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50년대 신규 고속정 수출시장을 꽉 잡아버린 탓도 크다 봐야 함.

물론 태평양의 미해군 PT 보트들이 유명했고 영국조차 이를 수입하긴 했지만 일본 제국 해군은 고속정의 건조에 있어서 파멸적으로 재능이 없었고(당장 T-51a/b가 1943년 즈음에나 겨우 만들어진 물건이고 그때까지 일본 해군이 가지고 있었던 모터어뢰정은 단 6척임) 따라서 미해군의 PT 보트 역시 대고속정 역할보다는 다목적 역할로 진행되게 되었고, 당장 설계를 개선할 필요도 없으니 기존 디자인에서 무장만 올리는 방향으로 진화함. 



  반면 영국은 주전장인 대서양과 지중해 모두에 강력한 고속정 세력을 가진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와 교전을 치루고 있었고, 특히 독일의 S보트들은 개전시점에서 영국 고속정들을 압도하고 있었기에 대고속정 목적으로 빠르게 진화해야 했음. 이 때문에 대전기 초창기만 해도 7.7 mm / 빅커스 12.7 mm나 반자동 롤스로이스 2파운더에 의존하던 영국해군 고속정들은 1945년 즈음엔 대부분 폼폼 2문 혹은 몰린스 자동장전장치와 스태빌라이저를 장착한 57 mm 2문으로 무장중이었고, 전쟁이 끝난 직후에는 예비탄을 아예 포좌 옆에 놔둬 기존 보포스에 비해 빠른 장전이 가능해진 QF Mark VII를 갖춤.



  덕분에 1950년대 영국 해군 고속정은 제3세계에 신명나게 팔림. 독일과 이탈리아는 전후복구에 바빠 자국수요조차 전후에 살아남은 대전기 고속정을 개조하는 수준이었고, 프랑스는 대전기 내내 영국제 고속정에 의존하다가 프랑스 수복후에나 자국산 고속정 부활을 시도하고 있는 처지였음. 상태가 가장 나았던 미국은 PT 보트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던 여파로 시대가 원하는 금속제 고속정 시장에 외장만 목재에서 금속으로 바꾼 수준인 PT-810/811/812를 1951년에야 시범적으로 만들었다가 때려쳤고, 이후에 노르웨이에서 내스티급을 구매해와서 테스트하다 '이건 미국의 길이 아닌데스 데프프'하고 정신승리를 해버림.



  결국 고속정 시장에 남은 수출 가능한 국가는 영국과 노르웨이 정도만 남게 되고, 이중 노르웨이보다 업체의 능력이나 국제위상 면에서 훨씬 앞서던 영국은 적극적으로 수출에 나서게 됨.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의 구 영연방 국가들 뿐만 아니라 위의 pfeil처럼 독일조차 영국 고속정을 수입해서 쓸 정도였음. 일본 트리의 PT-11 역시 일본이 영국산 엔진을 구입해와서 뜯어본 이후에 만들어낼 수 있었고. 이러한 영국의 행복은 일본도 어뢰정을 포기하고 독일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국내수요를 채우고 수출시장에 나서기 시작하면서 많이 죽지만, 지금까지도 영국은 바레인, 오만, 그리스, 우크라이나 등에 고속정을 공급하는 등 자국 수요가 없음에도 고속정 건조 강국으로 우뚝 서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