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gaijin/47795432(
헝가리 트리 나온다고? 이거 보여주려고 호다닥 달려왔다;)
https://arca.live/b/gaijin/66303808 (아직도 즈리니 돌격포 타는 가붕이 있으면 참고하셈)
https://arca.live/b/gaijin/55777272 (ㅆㅂ 헝가리 새끼들 구축전차에 6연장 로켓 실화냐?)


그래서 이번엔 티저에 등장한 처버 장갑차의 전투 사례에 대해 알려주려왔음.


처버는 진짜 존나 마이너 차량이라 앞으로 헝가리 트리 타게 될 가붕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글 길어져서 전투사례만 보고 싶으면 배경이랑 전투사례 단락 나눠놨음.




골로바넵스크 전투

1941년 8월 6일




배경


우만 전투 (1941 7월 15일-8월 8일)는 이반 N. 무지첸코 중장의 제 6군과 포네델린 소장의 12군을 목표로 한 추축군의 공세였다. 전투는 르포프 (리비우) 돌출부에서 후퇴하는 붉은 군대 남서 전선군과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 예하 남부 집단군 간에 벌어진 키예프 전역에서 발생했다. 독일군은 우만 부근에서 25개 사단으로 구성된 소련군 2개 야전군을 포위했다. 소련군은 세묜 M. 뷰됸니의 남서 방면군 지휘 하에 키르포노스 상장의 남서 전선군과 이반 V. 튤레네프 장군의 남부 전선군이 배속된 형태였다.


7월 하순까지 부흐 강을 건넌 헝가리 기동 군단은 골로바넵스크 (우크라이나어로 홀로바니우스크Голованівськ) – 라디진카 – 우만에 위치한 스탈린 선에 도달하여, 셰페토프 대령의 소련군 제 96산악소총사단에 소속된 209산악소총연대를 격파했다. 헝가리군은 포위망 남쪽의 형성을 위한 토대로서 우만 인근에 뚫린 40km 길이의 틈을 메워야 하는 역할을 부여 받은 상태였다. 8월 1일 오전에는 소련군 제 6군과 12군 사령부 (7월 28일부터 제 6, 12군 잔존부대와 제 2기계화군단을 포네델린 집단으로 묶은 상태였음)가 스탈린에게 전달할 사본과 함께 남서 전선군 사령부로 통신문을 발송했다. 포네델린 집단은 완전히 포위되어 붕괴될 위기에 처해있기 때문에 상황이 위급하다고 호소하고 있었다. 보충병과 탄약은 부족했고, 연료는 거의 바닥나고 있었다.



(1941년 7월 제4 후사르 연대의 기마 및 차량화부대가 지역 주민들이 설치한 환영 기념물 아래를 지나고 있다. 헝가리군은 부크 강을 따라 우크라이나 더 깊숙히 진격하였으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으며 지역 주민들의 태도가 더 적대적으로 변했음을 알게 되었다. 인위적으로 건설된 도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한 집산화된 소규모 마을들에서는 교회가 창고나 축사로 사용되었는데, 이런 사실은 헝가리군은 크게 충격에 빠트렸고, 볼셰비키 체제에 대한 편견을 확신하게 만들어주었다. NKVD가 조직한 파르티잔 운동도 현실적인 위협이었다.)


그런 상황에도 튤레네프는 스탈린에게 상황이 좋아질 것이라고 장담했다. 튤레네프의 언급에 따르면 북동쪽에서 생생한 제 223소총사단이, 남쪽에선 제 18군 예하부대들이 포네델린 집단 구원을 위해 공세를 개시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런 튤레네프의 구상에는 보급 문제가 부정되었다. 포위된 소련군 부대 중에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에서 동원되어 갓 입대한 콤소몰 (전연방 레닌주의 청년 공산주의자 동맹) 청년들로 구성된 공산주의자 연대도 있었다. 결국 포위된 채 흩어져 붕괴되고 있는 포네델린 휘하 병력의 지원을 바랄 수는 없었다. 제 18군 예하 부대들은 1개 소총연대로 게트마노프카 지역을 유지하며 8월 1일 콜로디스토예 – 모셰나 – 사브란 전선에서 방어전을 지속했다. 독일군과 헝가리군의 측면 공격을 받은 제 17소총군단 예하 사단들은 골로바넵스크 남서쪽에 있는 크라스노고르카 – 몰도프카 선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소련군 사령부는 독일군 산악부대의 일시적인 골로바넵스크 철수를 후퇴로 받아들였다. 8월 1일 19시경 제 17소총군단이 도시 남동쪽과 북동쪽 구역에서 돌파를 시도했다. 하지만 소련군의 공세는 다른 군단 병력의 효과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독일 제 4산악사단의 격렬한 저항에 돈좌되고 말았다. 이로써 독일 제 52군단과 헝가리 기동군단이 8월 1일 야간에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독일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한 소련 제 18군 병력들은 8월 1일 자정까지 크라스노고르카 – 몰도프카 선으로 복귀해야 했다. 21시 무렵 소련군 병력은 페르보마이스크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헝가리군 소총병들이 수레로 만들어진 가교를 통해 개울을 건너고 있다. 다수의 병사들이 소대 경기관총에 쓰일 철제 탄약 상자를 운반 중이다.)


8월 1일 헝가리 제 1차량화소총여단이 기동 군단의 선봉을 구성한 데 이어, 제 2차량화소총여단과 제 1기병여단이 가이보론에서 뒤따라 부크 강을 건넜다. 8월 2일 09시가 되자 제 1정찰대대와 제 1차량화소총대대가 몰도프카 서쪽고지를 공격했다. 소련군이 마을에서 나와 경전차 12대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헝가리군의 37mm 36M 대전차포와 20mm 대전차소총 장착형 39M 처버 장갑차들이 소련군 전차 4대를 격파하면서 좌절되었다. 제 1정찰대대의 지원을 받는 헝가리 차량화소총병들은 30분도 채 안 걸린 신속한 공격으로 몰도프카를 점령했다.


8월 2일에는 뵈뢰시 소장의 후임으로 비서 페렌츠 대령이 제 2차량화소총여단 지휘관에 부임했다. 같은 날, 독일 제 4산악사단이 우만 인근에서 소련군을 2개 집단으로 분열시켰고, 독일 제 125보병사단은 우만 – 노보 아르한겔스크 도로를 장악했다. 노보 아르한겔스크 – 오크사니노 – 두보바 – 테르니브카 지역에서 이루어진 독일군 항공 정찰은 돌파를 시도하기 위해 모여 있는 소련군 트럭 및 마차 1,400대를 식별할 수 있었다. 이에 독일 제 16기갑사단 병력들이 페르보마이스크에 진입하여 제 17군 사령부 예하 부대와 접촉했다. 그 결과 포네델린 집단 주위로 두 개의 포위망이 형성되었다.


독일 제 16, 11, 9기갑사단과 독일 제 16보병사단 (차량화), 제 1SS 보병사단 (차량화) ‘총통경호친위대 아돌프 히틀러’는 노보 아르한겔스크 북쪽과 동쪽에서 진격해 들어갔다. 독일 제 297, 24, 125, 97보병사단은 서쪽에서 접근했다. 남쪽은 독일 제 1, 4산악사단, 제 257, 96보병사단, 제 100, 101경보병사단, 헝가리 기동군단, 루마니아 기병군단 및 이탈리아 제 9보병사단 ‘파수비오’가 맡았다. 그렇게 총 22개의 추축군 사단이 포네델린 집단에 맞서 페르보마이스크, 우만, 키로보흐라드에 전개되었다. 루프트바페 제 4항공군단은 포위망에서 탈출하려는 붉은 군대에게 지속적인 공습을 가했다.


8월 5일이 되자 제 1차량화소총여단은 페르보마이스크에 안착했다. 예하 대대 일부가 도시 남쪽 부크 강 도하 지점을 확보했다. 헝가리군은 세 방향에서 진행될 수 있는 잠재적인 공격에 직면한 상황이었다. 북쪽은 우만에서 탈출하려는 소련군의 필사적인 돌파 시도에, 남쪽은 헝가리 제 1차량화소총여단과 제 1기병여단이 이용 가능한 도하 지점들을 점령했기 때문에 북동쪽으로 철수하려는 소련군의 공격에, 동쪽은 포위된 부대를 구원하기 위해 투입된 소련 증원군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었다. 헝가리 제 1기병여단은 부크 강 북쪽 기슭을 따라 약 50km 길이의 도하 지점을 점령했다. 페르보마이스크 북쪽에선 독일 제 101경보병사단과 제 257보병사단이 측면 방호를 제공했다.




위는 배경 설명이고 전투사례 보고 싶으면 여기서부터 보면 됨



1941년 8월 6일 골로바넵스크


오전 9시 45분 : 소련군의 탈출 시도를 정탐하라는 제 1기병여단장 버터이 언털 소장의 명령에 따라 메레스 라슬로 소위와 예하 39M 처버 장갑차 2대가 휴식 중인 독일 제 257보병사단 참모부와 보급행렬을 지나치다.


오전 10시 00분 : 골로바넵스크 남쪽에서 헝가리군 장갑차들이 소련군 3개 기병중대와 마주치다. 이 중 2개 중대 괴멸.


오전 10시 45분 : 메레스가 매복을 위해 예하 장갑차 2대를 숲 지대로 이동시켜 배치시킴.


오전 11시 00분 : 헝가리 장갑차가 남쪽으로 이동 중인 소련군 트럭 20대를 향해 발포. 붉은 군대 소총중대가 숲에서 나와 공격을 시도함. 소련군 전차 2대와 교전.


오전 11시 30분 : 메레스가 탄약이 떨어졌기 때문에 재보충을 위해 후퇴한다고 무전함.


오전 : 소련 제 6군 사령관 무지첸코 중장의 관측소가 메레스의 장갑차로부터 고작 600m 떨어진 곳에 자리 잡음.


전 12시 00 : 세 번째 장갑차와 자전거소대가 도착하여 철로를 따라 자리 잡은 헝가리군 거점을 안정시킴. 헝가리군이 침투한 소련군을 격멸함.



전장 환경


구릉지대 사이의 계곡은 습지와 주로 낙엽수로 이루어진 삼림지대로 구성되었다. 습지는 저지대에 위치했지만, 고지대에는 소나무가 무성했다. 은엄폐 및 매복하기에 이상적인 지형이었다. 날씨는 다소 좋아진 상태로 진창인 도로가 말라붙은 상태였다.




전투


소련 제 6군은 특임대에 남아있는 전차를 모아 포위망을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8월 5/6일 야간 동안 제 141, 190소총사단 예하 4,000명과 이들을 지원하는 제 44전차사단 소속 전차 10대로 구성된 분견대가 무지첸코의 지휘 아래 코펜코바타의 독일 제 4산악사단을 돌파하여 골로바넵스크로 향했다. 독일 제 1, 4산악사단은 포위망을 돌파하는 소련군을 저지하는데 실패했다. 소련군 부대는 20km의 행군 끝에야 마을에 도착했지만, 마주친 건 구원군인 소련 제 18군이 아닌 독일 제 52군단과 헝가리 기동군단이었다. 거듭되는 후퇴와, 독일 공군의 공습, 추축군의 신속한 움직임으로 사기가 꺾인 소련 제 96산악소총사단과 제 169소총사단은 와해되어 더 이상 단일 부대로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헝가리 제 1, 2차량화소총여단과 제 1기병여단은 정확히 소련군의 공격로에 집결했다. 이 중 제 1기병여단은 소련군 부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되었다. 8월 6일 화창한 아침, 여단 본부에서 군단 본부로 통신을 송신하는 임무를 맡고 있는 헝가리군 고정 통신초소 중 하나가 소련군이 우만 북쪽 포위망을 돌파했다고 보고했다. 격렬한 소화기 사격소리가 들렸다는 것이었다. 추가 보고에 따르면 소련군은 헝가리 제 1기병여단의 후방제대를 향해 철도를 따라 나있는 골로바넵스크 숲 주변을 이동하고 있었다.


격파된 소련제 ZiS-5 트럭과 전사한 운전병들. 1941년 8월 6일 골로바넵스크 전투 이후 메레스 소위가 촬영하였다.


제1 장갑기병대대의 메레스 라슬로 소위가 지휘하는 장갑차 중대의 39M 장갑차 4대.1941년 8월 6일 골로바넵스크 전투 당시 촬영.


제 1기병여단장 버터이 언털 소장은 상황을 더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며 적을 찾아내기 위해 수색대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오전 8시 30분, 버터이는 수색대 지휘관인 제 1장갑기병대대 장갑차 중대의 젊은 예비역 장교 메레스 라슬로 소위를 사령부로 소환했다. 그리고 골로바넵스크 인근 구역을 수색하여 숨어있는 붉은 군대 병력들을 소탕하라는 명령을 직접 내렸다.


메레스는 자신의 장갑차소대 (39M 처버 장갑차 3대)를 1개 자전거소대로 보강했다. 몰도프카의 교차로에서 자전거소대와 합류하여 함께 소련군 예상 침투지로 이동하는 것이 계획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전거소대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하면서, 메레스는 ‘고무 후사르’ (헝가리 자전거 부대의 별명)를 기다릴 장갑차 1대를 남겨둔 채 단독으로 임무에 나섰다. 메레스 수색대는 기동하는 동안 휴식 중인 독일 제 257보병사단의 참모진과 보급대를 통과했다. 독일군은 어떠한 밀접 보호도 없이 도로변에 주차하고 있었다. 메레스는 지휘차량에 앉아 있는 독일군 사단장 카를 작스 소장에게 경례했다.


2대만 남은 헝가리 장갑차소대는 속도를 올려 기동해 철도 교차로를 건넜다. 그리고 골로바넵스크 남쪽에서 갑작스레 정체불명의 기병대와 조우했다. 처음에 기병대가 루마니아군이라고 생각했던 메레스는 장갑차를 세우고 포탑 위에 나와 기병대 지휘관에게 독일어로 말을 걸었다. 그때 메레스 휘하의 두 번째 장갑차가 도착했다. 운 좋게도 해당 장갑차에 탑승해있던 슬로바키아인 조종수 덕분에 기병대 지휘관이 러시아어로 대답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기병대는 바로 붉은 군대 소속이었던 것이었다. 메레스는 즉시 행군 중인 소련 기병대를 향해 장갑차에 장착된 20mm 대전차소총과 8mm 기관총을 사격하라고 명령했다. 장갑차소대가 사격을 시작하자 소련 기병대는 공황에 빠졌다. 죽은 군마와 병사들이 길가에 흩어졌다. 수분 만에 소련군 2개 기병중대가 심각한 사상자를 내며 격퇴당했다.


메레스는 소련군 기병 두 명을 생포하여 심문을 위해 독일군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심문 과정에서 포위망 내 돌파시도가 가능한 틈새를 찾는 것이 포로들의 임무였다는 게 확인되었다. 헝가리군이 만난 2개 소련 기병중대 뒤로는 세 번째 중대가 뒤따르고 있었다. 해당 정보에 따라 독일 제 257보병사단은 소련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골로바넵스크 매복


8월 5일, 약 4,000명의 소련군 병력이 추축국 전선을 돌파하여 헝가리 제 1기병여단 방향으로 향했다. 제 1장갑기병대대의 메레스 라슬로 소위가 지휘하는 헝가리군 수색대는 8월 6을 적을 찾아내라는 명령을 받았다. 오전 10시 00분경 3개 소련 기병중대가 헝가리군 39M 처버 장갑차 부대와 접촉하여 심각한 손실을 겪었다. 약 1시간 후, 남쪽으로 향하던 소련군 차량 행렬이 헝가리군 장갑차 부대에게 매복을 당했다. 근거리 사격에서 피격 당한 선두 트럭이 멈추어 서자 뒤이은 차량들이 앞차와 충돌했다. 도로 남쪽에선 소련군 2개 보병중대가 숲에서 뛰쳐나왔다. 소련군 보병대는 착검한 모신나강으로 무장했고, SSh-39 철모와 무릎까지 오는 군화 등 통상적인 소련군 전투복을 착용했다. 부사관은 SVT-38 반자동소총과 전용 탄입대로 무장했다.


1941년 골로바넵스크 전투의 전공으로 진급 및 수훈한 메레스 라슬로 예비역 소위.


오전 10시 30분 메레스가 적과의 접촉을 보고하자 여단장인 버터이는 여단 전체에 경보를 내렸다. 메레스는 추가적인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휘하 장갑차들을 도로를 따라 나 있는 숲 지역에 매복시켰다. 곧 20대의 소련군 트럭 행렬이 남쪽으로 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근거리 (30-40m)까지 다가오자 헝가리군 장갑차들은 사격을 개시했다. 선두 트럭이 피격 당해 멈추어 서자, 뒤따르는 트럭들이 앞차와 충돌했다. 헝가리군 장갑차들은 도로를 따라 달리며 쉴 새 없는 대전차소총과 기관총 사격으로 적을 제압했다. 그때, 갑작스럽게 다수의 소련군 보병대가 도로 남쪽 숲에서 튀어나왔다. 헝가리군이 사격을 가하자 혼란에 빠진 소련군 보병대는 숲으로 후퇴했다.


아무런 징후 없이 소련군 전차 2대가 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메레스의 경장갑차량들은 소련군 전차 (아마 BT 또는 T-26 경전차)에 상대가 되지 못했지만 후퇴하지 않았다. 헝가리군 장갑차는 즉시 소련군 전차와 교전에 돌입하여 장갑차에 탑재된 20mm 대전차소총으로 첫 번째 전차를 공격했다. 메레스의 차량 역시 피격 당했다. 조종수인 톨디 페렌츠 일병이 중상을 입으면서 장갑차는 도랑에 빠지고 말았다. 조종수를 교체한 메레스의 장갑차는 부상자를 대피시키기 위해 후퇴했다. 체르니츠키 라슬로 생도가 지휘하는 장갑차는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지속적인 사격을 가했다. 소련군 전차들은 헝가리군 장갑차를 따라가지는 않고, 그냥 철수해버렸다. 중상을 입은 조종수는 독일군 항공기를 통해 바르샤바로 이송되어 수술을 받았다. 한쪽 눈을 잃었지만 살아남아 훈장을 받을 수 있었다.


오전 11시 30분이 되자 메레스는 탄약이 떨어졌다고 보고하며, 탄약 보충을 위해 후퇴할 계획을 세웠다. 정오쯤에는 세 번째 장갑차와 자전거소대가 도착하여 상황을 안정시키고 틈을 메운 뒤, 침투한 소련군을 소탕했다. 헝가리군 장갑차들은 교전 동안 기관총 탄약 12,000발과 20mm 대전차총 탄약 720발을 소모했다. 메레스는 전투에서 보인 지도력과 용맹으로 헝가리 최고 군사 훈장인 금장 사관 용맹훈장과 독일 철십자 훈장에 서훈되었다.


소련군 포로 2명을 심문한 결과에 따르면, 이 돌파시도를 주도한 것은 소련 제 6군 사령관 무지첸코 중장이었다. 무지첸코는 이후 포로 잡혔다. 헝가리 장갑차 부대가 교전 중일 때 무지첸코의 관측소는 메레스의 장갑차로부터 60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메레스 라슬로


메레스 라슬로Merész László는 1915년 1월 17일 커포슈바르에서 태어났다. 1938년 부다페스트 경제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헝가리 국립은행에서 근무했다. 기갑수색대에서 의무복무를 마친 메레스는 대학교 졸업자로서 예비역 장교 훈련과정에 참가했다. 트란실바니아 진주 작전과 유고슬라비아 전역 때 소집되었으며, 1941년 봄 니레지하저에서 제 1장갑기병대대 (제 1기병여단) 장갑차 중대에 예비역 소위 계급으로 배치되었다. 직책은 장갑차 소대장이었다.


1941년 8월 초 부크 강을 건넌 독일과 헝가리군은 스탈린 선에 도달했다. 메레스는 8월 6일 우만 근처에 포위된 소련군을 정찰하는 명령을 받았다. 골로바넵스크 남쪽에서 소련군 2개 기병중대와 접촉한 메레스는 결단력 있게 행동하여 적을 격퇴했다. 2년 후인 1944년 1월 28일에는 금장 사관 용맹훈장을 수훈했다.


메레즈는 중위로 진급한 다음 1941년 12월 소집 해제되었다. 그리고 1944년 재소집되어 제 3전차연대의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메레스는 소속 부대와 함께 오스트리아에서 종전을 맞아 미군에게 포로로 잡혔다. 전 후에는 소련군 점령 하에 있는 헝가리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군 경력 때문에 보복 당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대신 런던으로 이주한 메레스는 1951년 호주로 이민 가, 1997년 11월 13일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