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muel J. Cox, Director,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January 2021




미국인들이 빨리 올수록 좋다,1억명이 옥쇄할것이다.-


1945년 여름,일본군 선전문구



다행히도 45년 크리스마스에는 매직카펫작전이 성공적으로 진행중이였으며 12월에는 70만명이상의 미군이 미군함 수백척에 탑승해 집으로 귀환중이였다. 45년 8월에 전쟁이 끝나지 않았더라면 집에오는 대신 미군 역사상 가장 피비린내나는 전투가 될 예정이였던 몰락작전 (일본 본토 침공)의 첫 단계인 올림픽작전(일본 본토 규수 최남단에 상륙예정)이 실시 예정일인 11월 1일에 맞춰 실시될것이였다. 올림픽 작전을 위해 영국군이 참가한 미군 상륙부대는 44년 6월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능가하는 규모가 될 예정이였다. 도쿄 인근의 간토 평야를 침공하는 작전인 코로넷 작전은 46년 3월로 예정되어 있었으며 더 거대한 규모의 작전이 될것이였다. 다행히도 올림픽이나 코로넷, 일본의 방어 계획인 결호 작전이 실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 1 억명이 "영광스러운 죽음"을 맞을 필요도 없었고, 미국인 수만 명과 미 해군에서 5,000명 (니미츠 제독의 추정치)이 죽을 필요도 없었다. 








45년 일본의 상황은 절망적이였는데 일본군 사백만명이 남아있었으나 절반 이상은 중국과 만주에 갇힌상태였고 (미군, 특히 잠수함 때문이였다) 그로인해 본토수비에 동원될수 없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본토는 2천년간 제대로 침공받지 않았다. 이전에 가장 심각한 위협은 1274년과 1281년에 두 번의 몽골 침공 시도에서 나왔는데, 두 번 모두 태풍으로 인해 엄청난 선박과 인력 손실을 초래했다. '신풍(가미카제)'의 이야기가 가장 인상적인것이지만,각각의 경우에서 일본인들은 해변에서 맹렬히 저항했다. 1274년의 침공시도에서 몽골군은 태풍중에 철수해 500-900척의 배중 200척가량이 파괴되고 3만명중 만 3천명을 상실했다. 








쿠빌라이 칸의 1281년 침공시도(사천 사백척 이상의 배와 14만 2천명 이상의 병력으로 알려져 있으며 아마 크게 과장되었겠지만 당대 최대급 침공군이였을것이다) 는 더욱 절망적이였는데 1281년에 일본군은 방어준비를 마친상태였으며 몽골함대는 태풍이 함대를 쓸어버리기전에 상륙할곳을 찾기위해 몇달동안 항해했다. 일본군은 해변에 상륙한 모든 몽골인(한국인과 북중국인도 포함해서)을 처형했으며 몽골군이 끌고왔다고 생각한 남중국인만 살려 노예로 만들었으며 일부 자료에서는 몽골군이 10만명이상을 잃었다고도 추정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올림픽작전이 45년 11월 1일에 실시되었다면 태풍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1945년의 태평양 태풍 시즌은 4월부터 11월까지 26개의 태풍이 이름을 받았을정도로 매우 활발했다. 일본이 항복한 후 첫 태풍은 우르술라로(9월 7일부터 15일까지) 오키나와에서 마닐라로 향하던 수송기 6대를 잃었는데 탑승중이였던 미군포로 120명과 승무원 전원이 사망했으며 이는 당시 최악의 평시 항공 재난이였다.

USS LCI(R)-771 at Okinawa, Japan, October 1945, following Typhoon "Louise." (UA 538.04.02)




그러나 10월 초 태풍 루이스가 갑작스럽게 진로를 틀어 45년 10월 9일 오키나와를 전력으로 강타했으며 나카구수쿠만에 정박중이던 수백척의 미군 함선들은 바다로 탈출할 시간이 없었다. 12척의 배가 침몰했으며 222척의 배는 좌초되었고 추가로 32척의 배가 수리가 필요할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사상자는 36명 사망,47명 실종,1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세척의 구축함 개조 소해함과 호위구축함이 좌초되었다. 호위구축함 Oberender (DE-444)는 재취역했으나 나머지 구축함 개조 소해함은 수리가치 없음으로 판정되었다. 약 107척의 상륙정이 좌초되었으며 좌초된 LST 6척중 4척을 포함해 많은 선박이 복구 불가능할정도로 파괴되었다. 오키나와의 건물 80프로가 파괴되거나 심각하게 손상되었으며 대부분은 군수품으로 가득찬 상태였다. 오키나와 비행장의 항공기 60대도 손상되었다. 불과 한달전에는 더 많은 항공기가 오키나와 비행장에 가득찬 상태였고 배와 상륙정도 마찬가지였다. 올림픽 작전이 진행중이였다면 손실은 더 심각했을것이며 대부분의 배와 항공기가 사라졌을것이다. 태풍으로 인하여 올림픽 작전이 45일 지연되어 겨울폭풍 시기에 접어들었을것이다(올림픽 작전 계획에서 12월 1일이 작전이 실행가능한 마지막 날짜였다).

Japanese Terutsuki class destroyer in Moji harbor, Kyushu, 15 September 1945. Photo by USS Haven (AH-12). (80-G-346356)




결호 작전 ("결정적 작전")




올림픽 작전을 위한 미군의 상륙군은 어마어마했으나 일본은 이에 대응하기위한 준비를 했다. 일본 정보국은 해군의 정박지와 비행장을 확보해 현 작전과 후속작전에서 항공엄호와 근접항공지원을 원활히 하기 위해 미군이 규수 남부, 정확히는 가고시마 만 지역을 초기 목표로 삼아 상륙할것으로 정확히 예상했다. 일본이 규수 남부를 초기 목표로 예측한 이유중 하나는 오키나와에서 이륙한 미군 전투기의 최대 항속거리 내에 규수 남부가 위치했기 때문이였다. 일본은 또한 미군이 섬 전체를 점령하지는 않고 도쿄 인근으로 추정되는 다음 주요 상륙을 준비하기위해 새로운 비행장을 방어할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했다. 








일본은 신기할정도로 정확히 규수 해변들이 첫 상륙의 목표가 될것으로 예측하였다. 일본은 상륙이 빠르면 7월에 일어날것으로 예측했으나 오키나와 전투에서 소요된 시간과 태풍 시기가 끝나는 시점(10월)에 따라 예측시기를 변경하였다. 일본은 또한 상륙이 10월 말에서 11월초에 일어날것이라고 정확히 예측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45년 봄에는 1개사단만이 규수를 지키고 있었으나 늦여름엔 15개 사단이 규수를 방어하게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 (참고로, 원자 폭탄이 필요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선별 한 미국의 최소 사상자 추정치 중 일부는 규슈에 대한 일본 방어 태세의 전체 범위가 명백해지기 전에 도출된 것이다).








결호 작전의 전략은 45년 4월 8일자 일본 제국군 지령에 명시되어 있다.일본은 작전의 전략적 중심이 대규모 사상자를 마주하고도 "무조건 항복"이라는 연합군의 목표를 계속 지지하려는 미국인들의 의지라고 판단했다. 일본은 미국의 약점이 엄청난 손실을 버티는 능력에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결호작전의 주 목적은 땅을 지키거나 장비를 파괴하는것이 아닌 어떤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가능한 많은 미국인을 죽여 미국이 더이상 희생을 감수하지 못하게 하여 협상장으로 이끌어낸뒤 종전후 일본 본토가 외국군에 점령되는 사태를 막아내는것이였다. 또한 일본의 계획에서 그들이 가진 모든 자산을 규수방어에 투입해(적어도 항공기와 해군함정들은) 해안 교두보에서 가능한 최대의 미군 사상자를 만들어내려했고, 그래서 미군 병력수송선과 상륙함들이 최우선 목표가 되었다.








규수방어를 위한 구체적 작전은 결6호였다(상륙이 예상되는 다른 지역에도 결호작계가 있었으나 결 6호작전이 최우선 순위를 부여받았다). 규수 방어는 총 15개 사단,3개군으로 구성된 16방면군이 맡았는데 휘하에 혼성여단 7개와 독립기갑여단이 편제되었으며 두개의 해안방어사단이 있었다. 일본이 항복할때 이 부대는 90만 병력을 보유중이였는데 이는 규수에 상륙하기로 계획된 미군 13개 사단병력인 52만 3천명을 넘는 규모였다. 규수에 전개될 미군은 최대 76만 6천명 수준이였다.




미 해군 포격의 영향은 일본군 방어 계획에서 두드러졌다. 일본의 전투계획은 미군과 최대한 근접해서 전투를 치뤄 근접항공지원과 해군 포격에서 오는 미군의 이점을 부분적으로라도 줄이려는 것이였다.



전쟁이 진행되면서 일본은 힘들게 배워왔는데 규슈에 대한 방어 준비는 이전의 전투 경험에서 나온 "미군과 싸우는 방법에 관한 3가지 기본 원칙"을 기반으로 했다. 세 기본원칙을 요약하자면:








1.진지는 적 해안포격의 사거리 밖에 구축되어야하며




2.동굴진지는 적 공습과 해안포격에서 안전한 위치에 건설되어야하며




3.화염방사탱크에대한 보호를 위해 접근불가능한 고지대를 선택해야한다는 것이였다.








규수 침공에 대응하기 위한 일본의 1차방어선은 일본 해군의 몫이였는데 이는 병력 수송선이 해안 근처에 오기 전까지 항공기가 투입되지 않을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이였다. 일본 해군에 남은 46척의 잠수함중 일본 근해에서 작전중인 38척의 잠수함이 미군 상륙부대가 마주할 첫 적이였다. 항모를 격침시킬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는 말아야했으나 병력수송선이 최우선 순위였다. 일본 잠수함중 일부는 유인유도 자폭 어뢰인 가이텐을 사출시킬수 있었으며 120기의 가이텐이 즉시 동원 가능했으나 11월에는 최대 1000기의 가이텐이 사용 가능했을것이다. 가이텐은 대양에선 다소 비효율적이란것이 입증되었으나 일본은 상륙교두보의 좁고 붐비는 해역에서는 훨씬 나을것이라 생각했다. 

Japanese Kaiten Type 2 or 4 Human Torpedo View of the afterbody, showing rudders and propellers, with other Kaiten in the background, at the Yokosuka Naval Base, Japan, 7 September 1945. Japanese kanji character painted on the fairwater of Kaiten number 26 is yoko, probably a unit marking for Yokosuka naval base. Top fin of the Kaiten in the foreground features a painted Japanese navy flag. Official U.S. Navy Photograph, now in the collections of the National Archives. (80-G-339854)






일본은 지금까지 제한되었던 소형잠수함을 꽤 많이 가지고 있었으며 더 많이 만들고 있었다. 일본은 11월까지 5인승 소형 잠수정인 "코류"(어뢰 두발 혹은 폭약 장착)를 540척,좀더 발전된 "카이류"(코류와 같이 어뢰 두발 혹은 폭약 장착)를 740척 보유할것으로 예상하였다. 그러나 코류 생산은 폭격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어 종전시 110척만 완성되었고 카이류는 250척만 완성되었다.

Japanese Type D (Koryu) midget submarines in a partially flooded dry dock at Kure Naval Base, Japan, February 1946. The larger vessel in the drydock, right background, appears to be a barge. Flooding, deposit of debris (including a bulldozer) and other damage was done after mid-October 1945. Official U.S. Air Force photograph. (USAF K-6023)




미군 상륙이 시작되었을시 일본 해군은 2단계로 전환하여 살아남은 구축함 19척을 상륙함에 대한 자살공격에 투입할 예정이였다. 또한 3천 3백여척의 신요 자살보트(대부분은 육군이 운용,소수만 해군이 운용함)를 투입하려 했다. 신요는 다양한 버전이 있었는데 해군 버전은 선수에 550파운드의 폭발물이 장착되었고 육군 버전은 배가 도주할때 선미에서 던질수있는 두개의 폭뢰가 있었다(육군버전은 자폭용으로 개발된것이 아니였다). 신요의 수는 매우 모호하며 최대 6300척에 달했을것으로 추정된다. 확실한것은 종전시까지 800척의 신요가 규수의 16 방면군에 배치되었다는것이다.








일본 해군은 또한 '후쿠류'라는 해변 주변에서 쉘터에(일부 쉘터는 18명까지 수용이 가능했다) 숨어있다가 작전하는 자폭 잠수부를 배치할 예정이였다. 잠수복과 산소통을 장비한 후쿠류는 상륙함이 머리 위를 지나가면 폭약을 가지고 수면으로 올라와 자폭할 예정이였다. 일본해군은 11월까지 4천명의 후쿠류를 "수선 기습부대"에 배치할 예정이였다.








결 6호 작전은 해군 5 항공함대와 육군 6항공대가 지원할 예정이였으며 둘다 항공최고사령부의 지휘하에 있었다.(일본군이 전쟁 기간 내내 해왔던것과 달리 결호 작전은 육해군의 합동작전과 일원된 지휘통제를 강조했다.)인근 시코쿠와 혼슈 섬에는 사용 가능한 비행장이 많이 있었다.그러나 규수에 있는 60여개의 비행장은 매일같이 미군 공습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가미카제 공격에만 사용되었다. 








오키나와 전투중의 가미카제 공격은 오키나와 인근의 미군배로 향하는 긴 여정으로 인해 과반수가 미 해군 전투기들에게 격추당했다. 규수에선 상황이 달랐다. 일본군은 미군 선박 (특히 병력 수송선)이 해안에 가까이 올때까지 공습을 하지 않으려했다. 일본군은 짧은 비행시간을 극대화하고 지면에 근접해서 비행해 미군 레이더를 무력화해 기습을 가하려했다. 니미츠 제독은 10월에 미군함대를 근접시켜 일본기를 끌어내 전함과 순양함의 대공포화로 일본 항공기를 격추시킬 계획이였으나 일본은 미끼를 물 생각이 없었다. 항공기들은 미군 상륙함이 해안에 접근할때까지 분산되었고,위장되있고,숨겨진상태로 있을 예정이였다. (전쟁 마지막 몇달간 일본 항공기의 활동이 없었기에 일본의 항공유가 부족했다는 미군 보고서는 잘못된것이였다. 사실은 결호작전을 할만큼의 연료를 보관해둔 상태였다.)








일본 육군항공대는 항공기와 조종사가 바닥날때까지 한번에 300~400대가 한시간에 한번씩 밤낮으로 공격해야한다고 주장했다. 해군은 새벽에 공격하는것을 선호했으며 전쟁이 끝날때까지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계획은 오키나와 전역의 3개월보다 더 강렬한 가미카제 공격을 3시간만에 했을것이며 가장 취약한 순간에 수송선의 방어능력을 포화상태에 빠트렸을것이다.








전쟁이 끝날 때 일본이 보유한 항공기의 수에 대한 추정치는 상당히 다양하지만 공통된 주제는 미국이 그 수를 과소 평가했다는 것이다. 45년 여름 내내 추정치는 놀라울정도로 늘어갔다. 미군 공습에 의해 지상에서 격파된 항공기의 대부분은 나무로된 더미였다. 일본이 가진 모든 종류의 항공기 추정치는 12,700기였다(육군기 5,600기에 해군기 7천기). 이들 대부분은 전투기가 아니였다. 그러나 일본은 오키나와 전투중 나무로 된 복엽기가 구축함을 격침할수 있다는것을 증명했으며 그러한 항공기들은 병력수송선에 대한 해안에서의 근거리 공격에 잘 맞을것이다. 이러한 목재 및 캔버스제 항공기는 레이더 단면적이 낮아 미국 VT신관의 효율성을 저하시켰다. 종전 무렵 일본에는 8천명가량의 훈련된 조종사가 있었다(이 숫자도 엉망이다). 일본은 자폭 조종사를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일부 자료에 의하면 11월까지 자폭공격이 가능한 조종사 18,600명을 확보할것으로 예상되었다. 일본의 의도는 미군이 가장 취약해지는 순간인 해변에 병사들을 상륙시키려는 그때를 노려 미군 선박에 비행가능한 모든 항공기를 동원해 가미카제 공격을 하기위해 모든 항공기를 개조하는것이였다. 








일본 지상군은 규수에서 종심방어전략을 해변에서 혼성방어부대로 펼치고 결정적인 야간 반격을 위해 내륙에 굴을 파 숨거나 도보 기동예비대를 확보하려했다. 전초 타라와처럼 일본군은 미군 함포사격을 상대로 해변에서 방어하는건 좋은 전략이 아니란걸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대구경 포탄의 직접적인 타격을 제외한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더 잘 은폐된 해변 방어 시설을 구축하는 방법을 배웠다. 일본은 44년 말에 독일로 팀을 보내 독일이 노르망디에서 얻은 경험을 전수 받았다. 해변 방어시설 뒤에는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의 일본 방어시설과 비슷한 '관측지대'가 있었으며 박격포와 포병 진지는 첫번째 능선의 반대편 사면에 위치했으며(공습으로부터 보호받기위해 위장되었다) 미군이 진지를 구축하기전에 교두보와 교전할 수 있을만큼 가까이 배치되었다. 더 나아가 해안포격 사거리 밖이거나 포격이 불가능한 내륙은 "주 저항지대"였는데 공습에 대응하기 위해 굴을 팠으며 전진하는 미군의 뒤로 침투할수있는 광대한 동굴과 땅굴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








또한 일본은 "민간 자원자 부대"를 동원했는데, 사실 자원자들이 아니였으며 "1억 총옥쇄"라는 구호하에 15~60세의 모든 남성과 17~40세의 모든 여성이 동원되었다. 많은 이들이 수류탄,검,칼,죽창이나 날카로운 부분이 있는 물건으로 훈련받음과 동시에 미군 전선 뒤로 침투하는것의 중요성에 대해 교육받았으며 일본은 민간인을 전투지역에서 대피시키거나 "무저항 도시"를 선언할 계획이 없었다. 민간인들은 병사들과 함께 최후까지 싸우고 죽을 것으로 예상되었으며, 일본의 광범위한 선전의 결과로 대부분의 일본 민간인은 1945년 말까지 죽음을 맞을것이였다. 규수의 민간인은 약 240만명이였으며 그들이 싸우다 죽었든, 십자포화에 갇혔던지, 자살했든지(사이판과 오키나와에서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싸우지 않아 처형당했던지간에 수만 명이 죽을 것이였다. 또한 일본은 일본 본토에 연합군이 상륙하면 모든 연합군 포로를 처형할 계획이였다;상륙부대가 아닌 15,000여명의 미군(총 10만명의 연합군)이 죽을것이였다.

Japanese kamikaze pilots prepare for battle. A comrade tightens the "HACHIMAKI" for a Japanese Kamikaze pilot ready to sortie, 1944-45. The ancient Samurai, in preparing for battle, wound this folded white cloth about their heads to confine their long hair and to keep perspiration from their eyes. The “HACHIMAKI” thus came to symbolize manly composure, and so was worn by all the Kamikaze pilots. (NH 73096)


몰락작전




몰락작전의 목표는 독일 항복후 18개월 이내에 일본에 상륙후 점령하여 무조건 항복을 받아내는것이였다. 계획된바에 의하면 170만명의 미군이 필요했으며 미국의 정치지도자 및 군 사령관들은 미국의 전쟁 피로가 점점 심해져 가능한 빨리 전쟁을 끝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상자가 미국의 전략적 약점이라는 일본의 평가는 대체로 맞았다. 전쟁 첫해(진주만을 제외한)에 미국의 사상자는 타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주요 참전국에 비하면). 그러나 이것은 노르망디 상륙과 마리아나 제도 상륙,벌지전투,필리핀,이오지마,오키나와 전역을 겪으면서 달라졌다. 44년말 미 육군 사상자는 월 6만 5천명이 되어 급상승하였고 미군이 그만한 손실을 보충할수 있을정도로 충분한 인력을 확보할수 있는가에 관해 우려가 증가하였다. 따라서 미 육군 지도부는 해군이 제출한 해상 봉쇄와 폭격으로 서서히 일본의 목을 졸라 죽이는 방식을 통해 일본과의 전쟁을 길게 끌고싶지 않았다. 




남서태평양 전역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사이판,펠렐리우,타라와,이오지마같은 해군 주도 작전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판했으나 예상되는 희생에도 불구하고 일본 본토 침공을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육군 참모총장 조지 마셜은 그보다는 덜했으나 일본 본토 침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마셜은 규슈의 일본군 수에 대한 정보 추정치가 사상자 추정치와 함께 계속 증가함에 따라 점점 더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오지마와 오키나와에서의 피튀기는 전투는 충격적이였다. 사이판에서의 사상자 비율은 충분히 나빴고 몰락작전의 초기 계획은 미군 한명이 죽을때마다 일본군 수비병 7명이 죽는다는 '사이판 비율'을 기준으로 만들어졌으나 오키나와에서는 미군 한명이 죽을때마다 일본군 한명에서 두명이 죽어나갔다. (규수의 본토에서 싸우는 일본군 90만명에 대한 계산을 해보았을때 미국 수뇌부는 침공에 냉담해져갔다.)




해군측에서 해군 참모총장 어네스트 킹은 일본 본토 상륙에 계속해서 반대했으나 (올림픽 작전의 세부계획중 일부의 필요성을 인정했음에도) 그 이유는 미 육군항공대와 일치하지 않았다. 중국군을 이용해 일본 본토를 공격하겠다는 킹의 계획은 많은 이유로 비현실적이였으나 그럼에도 그는 일본을 목졸라죽이기위해 중국 해안에 봉쇄기지를 세우는 안(롱톰 작전)을 지지했다. 공군은 일본을 폭격하여 일본을 항복시킬수 있다고 믿었으나 폭격할 도시가 다 떨어져갔다. 합참의장과 비슷한 급의 윌리엄 리히 제독은 일본 본토 침공이 필요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믿었다. 태평양지역 총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처음에는 본토 침공을 지지했으나 오키나와와 이오지마에서의 학살과 가미카제 공격을 겪은후 생각을 바꾸었다. 규수의 초기 상륙을 지휘할 예정이였던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은 사이판,이오지마,오키나와 전투를 직접 경험했기에 침공에 찬성하지 않았다. 스프루언스는 니미츠에게 계속해서 폭격을 하고 해상 봉쇄를 지속해야한다고 요청했으며 다른 일본 거점처럼 그들이 "자기 자신을 뜯어먹다"가 "더 이상 먹을게 없게" 되도록 해야한다고 믿었다.




몰락작전의 계획표는 합동참모본부가 45년 3월말에 작성하였으며 올림픽 작전(규수)은 45년 12월 1일,코로넷 작전(도쿄의 간토평야)은 46년 3월 1일로 잡았으나 니미츠 제독이 위험한 겨울 폭풍을 피하기 위해서(태풍 시즌이 예년보다 오래갈것을 예상하지 못함) 11월 1일로 날짜를 당길것을 제안하였고 그것이 받아들여졌다.




몰락 작전의 계획은 최종 지휘권이 맥아더에게 있는지 니미츠에게 있는지에 대한 군종간의 의견차이로 인해 복잡했다. 결론은 맥아더가 '일차적 책임'을 지고 니미츠는 '작전의 넓은 자율성'을 보장 받았다.즉, 전쟁이 끝날때까지 지휘 통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결국 태평양의 모든 미 육군은 맥아더의 지휘하에(니미츠의 지휘 구역에 있는 병력일지라도),모든 미해군은 니미츠의 지휘하에(맥아더의 지휘 구역에 있는 7함대까지도) 있었다. 이것은 실제로 '합동' 작전과 지휘의 통일을 위해 중요한것이였으나 맥아더의 참모부장은 "다시는 미 육군이 제독 아래에서 복무하지 않을것이다."로 요약했다. (골드워터-니콜스는 마지막으로 이것에 웃었다)[1]




45년 6월 18일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트루먼 대통령,전쟁부 장관 헨리 스팀슨,해군부 장관 제임스 포레스탈,그리고 네명의 합동참모들(리히,마셜,킹,육군항공대 장군 헵 아놀드)이 중요한 회의를 가졌다. 마셜은 규수가 일본군 35만명이 방어할것으로 예상된다고 브리핑했으며 맥아더는 일본군에 남은 항공기는 단지 2500~3000기 정도라고 추정했다(두 예상치 모두 너무 적다). 각군 수뇌부는 각각의 시점에서 일본 침공의 타당성에 대한 견해와 예상되는 인명피해를 제시하여 조언을 제공했다. 리히,킹,아놀드는 침공에는 반대했으나 전진해야한다는것에는 동의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최소한 규수를 점령하기 위한 첫단계로 침공이 필요하다고 마셜의 편을 들었다. 그런다음 트루먼은 작전에 필요한 인력을 유럽에서 태평양으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트루먼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결정을 내렸으나 킹은 향후에 재평가를 해 침공을 막을수 있는 기회가 있다고 믿었을 것이다(엄밀히 말해 그 후로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가 필요한 주요 결정사항은 없었다).




한편 여름동안 울트라 암호 해독을 통해 추산한 규수의 일본군 방어병력의 수는 계속 증가해 7월 중순에는 68만명에 도달했다. 그 결과 오키나와에서의 경험을 통해 추산한 사상자수는 계속 증가했으며 정보에 의하면 일본은 본토에서 더 많은 남성을 징용하고 있었으며 봉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만주에서 많은 병력을 본토로 데려올수 있었다.




규수에 상륙해 점령할 미 6군은 규수에서만 전사자 25,000명을 포함해 12만 4천 935명의 미군 전투 사상자와 비전투 사상자 26만 9천명이 나올것으로 예측했다. 합동참모본부는 규수에서의 90일간의 전투동안 156,000~175,000명의 전사상자와 3만 5천명의 전사자가 나올것으로 예측했다. 7월 말에 합참은 사상자가 최대 50만명에서 최소 10만명이 나올것으로 예측했다. 45년 7월 전쟁부는 몰락작전 전체 미군 사상자를 170~400만명으로 추산했는데 그중 사망자는 40~80만명 수준으로 예측했으며 일본측 사망자는 500만에서 천만까지로 예측했다.(몰락작전 초기 계획에서 1,792,700명의 병력이 일본에 상륙해야함을 요구했음을 감안할때 이 추정치는 가장 냉정히 추산한 수치이며 계획 된것보다 더 많은 병력이 고기분쇄기에 넣어져야했음을 보여준다.) 미국 정부의 다른 추정치에 의한 사상자 수는 50만에서 100만이다. 이 추정치와 다른 추정치중 어떤것이 더 정확한가에 대한 논쟁이 수년에 걸쳐 있었으며 (원폭 사용이 불가피했는가에 관한 논쟁에 휩싸였다) 나는 이것을 해결하지 않을것이다. 그러나 일본 침공의 결과는 미일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임은 분명하다.




올림픽 작전을 위한 미 해군 편성 계획




올림픽 작전에서의 미 해군의 역할은 태평양 전역의 모든 함정을 끌어와야 했으며 유럽 전역에서도 배를 가져와야했다. 전쟁에서 처음으로 3함대와 5함대가 동시에 작전할수 있을만큼 미 해군은 많은 배를 보유하고 있었다(7함대는 동남아시아와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에 있는 소수의 배로 축소되었다.).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이 지휘하는 5함대는 규수로의 상륙작전과 휘하의 고속항모부대 (TF-58)와 아직 살아있는 모든 구형전함들의 화력을 동원해 상륙을 직접지원하는것이 임무였다. 3함대의 고속항모부대(TF-38)와 모든 고속전함들은 혼슈와 훗카이도를 구석구석 두들김으로서 규수를 고립시키는 전략적 지원을 할 계획이였다. 영국 왕립해군 항모 부대(TF-37)는 3함대에 배속되었다. 일본에 대한 전술 공습을 위해 해군과 육항대는 영공을 분할했으며 해군은 동경 135도 동쪽의 모든것을,육항대는 그 서쪽의 모든것을 공격할수 있었다.




윌리엄 홀시 제독이 지휘하는 3함대는 10월 18일 규수를 고립시키기위한 공격을 시작할 예정이였으며 일본군 항공기들을 끌어내 파괴할수 있기를 바랬다. 10월 24일,고속항모부대는 TF-38과 TF-58로 분리될 예정이였고 분리 후 3함대는 1826기의 항공기를 보유한 21척의 고속항모와 11척의 고속전함,순양함 30척,구축함 107척으로 구성될 예정이였다. 3함대 휘하의 TF-38은 제2고속항모전단으로 지정될 예정이였으며 존 메케인 중장과 교대한 잭 타워스 중장이 지휘할 예정이였다. TF-38은 1266기의 항공기를 보유한 8척의 에식스급 함대항모와 4척의 인디펜던스급 경항모를 보유할 예정이였다. TF-38은 3개의 테스크 그룹으로 구성될 예정이였는데 아서 데이비스 소장이 지휘하는 TG-38.1,토마스 스프리그 소장이 지휘하는 TG-38.2,클리프톤 "지기" 스프리그 소장이 지휘하는 TG-38.3으로 구성될 예정이였다. 




영국 테스크포스(TF-37)는 버나드 롤링스 중장이 지휘하는 4척의 함대항모로 구성된 테스크 그룹하나와 (TG-37.6),필립 비안 중장이 지휘하는 한척의 함대항모와 4척의 경항모로 구성된 두번째 테스크 그룹(TG-37.7)과 560기의 영국 항공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TF-37은 3함대에 합류해 일본 본토 공격을 하기전에 홍콩 인근에서 기만공격을 하려했다.


Photograph of an oil painting by Commander Albert K. Murray, USNR, Official U.S. Navy Combat Artist. Admiral Raymond Ames Spruance, USN, aboard his flagship during his brilliant command of U.S. Fifth Fleet. Admiral Spruance is shown with some of his staff (left to right), the then Capt. Emmet P. Forrestel, Capt. B.B. Biggs, Capt. C.J. Moore, examining operational plans. (NH 124465)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제독 휘하의 5함대는 거대했는데 총 2,902척의 배로 구성되었으며(상륙함은 제외하고서) 미 6군 (해병사단 3개를 포함해) 58만 2천명의 병력을 규수의 35개 해안에 상륙시키며 총 76만 6700명의 병력을 해변에 내려놓을 계획이였다. 5함대는 800척 이상의 전투함과 1500척의 수송선, 13척의 구형전함, 순양함 24척, 구축함 139척, 호위구축함 167척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20척의 상륙지휘함, 210척의 공격수송선, 12척의 병력수송선, 84척의 공격화물수송선 ,92척의 구축수송선,515척의 전차상륙함,16척의 상륙선거함, 360척의 중형상륙함,3척의 병원선 또한 포함되어 있었으며 수많은 소형 순찰선과 기뢰전 함선과 보조함들이 있었다. 




5함대에 대한 항공지원은 '테드' 셔먼 중장이 지휘하는 제1고속항모전단인 TF-58이 제공할 예정이였다. TF-58은 6척의 에섹스급 함대항모와 엔터프라이즈,세척의 경항모가 포함되어 있을 예정이였으며 추가적인 항공엄호는 캐빈 더진 중장이 지휘하는 호위항모부대(TF-55)가 제공할 예정이였는데 TF-55는 16척의 호위항모와 448기의 항공기가 있을 예정이였다. 호위항모 4척은 해병항공대가 탑승중이였으며 3척은 '야간작전항모'로 지정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5함대는 4,023기의 함재기와 지상발진 항공기(류쿠제도에서 이륙한)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을 예정이였으며 마리아나에서 이륙한 768기와 이오지마에서 이륙한 225기가 혼슈를 공격해 간접적인 지원을 할 예정이였다. 엔터프라이즈를 포함한 야간작전항모와 함께 함대는 밤에도 최소 18기의 F6F-5N 헬켓 야간전투기와 육군 항공대에의 지상발진항공기인 P-61 블랙위도우 6기가 전투항공초계를 받아 보호받을 예정이였다. 전쟁에서 처음으로 공중조기경보가 레이더 탑재 함재기인 PBM-3W 어벤져와 지상발진 PB-1W(B-17 플라잉 포트리스의 해군형 공중조기경보 버전)에 의해 제공될 예정이기도 했다. 함대에는 또한 13개의 해상 전투기 지휘팀과 5개의 상륙부대 전투기 지휘팀도 포함될 예정이였다. 항공기 발전에 더불어 5함대는 1000기 이상의 KGW-1 론 순항미사일(독일 V-1 비행폭탄을 역설계한것의 해군 버전)을 개조된 LST와 호위항모에서 발사할 예정이였고 PB4Y-2 프라이베이터(B-24 폭격기의 해군 버전)에서도 발사가능하게 작업중이였다. 




상륙부대는 TF-40으로 지정되었으며 엘도라도에 승함한 리치몬드 '켈리' 터너 제독의 지휘를 받았다. 엘도라도에는 6군 사령관 발터 크루거 육군 장군또한 탑승했다. 6군은 각각 3개 사단으로 구성된 4개 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독립사단 두개가 추가로 있었다. 여기에는 제2,3,5해병사단과 9개의 미 육군 보병사단,1개 기병사단,1개 공수사단이 포함된 5 상륙군단또한 포함되어 있었다. 또 멜 프라이드 중장이 지휘하는 항공지원통제그룹(TG40.10)도 엘도라도에 탑승했다. 




켈리제독은 또한 10월 24일 규수에 도착할 어드벤스 포스(TF-41)을 지휘해 포격지원,기뢰제거,수중 폭파,수로측량 및 구조를 할 예정이였다. 실행일 직전 나머지 상륙군이 도착하면 TF-41은 해체되어 TF-40과 합쳐질 예정이였다. 제시 올랜도르프 중장은 구형전함들을 가지고 포격및 엄호부대 (TF-54)를 지휘할 예정이였으며 대부분의 전함은 나뉘어 각각의 공격부대와 함께할것이였다. 기뢰부대(TF-56)는 알렉산더 샤프중장이 지휘했으며 소해정들은 갈라져서 각각의 공격부대와 함께할것이였다. 




상륙군은 여러 공격부대로 나뉘어서 각각의 전함/순양함 호위항모의 지원을 받을것이였다.




제3공격부대(TF-43)는 올림푸스산에 승함한 시어도어 윌킨슨 중장의 지휘를 받을 예정이였고 수송선에는 미 육군 11군단이 탑승할 예정이였다.TF-43을 지원하는것은 리치몬드 코놀리 중장이 지휘하는 제3화력지원그룹(TG-41.3)으로 6척의 구형전함과 순양함 6척,구축함 13척에 지원함 34에 TF-55의 호위항모 4척이 있을 예정이였다..




제1공격부대(TF-45)는 헤리 힐 중장이 지휘할 예정이였으며 수송선에는 미 해병 제 5상륙군단이 탑승할 예정이였다. TF-45를 지원하는것은 제룰드 라이트 중장이 지휘하는 제5화력지원그룹으로 (TG-41.5) 4척의 구형전함과 10척의 순양함,구축함 14척에 지원함 74척에 TF-55의 호위항모 4척이 있을 예정이였다.




제7공격부대(TF-47)는 안콘에 승함한 다니엘 바비 중장이 지휘할 예정이였으며 수송선에는 미 육군 1군단이 탑승할 예정이였다. TF-47을 지원하는것은 잉골프 칠랜드 중장이 지휘하는 제7화력지원그룹으로 (TG-41.7) 3척의 구형전함, 8척의 순양함, 구축함 11척에 지원함 35척에 TF-55의 호위항모 4척이 있을예정이였다.




다른 두개의 소규모 공격부대는 글랜 데이비스 소장이 지휘하는 서부 공격부대(TF-42)에 속했으며 서부화력지원그룹 (TG-42.2)의 지원을 받아 바깥쪽의 섬들을 점령할 계획이였다. 남부 공격부대(TF-44)는 로바트 바리스코 소장이 지휘할 예정이였으며 남부 화력지원그룹(TG-44.2)의 지원을 받았다.




다른 주요 5함대 소속부대는 바트람 로저스 중장이 지휘하는 예비부대(TF-48)로 미 육군 9군단이 탑승할 예정이였고 아서 스트러블 중장(한국전 기간동안 7함대 사령관이였으며 인천상륙을 위한 제7연합 기동부대의 사령관이기도 했다)이 지휘할 지원부대(TF-49)도 있었다. 견제 부대(TG-40.1)는 프레더릭 무스브리거 준장이 지휘할 예정이였고 다른 주요부대를 위해 레이더 피켓과 견제를 할 예정이였다. 




이 엄청난 힘에 더하여, 11월에 신규건조 및 수리 된 선박의 추가 증원이 도착할 예정이였고 여기엔 수리된 에섹스,벙커힐,프랭클린, 산 재신토가 포함되었으며 영국 항모 HMS 일러스트리어스와 새로운 캐나다 야간항모 HMCS 오션이 합류할 예정이였다. 45년 12월까지 고속항모 40척에 전함 25척이 올림픽작전 지원과 다른 일본 본토 폭격을 위해 작전할것이였다.




올림픽 작전에 투입된 미해군의 규모로 보아 승리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의심스러운것은 승리를 위해 지불해야할 대가였다. 잠수함과 소형 잠수정,자폭보트,자폭 잠수부,기뢰,짧은 비행거리와 지면 근접비행에서 오는 일본의 이점과 비교적 약한 병력 수송선을 공격하려는 일본의 전략을 배제하고 오키나와 전역과 같은 가미카제당 피격 횟수 비율을 계산하면 미 해군은 최소 95척의 배가 침몰할것이며 995척의 배가 손상되며 5천에서 만 이천명의 수병 사망이 올림픽작전에서만 나올것이다. 쉽게 설명하자면 미 해군 역사상 가장 큰 희생을 치룬 전투가 됐을것이다.




1.골드워터-니콜스법

참조: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ils5229&logNo=221049878532&categoryNo=0&parentCategoryNo=0&viewDate=¤tPage=1&postListTopCurrentPage=1&from=postView 


(Sources include: The Naval Siege of Japan 1945: War Plan Orange Triumphant, by Brian Herder: Osprey Publishing, 2020. Downfall: The End of the Imperial Japanese Empire, by Richard B, Frank: Penguin Books, 1999. Hell to Pay: Operation Downfall and the Invasion of Japan, 1945-1947, by D.M. Giangreco: Naval Institute Press, 2009. Twilight of the Gods: War in the Western Pacific, 1944-1945, by Ian Toll: W.W. Norton, Co., 2020. The Fleet at Flood Tide: America at Total War in the Pacific 1944-1945, by James D. Hornfischer: Bantam Books, 2016. Typhoons and Hurricanes: Pacific Typhoon at Okinawa, October 1945, NHHC document at history.navy.mil Nov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