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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당신 요즘 몸상태가 어떻소?》

온종일 분주히 돌아치느라 늦어서야 퇴근해온 광우는 잠자리에 누워 멍하니 천정을 올려다보다가 느닷없이 안해에게 물었다.

실은 그러지 않아도 요즘 신색이 눈에 띄게 좋아지면서 집안동자질같은것도 헐해하는 안해였다.

《퍽 나아졌어요. 최윤호동무가 구해다준 약이 정말 좋은것 같아요. 그걸 쓰면서 손발이 차던것도 한결 나아지고 가슴이 답답하던 증세도 없어지는게 알려요. 의사들이 그러는데 제 병은 랭이 심해서 오는거래요. 그러니 랭치료부터…》담담하게 울리던 안해의 목소리가 갑자기 끊어졌다.

광우는 그것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자기 생각에 잠겨버렸다. 귀전에는 나라의 흥망과 관련되는 교육문제를 시험대우에 올려놓아서는 안된다고 하던 ㄷ대학일군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그가 또 뭐라고 했던가? 공장의 기술혁신문제라면 수십번이라도 다시 뜯어고치면 된다고… 그래, 그렇게 말했다. 《오늘의 시대에 와서 과학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은 나라의 흥망을 걸고 하는 치렬한 투쟁입니다.》이건 누구의 말이던가? 그 사람은 공민적의무에 대해서 말했다. ㅎ대학에서 만나본 지석영부학장은 또 뭐라고 했던가? 콤퓨터가 아무리 지능화되였다고 해도 인간의 두뇌는 아니라고?

《여보, 내 말을 듣지 않으시는군요. 말은 당신이 시키구선.》

안해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져서야 광우는 자기 생각에서 깨여났다.

안해가 그를 내려다보고있었다.

광우는 미안해하며 아무런 고민도 없었던듯 황황히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온참!》어이없다는듯 웃는 안해의 힐난!

아니, 그것은 안해의 부드러운 애무와도 같은것이였다. 심중의 번뇌를 다독여 잠재우는 애무! 안해란 신비의 힘을 간직한 존재이다.

그런데 광우는 갑자기 가슴이 찌릇해왔다. 안해는 그 어떤 심각한 고민거리가 남편을 괴롭히고있다는것을 리해한것이였다.

안해는 그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았다. 그것을 물으면 그 녀자가 아니였다.

《여보, 당신은 사범대학을 나왔고 엊그제까지 선생님이였지. 처녀때도 선생님이였고 시집을 와서도 내가 군복을 입고있다보니 이동이 많은 남편을 따라다니며 교원을 했고 또 평양에 와서도 교원을 하지 않았소.》 광우는 아직도 랭기가 감촉되는 안해의 연약한 손을 더듬어 꼭 잡으며 말했다.《나의 한정실이라는 녀자는 참 좋은 녀자요!》

《…》

《내가 제일 애석하게 생각하는것은 당신이 건강때문에 교원생활을 더 못하고 집에 들어온거요. 당신은 시집을 와서도 여태 말하지 않고있지만 나는 다 아오. 당신이 병을 만난것도 나때문일거요. 그때 그 눈보라 사나운 령길에서… 나때문에 솜옷을 벗고있던 그 간호원을 생각하면 지금도…》

《여보!…》

갑자기 안해는 흑― 하고 흐느꼈다. 안해는 눈보라치던 령길의 그 엄혹한 밤을 생각했는가? 사그라져가는 이 광우의 연약한 생명의 불씨를 지켜보며 가슴이 타던 그밤의 처절함을. 아니, 안해가 지나온 반생의 나날에 마음써야 했던것이 그뿐이였던가? 이 김광우 좌절의 고통을 겪고있을 때 안해의 괴로움은 얼마나 컸던가! 그런속에서 변함없는것이 안해의 사랑이였다. 마음이 여린 안해는 지금도 남편의 마음속에 생겨난 시름의 무거운 덩이를 의식하며 가슴을 조이는것이였다. 그것을 의식하자 안해는 눈물겹고 괴롭고 힘겨웠던, 지나온 반생에 있었던 일들이 일시에 다 떠오른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흐느끼는지 모른다. 광우는 새삼스럽게 자기가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가슴이 찌릇해왔다.

《내가 오늘 새삼스럽게 이 말을 하는건 다른게 아니요. 나는 안해가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원인것을 자랑으로 여겨왔다는것을 말하자는거요. 나는 당신이 교원을 하면서 애꾸러기들때문에 마음을 쓰고 가정도 돌볼래 학교일도 할래 늘 바빠하고 힘들어하는것을 보면서도 내 안해는 선생님이다! 하고 마음속으로 긍지를 가졌소.》

《…》

《교원이 얼마나 좋소. 아이들속에서 살며 나라의 미래를 가꾸어가는것보다 더 중요하고 보람있는 일이 또 어디에 있겠소.》

《무슨 일이 있었어요?》안해는 끝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불안해할건 아니요. 일이야 있었지.》

광우는 나라의 중등교육에 관여하는 한다하는 일군이 원격시험문제를 두고 자기 딸에게 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 말을 해서 안해를 불안하게 해주고싶지 않았다. 그는 자기가 만나본 많은 대학책임일군들이 나라의 교육발전에 혼란을 가져오지 않을가 우려하면서 콤퓨터에 의한 대학입학원격시험을 조심스럽게 대한다는데 대하여, 그때문에 자기도 생각이 복잡해진다는데 대하여 말했다.

《그 사람들이 우려하는것을 나쁘다고 할수는 없소. 그건 그 사람들이 진정으로 나라의 교육을 걱정해서 말하는것이기때문이요. 내가 그 사람들의 견해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주관적인 생각만 앞세우면서 콤퓨터시험을 벌려놓았다가 그것이 교육발전에 기여하지 못하고 반대의 결과를 낳는다면 어떻게 되겠소? 그건 내 하나가 책임지는것으로 그칠 일이 아니지 않소.》

《그건 정말 심중한 문제예요. 하지만 당신이 하는 일이 옳다고 봐요. 나라에서 교육혁명을 일으키자고 하는 때가 아니나요. 교육의 정보화를 실현하자는것이 당의 요구이구요. 그래서 원격대학이 나와 지방들에서도 중앙대학의 유능한 교원들이 출연하는 원격강의를 받고있구요.

정보화시대의 요구에 맞게 학교의 모습도 변모되여 이제는 중등교육단계의 학생들도 다기능화된 교실들에서 공부하는것이 우리 나라의 현실이 아니예요.

그런데 학교들에선 아직도 적지 않은 교원들이 여전히 구태의연한 교수방법에 매달려있지요.

저는 시내학교에도 있어봤고 당신을 따라다니다나니 지방학교들에서도 교원을 해봐서 알아요. 낡은 교수방법에 매달려있는 일부 교원들을 보면 수준이 문제예요. 그러다보니 교수방법을 혁신하기 위해 머리를 쓸 형편이 못되지요.

재교육의 질을 높이는것도 중요하지만 교원들자신이 교과서내용에만 매달리는 지식전수형이 아니라 탐구하고 창조하는 과학자형이 되고 자기 전공만이 아니라 린접과목에까지 전공한 완전무결형으로 준비할 때 시대를 따라가게 된다는것을 알아야 해요.

교수방법에서 진보가 이루어지자고 해도 새로운 시험방법은 꼭 나와야 해요. 제 생각엔 당신이 주변구역같은데 나가서 교원들도 그러하지만 학생들을 만나봤으면 해요. 지금은 우리 학생들의 수준도 그전과는 달라요.》

《허허.》

김광우가 느닷없이 소리내여 웃는 바람에 안해는 어리둥절했다.

《아니, 왜 웃어요?》

《그저 웃고싶어 웃는거지. 허허.》

광우는 급행렬차의 새 손님이 또 한명 늘어났다는 소리를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이튿날 광우는 시교외에 있는 어느 고급중학교를 찾아 나갔다. 거기서 한해전에 시집을 간 처조카가 수학교원을 하고있었다.

《어마! 이모부가 어떻게 여길 다 왔어요?》

깜짝 놀라며 반색의 미소를 짓는 처조카를 보며 광우는 얼굴이 환해서 웃었다.

《어떻게 오긴 어떻게 와. 머리가 좋아서 대학때 늘 최우등만 했다는 수학선생님을 찾아왔지.》

처조카는 악의없는 힐난의 눈길을 던지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음― 거짓말. 이모부가 나를 찾아왔을게 뭐예요. 학교에 일이 있어 내려왔겠지요 뭐. 이모는 잘있어요? 》

《그래, 여전하지. 랭이 심해서 속탈이 도질가봐 옆에서 걱정하지만 그 사람은 내색을 하지 않고 항상 웃으며 산다. 이제 말이다, 내가 여기 내려온건 우리 옥희선생 도움을 좀 받자는거다.》

《어마! 제가 부국장동지한테 도움을요?》 처조카는 처음에 눈이 둥그래졌다가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듯 깔깔 웃었다.

《허, 우리 옥희선생이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그럼 저기 나무그늘밑에 좀 가앉자. 네 말을 먼저 들어본 다음 너희네 교장선생님을 만나겠다.》

광우는 매미들이 극성스럽게 우는 뽀뿌라나무그늘밑에 앉아 가방에 넣어가지고온 파란 뚜껑을 한 서류철 하나를 꺼냈다.

《자, 우선 이걸 봐라.》

《무슨 서류예요? 이모부.》 처조카가 서류철을 받아들고 의아해서 물었다.

《시험문제들이다. 그걸 보고 우리 옥희선생님의 의견부터 들어보자.》 처조카는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듯 고개를 기웃거리다가 서류철을 번지기 시작했다.

광우는 그 시험문제들이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위해 김호성이네 시험연구조가 작성한 고심어린 창조물이라는것을 말하지 않았다. 아침에 광우는 시험연구조사람들을 만나 이미 완성하여 자료기지에 넘긴 시험문제중에서 매 과목별로 10문제씩 뽑아 자기에게 가져오되 수준이 제일 낮은 급과 중간급, 제일 높은 급의 문제들이 골고루 들어가게 하라는 지시를 주었던것이였다.

시험문제들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던 수학교원의 눈에는 놀라움과 경탄의 빛이 어리였다.

《이모부, 이 시험문제들은 정말 새롭고 놀라운거예요. 교과서글줄이나 졸졸 따로외운 글뒤주들은 풀어내기 힘들거예요. 창조적인 사고를 해야 답을 낼수 있어요. 실례로 이 화학문제 하나만 봐도 그렇지 않나요. 요즘 세계적인 론의거리로 되고있는 환경오염과 관련되여있는 문제거던요. 그러니 화학식에 대한 개념을 안다고 해서 이 문제의 답을 낼수 없어요.》

광우는 흡족하여 말했다.

《확실히 우리 옥희선생이 괜찮아! 그 말이 옳다.》

《이 시험문제들은 연구를 많이 해서 낸게 틀림없어요. 하나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자고 해도 중학교 전과정에 배운 내용을 다 알아야 풀수 있게 되여있거던요.》

《허허, 옥희선생 말이 옳다.》

《그런데 미안해요. 이모부, 지금 시험방법으로는 안되겠어요. 한번시험에 이 많은 문제를 어떻게 시험지 한장에 다 쓸수 있겠어요.》

《그 말도 옳다.》

처조카는 갑자기 눈살이 꼿꼿해서 광우를 쏘아보았다.

《뭐예요, 이모부! 사람을 놀리는거예요? 그 말이 옳다, 그 말이 옳다 하면서.》

광우는 만족한 기분에 소리내여 웃으며 롱조로 말했다.

《아닙니다. 최우등선생님을 놀리다니요. 나는 이제 곧 교장선생님을 만나야겠습니다.》

그리고는 정말 교장방을 찾아 들어갔다.

광우는 한나절을 처조카네 학교에서 보냈다. 이튿날은 온 하루 그곳 학교에 나가 살았다. 처조카가 담임한 중학교졸업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시험연구조에서 가지고나간 문제들을 가지고 콤퓨터시험을 쳐본것이였다.

계획에 두지 않았던 그 일때문에 이틀을 소비하다나니 광우는 일감이 밀리여 며칠동안 몹시 볶이우며 살아야 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처조카네 학교에서 별도로 쳐본 콤퓨터시험이 예상외로 결과가 좋은것이였다.

어느날 광우는 시험연구조로 건너가 장연화를 만났다. 그는 출장지들에서 긴장하게 일하고 돌아온 녀성책임교학에게 시험문제의 수준을 높일데 대한 문제를 가지고 진행한 협의회내용을 알려주고 시험연구조에서 진행하는 수정보충작업이 선을 바로 타고 나가도록 봐달라는 부탁을 했는데 어떻게 돼가는지 알아봐야 했고 그밖에 별도로 예견하는 일이 하나 있어 건너온 걸음이였다.

장연화는 그러지 않아도 일 바쁜 자기를 부국장이 시험연구조일에 끌어들였다고 불만의 말을 하면서도 맡겨진 일을 성의껏 했다. 그동안 갱신되여나온 수만개의 문제들을 한주일도 못되는 사이에 다 검토하고 의견을 준것이였다. 그가 가정을 가진 녀성의 몸으로 그 방대한 일감을 처리하자니 얼마나 긴장하게 일했을것인가! 김호성의 말을 들어보면 장연화는 집일을 중학교에 다니는 딸애한테 다 맡겨버리고 한주일동안 꼬박 콤퓨터앞에 앉아있었다고 한다. 더 놀라운것은 장연화가 연구사들의 땀과 노력이 슴배인 매 문제 하나하나에 높은 책임성과 함께 피타는 창조적사색을 기울인것이였다.

《음―》 장연화로부터 정형보고를 들으며 콤퓨터를 켜놓고 수정완성된 문제들을 장시간 확인하고난 광우는 가타부타 말없이 천정을 올려다보다가 만족의 뜻인지 불만족의 뜻인지 누구도 대중할수 없는 코소리를 흠 하고 내질렀다. 그리고나서 장연화에게로 눈길을 돌리였다.

《장동무의 세대주가 나를 욕하겠구만.》

장연화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해서 부국장을 바라보며 덤덤해있었다.

광우는 느슨한 웃음을 입가에 실었다.

《안해를 한주일이나 사무실에 붙들어놓고 들여보내지 않은 량심없는 부국장이라고 말이요.》

그제서야 장연화는 명랑해졌다.

《아유, 부국장동지두. 언제는 이 장연화가 시험연구조일에 관심이 없는것처럼 그러시더니…》

《내가 그렇게 말한건 사실이지. 세대주야 가정형이 못되고 직장에 나와 일밖에 모르는 녀자를 부인으로 두었으니 안해를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며칠 못 보는것쯤이야 참아야지. 허허… 그런데 말이요. 장동무의 딸한테는 정말 미안하게 됐소. 그러지 않아도 출장이 많은 어머니인데 이 부국장이 또 직장에 한주일이나 붙들어두었으니 말이요. 장동무도 너무했소. 아무리 일이 바쁘고 중하다 해도 한번쯤은 집에 들어가서 기름이랑 찬거리랑 마련해놓고 나왔어야지.》

부국장이 기름소리를 한것은 내용이 있는 소리였다.

그것은 김호성이 며칠전에 장연화가 중학생인 딸애와 전화하는것을 들은데 대하여 말해준것이였다.

장연화는 그날 딸애가 아버지 들어오기 전에 저녁밥을 지어야겠는데 기름이랑 다 떨어져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고 울상이 되여 하는 전화에 《얘, 어머니가 인차 들어가 기름이랑 찬거리랑 사올게 오늘은 기름병을 꺼꾸로 세워놓고있어봐라. 두숟갈은 나올게다.》하고 말했던것이였다. 그 말에 딸애는 《됐어요, 어머니. 내가 공연히 전화하는거지. 우리 어머닌 그저 일 하나밖에 모르는 그런 어머니인걸. 이제 아버지한테 혼나봐요. 공부하는 이 딸한테 집안일을 다 맡겨놓고 관심이 없다구요.》하고 엄포를 놓았다.

어머니와 딸이 전화하는 소리를 듣고 시험연구조의 입담이 건 김승호까지도 자못 걱정이 되여 《아니, 거 기름이 문제로구만요. 책임교학동지, 그러다가 보안원세대주한테 아예 쫓겨나지 않겠습니까? 빨리 들어가 기름부터 준비해놓고 나오십시오.》 하고 말하는 바람에 곁에서들 모두 웃었다고 한다.

어처구니없는 그 일을 상기시키는 바람에 장연화자신은 멋적어서 얼굴이 붉어지는데 사말사같은 소리까지 늘어놓던 부국장은 또 말없이 천정을 한동안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슨 생각엔가 잠기다가 《흠.》 하고 례의 그 아리숭한 소리를 질렀다.

장연화가 부국장의 종잡을수 없는 거동에 의아해서 물었다.

《아니, 왜 그럽니까? 부국장동지.》

광우는 그제서야 그를 보며 히죽이 웃었다.

《왜 그러는가 하면 내가 생각을 아주 잘했다는거요!》

그거야말로 부국장의 속안에 들어가보지 않고서는 누구도 해득을 할수없는 수수께끼같은 소리였다.

광우는 그 순간에 자기가 책임성이 높고 리론이 준비된 녀자를 모집국이 벌려놓은 일에 받아들인것이 참 잘된것이라고 흡족해했던것이였다. 그는 혼자 생각을 그냥 마음속 당반에 올려놓은채 장연화를 바라보며 소리내여 웃었다.

《그새 장동무가 정말 수고했소. 이제는 시험연구조가 진행하고있는 수정보충작업이 자기 궤도에 들어선것 같구만. 마음을 놓아도 되겠소. 그러니 내가 다른 일감을 하나 부탁하겠소. 이제 말이요, 책임교학동무는 드문히 여기 건너와 시험연구조의 일을 봐주면서 강연에 출연할 준비를 해야겠소.》

갑자기 무슨 강연소린가 해서 의아해하던 장연화는 새로운 대학입학원격시험체계에 대한 인식을 줄 목적으로 평양시안의 대학일군들과 위원회안의 일군들을 대상으로 진행되는 강연회에 출연해야 하겠다는 김광우의 말에 놀라 펄쩍 뛰였다.

《아니! 아니! 전 못합니다! 대학일군들과 위원회일군들앞에 제가 어떻게 나선다고 그럽니까? 모두 제 선배들인데요. 그런데다가 저야 정식 시험연구조 성원도 아닌데 제가 나서면 뭐라고들 하겠습니까. 그거야 응당 부국장동지가 나서야 할 일이지요.》

《이보오 책임교학동무, 여기에 선후배관계가 무슨 상관이요? 동문 교육정보학박사가 아니요. 다 생각이 있어 그러니 품을 들여 준비를 잘해야겠소. 일군들부터가 콤퓨터시험에 대한 인식을 바로 가지지 않으면 우리 일이 잘될수가 없소. 그래서 조직하자는 강연이니 동문 자기가 얼마나 중요한 일감을 맡아안았는지 알아야겠소.》

광우는 미리미리 연구를 잘해서 강연준비를 착실히 해야 한다고 루루이 강조를 하고나서 그가 두말 못하게 《빠질 생각은 꿈도 꾸지 마오.》 하고 꾹 눌러놓았다.

장연화는 벽창호앞에 섰다고 생각하는 모양 한숨을 폭 쉬며 이럴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아예 시험연구조일은 못하겠다고 딱 잡아뗐을걸 그랬다고 한숨같은 소리를 하다가 부국장을 빤히 건너다보았다.

《아니, 위원회에선 저더러 제 일을 하면서 시험연구조일을 도와주라고 했는데 부국장동진 이 장연화를 아예 이 일에 붙잡아둘 작정이 아닙니까?》

《허허허, 그럴수도 있지.》

그리고는 또 큰소리로 웃었다.

며칠후, 김광우가 하루를 분주하게 보내고 퇴근길에 오르려는데 전학선이 그를 찾았다.

부상의 사무실을 찾아들어갔다.

《바쁘십니까?》

《늘 그렇지. 여기 와 앉소.》

문가에 나타난 김광우에게 온화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전학선이 벽가의 긴 쏘파를 가리켰다.

《한청사에 있으면서도 만나기 힘들구만. 지석영동무한테 내려갔댔다더구만. 그 동문 잘있습데까?》 대학교단에 있으면서 아끼던 자기의 수제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말하는 전학선이였다.

《예. 무척 바쁘게 지내는것 같더구만요.》

《아까운 사람이 행정사업에 빠져서…》혼자소리로 중얼거리던 부상은 광우의 얼굴색을 일별하며 근심이 자욱해서 물었다. 《얼굴색이 좋지 않구만. 어디 편치 않은데가 있지 않소? 군대때 심한 동상을 입었던 후과가 좋지 않다더니 그게 말썽을 일으키는건 아니요?》

광우는 얼굴에 밝은 미소를 피워올리였다.

《그게 언제적 일이라구요. 좀 피곤해서 그러겠지요.》

《일없으면 좋은것이구. 그렇다고 해도 너무 무리하진 마오. 그래, 대학들에 내려가서 사람들을 만나보니 어떻소?》

그사이에 있은 광우부국장의 부지런한 행보에 대하여 어지간히 알고 묻는듯 했다.

광우는 아무런 특별한 일도 없었다는듯 태연한 미소를 지어보이였다.

《부상동지도 다 아시는가본데 제가 더 말할게 있겠습니까.》

《허허, 그건 무슨 소리요?》

《전학선부상동지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두고 열사람중 아홉명이 반대를 한다는 말을 했다더구만요.》

전학선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말고 김광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니, 그건 어디서 들은 소리요? 내가 언제 그런 소릴 했다고 그러오?》

광우는 떠오르는 웃음을 누르며 짐짓 성난 표정을 지었다.

《부상동지의 따님한테서 들었지요. 이 김광우가 열명중 아홉사람이 반대하는 일을 혼자 하겠다고 뛰여다니는 우둔한 곰이라느니 돈 끼호떼라느니 하면서 동정했다던데요.》

그제서야 전학선은 알만하다는듯 고개를 끄덕이며 얼굴에 느슨한 웃음을 실었다.

《원, 동무두! 곰소리는 뭐구 돈 끼호떼는 또 무슨 돈 끼호떼요? 열명중 아홉명이란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했구만. 허허, 우리 딸년이 제가 좋아하는 총각한테 뭐라고 한 소리가 부국장한테까지 들어간게 아니요?》

김광우는 그제서야 허허 하고 웃으며 악의없이 말했다.

《그러니 부상동지가 원격시험문제를 두고 무슨 좋지 않은 말씀을 한건 사실인게지요? 바빠하시는걸 보니.》

《바빠하기는 누가 바빠해? 동무는 이 전학선을 나라의 교육발전을 저애하는 무슨 보수분자쯤 된다고 생각하는게 아니요? 그것도 앞에서는 말 못하고 돌아앉아 뒤에서만 험담질을 하는 인간으로 말이요.》

김광우는 얼굴이 뻘개졌다.

《그런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실… 제 생각을 말하면…》

《말해보오. 뭐요?》

《부상동지가 정말로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많은 사람들의 리해를 받지 못하기때문에 안된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건 정말 신중한 문제지요. 전 옳지 않다고 봅니다. 우리 교육의 진보를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누구의 눈치를 보거나 이런저런 타산을 하지 말아야지요. 안그렇습니까?》

부상은 의외라는듯 놀라더니 고개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그렇다-》

그리고는 고개를 들어 천정에 시선을 못박았다. 늘 사색이 깃든듯 하던 그의 거뭇한 얼굴에 차츰 노여움이 살아났다.

이윽하여 그는 무겁게 입을 열었다.

《부국장동무, 나는 진중하게 하고싶은 말이 있소. 부국장동무는 얼음우에 엎드려 온몸을 얼구면서 잠복근무를 서본 사람이니 나라의 미래를 두고 누구보다도 생각이 깊을거요. 그러나 이걸 생각해야 하오. 부국장동무자신이 이자 과장해서 말한 그 〈열명중 아홉사람〉이란 교육부문에서 한생을 바쳐오는 사람들이고 나라의 교육발전에 기여도 많이 했으며 지금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 누구보다 사색을 많이 하는 지성인들이라는것을 말이요. 그런데 그들이 부국장동무를 선듯 지지해주지 않는다고 해서 락후분자나 되는듯이 말하면 되겠소?》

(옳다! 백번 옳은 말이다! ) 하고 광우는 생각했다. (그런데 속은 어째서 편안치 않은것인가? 나는 대학일군들을 만나고 나오면서도 이런 모순된 감정을 체험하지 않았는가! 결코 그 사람들을 락후분자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론리적인 말에 공감하면서도, 그들의 애국의 감정을 의심하지 않으면서도 불만을 느끼지 않았는가. 이 김광우 남들이 한창 대학에서 마음껏 과학의 세계로 나래쳐오를 날개를 자래울 때 최전연초소의 전호속에서 조국을 지켜 청춘을 바쳤다고 저 하나만이 애국자인체 하는게 아닌가? 이 전부상도 나한테 그걸 말하자는게 아닌가?)

문득 오래전 전연초소의 그 처절했던 밤이 떠오른다. 내장이 얼어드는 참기 어려운 고통을 이겨내야 했던 그밤! 정신을 잃으면 안된다는 그 하나의 단순한 생각만을 하며 어둠속을 쏘아보던 그밤!

《내 말에 의견이 있소?》

고개를 숙인채 한동안 말이 없는 김광우를 지켜보던 부상이 입을 열었다.

광우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거밋한 얼굴에는 짙은 고뇌와 함께 무척 미안해하는 표정이 살아났다.

《아닙니다.》

전학선은 그제서야 다시금 온화한 미소를 얼굴에 실었다.

《자신을 속박하라고 말해주는게 아니요. 참고로 들어두라는거요. 부국장동무가 아무렴 탈선이야 하겠소? 그래두 명심해서 나쁠거야 없지. 아마… 힘이 들거요.》

지나가는 말처럼 혼자소리로 뇌이는 부상의 마지막 한마디가 이상하게도 메아리처럼 광우의 머리속에서 인차 사라지지 않았다.

《힘이 들거요.》 이상하게도 그 순간에 리과대학 책임일군도 그 비슷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얼핏 떠올랐다.

이 전부상은 왜 새삼스럽게 그 말을 했을가? 별다른 생각없이 우연히 나간 소리인가? 아니면 내용이 있는 소리인데 까밝혀 말하기 힘든것이여서 그러는가? 언제나 모를 죽여서 말하지만 새겨보면 한마디한마디 사색이 깃든 소리를 하는 부상이였다.

김광우는 그의 생각을 알고싶었다. 한데 그의 얼굴에선 아무것도 읽을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원격시험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 아닙니까?》

《허허, 이 사람이…》 부상은 별안간 소리내여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정말 이 전학선을 금이 간 헌 바가지처럼 생각하는게 아니요? 사명을 다해서 이제는 쓸모없어진 낡은 물건짝처럼 말이요.》

광우는 아리숭한 말을 하는 부상을 의혹에 차서 바라보기만 했다. 까닭모를 불만이 속에서 자라올랐다.

부상의 얼굴에선 웃음이 사라졌다.

《이보우 광우부국장, 나도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을 지지하는 사람이요. 정보산업시대가 오고 교육부문에서도 정보화가 급속히 심화되고있는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니요. 오늘까지도 수세기를 거쳐 내려오는 낡은 시험방법에 의거할수는 없소. 지금의 서지시험방법이 여러가지 부족점을 안고있다는거야 교육부문에서 일해오는 우리들가운데서 누가 모르겠소. 중등교육부문에 남아있는 교과서를 그대로 따로외우는 암기식학습방법을 완전히 극복하고 학생들에게 응용능력을 키워주자고 해도 시험방법은 개선해야 한단 말이요.》

광우는 꼭 숨박곡질을 하는것 같은 어이없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허.》 하는 김빠진 소리가 새여나갔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리해가 안됩니다. 부상동지는 콤퓨터에 의한 새로운 시험방법이 교육발전을 위해 필요하다는것을 인정하면서도 그게 실현될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인데 저는 그게 리해가 안된단 말입니다.》

광우는 부상이 어째서 사위감을 시험연구조에서 뽑아내려고 딸에게 좋지 않은 바람을 불어넣었는가고 따지고싶은것도 꾹 참았다.

《내가 부국장동무한테 이미 말하지 않았소. 동무가 만나본 사람들이란 교육부문에서 오래동안 일해왔고 공로도 있는 사람들이며 나라의 교육발전을 위해 누구보다 사색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요. 그 사람들이라고 뭐 시험방법을 혁신해야 한다는것을 모르는것 같소? 그렇지 않소. 그 사람들이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에로 넘어가는데 선듯 손을 들기 저어하는것은 나라의 교육을 걱정하는 애국적인 감정에서 그러는거요. 그러니 그 사람들을 나쁘다고 할수는 없는거요.》

광우는 자기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하려다가 여기엔 무엇인가 모순되는것이 있으며 한생의 많은 구간을 교단에 바쳐온 이 오랜 일군이 좋은 말로 에돌고있는데는 서둘러 말하기 저어하는 보다 심각한 그 무엇인가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데다가》부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사이를 두었다가 고개를 들어 광우의 얼굴을 관찰이나 하듯이 바라보았다. 《그 사람들은 학계에서도 땅땅 굳은 관록있는 전문가들이요. 광우부국장이 그 사람들을 어떻게 리해시킨단 말이요?》

광우는 어리치운 사람처럼 한동안 멍하니 부상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서서히 의분이 끓어올랐다. 뿌연 안개속에 잠겨 아리숭하던것이 선명해지는듯 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 사업의 전진을 위해 허용되여서는 안된다! 나라의 진보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한다는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사람들의 굳어진 인식은 어쩔수 없는것이라고 여기며 나서지 않으려는 이것이야말로 지식인나름의 보신주의인가? 호인격의 사고인가?

《옳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상동지처럼 그렇게 어쩔수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남들보다 앞서나갈수 있습니까? 부상동지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이 우리 교육의 발전을 위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확신한다면 누가 어떻게 생각하든 주저하지 말아야지요. 앞장에 서서 그런 사람들을 설복해서 인식을 바로 가지도록 해야 합니다.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걱정만 하고있다면 그거야말로 사회적진보에 유해로운…》그는 격해서 목소리가 높아지려는것을 애써 누르면서도 속에 옹쳐있는 말을 끝내 쏟아놓고야말았다. 《패배주의입니다!》

우뢰소리처럼 들리는 말이였다.

부상은 부지불식간에 증기가마처럼 달아올라 그답지 않게 진중성을 잃어버리는 김광우를 묵묵히 바라보다가 패배주의라는 말에 어설픈 미소를 지었다.

《부국장동무의 그 말은 옳소. 이 부상이 용기가 부족하여 패배주의를 한다고 비판을 해도 좋소. 하지만 생활이야 어디 그렇소?》

《생활이 어쨌단 말입니까?》

《됐소, 됐소.》 전학선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 이 전학선은 어쩔수 없는 일을 하려다가 공연히 그런 사람들의 눈밖에 나기나 할가봐 나서지 않는다고 합시다. 부국장동무는 그들을 설복할수 있소?》

《그 사람들도 부상동지가 말한것처럼 나라의 교육발전을 위해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나라일이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제가 아는것이 적어 설복하지 못하면 부상동지가 나서야지요. 나라의 리익에 저촉된다는것을 알면서도 자기보신을 위해 나서지 않는다면 집이 기우는것을 보면서도 못 본척하는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허허, 동무는 모순에 빠진 소리를 하는군. 자기는 리론적으로 준비가 안돼서 리론의 대가들을 설복할 힘이 없으니 이 부상이 나서라?》

《부상동지두!》 광우는 애써 자신을 다잡았다.

《어쨌든 부상동지는 그저 좋은 사람이 되면 안됩니다. 그게 자기 보신을 위해서는 필요할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부상동지야 큰 일군이 아닙니까.》

《나도 그게 내 일이 아니라고 앉아 구경만 하겠다는건 아니요. 나서야지. 내가 말하는건 리론적으로 완벽한 사람들의 인식을 돌려세운다는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거요. 더구나… 내가 말하지 않았소. 그들은 누구보다도 나라의 교육발전을 위해 일을 많이 했고 지금도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들이라고 말이요.》

광우는 무슨 말을 더 하고싶었으나 단념하고 나왔다. 피뜩 오늘 전부상의 거동이 여느때와는 다르다는 이상한 생각이 뇌리에 떠올랐다. 부상이 분명 원격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자고 자기를 일부러 만나자고 한것 같은데 그것도 새삼스러운것이지만 왜서인지 무엇인가 내놓고말하지 않는것이 있는것 같이 보이였다. 그것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줄곧 부상의 얼굴에 나타나있었다.

광우는 어제 위대한 수령님들께서 교육부문에 주신 유훈관철정형을 중간총화하는 일군회의를 진행한 뒤끝에 위원회 당비서가 원격시험문제를 놓고 전학선부상을 별도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것을 알수없었다.

그때 당비서는 원격시험에 대한 전학선부상의 견해를 듣고나서 《원격시험이 모집국에서 하는 일이라고 해서 부상동무가 남의 일처럼 생각하지야 않겠지요. 또 그것이 나라의 중등교육에 관여하는 부상동무에게 남의 일이 될수도 없는것이구요. 어련하겠지만 그 사람들의 일을 잘 도와주십시오.》하고 말했던것이였다.

전부상방에서 나와 무거운 마음으로 복도를 걸어가던 김광우는 서류묶음을 들고 마주오는 몸이 부한 녀자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부국장동지.》

그 녀자가 별로 생글생글 웃으며 먼저 인사를 했다. 정보화국의 정성금책임부원이다.

《부국장동지의 차바퀴가 요즘 빵크날 지경이라더구만요.》

김광우는 얼떠름해서 그 녀자를 건너다보았다.

《그건 무슨 소리요? 정동무.》

《나야 정보화국사람이 아니나요. 정보가 빠르답니다. 광우부국장동지가 자기의 〈급행렬차〉에 태울 손님모집을 다닌다더구만요.》

위원회안에서 요 며칠사이에 있은 김광우의 부지런한 행보를 두고 본인모르게 돌아가는 말들이 있는 모양이였다.

《과연 정보가 빠르기도 하구만.》 그러던 김광우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무작정 책임부원의 팔을 덥석 잡았다. 《나 좀 봅시다.》 하며 그를 한쪽으로 잡아끌었다.

《아유나! 남들이 보면 련애를 하는줄로 알겠어요.》

김광우는 그러거나말거나 개의치 않고 그를 자기 방으로 끌고들어가서야 놓아주며 빙그레 웃었다.

《내 그러지 않아도 성금동무를 만나려던 참이였소.》

《아니, 저야 같은 부서도 아닌 정보화국사람인데 부국장동지가 만나야 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정보화국사람이니까 만나자는것이지. 정성금이 콤퓨터에선 위원회적으로 인정받는 실력자인데다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이 교육발전을 추동하게 될거라고 말했다는것도 아오.》

《누가 그래요? 부국장동지, 이 정성금이한테 비밀정보원이라도 붙여놓은게 아니예요?》

김광우는 껄껄 웃었다.

《그럴수도 있지. 허허, 그럴수도 있소.》

《오, 알만해요. 장연화책임교학이 부국장동지한테 뭐라고 한게구만요. 미주알고주알.》

《지레 넘겨짚는걸 보니 동무네 두 녀자가 마주앉아 이 김광우 뒤소리를 어지간히 한게로구만.》

《했지요 뭐.》 정성금은 그러고나서 깔깔 웃었다.

그것은 장연화책임교학이 시험연구조의 일에 관여하기 전에 있은 일이였다.

어느날 정성금은 위원회에 책임교학으로 온지 얼마 안되는 장연화와 나라의 교육발전문제를 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콤퓨터에 의한 대학입학원격시험문제를 놓고 서로 자기들의 견해를 나누었다.

《교육에서 똑똑한 인재들을 키워내자면 그건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예요. 그런데 누구보다먼저 리해하고 앞장에 서서 내밀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왜 리해하려고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새로운 시험방법이 연구되여야 한다고 저마다 말들은 하면서도 말이예요.》 하고 장연화가 말했었다.

그때 정성금은 콤퓨터시험문제를 놓고 자기들 두사람의 생각이 일치하다는것을 알았던것이였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후 얼마 안되여 장연화가 시험연구조에 동원된것이였다.

정성금이 그 일을 념두에 두고 웃으며 말했다.

《부국장동진 참 엉큼하구만요.》

《그건 무슨 소리요?》

《장연화책임교학이 교육문제에 대한 연구를 많이 했고 콤퓨터시험을 지지하는 립장이라는걸 용케 알고 자기네 렬차에 태웠으니까요.》

광우는 그제서야 얼굴에 웃음을 그리였다.

《어찌 그 동무뿐이겠소. 책임부원도 태우고 온 나라 사람들을 다 태우자는거요. 이제 두고보오.》

정성금이 《아유나! 그건 초인류적인 렬차가 아니예요?》하며 깔깔 웃을 때 김광우는 갑자기 한숨을 내불었다.

《이보우 성금동무, 이 김광우 요즘 고민이 많소. 당의 신임은 큰데 중임을 감당하지 못할가봐 앉으나서나 걱정이란 말이요. 밤에 자다가도 그 걱정때문에 깨여나군 하지. 그런데 동무야 정보기술분야에선 박식가가 아니요. 그러니 지금 우리가 하자는 일로 말하면야 실은 성금동무같은 사람들이 응당 앞에 나서야지. 안그렇소?》

정성금은 그 말에 어지간히 감동되였다.

정성금은 고개를 숙이고 한동안 말이 없었는데 얼굴에는 심각한 빛이 어려있었다. 이윽하여 그 녀자는 얼굴을 들며 생긋이 웃었다.

《그러니 이 정성금이도 부국장동지네 렬차에 오르라는 말씀이시군요.》

《내가 말하지 않았소. 누구나 다 올라야 할 급행렬차라고.》

《유선일동무를 만나보세요. 원격시험에로 넘어가자면 망기반을 구축하고 운영해야겠는데 그러자면 그 동무가 꼭 있어야 합니다.》

《원, 아무렴 그 콤퓨터귀신을 내가 놓칠가. 교육정보고속도로개척자를 말이요. 그러니 정동문 벌써 생각을 많이 해두었구만!》

김광우는 얼굴이 환해졌다.

아래층에 있는 식당에 내려가 저녁식사를 하고 올라와 모여앉아 잠시 이야기판을 펴는것은 시험연구조의 고정된 일과처럼 되여버렸다.

인간은 생활의 바다에 몸을 담그고사는 존재여서 갈망하는것도 많고 자기가 생각하는것 그리고 자기가 알고있는 하찮은 정보까지도 친구들과 공유하고싶은 심리가 드문히 작용하기마련이지만 대체로 마음껏 웃고 떠들수 있는 이 시간은 온 하루 콤퓨터앞에 앉아 긴장하게 일하는 시험연구조성원들에게 있어서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였다.

그런데 요즘에 와서 누군가 좀 과장하여 《한담회》라고 명명해놓은 이 저녁시간의 주제가 좀 달라졌다. 한것은 대학의 강좌나 연구실들에 적을 두고있으면서 위원회에 올라와 전국적인 원격시험을 위한 프로그람개발전투를 벌려오는 연구조성원들에게 자기들의 전망문제를 놓고 결심채택을 해야 하는 정황이 조성된것과 관련되는것이였다.

지금까지 림시로 조직되여 운영해오는 시험연구조대신에 위원회적인 조치로 시험정보과가 나오게 되는것이였다. 그러니 저녁시간의 《한담회》는 자연히 시험정보과에 그냥 남아있겠는가 아니면 자기 강좌나 연구실로 돌아가겠는가 하는데로 화제가 흐르기마련이였다.

《우영심선생은 어떻게 하겠소? 강좌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소?》 저녁식사를 하고 먼저 작업실로 올라와앉아있던 남자들속에서 김승호가 뒤늦게 들어서는 그 녀자를 보고 히죽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30대 중엽의 한창나이에 유별나게 이마가 벗어진것이 동료들속에서 안해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결과라는 유모아의 대상이 되고있는 김승호는 그자신이 웃기는 소리 잘하는 기지있는 이야기군이다.

우영심은 잘못하다가는 또 그의 《그물》에 걸려들어 입심사나운 남자들의 웃음거리가 될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 모양 《승호선생일이나 생각하세요.》하고 한마디 하며 텔레비죤앞에 가앉았다. 그 바람에 김승호는 좀 멋적게 되였다.

사실 우영심은 그러지 않아도 요즘 저녁시간의 《한담회》에 끼여들 형편이 못되였다. 저녁식사후에는 텔레비죤앞에 잠간 앉아 보도나 듣고는 인차 자기 방으로 건너가군 했다.《사랑과다증》에 걸린 남편때문이아니라도 요즘 머리 쓸 일이 많은 우영심이였다. 그는 남편한테 맡기고 올라온 소학교에 다니는 딸애의 일에 어머니로서 관심을 돌리지 않을수 없는 처지여서 그때문에 내가 시험정보과에 떨어지면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 부담거리나 될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없지 않은 때에 일에서 속도가 굼뜨다고 김호성조장한테서 매일과 같이 말을 듣는것이였다.

《사실이야 승호동무의 일이 더 바쁘지. 시험정보과에 떨어지면.》 평시에 말수더구가 적으면서도 어쩌다 한마디 끼여들면 엉큼한 소리를 곧잘하는 최광남이 시물시물 웃으며 하는 그 말은 김승호의 때이르게 벗어진 이마를 념두에 둔 유모아가 분명했다.

김승호는 옆에서 동무들이 저를 두고 슬금슬금 웃고있는줄은 알지도못하는 사람처럼 별로 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긴 요즘 생각이 많아. 이렇게 붙잡혀있으면 박사론문은 언제 쓰겠어?》

《그건 잘못된 생각이요. 박사도 돼야지. 그런데 시험정보과에 발을 붙이고 여기서 박사론문을 쓰란 말이요. 안 그런가? 동무들.》 시험연구조의 년장자인 량원일이 점잖게 하는 말이였다.

이런 때엔 사랑의 곡절을 한차례 겪고난 라영국이 《료리대》에 올라 얼굴이 뻘개있을것인데 어째서인지 오늘 저녁은 누구도 그를 건드리지 않았다.

량원일이 던진 한마디 말에 각이한 반응이 일어나고있을 때 무슨 전화를 하느라고 자기 방에 들어가있던 김호성조장이 문가에 나타났다.

왜서인지 그의 얼굴색이 밝지 못했다. 그런데다가 이 방안에서 벌어지는 화제가 그의 신경을 자극한듯 했다.

《이러니 우리 일이 잘될게 뭐요?! 우영심동무 보란 말이요. 량선생의 채점봉사프로그람은 동무가 맡은 외국어문제작성이 늦어지기때문에 이제 겨우 50프로계선이요. 이 속도로 나가면 동무가 맡은 외국어과목문제자료기지구축을 어느 세월에 끝내겠소?》

텔레비죤앞에 앉아있던 우영심이 세월소리에 대뜸 성을 냈다.

《아니, 이 우영심이보군 왜 자꾸 그래요? 제가 맡은 영어과목은 제가 책임질테니 걱정마십시오.》

《아무때건 내놓기만 하면 책임을 다하는거요? 다음해 시험이 눈앞이요. 발등에 불이 떨어졌는데 어디 한담판에 끼울 형편이 됐소?》

우영심이 텔레비죤앞에서 일어나 찬기운을 풍기며 자기 방으로 씽 건너가버렸다.

그바람에 방안의 공기가 썰렁해졌다. 남자들 대다수가 우영심이 당치않은 비판을 받았다고 동정하며 조장을 나무라는 눈치였다.

그것을 느낀듯 김호성이 뭐라고 화가 나서 중얼거리며 다시 자기 방으로 가버렸다.

김승호가 옆에 있는 최광남의 옆구리를 툭 치며 조장이 사라져버린 나들문쪽을 눈짓했다. 저 사람 오늘 왜 저래? 하는 표정이였다.

최광남은 대답대신 흥 하고 언짢은 코소리를 내질렀다.

《그만들 하오. 책임자야 우리 일이 늦어져서 위원회적인 계획이 튈가봐 걱정되여 그렇게 말할수 있는거지 뭘. 누구든지 책임자가 돼보오.》량원일이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무슨 일이 있는지 스적스적 방에서 나갔다.

《하긴 그렇다더군. 누가 그러는데 일단 책임자가 되니까 데리고있는 대원들은 다 건달을 부리는것처럼 생각되더래. 우리 조장선생도 아마 그런 모양이지?》

량원일의 뒤에서 김승호가 악의없이 한마디 했다. 좋은 분위기를 되살리자고 해보는 소리였다.

아닌게아니라 흐하 하고 웃음파도가 일어났다.

량원일은 곧장 조장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김호성은 콤퓨터를 마주하고앉아 특별히 하는일없이 덤덤해서 창문너머를 내다보고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소? 조장동무.》

《…》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하는것 같아 그러는거요.》

《내 기분이 어쨌다는겁니까?》

퉁명스러운 조장의 말에 량원일은 화를 냈다.

《그렇다면 이자 그건 뭐요?》

《내가 어쨌다는겁니까?》

《그러지 마오, 조장동무. 자기 사람들을 뭘로 아는거요? 동문 사람들을 모욕했단 말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책임자란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되겠소? 온 하루 콤퓨터앞에 앉아 긴장하게 정신로동을 하던 동무들이 저녁시간에 잠간 모여앉아 머리휴식을 좀 하는 그 귀중한 분위기를 조장이 몽둥이를 마구 휘둘러 깨버렸소.》

《…》

《우리 사람들가운데 뭐 건달군이라도 있소? 조장동문 우영심동무가 속도를 내지 못한다고 가슴에 맺히는 말을 했는데 그런게 아니요. 어떻게 하면 훌륭한 창조물을 내놓겠는가 사색도 많이 하고 밤을 패가면서 일한단 말이요. 그 동무라고 마음써야 할 일이 없겠소? 아이어머니가 아니요.

동무들이 시험정보과에 떨어지는것을 두고 마음쓰는것도 그렇소. 누군들 자기 발전문제를 놓고 생각하지 않겠소? 더우기 우리 동무들은 모두 젊고 자기 전공과목에선 한다하는 수재들이요. 그 사람들이라고 명예가 귀중하지 않겠소? 하지만 나라의 진보에 하나의 고임돌이 되고저 군말없이 새로운 시험체계를 완성하기 위해 정력을 쏟아붓고있단 말이요. 그런데 조장동무가 그러니 섭섭하구만.》

고개를 짓수굿하고있던 김호성이 머리를 들어 원망과 고뇌가 깃든 이상한 눈으로 량원일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한순간이였다. 그는 다시 머리를 떨구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그의 입에서 한숨섞인 소리가 흘러나왔다.

량원일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성격이 소탈하여 사람들과 관계가 좋고 무슨 일에서나 적극적인 김호성에게서 이런 일은 처음이였다.

조장한테서 억울한 비판을 받았다고 우영심이 잔뜩 의견이 있어하는 바람에 집단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던 바로 그날 저녁에 있은 일이였다.

김호성이 동무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올라와 자기 방에서 문건 하나를 만들고있는데 딸애한테서 전화가 왔다.

《아버지, 집에 언제 오나요?》

김호성은 집에 내려갔다온지도 두달이 되여오니까 어린것이 아버지가 보고싶어 그러는줄 알고 웃으며 말했다.

《우리 금선이 아버지가 막 보고싶지? 하하, 이 아버지도 금선이 보고싶어 죽을지경인걸.》

《…》

《공부 잘하니? 선생님말씀이랑 할머니말씀이랑 잘 듣구?》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여느때같으면 해해거리며 뭐라고 잘도 조잘댔을 딸애인데 왜서인지 말이 없었다.

딸애는 한참만에야 말했다.

《아버지, 집에 빨리 와!》

김호성은 갑자기 가슴이 짜릿해왔다. 어머니 없이 자라는 애가 아닌가! 이 아버지의 사랑이 오죽 그리웠으면 그러랴싶었다.

《얘 금선아, 이 아버지가 말해주지 않았니. 아버진 우리 나라를 더욱 빛내일 중요한 일을 하느라고 금선이 보고싶어도 집에 자주 내려갈수 없는거라고 말이다. 너도 이제 한살 더 먹으면 중학생이 되겠는데 이 아버지를 리해하렴.》

《…》

얘가 성이 났구나! 눈앞에선 원망이 가득 실린 딸애의 까칠한 얼굴이 얼른거리였다.

《얘 금선아, 성났니?》

《…》

김호성은 마음이 약해지는 자기를 느꼈다.

《이 아버진 정말 바쁘다. 일감은 산같은데 시간은 없구나! 네가 리해 못하겠니? 정 그러면 한번 내려가자꾸나. 그러면 되겠니?》

그래도 기척이 없다. 차츰차츰 속에서 언짢은 감정이 끓어올랐다.

갑자기 딸애의 목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외할머니가… 외할머니가!…》그리고는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김호성은 와뜰 놀라며 부르짖었다.

《야, 외할머니가 어떻게 됐다는거냐?》

《됐어 아버지, 내려오지 마!》

딸애는 아예 전화를 끊어버렸다.

아무리 찾아도 전화는 다시 이어지지 않았다.

속에서는 불이 일었다. 철없는 딸애를 속으로 안타깨비라고 아무리 욕을 해야 소용이 없었다. 딸애는 다시 전화를 걸지 않을것이다. 이런 속상한 일이 어디 또 있을가! 가시어머니가 어떻게 됐다는것인가? 심장발작이라도 일어난게 아닐가? …

그렇다. 그날 저녁 그런 일이 있었다.

김호성은 긴장하게 일하는 동무들 보기가 미안했지만 시간을 내였다.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내려가봐야지.》

부국장은 선선히 승인했다. 무슨 일때문인지는 구태여 묻지 않았다. 시험연구조일이 바쁜데 오래 지체하지 말아야겠다는 말만 한마디 했다.

(도대체 가시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가?)

뻐스를 타고 집으로 내려가는 김호성은 머리속에서 그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는 초조하고 착잡한 심리에 빠져들었다. 심하게 앓고있는것이나 아닌지? 아니면… 혹시… 점점 불안한 생각들이 떠오르고 거기에 시험연구조일까지 겹쳐들면서 머리가 터져나갈 지경이였다. 한창 바쁜 모퉁이에 이게 뭔가!

그러나저러나간에 가시어머니의 일이 제일 걱정되였다.

심장병이 있어 한뉘를 고생하는 로인이 아닌가.

김호성은 일이 바빠 늘 나가 생활하다싶이하면서 가시어머니의 일때문에 마음이 편안치 않았다.

호성은 몇해전에 뜻밖의 일로 사랑하는 안해를 잃었다. 부부가 금슬이 좋아 함께 살아오면서도 두사람은 서로 얼굴 한번 붉힌적이 없었다. 그런데다가 안해 강수련은 다감하고 마음이 비단결처럼 고왔으며 의협심을 천성으로 타고난 녀자였다. 동네에서 그 녀자를 칭찬하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사람이 한생을 살아가느라면 좋은 일도 있는 반면에 가슴아픈 일도 당하기마련이지만 김호성에게 있어서 안해의 죽음은 참기 어려운것이였다.

그때 김호성은 처음부터 촌에 있는 늙은 가시아버지와 가시어머니를 모셔다 함께 살고있었다. 늙은 량주를 잘 모시자니 모자라는것이 더러있었다. 안해는 드문히 고맙다는 소리, 미안하다는 소리를 했는데 그럴 때면 김호성이 정말로 성을 냈다.

《여보, 그런 소리 하지 마오. 당신 아버님은 전쟁때 락동강계선까지 나갔다왔고 월비산전투에 참가하여 한쪽다리를 상한 영예군인로병이요. 설사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가 아니라고 해도 우린 잘 모셔야 하오. 그들은 자기들의 피를 바쳐 우리 세대에게 오늘을 넘겨준 혁명선배들이란 말이요. 그리고 말이요, 사람은 정이 없어 못사는것이지 물건이나 쌀이 바르다고 못사는게 아니요. 난 당신 아버님이나 어머님을 내친아버지, 친어머니가 아니라고 언제한번 생각해본적이 없소.》

안해는 그 말이 고마와 눈물을 흘리였다.

어느해 곡식이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이였다. 안해는 먼 촌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고있었다.

등에 진 배낭속에는 친척집에서 꾸려준 말린 고추며 올감자며 완두콩이며 하는 농토산물이 들어있었다.

안해는 먼데서부터 타고오던 자동차가 집이 있는 도시근방에 이르러 다른 방향으로 가는 바람에 내려서 걷기 시작했다. 땡볕에 땀을 흘리며 한참 걸어가다나니 고개 하나를 두고 물을 마시고싶어졌다.

그래서 밭가운데 외따로 떨어져있는 인가를 찾아들어갔다. 복슬강아지 한마리가 낯선 사람이 나타났다고 영악스럽게 짖어대는데 어찌된 일인지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안해가 주인이 있는가고 몇번을 찾아서야 울타리너머 어딘가에서 《들어오세요.》하는 녀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리였다. 인차 집모퉁이쪽에서 푸성귀를 담은 비닐소랭이를 든 중년녀인이 나타났다.

친절하고 상냥하기 이를데없는 녀주인은 길을 가다가 갈증이 나서 찾아들어온 손님이 먼길에 지친 몸으로 고개를 걸어서 넘어가야 한다는것을 알고 동정이 갔던 모양이였다. 물 한그릇 떠주고는 해가늠을 해보더니 쉬여가라면서 방안으로 이끌었다.

그러지 않아도 배낭까지 지고 걸어오느라 힘들었던 안해는 고마와하며 따라들어갔다. 주인집녀인은 《자동차를 타고 200리도 넘게 왔다니 점심을 못했겠구만요.》 했는데 안해는 아닌게아니라 점심을 굶은 상태였다. 그래서 생각없이 《집에 가서 먹지요 뭐.》하고 말했다.

주인집녀인은 부엌으로 내려가 떨거덕거리더니 완두콩이 섞인 잡곡밥 한그릇에 김치종지며 빨갛게 고추물이 오른 무우장절임을 곁들여서 들여왔다.

그 바람에 안해는 바빠맞아 그러지 말라며 급히 일어나려고 했다.

집주인은 시장하겠는데 변변치 않은 잡곡밥이라도 한술 들고가라고 굳이 붙들었다.

집주인은 그러고나서 《손님대접할게 이것밖에 없구만요.》 하며 몹시 미안해했다.

정앞에서 무른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주인녀자의 그 말이 오히려 안해를 감동시켰다.

그 집의 방안이며 부엌이며를 둘러보니 살림은 그닥 넉넉치 못한것 같은데 인정은 넘쳐나는 집이였다.

알고보니 주인녀자 역시 돌격대출신이였다. 산후탈로 몇해째 직장에도 못 나가며 고생하는 녀자였다.

녀인은 남편이 철길순회원이라고 했다.

《철도는 나라의 동맥이라고 하지 않나요. 철길이 안전해야 기차가 무사고운행하여 짐을 많이 실어나를게 아니예요. 안해라는게 제구실을 못하다보니 어떤 날엔 점심밥곽에 변변한 반찬을 싸주지 못해 미안한 때가 있답니다. 그런 날엔 남편을 내보내고 혼자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요 뭐. 호호.》

남편이 하는 일을 긍지로 여기는 소박하고 마음이 깨끗한 녀자였다.

안해는 그 녀자의 말이 리해되였다. 《아주머니, 지금은 좀 힘들더라도 견디여내자요. 이제 잘살게 될 때가 꼭 와요.》하고 웃으며 말해주었다.

그날 안해는 먼길에 지고오던, 도시에서는 귀한 농토산물들을 죄다 그 집에 꺼내놓고 저녁늦어서야 집에 들어섰다.

안해는 친척집에 갔다오면서 빈 배낭만을 들고온 사연을 말했다.

안해는 집안사람들 보기 미안해하며 그 말을 했지만 김호성은 그것이 조금도 서운하지 않았다.

《그게 강수련이지! 배낭을 그대로 지고왔다면 강수련이 아니지!》

그때부터 안해는 그 집의 인정에 끌려 드문히 고개를 넘나들었다.

안해의 마음속에서는 철길순회원 남편이 일을 잘해야 기차가 무사고운행으로 많은 짐을 실어나를게 아니예요 하던 녀인의 목소리가 울리였다.

안해는 나라의 철길을 지키는 남편을 위해 앓는 몸으로 마음을 쓰는 녀인을 위해 집에 무엇이 조금 생기면 그 집에 들고가군 했는데 그날도 그런 일로 고개를 넘어갔다오고있었다.

지금도 김호성의 가슴속에는 그날의 괴로운 추억이 영원히 아물지 않을 아픈 상처로 남아있다.

우뢰울고 번개치며 광풍이 몰아치던 늦은 저녁이였다. 멀리서 꾸르릉거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일없겠지 하고 집을 나섰던 안해는 철길순회원네 집에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쏟아져내리는 폭우를 만났다.

고개를 넘어가는 소로길은 탕수가 흘러내리는 도랑처럼 되였다. 그 《도랑》옆에서 구새먹은 뽀뿌라나무 한대가 강풍에 넘어지면서 안해를 내리쳤다.…

딸없는 사위에게 얹혀살게 된 늙은 내외는 집에서 나가려고했다.

그것은 김호성을 위하는 마음에서였다. 젊은 나이에 안해를 잃은 사위이니 어차피 재취를 해야 할것인데 자기네가 있으면 딱해지리라고 생각했을것이였다.

가시아버지와 가시어머니는 그렇게 생각할수 있는 일이지만 김호성은 그럴수 없었다.

《안해가 없다고 해서 아버님과 어머님이 이 집에서 나가면 먼저 간 금선이 어머니가 뭐라고 하겠습니까! 아니, 그건 인간세상의 법도가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게는 못합니다.》

호성은 안해가 세상을 떠난 다음에도 두 늙은이를 자기를 낳아준 친부모이상으로 모시였다.

가정의 화목은 그전과 조금도 다름없었다.

가시아버지는 전쟁에 나가 기관총이 울부짖는 적참호에 주저없이 뛰여들어 총창으로 놈들을 찔러넘기고 그자신도 복부에 총상을 입은 용감한 전투원이였지만 천성이 조용하고 인정이 많은 로인이였다. 그 가시아버지가 드문히 《젊은 나이에 외롭게 살지 말게. 재취를 한다고 그게 륜리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고 남들이 뭐라고 하지 않아. 우리 생각말구 좋은 사람 골라 금선이 새 어머니를 들여오라구.》 했지만 김호성은 그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 세상떠난 사람에게 죄되는 일처럼 생각되기때문이였다. 그만큼 김호성은 안해를 사랑했다.

다시 몇해가 흘렀을 때 그렇게 고박하고 사람좋던 가시아버지가 로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가시아버지는 숨을 거두면서 사위에게 말했다.

《이 사람, 저 로친이 변변치 못한 이 령감을 만나 한뉘 고생이 많았네. 좋은 로친인데… 심장때문에…》

한생을 심장때문에 고생해오는 늙은 로친을 딸없는 사위네 집에 홀로 남겨두고 먼저 가는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였다.

김호성은 집에 있는 날보다 나가 사는 날이 더 많았다. 위원회에 올라와 전국적인 대학입학원격시험을 위한 《미래》프로그람개발조를 책임지면서부터는 더했다. 거의 집에 붙어있을새가 없었다.

결국 집안일은 가시어머니에게 다 떠맡긴셈이였다.

가시어머니는 집일을 하면서 딸이 남겨놓고간 손녀의 뒤바라지도 해야 했다. 제 어머니를 일찍 잃다보니 어려서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라온 딸애였다.

그 애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머니를 도와 웬만한 잔심부름같은건 해준다고 하지만 그래도 김호성은 심장때문에 고생하는 가시어머니에게 자기의 성의가 부족하여 고생만 시키는것 같아 먼저 간 안해와 가시아버지앞에 늘 죄스러운 심정이였다.

이 김호성에게 요즘 은근히 마음쓸 일이 하나 생기였다.

안해가 돌격대소대장을 할적에 대원으로 있던 강수영이란 녀자한테서 이상한 편지가 온것이였다.

안해와 이름도 형제처럼 비슷한 그들 두 녀자가 돌격대에서 제대된 다음에도 전화로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우정을 두터이 하고있다는것은 김호성이도 알고있었다. 안해가 세상을 떠난지도 여러해가 지난 지금에 이르러 그 녀자에게서 그런 편지가 올줄은 김호성이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였다.

《강수련소대장동지의 자리에 제가 서고싶어요.》 라고 쓴 편지였다.

강수영은 회답을 기다리겠노라고 했다.

하지만 회답을 할수가 없었다. 뭐라고 회답한단 말인가? 동의한다고 쓰기에는 자기가 깨끗한 처녀의 희생의 대가로 행복을 누리려는 량심없는 인간처럼 생각되였고 단념하라고 하기에는 처녀의 진심에 대한 모욕으로 되는것만 같았다. 대학공부도 하고 나이도 어지간한 처녀가 결코 범박한 그 어떤 욕망에 들떠서 편지를 쓴것이 아니였다.

김호성은 자기가 회답하지 않으면 처녀가 그것이 그대로 동의하지 않는다는 회답으로 리해할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답편지를 쓰지 않았는데 그래놓고도 마음은 편안치 않았다. 처녀에게 미안한 생각이 자꾸만 드는것이였다.

결국 처녀는 일 바쁜 김호성의 심중에 무거운 짐을 하나 덧놓아준셈이였다.

김호성은 저녁느지막해서야 집에 들어섰다.

앓아누워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가시어머니는 덤덤해서 앉아있다가 집안으로 들어오는 사위를 보자 《임자 왔나?》라고 했다.

아무리 봐야 앓는 로인같지 않았다. 딸은 별로 반색하는 기색이 없이 벽에 기대여앉아있다가 아버지쪽에 한번 피끗 눈길을 돌렸을뿐이였다.

김호성은 자기도 모르게 화를 냈다.

《금선아, 넌 뭐냐?! 집에 무슨 큰일이나 생긴것처럼 오라 어쩌라하면서 그러니? 일바쁜 아버지한테.》

《피, 할머니한테 물어보라요!》 딸은 아버지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한마디 내쏘고나서 웃방으로 씽 올라가버렸다.

김호성은 아연해서 굳어져있다가 한숨을 내쉬였다. 무슨 일이 있기는 있은 모양이였다.

《어머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저녁식사를 엉성한 분위기속에서 대충 치르고났을 때 김호성이 물었다.

《이 사람, 임자 요즘 이 로친때문에 마음쓰는게 있지 않나?》

김호성은 의아해서 굳어져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웃방에서 딸애의 토라진 목소리가 날아내려왔다.

《할머닌 숙천에 있는 이모네 집에 가 살겠대. 아버지가 싫대. 숙천에 가면 나까지두 데려가겠대. 그러면 엄마도 없는데 아버지 혼자…》

《이년아, 그만하지 못하겠니?》가시어머니가 웃방에 대고 소리질렀다.

그다음엔 딸애의 울음소리.

《싫어! 난 안 갈래. 아버지 혼자 두구 어디 간단 말이야? 엄마!- 엄마-야!-》

방안에는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깃들었다.

《계집애두! 언제면 커서 철이 들겠는지…》

가시어머니가 혼자소리를 하다가 긴 한숨을 그었다.

한동안 아연해있던 김호성은 속에서 부걱부걱 괴여오르는 언짢은 감정을 애써 누르며 힘들게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제가 싫어졌다는건 무슨 소리예요? 정이 식어졌다는거예요? 제가 일이 바빠 집에 자주 내려오지 못한다고 해서 그렇게 생각하는것입니까?》

《아니네. 이 사람, 이 로친이 임자만큼 아는건 없어두 개인사정보다 나라일이 더 중하다는것쯤은 아네. 하지만 임자가 젊은 나이에 이 늙은이 하나때문에 발목이 잡혀 많은걸 잃을수야 없지 않나. 내 딸이 살아있으면야 무슨 일이 있겠나. 임자가 어쩌다가 집에 내려오면 반겨맞는 안사람이 없는 집에서 이 로친이 해주는 엉성한 식사나 한두끼 하고 나서는걸 차마 못 보겠네. 내 눈치볼것 없이 금선이 새 엄마를 어서 데려오라구.》

《참, 어머니두!》 김호성은 그제서야 깨도가 되여 허거프게 웃었다.

《그래서 저 애한테 이 사위가 싫다는 말씀까지 하셨어요?》

《…》

김호성은 한숨을 그었다. 가시어머니가 야속했다. 공연한 일로 바쁜 사람 오게 하지 않았는가.

가시어머니의 입에서 애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사람 금선이 애비, 이 늙은것의 말을 들으라구. 나야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임자야 한창나이가 아닌가.》

김호성은 그러지 말자고 했다가 자기도 모르게 왈칵 성을 냈다.

《그런 말씀 마시라요!》

《…》

그는 인차 후회하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어머닌 숙천에 가시면 여기서보다 오륙이야 편할지 모르지요. 하지만 마음은 편하지 못할거예요. 그건 어머니가 이 집에 정을 두고 살았기때문이예요. 어머니가 숙천에 가시면 이 사위나 저 금선이의 마음도 편할수 없어요. 난 언제한번 어머니를 남이라고 생각해본적이 없어요. 설사 아무런 인척관계도 없는 남남사이라고 해도 그래요. 난 어머니와 헤여지지 못해요. 난 어머니가 좋아요. 어머니가 해주는 밥이 더 맛있고 어머니의 온기가 있는 이 집이 좋아요.》

《이 사람, 이 로친을 울리겠나? 임자가 나빠서 그러는게 아니라고 몇번이나 말해야겠나. 나도 금선이 애비를 남이라고 생각해본적이 없네.》

《어머니, 이 사위가 어머니를 고생 많이 시키지요?》

《임자, 그건 무슨 소린가?》

《사위라는게 늘 나가살다보니 집에서 제가 해야 하는 일도 어머니가 다 해야 하니까요. 심장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말이예요. 하지만 저도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때가 있을거예요. 그때문에 이 사위가 힘든줄 모르고 동무들과 함께 밤을 새워가며 일을 하는거예요. 난 사회에 나가서 일을 잘하는것이 어머니한테 자식된 효도를 다하는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어머니를 잘 모시는건 전쟁로병인 금선이 외할아버지가 저한테 남긴 부탁이예요. 얘 금선아, 여기 내려오려무나.》

웃방에 있던 딸애가 살며시 내려와 할머니곁에 앉았다.

《그렇지 않니? 금선아. 이 아버지의 말이 맞지?》

딸애는 그제서야 촉촉히 젖어든 눈에 웃음을 담았다.

《할머니, 가지 말아. 여기서 살자요. 난 할머니가 좋아요.》

《원, 계집애두! 이년아, 그만하지 못하겠니!》

로인은 애달픈 소리를 하며 촉촉히 젖어든 눈굽을 훔치였다.

김호성은 자기가 늙은이를 리해시켰는지 어쨌는지 알수 없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하루밤 자고 평양으로 올라왔다.

그는 콤퓨터를 마주하고 앉았으나 인차 일이 손에 걸리지 않았다. 귀전에는 함께 살자는 손녀의 말에 계집애가 그렇게도 철이 없느냐고 하던 로인의 말이 그냥 울리였다.

속이 편안치 않았다. 시험정보과가 정식으로 나오는 이번 기회에 강좌로 돌아가겠다고 다시 제기해야 하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들었다. 그러면 집에서 출근하며 로인의 건강도 돌봐드리고 딸애의 일에도 관심을 돌릴수 있을것이다.

그는 머리속에 떠오르는 어수선한 생각들에 스스로 화가 났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있단 말인가! 조장이란 사람이 이런 한심한 생각을 하고있는줄 알면 동무들이 뭐라고 하겠는가?

나들문이 열리며 《뭘하오?》 하는 부국장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리였다.

부국장이 언제나와 같이 서글서글한 인상을 하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집에서는 다 잘있소? 로인은 건강이 어떻소?》

김호성이 집을 떠나있으면서 가시어머니의 심장병때문에 늘 걱정한다는것을 아는 부국장이였다.

《뭐 일없는것 같습니다. 일 긴장한 때 제가 공연히…》

《일없는것 같다는건 무슨 소리요?》

부국장은 이상한 느낌이 드는 모양 김호성의 그닥 밝지 못한 얼굴색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늙은이들이란 어린아이처럼 늘 관심을 돌려주지 않으면 안되오. 더구나 심장때문에 고생하는 로인이 아니요. 앞으로는 일이 아무리 바빠도 자주 내려가봐야겠소. 그리고…》 부국장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미안해하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이었다.《새 안해를 데려오오. 상급으로서 하는 말이 아니요. 가정이 편안해야 일도 더 많이 하게 되는것이지만 그보다도 한창시절을 외롭게 보낼수야 없지 않소. 그것도 역시 랑비요. 생활을 랑비하는것이지.》

《…》

《어디 봐둔 좋은 녀자가 없소?》

《됐습니다.》 김호성이 쓸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뇌이였다.

김광우는 가슴이 아리였다. 그는 자기가 상처한 젊은 사람의 아픈 곳을 다쳐놓았다고 후회하고있었다.

김호성이 흔연히 말머리를 돌리였다.

《어떻게 건너오셨습니까?》

《어디 맘편히 사무실에나 박혀있을수가 있소? 동무네가 하는 일이 제일 중요하기도 하지만 기일때문에 도무지 마음을 놓을수가 없소. 다음해에 시험단계를 거쳐 전국적인 대학입학시험을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으로 진행하자면 기일이 많은게 아니지 않소. 솔직히 말해보오. 조장선생은 이 부국장이란 사람이 주관적인 욕망만 앞세우면서 기일을 너무 앞당겨 잡았다는 생각은 없소? 한 이태쯤 기일을 더 늦추어서 준비를 착실히 해가지고 원격시험에 들어갈걸 그러지 않았는가 말이요.》

김호성은 《예에?!》 하고 신경질적인 소리를 내질렀다.

《부국장동진 우리 동무들을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이 일을 벌렸습니까?》

갑자기 푸르딩딩해지는 김호성의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며 광우는 허허 하고 어울리지 않게 웃었다.

《아니, 이 부국장이 동무들을 믿지 못한다는건 무슨 소리요?》

《그럼 뭡니까? 부국장동진 나라의 진보를 위하는 일은 한시도 미루어서는 안되며 우리 시험연구조가 조국의 꿈을 싣고 미래에로 질주하는 급행렬차가 되여야 한다고 하지 않았단 말입니까. 그런데 이제와서 이태쯤 늦잡았을걸 하고 말씀하시니 말입니다. 그거야 우리 사람들을 믿지 못해서 하시는 말씀이 아니면 뭐란 말입니까.》

《내가 동무들을 뭘 믿지 못한다고 자꾸 그러오? 동무두 참!》

광우는 자기도 모르게 야릇한 한숨을 내쉬였다. 광우는 그 시각 새로운 시험체계로 넘어가는 문제를 두고 우려하던 대학일군들의 모습을 눈앞에 떠올린것이였다. 하지만 광우는 속에 연추처럼 무겁게 매달려 사라지지 않는 불안을 김호성에게 내놓고 말해줄수 없었다.

그런데 김호성은 《동무두 참!》하던 부국장의 애달픈 어조에서 그리고 까닭모를 한숨에서 무엇인가를 느낀 모양 동정의 빛을 두눈에 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부국장동지. 다음해 입학시험철전으로 죽으나사나 해내겠습니다. 지금 좀 지체되는거야 위원회에서 생각지 않던 시험문제자료기지를 혁신할데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바람에 그렇게 된것이지요. 장연화책임교학이 자주 건너와 봐주면서 좀 편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매 과목당 수만문제나 되는 자료기지를 다 들추면서 이미 작성한 프로그람을 갱신해야 하는 일이 어디 간단합니까? 사실 초인간적인 정력을 쏟아붓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시험문제의 수준을 전반적으로 높이는 수정작업이 제기되였을 때 더러 의견들은 있었지만 우리 동무들중 누구도 기일을 늦추었으면 하는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부국장은 잠시 말이 없다가 조용히 뇌이였다.

《초인간적인 정력이라…》

《부국장동지, 제가…》

《아니 아니, 동무 말이 옳소. 동무들이 정말 수고를 하지. 하지만 동무의 이자 그 표현을 빌면 정말이지 〈죽으나사나〉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아니겠소. 진보에로 가는 급행렬차가 늦어지면 안되지.》

부국장은 여기서 말을 끊고 무슨 생각엔가 잠기였다. 어쩐지 그의 얼굴에 한순간 침울한 기색이 어리는듯 했다.

부국장이 그 시각에 《차를 놓치면 안돼요!》하던 아득한 추억의 언덕너머에서 울려오는 애절한 목소리를, 눈보라 사나운 령길의 그밤을 생각했다는것을 김호성은 알수 없었다.

한순간이 지나자 부국장은 다시 거뭇한 얼굴에 례의 그 온화한 미소를 그리였다.

두사람은 프로그람 《미래》를 하루빨리 완성하는데서 나서는 문제를 놓고 장시간 토론을 했다.

마지막으로 부국장은 연구조성원들의 생활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다가 라영국의 애인되는 처녀가 지금도 계속 찾아오는가고 물었다.

김호성은 이상한 눈으로 부국장을 바라보았다. 몇달째 원격시험 하나밖에 모르는 이 부국장이 젊은 사람들의 련애에 별스레 관심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국장이 라영국이네 일을 놓고 마음쓴다는것을 내놓고 표현한것은 사실 이번이 처음이 아니였다. 혹시 두사람의 련애때문에 나도 모르는 무슨 여의치 못한 일이 그사이에 있은게 아닐가? 어쨌든 라영국의 애인이 부상의 딸이고보면 부국장이 그저 무심히 물어보는게 아닐거라고 그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허허, 일은 무슨 일. 그저 물어보는것이지.》

《요즘은 그 처녀가 자주 찾아오지 않는것 같습니다. 영국동무가 두어번 일이 있다면서 외출은 했는데… 뭐 처녀를 만났는지 어쨌는지 알겠습니까?》

《책임자라는 사람이 참 한심도 하오. 이제부터는 일만 일이라고 내몰기만 하지 말고 아래사람들의 생활에도 관심을 두오. 특히 그 라영국동무말이요. 처녀 만나러 갈 시간도 주오. 그것도 사람과의 사업이란 말이요. 아니, 왜 웃소?》

《어떻게 된겁니까?》

《어떻게 된거라는건?》

《부국장동지가 라영국동무네 일에 별스레 극성이시니 이상해서요.》

《이상할것도 있겠다. 그것도 사람과의 사업이라고 내 말하지 않던가? 말하자면 일을 위해서란 말이요.》

부국장은 허허 하고 제멋에 겨워 웃었다. 김호성은 머리를 기웃거려봤지만 부국장의 본심이 무엇인지 도무지 알수가 없었다.

이때 나들문이 열리면서 무슨 일때문인지 라영국이 들어왔다.

그 바람에 방안에 있던 두사람은 멍해있다가 약속이나 한듯이 웃었다. 과연 속담 그른데가 없구나 하고 두사람은 꼭같은 생각을 하고있었다.

《아니, 왜들 웃습니까?》

라영국이 영문을 몰라 어정쩡해서 물었다.

《어디서 뻐꾸기소리가 나서 그러오.》부국장이 의아해하는 라영국을 바라보며 껄껄거리였다.《호성조장 만나자고 그러오?》

《시험연구조 책임자를 만나야 할 일이 있다면서 지방에서 웬 녀손님이 찾아왔습니다.》

라영국이 말하기 바쁘게 열려져있는 문가에 한 녀인이 서있었다.

인생의 한창계절을 맞이한 젊고 아련하게 생긴 녀인, 옷차림은 소박하고 어딘가 모르게 촌티가 나면서도 몸가짐에서는 깊은 지성과 고요한 사색이 느껴지는 녀인이였다. 대뜸 김광우의 얼굴에서 웃음이 버그러졌다. 은률에 나갔다오는 길에 서해갑문에서 만나 차를 태워주었던 그 인상깊은 녀교원이 아닌가!

《허, 이게 누구요?!》 반가운 소리가 광우의 입에서 튀여나왔다.

방안의 주인들을 가려볼사이 없이 다소곳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던 녀교원이 그 소리에 놀라 머리를 들어 광우쪽을 바라보았다.

급기야 그 녀자의 입에서 《어마나!》 하는 소리가 튀여나왔다. 그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이였다.

《선생을 다시 만나고싶었는데 이렇게 제발로 찾아왔구만! 이런 반가울데라구야!》

광우는 그날 천리마제강련합기업소에 들어가 초고전력전기로를 봤는가? 평양에 들어와 어디어디를 가봤는가를 련거퍼 물어보다가 김호성을 돌아보았다.

《이보오 호성조장, 내가 엊그제 말하던 그 녀선생이요. 수학수재를 데리고 평양에 올라왔다는 지방분교의 녀선생을 동무들이 한번 만나봤으면 좋겠다고 내가 말했었지.》

광우는 무슨 말을 더 하려다가 눈이 둥그래지며 입을 벌린채 굳어져버리였다.

녀자손님을 이상하게 바라보며 꿈이 아닌가해서 멍해있던 김호성의 입에서 《아니, 오련희 아니야?!》하는 소리가 급기야 튀여나오는것이였다.

오련희 역시 그를 알아보고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

《어마나! 호연이 오빠!》

두사람은 인차 방안의 년장자이며 상급인 김광우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저들끼리 반갑다고 떠들어댔다.

《허허, 이건 또 무슨 일이요? 견우직녀가 오작교에서 만난건 아니요?》

어리둥절해진 김광우가 그렇게 말해서야 김호성이 그를 돌아보았다.

《견우직녀는 무슨 견우직녀입니까. 어렸을 때 제 누이동생하구 같이 오빠오빠 하며 따라다니던 고향동무입니다. 부국장동지, 제가 한창 군사복무를 할 때 이 오련희는 대학생이 되였으니 나이는 아래이지만 저보다 퍽 선배인셈입니다. 우리 부국장동지요, 련희동무.》

부국장이라는 소리에 오련희는 놀라서 눈이 둥그래졌다.

《전 그런것도 모르고… 전번에 정말 고마왔습니다. 부국장동지가 차를 태워주지 않았더라면 우린 그날 한지에서 밤을 보냈을지도 모르지요 뭐.》

《고맙기야 무얼. 그런데 련희선생이 우리 호성조장의 선배란 말이지?》

그 소리에 오련희는 얼굴을 붉히며 명랑하게 웃었다.

《아유! 호연이 오빤 중학교때 엉너리치기 잘하더니 그 성미 여전하구만요. 선배는 무슨 선배예요. 촌학교 선생인걸요. 호성동지에 비하면 까마득하게 떨어졌지요 뭐. 부국장동지, 호성동지를 통해서 아시겠는지 모르겠는데 우리 고향은 하늘아래 첫 동네입니다. 머리를 들어야 해를 봅니다. 사방 높은 산으로 둘러막혔으니까요. 호성동지가 리과대학에 갔다는 소리를 듣고 그 산골 림산동네에서 수재가 나왔다고 고향사람들모두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티없이 웃으며 말하는 그 녀인에게서는 향촌의 싱그러운 숲냄새며 찔레꽃향기같은것이 풍겨오는듯 했다.

오련희의 말에 김호성은 얼굴이 뻘개지며 싱글싱글 소리없이 웃기만 했다.

《얼마나 좋소! 고향사람들이 못 잊어하며 긍지로 여긴다면 호성동무는 참 행복한 사람이요. 그런데 련희선생이 시험연구조가 있다는건 어떻게 알고 무슨 일로 여길 찾아왔소?》

《평양에 오면서 기차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건 정말 놀라운 일이구만. 시험연구조가 있다는게 아직은 세상에 알려지지도 않았겠는데.》

《부국장동지, 제가 여기 찾아온건 사실 제자때문입니다. 전번에 부국장동지의 차를 함께 타고온 그 중학생말입니다. 여긴 실력있는 수학전문가선생들도 있겠는데 우리 금동학생을 한번 만나게 해주었으면 해서 그럽니다. 그러면 많은 도움이 될거란 말입니다.》

김광우는 대뜸 웃음집이 버그러졌다. 호박이 저절로 떨어지듯 일이 되지 않았는가.

《그렇다? 아주 좋은 일이요. 그러지 않아도 내가 동무들이 들어있는 숙소도 알아보지 않은걸 그날 차를 타고 들어오면서 얼마나 후회했는지 아오? 지향이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다시 만나는걸 가지구. 그 수재학생은 어디에 있소?》

《정문에 떨어져있습니다.》

《원, 선생두! 아예 데리고 들어올것이지. 자, 오래간만에 만났겠는데 회포를 나누오.》

김광우는 그렇게 말하고 흡족해서 자리를 떴다.

김호성은 그제서야 생글거리는 오련희의 변모된 모습을 깊은 감회속에 여겨보았다.

세월은 얼마나 흘렀는가! 노래 잘하고 자그마한 덧이 하나가 웃을 때마다 유표하게 드러나던 소녀, 정갱이가 까맣게 타도록 숲속을 돌아치기 잘하던 옛날의 모습은 찾아볼수 없다. 있다면 웃을 때마다 드러나군 하는 자그마한 덧이 하나이다. 오련희의 눈귀에는 때이른 잔주름 몇오리가 생기였다. 그런데 그 녀자에게서 초여름의 숲처럼 생신하고 생활의 만족감에 넘쳐있는 사람들에게서만 찾아볼수 있는 희열이 느껴지는것은 무엇때문인가?

김호성은 그 녀자가 결코 범상하다고 볼수 없는 생활의 곡절을 겪었다는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있다.

《그래, 련희가 도소재지에 배치받았다가 고향의 림산분교로 자진하여 내려갔다는 말은 오래전에 들었는데 이렇게 생각지 않게 만나니 정말 반갑구만! 수재학생을 위해 평양에 일부러 올라왔다는 말은 우리 부국장동지한테서 들었소. 그런데 시험연구조가 여기 있다는건 어떻게 알고 찾아왔소?》

오련희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평양에 왔다가 우연히 교육위원회에 있는 정성금동지를 만났지요뭐. 내가 대학에 입학했을 때 성금동진 박사원생이였는데 우린 기숙사 한호실에서 생활했거던요.》

《오, 그런 사이였구만.》

《성금동지한테 우수한 실력가선생들이 위원회에 올라와 콤퓨터에 의한 원격시험프로그람개발전투를 벌리고있다는데 그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가고 물어봤지요 뭐. 제꺽 말해주더구만요. 그 조장이 내가 아는 고향사람 김호성동지가 아닐가 하는 생각은 하고있었어요. 기차를 타고오다가 그럴만한 일이 있었거던요. 역시 호연이 오빤 고향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큰일을 하는구만요. 대단해요!》

《큰일이라… 허허.》

《아니, 왜 웃어요?》

《다 달라졌는데 두가지는 아이적 그대로구만.》

오련희의 눈에선 호기심이 반짝이였다.

《그게 뭐예요?》

《웃을 때 보이는 그 덧이하고 무엇이나 과장하기 좋아하는 버릇.》

《어마나! 호호호.》

두사람은 아득히 흘러가버린 시절의 일들을 감회깊이 추억하며 즐겁게 웃었다.

《련희동무, 거기서 데리고왔다는 그 제자말이요, 이자 부국장동지가 말하는걸 보면 수학수재라고 하던데 정말 그렇소?》

《사실이예요. 수학두뇌인데 앞으로 잘 키우면 세계적인 유명한 수학자가 될수 있어요.》

《세계적인 수학자라…》

김호성은 또 얼굴에 웃음을 실었다.

오련희는 악의없는 힐난의 눈길로 김호성을 건너다보았다.

《음- 과장이 아니예요. 정말이란 말이예요.》

《허허, 말하오. 그래서 우리가 뭘 도와주어야 한다는거요?》

《어떤 때엔 선생인 내가 지식이 모자라 배워주기 힘들 정도예요. 그래서 수학참고서같은것도 필요하고 더구나 여기엔 실력있는 수학선생들도 있겠지요? 그런 선생님들한테서 좋은 말을 들으면 금동학생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칠게 아니예요.》

《동무 말대로 여긴 수학재사들이 있소. 더구나 다음해부터는 콤퓨터에 의한 대학입학원격시험으로 넘어가는데 우리 사람들이 그 애한테 필요한 학습방조를 줄수 있소. 그리고 말이요, 사실 그 학생을 만나보는건 우리 사람들한테도 필요하오. 지방 분교생들의 중등교육실태도 다 알아야 하니까. 이자 부국장동지도 그래서 그렇게 말한거요.》

《그러고보니 정말 그렇구만요!》

《참고서도 주면 되는거구. 그러니 이젠 동무이야기나 들어보자구.》

《제 이야기라는거야 들어볼것이 뭐가 있겠어요. 촌생활이라는거야 호성동지두 알지 않나요. 눈뜨면 보이는건 산, 나무, 토장, 산판의 기계톱소리… 사람들은 예나지금이나 더없이 좋아요. 그저 아이들하고 어울려서 살지요 뭐.》

《난 그 말 듣자는게 아니요. 동무가 자진해서 고향 분교로 내려간데는 실련을 당한것과 관련된다는 말을 들었소. 도대체 오련희의 인생을 그렇게 만든 그 사람은 어떻게 돼먹은 사내요?》

오련희의 얼굴에 샘물처럼 반짝이던 웃음은 닦아버린듯이 사라졌다.

그 녀자는 심란해졌다.

김호성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픈 추억을 건드려서 안됐소. 동무를 괴롭히자고 그런건 아니고 그저 분해서 그러는거요.》

오련희는 그제서야 고개를 들며 살며시 웃었다.

《호성동지두 참! 내 인생이 어쨌다고 그래요. 호연이 오빠나 빨리 생활을 찾으라요. 상처를 한지도 몇해 됐다는데… 집에는 안사람이 있어야 해요.》

《동문 마치 가정생활을 해본 경험자처럼 말하는군.》

《호호… 사람들이 그러더군요. 그런데 음― 호성동진 나쁜 사람이예요. 아주 나쁜 사람.》 그렇게 말하는 오련희의 눈에선 웃음이 새물거리였다.

《정직한 사람을 보고 그건 무슨 소리요? 나서 처음 듣는데.》

《강수영이란 이름이 생각나지요?》

김호성은 깜짝 놀랐다. 그는 자기가 잘못 들은게 아닌가해서 귀를 의심하며 오련희의 장난기어린 눈을 빤히 쳐다보았다.

《동무가 그 녀자를 어떻게 아오?》

《세상은 넓고도 좁다는 말이 있지 않나요. 이 오련희하구 죽자살자하는 친구지간인걸요. 죽마고우.》 그 녀자는 그러고나서 김호성의 얼굴표정을 살짝 훔쳐보며 깔깔 웃었다.

김호성은 그 녀자가 계교를 꾸며대고있다는것을 알아차리고 빙그레 웃었다.

오련희는 그제서야 강수영이와 한렬차를 타고오면서 알게 된 사연을 말했다.

《호성동진 그 녀자를 만나야 해요. 녀자의 마음은 녀자가 알아요. 그 동문 흔치 않은 녀성이예요. 진실하고 시대를 안고 사는 동무란 말이예요.》

김호성은 아무런 응대도 없었다. 한순간 그의 얼굴에는 괴로움의 음영이 어려있었다. 눈앞에 안해의 얼굴이 그려지고있었다.

김광우는 시험연구조로 건너왔던김에 량원일을 만났다.

《량동무, 시험정보과가 정식 나오는것과 관련해서 동무들속에서 다른 일은 없소?》

광우는 별다른 기색을 보이지 않으면서 물은것이지만 생각은 많았다. 한것은 김호성조장에게서 과장으로 떨어지는것과 관련해서 좋지 않은 말을 들었기때문이였다.

조성원들가운데서 조용한 축으로 알려져있으며 사람이 원만한 량원일은 부국장이 새삼스럽게 묻는 리유를 대체로 짐작하는듯 신중한 표정이 되여 잠시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일부 동무들속에서 그런 말들을 하고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확고히 나가겠다고 하는것도 아닙니다. 좀 사정이 있는 동무들은 있습니다. 례하면 우영심동무 경우인데 그 동무자신은 남편과 아이를 두고 올라와있는 가정부인이지만 함께 일해온 동무들과 떨어지는것이 미안해서 그러는지 아직 강좌로 돌아가겠다는 말은 하지 않고있습니다. 우리 보건대 그 동무의 남편은 안해가 장기간 집을 나가 사는것을 바라지 않는것 같습니다.》

《허허, 그러니 우영심선생이 강좌에 떨어져야 그 사람들의 문제가 원만히 풀리겠구만.》

《사실 그 동무가 연구심도 있고 창조물에 자기의 넋을 심으려 하는데서는 따라배울만 한 동무입니다. 그때문에 속도가 떠서 말을 좀 듣지만…》속이 깊은 량원일은 우영심을 몰아대는 호성조장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서도 그것은 말하지 않았다.

부국장은 고개를 끄덕이였다.

《량동무의 말이 옳소. 창조물은 결코 기술 하나만으로 이루어지는게 아니지. 거기에 자기의 넋을 심을 때 나라의 진보에 이바지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창조물이 될수 있소. 그 넋이란게 뭐겠소? 나라를 받들겠다는 마음이고 사랑이 아니겠소. 그 어떤 타산도 없는 순결하고 열렬한 사랑. 라영국이는 어떻소?》

《좋은 친구입니다. 우리 조의 막내이지만 실력이 있고 일에 달라붙으면 일자리를 내고서야 물러나는 이악한 동무입니다. 그 동무의 아버지가 한생을 화학공장에서 일해오는 성실한 로동자인데 그 아버지가 아들한테 사람은 사회에 보탬을 주는 필요한 인간이 돼야 한다는 좋은 말을 해주는것 같습니다. 애인과의 관계에서 처녀의 아버지견해가 시원치 않아 좀 문제가 있는 모양인데… 제가 알기에는 그렇다고 처녀도 갈라지려는것 같지는 않습니다.》

량원일이 전학선부상에 대한 의견이 있으면서도 일군들에 대한 문제여서 일부러 피하는것이 분명했다.

《량동무, 나는 동무문제에 대해서는 더 견해를 묻지 않겠소. 재능있는 프로그람전문가인 동무는 다른데로 옮겨가면 더 발전할수 있을거요.》

그것은 사실이였다. 량원일이 대학응용수학연구실에 있으면서 전국알아맞추기경연을 위해 내놓았던 프로그람이 우수한것으로 인정되면서 그는 그 분야의 전문가들속에 유능한 프로그람전문가로 알려진것이였다.

《하지만》하고 김광우는 말했다. 《량동무는 지금껏 아무런 내색도 없이 일해오고있지 않소. 시험정보과가 나온 다음에도 기둥이 되여주오. 나라의 진보에 밑거름이 된다는것이 무엇이겠소? 그건 자식이 자기를 낳아주고 키워주고 내세워준 어머니앞에 성실하다는것이 아니겠소.》

김광우는 그곳을 나서면서 새삼스럽게 자신에 대해서 생각했다.

어깨가 무거웠다. 지금까지 일 하나만 생각하고 시험연구조의 매 사람들에 대하여 너무나도 무관심했다는 생각을 했다. 그 사람들 한사람한사람은 나라가 아끼는 재사들이다. 그 사람들은 모두 앞길이 구만리같은 젊은이들이며 그들이라고 창공에 훨훨 나래치고싶은 생각이 왜 없겠는가. 그런데 나는 언제한번 그들의 발전에 대하여, 그들의 운명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보았던가? 누구나 사회적의무에 충실해야 한다는 그 하나의 관점만 세워놓고 일했다. 그러니 내가 무슨 사람들의 운명을 책임질줄 아는 좋은 일군이겠는가. 일을 시키기 전에 먼저 사람들을 알고 그들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간직해야 한다. 군대에서도 나는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가.

그가 이렇게 생각하며 복도를 걸어가는데 라영국이 마주 걸어오다가 인사를 했다.

《안녕하십니까? 부국장동지.》

《어, 라선생이로구만.》 광우는 번거로운 생각에서 벗어나며 얼굴에 미소를 실었다.

《요즘 일이 잘돼가오?》

《뭐 대체로…》

《내가 말하는건 애인과의 일이 어떻게 돼가는가 하는거요.》

라영국은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히죽이 웃었다.

《뭐 대체로…》

《이 사람이! 대체로가 입에 붙었나?》

광우는 어이없어 껄껄거리고 라영국은 얼굴이 수수떡처럼 뻘개졌다.

《이보라구 라영국동무, 처녀가 마음에 들면 절대로 놓치지 말라구. 너무 그러면 오히려 랑패를 볼수 있소. 나이많은 사람의 말을 듣소. 그리고 말이요, 그 처녀한테 말해주오. 라동무를 사랑하는데 처녀의 아버지한테 무슨 문제가 있다면 어떤 수를 써서든지 돌려세우라고 하오. 례하면 〈아버지, 이 딸은 죽어도 그 동무와 떨어질수 없어요. 그 동문 장차 나라의 과학발전을 위해 큰일을 할수 있는 재사예요. 그러니 아버지는 그 동무가 지금 하는 일을 적극 지지해주어야 해요.〉라고 말이요. 이보오, 이 부국장이 그런것까지 말해주어야 하겠나? 음, 음―》

김광우는 일부러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고는 지나쳐서 걸어갔다. 그는 혼자 히죽이 웃었다.

멀어져가는 부국장을 뒤에서 바라보는 라영국의 단정한 얼굴에 의혹이 실리였다. 저 부국장동지가 어떻게 되여 우리들의 사랑에 대하여 그렇게 관심이 많을가? 어째서 우리들의 일에 관심이 많은것인가?

라영국은 인차 씩 웃어버렸다. (부국장동진 일군이니까.) 하고 심상하게 생각해버렸다.

자기의 일과 특별한 관계가 없는 이여의 문제에 대하여서는 생각을 깊이 하지 않는데 습관되여있는 라영국이였다. 그 《이여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 잘되겠지 하는 생각으로 그치는것이였다.

세상에 나서 서른해를 살아오며 라영국이 체험을 통해 세워놓은 견해에 의하면 그렇게 하는것이 한여름의 솜옷같이 성가신 번거로움에서 벗어나 편리하게 살수 있을뿐더러 중요하게는 인생의 목적을 향해 층계를 거침없이 톺아오를수 있기때문이였다.

라영국은 부국장이 무엇때문에 전학선부상과 관련되는 이상한 말을 했으며 그것이 결코 무시해버려도 되는 《이여의 문제》가 아니라는데 대하여서는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날 밤, 오련희는 대학때 알게 된 정성금의 집으로 초청받아갔다.

두 녀자가 나이차이는 있지만 기숙사의 같은 호실에 있으면서 남달리 가깝게 지낼수 있은것은 서로가 상대방에게서 자기와 비슷한것을 보았기때문이였다. 두 녀자는 다같이 마음이 깨끗하고 불의앞에서는 참지 못했다.

그들은 기숙사시절처럼 한잠자리에 누워 대학때의 일들이며 동무들에 대한 추억도 하면서 지금껏 살아온 이야기들을 펼쳐놓았다.

《련희동무, 난 도무지 리해가 안되누나. 좀 설명을 해주렴.》

정성금이 갑자기 심각해서 하는 말에 련희는 의아해서 그 녀자를 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해요? 성금동지.》

《그때 넌 그 사람에 대해서 나한테 좋은 말을 얼마나 많이 했니? 성격이 좋고 인물 그쯘하고 인정이 많고 또 어쩌고 하면서 좋은 말을 다하지 않았니. 그러던 네가… 글쎄 너같이 마음 깨끗한 녀자를 그 인간이 배반을 했단 말이냐?》

오련희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그러다가 힘들게 입을 열었다.

《성금동지, 그 말을 꼭 들어야겠어요?》

《들어야겠어. 대학때 한호실에서 생활하던 혜숙이랑 그 얌전때기 영란동무랑 후에 만났는데 그 인간을 욕하더라. 사랑을 그렇게 쉽게 배반하는 나쁜 사내라구. 그래 정말 어떻게 된거냐?》

《그건 사실 소문이 잘못 난거예요. 제가 스스로 도소재지를 떠난걸요.》

정성금은 그 말에 놀라서 입이 벌어졌다. 서글서글하던 눈에 잔뜩 의혹이 비끼였다.

《뭐라구? 그럼 동무가 먼저 배반을 했다는거냐? 마음 곱고 불의앞에서 너그러울줄 모르던 동무가? 난 뭐가 뭔지 통 모르겠구나. 말해주렴.》

《…》

《어서.》

오련희는 한동안 지꿎게 말이 없다가 정성금이 재촉해서야 《성금동지두!》하고 원망의 소리를 했다.

그것은 돌아다보기조차 괴로운 과거였다.

눈앞에는 해볕이 재글재글 끓던 무더운 여름날이 떠오른다.

여름방학을 보내려고 고향인 멀고도 먼 산골의 림산마을에 내려갔던 오련희는 대학으로 돌아가고있었다. 그는 몹시 바빴다. 수백리나 되는 산골길로 자동차를 잡아타고 오다가 길우에서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기차가 떠날 시간이 림박해서야 겨우 도소재지 입구에 들어섰는데 거기서 또 발동이 멎은것이였다.

운전사는 몹시 미안해하며 철도역까지 태워다줄테니 잠간만 기다리라고 했지만 오련희는 그럴 경황이 못되였다. 자칫하면 렬차를 놓칠수 있기때문이였다.

그는 운전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

걸어서 철도역으로 가면서 오련희는 괜히 운전사의 호의를 마다했다고 후회했다. 집에서 배낭가방과 들가방이 터져나갈지경으로 간식이며 옷가지를 가득 채워넣어준 두개의 짐을 지고 들고 달아오른 세멘트포장길로 달리다싶이하며 걸어가자니 여간 베차지 않았다.

온몸은 어느새 땀에 화락하니 젖었는데 철도역쪽에서는 당장 렬차가 떠나려는지 기적소리가 련거퍼 두번이나 울렸다.

오련희는 그 소리에 바빠맞아 자기도 모르게 《어마나!》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때 뒤에서 《함께 갑시다.》 하는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리였다.

돌아다보니 대학생복을 입은 남자였다. 오련희와 꼭같이 배가 불룩한 배낭가방에 들가방을 들고 땀을 뻘뻘 흘리며 바삐 달려오고있었다.

《동무도 방학에 왔다가는게구만요. 평양가는 차를 타러 나가지요?》

초면의 남대학생이 물었다.

《예. 그런데 차를 놓치면 어쩌나!》

남대학생은 히쭉 웃었다.

《타게 되겠지요, 희망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가방 하나는 저한테 주십시오. 몹시 힘들어하는것 같은데…》

《일없습니다. 아니… 정말…》

처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가방 하나는 그의 손에 가있었다. 숨막히게 무거운 짐을 덜게 되자 남학생이 은인처럼 생각될 지경이였다.

두사람이 역에 이르렀을 때에는 이미 차표판매가 끝나고 나들문으로 여라문명 남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빠져나가고있었다. 차표를 팔아주는 매표구는 닫겨있었다.

아무리 두드려야 응대가 없었다. 오련희는 맥살이 풀려 울상이 되여버렸다.

그가 희망을 잃고있을 때 남학생이 히쭉 웃으며 또 《희망을 가지십시오.》하고 말했다.

배포유한 성격같았다.

남학생은 오련희의 증명서까지 걷어가지고 어디론가 사라지더니 잠시후에 차표 두장을 가지고 나타났다.

그는 오련희의 배낭가방까지 빼앗다싶이하여 들고 나들문으로 이끌었다. 거기서는 이미 문을 닫고있는중이였다.

여기서도 남학생이 돌부처도 감동시킬만 한 간절한 표정을 동반한 끈질긴 기질을 발동하여 역원처녀를 기어코 설득시켰다. 두사람이 나들문을 빠져나가 렬차에 오르기 바쁘게 덜커덩 하며 기차가 떠났다.

《동진 기적을 창조하는구만요.》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겨우 자리를 잡았을 때 오련희가 비로소 마음이 편해서 웃으며 말했다.

남학생은 손수건을 꺼내 얼굴에 즐펀히 흐르는 땀을 씻으며 말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큰 기쁨은 남이 할수 없다고 생각하는것을 하는것입니다. 나는 늦어가지고 역으로 나오면서도 내가 오늘 기차를 놓치게 되리라는 생각은 안했으니까요.》

《그러니 저는 동지의 생활에 대한 견해랄가 좌우명이랄가 아니, 그건 좀 지나친 표현같아요. 어쨌든 견해이든 좌우명이든 그 덕분에 저도 이 기차를 탈수 있었구요. 사실 난 오늘 기차를 못 타는줄 알았어요. 기차 못 타면 려관에서 하루밤 자야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동문 여기 시내에서 살지 않습니까?》 남학생은 그제서야 오련희에 대하여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련희는 생긋이 웃으며 말했다.

《하늘아래 첫 동네에서 살아요. 자동차를 타고 세시간이나 왔으니까요.》오련희는 《령을 넘어 또 넘어》하고 노래부르듯이 말하다가 해해거리였다.

남학생은 정말로 그가 하늘나라에서라도 내려온것 같이 생각되는듯 처녀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마도 그래서 처녀에게 더 각별한 관심을 돌리는것 같았다. 처녀에게 조금이라도 더 편리한 자리를 마련해주려고 애썼다. 처녀가 물을 마시고싶어하자 자기의 배낭가방을 주저없이 헤치였다.

처녀의것보다 두배는 될 큰 가방이였다. 욕심쟁이배낭이구나 하고 자기도 어처구니없는 우습강스러운 생각을 하고있을 때 남학생은 그안에서 화려한 상표가 붙은 노란 과일단물병을 꺼냈다.

향기로운 과일단물로 갈증난 목을 기분좋게 추기며 오련희는 《욕심쟁이배낭》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너그럽게 정정했다. 좋은 배낭이구나 하고.

《동문 어느 대학이요?》 남학생이 물었다.

오련희가 사범대학에서 공부한다는것을 알고는 무슨 의미인지 알수 없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그러니 선생님이 되겠구만요. 동문 원래 교원이 될것을 지망한게지요?》

《그래요. 전 아이때부터 교원이 되고싶었어요. 동진 어느 대학이예요?》

알고보니 남학생은 공업대학에 다니였다.

점심때가 되였을 때 그들은 자기의 가방속에 넣어가지고온 도중식사구럭들을 꺼내놓았다.

남학생의 도중식사가 굉장하였다. 김밥과 깜찍하게 빚은 꼬리떡에 문어회, 낙지순대, 고기… 《어마나!》 하는 감탄이 처녀의 입에서 저절로 터져나왔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

《이런 노래 있지 않습니까.〈먹어야 힘난다네〉 하하. 많이 하십시오. 주저하지 말고. 용기를 내란 말입니다. 사실 동무를 위해 많이 꺼내놓은거요.》

그럴수도 있었다.

사실 거기에 비하면 오련희의 도중식사는 너무나도 소박했다. 흰쌀밥이 들어있는 비닐밥곽 하나에 반찬이란 도라지생채와 고사리볶음이 전부였다.

최윤호는(남학생의 이름이였다.) 기름진 자기의 음식은 처녀앞으로 밀어놓고 자기는 산나물이 좋다면서 도라지와 고사리만 집었다.

그 행동에는 처녀에 대한 총각의 호의가 작용한다는것이 알리였지만 최윤호의 꾸밈없는 밝은 미소와 관심으로 하여 오련희는 조금도 구속감을 느끼지 않았다.

《동문 어머니가 료리사인게지요?》

곱게 빚은데다가 파란물까지 들이여 여간 먹음직스럽지 않은 꼬리떡 하나를 집어들며 오련희는 물었다.

《어머니가 료리사인게 아니라 우리 형수가 료리사요. 나한테는 훌륭한 형님이 한분 계시오. 도림업관리국에 있는데 일을 많이 해서 국가적인 큰 대회에도 많이 참가했소. 표창도 많이 받고. 한마디로 말하면 전도가 양양한 일군이지. 우린 그 형님신세를 많이 지오. 이번에도 내가 방학이 끝나 대학으로 올라간다니까 형수가 이렇게 잔뜩 꾸려주지 않겠습니까. 많이 드십시오. 남겨놓으면 이제 기숙사에 가서 그걸 다먹고 왔을걸 하고 후회하게 될거요. 난 말이요, 생활에서 후회를 남기는 일은 제일 질색입니다. 동무도 그렇게 하십시오.》

최윤호는 그러면서 하하 웃었다.

그들은 평양역에 내려 헤여지면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일요일이면 두사람은 드문히 학습당이나 유원지같은데서 만나 함께 시간을 보냈다. 방학이 되여 고향으로 내려갈 때면 의례히 약속을 하고 같은 기차를 탔다.

한번은 최윤호가 기차에서 내리자 처녀를 자기 집으로 끌었다. 늦었는데 자기 집에서 편히 하루밤을 자고 아침에 고향 림산마을쪽으로 가는 차잡이를 하라는것이였다.

하긴 기차가 저녁무렵에야 역에 이르다나니 어느 려관에라도 찾아가 하루밤 묵어야 할 형편이였다.

최윤호의 집에 가면 려관신세를 지지 않아도 되겠지만 그의 호의를 따를수 없었다. 처녀가 총각네 집에 잠을 자러 간다는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무엇한 일이였다.

마침 철도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도림업관리국에 있다는 최윤호의 형네 집이 있었다.

최윤호가 소개하여 오련희는 그 집에서 자고 가기로 했다.

내외가 모두 마음들이 무던하고 손님을 친절히 대해주는 집이였다. 오련희는 아무런 불편도 없이 그 집에서 하루밤을 보내며 호텔료리사를 한다는 안주인과 친하였다.

그 집에는 인민학교(당시)에 다니는 오돌차게 생긴 아들이 있었다. 최금동이라는 그 소년은 붙임성이 좋아 처음 보는 오련희를 대뜸 누나라고 불렀는데 알고보니 국제수학올림픽경기에 나가 금메달 따는것을 목표로 하는 소년이였다.

오련희가 그 애의 수학실력을 슬그머니 알아보니 놀라울 정도의 수학두뇌였다.

《금동인 앞으로 유명한 수학가가 될거야. 그러니 공부를 더 열심히 해라. 국제수학올림픽경기에 나가 금메달을 따오는것도 좋지만 그보다도 장차 우리 나라의 과학을 세계에 우뚝 세우는데 기여하는 세계적인 과학자가 돼야 해. 이 누나와 약속을 하자. 그런 과학자가 되겠다는걸 말이다. 누나도 금동이의 수학공부를 도와줄게. 약속하지?》

그들은 그날부터 친한 사이가 되였다.

오련희는 방학이 되여 집에 내려갈 때면 금동이네 집에 들려 그 애의 수학공부를 지도해주군 하였다.

매번 들릴 때마다 금동소년의 수학실력이 놀랍게 올라간것이 알리였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이 흘러갔다.

최윤호가 먼저 대학을 졸업하고 도소재지에 배치받아 내려갔다. 그는 평양을 떠나가면서 오련희를 만나 말했다.

《졸업하면 어떻게 해서든지 도소재지로 내려오오. 거기엔 힘있는 우리 친척들도 있고 가까운 사람들이 많소. 림업관리국에 있는 우리 형님도 인정이 많은데다가 한다하는 일군이니까 교제범위가 넓소. 련희동무 하나 도와 못 주겠소?》

이태가 지났을 때 오련희도 졸업했다. 그는 정말 도소재지에 배치되였다. 그는 향촌의 소녀시절부터 꿈꾸어오던 소원대로 선생님이 되였다.

최윤호는 그가 교원이 되는것을 그닥 달가와하는 기색이 아니였지만 련희는 기쁘기만 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가 되였다.

한해가 지나갔을 때 최윤호네 집에 하나의 일이 있었다. 최윤호가 그렇게도 자랑하던 그의 형이 큰 과오를 범했다. 도림업관리국의 한다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일처리를 잘못하여 산하단위인 한 림산사업소의 림지를 못쓰게 만든것이였다.

사업소는 생산전망이 암담하게 되였으며 그 후과로 큰물때 인명피해까지 났다.

그것이 관리국적인 문제로 제기되여 그는 비판을 받게 되였다.

다행히 일을 잘하려다가 범한 본의아닌 과오로 인정되여 엄한 처벌은 면하였으나 그는 심한 량심의 가책으로 고민하던 끝에 자기 잘못으로 황페화된 림산사업소로 자진하여 내려갔다.

그때로 말하면 최윤호가 인민위원회 학생모집처에서 일하면서 실적을 내여 우의 일군들로부터 평판이 좋던 때였다. 오래지 않아 부서책임자로도 될수 있다는 소문이 돌고있었다.

오련희는 길거리에서 금동소년의 어머니를 만나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일이 그렇게 되였어요. 촌으로 내려간다고 해서 달리 생각지는 않아요. 생활조건이 여기보다는 못할수 있겠지만 거기라고 뭐 사람못살 고장이겠어요. 하나 속에 걸리는것이 있다면 금동이문제예요. 유명한 수학가가 되겠다는 애인데 동무들과 떨어져 촌에 내려가서 위축되지 않겠는지…》 하고 그 녀자는 말했다.

《위축되기는 왜 위축되겠어요. 거기 가면 또 좋은 동무들을 사귀게 될거구 금동이의 재능을 아껴주는 훌륭한 선생님들도 있을게 아니예요. 그리고 거긴 제가 나서자란 고향인데 물좋고 경치좋고 사람들도 모두 좋은 살기 좋은 고장이랍니다.》

그 녀자를 위안하는 좋은 말을 해주었으나 오련희는 속이 편안치 않았다.

어쩐지 자기가 꼭 위선적인 인간처럼 생각되였다. 자기가 나라의 과학을 떠메고나갈 유명한 수학자가 될거라고 하며 학습방조를 주던 금동이는 아버지를 따라 촌으로 내려가는데 자기는 도시에 남아 편안한 생활만 추구하는 녀자처럼. 네가 금동이를 따라 촌에 내려가면 안된다던 하는 생각이 피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한편 최윤호가 형님의 일로 얼마나 걱정하랴싶었다.

금동이네가 촌으로 내려간지 며칠 지나서였다. 오련희는 최윤호를 만나 《형님의 일이 참 안됐더구만요.》 하고 진심의 말을 했다.

최윤호의 얼굴에는 사랑하는 처녀가 자기네 집안의 창피한 내막을 알고있다는데서 오는 수치의 감정이 진하게 나타났다.

《사실은 말이요, 그 사람은 내 형이 아니요.》 최윤호가 하는 말이였다.

오련희는 깜짝 놀랐다. 한순간 자기 귀가 잘못되지 않았는가 했다. 하지만 그런것이 아니였다.

《우리 집안엔 그런 역적같은 인간이 없소! 그 사람은 원래 고아였는데 오래전에 아버지가 데려온것을 우리 집에서 먹여주고 입혀주면서 대학공부까지 시켰던것이요. 그러니 촌수를 따지면 그 사람은 사실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소.》

형님이 집에서 데려다 키운 자식이라는 말은 최윤호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였다.

《동지는 언젠가 자기한테 훌륭한 형님이 있다고 자랑하지 않았나요. 오래전의 일이여서 다 잊어버렸어요? 이젠 형님이 아니라 〈그 사람〉이 됐나요? 덕을 볼 때엔 자랑스러운 형님이고 과오를 범하여 필요없이 되면 거치장스러운 〈그 사람〉이 되는가요?》

아니, 오련희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그저 온몸이 갑자기 나른해왔다. 세상이 눈앞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것만 같았다. 어쩌면 사람이 이럴수가 있단 말인가? 최윤호가 이런 비렬한 인간이였단 말인가? 수단좋은 사람, 항상 소탈하게 웃는 낯으로 상대하는 사람에게 좋은 인상만을 주던 인간이 어쩌면! 어쩌면!

《위험해요!》 저도 모르게 그 말이 오련희의 입에서 나갔다.

최윤호가 린광이 번뜩이는 눈으로 처녀를 마주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는거요?》 하지만 떳떳하게 울려나오는 소리는 아니였다. 조심스러운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오련희는 주저할 필요가 없게 되였다. 일단 시작을 뗀 말이 아닌가.

《동지야말로 형세가 좋을 때에는 〈충신〉이 되고 어려울 때엔 당도 서슴없이 배반할 인간이예요!》

《동문 아무렇게나 막 말하누만.》

《아니, 생각해보고 하는 말이예요.》

《나의 당성을 그렇게 함부로 평가하지 마오. 우리 아버지는 전쟁시기 인민군대 정치일군으로 락동강을 건너갔다왔고 전후에는 종파놈들과 싸웠소. 사람은 어디까지나 원칙이 있어야 하는거요!》



오련희의 말을 잠자코 듣고있던 정성금의 입에서 《세상에!》하는 한숨같은 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래서 네가 도소재지를 떠나 림산분교로 내려갔단 말이구나. 그 수재소년을 위해서… 우린 그런줄도 모르고… 동문 누구한테도 그 말을 안했지?》

《…》

《동무두 독한 녀자로구나. 그래 촌으로 자진하여 내려간걸 이제와서 후회하지 않니?》

《조금도 후회하지 않아요. 거기 사람들이 얼마나 좋다구요. 그런데 참…》

《왜? 무슨 일이 또 있었니?》

오련희는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가 자진하여 내려간 고향 림산마을에 바로 최윤호가 역적이나 되는듯이 말하던 그의 형이란 사람이 가족과 함께 이미 가있었다. 그 사람은 자기때문에 사업소가 식수계획을 못하여 벌거숭이가 된 산판에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일요일이 따로 없었다. 남들이 모두 휴식하는 날이면 안해와 아이까지 데리고 산판으로 올라가 온종일 나무를 심었다.

그러던 어느해 여름, 며칠째 그칠사이없이 폭우가 내리였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내여 토장에 쌓아놓은 나무들과 물동을 지켜내기 위한 전투를 지휘하다가 탕수에 말려들어 위험하게 된 한 로동자를 구원하고 중태에 빠졌다.

그는 의식을 잃은채 병원에 실려갔다. 의사들과 담당간호원이 이틀밤을 꼬박 새우면서 노력하여 간신히 깨여났으나 생명의 초불은 이미 심지의 마지막끝을 태우고있었다.

생의 마감에 이르렀음을 예감하는 순간에 그는 안해의 눈물고인 눈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미… 안… 하… 오.…》 마디마디 동안뜨게 울려나오는 연약한 목소리… 그것은 가장 가까운 사람인 안해만이 리해할수 있는 말이였다. 그는 나라에 손해를 끼친 자기의 과오를 두고 괴로와하고있었으며 그때문에 처자앞에 죄를 지었다는 번민에 시달리고있었다. 그는 또 무슨 말인가를 하고있었는데 옆에 있는 어린 아들애조차 알아들을수 없는 소리였다.

그리하여 안해가 눈물을 흘리며 남편의 입에서 간신히 흘러나오는 마지막말을 따라가며 《통역》했다.

《여보… 당신은… 이 못난놈을 대신하여… 이 땅에… 나무 한그루라도… 더 심어주오.… 그리고 금동아… 당에서는… 나라에… 손해를 주고 과오를 범한… 이 아버지를 용서해주었다.… 아버지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당원이고 나라를 사랑했다.… 너는… 나라를…참되게 받들줄…아는… 좋은… 사람이 되… 거… 라.…》

남편은 알릴듯말듯하게 고개를 끄덕이였다.

《알겠어요, 아버지! 죽지 말아요, 아버지! 눈을 떠요, 아버지!―》

아들애가 처절한 목소리로 아버지를 불렀다.

남편의 얼굴에는 편안한 미소가 실리였다.

그는 과오를 범했으나 자기를 키워주고 내세워준 나라의 은덕은 잊지 않았으며 깨끗한 량심을 간직하고 세상을 떠나간것이였다.

지금 림산마을에는 그가 남겨놓고간, 최윤호에게는 이러나저러나간에 형수와 조카가 되는 그 사람의 안해와 아들이 살고있다.

오련희는 금동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자기의 남편을 두고 최윤호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비렬한 말을 내돌렸다는것을 알고있으며 그때문에 시동생을 지금도 용서하지 않고있다는 말도 했다.

《용서를 못하지. 어떻게 용서를 하겠어. 나같아도 용서를 못하겠다. 둘러보면 속에 쉬가 잔뜩 쓸어가지고서도 좋은 사람인체 하는 그런 인간들도 있는거지. 그런데 련희동문 어떻게 할셈이야? 일생 시집을 안 가고 혼자 살 결심이야 아니겠지? 스스로 자기 인생을 고독의 함정속에 처박을수는 없어. 인간은 사랑이 없이는 못산다. 빨리 생활을 찾아.》

《생활?》

오련희는 나직이 받아외우며 새물새물 웃었다.

정성금은 돌아누우며 그 녀자의 얼굴을 새삼스럽게 여겨보았다.

《어쩐지 련희얼굴에서 수심기는 찾아볼수 없고 생활의 만족감이라고 할지 그런게 느껴진다고 했지. 너 사랑이 생겼구나. 그렇지?》

《사랑?》

오련희는 아리숭한 소리를 했다.

불현듯 눈앞에는 눈이 어글어글하고 얼굴이 투덤투덤한 남편의 볕에 탄 검스레한 얼굴이 떠오른다. 위험하게도 바투 다가오는 그 눈, 이글이글 타는것 같은 눈 그리고 《잘 갔다오오.》하던 투박한 목소리… 생긴건 참나무드덜기처럼 투박하고 무섭게 생긴 사람이 마음은 어쩌면 그렇게 찬찬하고 부드럽고… 진정에 차고… 열렬하고… 아니,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담!

련희는 갑자기 숯불을 뒤집어쓴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문득 그를 처음 알게 되던 그때의 일이 눈앞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