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애매한부분이 많아서 원문하고 100% 같진 않음

링크는 아래에 있음


기자 : 피터 부커



포르투갈의 기네비사우에서의 식민지 전쟁 - 종말의 시작

1960년대 식민지군 룩. 이때까지의 식민지군은 어느나라나 그렇듯이 2선급 장비들을 지급받았다.


1961년 살라자르의 독재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무장 투쟁이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영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1960년 포르투갈의 아프리카 영토는 두개의 작은 제도(카포 베르데, 상투메 프린시페)와 남부 아프리카의 두 거대한 지역(앙골라와 모잠비크) 그리고 서아프리카의 작은 해외영토(기네비사우)로 구성되었습니다.


현재 기네비사우의 면적은 36125km²로 포르투갈 면적의 40%이며 아프리카에서 제일 작은 국가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1961년-1974년 식민지 전쟁의 고통 속에서 포르투갈의 군사력 확립에 가장 가혹한 시험을 제공한 것은 작은 기네*였습니다.

*작은 말장난으로, 아프리카에는 기네비사우 외에도 기네, 그리고 태평양엔 뉴기니(누벨 기네)가 있음


포르투갈의 입장에서 보면 인접한 세네갈과 기네가 기네비사우의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한것이 큰 실책이었고, 1973년에 기네비사우는 포르투갈 식민지의 종말을 예고하는 중요한 정치적, 군사적으로 발전을 하였습니다.


1973년 1월 8일, PAIGC(Partido Africano para a Independência da Guiné e de Cabo Verde)의 오랜 지도자인 아밀카르 카브랄(Amilcar Cabral)은 곧 기네비사우 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2일 후 카브랄은 이웃나라 기니의 수도인 코나크리에서 암살되었지만, 이 손실은 소련으로부터 지대공 미사일도 받은 PAIGC의 성장세를 꺾지 못했습니다.


공중전


포르투갈이 누리는 주요 군사적 이점 중 하나는 포르투갈 공군(FAP)을 통한 제공권 장악이었으나 소련의 미사일 지원은 이에 커다란 변화를 주었습니다.


공군의 주요 임무는 보급품으로 군대를 지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임무의 군사적 효과는 포르투갈 군대에 대한 적의 공세를 방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군대가 공격을 받거나 매복을 당하거나 위치가 포격당하는 상황에서 피아트 전투기(G.91) 또는 헬리콥터 건쉽(알루에트 III)를 사용하여 공격하는 게릴라를 폭탄이나 기총소사로 방해하기 위해 즉각적인 공중지원을 호출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게릴라 주간 공격은 짧게 진행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공군은 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들을 구출해 기네비사우에 있는 군병원으로 이송하기도 했습니다. 이로인한 '구출의 확실성'은 주로 징집병으로 구성된 최전선 부대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3월 말 포르투갈은 새로운 미사일로 인해 피아트 G.91전투기 2대를 잃었습니다. 4월 6일, 세네갈과 인접한 북쪽 국경에서 공군은 3대의 항공기를 잃었습니다.


공군은 항공기가 표적이 된 방법을 발견할때까지 지원임무를 중단했습니다. 따라서 기네비사우의 제공권은 상실되었고 이는 포르투갈 군대의 효율성을 낮추고 수비로 전환하도록 강요했습니다.


전쟁이 성격을 바꾸다


공군이 더 신중해짐에 따라 게릴라는 포르투갈군의 진지를 더 자주, 그리고 장기간에 걸쳐 포격하도록 함으로써 이점을 얻었습니다. 게릴라는 이제 기동성이 더 좋아졌고 대형화되었으며 장갑차를 동반하기도 했습니다. 게릴라전은 천천히 재래식 전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공군이 마비됨에따라 구조의 불확실성은 징집병의 사기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공격작전에서의 전투능력이 저하되었습니다. 군사 작전에 대한 부담과 책임은 이제 포르투갈의 정규군, 특공대, 해병대 그리고 공수부대에 떨어졌습니다.


반군이 3월과 4월에 지대공 미사일을 사용하는데 성공한것은 PAIGC가 세네갈과 인접한 귀다지(Guidage)의 수비대에 대한 공격을 수행하고 반대편에 있는 귈레지(Guileje)에서 동일한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장려했습니다. 


1973년 5월 8일 새벽, 게릴라들은 귀다지를 포위하기 시작했고 빈타(Binta)에서 시작되는 수송도로를 집중적으로 타격했습니다. 빈타에서 귀다지로 가는 도중에 60여명으로 구성된 포르투갈 수송대가 공격받아 4명이 사망하고 4대의 차량이 파괴되어 강제로 후퇴했습니다. 


하지만 15대의 차량으로 구성된 두번째 열이 귀다지에 도달하는것에 성공했습니다. 이 새로운 부대는 이제 집중 공격을 받아야했으며 이미 많은 사상자를 낸 특수 해병대에 의해 지원받아야 했습니다.


기네비사우 방면 포르투갈군의 총사령관인 스피뇰라 장군은 5월 19일 아프리카 특공대 대대가 PAIGC 보급 기지를 파괴하기 위해 세네갈 영토에 진입하는 작전을 승인했습니다.


이 작전 덕분에 귀다지에 대한 게릴라의 공격을 줄일 수 있었으나 여전히 빈타와 귀다지 사이에 있는 수송 도로는 문제에 직면해있었습니다.


도로의 통제권을 되찾기 위해 5월 20일에 대형 수송대가 귀다지에서 빈타로 향했지만 탄약을 모두 소모한 후 귀다지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또 다른 증원군은 이틀 후 빈타에서 출발하여 광범위하게 공격받은 도로를 따라 천천히 진행했습니다. 대부분의 종대는 후퇴했지만 공수부대는 4명의 병사를 잃고 헤쳐나갔습니다.


의료지원이 없고 탄약과 식량 공급도 부족한 상황에서 귀다지에서의 포르투갈군의 위치는 위험해졌습니다.


의무대는 부상자로 가득찼을 뿐만 아니라 수비대가 사용하는 건물은 엄폐할 구간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동하는것조차 매우 위험해서 병사들은 전사한 군인들을 매장할 수도 없었습니다.


5월 29일, 500명의 병력이 빈타에서 귀다지까지 오래된 수송 도로와 평행한 또 다른 도로를 통해 이동했습니다. 살게이로 마이아(Salguieiro Maia) 대위는 다음과 같이 회고합니다 "우리는 19시에 귀다지에 도착했습니다. 캠프 내부의 땅은 수류탄 폭팔로 찢어졌고 모든 건물이 타격을 입었으며 대부분은 폐허가 되어있었습니다. 군인들은 대부분 개인호에 있었고 물도 힘도 없었습니다. 포격으로부터 보호되는 잔해 속을 방문했을때 나는 4명의 전사자와 3명의 중상을 입은 군인을 발견했습니다. 땅이 이상하게 보였습니다. 거의 1인치 깊이의 갈색 피 웅덩이가 있었고 마른 진흙처럼 보였습니다."


귀다지에 대한 구호는 반란군이 남쪽의 귈레지로 관심을 돌려버릴 때에만 간신히 가능했습니다.


귈레지 포위 공격


국경에서 약 10km 떨어진 귈레지 마을에 있는 수비대의 목적은 인접국인 기네의 기지에서 기네비사우의 게릴라에게 군수품이 제공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었습니다. 귈레지는 남서쪽으로 14km 떨어진 덜 요새화된 도시인 가다마엘(Gadamael)에 보급을 의존했습니다.


귈레지에서 포르투갈 군은 포병을 보강하는 중이었고 쿠바 군대의 지원을 받은 PAIGC의 게릴라가 공격을 시작했을때엔 아직 포탄이 도착하지 않았었습니다.


PAIGC는 북쪽에서 거둔 성공을 반영해 귈레지와 가다마엘을 이어주는 도로를 공격했습니다. 귈레지의 전초기지를 철저히 정찰 한 그들은 지대공 미사일을 가져와 배치하고 포병과 관측병을 주둔시켰습니다.


스피뇰라 장군은 5월 11일에 귈레지를 방문했습니다. 그는 수비대에게 임박한 공격을 경고했고, 항공기의 손실을 무릎쓰고 항공지원을 약속했습니다. 항공기는 미사일의 범위를 벗어나 더 높은곳에서 폭탄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물론 부상병에 대한 후송도 계속될 것입니다.


압박을 받고 있는 포르투갈


5월 18일, 귈레지에서 가다마엘로 향하던 포르투갈군이 공격을 받아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들은 공중엄호를 요청했지만 공군은 낮은 구름때문에 지원요청에 응할 수 없었습니다. 귈레지의 사령관은 부상자를 후송시키기 위해 헬기도 요청했지만 끝내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귈레지는 더 심한 공격을 받기 시작했으며 많은 수류탄과 포탄이 수비대 건물 지역에 떨어졌습니다. 이 공격은 다음날에도 계속되었고 공군은 귀다지 방어를 위해 북쪽으로의 항공작전을 시행했기 때문에 약속했던 항공지원은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귈레지의 사령관인 쿠티뇨 에 리마(Coutinho e Lima) 소령은 비사우(Bissau)로 가서 스피뇰라 장군에게 수비대에 지원군을 보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스피뇰라 장군은 요청을 거절하고 소령에게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라고 명령했습니다. 돌아온 그는 더 큰 참상을 발견했습니다. 통신센터은 부엌 그리고 식료품점과 함께 파괴되었고 물 공급이 끊겼습니다. 사령부와 부대 구역은 크게 축소되었습니다.


귈레지에서의 철수


이러한 압도적인 어려움에 직면한 소령은 그 자리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동 가능한 모든 장비가 파괴된 후 군인과 지역 주민들은 5월 22일, 마을을 떠났습니다. 주요 도로들을 피하면서 부대는 안전하게 가다마엘에 도달했습니다.


귈레지에서의 철수는 제공권 장악 없이는 포르투갈 최고사령부가 기네비사우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뤄지는 합동 공격에 대처할 수 없음을 보여주었습니다.


가다마엘의 포위


가다마엘의 막사는 귈레지의 막사보다 훨씬 작았으며 제대로 보호되지 않았습니다. 귈레지에서 200명의 군인과 600명의 민간인이 도착해 공간이 너무 붐볐고 공격을 방어하고 보호를 제공할 희망이 거의 없었습니다.


5월 31일 PAIGC는 포병을 이동시켜 가다마엘을 포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은 급히 참호를 팠지만 많은 사람들이 숨을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습니다. 혼란 속에서 부대 지휘관들은 부상을 입고 철수했고, 무전초소는 타격을 받아 무력화됐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둑으로 도망쳤고, 30명만이 자리에 남았습니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남은 생존자들은 시체위에 크레오소트* 를 뿌려 시체썩는 냄새를 중화시켰습니다.

*나무등에서 채굴되는 화학물질. 보통 방부제로 사용


이제 두 번째 마을도 잃었기에 스피뇰라 장군은 가다마엘의 생존자들을 겁쟁이로 간주했고, 이들이 지원을 요청했지만 무시했습니다.


해안에서 포르투갈 순찰선 NRP 오리온(Orion)은 공수부대를 수송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6월 1일 저녁, 오리온의 선장은 가다마엘의 절박한 상황을 듣고 수송명령을 무시한 채 강둑에 있는 생존자들을 돕기로 결정했습니다.


300명의 포르투갈 군인과 500명의 민간인의 목숨이 위험에 처했고 오직 오리온만이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선장은 두척의 상륙정과 여러척의 소형보트들을 지휘했습니다. 그 후 몇일동안 이 작은 함대는 약 천 명의 군인과 민간인을 구출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상을 입었고 다른 사람들은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결과


1973년 5월 한 달 동안 기네비사우에 주둔하는 포르투갈군은 63명이 사망하고 122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차량 6대와 항공기 3대를 잃었습니다. 예쌍대로 1973년 9월 24일 PAIGC는 기네비사우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1973년 9월 중순 무비멘토 도스 카피타에스(Movimento dos Capitães)의 첫번째 회의가 열렸습니다.(이 회의에 참가한 이들은 카네이션 혁명의 주역이었습니다.) 이 하급 장교들 중 다수는 기네에서 복무한 경험이 있었고, 식민지 전쟁에서 결코 이길 수 없으며 전쟁에서 패하면 자신과 군대가 비난받을 것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군대가 잘못했다면, 이미 12년동안 전쟁의 해결책을 찾지 못한 정치체제는 흠잡을 데가 없을 것입니다. 하급 장교들은 자신들의 군사 경험을 포르투갈 자체에서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는 데 사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1974년 4월 24일에 독재 정권을 전복하고 2년이 채 안되어 5개의 아프리카 식민지가 독립한 것은 무비멘토 다스 포르사 아르마다(군사운동)의 살게이로 마이아 대위를 비롯한 이들이었습니다.


기네에서 복무했던 장교들의 경험과 추진력은 포르투갈의 독재를 무너트리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 기사는 오리온호에서 부사령관으로 복무했던 포르투갈 해군 장교 페드로 로레(Pedro Lauret)의 개인적인 회고록을 기반으로 합니다.






인터넷 이곳저곳 뒤져보다가 찾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번역해서 한번 들고와봄.


1970년대에 포르투갈군이 유일하게 주도권을 잡지 못한 지역은 기네비사우였고, 이는 포르투갈의 유일한 실책이었음. 후퇴 후 독립도 생각해봤지만, 여기에서 독립에 응해준다면 앙골라와 모잠비크에도 엄청난 후폭풍이 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켜야 했던곳이기도 하고. 기네비사우의 기후는 고온다습하고 정글과 습지가 대부분이라서 일반 징집병보다는 해병대가 크게 활약을 한 곳이기도 함. 


사실 처음에는 여기에 올려도 되나 생각했지만 공군하고 해군에 대한 이야기도 꽤 들어있고, 처음으로 SA-2 스트렐라가 쓰인곳이기도 해서 올리게 됨


기네비사우 지도


https://www.portugalresident.com/portugals-colonial-war-in-guine-the-beginning-of-the-end/

기사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