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https://arca.live/b/gaijin/59805898



1521 항공기지는 1969년의 처참한 실패를 교훈 삼아 밑바닥부터 모든 제트 항공전 교리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이를 위해 소련 공군본부의 수많은 전술 분석가들은 매일같이 수많은 양의 데이터와 자료를 가지고 씨름해야 했다. 이들은 베트남 전쟁과 4차례에 걸친 중동전쟁에서 기록된 모든 항공전의 결과를 분석하고 취합하여 소련 공군에게 적합한 항공전 교리를 만들어 내야 하는 임무를 맡았던 것이다. 미국의 탑건에서는 우수한 조종사들이 자신들의 경험을 내세워 도제식으로 조종사들에게 조종술을 가르쳤다면, 1521부대에서는 다름 아닌 유리 가가린 공군사관학교가 전술과 교육과정을 개발하는 역할을 맡았다. 항공 전술 개발 과정은 훗날 리페츠크 훈련 센터에서 이어받게 된다.

 

데이터 분석 결과가 나오기 시작하자 1521부대는 즉시 소련 공군을 위한 새로운 항공전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한 그룹이 항공기의 기동에 대한 계산을 수학적으로 이론화하면, 다른 그룹이 이 이론을 직접 항공기를 타고 성립하는지 증명해 보는 과정이 이어졌다. 이렇게 해서 정립된 일련의 전술들을 이용하여 소련 공군은 ‘500 연습’이라는 고난이도의 전투 훈련 과정을 창설하게 된다. 500 연습에서 가장 중요시된 요소는 바로 강도였다. 조종사가 500 연습에서 고득점을 하려면 전체 임무 시간의 60% 이상을 800km/h를 초과하여 날아다녀야 했고, 공중 기동을 수행하는 시간의 40%는 항공기의 가해지는 중력가속도가 4G 이상이 되어야 했다. 이 두 조건을 만족하지 못하면 임무는 실패한 걸로 간주되었다.

 

500 연습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변화한 부분은 바로 조종사들에게 요구되는 ‘전장 가시화’ 능력이었다. 보즈두크 방공시스템의 명령을 수동적으로 따르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500 연습에 참가한 조종사들은 가상적기와의 교전 상황에서 15개에서 20개 정도 되는 모든 경우의 수들을 직접 생각해 내고 이를 가시화하여 그에 맞는 적절한 기동을 수행해야 했다. 이를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1521부대의 가상적기 조종사들에게는 소련치고는 굉장히 파격적으로 기존 전술에 없는 기동을 수행해도 좋다는 허가가 떨어졌다. 이것이 바로 기존 항공 전술 훈련과 500 연습이 차별화되는 가장 큰 요소가 되었다.

 

가상적기 조종사들이 모두 적절한 기량을 갖추게 되자 탑건처럼 500 연습의 대상은 전 공군으로 확대되었다. 마리 항공기지에 파견된 소련 각지의 항공연대에서 차출된 파일럿들은 마리에서 혹독한 공중전 훈련을 받았고, 이들은 훈련이 끝난 후 원대 복귀하여 해당 부대에서 비행 교관 역할을 맡게 되었다. 1972년 중반이 되자 소련의 모든 미그-21 연대들은 마리에 파견되었던 조종사를 한 명씩 보유하게 되었다. 이 기조는 소련 공군이 미그 21을 제외한 다른 모든 전투기 연대에게도 500 연습을 확대하게 되는 1974년까지 유지되었다. 이제 1521 부대는 소련 전 공군의 전투기 부대에게 적절한 평가를 부과하는 임무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1974년 이후 소련의 모든 전투항공연대는 1년에 한번 500 연습에 참가하여 부대의 전투 기량을 평가받아야 했다. 평가되는 요소는 복잡한 기동의 수행능력, 사막 지형에서의 저고도 침투, 도그파이트와 신속 대응 능력, 기동중인 적기에 대한 미사일과 기관포 사격 능력 등이 있었다. 평가는 단일 기체는 물론이고 2기 편대와 4기 편대, 심지어는 항공연대 전체에 부과되는 경우도 있었다. 평가에서 좋은 점수를 받는다는 것은 곧 빠른 진급을 보장하는 길이었다. 500 연습이 전 공군에 확대되어 시행된 이후로 소련 공군의 전술적 숙련도가 눈부시게 뛰어올랐을 뿐만 아니라, 전투조종사들에게 공중전의 양상을 능동적으로 사고하고 분석하는 능력까지 같이 길러주었다. 그러나 훈련의 발전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애석하게도 소련 공군은 중동에서 다시 한번 실패의 쓴맛을 처절하게 맛봐야 했기 때문이다.

 


1521부대 조종사들의 기량과 분명 당대 최고였지만, 안타깝게도 소련 공군은 당시 시대에 흐름에서 한 발자국 뒤처져 있었다. 베트남전에서는 당시의 열악한 전자장비에 가려 크게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1980년대가 되자 전자기술의 발전에 힘입어 시계 밖 교전, 즉 BVR이 항공전의 대세가 되었던 것이다. 이제 항공전은 소련 조종사들이 마리에서 연습했던 것처럼 적의 꼬리를 무는 것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 펼쳐질 항공전은 누가 더 좋은 레이더를 탑재했는지, 누구의 반능동 레이더 유도 미사일 시커 성능이 더 좋은지, 그리고 누구의 IFF(피아식별기)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작동하는지에 의해 결정될 것이었다. 기껏 훈련체계를 다듬어내고 보니 소련제 항공기들은 이런 세계적 흐름에서 다소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1982년에 벌어진 레바논 내전에 개입한 이스라엘 공군은 말 그대로 시리아의 공군과 방공망 전체를 삭제시켜버리는 것에 성공했다. 시리아 공군이 소련에게 직접 훈련받았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이는 소련제 항공기와 방공시스템, 그리고 훈련 체계의 신뢰성을 나락으로 보내버리는 길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 공군의 전과가 다소 부풀려진 점, 시리아에 배치된 소련 전술기들은 미그-21과 23을 필두로 한 3세대기인 반면 이스라엘의 전술기 주력은 F-15와 F-16으로 구성된 4세대기라는 점, 그냥 아랍인들이 전쟁을 잘 못한다는 점 등으로 구성된 소련 정부의 구차한 변명은 단 한 개도 통하지 못했다. 당시 소련의 최신예기였던 미그-23기는 감히 미국의 F-15는 고사하고 F-16에게도 흠집을 내지 못할 정도의 성능이 만천하에 드러났던 것이다. 이런 성능의 격차는 1521부대의 조종사들이 고군분투한들 어찌해볼 수 있는 성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바논에서 펼쳐진 모든 공중 충돌을 분석한 1521부대의 조종사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라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마리의 조종사들은 그동안 연습해 왔던 미사일 회피 기동은 이제 쓸모가 없다는 것을 알아냈다. BVR 상황에서는 첫 번째 미사일을 피하려고 회피 기동에 들어가는 순간 두 번째 미사일이 날아와 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에서 이제 마리의 교육과정은 적의 레이더를 피하고 적 미사일 가동범위의 한계를 넘어가는 쪽으로 맞춰지게 되었다. 마리 조종사들의 노력은 소련 공군에 본격적으로 최신 미그-29기들이 배치되면서 그 진가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구형 미그-23으로 최소한 한 번 이상은 전자장비 차이가 압도적인 미그-29를 격추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1984년은 소련 공군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한 해였다. 1984년부터 소련 공군에 본격적으로 미그-29와 Su-27을 위시한 4세대기들이 대량 배치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는 소련과 러시아 공군 역사를 통틀어서 유일하게 미 공군보다 IRST 등 특정 부분에서 앞서갔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해는 또한 1521부대의 평가 과정이 전부 바뀐 해이기도 하다. 그동안 공군 상층부가 500 연습에서 치러질 훈련 내용을 미리 피훈련부대에게 암암리에 알려주었다면, 지금부터는 그러한 행위는 일체 근절되었다. 대신 피훈련부대의 지휘관은 마리에 도착하고 나서야 전체적인 훈련 개요를 듣고 본격적인 작전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피훈련부대의 지휘관은 상급 부대의 작전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작전 수행 방안을 논의하고 실행에 옮겨야 했다. 열병식과 보여주기식 훈련에 찌든 소련군으로서는 상당히 파격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었다.

 

사격술 평가도 상당 부분이 바뀌었다. 기존에는 단순히 가상 표적를 격추했냐 못했냐를 두고 훈련의 성과가 갈렸다면, 이제는 표적을 얼마나 빠르고 효과적으로 격추하는지에 무게를 두기 시작한 것이다. 조종사가 사격술에서 최고 점수를 받으려면 그는 표적기가 ‘보호 구역’에 진입하기 전에 격추해야만 했다. 표적기가 보호 구역에 진입한 후 격추되었다면 ‘우수’, 표적기가 보호 구역을 빠져나온 뒤 격추시켰다면 ‘보통’ 등으로 평가 단계가 세분화되었다. 이제 피훈련부대의 지휘관은 더 이상 미리 조종사들의 작전계획을 볼 수 없다는 것도 바뀐 요소 중 하나였다. 양 측의 계획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은 1521부대의 지휘관 단 한 명이었으며 이를 통해 피훈련부대의 비행계획을 반려시키는 등의 안전 조치가 취해지기도 하였다. 훈련의 대대적인 개편은 전반적으로 크게 바뀐 것은 없으면서도 작전 효율성을 크게 향상되는데 주안점을 둔 것이다.

 

또한 1984년부터 위에 잠깐 언급했던 리페츠크 훈련 센터의 조종사들의 기량과 전투태세를 1521부대의 조종사들이 점검하기 시작했다. 리페츠크의 역할은 1521부대와는 다소 달랐다. 1521부대가 공중 전술 개발에 중점을 두었다면, 리페츠크는 조종사들의 재훈련과 기종 전환, 그리고 항공무기의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사용 방안을 교육하는 데 중점을 둔 부대였다. 리페츠크는 이러한 연유로 소련에서 가장 먼저 신형기를 수령하는 부대였으며, 신형기를 위한 교범을 만드는 것도 리페츠크의 업무 중 하나였다. 리페츠크가 1521부대에게 검수를 받게 된 건 다름이 아니라 R-73 미사일의 배치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1521부대에서 훈련을 진행한 제145 전투항공연대는 자신들의 성적이 예상보다 매우 좋지 않자 1521부대의 지휘관에게 항의를 넣었다. 자신들은 리페츠크에서 개발한 모든 수칙을 지켰음에도 항공기가 제 성능을 내지 못했다는 것이 그 사유였다. 1521부대의 지휘관은 145연대의 평가는 공정했고 성적을 절대 바꿔줄 수 없다며 단호하게 대처했고, 이 싸움이 소련 상층부의 귀에까지 들어가자 R-73 미사일의 성능을 재검사하기에 이르렀고, 결국 리페츠크가 작성한 매뉴얼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1년에 한번씩 리페츠크의 조종사들은 마리에서 자신들이 개발한 전략 전술 및 무장 평가를 진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탑건이 지금까지도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과 달리 1521부대의 끝은 좋지 못했다. 1980년대 후반 소련의 경제 붕괴가 가속화되자 1521부대는 그들에게 필요한 새 전투기들을 수령할 수 없었다. 1990년이 돼서야 1521부대의 제1연대가 겨우 미그-29를 수령했을 뿐이었다. 제2연대의 Su-27 배치 계획은 1987년 이후 지속적으로 연기되다 결국 1991년 소련이 붕괴함으로서 휴짓조각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돈이 궁했던 신생 러시아 연방은 당연하게도 훈련 전용 부대에게 신기종을 사줄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1521부대는 소련 붕괴 이후로 단 한번의 훈련 비행도 실시하지 못했다. 마리 항공기지는 러시아가 아니라 투르크메니스탄에 있었기 때문에, 양국은 마리에 배치된 항공기들에 대해 신경전을 이어오다 1990년대 초 어느 날 러시아가 마리 항공기들을 대대적으로 수리해야겠다며 러시아 영토 내로 재배치하면서 소련판 '탑건', 마리 항공기지와 제1521 특별 항공 교육 센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여담) 1521부대의 지휘관을 지낸 콘스탄틴 마로조프는 우크라이나의 초대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으며, 2007년 나토 대사 재직 시절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수 있도록 하는 단서 조항을 만드는 데 기여를 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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