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탁, 탁, 탁,


  "야, 넌 걔한테 뭐 받냐?"

  "나? 오렌지맛 사탕. 오렌지 냄새 난대."

  "오렌지는... 살짝 맞는 듯? 나랑 바꾸자, 나 청포도맛 별로."


탁구대 건너편에서 여우가 오렌지 사탕을 건넸다. 백구 용이는 사탕과 주황색 탁구공을 주머니에 넣은 다음 여우와 체육관을 나갔다.


  "용이용이~!"


용이가 교실에 들어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난 청색 늑대가 용이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쓰으읍 하아아... 따뜻해~"

  "아니 땀 냄새를 왜 맡아, 이 변태야."

  "운동한 냄새는 멋있는거니까~"


  "킁킁, 우리 강아지 주호랑 탁구치고 왔어요?"

  "헉... 맞음."

  "잘했어요~ 여기 사탕~"


청색 늑대는 용이를 마구 쓰다듬고 얼굴을 등에 비비다가 쌩하고 교실 뒤로 가서 다른 친구들한테도 같은 짓을 반복했다. 늑대들 후각은 도무지 공감할 수가 없는 영역이구나 하고 용이는 생각했다.


  "킁킁, 오늘 범이 냄새는... 여기 치즈 줄게~"


  "헤헤, 폭신하다... 형설이는 살찐 게 아니라 털찐 거야! 말랑파우 줄게~"


  "킁킁, 묘훈이는 오징어땅콩 줄게~"

  "랑윤아... 무슨 뜻이야?"


파랑윤의 털은 반짝이는 하얀색 위의 시원한 물빛 하늘색이었다. 안그래도 늑대치고 — 아니, 개 치고도 쪼매난 편인데 눈은 사탕처럼 땡글땡글 해가지고 순 강아지 같았다. 그럼에도 늑대 자존심은 확실한 지 눈에 힘을 주고 다니는게 퍽 귀여웠다.


  "아악! 잘못했어요, 거긴 안돼요 아아악!!!"


그런 이상한 강아지가 남의 반 교실을 헤집고 다니면 사춘기 짐승들 신경을 거스를 법도 하지만, 어디서 계속 가져오는지 먹을 걸 찔러주면서 (대체로) 좋은 말을 해주니까 반응은 썩 괜찮았다. 사실 용이네 교실 밖에서는 (대체로) 멀쩡한 스포츠보이였다.


  "풉... 주호, 쟤 중학교 때도 저랬다고 했나?"

  "아니? 원래도 약간 관종이긴 했는데."

  "왜 우리 반에만 와서 저러는지 알아?"

  "난 모르지."


  "앗, 주호도 까먹을 뻔했네. 여기 사탕~ 그럼 멍멍이들 안녕~"

  "어... 안녕~"


2.


탁, 탁, 탁,


점심 시간 창밖 너머로 체육관에서 탁구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랑윤은 창가에서 체육관을 내려다 보고있었다. 랑윤은 창밖이 아닌 등 뒤에서 다가오는 용이의 냄새에 화들짝 놀란 듯 했다.


  "엇, 용구 안녕~"

  "안녕~ 너 뭐하냐."

  "멍 때리는데!"


용이는 랑윤의 자리에 앉으며 창틀의 랑윤을 올려다 보았다. 랑윤의 물빛 털과 청색 눈동자가 여름 하늘을 바탕으로 반짝였다.


  "야, 나 청포도 말고 다른 맛 주면 안돼?"

  "안돼! 돌아가!"

  "청포도맛 별로라서."


용이의 말에 랑윤은 돌연 입을 닫고 큰 눈으로 용이를 바라보았다. 용이는 왠지 가슴 안쪽이 움찔해서 눈을 피했다.


  "... 근데 나한테 어딜봐서 청포도 냄새가 나? 개 샴푸 냄새 아냐?"

  "아냐 진짜 나! 등에서 맡으면 확실한데. 잠만 내가 털 뜯어줄게!"

  "야야야 꺼져ㅋㅋ"


반으로 돌아간 용이는 가만히 있다가 등의 하얀 털을 조금 뽑아서 킁킁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3.


탁, 탁, 탁,


  "매치 포인트! 스겜 스겜~"


오늘은 탁구대 옆에 랑윤이 자연스럽게 끼어있었다.


  "비디오 판독 결과~ 선 맞았습니다! 용이 압승!"

  "쯧, 용구 이 새끼 또 매수했네. 난 먼저 간다, 수고-"


랑윤이 잽싸게 주호의 자리를 차지하고 하얀색 탁구공을 꺼냈다. 용이는 랑윤의 낮고 빠른 공격을 겨우겨우 수비해 나갔다.


  "... 근데 랑윤이 너 배드민턴부 연습 계속 안 가도 돼?"

  "더워서 못해먹겠어~ 그리고 대충 해도 우리 학년 애들은 이겨!"

  "와, 늑대들 진짜 적폐..."

  "어허, 경기에 집중!"


랑윤은 용이를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용이는 제 몸에 매미처럼 달라붙은 랑윤과 함께 체육관을 나갔다.


5교시 수업을 듣는 용이는 쏟아지는 졸음에 포도 사탕을 꺼내 입에 굴렸다. 역시 달기만 하고 상쾌한 '뭔가'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랑윤의 사탕이 포도맛으로 말없이 바뀌었지만, 이것도 용이의 책상 서랍에 계속 쌓여갔다.


4.


탁, 탁, 탁,


'수학 B반: 이번주부터 8반으로' — 칠판에 글을 적은 반장이 교실을 나가는 동시에 용이가 들어왔다. 용이는 랑윤이네 반에 딱히 친한 사람이 없어서 랑윤의 옆에 앉는다. 용이는 책을 펼치고 청포도 사탕을 꺼내서 입에 넣었다.


  "안녕~ 너 요새 우리반에 잘 안 오네."


랑윤이는 대답없이 용이를 바라보다가 혀를 쭉 빼고 헤 하고 웃어보였다. 용이는 그 모습을 오래 쳐다보지 못하고 책상에 엎드려버렸다.


  '누가봐도 청포도 냄새는 지한테서 나잖아.'


창가 자리의 작은 늑대가 꼬리를 흔들며 청포도 사탕을 까득까득 깨물어먹는 모습을 책상에 엎드린 백구가 지켜보았다. 어제보다 쨍해진 하늘에 파랑윤의 털이 더욱 빛나 보였다. 햇빛을 받은 용이 자신의 흰 털도 그만큼 빛나는 것 같았다. 


  "랑윤, 혹시 청포도 사탕 남아?"

  "왜~?"

  "이거 청포도맛 마지막인데... 먹다보니까 포도보다 맛있더라고."

  "히거 하나 하져가"


랑윤이 혀를 꺼내서 사탕 두 조각을 보였다. 용이는 피식 웃고는 랑윤의 볼 털을 잡고 쭈욱 당겼다.


사탕이 다 떨어진 용이는 수업에 금방 골아떯어졌다. 한참 뒤 잠에서 깨어 교실로 돌아가는데 바지 주머니에서 청포도 사탕이 만져졌다.


5.


퍽, 퍽, 퍽,


  "용구, 스텝 조금만 더 빨리~"

  "헉, 헉, 내가 뭐하고 있는거지?"


랑윤의 배드민턴부 초대에 똥개 훈련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용이는 자신이 운동부족인 게 아니라 랑윤이가 말도 안되게 빠른 거라고 생각했다.


  "야, 잠만 쉬었다, 악!"


형광색 셔틀콕이 용이의 이마에 명중하고 용이가 그대로 쓰러졌다.


  "쏘리~ 용구 생각보다 소질 있는데!"

  "헥... 야... 오지마... 저리가..."


랑윤은 용이의 땀을 아랑곳 않고 배를 쓰다듬으며 사탕을 바지 주머니에 쑥 집어넣었다. 정신을 차린 용이는 체육관 바깥의 음수대로 도망갔다.


푹푹 찌는 날씨에 구름이 두꺼운 이불처럼 덮여서 체육관 바깥이 오히려 찜질방처럼 숨이 막혔다. 용이가 잔디에 풀썩 앉자 곧 랑윤이도 나타나서 옆에 기대앉았다. 랑윤의 냄새는 털 색만큼이나 시원했다.


  "아고, 오늘 잘했어~"

  "야야, 나 지금 땀... 그만 좀 만져-"


용이가 랑윤의 손을 뿌리친 다음 웃통을 벗고 옷을 탁탁 털었다. 지저분하게 젖은 흰 털의 몸뚱아리가 꼭 랑윤의 머리 위에 떠있는 구름같았다.


  "하아 살겠다. 킁킁, 어우... 이래도 나 청포도 냄새 난다고 할거야? 크크"

  "..."


  "사탕 잘 먹을게. 아, 예전부터 궁금했는데 사탕이랑 과자는 대체 어디서 다 가져오는거야?"

  "..."


  "우리 반 애들은 과자 창고 짬처리 끝나서 안 오는갑다 하고 은근 아쉬워하더라고."

  "..."


  "근데 왜 말이 없냐. 어, 야 괜찮아?"

  "..."


랑윤이는 꼬리를 가랑이 사이에 넣고 숨을 거칠게 쉬고 있었다.


  "배 아파? 쌤 부를까?"

  "... 나"


  "뭐라고?"

  "난다고, 그 냄새! 존나게 나!"


랑윤이 홱 돌린 주둥이가 용이의 코 끝에서 멈췄다. 랑윤의 입에서 달짝지근한 청포도 냄새가 풍겨왔다. 백구 용이는 늑대의 눈이 너무 가까워 고개를 내렸다. 어느새 땅을 짚은 손 위로 랑윤의 손이 올라와 있었다. 용이의 눈은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다.


  "야, 야... 잠깐만... 으웁!"


용이가 속공을 허용하고 말았다. 혀에서 머리가 띵할 정도로 진한 청포도 맛이 느껴졌다. 강렬한 단맛에 입 안이 다 허는 것 같았다. 저릿한 손을 잡은 랑윤의 손아귀에 힘이 점점 세게 들어갔다. 용이의 완전한 패배였다.


풀 냄새가 진해지더니 구름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6.


  "늑돌이 안녕~"

  "어라, '안녕~' 이거 완전히 옮았네! 안녕~"


이제는 용이가 랑윤이네 교실을 찾아가는 모양이었다.


  "쓰으읍 하아아... 청포도 냄새."

  "용구 더워... 그것보다 강아지 취급하지 말아줄래?"


용이는 랑윤을 인형처럼 무릎에 앉히고 랑윤의 머리를 턱으로 쓰다듬었다.


  "따뜻하다고 먼저 안아준 건 너잖아. 귀여워..."

  "자... 자꾸 귀엽다고 하면 사탕 안 줄거야!"


사실 랑윤은 사탕을 살 돈이 거의 남지 않았다.


  "용구, 대회는 좀 생각해봤어? 합숙 때문에 쌤한테 일찍 말씀드려야 돼~"

  "맞다 그거. 할게."

  "아싸!!!!!! 일로와!!!"

  "야, 야- 애들 보는 앞에서는 좀..."


무더운 여름 교실이 청포도 냄새로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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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학교라서 샤인머스캣 탕후루는 없다고 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