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량이 발명했다는 전설의 발명품이 목우유마입니다.


나무로 만든 소와 미끄러지는 말, 즉 썰매같은 것이라고 추정하는데요


실물은 확인된 것이 없지만, 제갈량이 목우유마를 만든 이유는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사천 분지를 통과하는데 필요한 수송과 보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죠.






사천 분지는 첩첩산중으로 유명합니다.


때로는 아기자기한 풍경도 있지만 웅장한 산세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저 산과 절벽 사이로 난 잔도를 통과해 군량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전쟁이라고 하면 전투부대에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수나라 백만 대군 중에 전투부대가 몇명이냐에 그렇게 관심이 높고 


전투부대가 25만에서 30만 정도였다고 말하면 거의 좌절하다시피 하는 분도 계십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전투능력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군수와 보급능력입니다. 


저 뒤에 있는 수송마차와 그것을 운반하는 부대죠.




백만 대군이 모두 전투병이라고 하면 그건 절대로 무시무시한 군대가 아니라 허수아비 군대입니다.


단 하루면 전투력을 상실할 겁니다.


전투병 50만에 전투지원부대 50만의 비율이라면 단기전만 가능하고 멀리 원정을 가지도 못합니다.


전투병 25만에 전투지원부대가 75만 정도 되어야 진정 무시무시한 군대가 됩니다.


그들은 1년 2년을 행군하며 전투를 치를 수도 있고, 전 중국을 정복할 수도 있는 능력을 보유한 군대입니다.






전투력을 충분히 유지시켜줄 수 있는 보급과 군수능력이 없다면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도 나폴레옹의 영광도 존재하지 못했을 겁니다.







오늘 소개할 전투는 전쟁사에서 늘 소외받고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던 군수와 보급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서기 662년, 신라의 군량 수송 작전입니다.







서기 661년, 삼국의 정세가 급속하게 요동칩니다.


갑작스럽게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해 사비와 웅진을 함락하고 의자왕을 포로로 잡아가버린 것입니다.


삼국시대가 순식간에 이국시대로 바뀌어버렸습니다.




이건 고구려에게도 충격적인 사건이었죠.


고구려는 오랫동안 당의 침공에 맞서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당의 목표는 어떻게 해서든 만주에서 고구려의 세력을 몰아내는 것이었죠.


백제와 신라는 서로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남쪽의 정세에 대해서는 신경을 덜 써도 되었죠.


그런데 갑작스럽게 한반도 중부가 통일되고, 고구려는 당과 신라의 협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도 위기를 감지했겠지만, 당도 그것을 예측하고 고구려에게 대항할 시간을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몰아붙일 때 단숨에 몰아붙인다는 작전이었죠.




소정방의 군대는 백제 정복이 완료되지도 않았는데 급히 사비를 떠나 평양을 습격해 포위합니다.


그리고 소정방 군과 합류하기 위해 유목민 출신의 맹장이었던 계필하력이 압록강 방어선을 돌파해 남하하려고 합니다.


당은 용의주도하게 방효태를 고구려 동쪽으로 파견해 고구려를 조각서내 분열시키는 보완조치까지 취했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고구려에게 기적이 일어납니다. 


계필하력의 본거지인 철륵에서 반란이 일어나 당 조정이 급격하게 계필하력을 소환해 버렸습니다.


난감하게 된 것은 평양을 포위하고 있는 소정방 군이었죠. 


갑자기 고립무원의 상태가 되어 역으로 고구려 군에게 포위당하게 생겼습니다.




다급해진 소정방은 총공격을 개시하지만, 이것이 오히려 화가 되어서 공격이 실패하고 역으로 고구려 군에게 포위되어 버립니다.


당은 급하게 방효태 군을 남하시켜 소정방 군과 합류하라고 지시합니다. 


그러나 이미 작전은 틀어졌고, 소정방 군은 전멸의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놀란 당나라 고종은 신라의 문무왕에게 강압적인 요구를 합니다. 평양에 있는 소정방 군에게 신라가 군량을 지원하라는 요구였죠.


신라에게는 청천벽력같은 요구입니다. 지원부대를 보내는 것보다 군량을 수송하는 것이 열 배는 더 어려운 일입니다.








모든 군사작전에서 군량 수송은 최고난도의 작전입니다. 


도로사정이 좋지 않던 옛날에 수송작전은 현대인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고되고 힘든 과제입니다.


그중에서도 군량은 무겁고 상하기도 쉬워서 제일 어려운 과업이었죠.






그뿐인가, 수송마차는 언제나 적군에게는 최고의 사냥감입니다. 


더구나 이 작전에서 상대는 기병의 천국이며 신라군이 제대로 이겨본 적 조차 없는 고구려군입니다.




아 뭐 신라도 고구려군에게 승리했던 적이 없던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신라 영토 내에서 벌어졌던 방어전이었습니다.


고구려 땅으로 침공해 들어가 최정예 부대와 싸워본 적은 없습니다.


진흥왕의 정복이라는 사례도 고구려가 내전으로 거의 반응할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더욱이 이때는 한겨울입니다. 우리나라의 북쪽 지방은 겨울이면 영하 20도는 가볍게 넘어가고, 도로는 눈과 얼음으로 얼어붙습니다.


이것 역시 여러분이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도로망은 거의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도로는 이렇지 않았습니다.


일단 여러분이 보시는 것처럼 평지가 아니었습니다. 


도심과 도로 모두 지금은 언덕을 인정사정없이 깎아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과거에는 도시 한복판도 오르막과 비탈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죠. 


도시 밖의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하고 롤링도 굉장히 심했습니다.







조선시대에 경상도에서 서울까지 조세를 육로로 수송하면 


도중에 사람과 가축도 먹어야 하기 때문에 곡식의 60퍼센트 이상이 비용으로 소모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일본군은 수송인원에 경호부대까지 붙여야 했기 때문에 소모가 더욱 컸죠.


부산에서 서울까지만 와도 남는게 하나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662년에, 신라군은 서울까지도 아니고 직선거리로 195km, 당시 도로사정을 감안하면 300km가 넘고 더 춥고 험한 길을 행군해 가야 합니다.






신라의 고민은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소정방 군이 빠져나가자 백제 곳곳에서 백제 부흥군이 봉기합니다.


여기에 난데없이 일본군까지 백제부흥군에 가세합니다.


당은 신라에게 사비와 웅진에 고립되어 있는 당나라 군에게도 군량을 조달하고 포위망을 풀어주라는 요구를 했죠.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 양쪽에 군대와 군량을 보내야 할 상황에 빠졌습니다.


어느 하나를 감당하기도 힘든데 말이죠.






신라군의 유일한 희망은 북쪽에서 남하하고 있는 방효태 군이 평양에 도달해서 신라군으로 향하는 고구려 군의 압박을 풀어주는 것이었습니다.


방효태 군이 충분한 군량을 가지고 와서 신라군이 갈 필요가 없게 된다면 그건 정말 최고의 상황이죠.








그러나 신라의 기대는 물거품이 됩니다.


방효태 군은 청천강에서 연개소문이 지휘하는 고구려 군에게 완전히 몰살당합니다.


방효태와 함께 참전한 13명의 아들이 모조리 전사했다고 하는, 고당전쟁 사상 최악의 참패였죠.


이제 소정방의 당군도 같은 운명을 맞이할 위기에 처합니다.








방효태 군을 제거한 고구려 군은, 한 부대는 평양으로 보내 소정방을 공격하고


다른 부대는 남하해서 신라군을 차단할 겁니다.


둘 중 하나만 성공해도 고구려는 승리를 거머쥘 수 있습니다.




신라군과 당군은 어느 한쪽만 패전해도 둘 다 적진에 고립되어 파멸할 것입니다.







불가능한 과제, 신라는 60대 노장이며 문무왕의 외삼촌인 김유신이 직접 지휘를 자원합니다.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과 최고급 귀족인 김양도도 김유신을 따라나섭니다.


이건 칭찬하지 않을 수 없는 노블리스 오블리제죠. 


물론 여기서 신라가 실패하면 자신이 평생 노력해온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갈 판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서지 않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신라군은 수레 2000대에 쌀 4000석, 벼 25000석을 싣고 북진에 나섭니다.


쌀 4000석은 아마도 신라군이 사용할 군량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때는 한겨울, 길이 얼어붙어서 곧 수레를 포기하고 말등에 옮겨 싣게 됩니다. 이건 기병의 전투력이 절반 이하로 떨어진 것을 의미하죠. 






신라군은 신계에서 삭령을 거쳐 수안으로 올라가는 루트를 잡았습니다. 


이 길은 개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1번 국도가 아니라 2번 국도라고 할 수 있는데요, 


지도로 보는 것과는 다르게 이 길에 어떤 군사적 인 이점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신라는 나중에 최후의 고구려 원정때도 이 루트를 사용합니다. 


재미난 사실은 한국전쟁때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한국군도 1번 국도를 미군에게 주고 이 루트로 따라올라가 평양에 미군보다 먼저 입성했습니다.





이 진군과정 중에 어떤 전투가 있었는지는 기록이 자세하지는 않습니다만, 


신라군은 수안까지는 용케 고구려군의 주력을 피해 올라갑니다.


수안 근처에서 선발대가 소수의 고구려군과 조우하지만 격파하고 북상을 계속하죠.







그러나 당군 진지와 겨우 45km를 남겨놓은 지점에서 고구려의 차단선에 걸립니다. 


이들은 아마도 소정방 군과 대치중이던 고구려군의 주력이었겠죠.


지친 신라군은 이들을 돌파할 능력이 없습니다.







이때 갑자기 눈보라와 강추위가 몰아칩니다. 이 한파로 지금껏 견뎌오던 말들이 엄청나게 얼어죽는 대단한 추위였죠.


그러나 신라군은 이 최악의 위기를 역으로 이용하기로 합니다. 


고구려군도 한파로 전투를 중지한 틈을 타서 신라군은 특공대를 당군 진영에 파견합니다.


그들은 당군과 연락을 했고, 당군이 움직여 고구려군의 배후를 위협했던 모양입니다. 


이렇게 해서 신라군은 군량을 전달하고, 임무를 완수합니다.







임무는 대성공이었지만, 그 결과는 당군의 배신이었습니다.


당군은 군량을 받자마자 도망쳐 버립니다. 어쩌면 신라군을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해체하는 미끼로 이용했던 건지도 모르죠.


이제 신라군은 지치고 말도 부족한 상황에서 사방에서 달려드는 고구려군을 피해 귀환해야 합니다.




결과를 다 아는 우리의 입장일 뿐이지만, 이때 고구려군은 무슨 수를 쓰든지 신라군을 격멸해야 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신라는 김유신 이하 군 수뇌부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전쟁의 추진력을 완전히 상실했을 가능성이 높았죠.







신라군은 기적적으로 국경인 임진강까지 도착합니다. 


고구려군이 임진강으로 가는 길을 막고 있었지만, 야음을 이용해 고구려군의 차단선을 우회합니다.




그러나 성공은 잠깐, 연천 호로고루 성(진짜 이름이 이렇다) 아래 임진강 여울에 도착했지만 


강을 건너기도 전에 고구려군이 신라군을 추격해 후미를 강타하며 짓이기기 시작합니다.







이때 신라군은 궁수를 제일 먼저 도강시켰습니다. 강변에 도착한 노수들은 즉시 고구려군을 향해 사격을 개시합니다.


이 사격으로 고구려군이 흔들리자 신라군은 바로 기병을 돌격시킵니다.


이 습격으로 신라군은 고구려 장수까지 생포하는 대승리를 거둡니다.









군량 수송 작전은 절반의 성공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보여준 신라군의 전술적 능력은 높은 수준이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평양까지 진로를 정확히 파악하고, 고구려의 매복과 습격을 최소화하며 이동했습니다.


부대의 진군과 행군은 생각만큼 쉬운 것이 아닙니다. 


지휘관들이 유능하고, 군대가 잘 훈련되고, 조직화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몇번의 위기에서 신라군은 임기응변의 능력을 발휘해서 위기를 모면하고 마지막 임진강 전투에서는 대역전승을 거둡니다.




사실 임기응변에도 수준이 있습니다. 


위기때마다 신라군은 적의 대응을 예측하고 대담하고 선제적인 작전을 통해 항상 상황의 주도권을 쥐고 움직였습니다.


이것이 임기응변에서도 최고난도의 기술이며, 손자병법에서도 최고의 전술로 인정하고 있는 임기응변의 수준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모험이 신라의 젊은 장수들과 병사들에게 엄청난 실전경험을 안겨주었다는 점을 지적해야 합니다.


실제로 이 작전 후 신라군은 몰라보게 달라집니다. 


이후에 벌어지는 백제부흥군과의 전투, 668년의 고구려 멸망전, 이어지는 나당 전쟁에서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능력을 발휘합니다.




세상에 어떤 군대도 실전만큼 훌륭한 경험은 없습니다. 


그리고 실전을 경험하지 못하거나 실전에 준하는 훈련을 통해 양성하지 못한 군대는 전쟁에서 위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놀랍도록 강해진 신라군의 변신, 바로 이 모험이 그 시작이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마지막으로 이런 교훈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방법을 알고 있는 일도 시도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답이 없는 길에 도전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길을 간 사람이 진정한 영웅입니다.







전사에서 빛나는 장군들의 리스트는 답을 모르는 길에 도전해서 답을 찾았던 사람들의 리스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전사뿐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가장 존중해주어야 할 용기입니다.









3줄요약



위기를 역이용하는 능동적 임기응변 능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성공의 경험은 환골탈태의 성장을 부른다


중국놈은 믿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