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석 (일본명 : 아오키 콘세키)

1917년 평안남도평원 출생

1933년 평양고교를 졸업후, 17세에 일본으로 가서 신문사에서 일하다 소년비행시험에 합격하였다.

쿠마가야 육군비행학교에 2기생으로 입학.

동기였던 후지와라 타케히코씨가 말하길,

"이는, 매우 성격이 좋은 소년이었습니다. 군인칙유를 외우지 못해 벌로 팔굽혀펴기를 하고 울곤했으나,

기계체조를 매우 잘해서 "너는 곡예사냐" 라는 말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태평양전쟁 초기 비행제77전대에 소속, 1941년 12월 25일 버마에서 공중전중에 영국공군 버팔로에게 피탄되어 낙하산을 폈으나, 나무에 걸렸고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4년간 포로생활을함.

중일전쟁에서 18기, 태평양전쟁에서 5기를 격추하였다고 기록되어있음.


해방후엔 한국공군창설에 참가하여 공군사관학교 초대교장, 비행단장역임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후 27일 P-51D를 10기를 미군에게 인수받기 위해 이근석을 포함한 10명이 일본에 파견됨





하지만 비가와서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못했고, 7월 2일날 한국으로 돌아온 뒤 7월 3일 일일 3소티 임무수행.


7월 4일 3기 편대로 출격하였으나, 안양상공에서 적 전차종대를 발견한 뒤 지상공격 중 적에게 피탄되어 장렬하게 전차에 돌입하여 자폭하였다고 공군에서는 전하고 있다.



하지만 미군은 추락한 원인이 P-51 표준 강하고도 보다 훨씬 낮은 고도에서 강하하였다가 회복을 못하고 지상에 격돌한 표적고착으로 판단하였다.




 

T-6텍산 빼고 이근석 대령이 운용해본 가장 고성능 기체가 Ki-27이니 솔직히 표적고착으로 사망한게 맞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