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게는 20년 전, 길게는 30년 전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풍경이 있었다. 태권도복을 입고 문방구 앞의 조그만한 오락기로 킹오파를 하던 초등학생들, 오락실에서 철권을 하던 초등학생을 윽박지르던 불량학생과 그 불량학생을 끌어내던 오락실 주인, 더 이전에는 군인과 달심으로 싸우다가 스트리트 파이터의 참 뜻을 실현하던 중학생들까지, 이젠 누군가의 기억 한 켠에 자리잡은 모습들이다.

게임은 대중화되고, 콘솔게임 역시 점점 입지를 넓혀가지만, 격투게임은, 그리고 학생들이 그것을 즐기는 모습은 이제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세상에 특이한 씨앗을 심는 누군가는 존재하기 마련이었다.

토요일, 쓰잘데기없이 화창한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와 함께 남학생 하나가슬리퍼를 끌고 학교로 걸어간다. 운동장과 떨어진 콘크리트 길을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운동장에선 남자애들이 모여서 축구를, 그리고 좀 더 구석에선 농구를 하고 있었다. 아마 다들 성적과 포상이라는 떡밥에 동아리를 만들어 활동중인 듯 했다. 지방교육청에서 하는 일 들이 그러하듯 목적과는 다르게 모여서 놀고싶은 애들이나 축구니, 게임이니 하는 동아리를 만들고 창의활동이니 진로니 그런 것에 관심있을 학생은 그냥 학원에 가 있는 그런 무의미한 제도였다.

학교 건물로 들어온 남학생은 애초에 동아리에 관심이 있어서 학교에 온 것은 아니었다. 여타 남학생처럼 게임 같은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게임 동아리에 들어봐야 만만하다고 조롱이나 당할 것이 뻔했으니, 그냥 모자란 부분을 다른 곳에서 떼우고 토요일엔 집에나 있는 것이 더 편했다.

두고 간 프린트를 찾으러 반까지 온 남학생이 묘한 짜증과 함께 오래된 나무문을 연다. 분명히 비어있어야 할 교실에서 화들짝 놀라는 누군가의 모습에 남학생도 덩달아 놀란다.

 

어이 씨, 뭐야”

 

어안이 벙벙한 모습, 창가쪽 책상에 앉아있는 여학생, 그리고 천장 높이 메달려 있는 티비 화면에는 척 봐도 게임 그래픽 같아보이는 것이 출력되고 있었다.

 

뭐해?”

 

고요한 정적을 깨는 남학생의 목소리에 여학생이 게임 패드를 내려놓는다. 자기 자리에서 프린트만 갖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워낙 황당한 광경에 남학생도 서서 눈만 끔뻑이고 있었다.

이제 본 지 한달 된 관계지만, 남학생이 생각하기에 여학생은 평소 게임이랑 어울리는 이미지도 아니었거니와 그것도 학교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을 가져다 두고 학교의 pdp 모니터로 게임을 하는 광경 자체가 워낙에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게임…”

아니, 그러니까 좀 이해를 시켜줘봐, 뭐 동아리 같은거야?”

응”

혼자?”

응…”

동아리가 혼자도 돼?”

사진 첨부해서 활동지만 써서 내면 돼”

뭔 게임이야?”

 

그래, 그런가보다 하는 넓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2022년에, 여학생이 주말 학교에서, 플레이스테이션을 가져다두고 게임 동아리 활동을 할 수도 있지, 흔한 광경 아닌가.

 

스트리트 파이터”

어디서 들어본 거 같은데”

유명하니까…”

 

그나마 이런 저런 게임에 대한 지식이 있는 남학생의 머릿 속에도 격투게임이란 것과 되게 오래된 게임이란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해봐”

뭐?”

아니, 구경이나 좀 하게…나도 게임 좋아해”

 

뻔뻔하달지, 당당하달지, 여학생의 뒷자리에 앉아 게임을 해보라고 턱으로 패드를 가리킨다. 물론 남자도 소심한 아싸 스타일인지라 다른 남학생이나 혹은 좀 노는 여학생이었다면 눈치나 보다가 슬그머니 나가겠지만, 여학생은 조용한데다 소심한 타입이었으니, 말 좀 붙인다고 짜증을 내거나 그러진 않을 듯 했다.

남학생의 예측대로, 여학생은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패드를 쥔다. 푸른 빛 바탕의 플레이스테이션 로비에서 버튼을 누르자 다시 게임화면이 켜진다.

 

스트리트 파이터면 춘리 나오는거 아니야?”

알아?”

춘리, 장기에프, 달심…말곤 몰라, 팔 늘어나고 막”

 

사실 그마저도 스트리트 파이터라는 게임에 관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오타쿠적 성향이 있던 남학생이 이리저리 둘러보다 알게 된 정보의 말미였다. 사실 춘리란 것도 야한 만화나 그림으로나 봤지 무슨 기술을 쓰는지, 알 턱이 없었다.

 

뭐 그런 애들은 안나오나? 내가 봤던건 옛날 게임이라”

있어, 셋 다”

어, 나도 해봐도 돼?”

 

뭐 하는 건지는 몰라도 무언가를 연습하듯 똑같은 패턴만 반복하던 모습에 질린 남학생은 패드를 건네받는다.

 

이거 쓸 줄 알아?”

플스 몇 번 해봤어”

그런데 너…”

 

흰색의 플레이스테이션 패드를 건네주던 여학생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일평생 여자라고는 인연도 없던 남학생에게 면전에서 보는 여학생의 모습은 이성에 대한 묘한 자극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름이 뭐더라…?”

 

남자는 옷깃만 스쳐도 자식계획까지 생각한댔던가, 여학생의 모습에 잠깐이나마 청춘의 로망을 상상해보았지만, 같은 반 친구의 이름도 모르는 수준인 자신의 존재감만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야 아무리 그래도 한 달은 같은 반이었는데 이름도 모르냐…”

미안”

 

소심한 여학생의 성격을 생각하면 아마 저것도 큰 결심을 하고 물어본 것이리라, 물론 그 결심도 남학생의 성격이 소심해서 큰 소리 치지 못 할 것이란 것 정도는 알고있었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도인…그래 뭐…”

 

의외로 자기 이름을 남에게 말하는 것 자체가 꽤나 멋쩍은 일이다. 고개를 괜히 꺾어본 주원은 그대로 패드를 쥐고 캐릭터를 하나하나 둘러본다.

 

나는 고다희…”

알아, 반 애들 이름 정도는 외워라”

그래…”

오, 춘리”

 

연습모드의 창에서 캐릭터를 둘러보다, 그나마 익숙해보이는 캐릭터를 고른다. 파란 색 치파오를 입은 여성 캐릭터, 어디선가 많이 봤던 춘리였다. 도인이 캐릭터를 고르자 방금 전까지 다희가 연습모드의 상대 캐릭터로 골랐던 캐릭터가 자동으로 셀렉트된다.

 

얜 뭐야?”

루크”

끔찍하게 생겼네, 장수돌침대 마스코트도 아니고”

 

인트로가 끝나고 연습모드로 들어오자 도인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어렴풋한 경험으로 패드를 조작해본다. 그나마 듀얼쇼크를 만져본 경험으로 패드를 조작해보지만, 장풍이라던가, 뭔가 있어보이는 기술들은 나가지 않는다. 물론 춘리의 생김새만 알 뿐, 애초에 있어보이는 기술이 뭔지도 모르는 도인의 입장에서는 원래 이런건가, 하고 고개만 갸웃거릴 뿐이었다.

 

얘는 그런거 없어?”

어떤거?”

필살기라던가 뭐 그런거”

모으기캐라 밑으로 모았다가 위로 올리면서 쓰면 돼”

뭘 모아, 기? 저거 차있으니까 되는거 아니야?”

 

도인이 화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붉은색과 푸른색의 게이지가 번갈아가며 점멸하는 것이 보인다.

 

격투게임 같은거 하나도 안해봤어?”

중학생때 킹오파랑 철권은 해봤는데, 스트리머가 하는거 보다가”

킹오파에도 모으기 캐릭터 있잖아”

그게 뭔데”

레오나 같은거 기술 쓰려면…”

레오나 안해봐서 몰라”

줘봐”

 

결국 패드를 건네받은 지 3분도 안돼서 다희에게 다시 패드를 건네준다. 잠깐 앉아있던 춘리가 일어나자마자 팽이처럼 빙글빙글 도는 희한한 기술을 쓴다. 사실 기술을 쓰는 것 자체는 별로 특이한 게 없음에도 새로운 무언가가 나오자 도인의 눈이 크게 뜨인다.

 

어떻게 했어?”

이걸 이렇게 밑으로 땡겼다가 위로 올리면서 발차기”

 

다시 패드를 건네받은 도인이 다희가 가르쳐 준 대로 스틱을 밑으로 눌렀다가 위로 올리며 발차기를 날린다.

 

안되는데?”

일어나면서 눌러야지”

 

다희가 잡을 때 마다 기공장이며 스피닝 버드 킥 이라고 외치며 같은 기술을 쓰지만 도인이 할때는 다섯 번에 한 번 나갈까 말까 하는 극악의 확률을 자랑했다. 도인은 다년간의 게임 플레이를 통해 본인의 컨트롤이 그래도 중간은 간다 생각했는데, 게임과는 한참 떨어져보이는 다희가 오밀조밀한 손으로 자신은 쓰지도 못하는 기술을 능숙하게 쓰는 걸 보니 급격한 피곤이 찾아왔다.

 

캐릭터를 그지같이 만들었다…다른 애 해도 돼?”

응”

뭐가 좋을까…”

연습모드 말고 스토리 모드 시켜줄까?”

컴퓨터 깨는 거?”

응”

어, 그게 낫겠다”

 

사실 연습모드에서 기술 써봐야 별로 재미는 없다. 어렴풋이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던 기억으론 다른 사람이 맞은 편에서 잇기 전까지는 컴퓨터나 깨면서 손을 풀고 그랬던 기억이 난다. 물론 플레이스테이션에 500원씩 넣어가며 게임을 하진 않을테니 아마 스토리 모드가 따로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다.

 

얘가 이쁘네”

주리?”

 

머리에 소라빵 두개를 얹은 것 같은 헤어스타일은 다른 캐 못지 않게 아스트랄했지만 그래도 훨씬 요란하게 생긴 남성 캐릭터에 비하면 굉장히 미인 스타일이었다.

 

교복 이쁘다”

그런 취향이구나”

게임 캐릭터니까 그런거지”

 

게임 캐릭터니까 3톤 염색에 체인 달고있는 교복이 납득 가능한 것이지 실제로 저런 사람을 보면 제정신인지 의심부터 할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걸려? 1시간?”

“10분 정도”

되게 짧네?”

스파5가 싱글이 좀 별로야”

 

다희가 이야기 한 대로, 격투게임 초심자인 도인이 커맨드 약간만 보고 하는데도 스토리를 미는데는 별 지장이 없는 정도였다. 물론 오히려 대놓고 큰 기술을 날려도 컴퓨터들이 맞아줬으니 초보자 입장에선 그게 나은 듯 했다. 실제로 다희라면 한 손으로도 깰 스토리모드를 생각보다 신이 나서 하고있는 도인을 보고있자니 그래 그런가보다 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다른 사람들이랑 붙는 건 없어?”

있는데, 여기는 랜선이 없으니까”

핫스팟 켜서 와이파이 잡으면 안되나? 플스4는 와이파이 잡히잖아”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형상화 한 듯한 도인의 의기양양한 모습에 다희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하지만 그런 것쯤 눈치채지 못한 도인에게 조곤조곤히 그의 말을 반박한다.

 

격투게임은 와이파이로 하면 렉이 심해”

아, 그래?”

나중에 시켜줄게…사진 한 장만 찍어줄래?”

아, 동아리 있잖아”

응?”

그거 맨날 혼자 이러고 노는거야?”

뭐…그렇지”

그럼 나도 해도 돼?”

상관은 없는데…”

 

도인의 머릿속에는 괜히 불편한 남자애들도 없겠다. 여차하면 주말에 학교에 잠깐 나와서 게임이나 하거나 시간이나 떼우다가 약간이나마 성적 보정도 받고 운 좋으면 연말 학교 행사때 상금도 받을지 모를 일 아닌가 하는 계산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그럼 월요일에 신청서 받아서 줄게”

그런것도 써야해?”

응, 선생님이 다른 사람 들어오면 모아서 챙겨두랬어”

알았어”

 

다희의 핸드폰을 건네받은 도인이 패드를 쥐고있는 그녀의 사진을 찍는다. 벌써 12시, 햇빛이 직접 들이치진 않지만 방 안을 가득 밝히는 선명한 천연 조명에 비춰진 다희의 모습은 어깻죽지에서 양갈래로 묶은 머리카락이며 고등학생인데도 젖살이 덜 빠진듯한 둥근 뺨이며 오밀조밀한 손까지, 꽤나 귀여워보였다.

 

이렇게만 찍으면 돼?”

응, 평소에는 내가 화면이랑 게임기만 찍었는데, 사람이 나온 사진도 하나 정도는 필요할 거 같아서”

 

액정에 남겨진 다희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도인이 그녀에게 핸드폰을 건네준다.

 

가볼게”

응”

 

선이며 게임기를 정리하던 다희를 뒤로 두고 프린트를 챙긴 채 도인은 교실 밖으로 걸어나온다. 아무도 없는 복도에 차있는 공허감이 유독 짙게 느껴진다. 슬리퍼를 끄는 발소리가 유달리 크게 느껴진다.


사실 여기다 올려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을 좀 했음, 원랜 노벨피아에 올리려고 해서

격겜 얘기긴 한데, 또 격겜보단 성장이 메인인 글이라

근데 뭐, 재미없으면 알아서 거르겠지


나도 격겜 십초보라 뭔가 오류가 많겠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