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문, 학대, 시체 사진 등장 주의


1. 개요

때는 2002년, 대량학살무기를 찾기 위해 이라크를 침공하여 사담 후세인을 체포한 미국은 친미 정권의 수립이 우선 사항이라고 판단하고, 이의 원할한 진행을 위해 이라크의 "미국화" 를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 특유의 알쏭달쏭한 민사 작전의 한계로 인해 현지 미군은 처리해야 할 자잘한 반군 조직과 저항을 계속하던 이라크군 잔당이 잔뜩 생겨버렸고, 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사담 후세인 시절부터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던 아부 가리브 교도소를 이용하게 된다. 아부 가리브 교도소는 당시 이라크 내 존재하던 미군이 운용하는 수용 시설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으며 미 육군의 제372헌병중대가 교도 임무를 담당하였다. 대부분의 수용자는 교도소의 연병장에 쳐진 텐트에 수용되었다. 아부 가리브에는 반군 단체의 리더격 인물들과 반미 행위 주동자들이 주로 수용되었으며, 그 수가 가장 많았을 때는 무려 7,490명에 달했다.


<아부 가리브 교도소의 지도>


그렇게 아는 사람만 알던 수용소가 조용히 운영되던 중, 국제 인권 단체인 암네스티 인터네셔널이 성명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이라크에서 운용중인 미국의 수용소에서 상당한 수준의 인권 탄압이 자행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의 폭로에 의해 수용자들이 어떠한 재판도 없이 즉결 심판에 의해 이 곳에 수용되었으며 잠 안 재우기, 직사광선 아래에 방치하기, 불편한 자세로 구속하고 방치하기 등의 잔혹한 고문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이 폭로 이후, 당연히 미 육군은 이 사태를 부정했지만 이미 늦어버렸다. 아부 가리브 교도소는 순식간에 취재하려는 기자들로 넘쳐나기 시작했으며 AP통신, 국제적십자회, CBS와 뉴욕타임즈가 아부 가리브의 참상을 다큐멘터리와 뉴스 특집 형식으로 방영하는데에 성공했다. 아부 가리브의 참상이 미디어에 등장하자 조지 부시 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트 국방장관은 결국 이 상황은 이라크 주둔 미군의 의도와는 무관하며 책임자를 밝혀내어 처벌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약속할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추가적인 정보가 공개되었다. 아부 가리브에서 고문을 승인한 사람은 리카르도 산체스 중장으로, 그는 포로들에게 군견으로 위협하기, 극한의 온도에 내몰기, 잠 안 재우기 등의 "향상된 심문 기법"을 사용하는 데에 동의했다. 그러나 이는 산체스 중장의 독단적인 결정조차도 아니었다. 애초에 "향상된 심문 기법" 자체를 승인한 것이 다름 아닌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이었고, 이는 고문을 묵인한 최상급 주체는 미 국방부였던 것임을 뜻했다. 이런 식으로 상부의 묵인과 은근한 독려가 지속되자, 현장 병력인 372중대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2. 참상

<아부 가리브를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사진. 사진 속 인물은 알리 샬랄 알-카시라는 남성으로, 그의 소유인 축구장에 미군이 시신을 묻으려고 하자 그에 대해 항의하다가 체포되었다.>



<신원 불명의 남성에게 목줄을 채운 린디 잉글랜드 일병. 이 사진의 유출로 인하여 아부 가리브의 포로 학대 소식이 들불처럼 퍼져나갔다.>


<인간 피라미드를 쌓고 포즈를 취하는 찰스 그레너 상병(뒤)과 사브리나 하먼 상병(앞). 하먼 상병은 입대 전 파파존스의 매니저로 일하던 평범한 여성이었으나, 아부 가리브에서는 심문이 예정되어 있는 포로들을 "정신적으로 굴복"시키는 역할을 맡았다.>


<수갑이 채워진 수용자들을 마구 구타하는 그레너 상병과 침대에 묶인 채로 방치되었던 죄수.>


<수용자들에게 자위행위를 강요하며 담배를 물고 포즈를 취하는 잉글랜드 일병. 이 상황에 대한 설명은 교도소 출소 이후 잉글랜드 일병 본인이 기자에게 직접 증언한 것이다.>


<스트레쳐에 수용자를 엎드리게 한 뒤 깔고 앉아있는 모습과 블편한 자세로 수용자를 구속한 뒤 심문에 임하는 이반 프레드릭 하사.>


<수용자에게 안정제를 강제로 주입하는 메간 앰뷸 상병. 그녀는 원래 만기 제대 후 예비군으로 전환되었으나, 이라크 전쟁 발발 이후 병력 부족으로 인해 소집된 후 372중대로 배속되었다. 앰뷸 상병은 맨 윗 사진에 나온 목줄 사건 당시 잉글랜드 일병 옆 벽에 기대어 구경하고 있었다.>


<고문치사로 사망한 마나델 알-자마니의 시체 옆에서 포즈를 취하는 하먼 상병과 그레너 상병. 알-자마니는 모래주머니를 얼굴에 올려놓는 고문을 당하다 질식사하였다.>



아부 가리브의 수용자들을 취재한 기자들과 복무했던 병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교도소 안은 가히 지옥에 가까웠다. "향상된 심문 기법"이 절찬리에 사용된 것은 물론이고 이에 전혀 해당하지 않는 구타 및 가혹행위도 당연하다는 듯 이어졌다. 위 사진에 나온 것 외에도, 침대에 거꾸로 매달아서 수 시간 방치, 군견을 동원하여 위협하기, 분변을 강제로 온 몸에 바르기 등의 온갖 잔혹행위가 벌어졌다. 수용자에게 가해지는 성폭력도 심각한 수준이었다. 교도소에 수용된 여성 수용자들의 일부는 헌병과 통역관들에게 강간 피해를 입었으며, 이들 중 임신한 여성은 석방 이후 명예 살인을 당해야만 했다. 남성 수용자들의 경우에는 서로의 성기를 빨게 하는 등 굴욕적인 행위를 하도록 강요받았으며 나이가 어린 수용자들은 강간의 마수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3. 처벌과 마무리

결국 2004년 7월 청문회가 대대적으로 열렸고, 럼스펠드는 자신의 책임임을 전면적으로 인정했으나, 여기에서도 '학대'와 '고문'은 다르다며 아부 가리브 사태에 '고문'이란 단어는 맞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이 발언과 더불어 책임을 고문 당사자들에게만 떠넘기려는 미 육군의 태도는 정치권의 무수한 지적을 불러일으켰다. 이라크 국민들은 당연히 분노했으며 미적지근한 미국의 태도는 향후 7년간 미군의 민사 작전의 발목을 잡는 문제의 주요 발판이 되어버린다. 이 사건은 국제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러시아를 비롯한 제2세계는 기회를 놓지지 않고 미국을 맹비난했으며 쿠바의 관타나모 수용소 문제가 다시금 국제적으로 불거지는 계기가 되었다.


총 14명의 군인들이 사건과 관련되어 사법 처분을 받았지만, 그 중 3명은 무혐의로 판명되거나 아예 기소 자체가 되지 않았으며. 나머지 11명도 대부분 가벼운 형량만을 선고받았다. 주요 인물들의 형은 다음과 같다.


- 토마스 파파스 대령: 군견의 사용을 묵인한 죄로 8000달러의 벌금형에 처해졌다. 이후 장성 진급에 실패하였지만 사법 처분은 받지 않았다.


- 스티븐 조던 중령: 중범죄 2개를 포함한 12개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나, 증언 시 그의 권리를 말해주지 않은 군 검사 측의 의도적인 실수로 인해 중범죄 2개 항을 포함한 8개의 죄목의 기소가 취소되었다. 이후 남은 죄목에 대해서도 전부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다.


- 찰스 그레너 상병: 그레너 상병은 포로학대의 제1주범으로 지목되어  다수의 포로학대에 관한 중범죄로 기소되었으며, 일병으로 강등 후 징역 10년을 선고받은 후 6년 반만인 2011년에 가석방되었다.


- 이반 프레드릭 하사: 프레드릭 하사는 각종 학대와 가혹행위로 기소되어 일병으로 강등 후 징역 8년을 선고받은 후 4년만인 2007년에 가석방되었다.


- 사브리나 하먼 상병: 하먼 상병은 혐의 7개 중 6개가 인정되어 징역 5년을 구형 받았으나, 실제로는 징역 6개월이 선고되었다.


- 메간 앰뷸 상병: 앰뷸 상병은 업무태만으로 기소되어 일병으로 강등 후 6개월간 감봉에 처해졌다. 앰뷸 상병은 수감 전인 2005년 위의 찰스 그레너 상병과 결혼했고, 남편의 형기인 10년은 유래없이 긴 기간이라며  남편의 결백을 주장하였다.


- 린디 잉글랜드 일병: 잉글랜드 일병은 포로학대의 제2주범으로 지목되어 다수의 포로학대에 관한 중범죄로 기소되었으며, 일병으로 강등 후 징역 10년이 구형되었으나, 실제로는 일병 강등 후 징역 3년만이 선고되었고 1년 반만인 2007년에 가석방되었다. 잉글랜드 일병은 위의 찰스 그레너 상병과 교제하며 임신하였고, 아부 가리브 이후 귀국한 후 그의 아이를 출산하였다. 이후 2012년 인터뷰에서, 수용자들은 자신들을 죽이려고 했던 사람들이라면서 자신의 행동에 부끄러움이 없음을 피력했다.



이후 도널드 럼스펠드가 기소되는 것을 시작으로 개인 간의 피해소송 등이 다수 발생하였으며, 아부 가리브와 관련된 마지막 판결은 2013년에 나왔다. 유엔에서는 이라크와 관련하여 제네바 협정 및 포로와 관련된 유엔 결의안이 채택되었으나, 제1세계 친미 국가들의 미진한 태도와 추후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기를 원했던 제2세계 국가들의 시큰둥함으로 인해 결국 결의안은 흐지부지되었다. 이 사건 이후 미군에 의한 대규모 고문 사건의 눈은 쿠바의 관타나모로 쏠림으로서 자연스럽게 아부 가리브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잊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