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1970년대.

북한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남한을 향한 대남 도발을 감행하는 중이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 초반까지는 2차 한국전쟁이라고 불릴 만큼 도발이 잦았고, 현역부터 예비역까지 아주 치열하게 북괴를 막아섰던 혼란의 시대였다.

사살당하거나 체포된 간첩의 수가 거의 3천이니 말 다한 셈.

북괴는 어선으로 위장한 간첩선으로 간첩을 빼오거나 침투시키는 일이 잦았다.

위 어선은 일반적인 어선 같지만, 14.5미리 KPV 2정, 82mm 무반동총, 40mm 대공포 등등 아주 우수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

1972년 1월에 소흑산도에 침투한 간첩선도 이 모델로 추정된다.

1972년 6월 1일 새벽 2시 5분, 한국군은 괴선박 하나를 발견한다.

한국 공군과 해군은 이를 추적하기 위해 애를 썼으나, 안개도 심하고 심야인지라 간첩선을 찾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서 C-46이 저공으로 비행하면서 조명탄을 지속 투하중이었는데, 하필 수송기가 지나가는 자리 밑에 간첩선이 있었던 것.

북괴의 간첩선은 화력을 퍼부었고, 안타깝게도 고도 200미터에서 임무 수행중이었던 수송기는 그 화력에 큰 피해를 입고 추락하여 승조원 8명이 사망한다.

그리고 시야에서 간첩선을 놓치고 만다.

그러나 대대적 수색 끝에, 한국 공군의 T-33 2기가 4시 6분에 적함을 포착한다.

이들은 로켓과 12.7미리 브라우닝의 화력을 퍼부었으나, 간첩선은 격침되지 않았고, 오히려  훈련기가 14.5미리에 피탄되는 피해를 입었지만, 다행히 격추되진 않는다.

그리고 새벽 5시 10분

김주호 대령이 탑승한 F-5A가 출격한다.

20미리 기관포와 38발의 로켓이 있었지만, 정밀한 유도무장이나 탄도 컴퓨터는 없는 상황.

거기다 안개까지 껴 있는 악조건이었으나...

김주호 대령은 이 악조건을 뚫고, 가진 모든 무장을 퍼부어 적을 몰살한다.

최소 17명의 북괴가 이때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 공로로 김주호 대령은 화랑 무공훈장을 받고  사후 현충원에 안장되었다.

그리고 김 대령은 손녀를 매우 아끼는 사람이었는데,

이 손녀가 가수 윤하이다.

윤하가 가수의 꿈을 꾸었을때, 가족 모두가 반대했지만 유일하게 지지하고 응원해주었다고 한다.

생전 손녀한테 이런 말을 자주 했다고 한다.

"끝까지 살아남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