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만난 것은 가을의 짧은 해가 서산을 넘어가려던 무렵이었다.
찌르기에서는 쇼난의 날카로움을, 휘두르기에서는 제국의 묵직함을 보여준 그에게서는 켜켜이 쌓인 모래의 냄새가 났다.
누구보다도 강하고 빠른 창술로 상대를 압도하는 그에게 환호가 쏟아졌지만 나는 그가 무언가를 억제하는 데 상당한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가 무엇을 경계하고 있었는지는 스승님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는 마창이라는 끔찍한 힘을 다룰 수 있는 자였다. 마법사가 마법을 사용하는 것보다도 자연스럽게.
하지만 그는 마창을 최대한 억누르고 있었다. 간혹 사용하기는 하였으나 익히 들어온 특유의 사특한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마창사를 직접 보았는데도 반감이 들지 않았다. 그의 창술은 순수하게 강력했다. 마치 사람의 힘만으로도 이런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보여주듯이.
날이 밝기도 전에 다른 곳으로 향하던 그의 모습을 눈에 새겨둔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소문을 듣게 되었다.

세상에 '듀얼리스트'라 불리는 자가 있어, 각지를 떠돌며 무술을 익히고 결투를 통해 가다듬는다는 것이다.
재차 확인할 것도 없이 그의 이야기임을 알았다.
얼마나 결투를 좋아했으면 많고 많은 이름 중에 하필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결투에 미친 그저 그런 싸움꾼인가? 높은 뜻을 품은 고고한 무술가로 생각했던 나는 실망하여 스승님께 여쭈었다.

"수행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텐데 결투에 집착하는 걸 보면 단지 실력을 뽐내고 싶은 게 아니겠습니까?"

"한시라도 빨리 버리고 싶기 때문일 게다."

"무엇을 버리고 싶어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그야 그만이 알겠지. 하지만 그의 창술을 다시 떠올려 봐라. 짐작이 가지 않느냐?"

입을 다물었다. 그가 끝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마창의 힘. 그 속뜻을 짐작한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혔다.
혹시 누군가 나와 같은 오해를 품었다면 부디 이 말을 하고 싶다.

저주스러운 마창을 억누르기 위해 닥치는 대로 힘을 키워야 했던 그의 고뇌와 아픔을 우리는 감히 짐작하지 못 한다고.










그를 처음 만난 것은 수쥬 변방의 작은 촌락에서였다.
고문서라면 가치가 떨어지는 물건이라도 높은 값에 매입하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 무작정 수소문한지 사나흘만에 그와 마주할 수 있었다. 당시 내겐 가치가 있을만한 문서도 없었고, 가치가 있다 하더라도 진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없었으나, 야간 경비 일을 시작하게 된 건물의 문헌 보관소에서 그럴듯한 것을 몇 권 빼돌리기로 했다.
당시엔 그 뭣보다도 돈이 필요했었다. 그에게 이름을 묻자 그는 짧게 '듀란달'이라는 대답을 남겼다.
사람 이름이라 하기엔 이상했었고 차림새 또한 오랜 풍파에 찌든 듯했으며, 등 뒤에는 천으로 단단하게 싸맨 기다란 물건(아마도 창병기이리라.) 등등 수상쩍은 점이야 한 둘이 아니었지만, 대전이 이후 이런 차림새의 인간들이야 종종 볼 수 있는 일이었고 내게 중요한 것은 책들의 값어치였으니 그런 것쯤은 적당히 무시하기로 했다.

"이렇게 합시다. 붉은 책 다섯 권은 합쳐서 이 정도 금액을 드릴 수 있을 것 같군요. 다만 이 푸른 문헌들은 원래 자리에 돌려놓으시는 게 좋겠소."

시작이 좋은 것 같았다. 그 파란 것들은 다른 책들과 달리 금고에 보관됐었던 것들로, 위험을 감수하고 선임 경비가 잠든 사이 열쇠를 빼돌린 보람이 생긴 셈이었다.

"아니 아니 선생님. 제가 예까지 오는데 무려 보름이 걸렸습니다요. 저도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어 찾아뵌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잘 살펴봐 주십쇼."

과장을 섞었지만, 책을 빼낸 시점부터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이었고, 그보다 그를 닦달하면 어느 정도의 금액을 얻을 수 있을 지 궁금한 마음에 심장이 방망이질쳤다.

"...이것들은 아까 물건들의 열 배 가격으로도 모자랍니다. 어디서 얻으셨는지는 모르나 뒷일은 본인이 감당하셔야 할 겁니다."

나는 쾌재를 부르며 그에게서 돈을 받아들고 미리 계획해둔 경로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 결과.

"더... 이상은... 도저히 못 뛰겠어요 아빠..."

나와 딸아이는 제국과 그들이 고용한 추격대에 쫒기는 신세가 됐다.
숲길에 몸을 숨기거나 정신없이 달려댄지 벌써 일주일이 지난 듯했다.
챙겨 놓은 식량이나 물품들도 이미 바닥난 지 오래였다. 그 남자의 마지막 경고가 떠올랐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다시금 제국 기사들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추측컨데 제국 기사들은 숲 속에서의 행동에 꽤나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문제는 그들이 고용한 가면의 남자 2명이었다.
경비 일을 하던 당시에도 본 적이 있는 자들로, 그들이 외출 후 돌아올 때마다 건물의 창고에는 각종 물건들이나 끌려와 구금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은 온갖 잡다한 의뢰를 처리하는 일종의 전문가 겸 해결사로 제국의 건물 관리자들은 그들을 그저 사냥개라 부르곤 했다.
결국 해가 질 무렵 우리는 드디어 꼬리를 밟혔다. 말발굽 소리들의 포위망을 뚫고 나왔다고 생각했으나 거대한 고목의 가지 위에 좌우로 올라선 가면의 2인조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가면 때문인지 숲의 사망을 메우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딸아이를 위해 돈이 필요했습니다. 어떻게든... 목숨만은..."

되는 대로 말해보았으나 그들은 서로를 잠시 마주 본 후 품에서 각각의 비수를 꺼내 들었다.
딸아이를 위해 몸이라도 던져야 할 판이지만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면의 남자들이 손을 움직였고 한 쌍의 비수들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공포에 질린 딸아이의 표정과 날아드는 비수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보였지만 역시 몸은 움직이지 않았다.
차마 볼 수 없는 광경에 눈을 감으려던 순간 일주일 전에 만났던 그 남자가 불현듯 나타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창은 날아드는 비수의 궤적을 비틀어 이미 멀찌감치 튕겨낸 것 같았다.
뭐가 되었건 헛것이 보이지 않는 것이라면 딸아이만큼은 무사가 보장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곧 몸에 벼락같은 고통이 올 거라 생각하며 딸에게 남길 마지막 말을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몇 초가 지난 것 같음에도 나에게 날아왔어야 할 비수는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서 경고를 드렸던 겁니다만..."

목소리가 들린 쪽은 딸아이 쪽이 아닌 나의 앞쪽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부르르 떨리는 창끝이 시야에 잡혔다.
다시 딸아이 쪽을 바라보자 딸의 앞에 버티고 서 있던 그 남자의 형체는 마치 안개가 걷히듯 서서히 흩어져 가고 있었다.
가면의 2인조는 잠시 멈칫한 것 같았으나, 이내 수십 개의 암기를 흩뿌림과 동시에 쇄도해 들어왔다.
남자가 창을 움직이자 사람이 밀려날 정도의 강력한 풍압과 함께 내 앞쪽의 암기들이 전부 날아간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돌풍을 일으키던 그의 창은 동시에 또 다른 회전을 일으키며 딸아이의 쪽의 암기들 또한 전부 튕겨내고 있었다.
사방으로 비산하는 금속 파편들에 놀라 움찔하는 순간 딸아이 쪽으로 달려들어간 가면의 남자가 이미 창끝에 꿰인 채 축 늘어져가는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마지막으로 내 쪽으로 달려들던 자들에게 황급히 몸을 돌려 보았으나 내 시선이 닿았을 때는 그 자 또한 이미 몸에 십수 개의 혈흔을 남긴 채 스르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내게 있어 저 일련의 과정들은 서너 개의 공격과 방어가 완전히 같은 시간에 일어난 것으로 느껴질 뿐이었다.

"제국은 공식적으로는 민간인에게까지 손을 대진 않습니다. 다만 앞으로 저런 살수들을 마주치실 수는 있을 겁니다."

나는 그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가 적어 준 어딘가의 장소로 딸아이와 함께 도망치듯 흘러 들어왔다.
나중에야 듣게 된 말이지만 그는 제국 투기장 출신의 방랑자로 전이 현상에 대해 연구하는 무인 집단에 소속된 인물인 것 같았다.
그들은 그들의 활동으로 인해 여러 단체와 대립하고 있는 듯했고,
내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가 마침 그 남자와 대립 관계인 적들에게 노출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팔아넘겼던 문헌들의 내용으로 보건데 그가 상대할 적은 비단 그뿐만은 아닌 듯했다.
내가 이해하기 어려운 보다 강대한 적이 그의 앞을 가로막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문헌을 팔아 그에게서 얻어낸 돈은 언젠가 이자를 쳐서 돌려줄 생각이다.
왠지 그런 마음을 먹지 않으면 자신을 고대 무구의 이름으로 소개한 정체불명의 남자를 다시는 보기 어려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나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자 휘두르는 창이었다.
무엇이든 좋았다. 어떻게든 과거를 떨쳐내고 싶었다.
유일하게 할 줄 아는 것은 창을 휘두르는 것뿐이었기에 수천, 수만 번 창을 휘둘렀다.
그리하면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그들조차 잊어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뿌리박힌 작은 씨앗은 여실히 나의 창술로 발현되었다.
얄팍하고 가벼운 창이었다.

짊어진 무게조차 깨닫지 못한 창이었다.
죄책감이라는 말로 그럴싸하게 감정을 포장하여 속죄라는 상자 속에 넣어 애써 외면하고 있었다.
죄를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도망치고 또 도망쳤다.
속죄라는 신기루를 좇아 수없이 창을 휘둘렀다.
하지만 나의 창에서 죄책감의 무게가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오랜 시간 도망친 끝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리도 쉽게 그들을 잊어선 안된다.
모두가 잊더라도 나는 결코 그들을 잊어선 안 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들의 죽음을 오롯이 나의 창 위에 올려놓는 것.
그리고 눈을 감는 그 순간까지 이 창의 무게를 견뎌내겠다.

그토록 도망치고자 발버둥쳤던 그들의 무게를 창에 담는다.
날카롭게 창을 휘둘러본다.
수많은 신기루의 향연이 펼쳐진다.
이것은 나의 모습인가. 그들의 모습인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이들의 삶을, 죽음을, 이름을, 모든 것을 이어받은 자.
창은 여느 때보다 무거웠다.










듀얼리스트 키워야겟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