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rgeting Iraqi assets in Kuwait, the USS Wisconsin (BB-64) fires a round from one of her Mark 7 16-inch/50-caliber guns in turret no. 1, adding her firepower to a war that necessitated a shift from “widely accepted doctrines and methods of operation.”

U.S. NAVAL INSTITUTE PHOTO ARCHIVE


사막의 폭풍 작전(1991년 1월 17일-28일)은 미 해군이 소련 해군과의 해상전에서 승리하는 군대에서 다국적 연합군의 일환으로서 육상에서 싸우는 군대로 변화하는 과정의 증거가 되었다. 오랜 기간 만들어지고 널리 수용된 전략 교리와 운용방법을 가진 기관의 주된 변경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용함이 인정될 수 있다. 그러나 그 변환 과정은 소세지 만들기와 같이 지저분한 일이 될 수 있다. 해군과 사막의 폭풍 작전도 마찬가지였다.


레이건의 빌드업과 "유조선 전쟁"


80년대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강력한 지지와 해군 지휘부의 단호한 노력 덕에 걸프전 직전의 함대는 이보다 더 강력할 수 없었다. 1990년, 해군은 15개의 항모전투단, 4개의 전함 전투단, 100척의 공격잠수함, 그리고 더 많은 전투 및 지원함들을 보유해 상당한 전력을 해상에 투사할 수 있었다. 함대는 기술적으로 가장 진보한 항공기, 무기, 함정, 9만톤급 대형갑판 항모인 니미츠급들과 재취역한 네척의 아이오와급을 자랑했다.

Ten ships of Task Force 155 gather during Operation Desert Storm. Leading the formation at left is the USS Saratoga (CV-60), flanked by the San Jacinto (CG-56), top, and Thomas Gates (CG-51). At center is the USS Mississippi (CGN-40), flanked by the America (CV-66), top, and John F. Kennedy (CV-67). At rear are, from top, the USS Preble (DDG-46), Philippine Sea (CG-58), Normandy (CG-60), and William V. Pratt (DDG-44). U.S. Naval Institute Photo Archive


수상함과 잠수함은 그들의 통상화력을 바다에서 수백마일 떨어진 곳 까지 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지상공격 토마호크 미사일(TLAM)을 통해 얻었다. 최전선의 항공기에는 전천후 운용이 가능하도록 발전된 A-6 인트루더 공격기, 새로운 F/A-18 호넷 전폭기, 그리고 F-14 톰캣 전투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지스 유도미사일 순양함은 새롭게 장착한 SPY-1A 위상배열 레이더와 팔랑스 근접방공시스템 덕에 강력한 방공능력을 함대에 제공할 수 있었다.


또한 해군은 3650톤의 올리버 해저드 패리급 유도미사일 프리깃에 SH-60B 시호크 헬리콥터를 전개했다. 사막의 폭풍 동안 미 상륙군을 지휘한 존 B. "뱃" 라플랜티 중장은 해군이 1991년에 이룬 것은 10년 전에는 불가능했다는 적절한 소견을 밝혔다: "내기가 아니다, 우린 레이건 정부시기에 투자한 것 만큼 결과를 냈다."


합동군 저항


소련이 1980년대 후반에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소련 해군은 전세계 바다에서 거의 사라졌다. 미 해군은 먼바다에서 계속해서 전투를 치룰 해상의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시점에 미국 전략가들은 미군이 일반적으로 최소한의 해상능력을 지닌 적에 대항해 팀으로 싸우는 능력을 길러야만 한다는 결론을 냈다. 이 핵심 아이디어는 1986년 골드워터-니콜스 국방법을 통해 구체화되었다.


그들이 한국과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많은 해군 지휘관들은 그들의 항모와 해병전투단을 육군이나 공군 장성이 지휘하는 지휘부에 배속 시키는 것에 저항했다. 그 결과 해군은 중부사령관(CINCCENT)휘하의 해군부서에 매우 소수의, 비참할 정도로 권한이 적은 참모들만 파견했으며, 합동훈련에 별 성의를 보이지 않았다. 존 레만 해군 장관은 후에 "유조선 전쟁" 기간 동안의 의사결정은 "'합동성'에 대한 워싱턴의 집착"과 미 중부사령부(CENTCOM's)의 "천명의 군 관료들에 대한 의존"으로 인해 복잡해졌다고 불만을 토했다.[2] 쿠웨이트에 대한 이라크의 침공에 대한 초기 대응인 사막의 방패 작전이 시작될 때인 1990년 8월, 해군은 페르시아 만으로 서태평양에서 수천마일 떨어진 곳에서 작전 중이던 7함대와 그 지휘관인 헨리 H. "행크" 마우즈 주니어를 파견했다.


베트남전 참전용사로서 훈장을 수훈받았으며, 1986년 6함대가 리비아에 공격을 감행하는 동안 핵심 사령관이였던 마우즈는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바레인 앞바다에 정박한 그의 기함에서 미 중부사령부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전역 사령관인 육군 장성 노먼 슈워즈코프 주니어의 희망은 마우즈의 지휘부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 배치해 장군의 긴밀한 지휘를 받게 하는 것 이였으나 해군 지휘부는 이를 거부했다. 1990년 12월 1일 스탠리 R. 아서 중장이 마우즈에게서 지휘권을 인수 받은 뒤 그는 지휘부를 라야드로 이전하는 것을 고려했으나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와의 전쟁이 임박했기에 지휘부의 전투 준비를 방해할 우려가 있어 이를 실행하진 않았다.


방패를 올리다


사막의 방패 작전이 시작된 직후 USS 인디펜던스(CV-62)와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CVN-69)의 항공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영공을 방어하는데 한 손을 보탰다.


80년대에 예측한 바와 같이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이 미군에 작전 개시를 명령한 직후 두개의 해병원정여단이 1개월간 작전할 물자가 적재되어 있는 해상사전배치전단이 페르시아 만에 배치되었다. 그 결과 사담이 쿠웨이트를 침공 한지 일주일 만에 강력한 해병대가 사우디아라비아의 항만과 공항을 방어하기 시작했다.


8월 말에 또한 마우즈는 전역 내에 약 300기 이상의 전술기를 탑재한 항모 두 척과 전함 미주리(BB-63)와 위스콘신(BB-64), 그리고 25척의 기타 전투함들을 가지고 있었다. 해군이 80년대 내내 준비한 강력한 전투함대의 전세계 배치는 그 가치를 입증했다. 해군 군 해상수송사령부(MSC)에 소속된 신속하며 특수하게 구성된 고속수송선들은 미국에서 장갑차량, 헬리콥터, 그리고 기타 고가치화물들을 계속해서 실어 날랐다. 사전예비함대 소속 96척의 화물 및 유조선들은 수많은 작전상 어려움들을 겪으면서도 군 장비와 보급품들을 사우디아라비아에 계속해서 내려놓았다.

Coalition Naval Forces in the Persian Gulf, 17 January 1991. Kelly Oaks


실제로 페르시아 만 전쟁에서의 7개월간 MSC는 전역내 10개의 전투사단들을 위한 장갑차량, 공격헬기, 트럭, 중화기, 탄약, 보급품들의 95퍼센트를 배송했다.


제 3 해상 건설연대, 통칭 시비즈는 해병 공병들로 구성되었으며, 이곳에 소속된 모든 이들은 비행장, 보급시설, 탄약고를 건설했다. 제 1 해병원정군을 지휘한 월터 E. 부머 중장은 당시 시비즈에 대해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라...그들은 가서 작업을 할 뿐이다."[3]


국제연합 결의안 제 661호와 665호에 의해 재재가 시행되며 미 해안경비대의 지원을 받은 미 해군은 기타 12개국의 해군과 함께 사담 후세인이 전쟁물자와 주요 수입원인 석유를 수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규모 해상 차단 작전을 실시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해군 파견대의 사령관으로서 마우즈는 다른 해군 사령관들과 월간 회의를 주관했다. 그들은 호출, 정선,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라크에서 출항하거나 그곳으로 입항하는 함선을 나포하기 위한 규약과 절차를 만들었다. 국제 해군 파견대는 금수조치를 강행하기 위해 통상 조치를 실시 중 이였으나 헬리콥터와 특별히 훈련된 승선팀을 배치해 이들을 이용해 새로운 "수직 진입" 및 "패스트로핑" 기술을 이용했다. 금수 초계는 이라크의 해외 무역을 목 졸랐을 뿐 아니라 이를 실시하는 수많은 국가들에 그들이 침략에 맞서기 위한 정당한 국제적 노력의 일환임을 재확인시켰다.


하늘과 바다에서의 공세


1991년 1월 17일 시작된 항공공세에서의 해군의 기여는 그것의 성공에 필수적이였다. 개전 직전 아서는 자신의 지휘하에 있는 수병과 해병들에게 "여러분의 능력, 용기, 체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는 인상적인 기술, 용기, 헌신을 가진 전문적이며 재능있는 아군들과 함께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제임스 미체너의 고전 한국전 소설인 도코리의 다리의 한 구절을 인용하여 제독은 "어디서 이런 [용맹한] 이들을 구할 수 있는가?"라 물었다. 그는 "나는 여러분 개개인이 자랑스럽다. 좋은 사냥되길, 그리고 신의 축복이 함께하길"이라고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1991년 1월 17일의 이른 아침시간, 페르시아 만, 홍해, 지중해에 배치된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들은 일제히 매우 잘 방호되는 이라크의 수도를 겨누고서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했다. 걸프전에서의 TLAM들은 위력과 정확도의 부족에 시달렸으나 그럼에도 적 시설들을 휼륭히 날려버렸다. 게다가 다섯 척, 후엔 6척의 항모가 페르시아만과 홍해에서 공습을 개시했다. 연합항공대의 일부로서 해군의 항모비행대는 이라크의 방공망, 통신시설, 비행장, 해군기지, 그리고 발전소를 날려버렸다.

Desert Storm, Day One: Lieutenant Commander Mark Fox flies an F/A-18 Hornet off the Saratoga; on this initial sortie, he and Lieutenant Nick Mongillo would down two MiG-21 fighters over Iraq. U.S. Naval Institute Photo Archive


해군 정보기관이 연합군에 이라크의 방공체계를 알려주고 이를 무력화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주목할만하다. 해군이 발사한 HARM(고속대레이다미사일)은 많은 적 레이다를 날려버렸으며 항모 기반 EA-6B 프라울러 전자전기는 남은 레이다를 재밍해 연합군 항공병력들을 보호했다. 사막의 폭풍의 첫날 밤에 USS 사라토가(CV-60) 소속 F/A-18 호넷을 조종한 마크 I. 폭스 소령과 닉 몽일로 대위는 이라크 상공을 비행하던 적 미그 21 전투기 두기를 격추 했다.


그러나 이것이 전쟁 내내 해군이 기록한 유일한 전과다. 중부사령부 합동 항공과 지휘관(JFACC)인 공군 장성 찰스 호너는 해군기가 피아식별을 하는데 있어 확신을 가지지 못했고, 그는 이들을 항공차단에만 제한적으로 투입했다. 한편 공군과 연합군 항공승무원들은 연합군의 38기 격추에 주요한 역할을 수행한 해군 개발 사이드와인더와 스패로우 공대공 미사일에 경의를 표했다.


"땅크-땡땡땡" 공습에서 해군 A-6 인트루더와 A-7 코르세어, F/A-18 호넷 공격기와 해병대의 AV-8 해리어와 호넷들은 쿠웨이트 내의 적 기갑부대를 레이저 유도 폭탄과 기타 정밀유도탄약을 이용해 날려버렸다. 쿠웨이트의 적군에 투하된 무장 대다수는 베트남전 시기의 재래식 "깡통 폭탄", 공대지 미사일, 로켓이였으나 이들은 주야간 공습 내내 투입되어 사막의 보루에 비참하게 숨어있던 이라크군의 사기를 완전히 박살 내 버렸다. 퇴역직전이였던 인트루더와 코르세어들은 호넷처럼 사막의 폭풍 내내 그들의 임무를 휼륭히 수행해냈다.


그러나 해군 지휘부는 F/A-18이 항속거리와 무장탑재량을 늘리기 위해 개량이 필요하단 사실을 인지했다. 수직/단거리 이착륙을 실시해 함정 주변이나 개선되지 않은 비행장에서 작전이 가능했던 해리어는 저위험 항공지원 임무에서 유용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라크의 방공무기에 취약하단 것이 증명되었고, 걸프전 내내 이들 중 4기가 격추되었다.


강력한 방공우산만이 미군과 연합군 항모, 수상전투함, 그리고 보급선이 협소한 페르시아 만 깊숙히 들어갈 수 있게 할 수 있었다. 연합군의 함대는 미 이지스 순양함과 함대공 미사일로 무장한 연합군 수상함, 연합군 조기경보, 초계, 전투기로 방어 받았다. 한 이라크군이 연합군의 방공망을 시험했으나 이는 페르시아 만을 향해 있던 연합군 레이더에 걸려 사우디 측 항공 초계에 의해 두기의 미라주 전투기가 격추되었다. 수상함과 항공기에 장착된 해군의 레이더는 공군의 AWACS(항공경보 및 통제 시스템)기 만큼 잘 작동했으며 이는 전쟁 내내 단 한번의 아군기간의 공중 충돌도 없었다는 것으로 증명된다.

While interservice friction was manifest in Gulf War operations, naval forces commander Vice Admiral Stanley R. Arthur (far left) earned the respect of theater commander General H. Norman Schwarzkopf, who hailed Arthur as “one of the most aggressive admirals I’d ever met.” U.S. Naval Institute Photo Archive


슈워츠코프, 공군과의 마찰


소련 해군과의 전투를 계획하는 것 에서 다른 군종, 특히 공군과의 합동 작전에 참여하게 되는 해군의 변화는 순조롭지 않았다. 슈워츠코프 장군은 처음부터 그의 JFACC인 호너가 공군, 해병대, 해군의 항공자산을 모조리 통제하길 바란다고 분명히 밝혔다. 호너는 그는 분리된 군간 지향 구역을 만들어내는 베트남전 시기의 "경로 포장" 폭격 접근을 수용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다. 마우즈가 그렇게 제안했을 당시 호너는 "그거 집어치워!...우리는 이렇게 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된다면)내가 먼저 사임해야 할 거다."


슈워츠코프와 아서의 유일한 차이점은 가연성 원유를 적재한 이라크 유조선을 쿠웨이트 해안에서 격침시킨 아서의 부대와 관계가 있다. 제독은 슈워츠코프가 연합 상륙군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이들의 격침을 승인했다고 믿었다. 그러나 장군은 이 사실을 알고서 국제 사회가 페르시아 만을 미국이 오염시켰다고 비난할 것이 두려웠기에 폭발했다. 이는 일어나지 않았는데,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의 유전을 날려버림으로서 그 주변 환경을 오염 시켰기에 그곳으로 오명이 집중되었다.


전쟁 내내 여러 문제들에도 불구하고 슈워츠코프와 아서는 좋은 업무적 관계를 유지했다. 실제로 장군은 아서를 진정한 지휘관이며 "내가 만난 제독들 중 가장 호전적"이라 평가했다.


아서의 해상 전역


미국과 연합군 해군을 지휘한 아서의 가장 눈에 띄는 성취는 그가 지휘하는 미 해병대를 이용해 또 다른 "인천" 상륙작전을 수행할 것임을 사담 후세인에게 확신시킨 것 이였다. 아서의 첫 단계는 만 북쪽에서 적군을 제거하는 것 이였고 그 노력은 사막의 폭풍이 합동군과 다국적이라는 점을 진정으로 반영한 것 이였다.


혁신적인 헌터-킬러 전술의 사용, 발전된 레이다, 야간투시장비, 시스쿠아와 헬파이어 미사일을 이용해 미 해군, 육군, 영국 헬리콥터 팀들은 다수의 이라크 전투함들을 격침시켰다.


유도미사일 프리깃 USS 니콜라스(FFG-47)과 쿠웨이트 미사일 보트 이스티퀄은 만에서 이라크가 요새화한 플랫폼을 점령해 전쟁의 첫 적 포로를 잡았다. 1월 24일, 니콜라스와 커츠(FFG-38), 구축함 레프트위치(DD-984)에 모함을 둔 네이비실과 육군 헬기팀은 콰루섬 인근에서 75명의 이라크군을 추가로 포로로 잡았다. 마지막으로 미, 영, 캐나다 항공기들이 공격이 불가능한 이란으로 도주를 시도하던 20척의 이라크 해군 함정들을 격침 혹은 기동불능으로 만들며 "부비얀 칠면조 사냥"으로 이를 불렀다.


따라서 1월의 짧은 몇주만에 연합 해군은 만 북부의 통제권을 가져왔으며 약 140척 이상의 이라크 해군 함정들을 격침시키거나 이란군에 넘어가게 했으며 여기엔 위협적인 미사일 발사 함정 13척이 포함되어 있었다.


아서와 그의 함대는 쿠웨이트 인근으로 이동해 항모들에 적이 점령 중인 해안의 군사적 표적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라고 명령했다. 미영 소해부대는 기뢰가 부설된 것으로 추정되는 구역을 소해했으며, 후에 이들이 1,200기의 낡았으나 기술적으론 진보된 기뢰들로 구성되어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해안에 가까운 위치에서 전함들은 적 식별이 가능해졌기에 강력한 16인치 함포로 엄폐한 적 병력들에게 정교한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그 함정들은 두꺼운 장갑 선체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의 호위로 영국 구축함 HMS 글로세스터(접근하는 이라크 실크웜 미사일을 함대공 미사일로 격추했다)가 붙어 전함들이 작전을 수행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함대의 다른 함정들은 전함의 중장갑 선체가 없었기에 큰 위험에 처했다.

Naval Operations in the Northern Gulf, 17 January–2 February 1991. Kelly Oaks


사막의 방패 기간 동안 슈워츠코프는 아서에게 해당 수역으로 항공기를 보내 기뢰지대를 표시하는 것을 금지했는데 이는 연합군이 준비되기 전 전쟁이 시작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 이였다. 그 결과 강습상륙함 트리폴리(LPH-10)과 그 조금 뒤 유도미사일 순양함 프린스톤(CG-59)가 기뢰에 접촉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으며 침몰할 위기에 처한 함을 살리기 위한 피해통제반의 초인적인 노력이 이어졌다.


이 기뢰밭은 슈워츠코프 혹은 아서가 쿠웨이트에 대한 상륙작전을 하는 것을 막았다. 그들은 2월 2일까진 쿠웨이트 해안의 기반시설의 파괴 및 상륙하는 해병대와 상륙함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할 것을 우려해 이러한 행동이 불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해군의 만 북부에서의 행동들은 사담 후세인의 연합군의 상륙이 있을 것이란 믿음을 강화시켰다. 2월 중순에 아서는 31척의 함정들로 구성된 상륙부대를 전개했고, 이곳엔 제 4,5 해병원정여단과 제 13 해병원정대가 승함한 채 쿠웨이트 해안에 떠 있었다. 그 시점에 항모 함재기들과 전함들이 해안의 표적과 적이 점령한 파라카 섬에 화력을 퍼붇고 있었고, SEAL이 대담하며 주의를 끄는 작전들을 해안에서 수행하고 있었다.


이 전략적 기만은 완벽히 작동했다. 이라크 전투사단, 수백문의 야포, 그리고 다섯개의 대함미사일 포대가 연합 해군에 대응해 해안에 배치되어 부머 장군의 제 1 해병원정단을 포함한 막대하며 강력한 미군과 연합군 육군이 사담의 군대를 우회해 쿠웨이트를 해방시키기 전까지 이에 대응해 이동이 불가능했다.


2월 24일 시작된 이라크에 대한 연합군의 가차없는 공습과 해상 공세, 완벽한 지상전은 불과 100시간 만에 사담의 무릎을 꿇렸다. 많은 관찰자들은 독재자가 더 이상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거나 자신의 시민들을 공포로 지배할 수 없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는 2003년 다른 전쟁이 발발하면서 이러한 추정이 실패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해군은 페르시아 만 전쟁에서 합동군과 국제연합군의 일부로서 군사사 사상 가장 성공적인 전역에서 싸웠다. U.N 결의안과 미국의 전략을 따르며 해군과 연합군의 다른 군종들은 쿠웨이트를 해방시켰으며 사담이 그의 이웃들을 다룰 능력을 제한시켰다. 해군과 그 군사적 파트너들은 이라크 공군의 전력을 절반 이하로 줄였으며, 이라크 해군의 전투능력을 심각하게 저하시켰고, 4,200대의 전차, 장갑차, 포들을 파괴했으며 10만명의 적군을 죽이거나 부상입히거나, 포로로 잡았다. 해군은 단 한척의 함정도 잃지 않고 이 임무를 완수해냈다. 적은 6기의 해군기를 격추해 6명의 해군 항공승무원을 죽였으며 여기엔 2009년까지 식별되지 않았던 미첼 S. 스피쳐 소령도 포함되어 있다.(그후 그는 중령으로, 그리고 대령으로 특진했다.) 해병대는 7기의 항공기를 잃고 110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대다수는 지상전에서 입은 피해였다.

A lightning strike, a resounding victory: A U.S. Marine savors the moment atop a military vehicle during celebrations after the liberation of Kuwait. U.S. Naval Institute Photo Archive


폭풍이 지나간 뒤, 새로운 명령


미 해군은 사막의 폭풍을 통해 해상과 해안에 있는 적에 대항할 다국적, 합동군 작전 능력을 키워야 할 필요성을 배웠다. 미 중부사령부 해군 사령부는 또한 전후 쿠웨이트의 기반시설들을 복구하며, 만의 기뢰들을 소해하고, 이라크에 대항한 해상 초계를 실시하며 사담의 새로운 침략적 행동을 저지하는 국제적 노력을 통해 상당한 작전 경험을 얻었다.


해군은 이라크 상공에 "비행금지" 구역을 유지하며 바그다드 내와 그 주변의 군사 목표를 향해 토마호크를 발사하는 것을 1993년까지 이어나갔으며, 1994년의 함대 이동은 일시적으로나마 독재자의 행동을 완화시켰다. 해군은 전후 기간에 걸프 지역의 항구적인 미국의 동맹국들을 확보하려는 노력을 다국적 훈련을 통해 이루려 했다.


해군은 지역내에서의 능력과 중부사령부에 대한 기여를 늘리기 위한 조치를 취했다. 1992년과 93년 해군은 중부사령부 해군 사령부를 3성 제독이 지휘하는 영구 보직으로 만들며 이 지휘부를 바레인으로 유지하는 것에 동의했다. 94년까지 중부사령부 해군 사령부의 지휘를 맡았던 존 스콧 레드 중장은 후에 "함대처럼 보이며, 함대처럼 행동하고, 함대처럼 작전한다면, 이는 함대다!"란 명백한 사실을 말했다. 마침내 95년 7월 1일에 해군은 미 5함대를 중부사령부의 직할 해군 부대로 설립하는데 동의했다.


또한 해군은 사막의 폭풍에서의 교훈을 합동군 작전에 구체화하려고 노력했다. 함대는 통신 및 데이터링크 시스템 대다수를 개선했으며, 항공 작전 명령에 적응하고, 공통 미사일과 기타 무장의 개발, 그리고 헬리콥터에 더 좋은 무기와 사통장치를 장착하고 소해함들과 항공기를 대대적으로 업그레이드 했다.


전략 레벨에선, 페르시아 만 전쟁은 해군의 전략이 전세계적인 냉전에서 적이 될 수 있는 비소련 국가들과 해군과의 새로운 지역분쟁으로의 진화의 필요성을 높혔다. 1992년 해군 백서인 바다에서는 이 새로운 전략 접근 방식을 발표했고, 이는 2년 뒤 전문...바다에서를 통해 논술되었다. 두 참조 문서 모두 걸프전의 경험이 녹아있다. 그들은 해안에서의 다국적 합동군 작전에 영향을 주기 위해 해상에 "위력 투사" 부대를 배치할 것을 요구했다. 따라서 페르시아 만 전쟁은 미 해군의 현대사에 진정한 이정표를 세웠다.


https://soundcloud.com/naval-institute/proceedings-podcast-episode-205-desert-storm-lessons-learned?utm_source=clipboard&utm_campaign=wtshare&utm_medium=widget&utm_content=https%253A%252F%252Fsoundcloud.com%252Fnaval-institute%252Fproceedings-podcast-episode-205-desert-storm-lessons-learned


https://www.usni.org/magazines/naval-history-magazine/2021/february/weathering-stor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