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전쟁이 일어나고 25년 후.

문명의 흔적이 방사능 폭발에 쓸려나갔으나 지면 밑에서 문명을 꽃피울 새싹들이 때를 기다리다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그 새싹 중 하나.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에서 선별되고 선별된 초-엘리트 Mr. Fall Boong(폴 붕).



하지만 희망넘치던 시작과는 다르게 황폐해진 고향의 광경은 절망적이었다.

거기다 생전 처음으로 쥐어보는 무기, 사방에서 쏟아지는 악의, 그에 따른 살생.


엘리트라 불렸지만 애팔래치아 땅에서 경험한 일들은 폴 붕의 정신을 좀먹어 가기엔 충분했다.



그러다 어느 날 폴 붕은 한 여인을 만났다.

핵전쟁의 여파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고, 그와 마찬가지로 살아남기 위해 나무를 하던 아낙내 말이다.


그 순간 폴 붕의 머릿속에서 새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여태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는 달콤하고 무자비했다.




"케케켓. 저 여자, 꽤 좋은 걸 가지고 있지 않나?"

"다, 닥쳐!"

"너의 우람한 무기를 겨누기만 하면 쉽게 얻을 수 있어. 왜 편한 길을 놔두고 돌아가려는 거지?"


폴 붕의 마음 속에선 짧은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그러나 지금까지 숱한 일들로 마모된 마음은 미약한 발버둥조차 칠 수 없었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피투성이가 된 여인의 시체에서 물건을 챙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내가 무슨 짓을."


나지막한 혼잣말이 무색하게 그의 마음 한켠엔 오늘도 살아남았다는 안도감이 남아있었다.

미국의 의무교육 아래 자유와 평화를 배워오던 자신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드디어 폴붕의 마음을 산산이 조각냈다.



볼트텍에서 지급한 점프 슈트를 벗어 던지고 넝마 같은 광대 옷을 주워 입은 폴 붕.

이윽고 자신의 일그러진 얼굴을 숨기기 위해 방독면을 쓰고 다녔다.


우스꽝스러운 복장으로 종잇장 같은 익면성을 얻은 그의 행보는 더욱 막장으로 치달았다.

하지만 부서진 마음의 파편, 그 사이에 남아있던 이성은 계속해서 비명을 질러댔다.



실낱같은 이성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그마한 밀폐 공간을 세운 폴 붕.



그 안에는 자신이 앉을 수 있는 의자 하나와 쓰레기통 하나만이 덩그러니 노여 있었다.

폴 붕은 그 앞에 앉아 이성을 키워나갔다.



"나 폴 붕은 쓰레기의 삶을 살았다."


자기객관화.

고개를 돌리고 싶은 추악한 행보를 돌아보며, 쓰레기통을 바라보던 폴 붕은 끊임없이 되냈다.


아직까지 애팔래치아엔 미치광이 광대옷 살인마의 모습을 봤다는 목격담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목격담이 사라지는 그 날, 그 날이 바로 폴 붕이 어떠한 방식으로던 안식을 찾은 날일 것이다.


-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