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The Red Baron Reports: What They Really Said

저자: William Sayers

출처: Air Power History Volume 52, Number 3 (2005)


미 공군은 베트남전 말기에 인상적인 격추 교환비를 달성했던 미 해군 항공대의 비교 대상으로 오랫동안 시달려 왔다. 민간에 공개된 공군의 "붉은 남작" 보고서는 지금까지 이루어졌던 공중전에 대한 가장 철저한 사후 연구 중 하나로서,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했다. 하지만 이러한 논쟁에서 비롯된 과장된 결론의 대부분은 북베트남 상공에서 벌어졌던 공중전에 대한 근본적인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논쟁은 한국 전쟁 당시 미 공군 F-86 조종사들이 북한 및 중국 공군을 상대로 10:1에 달하는(역주: 양측 손실 기록을 교차 검증한 결과는 5.8:1)교환비를 달성했었던 것에서 시작한다. 이 때와 다르게 1968년 북폭이 중단될 때까지 미 공군 조종사들이 달성한 교환비는 2.5:1에 불과했고, 이 민망하기 짝이 없는 전과는 크나큰 좌절감을 불러 왔다. 이에 대해 떠도는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미 공군이 매우 부적절한 훈련 프로그램을 계속할 동안 미 해군은 그 유명한 "탑건" 프로그램을 창설하였고, 3년 6개월 후 항공전이 다시 고조되었을 때 수많은 탑건 졸업생들이 베트남 상공을 누비며 에이스가 되었지만 공군 조종사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뒤쳐졌다는 것이다.


베트남 전쟁 이후 미 공군은 북베트남 상공에서 제공권을 확보하기 위해 진행되었던 교전들로부터 수집된 정보를 분석하였다. 붉은 남작 보고서의 저자들은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쓰면서 전쟁 중 발생했던 격렬한 공중전을 둘러싼 상황을 설명하고, 승패를 이끌었던 중요한 요소들을 선별했다. 붉은 남작 보고서는 작성된 지 20년 이상 기밀로 지정되어 있었으나, 갈등의 신화가 쓰여지는 와중에 그 연구의 결론이 미 공군 전투기 조종사 훈련 프로그램을 근본적으로 개편하는 것을 정당화하기 위한 근거로 쓰인 시점에서 미 공군은 최악이었던 현실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였다.


1990년대 말 붉은 남작 보고서가 기밀 해제되었을 때 그 연구의 결론이 더 나은 훈련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서가 제시하는 정보들을 주의깊게 연구한 결과는 북베트남 상공에서의 공중전에 대해 매우 다른 인상을 주며, 그것은 동남아시아의 하늘을 장악하기 위해 싸운 미 공군 조종사들을 멸시해왔던 통념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먼저 확실히 해야 하는 것은 북베트남 공군이 미 공군 및 해군 최고의 비행대대에 있을 법한 수준의 우수한 조종 인력을 일부 배출하긴 했지만 조종사들의 평균적인 기량을 따져 보면 미국 조종사들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북베트남 조종사들은 미국 조종사들과 맞설 수 없었고, 실제로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마다 대패했었다. 북베트남은 누릴 수 있는 모든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미군기 한 대를 격추할 동안 2.5대를 손실해야만 했다. 북베트남 공군의 성공(4:1에 달하는 교환비를 두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비결은 뛰어난 전술가로서의 능력에 있었던 것이다.



1964년 미국이 북폭을 시작하였을 때 북베트남 공군 지도부의 관점에서 제공권을 유지하고자 미국 조종사들을 상대로 매일같이 맞서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 없었다. 한국 전쟁에서 북한과 중국이 딱 그렇게 했었고, 그렇게 출격했던 조종사 대부분이 하늘에서 개죽음 당했음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방과 오랫동안 전쟁을 했던 북베트남인들은 광적인 투지, 그리고 전략 및 전술을 전장의 현실에 적응시키는 뛰어난 능력이라는 두 가지 측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 했다. 북베트남 공군이 미국의 전술 공군 전력에 정면으로 맞설 용기와 지구력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은 확실했지만, 그들은 더 나은 방법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북베트남군은 지상에서 마오쩌둥이 제시한 3단계 혁명 전쟁 계획을 실행했다. 마오가 주장한 바에 따르면, 1단계에서는 정치 간부들을 동원해 인민들에 침투하여 그들을 교육하고 선전하는 방식으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다. 2단계에서는 게릴라전을 통해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군대와 시민들의 사기를 낮춘다. 3단계는 본격적인 전쟁으로, 일단 판이 짜이게 되면 승리를 목표로 한 더 많은 재래전이 발생하게 된다. 마오쩌둥과 그 제자들이 천재적이었던 것은 이 세 가지 단계가 상호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서로 섞이고 요동치며 흘러간다고 인식했다는 점에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3단계에서 시도가 실패할 경우 2단계로 후퇴하여 시간을 벌고 압박감을 유지하는 와중에 또 다른 3단계 작전을 대비한 재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항공전에서도 중요한데, 북베트남 공군이 여기에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베트남 육군이 미 육군과 미 해병대를 상대로 대놓고 싸움을 걸었던 것과 다르게 미군과 직접적으로 도전하려 하지 않았고, 오로지 자신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 마련되어 무조건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만 싸우려 했다. 북베트남 공군은 이러한 공중에서의 게릴라전을 위해 미국에 제공권을 내어주었고 이 덕분에 미 공군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유롭게 갈 수 있었지만, 정작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진행된 롤링 썬더 작전 도중에는 백악관에서 폭격 목표물에 대한 엄격한 제한을 두어 북베트남 최중요 시설 상공의 제공권을 다시 돌려준 꼴이 되었기 때문에 북베트남으로서는 큰 손해가 아니었다.



그리고 이 전략 덕분에 북베트남 공군은 자신들이 원할 때만 싸울 수 있는 유연함을 얻었다. 대부분의 미국 조종사들은 수백 번의 임무를 수행하는 와중에 단 한 대의 미그기도 목격하지 못했고, 그렇지 않았던 나머지는 미그기와 조우했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한 채 격추되었다. 북베트남은 공군과 방공군을 지원하고자 자국 상공의 상황을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탁월한 조기경보 및 지상관제망을 구축했다. 이 방공 지휘통제 체계는 미국의 작전 진행 상황을 모니터링하였고, 그 도중에 발생하는 빈틈을 이용할 수도 있었다. 일부 예외 사례를 제외하면 북베트남은 손실 없이 미군기를 격추할 가능성이 높다고 믿는 상황에서만 항공기를 전투에 투입했다.


이러한 게릴라 전술로 미국으로부터 제공권을 되찾지는 못 했지만, 이를 더욱 밀집된 정교한 지대공 미사일 및 대량의 대공포로 구성된 방공망과 결합한다면 적어도 출혈을 강요할 수는 있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이런 전술이 미국을 좌절시키고 사기를 저하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점이었다. 동시에 북베트남 공군은 보다 결정적인 용도로 항공력을 활용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면서 미 공군과 정면대결할 역량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날이 올 때까지 미 공군을 상대하는 것은 지대공 미사일과 대공포들의 몫이었고, 요격기들은 매복해 있다가 적기를 치고 빠지는 공격에 특화되어 있었다.


남쪽에서 벌어지는 지상전과 마찬가지로 북베트남 공군은 미 공군에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고 판단할 때에만 출격했다. 몇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전통적인 재래전으로 변해가는 지상전과 다르게, 공중전에서 북베트남 공군은 공중 우세 작전으로 전환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미 공군과의 교전에서는 필연적으로 일방적인 피해가 발생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전쟁 기간 내내 큰 규모의 공중전이 드물게 발생하는 원인이었다.


1965년부터 1968년까지 진행된 롤링 썬더 작전 동안 북베트남 공군이 미국 전투기들에 정면으로 맞선 것은 1967년 한 해 뿐이었고 그마저도 단 3회―1월 2일 (볼로 작전), 4월 19일, 그리고 5월 13일부터 6월 5일까지 벌어진 수 차례의 전투―뿐이었다.



1966년 말엽 북베트남 공군은 더욱 뛰어난 전투기인 MiG-21을 여럿 운용하고 있었고, 그만큼 자신에 차서 공격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이 즈음에 약 2년에 걸친 소규모 교전과 매복 전술에 좌절했던 미 공군 상층부는 북베트남 공군을 대규모 전투로 끌어들이기 위한 작전을 실행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다. 그것이 바로 당시 미 공군 최고의 전투조종사이자 지휘관이었던 로빈 올즈 대령이 입안하고 지휘한 볼로 작전으로, 목적은 호위기를 대동하지 않은 폭격 임무로 위장하여 북베트남 공군을 유인해 섬멸하는 것이었다. 그 계획은 성공했고, 올즈 대령이 이끄는 제8전술전투비행단은 손실 없이 MiG-21 7대를 격추하여 북베트남에 막대한 손실을 안겼다. 나흘 뒤, 제8전술전투비행단은(역주: 실제로는 제7공군의 성과)역시 한 대의 항공기도 잃지 않고 MiG-21 2대를 기습하여 격추하는 성과를 올렸다. 


북베트남 공군은 한동안 회복에 전념하여 1967년 4월 중순에는 다시 미 공군과 맞설 수 있었다. 4월 19일에 다수의 F-105가 투입된 폭격 작전을 저지하기 위해 미그기들이 출격했지만 그 중 단 한 대만을 격추하고 그 대가로 MiG-17 4대를 잃는 실망스러운 결과를 냈다.


이 패배로 북베트남 공군은 다소 주춤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공권 확보를 위한 정면승부를 포기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5월 중순부터 3주에 걸쳐 수 차례의 전투를 치뤘으나 결과적으로는 패배하였다. 6월 5일까지 북베트남 공군은 F-4 2대를 격추하는 동안 MiG-17 12대와 MiG-21 5대를 손실했다. 이 12:1을 초과하는 교환비는 한국 전쟁 당시 미 공군의 기록을 상회할 뿐더러, 전폭기인 F-105가 8대를 격추한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 했다. 한국전에서 미 공군의 높은 교환비는 F-80이나 F-84같은 전폭기를 제외하고 제공전투기인 F-86의 기록만 집계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전투가 끝나갈 즈음 미 공군의 전체 교환비는 4.1:1이었으며 그 중 MIGCAP 임무에 투입된 F-4C의 교환비는 10.8:1로 한국전 당시 F-86의 전체 교환비와 거의 동등한 수준이었다. 이 당시 북베트남의 손실은 너무나도 컸기 때문에 다시 대규모 전투를 치루기까지 5년을 더 기다려야만 했다.


결국 북베트남 공군은 다시 게릴라전으로 회귀하였고, 그 결과 손실률을 7배 가량 줄일 수 있었다. 그 이후 롤링 썬더 작전이 끝날 때까지의 16개월 동안 양측은 각각 21대의 항공기를 손실했고, 미그기들의 전과는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적기의 접근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미군기들을 기습해서 얻어낸 것이었다. 실제로 이러한 전술이 미 공군의 교환비를 4.1:1에서 2.3:1로 떨어뜨리기는 했으나, 그 결과 북베트남 요격기 전력은 공중전의 핵심 요인에서 사실상 배제되었다.


3년에 걸친 롤링 썬더 작전 동안 미국 조종사들은 북베트남의 전술에 좌절하기도 했고 성공률이 낮다는 점을 우려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미그기들은 정말로 위험했고 상당히 큰 피해를 입혔던 것도 사실이지만 미군은 분명하게 제공권을 확보하고 있었고, 일부 예외를 제외하면 백악관이 허용하는 한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었다. 미국이 대가를 치룰 각오를 하고 있었다면 북베트남 방공망조차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물론 그것과는 별개로 폭격의 성과는 다소 모호했지만, 어찌되었든 간에 MIGCAP 임무의 핵심은 폭격기들을 목표물까지 보낼 수 있는가에 대해서였고 그 관점에서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한국전 때보다 성과가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면, 그것은 굳이 전투기를 띄워서 하늘에서 개죽음당하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 판단할 만큼 교활하면서 유능한 상대와 맞섰기 때문일 것이다.


공중전의 소강기까지 미 공군 조종사들은 미그기 87대를 격추하였고, 그 과정에서 38대의 항공기를 손실하여 2.3:1의 교환비를 기록하였다. 그러나 미 공군 측 손실에는 레시프로 공격기인 A-1, 비무장 정찰기인 RF-101과 EB-66, 심지어는 민항기 기반의 RC-47도 끼어 있었고 전폭기인 F-105도 포함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베트남에서 많은 조종사들을 괴롭혔던 한국전쟁 당시의 높은 교환비는 제공 전투기 이외의 기종들을 제외하고 집계한 것이었으며, B-29나 B-26 또한 확실하게 포함되지 않았다. 보다 공평한 비교를 위해서는 MIGCAP 임무를 수행한 항공기들만 봐야 할 것이며, 이 경우 미 공군 F-4는 57대를 격추할 동안 10대가 격추되었으니 교환비는 5.7:1이 된다. 놀랍게도 항상 무거운 폭장 때문에 수세에 몰리곤 했던 F-105 또한 미그기 27.5대를 격추할 동안 20대가 격추되어 1.4:1의 교환비를 기록했고, MiG-17로 한정하면 교환비는 5.5:1까지도 치솟게 된다.


해군의 경우 똑같은 기준을 적용한다면 미그기 30대를 격추하는 동안 9대를 손실하였으므로 3.3:1, MIGCAP 임무를 수행하는 F-4와 F-8로 한정하면 25대를 격추하는 동안 7대가 격추되어 3.6:1이 된다.


종합적으로 볼 때 미군이 격추한 미그기 중 약 3/4는 미 공군의 성과였는데, 이는 해군과 공군 조종사들의 기량이 동등했었을지라도 미 공군이 미그기들의 위협에 더욱 크게 직면했었음을 보여준다. 앞서 언급했듯이 롤링 썬더 작전의 결과를 본 미 해군은 흔히 "탑건" 으로 알려진 해군 전투기 무기 학교를 설립하여 전투조종사 훈련을 더욱 중요시하기로 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 명칭과 졸업생들이 교육 과정에서 배운 것을 동료 조종사들에게 전수할 수 있게 한다는 개념은 이미 넬리스 공군기지에서 진행되었던 미 공군 프로그램에서 유래되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 공군의 조종사 훈련 과정에 분명 개선의 여지가 있긴 했지만, 그것이 미 공군의 성과와 직결되는 요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공중전이 단순한 조종사 기량 대결의 양상을 띠게 될 경우 보통 미 공군이 우위를 점했다. 실제로도 베트남전 초기 미 공군 최초로 미그기를 격추한 조종사가 MiG-17을 상대로 구사했었던 전술은 수직 기동으로, 훗날 탑건 스쿨에서 가르치게 될 것과 거의 동일한 것이었다. 



미 공군은 적의 효과적인 전술에 대처하는 방법이 가장 큰 문제라고 판단하였고, 그에 따른 기술적 해결책을 찾아 나섰다. 롤링 썬더 작전 당시 대부분의 미 공군기들은 태국에 세워진 기지에서 출격하였는데, 이 기지들은 미 공군에 할당된 내륙 지역 루트 패키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사실상 거의 모든 임무에서 여러 번 공중 급유가 이루어졌다. 그런 만큼 미 공군기들은 연료 효율을 극대화할 수 있는 높은 고도에서 북베트남 상공으로 접근해야 했고, 북베트남 방공망에 더 일찍 포착될 수밖에 없었다. 미군기들이 북베트남 북부까지 도달하기 전에 가로질러야만 하는 라오스의 전원 지대가 충분히 넓었기 때문에, 북베트남 관제사들이 미 공군 스트라이크 패키지 뒤편으로 요격기들을 보낼 공간 또한 충분했다. 결과적으로 미 공군과 북베트남 공군 간의 전형적인 교전은 이미 미군기를 격추할 준비를 끝낸 요격기들이 고속으로 접근하는 데에서 시작되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 공군에 할당된 루트 패키지에는 레이더 관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미군기들이 북베트남 상공을 날고 있을 때, 그들이 사용할 수 있는 센서는 과거 붉은 남작이 서부전선에서 연합군 전투기들을 사냥할 때 썼던 것과 동일한 안구 Mk.1 뿐이었다. 게다가 미 공군 조종사들은 고고도로 날아드는 지대공 미사일 위협에도 맞서야 했고, 북베트남 공군은 미그기를 회피하는 전투기들을 지대공 미사일로 노리거나 반대로 지대공 미사일을 회피하는 전투기를 미그기로 요격하는 양날의 위협을 가할 수 있었다. 


북베트남 공군이 미 공군과 정면으로 맞섰던 일부 전투를 제외하면 미그기들을 통제하는 지상 관제사들은 전술적으로 상당한 이점이 있다고 판단될 때, 즉 손실 위험이 낮고 요격 성공률이 높게 보장된다고 판단될 때에만 요격기들을 내보냈다. 1967년 여름의 처참한 패배 이후 북베트남 공군은 미 공군 스트라이크 패키지 뒤편으로 MiG-21을 투입해 초음속으로 미사일을 쏘고 이탈시키는 것으로 전술적 이점을 극대화했다. 그 결과 MiG-17의 손실은 매우 컸지만 MiG-21은 적은 손실로 큰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이 퍽치기 전술은 제한적인 조건 하에서는 효과적이었지만 재공격이 불가능했으며 여러 목표물을 노릴 수도 없었다. 북베트남 공군이 미 공군 스트라이크 패키지에서 한 대 남짓한 항공기만 격추하고 마무리하는 걸 반복하는 한 이 전술은 충분히 성공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전술이 공격기들을 저지하는 데에는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이런 전술은 전폭기들을 격추하는 것보다도 폭격 편대가 회피를 위해 폭탄을 버리게 만드는 데 더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나머지 분량은 귀찮기 때문에 나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