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야 암살당할뻔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지만 발키리 작전을 통해서 합법적으로 총통의 지휘권을 빼았고 군통제권을 장악하려 했던 1944년 시도는 그 주체들이 독일 내부나 심지어 나치당 안의 거물들이 여럿 참여했던 계획이었음


이들은 거의가 프로이센의 융커 출신 귀족들이거나 독일 제국 시절의 정치인들, 제국군 출신 장성들이 많았는데 처음에야 나치가 가려운 곳을 긁어줘서 좋다고 찬동했지만 점점 포퓰리즘을 등에 업고 이들이 가지고 있던 파이를 침범하면서 불안감을 느낌. 


애초에 나치는 전반적인 성향은 극우라고 보지만 사실 구 지배권을 완전히 갈아엎어버리고자 했던 점, 반자본주의 등 극좌적인 성향도 있어서 상당히 복합적인 존재였음


거기다 점점 전쟁이 지는거 뚜렷하게 보이면서 이런 반 히틀러 성향 고위층들은 히틀러를 숙청하고 나치당 전체를 무력화시켜서 전제군주제를 부활시키자는 계획을 세움


이때 계획했던 방식이 히틀러 유고 시에 독일 전역에서 예비군을 소집하고 친위대 전력을 예비군의 통제하에 두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발키리 작전'임


원래는 나치당에 의해 계획되었지만 문제는 이 계획의 입안자가 반나치 성향이자 암살단의 소속이었음


이 암살작전의 주도자들은 주로 반나치, 기존종교지도자, 구 귀족 출신들의 비밀 모임이었던 슈바르츠 카펠레, 한국어로 검은 오케스트라라는 조직임.

여담으로 붉은 오케스트라도 있었는데 이들은 공산당 성향의 비밀조직임



이 슈바르츠 카펠레의 일원으로는


빌헬름 카나리스 제독

- 해군대장, 해군 총사령관 대기발령. 발키리 작전의 최초 입안자. 사실 이전부터 히틀러를 싫어해서 MI6에 정보를 흘려주기도 했음


에리히 펠기벨 장군

- 통신대장, 독일 최고사령부 암호국장. 암살 작전때 늑대굴(독일군 최고사령부)의 통신 차단을 맡음


헤닝 폰 트레슈코프 장군

- 소장, 2군단 참모장. 이 계획 전에도 여러번 암살을 시도했고 이후 2군단으로 전출되면서 슈타우펜베르크 대령이 이 사람의 자리를 대신함


에르빈 폰 비츨레펜

- 퇴역 원수. 전임 서부전선사령관. 쿠테타 성공시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관으로 내정


루트비히 베크 

- 퇴역 상급대장, 전임 국방군 총참모장. 쿠테타 성공시 독일 육군 총사령관으로 내정


카를 괴르델러

- 정치인, 전임 라이프치히 시장. 왕당파


프리드리히 올브리히트 장군

- 보병대장, 최고사령부 국방 예비국장. 쿠테타 성공시 국방장관으로 내정


에리히 호프너 장군

- 상급대장


디트리히 본회퍼

- 루터파 목사, 정보요원 (다만 1943년부터 체포된 상황이라 암살작전 자체에는 참여하지 못함)


울리히 폰 하셀

- 이탈리아 주재 독일 특명전권대사


볼프하인리히 폰 헬도로프 장군

- 백작, 베를린 경찰청장.


프란츠 리터 할더 장군

- 상급대장, 전임 총참모장


한스 오스터 장군

- 소장, 국방군 해외방첩청 중앙국장


아르투어 네베 장군

- 경찰중장, 제국 사법경찰 사령관


헬무트 야메스 폰 몰트케

- 법학자, 보불전쟁의 전쟁영웅인 몰트케의 조카손자


한스 폰 도흐나니

- 법학자


에리히 코르트

- 외무성 각료국장


에른스트 폰 바이트체커

- 전임 외무성 장관


카를 하인리히 폰 슈퇼크나겔 장군

- 보병대장, 서부전선군 사령부 소속. 암살 작전 시도때 게슈타포들을 체포하는 임무를 맡음


파비안 폰 슈바브렌도르프

- 법학자, 연락책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 대령, 백작, 보충군 사령관 동원참모. 1944년 7월 계획의 주도적 참가자


베르너 폰 헤프텐

- 중위, 슈타우펜베르크의 전속부관


케자르 폰 호파커

- 공군 중령, 롬멜을 포섭함


한스 슈파이델 장군

- 중장, B집단군 참모장


프리드리히 프롬

- 상급대장, 보충군 사령관.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도 아니고 거부한 것도 아니어서 두발을 걸친채로 간만봤음.


에르빈 롬멜

- 야전원수, 부관이었던 슈파이델 장군도 슈바르츠 카펠레의 핵심멤버였고 자기도 케자르 중령을 통해 관현악단이랑 접촉을 한 상태였음. 게다가 애초에 미국이랑 북아프리카에서 전투를 해보면서 전쟁에 회의감을 느끼던 상황이라 직접적인 참여는 아니지만 일원으로 관여한건 맞음. 다만 7월 20일 작전에는 참여하지 않음



  

이정도면 히틀러가 그간 머리에 총알 안박힌게 기적임


하지만 7월 20일 봉기에서 히틀러를 죽이는데 실패한 데다가 당시 봉기군의 참가자들이 거의 실전 지휘와는 거리먼 참모계열의 장군들이거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베를린 장악의 경우 4개 중대만 동원함. 그마저도 히틀러 생존 소식에 사기가 꺾이고 친위대가 숫자빨로 밀어붙여서 결국 대부분의 참가자들이 체포됨


히틀러는 개빡돌아서 소위 인간사냥이라고 해도 될정도로 잔인하게 숙청했고 대략 7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인민재판 당하고 사형을 언도받음. 주요 지도자급들은 거의 다 교수형을 당했고(군인에게 교수형은 꽤 큰 수치임) 가족들도 연좌제에 당하면서 이후 종전때까지 뚜렷한 반히틀러 세력 자체가 크지를 못함



노력은 가상했고 실제로 될법도 했는데 문제는 이사람들 중에도 문제많은 사람들이 간간히 있었고 최종목표부터가 전제군주정의 부활과 소련관의 전쟁 유지였던 점을 생각하면 

초기에 히틀러가 잘나가니까 찬동하다가 좀 미쳐날뛰기 시작하니까 손절하려했던 기회주의적 시도인지, 아니면 진짜 청운의 꿈을 가지고 시곗바늘을 움직이려고 했던 혁명적 시도였는지는 개개인이 판단할 문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