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대전에서 가장 많은 전과를 거둔 유보트 함장은 U-99를 지휘한 오토 크레치머였지만, 가장 많은 전과를 거둔 잠수함은 U-48 이었음. U-48은 1939년 4월부터 1941년 6월까지 약 2년간 현역으로 활동했으며, 약 300일의 작전기간 동안 12회의 초계를 수행하며 51척의 적선과 1척의 군함, 총 약 30만 톤을 격침시키고 3척을 손상시키는 혁혁한 전과를 올렸음. 단순 계산으로도 일단 바다로 나가면 6일에 1척, 일 평균 1,000톤 정도의 전과를 기록했다는 것임. 



많은 사람들이 연합군의 대잠 방비가 취약했던 저 전쟁 초기를 소위 '행복한 시간' 이라고 부르는 것과 달리 당시에도 유보트들의 상황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음. 사실 1939~1945년 간 독일 잠수함대의 손실률과 사망률은 생각보다 극적인 변화를 보이지 않았으니까. 그런 상황을 고려하면 2년간 3명의 유능한 함장을 맞이하고 끝까지 살아남은 U-48은 가히 행운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임.


1. 헤르베르트 슐체 : 약 17만 톤 격침 / 백엽 기사 철십자상 / 전과 8위

2. 한스 루돌프 뢰징 : 약 6만 톤 격침 / 기사 철십자상 / 전과 38위

3. 하인리히 블라이히로트 : 약 15만 톤 격침 / 백엽 기사 철십자상 / 전과 14위



그리고 이 중 U-48의 처음과 끝을 함께한 헤르베르트 슐체는 유독 독특한 행각을 벌이고는 했음.


1939년 9월 5일, 스페인 북서쪽에서 초계임무를 수행하던 U-48은 영국의 5,000톤급 상선 '로열 셉터' 를 발견했음. 당시 로열 셉터는 아르헨티나 로자리오에서 옥수수를 싣고 영국 벨파스트로 향하는 중이었으며, U-48은 수상에서 접근하며 로열 셉터를 정선시키기 위해 선수 너머로 경고사격을 실시하였음.


그러나 로열 셉터의 선장은 목적지까지 300 마일 남짓 남은 가운데 새 배를 버리는 것을 주저하였고, 잠수함 공격 신호(SSS)를 발신하면서 도주를 시도하였음. 이로써 정선지시 불응+조난신호 발신을 한 로열 셉터는 나포법에 의거 합법적인 공격 대상이 되었고, 이를 감청한 U-48은 이제 경고사격이 아닌 조준사격으로 로열 셉터에게 포격을 가했음.


4발의 명중탄에 선장이 사망하고 9명의 선원이 부상당하자, 로열 셉터의 부장은 그제서야 정선 후 배를 버릴 것을 지시하였음. 선원들이 구명정에 오르는 것을 확인한 U-48은 공격을 중지하고 접근하기 시작하였음.


구명정들이 멀어지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배에 남아 구조 신호를 송신하고 있던 로열 셉터의 무전수를 발견한 슐체는 구명정 하나를 붙잡고 배로 돌아가 그를 구조할 것을 지시하였음. 이후 슐체는 구명정들에게 식량과 물, 또는 구호물자가 필요한지 확인한 후 도움을 보낼 것을 약속하고 현장에서 이탈하였음.


"그는 잠시 우리를 바라보더니 '식량은 충분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예. 그렇습니다.' 라고 했죠. 그러자 그는 식수는 충분한지 물었고, 저는 '예, 충분합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잠시 멀어졌다가 돌아와서는 부상자가 있는지 물었고, 저는 '우리 모두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라고 했습니다."




수 시간 후, U-48은 또다른 영국 상선 '브라우닝' 을 발견하여 선수 너머로 덱건을 쏘며 정선을 지시하였음.


"침로 180도로 변침하여 13마일 밖에 있는 '로열 셉터' 의 선원들을 구조하라!"


그러나 유보트가 포를 쏘며 달려드는 광경에 브라우닝의 선원들은 이미 배를 버리고 구명정에 타고 있었음. 슐체는 구명정들 주위를 돌면서 다시 배로 올라타라고 설득했고, 브라우닝의 선장에게 "방위 180도, 거리 13마일 위치에 있는 '로열 셉터' 의 침몰 현장으로 향해 선원들을 구조하시오!" 라고 외쳤음.


나는 다음과 같은 까닭으로 '브라우닝'을 놓아주기로 결정했다.


1) 나포법에 의거 '로열 셉터' 선원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하여.

2) 여성과 어린아이가 승선해 있었는데, 내 배에는 이들을 수용할 수 없어 나포법의 준수가 불가하므로.

3) 적대행위를 저지르거나 밀수품을 운반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슐체는 자신의 지시대로 로열 셉터의 구명정이 있는 위치로 간다면 공격하지 않을 것을 약속했고, 브라우닝 또한 조난 신호를 보내지 않을 것을 약속하였음. 슐체가 말한 위치로 향한 브라우닝은 정말 로열 셉터의 생존자들을 발견하였고, U-48의 포격에 사망한 선장을 제외한 총원은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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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3일 후, U-48은 또다른 영국 상선 '윙클레이' 를 발견하고 마찬가지로 경고사격을 가하며 정선을 지시하였음. 윙클레이의 선원들은 일단 조난 신호를 보내기는 했지만 도주는 시도하지 않은 채 배를 버리기 시작하였음. 윙클레이의 선장이 지시에 따라 각종 문서를 들고 U-48에 승함하자, 슐체는 그를 반갑게 맞이하였음.


"그는 저를 매우 친절하게 맞이하였고, 제 배를 격침시켜야 해서 유감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제게 빵 네 덩이와 슈냅스 한 병을 건넸습니다. 그리고는 담배 한 갑을 꺼내 제게 한 개피를 권하더니, 나머지를 제 손에 쥐여주더군요."


약 7시간 후, 윙클레이의 생존자들은 지나가던 네덜란드 선박에게 모두 구조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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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다시 3일 후, U-48은 또 영국 상선 '퍼비' 를 발견하였음. 퍼비는 정선 지시에 불응한 채 조난 신호를 보내며 지그재그 기동으로 도주를 시도하였으나, U-48의 포격을 5발 얻어맞은 후 배를 버리기 시작하였음.


퍼비의 구명정들이 배에서 멀리 떨어지자 슐체는 선장으로 하여금 주요 문서들을 들고 승함할 것을 지시하였음. 비록 이미 문서들을 모두 파기해 선장 면허 외에는 보여줄 것이 없었지만, 슐체는 그에게 빵 열 덩이를 주고 경상자 2명에게 붕대를 주어 치료하게끔 하였음. 또 '처칠에게 SOS를 보내줄 것' 도 약속했지. 


그리고 슐체는 퍼비를 격침시킨 후 평문으로 아래와 같은 무전을 발신했음.


"처칠 씨에게. 북위 59도 40분, 서경 13도 50분에서 영국 선박 '퍼비'를 격침했습니다. 부디 선원들을 구조해 주시기 바랍니다. 독일 잠수함."



그리고 이 황당무계한 무전은 실제로 미국 상선 '스켄펜' 의 중계로 3시간 후 영국 해군성으로 전달되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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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영국의 처칠은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음. 독일 잠수함대가 개전 수 시간만에 여객선 '아테니아'를 격침한 이래 영국은 유보트들을 야만적인 학살자로 비하하는 프로파간다에 열중하고 있었는데, 1939년 9월 5일 전달된 로열 셉터의 조난 신호를 새로운 떡밥으로 덥썩 물었던 것임. 실제로도 로열 셉터는 당일 그 조난 신호 이후 연락이 완전히 두절되었고, 그 조난 신호를 수신한 인근의 선박들이 현장을 이 잡듯 뒤졌지만 생존자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에 프로파간다 용도로는 제격이었으니까.


처칠은 이를 '해양에서 벌어진 끔찍한 해적 행위' 라고 표현하며 독일 잠수함이 로열 셉터를 격침시킨 후 선원들을 몰살시켰다고 비난하였고, 영국 언론도 이에 대한 선전을 대서특필하며 언론전에 나섰음. 이후 퍼비를 격침시킨 슐체가 보낸 위의 구조 요청 무전을 받은 처칠은 "그 무전을 보낸 유보트 함장은 이미 포로가 되었다" 고 공표하였음.


그러나 9월 26일, 브라질 바히아 비앙카에 입항한 브라우닝에서 로열 셉터의 생존자들이 확인되자 이미 선전을 대대적으로 진행한 영국은 뻘쭘해질 수 밖에 없었음. 로열 셉터가 격침당한지 장장 21일 동안 영국이 그 사실을 전혀 몰랐던 까닭은, 브라우닝 또한 슐체와의 약속을 지켜서 일련의 사건에 대해 일절 보고하지 않았기 때문임. 결국 영국은 슐체를 사로잡은 적이 없다는 것을 포함해 선전이 허위였음을 인정해야 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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슐체는 개인적인 면에서도 대원들이 '아빠'(Vati) 라고 부르며 따를 정도로 선한 성품이었다고 함. 그러나 위와 같은 이야기는 비단 슐체 개인, 혹은 소수 함장들만이 행한 것이 아니라 독일 잠수함대에게 상당히 폭넓게 퍼져있던 풍조이기도 했음. 위 글만큼은 아니어도 생존자들에게 식량, 물, 의료품 등을 제공하거나 가까운 육지의 방향과 거리를 알려주는 사례가 셀 수도 없이 나옴.


물론 잠수함이 오래 공격 현장에 머무른다는 것 자체가 위험한 행위였고, 사령관이었던 카를 되니츠 또한 그 점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나 그보다는 이런 행동이 함장과 대원들의 사기 진작에 더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고 묵인하고 있는 상태였음. 물론 이런 선행이 거하게 통수를 맞은 라코니아 사건 이후에는 극대노해서 생존자들의 구조나 원조를 금지하는 '라코니아 명령'을 때려버리지만.


(라코니아 사건은 독일 잠수함 U-156이 이탈리아 포로들을 싣고 가던 여객선 '라코니아' 를 격침시킨 후 벌어진 사건을 뜻함. U-156은 연합국 민간인과 군인이 대부분을 차지하던 1,000명을 훌쩍 넘기는 생존자들을 구하기 위해 '니가 먼저 안 때리면 나도 안 때릴 테니까 일단 사람부터 살리자' 며 피아를 구분하지 않고 인근에 도움을 요청했고, 다른 유보트 2척과 이탈리아 잠수함 1척과 함께 생존자들을 함 내외에 빽빽하게 싣고 구명정 여러 척을 예인하고 있었음. 그러나 연합군은 이에 어떠한 원조도 제공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미국 폭격기가 갑판상의 생존자들과 구명보트들, U-156의 발광 신호, 크게 내걸린 적십자기를 모두 명확히 인지하고서도 폭격을 때려버리는 병크를 저지름. 이 폭탄에 구명보트 하나가 직격당하고 자신도 손상을 받자 U-156을 포함한 잠수함들은 결국 함 외부의 생존자들을 버리고 구명정의 예인색을 끊은 채 잠수할 수 밖에 없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격기가 사라지자 잠수함들은 다시 현장에 모여 생존자들을 다시 구조했는데, 그 와중에도 연합군은 야간까지 잠수함 수색을 위해 폭격기를 더 파견했을 뿐 그 어떠한 구조 시도도 하지 않았음.)


그러나 그 라코니아 명령이 내려진 이후 전세가 점점 열악해지는 가운데에도 알음알음 이런 사례들을 찾을 수 있고, 되니츠도 그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특별히 더 제재를 가하지 않았음. 당장 1943년 5월에도 나포법을 준수한 사례가 있을 정도임.


이런 풍조 덕분인지 낙지탕탕이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조차 전쟁 내내 독일 잠수함대의 활동을 통틀어 유죄를 선고받은 것은 단 한 사례라는 것이 어느정도 그 분위기를 방증한다고 볼 수 있겠음. 거의 친위대 수준의 악명과 취급을 받던 독일 잠수함대였던 만큼 기소 자체는 여럿 있었지만 조지려고 독기가 올라 있던 연합국 판/검사들도 뭘 어쩔 수가 없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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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슐체는 저런 선행에 대한 보답인지 전후에도 별 탈이 없었고, 연합군에게 임용되기도 하고 서독 연방해군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다가 전역 후 임종까지 평안히 살았음.


다만 이런 훈훈한 에피소드를 만든 U-48이 대서양 해전에서도 손꼽히는 비극적인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는 것도 아이러니한 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