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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명도 안되는 부서성원들이 일하는 사무실에는 대체로 내부사업을 위주로 보는 녀성부원이 혼자 콤퓨터를 마주하고 앉아 자료들을 종합하거나 아래단위들과 전화하면서 방을 지키는 때가 많다.

부서에서 내부사업을 맡아보는지도 10년이 되여오는데다가 기억력이 비상하고 일감을 처리하는데서 언제나 빈틈이 없는 이 중년녀성부원은 위원회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거의 모르는것이 없다. 위원회안에서 돌아가는 소문이라면 기차가 역을 거치듯이 의례히 이 녀성부원 앞을 거쳐가는듯 했다. 기관안의 일들은 대체로 내부일을 보는 부원들이 먼저 알게 되고 그들의 입을 통해서 퍼져가기마련인데 어찌된 일인지 한청사안의 많고도 많은 부서의 내부사업을 맡아보는 부원들중에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물어볼것이 있으면 자기 사업에 정통하고있으며 기억력만 좋은것이 아니라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로 방문자를 맞아줄줄 아는 그 녀성부원을 찾아오는것이였다. 그러니 위원회안에서 떠도는 소문이라면 그 녀자를 경유해서 흘러간다는것도 그닥 과장된 표현은 아니다.

이 녀성부원이 오늘은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혼자 방을 지키며 콤퓨터앞에 앉아 건반을 누르고있는데 나들문이 열리였다.

《그사이 무슨 다른 일은 없었소?》

원격시험때문에 아래단위들을 찾아 며칠동안 분주하게 돌아다니던 광우부국장이 사무실로 들어오며 물었다.

녀성부원은 콤퓨터앞에서 물러나며 깍듯이 아래사람답게 례의를 차리며 대답했다.

《다른 일은 없는데 당위원회에서 부국장동지를 찾았습니다.》

《당위원회에서?》 광우는 무슨 일이냐고 묻는듯 한 눈길로 녀성부원을 마주보며 물었다.

녀성부원은 약간 주저하는 눈치를 보이다가 입을 열었다.

《년초에 아래단위에서 제기되였던 신소건과 관련하여 그러는것 같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무슨 내용인지 더 알고있으면서도 그것이 우의 일군들에 한한 일이고 더우기는 자기 상급의 인격과 관련되는것이라면 크나작으나 아래사람이 알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 그러는것 같았다. 그 녀자의 맑은 얼굴에서 그 어떤 비난의 색채같은것은 전혀 찾아볼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그 녀자의 말에서 감촉되는 그것으로 하여 광우는 다소 기분이 좋지 않았다. 광우는 그것이 자기의 지나친 주관일수도 있다는 너그러운 생각을 하며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신소건이라니? 무슨 신소건 말이요?》

광우가 의아해서 물어서야 녀성부원은 ㅎ도에서 제기되였던 신소건이 있지 않는가고 했다.

생각이 났다. 그는 점점 의혹이 짙어가는 눈길로 녀성부원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거야 그때 이미 처리된게 아니요?》

《글쎄, 전… 잘…》 녀성부원은 고개를 저었다.

광우는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ㅎ도에서 있은 신소건이란 김광우가 책임부원을 할 때 있었던 일이였다. 그곳 어느 건설사업소의 한 로동자가 위원회앞으로 신소편지를 보내온것이였다.

대학추천사업을 공정하게 못했다는 내용이였다. 어느 중학교의 같은 졸업생들중에서 두명의 학생에 대한 중앙대학추천문제가 제기되였는데 공부 잘하는 자기 아들은 떨어지고 그대신 성적이 자기 아들보다 못한 어느 일군의 자식이 추천되였다는것이였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심중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정확히 알아보고 시급히 바로잡아야 했다.

공교롭게도 그때 광우에게는 하나의 딱한 사정이 있었다. 데리고있던 막내딸이 돌격대로 나간 후 세칸짜리 덩실한 집에서는 광우네 내외가 신혼부부처럼 단둘이 살고있었는데 오래전부터 앓던 속병이 도지는 바람에 중학교 교원을 하다가 끝내 사직하고 집으로 들어온 안해가 갑자기 병이 더 심해지면서 아예 자리에 누워버린것이였다.

광우는 자기가 붙어있으면서 관심해주어야 할 안해에게 미안한 소리를 하고 신소에 제기된 내용을 확인하기 위하여 현지로 내려갔다.

그는 도학생모집사업에 관여하는 최윤호처장을 만났다.

김광우와는 전쟁시기부터 아버지들이 한부대에서 사단장과 정치일군이였다는것으로 하여 인연이 남다른 사이였다.

전후에 그들의 두 가정은 군인사택마을에서 이웃하고 살았다. 그때에도 김광우의 아버지 김중혁은 사단장이였고 최윤호의 아버지는 사단정치일군이였다.

김중혁에게 있어서 최윤호의 아버지는 단순한 정치일군이기 전에 사선을 함께 넘어온 잊을수 없는 전우였다.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시기에 있었던 일이였다. 락동강을 건너갔던 사단은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간고한 전투를 치르면서 북으로 들어오고있었다.

김중혁은 사단지휘부와 함께 남강원도의 산발을 타고오다가 춘천계선에 이르러 이상한 공기를 감촉했다. 적들이 끈질기게 달려들어 하루에도 몇차례씩 힘겨운 전투를 치르어야 했는데 그날따라 온종일 조용한것이였다.

김중혁은 마치 사단지휘부가 적이 없는 텅 빈 지대를 지나가는것만 같이 생각될 지경이였다.

그것이 오히려 불안을 자아냈다.

바로 그럴 때 김중혁은 하나의 이상한 징후를 포착했다. 캄캄한 밤이였다. 사단지휘부가 행군하고있는 개활지대너머 맞은켠 산에서 희미한 불빛이 잠간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결코 헛개비에 홀리운것이 아니였다. 김중혁은 거기서 누군가가 분명 무척 조심하느라고 손으로 불빛을 가리우면서 무엇을 비쳐보고 인차 꺼버린 전지불을 자기가 보았다는데 대하여 조금도 의심치 않았다. 산에서 왜놈들과 싸울 때에도 그 비슷한 일이 있었던것이였다.

적이다! 하는 생각이 번개치듯 떠올랐다. 하루동안 사단지휘부가 적정이 없는 지대를 거침없이 행군해올수 있은것이 무엇때문인가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적들이 그 산에서 어떤 음모를 꾸미고있는것이였다. 그런것이 아니라면 이 깊은 밤에 누가 인적없는 산속에서 밤샘을 하고있겠는가. 눈앞에는 어둠의 면사포에 가리워진 적들의 무수한 총구가 떠올랐다.

그것은 젊은 사단장의 머리속에 그저 느닷없이 떠오른 상념이 아니였다. 김중혁이 지도작업을 하면서 익혀둔데 의하면 그곳은 북으로 뻗어있는 산줄기에서 하나의 외통길이라고 할수 있었다.

하나의 군집단이 산줄기를 타고 북으로 들어가자면 어차피 그곳을 거쳐야 하는데 뒤에서는 최고사령부의 명령을 받고 전략적인 일시적후퇴의 길에 오른 많은 부대들이 오고있었다. 만약 어느 부대든지 저 산이 안고있는 비밀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다가 놈들의 매복에 걸려들면 어떻게 되겠는가!

김중혁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얼마나 엄청나게 많은 적들의 무력이 그 산에 은밀히 전개되여있는가에 대해서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다.

그것은 당시 대내에 잠입해있던 미제의 고용간첩 리승엽놈의 작간에 의하여 일어난 사건이였다.

인민군대에 의하여 서울이 해방되자 거기에 나가있던 리승엽놈은 전략적인 일시적후퇴가 시작되자 최고사령부에서 내리는 명령이 부대들에 가닿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책동하는 한편 북으로 들어가는 인민군부대들을 괴멸시킬 목적으로 그들의 움직임을 놈들에게 미리 알려주었다.

하여 적들은 그곳에 엄청나게 많은 무력을 비밀리에 끌어다 대기시켜놓았던것이였다. 하지만 그런 내막은 썩 후에야 알려진것이였다.

김중혁은 맞은켠 산에 놈들이 있다는것을 알게 된 이상 어둠을 리용하여 개활지대로 에돌아갈수도 있었다. 하지만 뒤에서 들어오는 아군부대들에 적이 있다는것을 알려주기 위해 전투를 벌리기로 했다.

사단지휘부는 직속대대와 함께 행군하고있었는데 대대장은 보름전에 전사하여 상급부관이 인솔하는 상태였다. 그런데다가 사단지휘부에서는 문화부사단장이 부상을 당하여 담가신세를 지면서 들어오는 형편이였다.

김중혁은 자기가 직접 직속대대와 사단지휘부안의 전투능력이 있는 인원들을 모두 이끌고 전투를 벌리기로 했다.

전투능력을 상실한 부상병들과 군의, 간호원들, 통신병들은 부상을 입은 문화부사단장이 인솔하여 적들의 눈길이 덜 미칠수 있는 개활지대로 에돌아 빠져나가기로 했다.

그때 헤여지기에 앞서 문화부사단장이 김중혁에게 이상한 작별의 말을 했다.

《주의하십시오, 사단장동지. 살아야 합니다!》

마치 신경질을 부리듯이 하는 말이였다.

문화부사단장은 어둠속에 거대한 괴물처럼 웅크리고있는 맞은켠 산속에 상상밖의 커다란 위험이 도사리고있는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다가 사단장자신이 자기가 어떤 위험속에 스스로 뛰여드는것인지 알고있으며 따라서 무슨 모험도 단행할 각오를 하고있다는것을 명백히 느끼고있었던것이였다.

문화부사단장이 그것을 알면서도 사단장을 막아나서지 못한것은 무조건 놈들과 전투를 하여 총소리를 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군사적견지에서 보면 옳았기때문이였다. 조금전에 적들의 있을수 있는 음모를 까밝히기 위해서라도 전투를 벌려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서 김중혁이 열을 내뿜듯이 말했다.

《적들이 우리 인민군부대들의 행군로정을 알고 이곳 지형조건을 리용하여 음모를 꾸밀수 있습니다. 더우기 춘천이 가깝고 서울에서 얼마 멀지도 않은 여기로 우리 부대들이 무난히 지나가라고 적들이 비워놓을수는 없습니다. 전투를 합시다. 우리가 자기 안전만을 생각하면서 에돌아간것으로 하여 뒤에서 오는 아군부대들이 위험에 처한다면 최고사령부의 전략적기도를 실현하는데 엄중한 후과를 미치게 할수 있습니다.》

전투는 처절했다. 김중혁이 놈들의 음모가 있을수 있다고 예견은 했지만 그렇게 많은 적의 력량이 산속에 숨어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것이였다.

김중혁이네는 어쩔수없이 적의 강력한 화력권내에 들었다. 가까이에서 쓰러지는 대원들을 보면서 김중혁은 전멸이라는 생각에 전률했다.

하지만 그것은 한순간이였다. 그는 빗살처럼 예광탄이 날아오는 그 아래에 엎드려있으면서 자기를 모질게 질책했다. 여기서 전멸되다니!

무슨 생각을 하는가! 한생을 군인으로 살며 최고사령관동지를 받들어야 할 이 김중혁이 아닌가! 그는 돌파하리라 결심했다.

마침 실오리같은 하현달마저 구름속에 숨어버리여 주변은 캄캄해졌다.

그가 전투원들을 돌격에로 불러일으키려는 순간이였다. 적진에서 예상치 않던 혼란이 일어났다.

부상당한 몸으로 사단지휘부의 부상자들과 함께 어둠을 리용하여 개활지대로 은밀히 빠져나가던 문화부사단장은 멀지 않은 곳에서 울려오는 전투의 소음에 불안하여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는 수백인지 수천인지 모를 적들의 자동총이 미친듯이 울부짖고 박격포탄이 터지는 속에서 아군의 총소리를 가려들으려고 애썼다.

전투가 심상치 않게 번져가는것이 알리였다. 눈앞에는 적들의 질풍사격에 쓰러지는 사단장이며 아군전투원들의 모습이 얼른거리였다. 하여 그는 부상병들을 이끌고 전투에 진입하여 적들의 후위를 칠 결심을 한것이였다.

하지만 김중혁은 그때 일이 그렇게 되였다는것을 알수 없었다.

적들이 예견치 않았던 후면공격을 받고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있는 사이에 김중혁은 지체없이 전투원들을 공격에로 불러일으켰다.

《앞으로!》

적들의 질풍사격이 몰아오는 죽음의 선풍에 악이 받쳤던 전투원들이 그 소리에 벌떡벌떡 일어났다.

한개 대대력량이 증오의 무서운 불길이 되여 적진을 휩쓸었다. 놈들을 짓뭉개며 돌파하는데 성공했다.

김중혁은 락엽이 깔린 완만한 고지후면을 내려가다가 담가에 실려 전투를 지휘하는 문화부사단장을 만났다.

《살았습니까? 사단장동지!》

《살지 않구요. 그런데 문화부사단장동지, 그 몸으로 사지판에 뛰여든단 말입니까?》

《죽지 않소. 아직 대를 이을 아들도 못 보았는데 죽기는 왜 죽는단 말이요?》

문화부사단장은 껄껄 웃었다. 평시에 자기는 아들가진 사람들을 제일 부러워하는데 안해가 아직 아들을 낳지 못했다고 불만이라도 있는듯이 롱말을 하던 그였다.

이 전투로 하여 뒤에서 행군해오는 아군부대들에 적들의 음모가 알려지게 되였다.

김광우는 전후에 아버지가 뜻밖의 불행을 당하여 일찍 세상을 떠난 후 자라면서 어머니를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다.

광우가 후에 어머니와 군인사택마을을 떠나 군대에 나갈 때 그 정치일군이 세상떠난 아버지를 대신하여 좋은 말을 해주었다.

《너의 아버지 김중혁동지는 위대한 수령님밖에 모르는 훌륭한 군인이였다. 전쟁시기에도 전후에도 그렇게 살았다. 너도 아버지처럼 살아야 한다!》

광우가 최전연부대에서 하전사생활을 하고있을 때 최윤호의 아버지는 제대되여 부대를 떠나갔다. 전쟁때 부상당했던것으로 하여 군사복무를 계속할수 없었기때문이였다.

하여 광우는 그 고마운 정치일군을 다시 볼수 없었는데 뜻밖에도 위원회에 배치되여와서 최윤호를 만났다.

사업상필요로 ㅎ도에 내려갔다가 그곳 모집처장을 만났는데 알고보니 그가 바로 군인사택시절에 광우네 옆집에서 살던 그 고마운 정치일군의 아들이였다. 김광우가 군대에 나가기 전에 정치일군에게는 데려다 키우는 아들이 있었다. 그러다가 늦어서 안해가 아들을 하나 낳았다. 그가 바로 최윤호였다.

아버지들의 남다른 연고로 하여 두사람의 상봉은 감회로왔다. 그런데다가 성인이 되여 처음 만나보는 최윤호는 첫인상부터 그지없이 소탈하고 사람의 마음을 푸근하게 해주는 다감한 사나이여서 김광우를 더없이 기쁘게 했다.…

최윤호는 도모집처에 불쑥 나타난 김광우를 보자 내려온다는 전화라도 하고 내려올것이지 이건 뭔가고 짐짓 노여운 소리를 했다.

광우는 진정에 겨운 따뜻한것을 느끼며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전화는 무슨 전화요.》

《그래도 어디 그렇습니까?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 집사람한테 준비라도 시키는건데.》

《허허, 준비는 무슨 준비요!》

《집의 아주머니는 어떻습니까? 교원을 하면서 건강이 좋지 않아 고생한다더니요?!》

광우는 한순간 자리에 누워있는 안해의 파릿한 얼굴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는 걱정을 내색하지 않으며 밝은 표정을 보이려고 애썼다.

《그저 그러하지. 한달전에 사직하고 들어왔소.》

그 말속에 어쩔수없이 울리는 쓸쓸한 기운을 느낀듯 최윤호의 퍽 수척해보이는 꺼칠한 얼굴에 걱정이 뽀얗게 실리였다.

《병이 심해진거로구만요!》 그는 어딘가 먼곳을 바라보는듯 잠시 고개를 들고있다가 《아!》하는 소리를 애달픈 탄식처럼 내질렀다.

《됐소, 최동무. 걱정하지 마오. 우리 그 사람이야 내가 잘 알지. 건강이 회복되면 다시 학교에 나가겠다고 하는 사람이요.》

김광우가 내려온 사연을 드디여 말하자 최윤호는 자책에 잠기며 성근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신소는 공화국공민 누구에게나 부여되여있는 권리이기도 하지만 사실 대학추천에서 떨어진 자녀들의 부모된 심정이야 오죽하겠습니까. 더구나 그 사람은 그럴수 있습니다. 우리가 찾아가 사연을 설명하여 왜 일이 그렇게 되였는지 잘 리해시켰어야 하는건데 일이 바쁘다는 생각만 하면서 그런 사업은 못했단 말입니다. 우리도 후에야 잘못했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최윤호는 그렇게 말하며 사실은 대학생선발시험에서 두 학생의 점수가 꼭같아서 평상시성적을 보고 결정했노라고 했다.

말을 듣고보니 충분히 그럴수 있겠다고 생각되였다. 광우는 별치 않은 일같지만 그래도 신소를 한 당사자를 찾아가 만나봐야겠다고 했다.

최윤호는 무슨 생각을 하는듯 하다가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선선히 말했다.

《그래야지요 뭐. 제가 사업소에 전화로 미리 련락을 하겠습니다.》

그러고나서 전화로 건설사업소를 찾았다.

최윤호는 누군가와 전화를 하더니 인차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 이거 일이 좀 별나게 되였습니다. 신소자가 사업소운전사인데 오늘 오전에 세멘트실러 떠났답니다. 잘해야 래일모레쯤에나 돌아온다누만요.》

일도 참! 광우는 맹랑하여 입을 쩝 다시였다. 이틀이나 사흘을 려관방에 박혀 기다릴수는 없지 않은가.

평양에 바쁜 일감들을 두고온 광우였다. 그런데다가 앓는 안해를 두고온것이 마음을 불안촉급하게 했다.

그가 난감해하는것을 본 최윤호가 무척 미안해하며 말했다.

《어찌겠습니까. 우리가 일처리를 잘못해서 제기된 문제인데 제가 책임적으로 그 사람을 찾아가 만나겠습니다. 사연을 구체적으로 설명해서 그 사람을 리해시키겠습니다. 광우동지는 일이 바쁜것 같은데 마음놓고 올라가십시오.》

그리하여 광우는 이번 일에서 심중한 교훈을 찾고 사람들과의 사업을 잘해야겠다는 말을 최윤호에게 해주고 평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 신소건때문에 이 김광우를 찾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광우는 그때 ㅎ도에 내려갔다오면서 무슨 석연치 못한것이 없었던가 하는 불안한 생각을 하면서 당위원회로 갔다.

《찾았습니까? 비서동지.》

《오, 부국장동무요?》 탁상을 마주하고앉아 무엇인가 부지런히 쓰고있던 당비서가 둥실한 얼굴에 훤한 미소를 담으며 반가이 맞았다.

《여기 와앉소. 요즘 사무실이 자주 비여있어 부국장동무 보기가 힘들구만요. 일이 잘돼갑니까?》

《예, 제가 아직 경험이 없다나니…》

《누군 뭐 경험이 있어가지고 일을 시작했겠소? 경험이야 일을 하면서 쌓으면 되는거지요. 문제는 우리 일군들이 인민에 대한 헌신적인 복무정신을 가지고 자기 사업에 대해 연구를 하며 배심있게 내미는것입니다. 부국장동무가 대학입학시험제도를 혁신하기 위해 애를 많이 쓴다는걸 알고있습니다. 내가 이미 말했지만 그건 나라의 교육발전을 위해 아주 중요한 사업이고 따라서 반드시 성과가 있어야 합니다. 한가지 알아볼 문제가 생겨서 부국장동무를 만나자고 했습니다. 지금 바쁘지 않습니까?》

《말씀하십시오.》

당비서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잠시 무슨 생각을 하는듯 하다가 김광우를 건너다보았다.

《작년에 대학생모집사업과 관련하여 신소가 제기되였던것이 있지요? 부국장동무가 책임부원으로 있으면서 담당했던 도에서 말이요.》

《예, 제가 그때 료해하러 내려갔댔습니다.》

광우는 긴장해지며 당비서의 얼굴표정을 일별했다.

온화한 미소가 떠돌던 당비서의 얼굴에 불만의 기색이 력연하게 실리였다.

《거기 주민들속에서 그 신소처리문제를 놓고 좋지 않은 반영이 더러 제기되고있는가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겁니까?》

광우는 비로소 무엇인가 잘못됐다는 불안한 예감을 하며 그때 현지에 내려가서 한 일에 대하여 자초지종 말했다.

당비서는 다 듣고나서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광우는 《우리가 전적으로 잘못했습니다.》 하고 겸허하게 자기비판적으로 말하던 최윤호의 별로 수척해보이던 얼굴이 눈앞에서 얼른거리였다. 그리고 《바쁘신것 같은데 마음놓고 올라가십시오.》 하던 그 말!

《참, 동무두!》 당비서의 탄식같은 목소리가 망각에 빠져버린 김광우의 귀전에 먼 하늘의 우뢰소리처럼 들려왔다.

물론 신소자가 자리를 떠서 없었다니 그럴수 있었겠다고 리해는 된다. 그밖에 다른 사정도 있었으리라고 본다.

신소처리를 어떻게 하고 돌아왔는지 제때에 구체적으로 알아보지 못한 우리에게도 우선 잘못이 있다. 지금도 그곳 일부 주민들속에서 로동자의 자식이기때문에 중앙대학추천에서 떨어졌다는 말들이 돌아간다고 한다.

이번일에서 심중한 교훈을 찾아야겠다. 우리 일군들이 인민관이 바로서있지 못하고 일을 책임적으로 못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되겠는가!

《국가에 대한 인민들의 신뢰에 자그마한 실금이라도 가면 안되지요. 오로지 우리 당을 하늘처럼 믿고 운명을 같이해오는 인민들이 아닙니까.

그럴수록 우리 일군들은 인민의 충복답게 일을 더 잘해야 합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부국장동무가 현지에 다시 내려가 실태를 구체적으로 알아봐야겠습니다.》

김광우는 자기가 어떻게 당비서방에서 나왔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하였다.

자기 방으로 돌아온 그는 의자에 앉아 한식경을 무아상태에 빠진듯 멍하니 천정만 올려다보았다.

일군들이 일을 잘못해서 국가에 대한 인민들의 신뢰에 실금 하나라도 가면 되겠느냐고 하던 당비서의 준절한 목소리가 다시금 귀전을 왕왕 울리였다.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

그 순간에 광우는 《여보, 최윤호동무가 약을 두고갔어요. 구하기 힘들다는 귀한 약을.》하던 안해의 모습이 떠올랐다. 의리심이 있고 인정많은 최윤호라고 고마와하며 눈물에 젖던 안해였다. 광우는 그 일을 생각하자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여보, 오늘 꼭 출장을 가셔야겠어요?》

저녁차를 타기 위하여 집을 나서려는 남편의 가방안에 세면도구와 그밖의 필요한 사품을 넣어주며 안해가 물었다. 벌써 두번째로 묻는 말이다.

성품이 조용하고 사려깊은데가 있는 안해 한정실은 언제한번 남편의 의사를 거슬러본적이 없었으며 그 녀자에게 있어서 사사로운 일때문에 사회사업을 하는 그의 발목을 잡는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였다.

광우는 오늘 안해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거울앞에서 넥타이를 바로잡다말고 돌아보았다.

안해의 체소하여 한줌만 해보이는 몸이며 살폭이 없는 창백한 얼굴을 볼 때면 별로 가슴이 알알해지면서 생명의 은인과도 같은 그에게 자기는 한생 빚만 지고 사는것 같은 생각을 자연히 하게 되는 광우였다. 하여 그는 이마적에 이르도록 안해에게 짜증을 내거나 큰소리 한번 쳐본적이 없었다.

《여보, 당신 무슨 일이 있는게 아니요?》 하고 광우는 조용히 물었다.

《오늘 돌격대에 나가있는 영애가 와요.》

《그 애가? 왜 온다오?》

《평양에 일이 있어 저네 정치지도원과 함께 온다나봐요. 그런데 오늘이 영애생일이 아니예요. 당신은 잊고있었어요?》

광우는 갑자기 무딘 송곳으로 가슴을 쿡 찌르는듯 한 아픔을 느끼였다.

영애란 집안의 막내다. 광우는 그 애의 일때문에 더더욱 안해앞에 죄스러움을 느낀다. 안해가 여직껏 그 일을 두고 언짢은 소리 한마디 한적은 없지만 마음속에는 한생 사라질줄 모르는 한으로 남아있을는지 모른다.

그것은 광우가 위원회에 책임부원으로 배치받아온지 얼마 지나서 있은 일이였다.

그해에 영애는 중학교졸업반이였다. 딸애는 중앙대학을 지망했으나 예비시험을 잘못 치는 바람에 추천을 받지 못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제 어머니와는 달리 성격이 활달하고 무엇이나 속에 묻어둘줄 모르는 딸애는 그날 집으로 돌아와 자기는 그만하면 시험을 잘 쳤는데 어떻게 되여 떨어졌는지 모르겠다고 옹알거리였다.

《너 그러니 자기는 시험을 잘 쳤는데 선생님들이 채점을 잘못했다는거냐?》

옆에서 듣다못해 한마디 하는 아버지의 얼굴표정을 슬금슬금 훔쳐보던 딸애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잘못 채점했을수도 있지요 뭐, 아버지.》

《그렇단 말이지? 그럼 수학참고서와 쓸걸 가져오너라.》

《왜 그러시나요, 아버지?》

《시험을 쳐봐야겠다. 우리 따님이 시험을 잘못 쳤는지, 선생님들이 채점을 잘못했는지 봐야겠단 말이다.》

《아버지가요?》

《아버진 수학을 모르는줄 아니? 어서 가져와!》

아버지의 어조가 자못 엄해지는 바람에 딸애는 기연가미연가하면서도 할수없이 중학생용 수학참고서와 《시험지》한장을 들고 나타났다.

광우는 참고서에서 다섯문제를 뽑아내여 딸애더러 풀라고 했다.

《시간은 60분이다.》하고 광우는 못박았다.

광우는 딸애가 끙끙 갑자르며 수학문제들을 풀어놓은 《시험답안지》를 한번 들여다보지도 않은채 가방안에 넣고 이튿날 출근했다. 그는 중학교 수학교원경력을 가지고있는 한 책임부원에게 어느 학생의것이라는것을 말하지 않고 랭정하게 채점해보라고 했다.

3이라는 보통점수가 나왔다.

《그래, 어떻습니까?》 하는 광우의 물음에 그 부원은 답안지가 누구의것이라는것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한다는듯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학생은 일반수학은 그래도 그만하면 괜찮다고 볼수 있지만 기하학에 대해서는 개념에 대한 리해가 좀 부족하다고 볼수 있소.》

《그래도 그만하면》이라든가 《좀 부족하다》는 표현은 눈앞에 있는 학생의 아버지를 딱하게 하지 않으려는데서 쓴 점잖은 완곡법이라고 할수 있었다. 《45분수업시간마다 배워주는것을 제때에 소화하고 넘어갔더라면 얼마든지 풀수 있는 문제들인데…》하고 옛 수학교원은 위안삼아 말했다.

김광우는 그날 저녁 점수가 매겨져있는 답안지를 꺼내놓고 딸애를 자기 방으로 불러들이였다.

《사람은 맨몸으로 세상에 태여났으니 스스로 자기를 치장하라는 말도 있다. 그건 자기의 앞길은 자기 노력으로 개척해야 한다는 말이다.

자기는 노력하지 않고 남을 탓하는건 아주 나쁜 버릇이다! 이 좋은 제도에서 호강만 하는데 버릇되면 그렇게 되는것이다. 사회에 유익한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 되자면 뼈심을 들여 자기를 가꾸어야 한다. 한생을 노력하고노력해야 세상에 태여난 보람이 있게 된다.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네 할아버지한테 물어보렴.》

광우는 벽에 걸려있는 사진을 가리켰다. 장령복을 입은 광우의 아버지 김중혁이 근엄한 눈길로 자기의 손녀를 내려다보고있었다.

아버지의 준절한 말에 딸은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딸애의 그 일때문에 마음을 많이 쓴것은 딸애보다도 그 애의 어머니였다.

웃방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이틀째나 밥먹으러도 내려오지 않는 딸애를 보다못해 안해가 한마디 했다.

《여보 영애 아버지, 대학에 가고 못 가고 하는거야 저 애의 앞날과 관계되는 일이 아니나요.》

광우는 그 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화를 냈다.

《여보, 당신 나더러 어찌라는거요?》

《…》

노여웠다.

그는 안해의 마음을 리해 못해서가 아니였다. 안해는 교육자이지만 그보다 먼저 저 애의 어머니가 아닌가! 하지만 광우는 그래서 더더욱 노여운것이였다. 딸애한테 벌써부터 부모에 대한 의존심을 심어준다면 저 애가 어떻게 멀고먼 인생길을 똑바로 걸어갈수 있겠는가.

《이 김광우, 학생모집사업을 보는 책임부원의 권한을 휘둘러서 제 딸애의 대학추천문제에…》

《됐어요, 아버지!》 웃방에서 딸애가 째지는듯 한 소리로 부르짖었다.

광우는 말끝을 마무리지 못한채 입이 굳어졌다.

사이문이 열리며 딸애가 뜻밖에도 발랄한 인상을 지어가지고 내려왔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대학에 갈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언젠가 아버지가 말씀하셨지요? 담쟁이넝쿨처럼 의존심만 가지고 살아선 안된다구요. 전 돌격대에 나가겠어요.》

딸애가 돌격대에 입대하여 고산과수농장(당시)으로 떠나가는 날 부부는 역에 나가 바래주었다. 태여나 여직껏 부모의 슬하에서 떨어져본적이 없는 딸애였다.…

그 딸애가 집으로 오는것이다. 생일날 집으로 오는 딸애를 축하해주지 않고 떠났다고 그 애가 이 아버지를 또 원망하지 않을가? 아니, 딸애보다도 안해가 더 서운해할것이다. 마음이 쓰려오는것은 그때문이였다.

《여보, 미안하오.》

《가야 할 길이라면 늦지 않게 떠나세요. 차를 놓치지 마세요.》

안해의 유순한 눈에는 따뜻한 리해의 미소가 실리였다.

평양을 떠난 급행렬차는 북방의 도소재지를 향해 기운차게 달리였다.

밤이였다. 웅성거리던 차안은 조용해졌다.

잠을 재촉하는 렬차의 단조로운 바퀴소리…

《차를 놓치지 마세요.》 출장가방을 쥐여주며 하던 안해의 목소리가 다시금 귀전을 울린다.

아득히 흘러간 민경초소시절의 그 일을, 눈보라치는 령마루의 그 처절한 밤을, 그밤에 스러져가는 광우의 연약한 생명의 실오리를 이악하게 붙들고 놓아주지 않던 간호원처녀를 눈앞에 떠올리게 하는 안해의 말이였다.

처녀는 용모가 별로 아름다운것도 아니였다. 목이 할끔하고 체소하여 연약해보이는 처녀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부대안의 군인들은 그 처녀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의 말을 빌면 그 간호원은 이 세상 녀자들이 갖출수 있는 장점들을 모두 가지고있으며 인물 또한 그지없이 아름다왔다.

21살 홍안의 사관 김광우는 그것이 리해되지 않았다. 그때까지 광우는 건강하여 군의소신세를 한번도 진적이 없지만 예방주사를 놓아주러 초소에 내려오는 그 간호원을 드문히 볼수는 있었는데 원, 세상에! 남달리 연약하게 생겨 동정심만 자아내는 처녀를 두고 세상에 다시없을 미인이나 되는듯이 말하다니!

바로 그 처녀로 하여 인생의 먼길을 가는 광우에게 용기와 진함없는 열정과 사색이 태여날줄이야 어떻게 알았으랴. 《한생을 급행렬차처럼 살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좌우명이였으며 어머니의 당부이기도 한 그 말을 한생 잊지 않게 해준것도 그 처녀였다.

어느 겨울날, 초소에는 때아닌 진눈까비가 내리였다. 광우는 그밤에 잠복초소에 나가있었다.

그곳은 건너편 고지에서 눈에 쌍심지를 켜고 우리쪽을 감시하며 기회를 노리는 적들의 시야에 들어있는 곳이였다. 광우는 온통 진눈투성이가 되여버렸다. 물기가 스며들면서 속옷까지 말짱 젖어버리였다. 새벽이 가까와오면서 기온이 급격히 내려갔다. 온몸이 얼어들기 시작하였다.

날이 밝아 철수할무렵에 그는 거의 의식을 잃은 상태였다.

전우들은 군복에 온통 진눈까비가 달라붙고 얼어서 소가죽처럼 꽛꽛해진 그를 업어 병실로 날라갔다. 련락을 받은 지휘관들과 긴급치료대가 내려왔다.

며칠후에 그는 평양병원으로 후송되였다. 철도역으로 나가는 위생차안에는 도중에 일이 생기면 구급치료를 해야 하는 젊은 군의와 체소한 간호원처녀가 함께 타고있었다.

눈보라치는 맵짠 날이였다. 스러져가는 한 생명의 연약한 마지막여운인가 락조의 싸늘한 잔광이 걸린 산중턱, 거기 가파로운 령길우에 차는 멎어섰다.

경사진 령길이 얼음강판으로 변한것이였다. 그옆은 수백길도 될 아찔한 벼랑이였다. 차가 미끄러져 떨어지면 인간은 종말의 미궁으로 락하하게 될것이였다.

젊은 군의와 운전사가 도끼며 정대같은것을 찾아들고 밖으로 나갔다.

그들은 길우에 한벌 덮인 얼음을 까내기 시작했다. 길이 열리자면 몇시간이 걸릴지 모를 일이였다.

멀리 아득한 산마루의 뿌연 공간에 떠있던 해는 인차 어설핀 잔광을 걷어가지고 산너머로 사라져버리였다. 차안에는 고통속에 신음하는 광우와 그를 지키기 위해 간호원처녀만이 남아있었다.

주위가 어두워지면서 차안이 얼어들기 시작하였다.

광우의 입에서는 이따금씩 헛소리가 흘러나오군 했다.

그때마다 처녀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동지… 사관동지.…》

그것은 망각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광우를 불러세우는 소리였다.

이 광우는 이렇게 생을 마치는구나! 세상에 나서 생의 아득한 구간을 끝내지 못하고 이렇게 죽는다면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아파하실가.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가 못다걸은 길을 끝까지 가야 한다고 하시던 어머니가 아닌가.

광우는 어머니를 불렀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아득한 망망천지에서 울려오는듯 한 처녀의 목소리를 들었다.

《동지… 사관동지!…》

언제부터인가 흐리마리해진 의식속으로 끈질기게 파고들어오던 례의 그 애처로운 목소리였다.

광우는 눈을 떴다.

그는 눈물에 젖은 처녀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왜서인지 처녀는 솜옷을 벗고있었다. 그래서 처녀가 지금 몹시 추우리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추운 날에 저 처녀는 어째서 솜옷을 입지 않고있을가? 처녀가 솜옷을 벗어 자기에게 덮어주었다는것을 광우는 알지 못하고있었다.

《동문… 왜… 솜옷을… 안 입소?》

토막토막 끊어지며 흘러나오는 그의 가느다란 목소리에 처녀는 소스라쳐 놀랐다. 처녀는 어둠속에서 허리를 굽혀 광우를 찬찬히 내려다보다가 기쁨에 찬 소리를 질렀다.

《정신이 들었군요!》 그다음엔 더 말이 없었다. 처녀는 울고있었다.

마치 자기가 죽음속에서 살아난듯이 기쁨에 겨워 울고있었다.

광우는 또 어리석게 솜옷소리를 했다.

처녀는 대답대신 생긋이 웃었다. 어둠속이지만 처녀의 드러난 하얀 이발이 알리였다.

《내가 노래를 불러줄게요.》 마치 투정질하는 아이를 달래듯이 처녀가 말했다. 《〈할머니의 노래〉를요. 동진 들어보지 못한 노래예요.》

처녀는 어렸을 때 한번 세게 앓은적이 있었다. 그런 일이 있은 다음부터 왜서인지 깊은 잠을 들기 힘들어했다. 잠들었다가도 깜짝깜짝 놀라 깨여나군 했다.

심장이 약하기때문이라고 담당의사선생님이 말했다. 그래서 담당의사선생님은 하루도 빠짐없이 왕진을 와서는 약도 주고 진찰도 해보면서 잠을 잘 자야 건강한 몸으로 빨리 자라 군대에도 나갈수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그 말을 듣고 〈그것 봐라. 의사선생님의 말을 들었지? 잠을 잘 자야 빨리 커서 훌륭한 사람이 된다지 않니.〉 하고 말했답니다.

그러면서 할머니는 노래를 불러주었어요.》

처녀는 조용히 노래를 불렀다.


말 안 듣고 잠 안 자는 애꾸러기는

뒤산의 승냥이나 물어가거라

우리 집 착한 아이는 잠 잘 잔단다

어서 자거라 귀여운 우리 아이

창밖에선 우뢰 울고 바람 세차도

고운 네 꿈 지켜주는 해님이 있단다

아빠별 엄마별 반짝이는 별나라에 가면

네 소원이 이루어진단다


그것은 농촌마을의 할머니가 칭얼대는 어린 손녀를 다독여 잠재우면서 불러준 소박한 자작 자장가였다. 아니, 그것은 노래가 아니였다. 할머니의 사랑이였다. 산촌의 박우물처럼, 푸른 숲의 청신함마냥 한점 티없이 깨끗한 사랑이였다. 세상에 할머니의 사랑처럼 아름답고 깨끗한 사랑이 또 있으랴. 바라는것은 없고 주기만 하는 사랑!

《동무의 할머니를 한번 보고싶은데!》

《좋은 할머니예요. 한생 농사를 짓고 자식들 뒤바라지를 하시느라 고생도 많이 하신 할머니예요. 무던하고 자식들한테 얼마나 극진한지 몰라요. 동진 아버지가 전쟁로병이였다지요?》

《동무가 그걸 어떻게 아오?》

《왜 모르겠어요, 온 부대가 다 아는데.》

광우는 고개를 끄덕이였다. 온 부대가 다 안다는 처녀의 그 말은 사실이였다.

처녀는 그렇지요? 내 말이 맞지요? 하는듯 생긋이 웃었다. 그리고는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지의 어머니가 군대에 나가는 동지에게 사람은 한생을 급행렬차처럼 살아야 한다고 당부했다는것도 다 알아요.》

그것은 어마지두 놀라운 일이다. 이 처녀가 어떻게 우리 가정의 일을 다 알고있을가? 군의소란 그런 곳인가?

《동무의 말이 맞소.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소. 〈사람은 한생을 급행렬차처럼 바쁘게 살아야 한다. 사람의 한생은 짧은데 누구나 어깨에는 사회를 위해 해야 할 무거운 짐을 지고있기때문이다.〉라고 말이요.

그런데 사실 그건 우리 아버지의 좌우명이였소.》

광우가 아버지에 대하여 말할 때 처녀는 감동되였다.

자정이 지나서야 길이 열리였다.

광우는 달리는 차안에서 또다시 의식을 잃었다.

그를 흔들며 애처롭게 부르짖는 처녀의 목소리가 가냘픈 의식의 망사로 희미한 새벽빛처럼 비쳐들었다.

《동지… 동지… 정신을 차리세요.… 용기를 내세요.…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야 해요.… 차를 놓치면 안돼요.… 아이참!… 이를 어쩌나!… 동진 어머니의 당부를… 잊지 말아야 해요.… 동진 아버지의…》

지금도 때없이 귀전에 울려오군 하는 처녀의 여린 목소리… 어머니의 당부를 되새겨주던 그 목소리, 아버지의 넋을 잊지 말라고 하던 그 목소리…

전쟁이 일어났을 때 부대를 이끌고 불타는 락동강을 건너갔다 왔으며 전장에서 물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감한 지휘관이였던 그 아버지가 한창 혈기 넘쳐나는 젊은 나이에 뜻밖의 일로 세상을 떠난것은 너무나도 원통한 일이였다. 아들 광우가 태여난 이듬해 일이였다.

그는 숨지는 순간에 안해의 손을 잡고 말했다.

《여보, 이 중혁이 한생 군복을 입고 혁명을 보위하는 군인으로 살리라 결심했는데 이렇게 가는구려. 이제 아들이 크면 꼭 군복을 입고 이 아버지가 못다 걸은 길을 가게 해주오.》

그러니 광우는 달리 살수 없는 몸이였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로 나갔다.

최전연초소에서 전사생활을 거쳐 애젊은 나이에 군관이 되였다. 어깨에 별을 달았을 때 그는 결심했다. 내 숨지는 순간까지 군복을 입고 혁명을 보위하는 1선초소에 서있으리라.

인간의 운명이란 불가사의한것인가? 생활이란 그런것인가?

광우는 푸른 꿈이 하늘에 닿았을 때 뜻하지 않게 운명의 좌절을 당했다. 생의 좌표가 명백했던 그에게 있어서 그것은 너무나도 가혹한 좌절이였다.

사관시절에 입었던 동상의 후과로 다시 입원, 거기서 군사복무불가능이라는 뜻밖의 진단을 받고 제대, 인생의 기관차는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출발의 기적을 울리기 바쁘게 멎어섰다. 앞에 절벽이 막아나선것이였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되였다.

지금도 광우는 제대명령서를 받고 어머니앞에 섰던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갈가리 찢기는듯 한 아픔을 느낀다.

그때 어머니는 로환으로 운명의 마지막시각을 보내고있었다. 사람은 세상에 태여났다가 한번은 가야 할 길이지만 광우에게는 너무나도 가슴찢기는 아픔이였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아버지가 못다걸은 길을 마지막까지 꿋꿋이 걸어가라던 어머니가 아닌가. 하여 언제나 아들의 마음속 기둥이 되여주던 어머니가 아닌가. 광우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했고 광우 또한 그렇게 사랑하는 어머니였다.

그 어머니가 림종의 시각에 눈을 감지 못하면서 장한 아들을 기다리고있는데 한생을 군복을 입고 아버지의 길을 이어 혁명을 보위하리라던 자기는 그 길을 끝까지 가내지 못한채 인생의 패자가 되여 나타난것이였다. 광우는 자기야말로 불효한 자식처럼 생각되였다.

《어머니!…》

광우는 무슨 말을 더 할수 없었다. 아, 애오라지 이 아들의 일이 잘 되여 세상떠난 아버지의 생이 줄기차게 이어지기만을 바라온 어머니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진실을 말씀드린다면 어머니가 얼마나 가슴아플것인가! 그렇다고 속에 없는 말로 세상 떠나는 어머니를 위안한단 말인가?

《주저하지 말고 걸어가거라!》

어머니는 그 한마디를 유언으로 남기였다. 한마디한마디 힘들게 흘러나오던 그 말! 운명의 고통속에서도 편안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아들을 바라보던 어머니의 그 눈길! 사려깊은 어머니의 그 눈길이 그때 이 아들의 마음속을 다 들여다보고있었던것이나 아닌가?

광우는 쓰러지지 않았다. 그는 강자가 되여 기어코 일어났으며 대학으로 갔다. 애당초 자기가 교육부문 일군이 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못했던 그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시인민위원회에 배치받았으며 몇해후에는 교육위원회에 올라와 책임부원이 되였으며 2년후에는 부국장이 되였다.

새 직무에 임명되던 날 당비서가 말했다.

《동무도 알고있겠지만 우리 나라를 전민과학기술인재화가 실현된 인재강국으로 만들자는것이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교육제도를 마련해주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뜻이고 우리 당의 구상이요.》

당비서는 인재가 많아야 우리 나라를 하루빨리 발전된 문명하고 부강한 강국으로 일떠세울수 있고 나라를 지켜낼수도 있다, 놈들이 우리를 먹자고 발광하는 때가 아닌가고 하면서 김광우의 언독이 빠지지 않은 꺼먼 얼굴을 바라보았다.

《동무는 조국을 지켜 언땅에 배를 대고 잠복근무도 서본 군인출신이지요? 우리가 인재강국을 건설하여 과학기술을 발전시키지 않는다면 동무가 얼음우에서 잠복근무를 서며 지키던 이 훌륭한 제도를 끝까지 지켜낼수 없게 되오.》

그 순간 광우는 쿵― 하고 가슴을 세차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득히 흘러간 세월의 지평선너머에서 시대의 엄숙한 명령처럼 그리고 인생의 철리를 새겨주며 울려오는 음성! 《혁명을 보위해야 한다!》 그것은 군복을 입은 아버지가 인생의 로정도우에 세워놓았던 한생의 좌우명이 아니였던가.

광우는 비로소 자기의 급행렬차가 결코 정지된것이 아님을 의식했다. 자기는 여전히 최전연초병이였다. 지금까지는 군복을 입고 최전연초소에서 조국을 지켰다면 남은 생애는 조국의 미래를 지키는데 바쳐야 하는것이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단조로운 차바퀴소리… 급행렬차는 여전히 달리고있다. 차창너머로는 어둠에 싸인 전야가 흘러가고있다. 그너머 멀리에서 용접불꽃이 흘러내린다. 거기서는 또 하나의 거대한 창조물이 일떠서고있다. 조국은 이밤도 전진하고있다.

(그 김광우가… 그래, 이 김광우가.) 하고 광우는 생각했다. (내가 인민들의 신뢰를 떨어뜨릴수 있는 일을 했단 말인가?)

광우는 새벽이 가까와오는무렵에야 기차에서 내렸다.

그는 밤중에 자기가 아는 사람들한테 찾아들어가 페를 끼치고싶지 않아 가까이에 있는 려관으로 갔다. 거기서 두어시간 눈을 붙인 다음 아침식사를 하고 출근시간에 맞춰 도당에 먼저 들리였다. 그러고나서 인민위원회사람들까지 만나다나니 오전시간도 퍼그나 흘러서야 시건설사업소로 향했다. 거기에 자기가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그가 건설사업소의 위치를 물어가며 공원의 울타리옆으로 난 걸음길로 한참 걸어가는데 달리던 승용차 한대가 옆에 와서 멎어섰다. 무심결에 보니 구레나룻이며 코수염을 길러 나이를 대중할수 없는 외국인이 차안에 타고있었다.

승용차의 앞문이 열리면서 통역이나 안내원쯤 되여보이는 새파랗게 젊은 상고머리청년의 상반신이 나타났다.

《미안하지만 손님, 말 좀 물읍시다. 영산화학공장으로 가자면 어디로 가야 합니까?》 분명 김광우를 보고 묻는것이였다.

광우는 난색의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미안합니다. 영산화학공장이란 말은 많이 들었지만 나도 이 고장에 온 손님이다보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구만요.》

상고머리청년은 손님이라는 말에 씩 웃으며 제편에서 더 미안해했다.

《이거 안됐습니다, 전 여기 사람인줄로 알고…》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주 가까이에서 애어린 청년의 목소리가 울리는것이였다. 놀라운것은 목소리의 임자가 그리 류창하지는 못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영 서툴지도 않은 영어로 말하는것이였다.

《당신들이 그 길을 따라 승용차로 5분쯤 더 가느라면 좌측으로 큰 공장이 보일것입니다. 거기가 바로 당신들이 찾는 화학공장입니다.》

이것 봐라! 광우는 난데없이 울리는 그 목소리의 임자를 찾아 뒤를 돌아보았다.

공원의 울타리너머에서 도수안경을 낀 어린 청년이 커다란 전정가위로 측백나무를 철거덕 철거덕 다스리며 히쭉 웃고있었다. 방금전에 그가 영어로 말한것이 분명했다.

아마도 청년은 생울타리를 다스리는 작업을 하면서도 멎어선 승용차안에 외국인이 타고있는것을 보았으며 마침 상고머리통역이 길을 묻는 소리를 듣고 이 기회에 자기의 외국어수준을 시험해볼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던 모양이였다.

김광우보다도 차안에 타고있던 외국인에게서 당장 반응이 일어났다.

외국인은 나무를 다스리는 애숭이로동청년을 향해 너그러운 찬사의 표시로 엄지손가락을 내보이고나서 자기의 안내자에게 뭐라고 했다.

상고머리가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로동청년에게 외국인의 말을 통역해주었다.

《외국손님은 동무의 영어수준이 놀라울 정도라고 하면서 조선에서는 어린 로동청년들이 다 그렇게 외국어를 아는가고 합니다.》

그 말에 애숭이청년이 사기가 나서 또 자기의 영어지식을 발동했다.

《세계를 내다보며 이 땅에서 가장 훌륭한 미래를 건설하는것은 우리 조선청년들의 꿈과 리상입니다.》

외국손님의 얼굴에는 또다시 감동의 빛이 나타났다. 그가 흥미있어하며 로동청년에게 무슨 말인가 또 하려는 거동을 보이였다.

그것을 느끼자 로동청년은 히쭉 웃으며 외국사람들처럼 어깨를 으쓱해보이였다. 그리고나서 재빨리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당신들도 갈 길이 바쁜 사람들이고 나 또한 우리 도시를 아름답게 가꾸어야 하는 이 일이 대단히 바쁩니다.》

김광우가 보기에 로동청년은 영어사용지대에서 왔을지도 모르는 나이 많은 외국손님과 더 말하다가는 자기의 외국어밑천을 다 동원한 이 대화에서 잘못하면 렬세에 빠질수 있을것 같아 미리 몸을 사리는것이 좋은 수라는 생각을 한것 같았다.

로동청년의 그런 계교를 외국인이 눈치챘는지 어쨌는지는 광우가 보기에도 알수 없는 일인데 그의 구레나룻 더부룩한 얼굴에는 너그러운 미소가 어리였다. 외국손님은 승용차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로동청년을 향해 다정히 손을 저어보이였다.

승용차가 가버리자 김광우는 기지있고 재미있는 애숭이청년에게 별로 호감이 가서 빙그레 웃었다.

《동무, 이자 보니 외국어수준이 괜찮던데!》

《손님도 영어를 아시는거구만요.》애티가 아직은 말짱 가셔지지 않은 목소리였다.

《뭘, 영어라면 겨우 자모나 외우는 수준인걸. 그런데 동문 그만하면 어디 가서 통역원도 할수 있겠소.》

청년을 만족하게 해주고싶어 일부러 과장하는 말이였다.

해볕에 가뭇이 탄 청년의 애리애리한 얼굴에는 어른들의 칭찬을 받고 의젓하게 보이려는 철부지소년의 그것과 같은 천진한 표정이 떠올랐다.

《뭘요.》

《동문 아버지가 외교일군이 아니요?》

로동청년은 의아해서 김광우를 건너다보았다.

《그건?…》

《허허, 내가 묻는건 동무가 외교부문에 있는 아버지를 따라 외국에 나가 살았던적이 없었는가 하는거요.》

그제서야 청년은 씩 하고 웃었다.

《꼭 외국에 나가야 외국어를 배웁니까 뭐. 전 중학교에서 영어를 배웠는데요.》

광우는 느닷없이 즐거워졌다. 우연히 만난, 이름조차 모르는 청년이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동무말이 옳소. 그러니 동문 중학교때 외국어공부를 잘했구만. 동문 대학에 갈걸 그랬소.》

광우가 기꺼이 그 말을 하기 바쁘게 청년의 얼굴에는 뜻밖에도 인생의 쓰고 단맛을 다 체험한 뒤끝에 짓는듯 한 고뇌의 표정이 실리였다.

인생의 문어구에 금시 들어선, 기껏해도 스무살을 넘기지 못했을 애숭이청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였다. 광우가 무슨 영문인지 알수 없어 벙벙해있을 때 청년의 입이 열리였다. 청년은 광우를 놀리기라도 하는듯 영어로 말했다.

《대학에요? 난 운수가 좋지 않거던요. 그래서… 에이, 그저 이렇게 됐습니다.》

청년의 입에서 놀랍게도 거침없이 쏟아져나오는 외국어말마디들이 무엇을 뜻하는것인지 알게 되자 광우는 그만 어이없어 입이 하 벌어졌다. 방금전에 느꼈던 청년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당장 우뢰가 터졌다.

《이녀석! 무슨 소릴 해? 운수가 어쨌다구?!》

광우의 입이 다시 열리려고 할 때 청년은 이미 달아나버렸다. 길가는 나이지숙한 손님이 영어라면 기껏해야 뜯개말이나 번지는 정도인줄로만 알고 떠오르는대로 아무 말이나 섬겨댄것인데 알고보니 죄다 알아들은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 바빠맞은것이였다. 하여 애숭이청년은 보매 나이도 듬직하고 누군지는 알수 없으나 높은 기관의 일군일수도 있는 손님한테 잘못 걸려들었으니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당장은 꼬리를 사리는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한것이였다.

(음음, 나쁜 녀석!)

광우는 걸어가며 입을 쩝쩝 다시였다. 우연히 당한 이 일로 하여 우울해졌다.

그런 기분을 털어버리지 못한채 시건설사업소를 찾아들어갔으며 신소를 했던 당사자를 만났다.

시건설사업소의 운전사라는 얼굴 시꺼먼 사십대의 사나이는 김광우가 만나자는 취지를 알고 자기는 몹시 바쁜 사람이라고 했다. 기름내 풍기는 작업반휴계실에 불리워들어와 반들거리는 긴의자에 손님과 함께 나란히 앉기는 했지만 애당초 성근한 대화상대자가 되여줄 자세는 아니였다.

사나이는 몹시 불편해하며 금시라도 일어나 나가버릴듯 나들문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다가 겨우 성의없는 말을 한마디 했다.

《우리야 평범한 로동자가 아닙니까. 됐습니다. 큰일을 하는 사람의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야지요.》

그 순간 광우는 어디선가 울려오는듯싶은 우뢰소리를 들었다. 우우― 마치도 광우의 운명에 내려지는 그 어떤 예고처럼! 우뢰소리와 함께 당비서의 준절한 목소리가 다시금 귀전을 왕왕 울리였다.

《일군들의 인민관이…》 《…인민관이…》 그 말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마음이 불안했다. 약 한시간전에 류창한 외국어로 자기의 심상치 않은 심리를 토설하던 젊은이가 눈앞에 떠오르기도 했다.

광우는 언짢은 심기를 애써 누르며 얼굴에 느슨한 웃음을 실었다.

《동무, 그러지 마오. 우리 사회가 로동자는 아무런 권한도 없는 막바지취급을 당하고 일군들한테만 특세가 부여되는 그런 사회야 아니지 않소. 그걸 모르지 않을 동무가 그렇게 말하면 되겠소? 로동자가 어쨌단 말이요?》

사나이는 고개를 들어 광우를 피끗 건너다보았다. 사나와진 그의 눈에서 펑끗 불꽃이 이는듯 했다.

《그 인정많은 사람이 나를 찾아와서 무슨 말을 했는지 아십니까? 동지가 신소문제때문에 내려왔다간 다음…》그는 갑자기 말을 끊어버리며 고개를 홱 저었다. 그는 한순간 리성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회오의 감정에 빠져 우울해졌다.

이 사람이 무슨 말을 들었단 말인가? 무슨 말을 들었기에 평범한 로동자가 어쩌고 어쩌고 하는, 분명 그자신도 믿지 않는 당치않은 소리를 한단 말인가?

광우는 갑자기 용기를 잃어버리였다. 그것은 말을 성의없이 하는 이 투박한 사나이의 가차없는 비난같은 눈빛에 겁을 먹어서도 아니였고 수재아들의 좌절을 겪은 아버지로서의 그에 대한 동정에서 오는것은 더욱 아니였다. 자기와 이야기하는 사나이가 결코 막되게 사고를 할만큼 지각없는 인간같지는 않았다. 그의 가슴속에서 그 어떤 의분이 끓고있다는것을 그 눈빛이 말해주고있는것이였다.

그런데 광우는 차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툭 두드러져나온 언덕이마가 감때사나운 인상을 자아내면서도 광우앞에서 주눅이 들어 서있던 사단후방차운전사의 얼굴이 언뜻 눈앞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것이였다. 그것은 오래전에 광우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과거의 한토막이였다. 광우의 눈앞에서 병사의 모습이 환영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질 때 사나이의 눈에도 한순간 의혹의 빛이 어리였다. 그것은 인차 당혹감으로 변하였다.

《하고싶은 말이 있는것 같은데… 말해보십시오.》하고 광우는 온화하게 말했다.

《제가 이지러진 소리를 한건 용서하십시오. 그러지 말아야 하는건데 그랬거던요.》

《허허, 리해합니다. 동무야 우선 저에 대한 불만이 많겠지요. 그래서 그랬겠지요.》

사나이는 비로소 입가에 어설픈 미소를 그리였다.

《옳습니다. 실은 동지가 여기에 한번 나타나기를 바랐습니다. 비판을 하자구요.》

《말하십시오.》

《우에서 신소문제때문에 내려왔으면 제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을 다 만나봤어야 했습니다. 대중의 여론을 들어봐야 한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동지는 한사람의 말만 들었거던요. 항상 좋은 인상에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는 사람에게 다 정의가 있는것은 아닙니다. 자식가진 부모로서 제 자식의 일이 잘되지 않았을 때 마음 편해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아들녀석의 일이 그렇게 되여 괴로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들 하나때문에 가슴이 아파 그러는것이 아닙니다.

저 하나의 리속을 앞세우는 한두사람때문에 공정성이 묵살되는것이 문제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비판하기는 힘들지요. 보면 그런 사람들은 국가가 손해를 보는것은 아랑곳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는 당성이 강한체 하니까요.》

그 사람은 입을 꾹 다물어버리며 고개를 저었다.

《최윤호처장에 대하여 말하는것 같은데… 그 사람이 신소와 관련해서 동무를 찾아와 무슨 소리를 했다는것입니까?》

《아니!》 그는 천천히,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가 동지와 잘 아는 사이같은데… 저는 할말을 다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십시오.》

그는 일어나려 했다.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아들은 어떻게 하고있습니까? 알고싶은데…》

사나이는 잠시 덤덤해있다가 고개를 들어 김광우를 도전적인 눈길로 바라보았다.

《왜요? 걱정됩니까?》

《허허,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오.》

《…》

《동무를 보니 그 아들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사나이의 꺼밋한 얼굴에는 그제서야 깨끗한 미소가 실리였다.

《대학 못 갔다고 타락은 하지 않을겁니다. 괜찮은 녀석이니까요. 시원림사업소에 입직했습니다. 원래는 군대에 나가야 더 훌륭한 사람이 되겠는데 이 눈이 나쁘거던요. 젠장, 가문에 눈 나쁜 사람은 없었는데…》

《동문 제대군인이지요? 최전연에서 운전사로 복무하지 않았습니까? 나를 알아본것 같은데…》

사나이는 당장 얼굴이 뻘개졌다.

《옳습니다. 그때 동지는 련대작전참모였구 저는 사단후방차운전사였지요. 차를 잘못 세웠다가 참모동지한테…》

그것은 파아란 하늘에서 해빛이 눈부시게 쏟아져내리는 어느 가을날에 있은 일이였다.

김광우는 사단에 일이 있어 갔다가 련대지휘부로 돌아가고있었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그 기쁨은 풍요한 계절이 주는 선사품이였다. 따스한 바람에 실려오는 무르익은 낟알의 구수한 향기,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노래소리, 길을 가득 메우며 건너가는 염소들이 겨끔내기로 질러대는 음매소리… 인간과 자연이 어울리는 《교향곡》에 취해서 걸어가던 그는 앞에 있는 나지막한 언덕마루에 눈길이 멎어섰다.

사단후방차 한대가 기관실문을 열어놓은채 서있는데 그 주위에 소학교 낮은반이나 될 아이들이 모여들어 오구작작 붐비고있었다. 웬일인가 해서 눈여겨보니 서있는 자동차밑에 새끼염소 한마리가 들어간것을 아이들이 끌어내겠다고 복작대고있었다.

(허, 저러다가 차가 움직이기라도 하면 어쩔려구!)

광우는 아이들한테 물러나라고 소리치며 다가갔다. 운전사를 욕하려고 찾아보니 운전실이 비여있었다. 차바퀴에는 고임목조차 괴여있지 않았다. 아마도 운전사가 잠간사이에 무슨 사고가 나랴 하고 제동변만 당겨놓은채 자리를 뜬 모양이였다. 그런데 자동차가 서있는 곳에서 조금만 더 나가면 완만한 경사지였다.

광우는 한심한 운전사라고 속으로 욕을 하며 길가녁에 있는 커다란 돌 하나를 힘들게 안아다 차바퀴밑에 밀어넣었다.

그가 일을 끝내고 손이며 군복소매에 묻은 흙을 털고있을 때 고무바께쯔를 든 운전사가 나타났다. 나이도 어리지 않은 사관이였다. 언덕마루에 올라가서야 기관이 과열되였다는것을 알고 물을 길러 내려갔던 모양이였다.

《자동차를 세워놓을 때 고임목을 해야 한다는건 운전사들이 지켜야 할 규정이 아니요.동문 보아하니 운전년한도 어지간한것 같은데 제대될 때가 왔다고 해이된게 아니요? 자동차가 저절로 움직이기라도 했으면 귀여운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될번 했는가 말이요!》

운전사는 얼굴이 뻘개서 그의 비판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그래도 광우가 자리를 뜰 때에는 《작전참모동지, 사단에다가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아닌게아니라 전 인차 제대되는데 흠을 남기고싶지 않아 그럽니다.》하고 푸접좋게 말했다. 그 바람에 김광우는 어이없어 웃었다.

광우는 그때의 일을 생각하며 즐거운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동무도 나를 알아보면서 모르는척 했구만.》

《그래야 말하기 편하니까요.》 사나이는 성글성글한 하얀 이발을 활짝 드러내며 씩 웃었다.

《그때 말이요. 동문 나를 욕했겠구만. 련대작전참모라는 사람이 사단에 그 일을 보고해서 자기를 비판받게 했다고 말이요.》

《그때는 정말 그랬습니다. 아닌게아니라 동지가 보고하는 바람에 난 제대를 앞두고 부사단장동지한테 되게 비판을 받았으니까요. 하지만 제대되여와서 사회생활을 하며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생활의 걸음마다 그때일을 생각하며 자기를 채찍질하게 되더란 말입니다.》

광우는 마음속에 깃드는 따뜻한 정을 느끼였다. 이번 출장길에 또 한명 좋은 사람을 알게 되였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들을 더 만나야 했다. 그러자면 어데서 하루밤을 자야 했다. 렬차에서 내리자바람으로 만난 최윤호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김광우가 평양에서 내려온 용건을 말해주고 건설사업소에 먼저 들려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 하자 저녁에는 꼭 자기 집에 와야 한다던 최윤호였다. 하지만 오늘은 그의 집에 가고싶지 않았다.

내가 너무 옹졸한 생각을 하는게 아닌가? 그래도 우리 아버지와 함께 싸운 부대정치일군의 아들이고 군인사택마을에서 이웃하고 살아온 최윤호네가 아닌가. 앓고있는 내 안해를 위해서 극진하게 마음써준 고마운 사람이 아닌가! 집에 들리지 않으면 그 사람이 얼마나 서운해할가! 평양에 두고온 안해는 또 어떻게 생각할가!

그런데 인간은 아무리 원숙해지려고 해도 자기를 극복하기 어려운 때가 있는 법이다. 눈앞에는 늘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좋은것은 아니라고 울분에 차서 말하던 건설사업소운전사의 관골이 두드러진 꺼칠한 얼굴이 떠올랐다.

최윤호는 그때 신소자를 만나 사연을 잘 설명해서 리해시키겠다고 했다. 그런데 최윤호가 이자 그 사람을 만나 뭐라고 말했단 말인가?

《아니, 말하지 않겠습니다.》하던 그 말이, 《그가 동지와 잘 아는 사이같은데.》 하던 그 말이 가슴에 얼음쪼각처럼 들이박혀 빠져나가지 않았다. 불안했다.

여기 시내에는 그가 아는 또 한사람이 있다. 책임부원으로 있을 때 이곳 도에 드문히 내려오면서 전학선부상의 소개로 몇번 신세를 진적이 있는 공업대학 교무부학장 지석영이였다. 전학선부상이 대학교단에 있을 때 배워주었다는 제자였다.

김광우는 그의 집에 가면 평양소식도 말해주고 여기 지방형편도 들으면서 생활의 다반사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대화로 시간을 보내야 할것이였다.

그런 교제는 자연스러운것이고 생활의 단조로움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오늘은 누구와도 마주앉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는 혼자 있고싶었다.

려관에 다시 들어가 하루밤을 보내고 신소한 사람의 아들이 공부했다는 중학교를 찾아갔다.

거기서 나이지숙한 교장의 립회하에 당시 담임교원이였다는 녀선생을 만나 문제로 제기되였던 두 학생의 평상시성적을 알아보았다.

대학추천을 못 받고 원림사업소 로동자로 들어갔다는 오문형의 성적이 더 높았다.

《교장선생, 어떻게 되여 일이 그렇게 되였습니까? 원래야 성적이 우수한 오문형학생이 추천을 받았어야 하지 않습니까.》

《글쎄요. 일이 잘못된거지요. 그 문형학생이 품행도 좋고 공부도 잘했습니다. 수재라고들 했으니까요.》

교장은 퍽 소심한 사람같았다. 더 할 소리가 있는것 같은데 말하지 않았다.

광우는 그를 탓하고싶지는 않았다. 지내보면 우리 주위에는 부정을 알면서도 자기는 아무것도 모르는척 하는 약삭바른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모든것을 좋게만 보는 너그럽고 온화한 성격이 지나쳐서 뻔한 부정앞에서도 모난 말을 할줄 모르는 사람도 있는것인데 교장은 두번째 부류에 속하는것 같았다.

김광우가 어느 정도 답답한감을 느끼고있을 때 조심스럽게 앉아있던 녀교원의 입에서 《옳지 않습니다!》 하는 분노에 가까운 소리가 튀여나왔다. 교장의 두리뭉실한 말이 녀교원의 의분을 폭발시켰는지도 모를 일이였다.

《우리 일군들의 심장이 그렇게 차거우면 됩니까? 나라의 미래를 안중에 두지 않는건 더 말할것도 없고 한 학생의 운명을 우롱의 도마우에 놓았단 말입니다!》

《아, 정란선생!》

교장이 자제시키려 했으나 의분의 수레바퀴는 이미 누구도 멈춰세울수 없는 지경이 되여 우당탕거리며 굴러갔다.

《자기의 리해관계에 따라 성적이 우수한 로동자의 자식을 밀어놓고 다른 학생을 추천했단 말입니다!》

그 녀자는 모든것을 알고있었다.

결국 광우는 그때 《허심하고 자기반성적》인 최윤호의 설명을 믿고 본의아니게 과오를 범했던것이였다.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는 최윤호를 만났다. 광우가 건설사업소에 찾아가 신소한 당사자를 만났다고 말했을 때 최윤호는 왜서인지 당황해했다. 그것이 김광우를 더욱 의아하게 했다. 하여 내가 신소때문에 처음 내려왔다간 다음 신소자를 만나 뭐라고 말한게 없는가고 하자 최윤호는 그 사람을 리해시키자고 그때 찾아가 사연을 솔직히 말해주었으며 그 사람도 다 리해를 했노라고 했다.

그 말을 할 때의 최윤호의 부자연스러운 거동이며 말투에는 아리숭한것이 있었다. 더우기 신소자가 다 리해했다고 하는 말이 왜서인지 광우에게는 이상하게 생각되였다. 문득 눈앞에는 건설사업소 운전사의 분개해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신소문제때문에 나를 찾아와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까?》하던 그의 말! 《아니, 말하지 않겠습니다!》하던 그의 말! 최윤호처장이 그 운전사에게 뭐라고 했단 말인가?

광우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될수록이면 자제하려고 애쓰며 말했다.

하지만 자기도 모르게 격하여 인차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우선 동무의 말만 듣고 올라간 나부터 잘못했소. 이제 올라가면 당조직에 찾아가 내 과오에 대하여 보고하고 비판을 받겠소. 하지만 최동무도 옳지 않소! 옳지 않단 말이요! 자기의 상급에게 잘 보이는것이 동무에게는 국가의 리익을 지키는것보다 더 중요하오? 사람은 량심이 있어야 하오. 일군의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오. 왜냐하면 한 인간의 운명이 어느 한두 일군의 량심에 따라 달라질수도 있기때문이요. 다른 사람도 아닌 동무가 그렇게 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소. 섭섭하구만!》

《부국장동지, 제 다시야 그러겠습니까. 그러지 말아야 한다는것을 알면서도 제가 인정이 무르다나니 우에 있는 일군의 얼굴만 보면서 그런 과오를 범했단 말입니다.》

《동무는 인정에 못이겨 그랬다고 하는데 그〈인정〉때문에 한 로동자의 가슴이 얼마나 쓰리겠는가를 생각해봤소? 더우기 우리 사회가 미덕이 흐르는 사회이고 누구나 노력하면 희망에 따라 마음껏 나래칠수 있는 사회라고 배우며 자란 한 어린 청년의 가슴에 어떤 의혹이 자리잡겠는가를 생각해봤는가 말이요! 가슴이 다 서늘해지오. 그는 인생의 먼길을 가야 할 초년생이란 말이요.》

광우는 정말 이제 평양에 올라가면 먼저 당조직에 찾아들어가 자기의 과오에 대하여 비판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해는 서켠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평양행 렬차를 타야 할 시간도 얼마안 남았는데 광우는 또 한사람을 만나야 할 일이 있었다. 건설사업소 운전사의 아들이였다.

도모집처에서 나와 인적이 드문 길을 걸어가며 광우는 가슴이 쓰리였다. 최윤호동무에게 너무 가슴아픈 말을 하지 않았는가? 내가 그의 량심까지 거들며 모가 나는 말을 해준게 아닌가? 그는 안해를 생각했다. 여보, 미안하오. 내가 최윤호동무에게 가슴아픈 말을 해주었구려.

그는 어수선한 기분을 털어버리지 못한채 원림사업소를 찾아가 마침 퇴근길에 오르려는 오문형이라는 어린 청년을 만났다. 건설사업소 운전사가 눈이 나쁜 아들이라고 하더니 김광우앞에 나타난 청년은 어제 오전에 공원옆을 지나오다가 만났던 그 도수안경을 낀 애숭이로동자였다.

《나한테 종아리를 맞을 준비가 되여있겠지, 나쁜 친구.》

자기를 혼쌀내주려고 기어코 찾아온 손님인줄로 알고 주접이 들어있는 청년에게 일부러 엄포를 놓고나서 김광우는 껄껄 소리내여 웃었다.

그와 함께 역으로 나오며 말했다.

《문형아, 너도 알겠지만 우리 나라는 인간의 꿈을 소중히 여기고 그 꿈을 꽃피워주는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나라이다. 희망을 버리지 말고 공부를 해라. 그래서 다음해엔 꼭 대학입학시험을 치거라.》

청년은 말이 없었다. 한참후에야 《알겠습니다.》 하고 조용히 말했다. 그다음엔 침묵.

《?》

광우는 고개를 돌려 그의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아무런 원망도, 이지러진 심리도 찾아볼수 없는 깨끗한 눈이였다.

《문형인 내 말을 믿니?》

《믿습니다!》

청년의 눈에는 따뜻한 신뢰의 빛이 흐르고있었다. 그런데 어찌하여 가슴은 쓰려오는것인가?

눈앞에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녀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에 붙지 못하고 웃으며 돌격대로 나가던 딸애의 얼굴이 그리고 《당신은 제 딸문제 하나 해결할수 없어요?》하던 안해의 창백한 얼굴이.

지금도 안해의 마음속에는 그날의 원망이 녹을줄 모르는 얼음덩이처럼 남아있지 않을가?

그날 저녁, 도모집처장 최윤호는 기분이 흐려가지고 늦어서야 집으로 퇴근했다.

집에 들어서니 초인종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기다렸던듯 안해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 녀자는 혼자서 퇴근해오는 남편을 눈이 올롱해서 이상하게 올려다보았다.

《여보, 평양손님을 데리고온다더니 어떻게 된거예요?》

《다른데 들릴 일이 있다더구만.》

최윤호는 적당히 얼버무려치우며 시답지 않은 인상을 지어보이였다.

안해의 예쁘장하게 생긴 해말간 얼굴에는 점점 의혹의 빛이 짙어갔다. 그럴만도 했다. 남편이 낮에 전화를 걸어 저녁에 중요한 손님을 데리고 가겠으니 손님맞을 준비를 잘하라고 단단히 일렀던것이였다.

남편이 드문히 동무들을 데리고 들어오군 하여 손님접대에 어지간하게 지친것이지만 오늘은 중요한 손님이라고 강조를 하여 특별히 마음을 써서 음식준비를 한 그 녀자였다.

그러지 않아도 그 녀자는 집안의 외동딸로 자라면서 어머니한테서 전습을 잘 받아 음식솜씨가 있었다.

주부란 남편의 손님들로부터 료리솜씨가 있다든가 하는 그러루한 치하의 말을 듣는것도 하나의 기쁨이고 소박한 행복이라고 할수 있는것인데 오늘은 성의를 다하여 일껏 준비한 보람이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서운한 나머지 남편을 원망하던 그 녀자는 차츰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의 기분상태가 말이 아니라는것을 뒤늦게야 알아차린것이였다.

《여보,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요?》

전실로 들어서는 남편의 별로 어두워보이는 얼굴색을 살피며 그 녀자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불안의 기색이 어리는 안해를 피뜩 돌아보고난 최윤호는 시답지 않아하며 퉁명스레 한마디 던졌다.

《일은 무슨 일.》

광우는 이번 출장길에 확고히 결심한것이 있다. 그것은 어떻게 하나 지금 시험연구조에서 진행하고있는 원격시험프로그람개발을 다그쳐끝내면서 동시에 힘들어도 중앙봉사기실을 비롯하여 물질적인 기반조성사업을 동시에 밀고나감으로써 다음해에는 시범적으로 콤퓨터에 의한 대학입학원격시험을 진행해야겠다는것이였다. 새 시험방법을 도입하면 현존시험제도로 하여 산생되는 여러가지 부족점도 자연히 없어질게 아닌가.

그런데 귀전에선 원격시험에로 넘어가자면 먼저 시험단위들에 내려가 그곳 일군들부터 만나보라는 전학선부상의 점잖은 충고의 말이 사라질줄 몰랐다.

광우는 고급중학교와 대학일군들을 만나보았다.

중등교육단계의 일군들은 흥미있어하면서도 해봐야지 아직은 잘 모르겠노라고 하다가 부국장의 설명을 듣고나서 좋구만요 하고 머리를 끄덕이는 자세이고 대학들에서는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위원회에서 하는 일이니 내놓고 반대는 할수 없어 그러는것인가?


ㄱ대학일군: 대학입학시험을 국가의 통일적인 장악과 지휘하에 진행할수 있다면 그자체는 좋은것입니다. 그것은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지향하는 문제이구요. 그렇게 해야 나라의 중등교육실태를 정확히 장악하고 자기 실정에 맞으며 발전의 지름길로도 될수 있는 옳바른 교육전략을 세울수 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봐도 우리 나라 제도는 세상에서 가장 우월한 제도라고 당당히 내놓고 말할수 있지요. 제도자체가 빨리 발전할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가지고있거던요. 놈들이 우리의 제도를 없애버리지 못해 발광하는것도 그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정보화시대에 맞게 학생들에 대한 실력평가방법도 달라져야 합니다. 콤퓨터시험에로 전환하는 그자체는 좋은 일이지요. 하지만 신중해야 합니다.

부국장동무도 잘 아는 문제이지만 대학생선발을 잘하는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당에서 제시한 인재강국의 목표에로 하루빨리 도약하는가 늦어지는가 하는 문제이고 따라서 나라의 운명과 관계되는 문제라고 할수 있지요.

오늘의 시대에 와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은 나라의 흥망이 달려있는 치렬한 투쟁입니다.

때문에 우린 나라의 과학발전을 책임진다는 립장에서 이 사업을 대해야 한다고 봅니다.


ㄴ대학일군: 나 개인의 견해를 말한다면 지금당장이라도 콤퓨터시험에로 전환했으면 좋겠습니다.

대학입학시험때면 이 머리가 터질 지경입니다. 지금 시험제도라는게 부족점이 있는건 사실입니다.

우선 채점에서 완전무결하게 공정성이 보장된다고 할수 없지요.

례를 들어 수학시험답안지에 대한 채점을 한다고 합시다. 수백명 수험생들의 답안지를 채점하자면 한두명 교원들만 채점에 동원되는것이 아니겠지요?

그 매 교원들이 꼭같은 기준에서 채점을 한다고는 볼수 없겠지요. 기계가 아니고 사람이기때문이지요.

그건 그렇다치고 교원들이 수십장의 답안지를 쌓아놓고 채점을 하는데 처음 한동안은 긴장해서 제대로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인체의 생물시계는 긴장의 한계점에 가닿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오유라기보다 처음기준에서 채점이 진행되지 못할수 있습니다. 그걸 결코 교원의 잘못이라고는 볼수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의 생물학적피로를 의식적으로 조절통제하기는 힘드니까요.

하지만 그 결과는 심각해집니다. 대학입학시험은 개인적으로는 그 학생의 전도문제에 귀착되는것이니까요. 말하자면 운명문제이지요.

신소가 제기되지 않을수 없습니다. 신소는 매 공민들에게 부여된 권리가 아닙니까.

국가적으로 봐도 문제가 있습니다. 대학입학시험이 공정하게 진행되지 못하면 나라의 인재육성에 지장을 주게 되겠지요? 물론 부국장동무가 더 잘 알겠지요. 그런데 콤퓨터로 인간지능을 완전무결하게 잴수 있겠는지?

의심할 여지없이 정확하게 잴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말씀드리는데 전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ㄷ대학일군: 콤퓨터로 전문과목 교원의 두뇌를 대신할만큼 채점을 원만하게 할수 있다면 무엇때문에 숱한 로력과 종이를 쓰면서 지금의 서지시험에 매달리겠습니까.

대학입학시험을 치는데서 단지 채점의 공정성만 생각하면 안된다고 봅니다.

우선 채점이 정확해야 합니다. 모든 측면에서 말입니다.

어느 한 공장의 기술혁신문제라면 몇번 실패한다 해도 큰 문제는 아닙니다. 수십번이라도 다시 뜯어고쳐서 성공하면 될테니까요. 하지만… 나라의 흥망이 결정되는 교육과 관련한 문제를 시험대우에 올려놓아서 될가요?

교육에서 1년을 놓치면 미래에로 가는 진보의 기관차가 10년 늦어집니다.


광우는 자기가 꼭 어린애취급을 당한것 같이 생각되였다. 마치도 어린애가 어른들한테 갔다가 이 철부지야, 그런게 아니다 하고 핀잔을 받은 기분이였다. 그들은 나라의 부강발전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걱정이 많고 심도있는 사색을 하고있는데 자기는 도저히 그들의 지식, 그들의 사색의 높이에 가닿을수 없을거라는 막연한 생각조차 들었다.

그들의 애국심, 애국에 바탕을 둔 그들의 사색과 무한대한 지식, 나라의 과학발전에 한생을 기울여오는 그들의 량심과 헌신에 진심으로 머리가 숙어졌다.

그런데 속에서는 불만이 끓어올랐다. 그것은 누구에 대한 불만인가?

그 사람들에 대한 불만인가? 그 사람들을 납득시키지 못한 자신에 대한 불만인가?

어딘가 멀리에서 날아오는듯 한 녀인의 목소리가 귀전을 울린다.

《량심이 있어야 해요!》하고 정의의 심판자처럼 부르짖던 목소리! 왜 ㅎ도에서 만났던 그 녀교원의 말이 생각나는것인가? 이게 무슨 량심을 운운할 문제란 말인가? 랭정한 사고와 과학적인 론리… 아니, 랭정한 사고와 과학적인 론리라구? 《기차를 놓치면 안돼요!》 이건 누구의 목소리인가? 오래전 눈보라 사나운 령길우에서 망각의 미궁을 향해 락하하던 광우의 연약한 의식속으로 끈질기게 파고들던 간호원의 목소리이다. 어찌하여 이번에는 안해의 오래전 그 목소리가 울려오는것인가?

광우의 사고는 혼탁되여버렸다.

광우는 언젠가 전학선부상이 자기의 수제자에 대해 말하던것이 생각났다.

《그 지석영이 수학적인 두뇌가 비상하오. 대학적으로 실력이 가장 우수한 학생이였으니까. 연구사로 있으면서 외국에도 몇번 나가봤소.

그 사람이 콤퓨터에서는 제노라고 하던 때가 있었소. 생각이 있으면 한번 만나 이야기를 나누어보오. 유익할는지 알겠소?》

전학선은 그러고나서 잠시 무슨 생각을 하다가 신통치 않은 인상을 지으며 《그런데》 하고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몇해전부터 박사론문을 준비한다던게 아직 소식이 없소. 교무행정사업에 빠져서 그런것 같은데 그 두뇌가 아깝소.》

광우는 ㅎ도로 다시 내려갔다. 지석영을 만나 원격시험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보고싶었다.

《아니, 전번에 무슨 일때문엔가 내려왔댔다는데 원, 저한테라도 들릴것이지 려관에서 하루밤 쉬고 그냥 올라갔더구만요. 최윤호처장이 말해서야 알았습니다. 집에 오라고 해놓고 기다렸는데 들리지 않았다면서 몹시 섭섭해하던데요. 우리 도가 그렇게 인심이 박하지는 않은데요.》

키가 훤칠하면서도 탄력이 넘쳐나는 단단한 체격에 이마가 넓어 지성미가 있어보이는 지석영이 자기의 사무실에 앉아 전화로 한창 누구와 큰소리로 말하다가 얼굴에 반색의 미소를 듬뿍 실으며 김광우를 맞았다.

《몹시 바쁜게로군요.》광우는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창문옆의 쏘파를 권하며 지석영이 다소 면구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늘 이렇게 볶이웁니다. 함께 대학을 졸업한 동창생들은 모두 교수가 된다, 박사가 된다 하는데… 이거 행정사업에서 빨리 벗어나야지 이래가지고서야 친구들 보기가 부끄러워서 어디…》

광우는 한쪽벽을 절반이나 차지한 번쩍이는 책장에 눈길이 갔다. 표지가 화려한 신간도서들, 누렇게 퇴색한 도서들, 여러 나라의 원서들, 과학잡지들이 빼곡이 꽂혀있었다.

《허, 굉장한 책부자로구만요!》

《집에 있는것들을 모두 내다놨지요.》

김광우가 책장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부러워하는것을 보고 지석영이 말했다.

《사무실에 붙어있는 시간에라도 짬이 생기면 공부도 하고 또 박사론문도 다시 손을 대볼가 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마음뿐이지 어디 시간이 납니까. 우리 대학에서만도 30대의 박사들이 줄줄이 나오는 판인데요.》

그렇게 말하는 지석영의 어조에는 애달픈 한숨같은것이 느껴졌다. 광우는 은연중 동정이 갔다.

《허, 스스로 자기를 채찍질하는거야 좋은것이지요. 행정사업에 몸담근 바쁜 겨를에도 이렇게 책들을 내다놓고 공부를 하는 지선생을 보니 저부터가 자극이 되는데요.》

지석영은 그 말에 얼굴이 뻘개지며 손을 홰홰 내저었다.

《어이구, 그러지 마십시오.》

광우는 껄껄 웃었다.

《공부를 하십시오. 듣자니 지선생은 대학때 수재로 꼽혔댔다는데 지식이 로화돼서 밀려나면 안되지요. 박사론문도 빨리 완성하시오.》

《글쎄 그래야겠는데… 그런데 어떻게 또 내려오셨습니까?》

《위원회에서 새로운 시험제도를 내오려 한다는것을 알겠지요?》

지석영의 얼굴에는 한가닥 의혹이 스쳐지나갔다.

《알고있습니다. 콤퓨터에 의한 전국적인 대학입학원격시험에로 넘어가기 위한 준비를 한다지요?》

광우는 빙그레 웃었다.

《예, 대학의 실력가들이 위원회에 올라와 시험문제형식에 대한 연구도 하고 프로그람작업도 하고있지요. 그런데…》

《?》

《문제는 입학생들을 받아야 할 대학들에서 견해를 어떻게 세우는가 하는거지요.》

지석영은 혈색이 좋은 너붓한 얼굴에 호인적인 미소를 실으며 광우를 건너다보았다.

《아니, 무슨 말씀입니까? 우에서 결심하고 내밀면 아래에선 받아물게 되여있는건데요.》

그 말이 귀에 거슬리였다. 우에서야 지시할 권한이 있는데 하라고 하면 그만이지 뭘 그러오 하는 소리가 아닌가. 주인된 립장에서 하는 말이 아니였다.

광우는 그런 내색은 하지 않고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대학들에서 견해를 달리한다면 위원회에서 계획하고 내민다고 해도 일이 바로될수 없지요. 그렇지 않소?》

《그거야…》

《여기로 내려오기 전에 제가 여러 대학들에 내려가 일군들의 의견을 들어보았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콤퓨터에 의한 대학입학시험을 국부적으로는 시험삼아 해볼수 있는것이지만 아직 전국적인 대학입학원격시험으로 확대하는 문제는 나라의 교육과 관련되는 일이여서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격시험에 대한 지방대학일군들의 견해를 들어보자는것입니다. 더우기 지선생이야 콤퓨터에 능하지 않습니까. 듣자니 대학때 전국대학생프로그람경연에 나가 1등을 한적도 있다더구만요.》

《허허, 그게 언제적 일이라구요.》 그는 인차 신중해졌다. 《그걸 하자면 채점프로그람이나 운영프로그람만 완성된다고 해서 되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물리적인 기반이 축성돼야겠지요? 중앙에서야 문제없겠지요. 그러나 여기 실정은 그렇게 못됩니다. 그리고 물질적준비가 이루어진다고 해도…》

광우는 무엇때문인지 약간 주저하는 그를 의아해서 바라보며 끈질기게 물었다.

《또 뭔가요?》

《저의 개인적견해를 그대로 말한다면 콤퓨터가 학생들의 실력평가를 과연 얼마나 정확히 할수 있겠는가 하는것입니다. 콤퓨터가 아무리 지능화되였다고 해도 인간의 두뇌는 아니거던요. 콤퓨터도 사람이 만들었으니까요. 세계적으로 봐도 콤퓨터시험의 문제형식은 Yes, No형식이 80프로이지요. 그 80프로로 인간의 론리적인 사고과정을 어떻게 추적하여 정확한 평가를 하겠습니까. 실례로 수학의 증명문제와 같은… 이거… 제가…》

《아니, 그렇게 솔직히 말해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난 생각을 좀 달리합니다. 바로 콤퓨터를 인간이 만들었기때문에 인간은 그 콤퓨터를 자기의 의도를 실현하는데 활용할수 있는거라고 말이요.》

《글쎄… 어느 외국잡지를 보니 이제 50년후에는 인간이 화성을 정복하게 되고 달에 자원채취를 위한 광산이 생겨나게 된다더구만요. 그때에 가면 창조활동에 필요한 과학지식도 필요한 음료수를 공급하듯이 사람들의 머리속에 넣어줄수 있다던지… 우리들이 어렸을 때 환상동화에서나 보던것이 현실로 된다는것이겠지요. 하지만 지금은 새 세기가 아닙니까. 더구나 리상이 그대로 다 현실로 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허허.》

광우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부학장동무의 그 견해에도 난 반대요. 리상이 있으면 현실은 따라가기마련이지요. 그리고…》

《?》

《인간이 이룩한 과학적토대와 발전의 속도를 놓고 산출해낸 50년후의 미래가 그렇게 희한하다면 우린 남보다 빨리 내달려 그 미래를 30년, 20년, 10년으로 단축해야 합니다. 안 그렇소?》

다소 면구스러워하는 미소가 지석영의 얼굴에 나타났다.

《말씀이 옳습니다.》

검푸르러진 나무잎들이 해빛에 번쩍이는 한낮이다.

한여름의 이맘때면 모란봉은 오히려 조용해진다. 젊은이들은 대체로 뽀트나 유람선이 기다리는 대동강유보도가 아니면 시내에 새로 생겨난 물놀이장들을 찾아가는것이였다.

그리하여 모란봉에는 명소를 유람한다면서 찾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 련인들의 모습이나 드문히 보이기마련이였다.

그런데 오늘은 류별난 한쌍이 보이였다. 련애하는 처녀총각이 분명한데 그들은 해방탑쪽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맨우에 땡볕을 맞으면서 나란히 앉아있는것이였다.

그곳은 주변 어디에서든지 다 볼수 있는, 은밀한 사랑의 대화를 속삭이기에는 적합치 않은 흡사 무대와도 같은 곳이였다. 혹시 우리들은 그저 보통사이이니 누가 봐도 꺼릴건 아무것도 없답니다 하는 제딴의 약삭바른 타산을 하고 그 장소를 택한 련인들이나 아닌지?

하긴 해볕에 한껏 달아오른 계단가까이에는 유람객들이 있을수 없고 멀리 지하철도쪽에서 나와 공원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계단우의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수가 없는것이였다.

그곳은 라영국과 전영랑이 불과 두달전에 처음으로 사랑을 약속하던곳이였다.

그때에는 정말 사랑을 속삭이기에는 누가 보면 별다르게 생각할수 있는 으슥진 곳보다도 이런 《개활지대》가 오히려 유리하다고 두사람이 다같이 생각했다.

라영국은 좀 희떠운데가 있었다. 그는 눈아래 보이는 계단을 가리키며 《인생계단》에 대한 이상한 철학을 《강의》했다.

《사람이 한생을 산다는것도 이 계단을 오르는것과 같소. 하나의 계단을 올라서면 새로운 계단을 올라야 하지. 평지란 없소. 아니, 평지를 걸어갈 생각을 한다면 인생의 종착점에는 가닿을수 있어도 인생의 목적에는 도달할수 없는거요. 사람에게는 생의 목적이 있는것이요. 그 목적이란 가까이에 있는것이 아니여서 단번에 오를수는 없는것이지. 한계단 또 한계단 밟아오르는거요. 사람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것도 수행할수 있다고 했소. 그런데 사람마다 다 마지막계단까지 오르는건 아니요. 그건 의지와 신념과 관계되는 문제지. 의지와 신념이 얼마나 강한가에 따라 어떤 사람은 한두개 계단에, 또 어떤 사람은 중간계단에 머물러버리기도 하오. 그리고 어떤 사람은 한두개 계단을 극복 못하여 마지막계단을 앞에 두고 지쳐 쓰러지기도 하오. 그건 아쉬운 일이지. 나는 말이요, 이 마지막계단까지 오르고말테요.》

처녀의 샘물같이 정갈한 눈이 새물새물 웃었다.

《동지의 그 〈철학〉은 이 계단을 보면서 불쑥 떠오른거예요? 아니면 아름다운 처녀의 마음을 움직일 지레대가 필요해서 일부러 생각해낸거예요?》

《동무가 아름답다? 대학을 졸업했다는 처녀가 하는 말 치고는 좀 경박하구만.》

처녀는 또 웃었다. 이번에는 입을 가리우며 소리내여 웃었다.

《남자들이 그러더구만요. 속엔 아무것도 든것이 없는 남자들이, 처녀의 얼굴만 보고 반해버리는 남자들이 말이예요.》

사실 처녀는 자기 말처럼 아름다왔다. 약간 도드라져나온 하얀 이마며 사색적인 그윽한 눈… 처녀에게서는 신선하면서도 야릇한 향기같은것이 풍기였다. 그것은 고급향수나 화장품향기는 아니였다. 처녀의 체취였다. 총각은 굽실굽실하고 윤기나는 검은머리칼이 반쯤 내리덮인 처녀의 하얀 뒤목을 도적질하듯 슬그머니 바라보다가 눈길을 떼며 히죽이 웃었다.

《나도 그런 사람으로 보오?》

《모르겠어요.》

《이거 너무하구만. 대학을 금방 최우등으로 졸업한 사람을 그렇게밖에 안 보다니!》

《됐어요. 뜻을 세우지 못하는것은 키없는 배나 기수없는 말과 같다고 하더군요. 난 동지가 대학에서 수재로 소문났고 리상이 높다는걸 알아요. 동지와 같은 대학에서 공부한 우리 동무가 그러더구만요. 그런데 동지의 그 마지막계단이라는건 뭔가요? 박사인가요? 원사인가요?》

《박사도 돼야지. 원사도 될수 있소.》

라영국은 처녀를 위해서 기꺼이 박사가 되고 원사가 되겠다는 말을 하려다가 정정했다.

《난 말이요, 박사가 되고 원사가 되여 우리 나라가 강해지는데 기여할 좋은 일을 하자는거요. 세상이 부러워할 거창하고 현대적인 창조물들에 내가 바친 지식이 비껴있을 때 그걸 자랑으로, 긍지로 여기겠소.》

《현란하군요.》

처녀의 나직이 뇌이는 말에서는 야릇한 비난의 색채가 감촉되였다.

무엇이나 지나치게 요란하면 진실감이 없어진다는 소리가 아닌가.

라영국은 모욕감을 느꼈다. 그는 정말로 화를 냈다.

《동문 내가 소설책에서 베껴둔 문구나 외운다고 생각하는게 아니요?》

《…》

처녀는 제멋대로 돌아간 자기의 혀를 원망하는듯 얼굴이 빨개서 말이 없었다.

라영국은 정색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화학공장 로동자요. 아버지는 자주 말했소. 이 땅에 무수히 솟구치는 만년대계의 창조물들과 우리 공화국의 상표를 달고 나가는 명제품들 하나하나에는 나라를 받드는 훌륭한 인간들의 진실한 사랑이 깃들어있다. 만약 어느 한 창조물에도 자기의 넋이 깃든게 없다면 우리 사회에서 그 사람은 참 불쌍한 인간이다라고 말이요.》

《동진 참 훌륭한 아버지를 모시고있어요!》

처녀는 조심스럽게, 그러면서도 감동에 젖어 나직이 부르짖었다.…

그렇게 사랑이 이루어진 두사람사이에 요즘 좀 별난 일이 있었다.

김호성조장의 표현대로 순풍에 닻을 올렸던 사랑의 배가 《암초》를 만난것이였다. 부상인 아버지가 이제 정식 나오게 되는 시험정보과에 떨어지려는 라영국의 결심을 알고 그 일에 몸을 담그면 발전이 없고 더우기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이라는것이 학계의 권위있는 많은 사람들의 리해를 받지 못하는 일이라고 하는 말을 듣고 처녀가 깜짝 놀란것이였다. 리해를 받지 못한다고 하는거야 반대한다는 말을 못해서 그러는것이지 뭐겠는가? 더우기 아버지는 교육부문에서 그래도 한다하는 일군인데 아무렴 모르고 말씀하신걸가.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 그 동지는 한생 빛을 못 볼 일을 하게 된다는것이 아닌가!

하여 전영랑은 한창 프로그람개발에 바쁜 애인을 불러냈다.

《대학에서 강좌에 떨어지라고 했다는데 그렇게 하지 않겠어요? 어제 아버지를 만나 우리 관계를 말씀드렸어요.》

《아버지한테 말씀드린건 잘한거요. 아무래도 아시게 될 일인데뭐.》흔연스레 말하던 라영국이 이상한 생각이 들었던지 처녀의 얼굴을 빤히 건너다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대학에 떨어지라는건 무슨 소리요? 아버지한테서 말을 들은게 있소?》

전영랑은 한동안 즘즘해있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동지네가 하는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이라는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현재로서는 교육부문에서 한다하는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는 일이라더군요. 난 도무지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요, 그렇게 막연한 일을 위해 동지네 연구조가 모두 집을 떠나 고생한다는게… 그런데다가 아버지가 하는 말이 전국적인 원격시험에로 넘어가는 경우 동지네 연구조는 한생을 그 일에 바쳐야 한다더군요. 별로 빛을 보지 못할 일을… 그러니 동지가 시험정보과에 떨어지려면 애초의 꿈은 포기해야 된다는게 아니예요.》

대학강좌에 떨어져야 하지 않겠어요 하는 말을 무슨 당치않은 소리를 하느냐는듯 귀등으로 흘려보내던 라영국이 처녀의 아버지가 시험연구조의 일을 두고 했다는 말에는 생각이 많아졌다.

《그렇단 말이지.…》 라영국이 깨끗이 면도를 한 매끈한 턱을 슬슬 문지르며 혼자소리로 뇌이다가 고개를 돌려 처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어마!》 총각의 눈이 가까이에서 이글거리자 처녀는 당황하여 얼굴이 빨개지며 나직이 비명을 질렀다.

라영국이 빙그레 웃었다.

《그러니 동문 이 라영국이 함께 고생하며 시험프로그람을 개발해오는 동무들을 훌떡 배반하란 말이요? 물론 학계에서 발전하여 박사가 되고 원사가 되는건 이 라영국의 꿈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고락을 같이해오는 동지들을 배반할수는 없지 않소. 나 하나의 명예를 위해 그러는줄 우리 사람들이 알면 뭐라고 하겠소? 동문 말같지 않은 소리 하지 마오.》

말같지 않다는 말에 처녀는 발끈했다.

《동진 뭐예요?! 제 전망문제를 생각하라는것인데 그게 어디 말같지 않은 소리예요? 누구에게나 발전할 권리는 있는거예요!》

라영국은 삽시에 익은 가재처럼 온통 빨개진 처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실없는 사내처럼 또 싱글거리였다.

그것이 처녀의 약을 부채질했다.

《저를 위해 신중한 말을 하는데 웃기만 한담!》

《동무생각이 틀린다고는 볼수 없소. 하지만 꼭 맞는 말이라고도 할수 없는거요.》

《그건 무슨 말요술을 피우는거예요?》

《요술이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거요. 사람은 자기의 권리보다 량심을 앞에 놓아야 한다 그 말이요. 그리고 말이 난김에 하는 소리인데 동무 아버지에 대하여 난 리해할수가 없소. 동무 아버지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반대하는게 사실이라면 말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라의 교육발전을 두고 생각을 많이 해야 할 부상동지가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말이요. 제대로 되자면 누구보다 동무 아버지가 우리 일을 지지해서 발벗고 나서야 한단 말이요.》

《동지는 자신의 견해만을 너무 절대화하는게 아니예요?》

《그럴수 있소. 그렇지만 주관이라고 다 그릇된것이라고는 볼수 없소. 그리고 높은 사람이라고 그 견해가 다 정의일수도 없는거요. 그런 즉 내 생각은 이렇소. 이 라영국은 앞으로 동무의 아버지나 동무에게 만족을 주지 못할수 있소. 그러니 동문 우리 문제를 놓고 후날 후회하지 않게 잘 생각해보고 결심을 해야 할거요.》

첫날에는 그렇게 헤여졌다.

전영랑은 아버지에 대한 라영국의 비난은 기분이 나쁠지언정 참을수 있지만 자기들의 관계를 두고 잘 생각을 해보라느니 어찌라느니 한것은 아무리 삭여버릴래야 언밥을 삼킨듯 속에 걸려 내려가지 않았다. 어쩌면 그런 말이 쉽사리 나온담! 그게 결별을 선언한것과 다른게 뭐람! 《인생의 계단》이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자기만이 꿈이 하늘에 닿은 지성인이고 사랑도 영원히 변함없을것처럼 꿀같은 말을 하더니 그건 다 침발린 소리였나?

전영랑이 며칠을 고민하다가 아무런 전화련락도 없이 라영국이네 연구조가 들어있는 청사정문에 불쑥 나타난것은 그날의 일때문이였다.

처녀는 좋은 감정을 가지고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찾아간것이 아니였다. 싸움닭처럼 부리를 뾰족하게 벼리여가지고 간것이였다. 그런데 영랑이 싸움을 걸어볼 사이도 없이 남자쪽에서 자기는 무척 바쁘다는 말 한마디를 매정하게 쏟아버리고 들어가버렸다. 그게 관계를 영 끊어버리자는게 아니면 뭐란 말인가. 다시는 내 발로 찾아가지 않을테야! 우리 관계는 영원히 끝장이야!

웬걸, 보름도 안되여 그 애인한테서 전화가 왔다.

《영랑동무, 나요. 지금 어디에 있소?》

《어디에 있건 그건 왜 물어요? 선생님.》

《이거 별나게 그러누만. 갑자기 선생님이라는건 뭐야? 오늘은 일요일이 아니요. 집에 올라와있겠지? 만나자구.》

천연덕스럽기두 하지!

《난 몹시 바쁜 사람이예요!》

그것은 앙갚음이였다. 시험연구조를 찾아갔을 때 매정하게 굴던 그 말에 대한 앙갚음.

라영국이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하하 웃어댔다.

《만나자구, 열시정각에… 우리가 평양에서 처음 만나던 그 자리에서 말이요. 잊지 않았겠지? 그럼.》 그 말을 하기 바쁘게 먼저 전화를 꺼버렸다. 응당 처녀가 응하리라고 생각하는듯…

그렇게 되여 두사람은 여기 《운명의 계단》우에서 다시 만난것이였다. 처녀도 총각도 다시 안 만날듯이 그랬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련인들의 부질없는 변덕에 불과한것이였다.

사실 처녀를 통해 전학선부상이 시험연구조의 일이 성공하여 전국적인 대학입학시험을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체계로 넘어가는 경우에 한생을 빛이 나지 않는 그 일에 바쳐야 한다고 했다는 말에 라영국은 자기의 앞날을 놓고 생각이 전혀 없었던것은 아니였다. 누구에게나 발전할 권리가 있으며 따라서 앞날을 생각해야 한다는 처녀의 말도 그른데가 없는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권리보다 량심을 앞에 놓아야 한다고 라영국이 말한데는 처녀앞에서 사내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희떠운 감정도 작용한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진심도 있었다. 자기 하나의 발전을 위해 집단에서 떨어져나가는것이 함께 위원회에 올라와 반년나마 한가마밥을 먹으며 고심어린 탐구의 나날을 보내는 동료들을 배반하는 량심없는 일로 생각되는것이였다.

그런데 라영국이쪽에서 먼저 오늘 만나자고 전화를 한데는 사랑하면서도 애인을 울려서 보낸 자신에 대한 후회감도 있었지만 그보다도 김광우부국장의 입김이 작용해서였다. 처녀는 그것을 알수 없었다.

바로 어제 시험연구조에 나타났던 부국장은 라영국을 보자 대뜸 애인과의 일이 어떻게 돼가는가고 물었다. 라영국이 지나가는 말처럼 여기고 마치 일이 끝장난것처럼 시들하게 말했더니 뜻밖에도 부국장은 무슨 큰일이나 난것처럼 화를 냈다.

《이보우 라영국동무, 처녀와 사랑을 약속하고 이제 와서 그만두겠다는거요? 무슨 당치않은 소리요? 사랑을 약속한다는게 무슨 철없는 아이들의 놀음놀이인가 하오? 그게 사실이라면 동무문제를 단단히 봐야겠소. 그 처녀는 나도 잘 아는데 인물도 잘났지만 속에 든것이 있고 마음은 더 곱소. 세상처녀들을 다 갖다놔도 그런 보석덩이는 고르지 못해. 래일이 일요일인데 무조건 가서 처녀한테 용서를 빌라구.》…

라영국은 처녀를 만나자 그 말부터 하면서 우리 부국장동지를 어떻게 아는가고 물었다.

처음부터 새파란 인상을 보이며 《부리》로 쪼아댈 구실만 찾던 처녀는 그 소리에 놀라 대뜸 왕사발눈이 되였다.

《어마나! 동진 마치도 이 영랑이 그 부국장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우리사이 관계에 대하여 푼수없이 다 말한것처럼 생각하는게 아니야요? 내가 우리 상급도 아닌 부국장동지를 어떻게 알아요?》

라영국은 머리를 기웃거리였다.

《그렇다면 이상한데? 동무를 잘 아는것처럼 말하지 않아.》

《우리 집에 오셨을 때 차대접하느라고 아버지방에 들어갔다가 한번 얼핏 봤던적은 있어요.》

《그-으-래?-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구만.》

《뭐가 이상하다는거예요?》

《부국장동지는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실현하자고 애쓰는 사람인데 동무의 아버지는 그 일을 믿지 못해서 그런다니 말이요. 정말 반대하는건 아니요?》

처녀는 대번에 얼굴이 새파래지며 독을 내뿜었다.

《동진 전번에도 그랬지요? 동지가 우리 아버지를 얼마나 안다고 그렇게 말해요?》

《아, 됐소됐소, 영랑동무.》 라영국은 항복한다는듯 두손을 번쩍 들어보이며 화해의 미소를 지었다.

《어쨌든… 에이, 됐소. 그런 말은 그만하자구. 그런데 말이요.》

《뭐예요?》

《동무가 전번에 아버지의 말을 듣고 대학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한것은 나의 전망을 생각해서였을거요. 하지만 난 동무가 집단을 선듯 떠날수 없어하는 이 라영국을 리해했으면 하오. 우리 김호성조장동지가 어떤 가정적부담을 안고있는지 아오? 안해없이 앓아누운 가시어머니를 모시고있으면서 집을 떠나 살고있단 말이요.

우리 조의 다른 동지들도 다 그렇게 가정을 떠나살면서 일밖에 모른단 말이요. 그런데다가 부국장동지는 시험연구조에 내려올적마다 우리 일이 진척되지 않는다고 하지. 일이 긴장한것도 사실이요. 그런 형편인데 시험정보과가 나온다 해서 나 하나만 발전하겠다고 훌 빠져나가겠다는건 말하기 바쁜 일이란 말이요.》

전영랑은 실망의 한숨을 폭 내쉬였다.

《그러니 동진 100살을 살아도 여기까지 올라와보지 못하겠군요.》

라영국은 의아해서 처녀의 얼굴을 빤히 주시했다.

《여기까지라는건 무슨 소리요?》

《여기 마지막계단까지 말이지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이 자리에 앉아서 동지가 말하지 않았어요? 사람이 한생을 산다는것은 계단을 한계단 한계단 밟아오르는것과 같은거라구요. 어떤 사람은 한두개 계단에 그치고 어떤 사람은 중간에서 주저앉고만다구요. 동진 아마 한계단도 못 오른채 그 자리에서 생을 마치겠지요?》

라영국은 자기도 모르게 큰소리로 웃어댔다. 그러면서도 처녀앞에서 자신의 약점을 드러낸것만 같아 슬그머니 약이 올랐다.

《이보라구 영랑동무, 우리 시험연구조의 선생들이 지금 어떤 각오를 가지고 개발전투를 하고있는지 아오? 나라의 과학을 저 하늘높이 우뚝 세우는데서 그것을 떠받드는 하나의 조약돌이 되자는거요. 동문 저 거대한 건축물들도 땅속에 묻혀있는 기초우에 서있다는걸 알지? 그런데 사람들은 흔히 땅우에 솟아있는 건축물의 웅장미에 감탄하면서도 그 건축물을 땅속에서 말없이 떠받들고있는 기초가 하나하나의 모래알로 이루어졌다는 생각은 안하거던.》

《알겠어요, 모래알동지. 하지만 그건 소학생때부터 들어온 〈철학〉이예요. 유치하다고는 볼수 없지만 뻔한〈철학〉! 동진 이제 나한테 모래알의 의미에 대하여 말하자고 그러겠지요?》

《틀렸소!》

《그럼 뭐예요?》

《우리 사회의 원리에 대하여 말하자는거요. 아니, 발전의 원리이지. 아니, 량심에 관한 문제라고 할수 있소. 김광우부국장동지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두고 뭐라고 그랬는지 아오? 우리 조국의 꿈을 싣고 미래로 질주하는 급행렬차가 되여야 한다고 했소. 난 그게 마음에 드오. 그 급행렬차에 올랐다가 도중에 내리고마는 락후분자가 될수는 없지 않소.》

라영국은 무슨 말인가 하려는 처녀의 작고 보동보동한 고운 손을 급히 자기의 커다란 줌안에 넣으며 싱긋이 웃었다.

《됐어됐어, 동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모르겠소. 중요한건 내가 동무를 사랑한다는 그거요. 이젠 유보도에 나가 뽀트나 타자구. 가만… 이거 배가 의견이 있어하누만. 창고가 텅텅 비였는데 주인이란자는 뽀트생각만 한다고 말이요. 어!- 그러고보니 점심때가 다됐는걸. 차라리 식당에 가야겠소. 내가 우리 영랑동무 좋아하는 록두지짐을 사내지.》

《됐어요!》

처녀는 입을 비쭉 내밀었다.

하지만 처녀의 호수같은 눈에서는 기쁨이 은은히 빛발쳐나오고있었다. 애인을 만나면 한동안은 이지러진 소리를 하여 전날 《수모》를 당한데 대한 앙갚음을 단단히 하리라던 생각을 처녀는 그만에야 가뭇 잊어버린것이였다.

《오늘은 내가 하자는대로 해야 해요.》 처녀는 명령조로 말하며 애인을 모란봉너머 자기가 잘 아는 조용한 식당으로 안내했다.

두사람은 일부러 맨 구석의 빈 식탁 하나를 차지하고 마주앉았다.

전영랑이 이런데서는 녀자가 나서는것이라면서 책임자인듯 한 녀자를 만나고왔는데 조금후에 물찬 제비같이 쭉 빠진 접대원처녀가 음식을 날라왔다.

라영국이 몰몰 흰김이 피여오르는 자기단지를 내려다보며 눈이 둥그래졌다.

《아니, 이거야 단고기국이 아니요? 동무가 좋아하는 록두지짐을 하자고 했는데…》

《동진 단고기국을 좋아하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거야 불공평하지 않소. 동문 록두지짐을 좋아하는데 내가 좋아하는 단고기국이 나왔으니 말이요.》

좋아하면서도 처녀생각에 미안해하는 라영국을 보면서 영랑은 고운 얼굴에 행복한 미소를 담뿍 담았다. 그러고보면 녀자의 행복의 조건이란 요란한데만 있는것이 아니였다.

《영국동진 밤낮 콤퓨터앞에 앉아있지 않나요. 영양보충을 하지 않으면 안돼요. 제 말을 명심해야 해요.》

《하하.》

《무슨 생각을 하고 웃어요?》

《무슨 생각? 과연 호텔료리사가 옳긴 옳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

《나를 비웃는거예요? 대학졸업생이 하늘을 나는 수리개는 못되고 기껏해서 료리사라고?》

그 말에 라영국은 바빠맞았다.

《그런게 아니요. 동문 별나게 오해를 하누만. 이보우 영랑동무, 내가 재미나는 이야기 하나 할가?》

《단고기가 의견있어하겠어요, 음식을 차려놓고 이야기만 한다고요.》

《어, 하긴 그렇겠구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데 먹구보자구.》

식사를 채 끝내지 못했는데 처녀쪽에서 먼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래 무슨 재미나는 이야기를 하려댔어요?》

《그건 말이요, 사람의 몸안에서 있은 일이요. 말하자면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생겼을 때 입이 의견있어했소. 입이 말하기를 〈이거 공평하지 못하구만. 난 말이야, 식사시간이 되면 기껏해서 맛이나 보는데 음식을 씹어놓으면 위가 혼자 다 가져간단 말이야. 위는 참 량심이 없거던. 욕심쟁이야.〉라고 했지. 그러자 눈과 코와 귀가 한마디씩 했다구. 눈이 〈입은 말도 말라구. 그래도 입은 음식을 씹으면서 맛이라도 보지 않아. 난 늘 사람이 길을 헛갈리지 말고 바로 가라고 앞을 봐주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식사시간이면 눈을 펀히 뜨고 진수성찬을 구경만 해야 하니 이런 기분 나쁜 일이 어디에 또 있겠어.〉 그러자 코는 또 뭐라고 했는지 알아? 눈은 눈맛이라도 보지만 자기는 고소한 음식냄새만 맡아야 하니 더 죽여준다는거야. 그 말을 듣고있던 귀가 화를 벌컥 냈다구. 〈입이나 눈과 코는 말도 말라구. 나는 말이나 그밖의 온갖 소리를 듣고 주인이 제때에 결심채택을 바로하도록 해야 하는 중요한 일을 하면서도 식사시간이면 맛을 보거나 눈으로 보지도 못하면서 맛있게 먹는 소리나 들어야 하니 더 죽여준단 말이야.〉하고 말했지.

모두 저마끔 그렇게 한마디씩 하는데 손은 입을 다물고있었지. 그게 이상해서 입이 말했소.〈이보라구 손, 자네는 왜 한마디도 하지 않나?〉 그러자 부지런하고 과묵한 손이 말했지. 〈이보라구, 위를 욕하지 말라구. 사람한테는 입이나 눈도 꼭 있어야 하구 코나 귀가 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위가 얼마나 중요한 일을 한다고 그러나. 혼자서 묵묵히 음식물을 소화시켜서는 인체의 각 곳에 영양물질을 보내준단 말이야. 그러니 위가 없으면 자네들 입이나 눈과 코와 귀는 제구실을 하지도 못해.〉 입과 눈과 코와 귀는 그제서야 자기들만 인체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게 아니라는것을 깨닫고 위의 수고를 알게 됐지.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것을 알게 됐는데 말이야. 손이야말로 말은 없지만 그 어떤 보수도 바람이 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서 재부를 창조한다는거요. 그러니 결과는 뭐겠어? 》

처녀는 귀염상스럽게 입을 비쭉 내밀어보였다.

《음- 알겠어요. 사람은 명예나 보수같은것을 바라지 않으면서 사회를 위해 꼭 필요한 일에 자기를 바칠줄 알아야 한다, 그 말을 하자는거지요?》

《옳소. 그렇단 말이요. 자자, 단고기국이 정말 의견있겠소. 빨리 맛있게 먹구보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