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저번에 말했듯이 오늘은 BAC TSR-2에 대해 씨부려보겠다.



1. 도입배경

믿기지 않겠지만 2차 세계 대전 직후 제트 엔진 기술의 선구자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은 제트 추진 전투기의 선구자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40년대에 개발된 영국의 첫 제트 추진 전투기 미티어와 50년대 세계 최초의 슈퍼크루즈 기능을 갖춘 실전 배치 요격기인 라이트닝, '세이버 슬레이어'라는 별명이란 별명을 지닌 폴랜드 냇 등등 여러 전투기를 설계, 제작하였다.

(당시에 영국의 제트 엔진 기술의 결정체였던 라이트닝의 사진)


이는 영국에만 국한된것이 아니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 노동당이 집권했을 당시, 소련은 제트 엔진 기술이 영국에 비해 매우 낮은 상태였다.
그런데 1946년, 2차 세계대전때 동맹국이라는 이유로 롤스로이스 넨(Nene)터포 제트 엔진 55기를 수출하는 일이 벌어진다.
(사실 수출이 아닌 선물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소련과의 관계 증진이란 명목으로 수출했으며 소련은 이 엔진을 카피 생산하여 VK-1 엔진을 개발, 이를 Mig-15에 장착하여 한국전쟁 당시에 영국과 미국 그리고 UN군을 엿 먹이기도 했다.


(참고로 중국도 WP-5라는 제식명으로 카피생산했다)
(이후 롤스로이스는 당연히 그 어떠한 돈을 받지 못해, 영국은 두 번이나 엿을 먹기도 했다)

(엔진을 받은 즉시 테스트한 결과, 소련산 엔진에 비해 2배나 더 강한 힘과 고장이 잘 안나는 높은 신뢰성에 놀라워했으며 이 엔진으로 인해 소련의 항공기 개발 능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

(롤스로이스 넨(Nene) 엔진, 한국전쟁때 미국과 UN군을 곤욕에 빠뜨린 Mig-15를 나타나게 해주 원흉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당연히 전투기에만 국한된것이 아닌 폭격기도 적용되었다.

1951년, 잉글리시 일렉트릭 캔버라가 개발를 마치고 배치하기를 시작했는데 제트엔진을 단 폭격기였던 캔버라는 초기 요격기들의 요격을 따돌릴정도의 속도를 보여줬을 정도로 빠른 속도를 자랑했으며 당시 기준으로 높은 고도에서의 운용이 가능했다.

이로 인해 미국 록히드 마틴사가 RB-57D라고 명명정찰기를 라이선스 생산을 했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아왔다.

(RAF소속 폭격기, 잉글리시 일렉트릭 캔버라)

그러나 1959년, 미국의 RB-57D가 소련의 S-75(NATO 명칭 SA-2) 지대공 미사일의 첫 격추기가 되었다.

결국 지대공미사일에 격추된 캔버라로 인해 폭격기는 지대공 미사일하고 속도와 고도, 어느 하나 우월한게 없음을 입증하게 된다. 

(미공군의 RB-57)


결국 SAM에 대항하기위해 여러가지 방법이 나왔으나 그중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저고도 비행이었는데 이는 지구가 평면이 아닌 원형이기에 저공비행시에 레이더에 발각되지 않기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 개발된 캔버라는 중-고고도 폭격기로 개발되었던터라 이러한 저고도 비행을 못하였으며 결국 시대에 흐름에 따라 1961년, 폭격기로서의 임무가 종료되고 정찰기로 굴려졌다. 

(사실 캔버라는 폭격기보다 정찰기의 임무가 더 적성에 맞았다고 한다.)

(정찰기로는 2006년까지 운용되는 장수만세를 보여주었으며 NASA에서는 WB-57로 개조해서 아직까지도 쓰이고 있다. 노인학대)

(NASA가 운용하는 WB-57)


사실 RB-57이 격추되기 한참전이었던 1955년에 이미 폭격기의 운용 환경이 변화할거라는 예측한 영국 군수성(Ministry of Supply)은 캔버라를 제작한 잉글리시 일렉트릭사와 함께 새로운 경폭격기를 연구했다.
저고도 비행시 발생하는 난류와 역풍의 영향을 줄이기 위한 높은 날개 하중, 저고도 비행을 위한 고성능 항법 레이더의 초기 버전, 저고도 비행시 엄청나게 소모되는 연료사용을 위한 큰 연료통을 특징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연구결과는 3,700km의 작전 범위, 마하 1.5의 속도를 가져야 했으며, 2명의 승무원이 필요했는데 이중 한명은 항법 및 무장 운영자였다. 폭장량은 1000lb 4개(450kg)폭탄을 탑재되야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후 1956년, 일반 작전 요구 사항(General Operational Requirement)339, 일명 GOR.339로 명명됨과 동시에 공식적인 개발이 시작되었으며, 1957년 3월에 다양한 항공기 제조업체에 전달되었다.

이때 GOR.339의 요구 조건은 지금봐도 상당히 미쳐버린 요구사항이었는데 나열해보자면


1. STOL 혹은 제한적 VTOL 기능을 갖출것

2. 초음속에서 핵투발이 가능할것

3. 전쟁으로 비행장, 활주로 파괴로 인한 이용 불가를 염두한 험지 이착륙이 가능할것

4. 낮, 밤을 가리지 않고 모든 날씨에서의 저고도 비행과 전술 핵투하가 가능할것

5. 낮, 밤, 날씨 및 시간에 관계없이 정찰 촬영이 가능할것

6. 날씨에 관계없이 전자 정찰이 가능할것

7. 고고도에서 마하 2.0, 저고도에서 마하 1.2의 속력을 낼수 있을것(300m 이하에서는 마하 0.95)

8. 재래식 폭탄 및 로켓을 달수 있을것

9. 경우에 따라 레이더만으로 핵투하가 가능할것

...

 

구라같겠지만 사실이다. 참고로 글쓴이는 이 요구조건을 보고 욕이 절로 나왔다.


2. 제원

승무원 : 2명

길이 : 89ft(27m)

날개폭 : 37ft 1.68in (11.3203m)

높이 : 23ft 9.24in (7.2451m)

날개면적 : 702.9 sq ft (65.30 m2) (sq=제곱)

항공기 중량 : 54,750lb (24,834 kg)

총 중량 : 79,573lb (36,094 kg)

최대 이륙 중량 : 103,500lb (46,947 kg)

엔진 : 2개의 브리스톨 시들리사의 Olympus Mk.320 터보 제트 엔진

40,000ft(12,192m)기준 22,000lbf(98kN) 에프터 버너를 켰을 경우 30,610lbf(136.2kN)의 추력

최대 속도 : 마하 2.35 (해수면기준 마하 1.1)

사거리 : 4,600km

작전거리 : 1,390km

상승 한도 : 40,000ft (12,000m)

상승률 : 15,000ft/Min (76m/s)

추력 대 중량비 : 0.59


무장

무장 적재량 : 10,000lb (4,500kg)-내부 무장창 6,000lb (2,700kg)-외부 무장창 4,000lb (1,800kg)


(탑재무장 위에 사진 말고도 다른 무장도 많다.)

그외 탑재 무장 : Red Beard 15kt 핵무기/OR.1177 300kt 핵무기/1,000lb (450kg) 재래식 폭탄/WE.177 핵무기/37in(940mm)로켓런처


전자장비(회사명(장비이름)순)

Elliot Automation사에 의해 수정된 Autonetics Verdan AutoPilot(자동조종장치)

Ferranti (지형 추적 레이더 및 내비게이션)

EMI (측면 탐색 공중 레이더)

Marconi (일반적인 항공 전자 장비)

Cossor (IFF)

Plessey (라디오)


3. GOR.339 이야기


1-1. 정치적 변화

위에 GOR.339의 요구조건을 맞추기 위해 많은 업체가 연구하고 있을 무렵, 1957년 국방장관 던컨 샌디스(Duncan Sandys)'유인 전투기의 시대는 끝났고 탄도 미사일이 미래의 무기'라는 발언을 통해 처음으로 논란에 휩싸였다.

이러한 관점은 항공업계와 MOD 내부에서 활발히 논의되었으며, 당연하게도 이러한 발언은 엄청난 반대를 받았으며, RAF 고위 간부들은 기동성의 중요성을 언급하며 TSR-2가 캔버라는 물론, 잠재적으로 V 폭격기 전체도 대체할 수 있다면서 반대했었다.

(1957년 당시 던컨 샌디스 장관의 모습)


위에 유인 전투기의 필요성에 대한 논쟁과 더불어, 또 다른 정치적인 공작은 이 TSR-2 프로젝트를 복잡하게 만들어버렸는데 1957년 9월, 영국 군수성항공기 제조 업체들에게 둘 이상의 회사로 구성된 팀만이 프로젝트에 참가할 수 있다는 통보를 했다. 이는 영국의 항공수요는 나날이 줄어드는데 반해항공기 제조 업체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회사간의 협력 증진과 합병촉진을 도모하기 위해 이러한 통보를 했다.


게다가 GOR.339가 통보될 당시, 이미 왕립 해군은 NA.39 프로젝트가 한창이었다. 이것은 저고도 아음속 공격기로 육상이 아닌 해상용으로 설계되던중이었다. 다른 군대가 같은 항공기를 사용하는 것으로 예산을 절약할수 있으며 이 NA.39 프로젝트는 GOR.339의 일부 조건을 충족할 수 있는 설계안을 제안했다. 게다가 국방부 참모총자이자 전 제 1해군 사령관이 었던 마운트 배튼 경(Lord Mountbatten)이 NA.39 프로젝트를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후에 'TSR-2 1대 구입할 가격에 NA.39를 5대를 구입할수 있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으나 RAF(왕립공군)은 이 제안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TSR-2에 비해 나쁜 이륙성능과 더불어 RAF가 원하는 역할을 수행할수 없음을 이유로 들었다. 심지어 한 RAF 관계자는 'NA.39에 약간의 관심만 보인다면 GOR.339 항공기를 얻지 못할 수도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참고로 NA.39는 후에 블랙번 버캐니어가 되며 실질적 승자가 되었다.


(해군 사령관 마운트 배튼경의 모습, 그가 블랙번 버캐니어의 열혈한 지지자가 된건 뛰어난 안목이었는지 아님 그저 운에 불과했는지는 알수없다.)


마지막으로 당시 국방부 과학보좌관이었던 솔리 주커먼 경(Sir Solly Zuckerman)이 영국의 기술적 성과를 낮은 평가를 받았으므로 미국으로부터 하드웨어를 조달하는 것에 찬성하는 말을 했다고 한다.


1-2. 제출

GOR.339에 대한 작업은 1958년 1월 31일 제출 마감이 되었으며 수많은 제안들이 제출되었다고 한다.

당시에 잉글리시 일렉트릭사는 쇼트 브라더스사와 팀을 이루어 P.17A와 VTOL 기능을 갖춘 Shorts' P.17D를 제출 했다.

(당시에 P.17A의 모습)



또한 Avro사, Blackburn (NA.39)사, de Havilland사, Fairey사, Hawker사 및 빅커스-암스트롱사에서도 제출했다.


항공부는 추가적인 검토를 통해 EE P.17A와 빅커스-암스트롱사의  Type 571을 선택했다.


여기서 국방부는 항공기 설계뿐 아니라 현장에서 항공기를 유지하는데 필요한 모든 항공 전자 시스템, 지원 시설 및 물류등을 요약한 '전체 시스템 개념(Total Systems Concept)'를 포함한 빅커스-암스트롱사의 제출서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잉글리시 일렉트릭사의 경영진들의 공식 의견은 빅커스사에 비해 부족한것을 확실히 알았으며, 두 회사의 결합은 유익한 결합으로 느껴졌다고 한다. 이에 따라 잉글리시 일렉트릭사를 하청 업체로 하여 빅커스사에게 개발 계약을 수여했다.


GOR.339의 존재는 1958년 12월 하원에서의 성명에 의해 대중에 공개되었다.

추정 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항공부는 다양한 프로젝트 제안들이 결합될 수 있는 방법을 검토, 1959년 1월군수성 장관은 잉글리시 일렉트릭사와 협력하는 빅커스사에 의해 TSR-2가 개발될 것이라 발표했다. TSR-2는 "Tactical Strike and Reconnaissance, Mach 2"에서 따온 말이다.


1959년 1월 1일, TSR-2 프로젝트는 공식적으로 승인을 받고 2월에 새로운 운영 요구사항.343(일명 OR.343)에 따라 지정되었다. OR.343은 GOR.339의 요구사항뿐만 아니라 저고도 운영이 200ft 이하라는 것과 고고도에서 마하2에 도달해야 한다는 추가적인 사항이 추가됬다.


1-3. 요구사항 및 임무

TSR-2의 임무는 1,900km의 전투 반경을, 내부에 2,000lb(910kg)의 무기를 운반해야했다. 그리고 임무 중 190km에서는 마하 1.7의 속도로 고고도에서 비행해야했으며, 목표 지역 안밖으로 370km에서 마하 0.95의 속도로 200ft에서 비행을 해야했다. 그 외의 임무에서는 마하 0.92로 비행했다.

임무가 200ft의 저고도 비행일 경우 임무 반경은 1,300km로 줄어 들며, 더 많은 무기를 실을 경우 사거리도 더 줄어들었다. 그래서 TSR-2는 임무 반경을 늘리기 위해 외부 연료 탱크 장착이 포함되었으며, 각 날개 아래에 2,000L 탱크 1개나 동체 아래 중앙에 4,500L 탱크 1개, 내부 무장창에 무장이 없을 경우, 2,600L 탱크를 장착 할수있었다.

(참고로 이후 변형 모델은 가변 형상 날개가 장착되었을 것이다라는 글귀도 있다.)


4. 개발


1959년, 잉글리시 일렉트릭(이하 EE사)과 빅커스사는 1963년까지 항공기를 생산하는 것과 공동 설계를 추진하기 위해, 동시에 BAC사로의 합병을 위해 두 회사의 디자인 중 최고의 디자인을 결합하는 작업을 했다.

(당시에 BAc사의 로고)



EE사는 델타익 날개를, 빅커스사는 긴 동체에 후퇴익 날개의 설계를 제출했다. 이때 더 많은 초음속 실험을 통해 만들어진 EE사의 날개가 빅커스사보다 우월했지만 동체는 빅커스사의 기다란 동체가 선호되었다. 그래서 사실상 이 항공기는 50대 50으로 제작될 것이었으며 앞부분은 빅커스사가 뒷부분은 EE사가 제작할 예정이었다.


TSR-2는 두 개의 브리스톨-시들리사의 Olympus Mk.320 터보 제트 엔진에 의해 작동되었다. (이 엔진이 훗날 콩코드의 엔진으로 쓰이기도 한다.)

날개 하중이 당시로서는 매우 높았기에 마찰열을 비롯한 관련 기상 현상에 의해 날개가 동요하지 않고 매우 안정감이 있었고 매우 빠른 속도로 저고도 비행을 할 수 있었다. 당시 EE사의 최고의 테스트 파일럿인 Roland Beamont는 TSR-2의 비행 특성을 캔버라와 비교하며 '캔버라가 TSR-2에 비해 문제가 더 많다고 할 정도였다.'

(Olympus Mk.320 터보 제트 엔진의 모습)

당시 기록에 의하면 TSR-2는 37,000ft~51,000ft 사이의 고도에서 마하 2.05로 지속적인 비행이 가능했으며, 마하 2.35에 달하는 대시 속도를 가졌었다고 한다. 이론적으론 45,000ft에서의 수평 비행속도가 무려 마하 3이었다.


또한 TSR-2는 매우 정교한 항공전자장비를 갖추고 있었는데 전방 주시 레이더(FLR)와 항법 고정용 측면 감시 레이더를 지녔는데 이는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군용 항공기에 장착된 장비이다. 이러한 기능은 승무원의 작업량이 크게 감소함에 따라 장거리 지형 추종 분류를 가능하게 하는 혁신적인 자동 조종 시스템을 가능케 했다.


5. 테스트 비행과 문제점


테스트 비행을 할 2대가 제작되었지만 엔진 개발과 언더 캐리어 문제로 첫 비행이 지연되었고 TSR-2는 그 해 판버러 에어쇼에서 대중에게 공개될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시험을 앞둔 며칠 동안 야당의 국방 대변인인 데니스 힐리(Denis Healey)는 이 항공기가 도입될 즈음엔 '새로운 대공 미사일'이 나타나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며 비판했다.


1964년 9월 27일, 마침내 테스트 파일럿 롤랜드 빔온(Roland Beamont)월트셔 주 보스콤비 다운에 있는 항공기 및 무장 실험 시설(A&AEE)에서 XR219로 명명된 시험기의 첫 비행을 했다. 초기 비행은 언더캐리어를 내리고 엔진 출력을 엄격하게 제어한 상태에서 비행했으며 첫 15분 비행은 460km/h와 10,000ft로 제한되었다. XR219의 두 번째 비행에선 이륙 직후, 인간의 안구 공진 주파수가 연료 펌프의 진동으로 인해 조종사가 일시적 시력 상실을 방지하기 위해 엔진 한 개를 뒤쪽으로 조절했다고 한다.


(EE사의 최고의 테스트 파일럿, 롤랜드 빔온(Roland Beamont)의 모습, 그는 2차 세계 대전때 허리케인과 타이푼, 템페스트를 몰았던 파일럿이었다.)

그러나 착륙기어가 10차 시험 비행에서만 정상 작동하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는 착륙시 심각한 진동문제로 이 문제는 테스트 비행 내내 지속되었다고 한다.


이후 A&AEE에서 BAC Warton으로 이송된 후 14번째 테스트 비행에서 최초의 초음속 시험 비행을 했는데 이때 TSR-2는 에프터버너를 키지 않은채로 마하 1에 도달했다.(슈퍼 크루즈) 그러나 두 개의 엔진의 에프너버너를 켜야했지만 한 개의 엔진의 에프터버너용 연료 펌프가 작동하지 않자 결국 다른 한 개의 엔진의 에프터버너를 가동했으며, 그 결과로 두 개의 엔진이 에프터버너를 써야 겨우 따라잡았던 윙맨 James "Jimmy" Dell(제임스 "지미" 델)의 라이트닝이 따라잡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이후 TSR-2를 직접 조종한 제임스 "지미" 델은 TSR-2를 '마치 큰 번개' 같다고 말했다 한다.

(당시 라이트닝을 몰고 겨우 TSR-2를 쫓아갔지만 결국에 놓친 파일럿, James "Jimmy" Dell(제임스 "지미" 델)의 모습)

TSR-26개월 동안 총 24번의 테스트 비행을 했는데, 복잡한 전자제품이 장착되지 않았다. 이러한 비행은 기본적인 비행 품질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그리고 마하 1.12의 속도로 200ft까지 내려와 비행하는 저고도 비행이 페니슐라(Pennines) 상공에서 성공하였으나 동체의 진동 문제는 여전했으며 이미 복잡해진 착륙 기어를 장착한 XR219가 추가적인 tie-struts를 장착하고나선 몇 번의 비행에서만 비행성능에 심각한 감소가 뒤따랐다고 한다.

결국 1965년 3월 31일에 마지막 비행을 하고 테스트 비행 프로그램을 완료못한 상태로 설계와 시스템 수정을 거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비용은 꾸준히 상승했으며 회사 및 정부의 고위 관계자들의 우려를 낳았으며 이미 항공기의 이륙거리 및 전투반경과 같은 OR.343에 요구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결국 비용절감을 이유로 요구조건을 낮추었는데 전투반경이 1,200km 줄이고 최고 속도는 마하 1.75 줄였으며 이륙거리를 1,800ft에서 3,000ft로(550m에서 915m로) 늘렸다고 한다.


(폭격기가 550m 이륙? 이건그냥 미친거같다.)


그러나 이후 정세가 급변하게 되는데...


다음편에 계속...


(다음편 : https://arca.live/b/gaijin/23771341?p=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