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gaijin/74707972?p=1


1부 링크



https://gall.dcinside.com/mgallery/board/view/?id=war&no=2124093


원문








잠깐 뱀발로 빠져 이 기간동안 민간항공 산업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이전의 대세였던 초호화 수상기 산업으로 회귀하느냐, 아니면 지상 활주로를 이용한 비행기 산업으로 변화하느냐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수상기 사업에 배팅했던 회사들의 예상은 이랬습니다. '전후 찾아오는 보복성 여행붐은 엄청난 항공 여객 수요를 불러오고, 전후 호황기는 호화 여행에 아낌없이 돈을 쏟아 부을 것이니 우리는 상위 1%의 여행수요를 위해 수상 여객기를 더 대형화 하고 더 호화롭게 꾸미자.'는 것이었습니다. 


앞에 잠깐 이야기 했듯이 당시 항공 산업은 유럽의 귀족이나 사업으로 일으킨 신진 부유층을 대상으로하는 여객사업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상기한 Do.X나 Atlantic air Queen 같이 그중에서도 1% 찐 부자들을 목표로 하는 초호화 여객산업도 좌석을 없어서 못 팔았어요. 어느정도로 호화로웠냐면 Atlantic air Queen은 원래 보잉은 여객 총원 74명을 수용할 수 있게 설계했지만 팬암은 여기에 '좌석' 대신 '객실'의 개념을 도입해 최대 40명을 수용하는 하늘의 최고급 호텔로 영업했습니다.


그러니까 여객기 자체가 객실, F&B, 라운지와 아케이드를 모두 가진 온전한 초호화 호텔로서, 지금으로 비유하면 싱가(SQ)의 스위트, 에미레이트(EK)의 레지던스 클래스 수준 서비스로만 손님을 모셨다는거죠. 미친 돈지랄입니다.





<레스토랑이 아닙니다. 런던 구간 B-314 여객기 내부. 식기들만 봐도 크리스탈 잔에 제대로 된 플레이트에 제대로 된 코스 요리가 담겨 나옵니다.>





<1960년대 스칸디나비안 항공(SAS) 1등석 기내 서비스>





수상기에서 근대적 협동체 비행기로 옮겨오며 서비스 공간은 줄었지만 여전히 여객기는 부유한 사람들의 니즈를 충족하기 위해 충분히 호화로웠습니다.





<살면서 ICN-CDG, FCO-ICN 구간을 댄공 A380 F클로 딱 한 번씩 이용해봤는데 저 당시 호화로움에 비할바가 아니더군요.>


https://gall.dcinside.com/board/view/?id=aircraft&no=191802


(ICN-CDG F클 이용 후기)



지상에서 이착륙하는 바퀴달린 항공기에 배팅한 회사들은 이렇게 예상합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미국은 물론이고 여객 수요가 필요한 대부분의 국가와 도시에는 이미 지상 활주로가 깔렸다. 거기에 레시프로 엔진은 더욱 크고 강력해졌기 때문에 지상 발진 항공기도 충분히 크게 설계할 수 있다. 지상발진 항공기는 그 수준에 맞춰서 럭셔리하게 서비스를 밀고나가면 된다. 이렇게 커진 항공기엔 여행객과 화물을 싣고도 활주로에서 충분히 이착륙이 가능하다. 게다가 조만간 제트기 시대가 열릴텐데 먼저 미래를 대비해야지.'


결과는 수상기에 배팅한 회사들의 패배였습니다. 대부분의 회사들이 수상기의 시대가 저물었다는걸 알았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 이후 짧은 시간 여객, 우편사업에 이용되었던 수상기들은 대부분이 군용으로 개발되었거나 개발이 끝나고 양산을 시작했지만 종전으로 군에 납품되지 못한 수상기를 용도변경 한 것들입니다. 하워드 휴즈의 허큘리스 HK-1도 H-4라는 이름으로 팬암과 TWA에 민항기형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하면서 계획으로만 끝났지만 선더스로( Saunders-Roe)의 대형, 초호화 수상 여객기 프로젝트 프린세스는 끝까지 밀고나가 생산에 성공, 실제 운항을 잠깐 하기도 했지만 프린세스가 첫 운항을 시작하던 해엔 영국에서 최초의 제트 민항기이면서 민항기 역사의 문제아 드 해빌랜드 (de Havilland)의 Comet 1이 생산되면서 곧 운항 정지합니다. 이 경영 예측의 실패로 선더스로라는 회사 하나가 날아가버린 것이죠.







<선더스로의 '공주'. 이름답게 초초초초초초호화 럭셔리 여객기로 설계되었지만>





<드 해빌랜드의 DH-106 코멧이 나오면서 2년만에 여객 시장에서 밀려납니다.>



뱀발이 너무 길어졌네요. 본론으로 돌아와서 1차 세계대전의 전례처럼 종전과 함께 엄청난 규모의 조달 계약이 예상대로 휴지조각이 되어 날아갔고, 그동안 정부에서 지원받았던 연구개발비의 행방에 대해 집요하게 추궁받는 토사구팽의 시간이 찾아왔지만 이번에는 각 제작사가 보험으로 들었던 민항기 산업이 호황을 누리면서 대전기간 고용했던 엔지니어와 숙련공들을 항공기 생산공장과 함께 상당수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엔지니어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하게 작용했는데 록마의 컨스텔레이션 시리즈, 더글러스의 DC 시리즈 등이 성공적으로 시장에 안착하는데는 지난 번 보잉편에서 잠깐 언급했던 항공기 안전규격과 운항 안전 문제의 발전이 큰 역할을 합니다.


바로 위에 언급한 Comet 1은 최초의 제트 여객기외에도 항공 사고에 관련된 불명예스러운 타이틀을 지녔는데 고도에 따른 금속의 변형을 계산하지 않고 멋대로 디자인한 항공기, 리벳과 볼트 너트로 조립해버린 동체는 어느 순간 접합부의 금속 피로도가 한계를 넘어버리면 사각형 창문의 모서리와 주변 동체 접합부에서 튕겨나온 볼트와 리벳들이 총알처럼 여객기 내를 휩쓸면서 공중 분해되어 버렸습니다. 이 사고로 영국 해외 항공사 (British Overseas Airways Corporation : 상술했던 Imperial Airways 와 British Airways가 합병해 세운 현 영국항공 British Airway 전신)에서 도입한 Comet 1이 1년간 세 대나 추락해버리는 사고를 겪습니다. Comet 1은 팬암과 TWA에도 도입 예정이었던 만큼 도입한 항공사가 늘어나면 늘어날 수록 항공사고도 비례해서 늘어날 뻔 했지만 지속되는 사고로 2년간의 운항을 마치고 다행히 취항이 금지됩니다. 이 사고로 각국의 항공사, 항공기 제작사는 전쟁을 통해 얻은 경험으로는 민항기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음을 알고 항공기 개발에 엔지니어를 지속적으로 밀어넣게 됩니다. 전시경제가 아님에도 여전히 엔지니어가 매우 유효한 인력이라는게 증명됐기 때문에 항공기 제작사는 계속 엔지니어 숫자를 유지할 수 있게 되었던거죠. 그리고 얼마 뒤 2차 세계대전의 종전으로 끝난줄 알았던 전시경제는 한국전쟁, 월남전, 큰 틀에서의 냉전을 통해 계속 새로운 활력을 얻습니다.






<문제가 된 사각형 창문>


문과 동체 이음부는 리벳처리 되었지만 충분치 않았고 창문이 터지면서 주변의 볼트 이음부도 터져나갔습니다. 이때의 경험으로 현재의 매끈한 곡선의 객실 창문이 개발됩니다.






<통합 에비오닉스가 등장하기 전 전형적인 민항기 조종석 내부 (영국항공)>


군용기가 그랬듯이 초기 민항기도 현대의 에비오닉스가 등장하기 전 까진 전부 사람의 손을 이용해 비행을 통제했습니다. 조종을 담당하는 기장-부기장 외에도 항공기 상태를 실시간으로 감시하는 항공 엔지니어 (Flight Engineer:FE), 무선교신을 담당하는 라디오 오퍼레이더, 항로를 감시하는 내비게이터까지 4~5명이 한 팀이었습니다. 조종직을 제외하면 사실상 나머지는 전부 엔지니어거나 이에 준하는 테크니션이었던거죠.




다시 시점을 냉전으로 넘겨보죠. 냉전이 끝나기 전 미국의 항공산업은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국가간의 캐삭빵 매치 아래에서 기술적으로 큰 도약을 달성했습니다. 연속된 거대한 규모의 전쟁은 항공기 제작산업의 생산력을 유지할 수 있게 했어요. 여기서 촉발된 우주경쟁 역시 예산감사가 허술했던 초기에는 큰 먹거리였습니다. 철저하게 베일 쌓인 소련의 기술력에 대한 공포는 압도적인 기술우월을 달성해야 한다는 강박감 아래 대학에선 양질의 엔지니어를 배출하고, 산업은 이 인력을 곧바로 소화할 수 있는 규모로 성장합니다. 거대해진 제트 민항기 시장에선 더글러스, 록마, 록웰, 보잉이 시장 주도권을 쥐기 위해 경합을 벌였고 미국의 기업들이 전세계 항공 산업을 선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결과적으로는 잘 나가던 항공산업이었지만 경영자 입장에서는 매 사건 사건이 여전히 피 말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언제 한국전쟁이, 월남전이, 냉전이 끝나고 우주경쟁도 사그라들어 정부 조달 계약이 끊길지 알 수 없었습니다. 모두가 아는 맥나마라의 등장으로 막대한 개발비를 들인 정부 프로그램이 하루 아침에 백지가 되어 예상했던 대량의 조달계약이 사라지는 그런 일도 실제 생겨버립니다.







<군붕이들의 영원한 아이돌. '거 참 군붕이님들!, 어른의 경영으로 굳이 센타를 까 드려야 내가 여기 뭐하러 온 사람인지 아시것어?!'>



그나마 민간 항공 시장이 더더욱 커질 것이라 모두 예상하고 있었지만 여기도 막강한 경쟁사끼리 시장 우위를 점하려고 서로 개발비를 부어가며 치킨게임을 하고 있었습니다. 군 조달 계약은 연구 개발비라도 지원을 받지만 민항기 사업은 기업의 쌩돈이 그냥 뭉텅뭉텅 빠져나갔기 때문에 누군가가 압도적인 시장점유율에 도달하지 않으면 규모에 비해 기대 이익은 만족스런 수준이 아니었으니까요. 이러니 겉으로는 화려하지만 군용기와 민항기 시장 모두 만성적인 재정 위험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지난 보잉편에서 다뤘던 맥도널 더글러스는 어떤 상태였을까요?


맥도널 더글러스로 합쳐지기 이전 1921년 설립된 더글러스社(Douglas Aircraft Company)는 1924년 Douglas World Cruiser를 이용한 이용한 최초의 항공기 세계 일주라는 업적을 달성해 항공기가 본격적으로 전지구를 커버하는 보편적 교통수단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 미국의 민간 항공산업의 역사와 함께한 기업이었습니다. 1939년에 설립된 맥도널社 (McDonnell Aircraft Corporation)는 2차 세계대전 기간동안 군용기를 개발, 생산했던 군용기 명가였죠. 맥도널은 냉전에 접어들면서 미국의 우주경쟁 프로그램에서도 참여합니다. 두 회사 모두 보잉만큼의 긴 역사와 경험을 가지며 미국 항공산업에 큰 기여를 해온 기업이예요.


창업주 도널드 더글러스가 미래 경영예측에 연달아 성공한 덕분에 이 시기 발표한 DC-1,2,3는 사업 경쟁자였던 윌리엄 보잉의 B-247을 누르고 레시프로 민항기 시장에서 압도적 우위(당시 TWA社 자료상 민항기 시장점유율 80%)를 차지하고 있었고, 유럽에서 뭔가 터질 것 같으니 민항기와 군용기로 모두 쓸 수 있도록 설계된 DC-3는 미국의 2차 세계대전 참전이 시작되면서 빠르게 폭격기로 개조되어 민과 군 양쪽에 팔 수 있는 베스트 셀러 항공기가 됩니다. 이후 DC-4가 몇 가지 크고 작은 부침을 겪었지만 DC-5~7도 록마의 컨스텔레이션 시리즈를 기술적으로 압도하며 연달아 성공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점령하죠. 이 시기 더글러스의 위엄은 최초의 미국 대통령 전용기 사업을 쥐었다는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 루즈벨트 정부는 C-54(DC-3 수송기형)를 해리 트루먼 정부는 C-118 (DC-6 수송기형)을 택했습니다.


연속된 성공 속에 창업주 도널드 더글러스가 퇴임하면서 아들인 도널드 주니어가 더글러스의 차기 회장에 오르지만 도널드 더글러스는 퇴임 후에도 도널드 주니어의 뒤에서 회사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합니다. 도널드의 연달은 경영예측 성공이 이번에는 따라주지 않아 레시프로에서 제트엔진으로 전환 시기를 보잉에게 뒤쳐져버린 탓에 DC-8은 보잉이 준비한 회심의 협동체 4발 제트 여객기 B-707보다 개발 일정이 까마득하게 뒤쳐져 있었습니다. 당연히 B-707이 1년 먼저 롤아웃 되어 나왔고 더글러스 항공기만 고집하던 대표적인 충성 고객사 아메리칸 에어라인(American Airlines 이하 AA)이 보잉과 가장 먼저 계약해버렸는데 유나이티드 항공이나 팬암도 뒤늦게 나온 DC-8을 주문해주었지만 레시프로 엔진을 고집하던 더글러스의 생산라인이 발주받은 DC-8 주문을 충분히 소화할 능력이 없다는게 드러나면서 항공기 인도는 지연되고 많은 주문이 취소되며 더글러스 천하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더글러스와 보잉의 민항기 개발 경쟁이 뜨거워지는 것이죠.


민항기 사업부에서 DC-8의 결과적 실패가 더글러스를 궁지로 몰았다고들 하지만 사실 그 이전에 군용기 사업부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포레스탈급 항공모함 건조계획이 내홍을 겪으면서 여기에 탑재될 목적으로 개발중이던 함재기들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더글러스의 A-3는 하이네만이라는 천재 덕에 다행히 살아남았지만 설계를 변경하는 과정에서도 많은 출혈이 있있던 만큼 더글러스는 재정적으로 병색이 짙어져 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롭게 흐름을 탄 보잉의 B-727에 대항하기 위해 1억불이라는 엄청난 개발비를 들여 DC-9을 출시했지만 여전히 레시프로 항공기 생산에 적합하게 굳어져버린 더글러스 공장의 조립 방식에선 생산성 문제가 해결되지 못해 DC-8처럼 조달 능력 미달로 매 분기마다 엄청난 재정적자가 쌓이기 시작했어요. 유동성 문제가 불거지면서 DC-9을 출시한지 1년만인 1966년에 미국의 시중 은행은 더글러스에 일체의 회사채 매입을 포함한 추가적인 기업대출을 거절해버립니다. DC-3의 성공부터 은행 대출이 막히기까지 겨우 30년, 시장 점유율 80%의 압도적 위치에서 떨어지기까지는 겨우 10년이라는 시간 동안 일어난 일입니다. 이 글의 도입부에 서술했듯이 항공기 개발 사업과 경영이라는게 이렇습니다. 압도적 기술격차를 통한 성장 이면에 존재하는 비례해서 치솟의 비용의 통제. 매 프로젝트마다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는 특성상 한, 두 번만 휘청 해 버리면 회사가 곧바로 거꾸러지는 아슬아슬한 경영이었던 거죠.


더 이상 정상적인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더글러스는 매각의 길을 걷습니다. 경영 장부는 너덜너덜해졌지만, 보유한 특허, 엔지니어와 숙련공, 공장부지등은 여전히 매력이 있었기에 제너럴 다이내믹스를 포함한 다양한 기업이 인수 과정에 참여했고 이중 가장 먼저 적극적으로 구애했던 맥도널이 더글러스를 합병하게 되어 맥도널 더글러스社가 됩니다. 왜 맥도널은 그렇게 더글러스를 합병하고 싶어했을까요?


맥도널은 상술했듯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 설립되있던 소수의 군용기 제조 회사 중 하나 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주요 군용기를 탄생하게 한 군용기의 명가이지만, 그 근본은 세인트 루이스에 위치한 친족 경영으로 이루어진 전형적인 지역 기업 정도였던겁니다. 이런 회사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 월남전을 거치면서 전폭기 뿐만 아니라 NASA의 머큐리 우주 프로그램에 참여할 정도로 급성장하죠. 당장은 잘 나가고 있지만 냉전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기술경쟁에는 비용이 따르고, 개발한 군용기 프로젝트도 조달 계약을 따지 못 하면 자사의 투자금액을 보전해줄거라는 보장도 없으니까요. 여기에 대한 보험으로 NASA와 협력하여 우주 개발 프로그램에 뛰어들었지만 핵심 기술에 대한 협력에선 늘 밀려났기 때문에 예상한 만큼의 재미를 보진 못 하고 있었습니다. 냉전이 황혼기에 접어들 때를 대비해 들어놓은 보험도 시원찮으니 경영진은 늘 불안해합니다. 맥도널은 전적으로 전쟁 특수를 통해 급성장한 기업이기 때문에 정부 조달사업이 없어진다면 하루 아침에 세인트 루이스의 가족경영 회사 규모로 쪼그라들 수 있으니까요. 제 생각엔 더글러스가 휘청이는걸 보면서 보험을 새로 들기로 마음 먹은 것 같습니다. 맥도널도 전형적인 친족경영 회사였기 때문에 매각 당시의 더글러스와 같은 경영 문제가 있었습니다만 그런 경영 문제가 있었다는 것만 알고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맥도넬 더글라스의 CI를 보면 그들이 당시 합병을 통해 목표로 했던 항공 우주산업의 꿈을 알 수 있습니다.>



새롭게 출범한 맥도널 더글러스는 강력해보였습니다. 민항기 사업에선 DC-8,9이 결과적으로 판매량이 저조했지만 그게 보잉에 비해 기술력이 특출나게 후달려서 그런 것이 아니라 쌓이는 오더북도 소화를 못한 생산 효율의 문제이니 효율성 재고를 통해 해결이 가능했습니다. 군용기 조달 사업도 냉전 초기에 비해 둔화되었지만 아직은 민항기쪽 체질개선에 필요한 사업비를 확보하는 것도 가능했습니다. 합병으로 획득한 기술특허는 민항기와 군용기 사업부 모두에게 큰 기회가 됩니다. 이대로 맥도널 경영진의 바람처럼 민항기 시장의 패자로 군림하며 잘먹고 잘 살았느냐? 모두 알다시피 그렇지가 않았죠.


합병 후 맥도널 더글러스는 DC-8과 9의 전례를 통해 항공기 제작사 주도로 뽑은 민항기를 사달라고 내놓는 것 보다 민항사의 요구를 받아 만들면 개발 비용을 억제할 수도 있고, 수요에 따라 최소 주문수량을 맞추면서 자사 생산능력에 적합한 발주량을 조절할 수도 있으니 무척 효율적일거라는 생각을 합니다. 마음같아서야 '너 보잉 이새끼들 딱 대!' 하고 세상이 놀랄만한 물건을 내놓아 설욕하고 싶지만 이젠 민항기 프로젝트에 1억 달러씩이나 개발비를 써서 만들어놔도 팔린다는 보장이 없으니 무척 조심스러운 입장이었습니다. 마침 차세대 대형 수송기 사업에서 록마, 보잉에 밀려 일찌감치 나가 떨어진 수송기 설계부가 잉여로 남았기에 이걸 민항기 사업부에 붙여서 뭘 좀 어떻게 해볼까 하던 중 록마의 차세대 대형 수송기 C-5A에 실릴 GE제 TF-39 고바이패스 터보팬 엔진 프로토타입을 접한 AA 경영진에게 '이거 혹시 민항기에도 붙여서 광동체기로 뽑을 수 있나요?' 라는 문의를 받습니다. 



이 AA의 광동체기 요구조건과 과정, 기술적 허들은 꺼라위키에도 잘 나와있으니 패스하고 최소 의무도입수량에 맞춰 선발주를 해주면 만들겠다는 양해각서가 체결되면서 TF-39의 민수형인 CF6를 3발 탑재한 광동체기 프로젝트 DC-10이 탄생합니다. 이때 보잉도 록마와의 차세대 대형 수송기 사업에서 최종 탈락하면서 이때 제안했던 프로젝트 모델 750을 민수용으로 바꾼 B-747을 당시 단일 항공사로는 세계 최대였던 팬암에 제안하여 선발주를 받는데 성공하죠. DC-10과 B-747의 자세한 히스토리는 역시 꺼라위키에도 잘 나와있으니 이 부분도 패스하고, 지금에야 B-747이 매우 성공한 광동체 제트 민항기로 이름을 떨치고 있지만 세상에 나오기 전에 이미 런치 커스터머인 팬암을 포함한 항공사들에게 '너무 불필요하게 큰데?' 라는 선입견이 지배적이었고, 팬암과의 갖은 설계 마찰을 겪으며 시장에 나왔기 때문에 좀 미덥지 않아 보였습니다. 


이에 비해 DC-10은 약간 더 작고, 3발기라는 특성에서 경제적으로 보였기에 록마의 L-1011과의 경쟁에선 어찌어찌 승리했습니다만 B-747에 비해 늦게 시장에 나왔고 79년의 여러건의 사고와 소송을 겪으며 결과적으로는 B-747이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가져가죠. DC-8, 9의 실패를 거울삼아 보다 전략적으로 개발에 임했지만 DC-10은 결국 투자비용을 조기에 회수하는데 실패합니다.


민항기 사업부는 DC-10을 개량한 MD-11이나 MD-80을 내놓으면서, 한 편으로는 현재 항공사와 제작사간 리스 캐피탈 제도에 가까운 MD-80 리스 사업을 통해 재기를 노렸지만 세일즈 규모로나 기술적 격차로나 보잉을 넘을 수 없었고, NASA 우주 프로그램도 제미니 계획 이후 뭔가 팬텀, 이글, 해리어, 호넷 함재형 등을 연달아 수주한 군 사업부도 예산 삭감과 군 조달사업 이면에 있었던 각종 뇌물과 비리 스캔들이 드러나면서 타격을 입었습니다. 아니 팬텀 단일 기종만으로 팔아먹은게 얼마인데 재정적인 문제를 겪나 의아하겠지만 이 시기 군 조달 사업의 영업이익율이 생각보다 높지 않았습니다. 


마진율이 팬텀기준 평균 딱 20%였어요. 팬텀 한 기 납품하면 딱 50~70만 달러가 떨어졌습니다. 투자개발비를 단가에 산입하지 않은 순수 생산단가 기준입니다. (물론 뇌물과 로비 하면 록마였지만요.) 이렇게 뭔가 사업이 지지부진 하면서도 어찌어찌 군 조달사업을 하나씩 따내면서 힘겹게 80년대를 넘겼지만 모든 항공기 제작사가 사무치게 우려하던 시간이 찾아오고 있었습니다. 냉전이 끝나가고 있던 겁니다.





<하하! 군붕이들아! 이제 냉전따윈 잊고 춤이나 추자! 평화 좋아요! US 딸라 좋아요! 선유꿀 좋아요! >



이미 80년대 초반부터 군축 신호는 꾸준히 있었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냉전이 끝날거라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겠지만 우주 프로그램마저 점점 축소되면서 다들 멀진 않았구나 했던거죠. 그래서 더더욱 민간 항공산업이라는 보험에 필사적이었던거고요. 이 시기 맥도널 더글러스는 연달은 프로그램 부진으로 보유한 현금이 거의 바닥난 상태였습니다. DC-11과 MD-80의 연이은 부진으로 상환하지 못해 쌓이기 시작한 악성 부채는 86년부터 보잉과 합병된 뒤에도 오랜 시간 남아 33억불까지 불어납니다. 그나마 맥도널 더글러스 정도 체급이 되니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본 것이지 록마 같으면 이런식의 프로그램은 벌이지도 못 했을겁니다. 미국 최대규모의 방위산업체는 보유한 현금은 바닥, 보험으로 들어놓았던 민항기 시장에서도 주저 앉으며 기대되는 캐시카우가 하나도 남지 않은 재정 유동성이 박살난 상태로 부채만 약 13억불을 짊어진 채 냉전 종식을 맞습니다. 당장 내일 망해도 이상할게 없는 덩치 큰 거지나 다름없는 상태였던거죠.


앞에서 잠깐 합병 직전 맥도널의 친족 경영 상태가, 더글러스의 친족 경영 상태와 비슷하다고 짧게 집고 넘어갔었습니다.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며 맥도널 더글러스는 악화일로의 경영에서 탈출구를 모색하고자 친족경영을 벗어나 1994에 전문 경영인을 초빙하게 되는데 이 사람이 바로 지난 번 보잉편에서 등장한 前 GE 부사장 출신 해리 스톤사이퍼입니다. 


이 해리 스톤사이퍼의 이야기로 돌아오기 위해 참 많은 이야기들을 써내려왔는데요. 해리 스톤사이퍼가 맥도널 더글러스의 CEO로 부임하면서 곧바로 시작한 것은 피비린내 나는 구조조정이었습니다. 맥도널 더글러스 경영진과 해리 스톤사이퍼는 실로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맥도널 더글러스 임직원의 무려 40%를 단숨에 정리해고 합니다. 


이로서 연간 7억달러의 고정비를 절감하는 효과를 거두죠. 여기까지 읽어 오면서 해리의 구조조정을 보면 막연하게 부당하다고 생각되나요? 그렇지는 않을겁니다. 맥도널 더글러스의 연달은 경영 실패는 방만한 경영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 반드시 닥쳐올 위기를 잘 대비해, 미래 산업을 도모 해보려고 했지만 결과적으로 잘 안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었죠. 그래도 어떻게든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워보기 위해 친족 경영마저 포기하면서 전문 경영인 체제도 도입한 것이죠. 그러니까 회사 역사상 최초의 외부 출신 CEO인 해리 스톤사이퍼에게 지워진 짐은 큰 덩치 때문에 고정비만 1년에 수억달러씩 쳐먹는, 은행 잔고는 바닥나고, 부채는 불어나는데 이젠 어디서 돈이 들어오기도 힘든 회사를 살려내야 하는 것이었고, 사실은 이보다 더 크고 무거운 짐이 그의 어깨에 올려져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잡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하락세를 제대로 타 망해가는 애플을 살려내 최고의 위치까지 다시 끌어올린 경영 능력은 참으로 인정합니다.)




제가 글로는 '전문 경영인을 초빙했다.'라고 간단히 적었지만 맥도널 더글러스社의 입장에선 이 해리 스톤사이퍼의 영입이 실로 파산이냐 재도약이냐를 가르는 마지막 카드였습니다. 1993년 맥도널 더글러스는 1차 걸프전을 통해 추가 방위 계약을 따낸 덕에 회계상 숨통이 조금 트입니다. 이건 맥도널 더글러스가 뭔가 영업을 잘 했거나 로비를 해서가 아니라 단순하게 냉전이 끝나면서 항공 방위산업계에선 망해버릴 회사들은 이미 망해버렸거나 더 큰 회사들에게 매각된 덕분에 업계에서 여전히 가장 큰 덩치를 유지하고 있던 맥도널 더글러스가 단기성 반사이익을 얻은 것이죠. 덕분에 92년 회계 결산 약 8억달러 적자에서 93년엔 약 4억 달러 순익을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맥도널 더글러스는 진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이 짧은 기회를 통해 회사의 미래를 바꿀 신의 한 수를 찾으려 했습니다. '매각'을 통해서 말이죠.


DC-8부터 여러가지 치명적인 과오를 겪었음에도 냉전 수준의 전시경제가 형성될 가능성이 희박해진 상황에선 여전히 맥도널 더글러스가 기댈 항공산업은 민항기 시장이었습니다. 비록 91년 당시 전 세계 민항기 시장(화물기 포함)에서 보잉의 55%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12%라는 초라한 점유율이었지만 민항기 사업부는 회사의 유일한 흑자 사업부였기에 90년대 맥도널 더글러스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맥도널 더글러스는 성장동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고, 꺼낼 수 있는 카드가 몇 장 없는 상태에서 상대해야 할 보잉은 이전 편에서도 다뤘지만 항공기 보유 엔지니어만 4만여명을 보유한, 말 그대로 민항기 사업부의 외길인생이 뭔지를 보여주는 압도적인 격차를 두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차기 민항기 개발 자금도 마련하지 못하는 너덜너덜한 자금 유동성을 가지고 보잉하고 맞붙는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기에 경영진이 매각이라는 활로를 찾은건 지극히 정상적인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너덜너덜한 상태로는 보잉의 구미를 당길 수 없었던 거예요. 외부에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맥도널 더글러스는 진작부터 보잉에게 매각 의사를 타전하고 있던 거죠.


다만 과거 맥도널사가 더글러스사를 인수했던 것 처럼, 보잉은 급할게 없으니 값을 최대한 깍고자 맥도널 더글러스의 경영 상태가 완전히 회생 불가능해질 때 까지 기다리고 있었고 이대로라면 맥도널 더글러스는 자사의 사업부가 부위별로 예리하게 난도질되어 이 기업, 저 기업에 헐값으로 팔려나가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보게 됩니다. 정육점 소고기 부위처럼 회사가 팔려나가는 것만은 막아야 했기에, 유동성이 박살난 회사 재정을 일신하고, 보잉에게 최대한의 값을 지불하게 만들 사람으로 해리 스톤사이퍼를 영입하고,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그의 초대형 구조조정안을 받아들인 것이죠. 엄청난 피를 흘렸지만 덕분에 회사의 재정 건전성은 엄청나게 양호해졌고, 고정비가 줄었기 때문에 주가는 폭발적으로 상승했습니다. 알아서 무너질거라 예상하고 있던 보잉은 전임직원의 40%를 단칼에 잘라내버리는 구조조정에 질려버렸고, 주가가 더 상승하기 전에 맥도널 더글러스를 인수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경영인 것이죠. 그렇다면 해리 스톤사이퍼는 맥도널 더글러스의 구조조정에 성공하면서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고 어떤 카드로 필 콘딧이 이끄는 보잉 합병에까지 직접 관여하게 되었을까요? 왜 보잉의 경영진은 인수한 맥도널 더글러스의 경영진이 새롭게 합병된 보잉의 경영진 자리에 오르는 것을 용인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필 콘딧에게도, 해리 스톤사이퍼에게도 양사의 합병은 21세기를 내딛는 불확실한 모험 이었습니다.>



92년 보잉은 이미 전 세계 대형 제트 민항기 시장 점유율의 55%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자체로 미국 국내는 물론 EU에서도 보유하고 있는 특허를 포함한 시장 독점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져가고 있었습니다. 당장은 보잉이 시장에서 압도적인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지만 EU의 각국 항공사에선 공동 항공산업 보호를 위해 암묵적인 도입 항공기 쿼터제를 언젠가 실시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습니다. 굳이 쿼터제가 아니어도 에어버스는 점차 고객사를 늘리고 있었기 때문에 비록 보잉의 필 콘딧은 에어버스를 끝까지 과소평가했지만 다가오는 21세기는 보잉의 대형 민항기 시장 점유율에 부정적인 변화가 있을거라 모두 예상하고 있었죠. 보잉 역시 앞으론 대규모 전시경제에 기댈 수 없으니 미래의 주력 캐시카우는 민항기 시장이었기에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던 겁니다. 맥도널 더글러스의 점유율은 12% 뿐이었지만 보잉에게는 부족한 협동체 설계에 나름 노하우가 있었기에 두 기업의 합병은 그 자체만으로 미국내 다른 경쟁사는 물론 EU에도 엄청난 위협이었습니다. 그러니 합병하는 과정에서 EU의 항공산업 관계자들을 달래려면 스스로 항공사들과의 독점계약 포기, 보유한 항공특허들을 에어버스와 록마등에 공개 라이센스 하는 등의 광범위한 사전 협의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니까 보잉은 합병을 위해 미래에 기대되는 이익의 상당 부분을 포기한 셈이 되는거죠.






<1975년부터 2015년까지 100좌석 이상 대형 제트 여객기의 인도량 그래프. 90년 중반부터 말 그대로 위기의 연속이었습니다.>








<보잉은 그나마 양반이고 맥도널 더글러스의 민항기 사업은 거의 회생하기 어려운 수준이었고요.>



기업에게 시장 점유율이란 무척 중요하죠. 상대적 시장 점유율이 높으면 영업이익도 높아집니다. 기업이 공장 가동률을 높여 생산량을 늘리면 고정 제조 간접비의 흡수원가가 높아져 총 단위 비용이 낮아지니까요. 규모의 경제학에선 기업 성장율은 점유율에 비례해서 증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초기 시장에서 기업은 시장 경쟁력의 증가를 위해 점유율을 사수하려 노력하고 이는 성장율에 비례되는 규모의 투자를 요구하기 때문에 기업의 현금 유동성은 다소 경색됩니다. 다만 이 단계를 넘어서 안정적인 시장점유율을 달성한 기업은 (이론적으로) 성장율이 낮아지기 때문에 낮은 성장율 만큼 비례되는 투자 요구 사항이 줄어듭니다. 제조단계에서 축적된 경험이 효율성 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현금 유동성이 상당히 개선되는거죠.


제 생각엔 해리 스톤사이퍼와 前맥도널 더글러스 경영진은 합병된 뒤의 보잉이 마주할 미래가 현재보다 낮아진 점유율을 끌어올려야 하는 높은 투자 단계에 있을거라고 예측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안정적인 시장 점유율을 달성해서 잉여 현금 유동성을 확보할 때까지 허리띠를 더욱 졸라매야 한다고 이사회에 의견을 피력한 것이겠죠. 보잉의 제트 민항기 사업? 지금은 괜찮지, 우리도 예전엔 그랬고 압도적으로 잘 나갔다? 그런데 지금 우리 꼴을 봐라. 미래 예측을 잘못해서 30년만에 회사가 팔려나갔잖아. 우린 앞으로 21세기엔 차원이 다른 도전에 마주할텐데 투자 한 두번 잘못하면 보잉이라고 무사할까? 냉전도 끝나고, 민항기 사업도 에어버스가 치고 올라오고 미래가 그렇게 밝지 않으니 여력이 있을 때 회사를 미리 대비해서 체질개선을 빡시게 해야 한다. 지금 보잉 엔지니어 숫자 너무 많아. 저거 다 고정비인데 니들 여기서 점유율 10%만 떨어져도 인건비 감당 되겠어? 어차피 우리가 합병하면 신기종을 급하게 내놓을 필요 없이 우선 있는 모델을 시장 입맛에 맞게 이렇게 저렇게 고쳐서 내놓으면 될텐데? 더 늦기 전에 비대해진 잉여 인력부터 정리하자. 정도의 이야기가 오갔을 겁니다. 이게 아주 허황된 이야기는 아닌게 현금 유동성 문제가 발목을 잡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다 더글러스 시절부터 두 번이나 회사가 팔려버린 맥도널 더글러스 입장에선 지속적으로 현금 유동성을 지지해줄 금융권과의 연계가 무척 중요했을겁니다. 금융권의 지지를 받으려면 경영 쇄신을 통해 재무재표를 그들이 보기에 매력적으로 개선해야 했고 구조조정은 지금이 아니라도 언젠가는 이뤄져야 하는 숙제였을겁니다. 이게 냉전의 종식처럼 예상보다 많이 빠르고 갑작스럽게 찾아왔을 뿐이라고 생각했겠죠. 지난 번 이야기 했듯이 이 중차대한 갈림길 가운데 보잉에는 필 콘딧이 있었습니다. 필 콘딧은 훌륭한 엔지니어였을지는 몰라도 엔지니어 자질만큼의 훌륭한 경영자는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에어버스에 대한 고집스런 미래예측만 봐도 그렇고요. 이사회가 보잉 경영진을 해리 스톤사이퍼를 위시한 맥도널 더글러스 출신으로 채운 것도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결정이었다고 생각이 되는 이유지요.


생산공장과 설계부, 경영 사업부를 물리적으로 분리하는 투 트랙, 칼바람으로 걸러낸 탓에 쪼그라든 설계부와, 규모가 작아져서 발언권이 제한되어 발생한 경영 사업부의 지나친 엔지니어 경시 문화, 항공기 설계와 개발을 금융 이론으로만 이해하려다 말아먹은 프로젝트들과 기회는 이 시기 필 콘딧과 해리 스톤사이퍼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보잉 경영진의 실책이며 미래 경영 예측의 실패임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합병된 보잉의 COO 시절부터, 사임 후 CEO로 다시 복귀하기까지 해리 스톤사이퍼의 인터뷰를 보면 대략 이 아저씨는 무작정 탐욕스런 경영인이라 비춰지기 보단, 그가 꿈꿨던 미래경영의 생각과 방향이 기술과 자본의 세계화 소용돌이에 분명히 일관되게 맞춰져 있었음은 알 수 있습니다. 필 콘딧을 CEO에서 날려버린 오랜 악습 관례였던 조달과정에서의 로비와도 단호히 이별하려는 노력과 개혁의 행동도 있었습니다. 과거의 경험과 실사례를 통한 매우 합리적인 시도였고 결과적으로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결정이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제 개인적으로 생각되는거죠.







<합병된 보잉이 맥도넬 더글라스의 CI를 유지한 것 처럼, 양사 합병이 어찌됐든 미래로 나아가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마지막으로, 글을 쓰는데 참고한 도서 목록을 올려드립니다.


Jane's All the World's Aircraft, 1919. C.G. Grey


A history of the Air ministry. C.G. Grey


The history of combat airplanes. C.G. Grey


The U.S. Air Service in World War I. Mauer Mauer


Aviation History. Anne Marie Millbrooke


Pushing the Envelope. - The American Aircraft Industry. Donald M. Pattillo


A history in the making - 80 turbulent years in the American general aviation industry. Donald M. Pattillo


The 1919 aircraft year book. Fay Faurote


Cost-Estimating Relationships for Aircraft Airframes. G. S Levenson 外


Aerial Age. 미상


참고서적 일부는 구글링 하시면 미국 대학도서관에 공개되어 있는 것 또는 인터넷 아카이브에서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안타깝게도 랜드 연구소에서 72년에 발행한 Cost-Estimating Relationships for Aircraft Airframes가 정말 재미있는 자료가 한가득인데 저작권 만료 정보를 확인하지 못해 pdf 파일 공유가 불가능하지만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겁니다.) The U.S. Air Service in World War I은 미 국방부 자료실에 올려져 있고, 항공기 제조업 협회에서 발행한 The 1919 aircraft year book은 2008년에 저작권 만료로 미시간 대학교 도서관에서 2009년에 전문을 스캔해 pdf로 만들어 업로드 했음이 확인 되어 이 두 권의 스캔 pdf 만 구글 드라이브에 업로드 해두었습니다. 미시간 대학교 pdf 스캔본보다 제가 올려드리는 pdf 스캔본이 보다 선명하고 삽화가 누락된 부분도 없어 읽기 훨씬 편하실겁니다.


https://drive.google.com/drive/folders/1vJMYOAA0KlWuiXyFqvSOi0RpM0_CGFu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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