 신필드는 밴드를 한 차례 갈아 엎기로 하지.


-2기

1971년 로버트 프립, 피터 신필드, 멜 콜린스는 새 보컬을 뽑기 위해 오디션을 열고, 브라이언 페리, 엘튼 존, 밴드 매니저 등의 참가자들을 전부 탈락시킨 뒤 보즈 버렐이라는 사람을 영입하고, 드러머도 이안 윌리스라는 이를 영입하지. 그렇게 2기 킹 크림슨은 1971년 투어를 돌기 시작해. 

그해 말, 킹 크림슨은 4집 'Islands' 작업에 들어가. 밴드 역사상 가장 따뜻한 사운드를 만들어낸 이 앨범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와 연관을 보여주지. 또한 로버트 프립과 피터 신필드 사이의 갈등도 역시나 보여주고 있어.

(4집 'Islands'의 앨범커버)

수록곡 'Sailors Tale'. 로버트 프립의 연주 스타일을 보여준다.

이 악화된 관계 때문에 결국 프립은 신필드를 쫓아내버려. 정확히는 그냥 밴드를 해체하려 했는데, 다른 멤버들이 하던 투어는 마저 진행해야 하지 않겠냐는 설득에 72년 까지 투어는 진행하게 되지. 당시 발매된 라이브 앨범 'Earthbound'는 거지같은 레코딩 품질과 개같은 연주 컨디션으로 혹평을 받아.

결국 프립의 음악적 혁신에 대한 갈망으로 2기 킹 크림슨도 해체되지.


-3기

3기 킹 크림슨은 제이미 뮤어를 영입하고 뒤이어 드러머로 예스 출신의 빌 브루포드를 영입한 뒤, 베이시스트 존 웨튼을 영입하고 바이올리니스트 데이빗 크로스를 영입하며 라인업이 완성돼. 물론 작사가 신필드가 없으니 새 작사가를 구해야 했는데, 존 웨튼의 친구 리처드 파머-제임스를 알게 돼. 정확히는 이 리처드는 단독 행동을 원해서, 함부르크의 집에서 우편으로 가사를 부쳐주었지.

72년 말, 스튜디오 리허설과 라이브 투어를 시작해. 밴드 자체가 즉흥 연주를 엄청나게 잘하다 보니, 나름 주목을 받을 수 있었지.

곧이어 73년 초, 5집 'Larks' Tongues in Aspic'을 발표하고, 프립은 이전까지 이언 맥도널드나 피터 신필드에게서 벗어나 전권을 휘두룰 수 있었지. 이 앨범부터 프립은 1집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돼.

('Larks' Tongues in Aspic'의 앨범커버, 제이미 뮤어가 디자인 하였다.)

대표적으로 성향이 달라진 점은 주제곡 'Larks' Tongues in Aspic'이 분할된 점이지.

'Larks' Tongues in Aspic 파트 1


 'Larks' Tongues in Aspic' 파트 2

파트 1과 파트 2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이 모습은 헝가리 음악가 버르토크 벨러나 영국 음악가 랄프 본 윌리엄스 등 광범위한 장르에서 영향을 받은 거야. 특히 전작에 비해 재즈적인 분위기가 난 것도 그렇고.

이때 투어 중 갑자기 제이미 뮤어가 밴드를 탈퇴하게 돼. 당시에는 부상으로 인한 탈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이후 개인적인 종교수행을 위해서라는 것이 드러나지...

1974년, 밴드는 6집 'Starless And Bible Black'를 발표하고, 롤링 스톤 지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 'Starless And Bible Black' 앨범 커버)

각종 실험적인 성과들을 조합한 이 앨범은 'The Great Deceiver'와 'Lament' 말고는 전부 라이브에서 녹음한 것을 편집해 스튜디오에서 녹음한 것처럼 만든 것이지.

수록곡 'Fracture'. 3기 이후 킹 크림슨의 기타 사운드를 엿볼 수 있다.

하지만 또 악기나 연주 비중에 대해 갈등이 불거져. 데이빗 크로스는 자신의 악기가 리듬 섹션에서 잘 들리지 않는 것에 불만이 있었고, 프립은 계속 곡 안에서 기타 비중을 늘리려 하였지. 결국 이 앨범의 투어를 진행하던 중 데이빗 크로스가 탈퇴해고 말아.

데이빗 크로스가 탈퇴하며 3인 체제가 되자 로버트 프립은 결국 밴드 해체를 결심하고 3기 킹 크림슨 마지막 앨범 'Red'를 11월 발표해. 

(7집 'Red')

그리고 이 앨범은 'In the Court of the Crimson King'와 함께 킹 크림슨 최고 걸작으로 뽑히지.

이 앨범 최고의 명곡으로 꼽히는 'Starless'


-4기

이후 제네시스 출신의 피터 게이브리얼의 앨범에 세션으로 참가한 로버트 프립은 솔로 앨범을 내는 등 활동을 이어갔지. 그 후 데이비드 보위의 앨범 'Scary Monsters(& Super Creeps)'세션에 참가한 후 밴드 '리그 오브 젠틀맨'을 결성해 여러차례 라이브 투어를 진행한 뒤, 빌 브루포드와 연락해 새 밴드를 만들고자 했어. 킹 크림슨과 전혀 방향성이 다른 음악을 윈했기에, 프립은 토킹헤즈와 투어를 돌던 에이드리엔 벨류를 영입하고, 베이시스트 토니 레빈까지 영입하며 1981년 'Discipline'라는 이름의 밴드를 결성해. 정작 그래놓고 영국 투어 이후 81년 10월 다시 이름이 킹 크림슨이 되지만.

같은 해, 밴드는 새 앨범 'Discipline'을 녹음해. 포스트 펑크, 뉴 웨이브, 아프로 펑크 등을 수용한 이 앨범은 롤링 스톤 지에서는 "턱 빠질 만큼의 정교한 리듬의 향연, 규칙적이며 리드미컬하고, 동시에 하모니를 들려줘야 하기에 만만치 않은 작업이었을 것"이라 소개했지. 81년 9월 발매된 이 앨범은 영국에서 45위, 빌보드 41위를 기록해.

('Discipline'의 앨범커버)

수록곡 'Indiscipline'의 라이브 공연. 굉장히 자유분방하다.

다음해 6월, 밴드는 후속작 'Beat'를 녹음해. 이번에는 멤버가 아무도 프로듀싱에 참여하지 않고, 렛 데이비스에게 전권을 맡기지. 골때리는 건, 이 앨범이 킹 크림슨 사상 처음으로 2장 이상의 앨범을 동일 멤버, 동일 라인업으로 녹음한 작업물이라는 거야.

('Beat'의 앨범커버)

곧이어 83년, 'Three of a Perfect Pair'이 녹음되어 다음해 3월 발매되지. 이 앨범은 음악적 방향성과 제작에 난색을 겪어, 좌측(사이드 A)에는 대중적인 스타일의 노래 4곡이, 우측(사이드 B)에는 실험적인 곡과 즉흥 연주가 포함되어 있었지.

('Three of a Perfect Pair'의 앨범커버)

그리고 84년, 프립은 작업 방식의 불만족을 토로하며 밴드를 또 해체해. 브루포드와 벨류는 불만을 표출했지만 어쨌든 밴드는 해체되었고, 이 셋은 나른 우호적으로 관계를 유지하지.


-5기

90년대 초, 에이드리언 벨류는 프립을 찾아가 킹 크림슨으로 음악을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프립은 또 동의해 킹 크림슨을 구성하려 하지. 빌 브루포드, 토니 레빈, 에이드리언 벨류를 포함한 뒤 트레이 건과 마스텔로토를 영입한 5기 킹 크림슨은 94년 10월 EP 'Vrooom'을 발매하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공연을 시작하며 다시 모습을 드러냈어. 이후 95년 4월에도 앨범을 발매하고, 계속해서 투어를 진행했지만 97년, 밴드의 비용 상 문제로 유지하기가 힘들고, 또 프립을 만족시킬 수 없어지며 프립과 브루포드 사이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어. 결국 킹 크림슨은 또 활동을 정지하지. 다만 밴드를 해체하는 대신, 규모가 작은 하위 그룹으로 멤버를 재구성 하는 거야. 속칭 'ProjeKcts'라고 하지.

(현재의 킹 크림슨. 왼쪽부터 토니 레빈, 가빈 해리슨, 멜 콜린스, 빌 라이플린, 로버트 플립, 팻 마스텔로토, 재코 잭식)


-평가

프로그레시브 록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밴드 중 하나지. 가장 유명한 1집의 모습에서 멈추지 않고 계속 변화하는 모습에서 '진보'라는 뜻의 프로그레시브와 정말로 어울린다고 생각해. 다만 밴드 자체가 다사다난 한데다 홍보를 잘 안하는 탓에 다른 프로그래시브 록밴드-핑크 플로이드, 예스 등-보다 약간 인지도가 밀리는 감이 없잖아 있지만.


-기타

이 킹 크림슨이란 밴드는 로버트 프립의 능력으로 움직이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이 아저씨는 기묘하게도 당시 수많은 뮤지션들과 달리 약을 정말 싫어했지. 덕분에 다른 멤버들을 영입할 때도 약하지 않는 이들을 받았다고 해. 참고로 이 사람의 기타연주는 실생활에서 여러번 들었을 건데, 윈도우 비스타 부터 7까지 시작음, 종료음, 경고음은 모두 그의 기타 연주야.


-저작권 관리

저작권 관리가 빡센걸로 유명한데, 음악 파일 뿐만 아니라 앨범 커버나 밴드 사진도 그 저작권에 포함되지. 덕분에 어느 잉간은 폰1허브에 1집을 올려버리기도 했어.

폰 허브에 올라간 킹 크림슨의 앨범...

결국 2019년 킹 크림슨 데뷔 50주년 기념으로 공식 유튜브에 음원을 올리고 있으니 노래는 문제 없을 거야.


-잦은 멤버 교체

이 많은 사람들(총 22명)이 전부 킹 크림슨을 거쳐 갔어. 진짜 미친듯이 멤버를 교체해 버린거지.


-다음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