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

페르마타에 의해 길게 늘어지는 오선지 위의 음표처럼, 발자욱 사이의 빈 시간이 영겁처럼 느껴질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한없이 공허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그 발소리는, 금방이라도 별무리가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 아래에서, 청연의 외진 구석을 배회하는 이의 것이었다.


"..."


괴로운 듯, 한숨조차 내쉬지 못하고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른 하늘을 바라보며, 차디찬 밤공기 속을 걷는 그녀의 이름은, 흰 구름 전령, 에를리히였다.


가장 믿고 있었던 동료 중 하나가, 조금은 바보같은 구석이 있어도 함께 청연을 지켜나가기로 약속을 다짐했던 그 녀석이, 실력 하나만큼은 출중했기에 믿음직한 구석도 있었던 동료 감시자 녀석이, 라르고가, 모두의 신의를 저버린 배신자였다니.


"...거짓말... 모두..."


충격에서 좀처럼 헤어나올 수 없었던 그녀는, 태엽이 풀리기 직전의 인형처럼,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 같은 애처로운, 우주를 떠도는 소행성과 같이 목적지를 잃어버린 걸음을 터벅터벅 걸어나가던 그녀는, 후미진 골목 한 구석의 붉은 등불이 문득 눈에 들어왔다.


"..."




한편...


"...부탁하네. 모험가. 큰 어른으로써 자네를 볼 면목이 없군..."


심각한 표정으로, 모험가에게 부탁을 하는 루톤. 어둑섬에서 돌아온 이후, 다음 여정을 위한 준비를 하던 중 급히 들려온 루톤의 호출이었다. 에를리히가 말도 없이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실종이라니..."


"이를 어찌하면 좋소...? 에를리히 공이..."


"...차라리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군. 다른 감시자들은..."


"렐은 다시 한번 더 계곡을 살펴보기로 했다네. 마음이 급해서 필시 놓친 부분이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말일세. 다른 감시자들 또한 계곡을 위주로 수색할 것이라고 하니, 청연을 부탁하네."


"...큰일인 것이오... 에를리히 공... 대체 어디로..."


가뜩이나 고민이 많은 땅지기 슈므의 한숨이 더욱 늘었다. 미쉘과 베키까지 홀연히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그녀를 찾기 위해 나선 상황이었고, 그럼에도 그녀가 보이지 않아 모험가까지 나선 상황이었다.


"...그 아이, 강인하고 냉철한 철혈과도 같은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에 상처를 쉽게 받기도 한다네. 부디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다녀오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쉬는 루톤을 뒤로 하고, 모험가는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


"...어느새..."


한편, 에를리히는 그녀 스스로조차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붉은 불빛이 만연한, 청연에서 제일 후미진 골목의 홍등가의 코앞까지 다가온 상황이었다.


"..."


차라리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싶었다. 저 붉은 등불이 빛나는 환락가 속으로 몸을 내던지면, 머리와 가슴을 가득 채운 이 답답한 기분이 조금이나마 사라지지 않을까.


에를리히는 심적으로 너무 괴로웠다. 사랑하는 청연을 말 그대로 '뒤덮어버릴' 정도의 지독한 요기도, 가장 가까운 사람들마저 예외없이 인귀로 변해가는 참상도, 그리고...


"...라르고... 이 바보같은...!"


무엇보다도, 가장 신뢰하는 동료 중 하나였던 라르고가 애초에 환요오괴 중 하나였다는 사실까지도, 한번에 밀어닥치는 그 잔혹한 진실들은, 소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것이었다.


"...오늘, 하루만..."


붉은 조명이 빛나는, 끈적한 음악과 교태로운 신음이 난무하는 지저분한 골목 속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팔목을 붙잡았다.


"...!"


"...에를리히."


"...모험가...님..."


"...여기서 뭘 하고 있었지?"


"...모험가님이 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에를리히."


"...어차피 돌아갈 예정이었습니다. 그냥... 밤 산책을 즐긴 것 뿐이에요."


"말도 없이 홀연히 사라져서 한다는 짓이 이따위 짓인가?"


"...뭐라고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자신이 한 짓은 생각 안하고 대뜸 화부터 내는 에를리히. 모험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이미 극의에 달한 강자인 모험가를 상대로 유의미한 저항은 불가능한 그녀였다.


"윽... 놔요!"


"에를리히 너 진짜!"


모험가는, 거칠게 그녀의 손목을 부여잡으며, 그녀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그녀답지 않게 무책임한 모습이, 그리고 방탕함의 상징과도 다름없는 홍등가의 앞에서 자신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충격적인 모험가였지만, 더 충격적인 것은...


"...훌쩍... 저리... 가라고요..."


"..."


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그녀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뭘... 뭘 그렇게 보는건가요?"


"...미안. 에를리히."


"...알면 당장 사라지라고요. 이래저래 바쁘실건데 이런 곳에 허비할 시간은 있으신건가요?"


"허비하다니, 난 지금, 내 시간을 허비한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아."


"...또 무슨 말을... 윽?!"


모험가는, 에를리히의 양 손을 쥐고, 어떠한 저항조차 할 수 없도록, 더욱 벽으로 밀어붙였다. 차디찬 벽이, 그녀의 온기로 물들어갔다. 어느새 모험가는, 그녀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선 상태였다.


"이... 이게 무슨... 갑자기 이게 뭔가요...?"


"...에를리히."


땅거미가 어둑어둑 내린 노을빛같은 붉은 조명으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에를리히의 볼은 붉게 달아오른 상태였다. 모험가는, 문득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그녀를 자신의 품 속으로 끌어안았다.




미)

"미...미쳤나요 지금!? 아무리... 아무리 모험가님이라도...! 이런 행패는...!"


말은 그렇게 하며, 앙칼지게 저항하는 듯 하면서도, 저항할 생각은 없는 듯 격한 움직임을 보이진 않았다. 곧이어 그 움직임이 서서히 잦아들자, 모험가는 조용히 입을 떼었다.


"...에를리히."


"저리... 저리 가라...고요..."


"...모두가 널 걱정하고 있어."


"..."


"홀로 모든 것을 떠안으려 하지 않아도 괜찮아."


무어라 말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숨이 턱 막혀왔다. 북받치는 감정이 가슴에서부터 끓어올라와, 그녀는 무표정을 유지하고 서 있는 것 조차 힘든 수준이었다.


"방황은 누구나 하는 법이니까. 나도 한때 그러했고. ...절대, 너에게 책임을 묻지 않을게. 돌아가자. 에를리히."


"...모험가...님..."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었다. 요기로 물들어가는 인귀들 앞에서 느낀 슬픔, 그럼에도 그들을 지킬 수 없었다는 무력함, 동료 감시자들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였다는 수치스러움, 그리고... 처절한 배신감. 그 앞에서, 그녀는 마침내 무너진 것이었다.


"...돌아갈... 수 없어요... 이렇게... 감시자답지 못한 저 따위를 누가... 차라리... 차라리 절 꾸짖으셔야...!"


"...그럴 리 없잖아."


"...그런...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왜 없다고 생각하는데, 에를리히?"


"..."


"...많이 힘들었겠구나. 어린 나이에 감시자가 된 것도, 그 강단있는 성격 때문에 외로움을 자주 느꼈던 것도, 누구보다도 믿을 만한 상대라고 생각했던 자가 배신자였다는 사실도, 전부 감당하기에는 너무 어려웠겠지. ...우리도 마찬가지야. 괴로운 일이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홀로 괴로움을 삼키기만 할 필요는 없는걸."


모험가는 에를리히의 눈가로 손을 가져가, 그녀의 눈가에 괴인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


"...슬픔은 나누면, 함께 극복할 수 있으니까. 슈므도, 렐도, 그리고 루톤 어르신도. 모두 다, 너와 함께 그 슬픔을 이겨낼거니까."


"..."


"...이제, 홀로 괴로워하지 말았으면 해. 에를리히..."


참아왔던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의 어리석음이 미웠다. 이 가혹한 현실을 혼자서 받아들이려 했던, 그것이 너무 가혹해서 그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했던 그 어리석음이, 찰나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했던, 한없이 미숙하고 어리석었던 내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모험가님..."


"...그래. 전부 토해내. 괜찮아질 때 까지."


들썩이는 그녀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잠시 둘만의 시간을 갖는 둘이었다.




"...다 울었어?"


"...네."


"눈가가 퉁퉁 불었네. 얼마나 운 거야?"


"...윽..."


"풋... 농담이야. 어서 돌아가기나 하자고."


그녀와 함께 돌아가려던 모험가는, 무언가 미련이 남은 듯,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 에를리히에게로 다시 다가갔다.


"...왜그래?"


"..."


"...?"


"..."


에를리히는, 말로 대답을 하는 대신 힐끔, 곁눈질로 어딘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눈치챈 모험가는, 그녀의 눈빛을 따라가보았고...


"...진짜?"


"...네."


"...그... 지금?"


"...네."


"..."


"...싫으...신가요? 분명... 오랜 모험으로..."


"...그... 싫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럼... 같이 가요. 모험가님..."


...그 시선의 끝에서, 그는 홍등가 안쪽의 허름하고 작은 여관을 발견했다. 활짝 열린 문은, 금방이라도 둘을 집어삼킬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었다.


"...일단 미쉘을 통해서 널 찾았다고만 해 둘게. 그리고, 좀 늦을 것 같다는 이야기도."


"...네. 모험가님."


조용한 곳에서 통신을 마치고 온 모험가는, 산전수전을 수없이 겪어온 강인한 모습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무언가 망설이는 듯 하면서도 긴장한 모습을 하고는, 물을 좋아하는 소녀와 함께 향락의 거리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쓰다보니까 존나맘에안들어서그만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