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몇 시간째일까.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를 들으며 보라해의 황무지에 앉아있던 나는, 몸을 일으켜 앞으로 향했다.


"..."


감시탑이 눈 앞에 보였다. 이제 저 위로 향하면, 외신의 힘에 잠식된, 해방된 불신위괴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터. ...분명히 그래야만 할 것이다. 분명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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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그것에 닿는 일은 절대로, 영원토록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씨발...!"


...나아갈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앞으로 나아가 걷다 보면 어느새 나의 의식은 불이 꺼지듯 흐려지고,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려보면 나는 보라해의 더러운 모래밭 위에 축 늘어진 인귀의 시체마냥 누워있는 것이다.


"...지랄... 지랄하네...! 브림... 브림! 야! 브림! 이 씨발년아!"


"..."


"이 개새끼야! 아가리 벌리고 뭐라고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야! 아까 전까지만 해도 라르고가 어쩌고 저쩌고 하던 새끼가! 감시탑으로 가는 걸 막아야 한다고 지랄하던 새끼가! 왜 아가리에 좆대가리 문 창녀새끼마냥 아무 말도 못하는건데!"


나는 홧김에 검을 뽑아들어 브림을 무참히 베었다. 아무 반응도 없던 육신이 갈라진다. 낡디 낡은, 먼지 쌓인 오브제의 위로 붉은 물감이 어지러이 흩뿌려지듯, 치열한 전투의 흔적과 라르고의 더러운 피와 손톱자국이 곳곳에 즐비한 황무지 위에, 브림이었던 것의 따스한 피가, 만개하는 붉은 꽃무릇처럼 흩뿌려졌다.


비릿한 쇠 냄새가 코를 찔렀다. 검에 묻은 살점과 피를 아무렇게나 털어냈다. 토막난 시신은 차갑게 식어가며, 그 몸뚱이의 주인이 남긴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온기를, 피 냄새와 함께 보라해에 퍼트려나갔다.


"...씨발."


이런 무의미한 짓을 반복해도 분노는 사그라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어이없는 상황과 무력감에 지쳐 더욱 분노하고, 분노할 뿐. 축계망리와 다를 바 없는 상황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 이해를 넘어선 모종의 이유로 넘어갈 수 없이 막혀버린 보이지 않는 보라해 너머의 무의식의 장벽을 바라보며, 어린아이처럼 날뛰며 분노를 쏟아내는 것 뿐이었다.


"..."


그럼에도 나는 무기를 잡아들었다. 녹이 슬고 이빨이 빠진, 나만큼이나 허름한 검을 들고 비척비척 걸어가, 보노즈라고 하는 족제비새끼의 간이 배낭형 해체기로 다가가 나의 장비를 다시 손보았다. 헛된 희망을 안고, 보라해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희망이 아무리 가망이 없는, 그저 헛된 것임은 내 스스로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정할 수 없었다. 내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 무서웠다. 소중한 기회를 내 손으로 직접 짓밟아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건 다 거짓일 뿐이야. 극한 상황에 몰린 내가 계속해서 보라해를 떠올리는 것 뿐이야. 진정해라. 진정해. 골통의 뇌수가 밖으로 흘러나오기 싫다면 진정해라.


곧 끊어질 실낱같은 희망을 품고, 보라해 밖으로 나아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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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벅... 저벅...)


"허억... 허억... 허억... 이 씨발..."


괴롭다. 다리가 끊어질 것 같다. 하반신의 관절 하나하나가 뒤틀리는 것 같다. 고통스럽다. 하지만, 이 육신의 고통보다 더 심한 것은...


"...지라...지랄하지...마...! 지랄하지 마라고!"


...눈 앞에 보이는 감시탑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이 잔인한 사실이었다. ...눈 앞이 부옇다. 짜부... 아니, 나부의 날개깃을 내 눈에 비비는 것 같았다. ...나는 울고 있었다.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처럼, 자식을 잃은 부모처럼, 모든 것을 잃고 초라하게 몰락한 옛 권력자처럼, 나는 서럽게 울고 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행복, 만족감, 자부심... 나는 애초에, 이 모든 것을 움켜쥘 기회조차 없다는 사실이, 아니, 움켜쥐려는 시도조차도 할 수 없다는 잔혹한 현실이, 내 마음을 갈가리 찢어놓았다.


"...지쳤어..."


털썩, 추저분한 모래밭 위로 누군가의 무릎이 떨어진다. 곧이어 몸뚱이가, 얼굴이 떨어진다. 파도 소리는 여전히 청아하다. 브림도, 보노즈도, 내가 베었던 모든 것들도 전부 그 비장한 모습 그대로다. 오로지 나만이, 이 빌어쳐먹을 미친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었다. 외눈박이 마을에 가면, 두 눈 모두 달린 사람이 장애인 취급을 받는다. ...지금의 내가 딱 이 모습이려나.


"...이제... 쉴래..."


이 모든 것이 차라리 악몽이길 바라며, 나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에 빠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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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뭐야, 이제 와서 누구야.


"...님! 모...가...!"


"...브림?"


"...ㅁㅎ...모험가님!"


"...브림?!"


...믿을 수 없다. 브림이... 내게 말을? 시간이 흐른다는 뜻인가?


"일어나셨군요, 모험가님. 피로하신줄은 알지만, 서둘러야 합니다. 이질적인 기운이..."


...꿈이 아니다. 방금 전까지 발에 물집이 터지도록 걸어온 발이 비명을 지른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이 비명조차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다. 꿈이 아니다. 현실이다.


"감시자들의 장비-------------------------"



"...뭐?"


...아니야.


"...브림."


"---------"


아니라고. 아니야.


"브림!"


"......"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씨발... 씨발...! 브림! 브림!"


"..."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어야만 해.


"...뭐해 브림! 나를 위로 보내줘! 이질적인 요기가... 느껴진다며! 씨발!"


거짓말... 거짓말이다. 이건 아주 질 나쁜 거짓말이야. 악질적인 장난이야. 감시자 브림 녀석, 어지간히 심심했나보구나. 이런 장난같지도 않은 장난이라니.


"브림! 지랄하지 말고 어서 올려보내줘! 바쁘다며!"


"..."


...집어치우라지. 거기서 병신같이 굳어있어라. 차라리 내가 기어 올라가고 말지."


"..."


...움직이지 않는다.


...입도, 손도, 다리도... 모두, 움직일 수 없다. 비명조차 지를 수 없다. 나는... 그 끔찍한 꿈에서 깨어난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고통은 다 무엇인가.


내 눈앞의 브림은 무엇인가.


눈 앞에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요기는 무엇인가.


...애초에... 저게 라르고가 맞긴 한 건가.


...나는... 나는 대체 뭘까.


무엇이 꿈인가, 무엇이 현실인가. 극도로 혼란스러웠고, 괴로웠다. 하지만... 그 고통이 선명해질수록, 그와 함께 잔혹하리만치 선명해지는 진실이 하나 있었다.


'...어둑섬에서, 빠져 나갈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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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그로 억까당해서 결국 3단으로 도망쳐야 했던 범부의 괴로움을 아시오?


이 애미뒤진새끼들 검수를 어떻게쳐해놓는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