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학교가 끝나고 집에 와도 날이 그다지 어둡지 않다. 정규수업이 끝나고 자습 2시간까지 한 후에 하교하는 다희는 도착하자마자 책가방을 집어던지고 교복을 훌렁 벗어던진다. 평범한 고등학생이 사는 집이라면 보나마나 엄마가 교복 똑바로 벗어두라고 잔소리를 했겠지만 다행히 그런 벼락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수수한 학생용 브래지어까지 모두 탈의한 다희는 곧장 화장실로 들어간다. 샤워기에서 여름이 다 되어가는 날씨에 이마 라인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혔지만 그렇다고 찬물로 샤워를 할 만큼 그녀의 몸은 와일드하지 않았다. 맨손을 슬쩍슬쩍 들이밀며 물 온도를 체크하던 다희가 몸에 샤워기를 가져다댄다.

 

"아..."

 

게임하고싶다는 뒷 말은 마음속으로만 삼킨다. 화장실 거울에 수증기가 뿌옇게 앉을수록 다희의 머릿속도 뿌연 안개가 끼는 것 같았다. 복잡한 생각도 잠시나마 안개속에 묻어두고 그 위에 기분좋은 상상을 덮어씌운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닦는다. 화장실 문을 열자 수증기가 위쪽 문틀을 타고 넘어간다. 가벼운 원피스 스타일의 일상복을 입고 머리를 말린다. 멀티탭의 스위치를 켜고 어깨 언저리까지 오는 머리를 드라이기로 말리며 컴퓨터의 전원을 올린다. 케이스에 요란번쩍한 무지갯빛 조명이 점멸하기 시작한다. 덩치 큰 사람이라면 좁다는 것이 확 체감될 만한 8평짜리 원룸이었지만 작은 체격의 도희에게는 그다지 불편할게 없는 공간이었다. 바퀴달린 의자를 끌어당기고는 몸을 일으켜 앉는다. 따뜻하게 달아올랐던 몸에 식어있던 가죽이 닿자 몸이 기분좋게 으슬으슬해진다. 감정이 풍부한 편은 아니지만 이럴때는 괜히 히죽거리며 웃음이 나온다. 그녀가 몸을 일으킴에 맞추어 다희의 가벼운 몸을 받쳐주는 등받이가 딸려 올라온다. 서로 브랜드가 다른 듀얼모니터의 한 쪽에는 남자 아이돌들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이, 다른 한 쪽에는 오늘 뭘 할까 고민하다가 우선 켠 스트리트 파이터5의 로비 화면이 띄워져 있었다.

 

"킹오파할걸 그랬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스틱을 몸 쪽으로 가져다 붙이고는 랭크매치 설정을 켠다. 게임이 끝물이 되어서인지 미묘하게 매칭이 느려진 것 같았다. 스트리트 파이터6도 pv가 공개되었으니 사람들이 신작이 나올때 까지는 의욕을 잃는 것이 당연했다. 물론 그럼에도 자유롭게 매칭이 되는 게임은 정말 몇개 되지 않았다.

 

"진짜, 타워 죽어버렸으면"

 

철권7, 스트리트파이터5 지금 시점에서 원활하게 온라인 매칭을 할 수 있는 게임은 이 정도였고 발매된지 얼마 되지 않은 킹오파15 정도는 매칭은 됐지만 추세를 보니 곧 빠질 것 같았다. 그나마도 벌써 매칭이 느려지기도 했고. 동접수는 많은데 타워같은 이상한 매칭 시스템을 메다 꽂은 길티기어는 굳이 게임 잘만들고 왜 저런 짓을 할까 하는 생각이 들기 충분했다.

그 정도를 제외하면 원활하게 매칭이 되는 격투게임은 없었다. 프리매칭이라던가 로비매칭을 인터넷 커뮤니티, 단체 톡방, 디스코드 등에서 사람을 구해서 플레이 해야하니, 소심한 다희에겐 언감생심이었다.

루시아, 아키라를 번갈아 플레이한다. 주로 플레이하는 캐릭터들은 아니지만 게임 자체가 끝물이 오니 티어나 랭크보다는 그냥 안해봤던 플레이들을 해보고싶었다. 그나마도 몇 년을 했던 게임이니, 요즘은 스트리트 파이터 말고 다른 게임이나 마이너한 격투게임들을 켜서 트레모도 돌려보고 하며 무료함을 달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격투게임 커뮤니티도 계속 들여다보게 되고, 그나마도 없으면 어설프게 배운 일본어를 파파고까지 돌려가며 정보를 찾고는 했다. 딱히 밖에 나가지 않는 만큼 인터넷으로 좁은 세상을 탐험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게임 하나 하나에 감정이 동요했는데, 요즘 스트리트 파이터를 하면 승패에 연연하지 않아졌다. 그 이유를 딱히 마음속으로 부정하지는 않는다.

 

"질렸어"

 

스틱을 잠시 밀어두고 기지개를 켠다.

 

"질렸어, 질렸어"

 

하품과 함께 늘어지듯 질렸다고 말하며 고개를 찡그린다. 팔과 손목을 쭉 늘리고 다시 손을 눌러준다.

입으로는 질렸다고 말하지만 딱히 스트리트 파이터를 하기 싫다던가 격투게임이 질렸다던가 그런 뜻은 아니었다. 다희가 원하는 사실은 생각보다 단순하고 분명했다.

 

"스파6 언제 나와"

 

신작, 새로운 자극, 새로운 플레이가 필요했다. 물론 격투게임 신작이 안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저 만한 대작이 나와야 고여버린 격투게임 판이 흔들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베타라도 빨리 하던가"

 

지금도 가끔씩 pv영상을 돌려보고는 한다. 학교생활에 그다지 기대할 것이 없는 그녀에게, 마땅한 취미도 딱히 없는 그녀에게 기대할 만한 몇 안되는 즐거움 중에 하나였다. 이것마저 망해버린다면 아마 성인이 될 때 까지 그다지 즐거운 일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콘솔게임기를 갖고 있는 만큼 다른 게임들을 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봐야 1회차 정도, 남들이 기대하는 AAA게임이라고 해도 20시간, 30시간 하고는 그만둔게 태반이었다. 그러니 하루, 한 달, 일 년을 너머 몇 년씩 붙잡고 있을 수 있는 격투게임 신작이 망해버린다면 그것은 정말로 인생의 큰 장애물이 될 것이 분명했다.

2005년생, 킹오브파이터즈11이 출시됐을 때 태어났고, 어린이집에서 유치원으로 넘어갔던 5살 때 스트리트 파이터4가 출시되었다. 세 자릿수 덧셈을 배우던 초등학교 3학년때 길티기어xrd가 출시되었고 초등학교 5학년 때 오빠의 어깨너머로 보고 가끔 해보았던 스트리트 파이터5와 플레이스테이션4를 선물받고 격투게임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년 뒤인 초등학교 6학년때 나이차가 컸던 오빠가 취직을 했고 철권7을 스팀 계정에 선물해주었다.

지금 나이가 18살, 고등학교 2학년이고 스트리트 파이터5를 처음 한게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니, 인생의 1/3을 즐긴 게임이었다. 그런 게임의 후속작이 망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인생의 큰 절망이 될 것이었다.

격투게임 커뮤니티에서는 늘 했던 말들이 되풀이된다.

 

'스파6 베타 언제함?'

'플매할 플매'

'넥슨 이새끼들 사람 맞냐?'

'젖격7이랑 솔칼7이랑 뭐가 먼저 나오냐?'

'젖배구4'

'블태그 3.0 언제나오냐고 모리야'

'타워삭제해타워삭제해타워삭제해'

'멜티의 진 히로인 사츠키'

'아직 출시도 안된 새끼가 어떻게 히로인인www'

 

이 외에도 쓸데없는 소리나 밸런스를 성토하는 글, 평범한 오타쿠같은 글들도 많았지만 역시 새로운 캐릭터, 새로운 작품을 원하는 목소리가 꾸준하다. 최근에 나온 던파 듀얼, 킹오브파이터즈15가 연달아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였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스파6이 그렇게 재미있을까"

 

다희는 조용히 되뇌인다. 스트리트 파이터6이 나온다면 자신이 해본 게임중에 후속작이 나오는 게임은 그것이 처음이 될테니, 이상할 것도 없었다. 신작이 나온다는 두근두근한 느낌을 너무 많이 느껴봐서 단순히 새로운 자극을 위해 신작과 신캐릭터를 요구하는 노인네들과는 느끼는 감정부터가 달랐다.

하기사 격투게임 커뮤니티의 대부분 유저들은 킹오브파이터즈가 오락실에서 버전업이 되는걸 실시간으로 보고 어릴때 스트리트파이터2를 오락실에서 해보았단 사람들도 있을 정도니, 새로운 무언가를 느끼는 감정이 무뎌져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잠자리를 깔고 유튜브와 격투게임 커뮤니티를 번갈아 보던 도중에 다희는 잠자리에서 몸을 홱 일으킨다. 급한 손놀림으로 커뮤니티에 무언가를 톡톡거리며 글을 쓴다.

 

 

'뉴비한테 격겜 시켜줄건데 추천받음, 철권7, 스파5 빼고'

 

 

꼭 무언가 해야할 일은 자기 전에 생각난다. 동아리 활동에 새 친구가 오기로 한 것도, 스트리트 파이터를 했을땐 흥미를 못 느끼는 것 같아 괜히 다른 게임을 시켜주겠다고 얘기한 것도 모두 떠오른다. 다행히도 글을 올린지 얼마 되지 않아 댓글들이 수두룩하게 달린다. 뉴비, 격투게임 커뮤니티에서는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용어였다.

 

'그거 두개 빼면 뭘 시키죠'

'그렇다면 저 멜티블러드 타입루미나'

'씹덕이면 길티스트 시키고 씹덕 아니면 길티스트 시키셈'

'14 시키고 격겜같은거 앞으로 손도 못대게 해라 진짜'

'여캐 목록 보여주고 꼴리는 애 있다고 하면 걔 있는 겜 시켜'

'어차피 롤이나 다른거 하던 놈이면 금방 접음, 암거나 시키셈'

'인방충 갓겜 98'

'솔직히 던파는 해봤을거같은데 던격 어떰, 동접 30인 갓겜'

 

별로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역시 그다지 도움이 되는 답변은 없다. 하기사 다희 본인도 그런걸 기대하며 올린 글은 아니었다. 단순히 뉴비와 새로운 유저에 목말라하고있는 아저씨들에게 장난 겸 해서 올려본 글이었다. 답변을 보며 서랍장에서 여러 격투게임들의 패키지를 가방에 담다가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든다.

 

'얼마 안하고 안한다하면 어떡하지?'

 

보통 저런 반응이 정상이었다. 하겠다는 사람이 많으면 격투게임의 인식이 이러지도 않았겠지. 도인도 아마 금방 질려하거나 애초에 재미를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퇴부신청서도 준비해놔야하나...'

 

어차피 혼자서 게임을 하는 것에는 익숙해져있었다. 커뮤니티의 아저씨들은 가끔씩 다희가 태어나기도 전에 친구나 다른 누군가랑 둘이서 게임을 했던 썰을 풀곤 했지만 애초에 2010년대 들어서 격투게임을 접한 다희는 처음부터 온라인 매칭 아니면 혼자서 게임을 돌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딱히 들어왔던 사람이 나간다고 해서 아쉬울 것도, 섭섭해 할 것도 없었다.

 

'그래도 재밌게 했으면 좋겠는데'

 

다만, 자기가 재미있게 하는 무언가를 타인도 재미있게 즐겨주었으면 하는 마음 정도는 남아있었다.

캔버스 재질의 애코백에 플라스틱 패키지가 빽빽하게 쌓여간다.



들여쓰기 하나 하겠다고 8,900원을 지른 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