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자가 영주일을 마치고 수면을 취하려고 눕기 직전에 울린 에버폰에 구원자는 종종 날라오는 광고성 문자겠거니 하고 처음에는 무시하고 누우려고 했으나 이내 어딘가에서 엄습해오는 오싹한 기운 때문에 빠르게 다시 몸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다. 마치 지금 에버폰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크게 후회할 것이라는 듯


이러한 예감을 배반하지 않듯이 에버폰에서 연락이 온 것은 다름아닌 이브였다.

늦은 밤 아케나인 성당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와줄 수 있냐는 메세지

어지간한 정령들의 부탁도 부담이 가지 않는 선에서는 들어주기 마련이었지만 이번에는 부탁의 의미로 쓰여있었지만 에덴에서 이브가 어떤 의미인지를 잘 알고있는 이상 이는 거절할 수 있는 영역의 부탁이 전혀 아니었다. 차라리 이것이 이브가 가진 강력한 유혹의 권능이었다면 머리 속으로 납득이라도 가능하겠다만 과연 무엇 때문에 부르는 것이었을까.


아케나인 성당에 도착하니 원래라면 당연히 잠겨 있어야할 문은 풀려있었으며 구원자가 문을 당기자 자연스럽게 열렸으며 교회의 가장 안쪽 단상 위에 연락을 보낸 장본인 한쌍의 검은 날개와 뱀과 선악과가 엮인 듯한 지팡이를 제외한 모든 것이 새하얀 여신. 달빛이 스테인드 글라스를 투과하여 비추는데 유리세공 장인들의 의도적인 설계였는지는 몰라도 각각의 창문에서 비추는 달빛들은 마치 의도한 것 처럼 각각의 조명이 되어 단상 위에 있는 이브를 비추는 형상을 띠고 있었다. 만약 이것이 교회를 창조한 건축가와 스테인드 글라스를 만들어낸 유리세공인들이 의도한 결과물이라면 구원자는 찬란한 모습의 비추는 영광을 그들에게 돌렸을 것이다.

이브가 가진 강제적인 유혹의 힘 엮시 구원자는 완강한 정신으로 필사적으로 버티며 이브 앞으로 담담하게 나아갔다. 그러나 그녀와의 거리 단 한걸음을 앞두고 이전에는 있지도 않았을 본능이 갑자기 발하여 구원자는 이브 앞에서 무릎을 꿇고 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브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 처럼 더 가까이 다가오며


구원자의 머리 위에 약간의 물을 붓고는 무언가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말함은 확실하였으나 구원자는 잘 알아듣기 힘들었다. 멸망 직전 초인류의 언어였을지 아니면 먼 옛날 초기의 에덴에서 살아가던 정령들이 사용하던 고어(古語)일지도 모르는 말을 읊조리면서 구원자의 정신이 비몽사몽으로 흩어지기 직전에

마지막에는 향긋한 내음이 느껴지는 기름이 구원자의 머리에 부어졌다.


"그대의 앞날에 언제나 축복이 있기를 그리고 진정으로 이 세상과 모든 영혼들을 구원할 수 있기를."


그 말을 끝으로 정신을 차렸을 즈음에는 아케나인 성당에는 구원자 혼자만이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으나 그 앞에는 아까까지의 일이 환각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이브의 날개에서 떨어진 검은 깃털 하나가 떨어져 있었으며 머리에는 아직도 향유의 내음이 은은하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