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부순애물 채널

'난 왜 이모양일까?' 


한숨이 나온다. 거울 속엔 토실토실 살이 찐 키 작은 흰 곰수인 한명이 서 있다. 안경을 걸친 약간 어벙한 표정의 그 백곰수인은 입을 삐죽 내민 채 자신의 몸 이곳 저곳을 살피고 있었다. 티비 속에서 콜라를 선전하는 근육질의 스타 백곰수인, 명절 씨름대회에 출전하는 거대한 덩치 의 백곰수인선수들 처럼 세간에 익숙한 곰수인들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다부지지도 않고 그냥 동글동글한 나의 모습. 심지어 반쯤 감긴듯 졸려 보이는 눈동자에 코끝에 걸친 안경은 나를 한층 더 만만하게 보이는 데 일조했다. 


'인상을 쓰고 있을까?' 


안경을 벗고 잔뜩 인상을 써 보았다. 그러나 그렇다고 동글동글한 볼, 턱살과 근육하나 없는 몸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다못해 옷이라도 다르게 입고와야 했을까? 흰 셔츠에 단정해보이는 니트베스트, 체크무니 바지에 아끼는 나이키 스니커를 신고온 나는 누가봐도 무해한 대학생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이렇게 긴장하고 자책하는 이유는, 잠시 후 1번출구 근처 술집에서 있을 '모임'때문이었다.


"뭐해?"

"꾸악!" 


거울을 유심히 보는 내 어깨를 감싸는 손길에 나는 화들짝 놀라 요상한 비명을 질러버렸다. 레오형이다. 남자다운 인상에 럭비를 했다고 해서 그런지 다부진 어깨에 커다란 가슴근육, 그리고 맵시있게 차려입은 고급 브랜드의 옷까지. 사진만 올리면 좋아요가 평균 천여개를 웃도는 인기많은 수컷의 표본인 레오형. 그 형이 내가 얼굴을 괴상하게 반죽하며 거울 앞에 있는 모습을 봤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게 느껴졌다. 


"아, 아니에요! 그냥 눈에 뭐가 낀 것 같아서요." 

"눈에? 어디 볼까?" 


레오형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숙여 가만히 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는게 느껴졌다. 레오형이랑 키스를 한다면 이런 느낌일까?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형의 얼굴을 차마 마주하지 못하고 눈동자를 아래로 깔았다. 


"에이, 형 제대로 봐야지." 


그러자 두껍고 커다란 레오형의 손이 내 턱을 살며시 잡아 위로 올린다.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던 레오형은 내 눈동자를 향해 바람을 뿜었다. 커피를 마시고 왔는지 진한 원두향이 섞인 그의 어른스런 숨결에 나는 가슴이 더욱 거세게 콩닥거리는 것을 느꼈다. 


"괜찮아? 딱히 뭐가 낀건 안보이던데." 

"아, 아 네 형! 괜찮아졌어요! 감사합니다." 


나는 속으로 눈물을 흘리며 요동치고 싶어 쿵쾅거리는 심장을 애써 추슬렀다. 오늘, 모임에서 어떤 수확이 없다해도 난 승리자다! 그 레오형의 얼굴을 이렇게나 가까이서 보고, 숨결까지 맡았으니 말이다. 게다가 난 레오형과 단 둘이 술집으로 올라가기까지 했다. 술 자리엔 꽤 많은 사람들이 도착해있었다. 


"야! 어떻게 너네 둘이 같이오냐?" 


주최자인 도마뱀수인 만타형의 옆으로 앉아있는 수컷들의 싸늘한 눈초리가 나에게 꽃혔다. 나는 주춤했다. 사실, 오늘 모임자리는 말이 '모임'이지 레오형의 추종자들만 가득한 자리였기 때문이다. 만타형과 절친한 사이인 레오형이 온다는 이유만으로 참석을 희망한 수컷들이 나에게 질투의 눈빛을 보내는 건 당연했다. 


"하하. 역 출구에서 우연히 만나서 같이 들어왔지." 


나는 자연스레 큰 테이블 앞에서 레오형과 갈라져 들어갔다. 나는 멋쩍게 웃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인사를 했지만, 돌아오는건 싸늘한 끄덕임 뿐이었다.


'분위기 진짜 살벌하네!' 

"아잉 레오형~ 왜 인제오세요! 저 너무 기다렸잖아요~" 

"안녕?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만타형 옆에 자리잡은 레오형 주변에 있던 수컷들은 얼굴에 화색이 돌아 그에게 아양을 떨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내가 앉은 쪽의 수컷 들은 그저 매서운 표정으로 레오형 주변의 수인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 뿐이었다. 그런 분위기를 읽었는지, 잠시 후 만타형이 일어나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자자, 대충 다 온것같은데? 하나 두이 서이 너이...딱 한명 안왔네? 누구지?" "몰라요! 지금까지 안온거면 안오겠죠 뭐." 

"그래요, 그냥 시작해요! 레오형, 술 따라드릴까요?" 

"내가 따라드릴거거든?" 


그렇게 소주병이 테이블위로 놓이고, 모두들 한 잔씩 돌려받을때였다. 


"아, 안녕하심까." 


굵직한 저음에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싹 가라앉고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테이블의 끝에는 거대한 덩치의 흑곰수인이 서있었다. 파격적이게도, 브랜드도 알 수 없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온 그는 험상궂은 얼굴에 근육과 살이 마구잡이로 쌓아올려진 커다란 몸을 가지고 답지않 게 우물쭈물한 태도로 고개를 푹 숙였다. 


"멀리서 올라오느라 조금 늦었심더. 잘못했심더." 


걸쭉한 경상도 방언을 구사하는 그가 만타형의 단톡방에 있던 프로필도, 말도 없던 a라는걸 알아챈 사람들이 수근거리기 시작했다. 


"어, 반가워요. 앉아요." 


그는 그 전에왔던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커다란 덩치의 크가 푹 앉자 시큼하면서도 꼬릿한 남성스런 냄새가 확 올라와 코를 찔렀다. 나는 술병을 들어 그에게 소주를 따라주었다. 


"아, 고, 고맙심더." 

"네, 반가워요." 


그는 굉장히 부끄러워하며 술을 받았다. 커다란 두 손으로 공손히 잡은 소줏잔이 소꿉놀이를 하는 것 같아 그 모습이 귀여웠다.


"자 그럼 다왔네 진짜로? 우리 친해지려면 술게임좀 해야되지 않겠어?" 


그렇게 정신없는 술게임을 따라 테이블위에 빈 초록병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기는 운동해? 몸이 좋네?" 

"덩치가 레오형보다 더 큰것같은데?" 


술이 조금 취하자 내 주변에 있던 수컷들이 마지막에 합류한 흑곰수인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실, 그가 등장했을때부터 미묘한 기류가 느껴지긴했다. 모두들 잘보이려고 준비하고 나온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트레이닝복에, 굵은 저음과 험상궂은 얼굴까지, 마치 날것의 수컷같은 느낌이었다. 이쪽계열의 정석이자 엘리트같은 레오형과는 다른 매력에, 모두가 은연중에 그를 흘낏흘낏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예. 대학에서 씨름전공하고 있슴더." 

"와, 아예 씨름학과를? 나 처음들어봐." 

"어머 어쩐지! 허벅지랑 종아리가 엄청굵더라고." 

"혀, 형님은예?" 


갑작스레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나는 혼자 홀짝이던 소주가 사레가 들려서 코로 역류해, 엄청나게 매워서 눈물과 콧물을 흘리며 기침을 해댔다. 


"어, 어, 여 휴지있심더." 

"제, 제가 형이라고요?" 


사실 거기에 충격받았다. 누가 봐도 나보다 나이 두, 세살은 많아보이는 그가 나에게 형이라고 했으니까. 


"스물 네살 아닌가예? 톡방에서 봤는디, 지는 스물하나임더." 

"아, 아...그래요?" 

"어머! 얘는 그쪽이 연상인줄 알았나보다." 


그런 나를 두고 깔깔대는 끼순이들을 살짝 노려보며 나는 흑곰수인이 뽑아준 티슈로 얼굴을 닦았다. 은근히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나와 흑곰수인 조금 친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럼 이쪽수컷들 만나는건 처음이에요?"

"예 그렇심더. 형님은예?"

"나도 나온건 얼마 안되서요."

"그럼 만나는 수컷은..."

"없어요~"

"아, 다행임니더."

"네?"

"아, 아임더."


그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았다. 나는 어느새 밀착해온 그의 커다란 허벅지와 내 허벅지가 맞붙어 있는걸 느꼈다. 크고 단단했다. 나는 약간 몸이 달아오르는 것 같아 물을 꿀꺽꿀꺽 삼켰다. 그런 우리들에게 만타형이 왕게임 번호표를 건넸다. 1번 숫자를 받아든 나는 꽤나 강한 수위로 진행되는 게임에 살짝 긴장했다.


"1번하고 8번 없어?" 

"야! 1번하고 8번! 키스해!" 


정신이 번쩍 든 나는 1번이라 적힌 내 번호표를 들고 설렘 반 두려운 반인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제발 나를 노려보던 수컷들만 아니었음 좋겠는데... '

"아, 제가 8번..." 


그러나 8번이라며 자리에서 일어난 건 옆자리의 흑곰수인이었다. 그는 어색한 미소를 짓더니 내 팔목을 살짝 잡아 이끌었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따라 일어나 테이블을 나와 벌칙을 수행하는 자리에 섰다. 


"뭐야! 둘이야?" 

"빨리 키스해!" 

"어머 저년 오늘 계탔네 증말!" 


우리는 서로 멋쩍어 시선을 회피하자, 갑작스레 레오형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레오형에게 쏠렸다.


"내가 흑기사할까?" 


그러자 모두들 깜짝 놀라는 표정으로 레오형을 일제히 바라보았다. 


"흐, 흑기사요?" 

"응. 마지막에 온 친구는 나이도 어린것같고. 경험도 없다니까 소중한 첫키스일 것 같아서." 

"어머 그럼 레오오빠가 저년이랑 입을 비비겠다는거에요?" 

"푸하하하하! 뭐 술게임이잖아." 


그때, 내 허리를 강하게 휘감는 흑곰수인. 갑작스런데다가 힘이 너무 세서 나는 그의 옆에 안기듯이 끌어당겨졌다. 갑작스레 코에 감기는 그의 체취에, 내 양볼에 따뜻한 피가도는게 느껴졌다.


"아, 아입니더." 


모두들 또 거기에 깜짝놀라 이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지가 하겠심더." 

"엑?" 

'정말로? '


왼쪽 손으로 내 얼굴을 부여잡은 흑곰수인이 뜨거운 숨을 뿜으며 얼굴을 가져다 댄다. 


'아니 정말로?' 


나는 뛰는 심장에, 붉어지는 얼굴로, 천천히 그의 커다란 입이 내 입 위로 닿았다가 떨어지는 걸 느꼈다. 그러자, 테이블에서 웃음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야! 그게 무슨 키스야! 뽀뽀지!" 

"어머어머 그래! 혀없어 혀?" 


그가 아직 내 허리를 강하게 감고 있었기에 나도 자연스레 한쪽 손을 그의 가슴팍에 대고 있었다. 이 친구. 왜이렇게 심장이 빨리 뛰는지 모르겠다. 술때문일까? 아니면 나때문에? 


"혀, 혀를 넣으라고예?" 

"그래! 혀를 넣어야 키스지!"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털을 가지고 있어 얼굴이 붉어진 티는 별로 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지금 상황에 굉장히 긴장하고 있 다는 것만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괘, 괜찮겠습니꺼?" 

"아, 아니 그쪽이야말로 괜찮아요?" 

"지, 지는, 하고싶습니더." 

"네?" 

"하, 하고싶다고예." 


그리곤, 그가 덥썩 나의 입을 물듯이 얼굴을 들이민다. 벌린 입으로 끈적하고 커다란 혀가 밀려들어온다. 아직 술맛이 담긴 쌉싸래한, 그런 맛의 키스다. 그러나, 나는 생전 처음느끼는, 나를 향해 가슴을 뛰는 수컷의 키스에 이상야릇한 감정을 느끼며 그의 커다란 품속에 몸을 맡겼다. 박수 소리와, 함성소리가 요란했지만 마치 물속에 잠긴듯 아득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으겍!" 


힘조절을 잘못한 탓에, 그가 내 허리를 너무 강하게 끌어안아 내가 놀라서 입을 닫아버린것이다. 혀가 살짝 깨물린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서 순간적으로 나를 밀었다. 나는 중심을 잃고 그만 쓰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푸하하하하하!" 

"어머! 쟤네 뭐하니?"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당황해서 나를 안아들듯이 일으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나는 비뚤어진 안경을 고쳐썼다.


"아이고, 잘못했심더. 깜짝 놀라가...어디 다친데 없지예?" 

"아, 아뇨. 내가 미안하죠. 혀 괜찮아요?" 

"예. 괜찮심더." 

"야! 니네 뭐하냐! 자리 들어오고 2번이랑 3번 트월킹 50초!" 


레오형 옆에 앉아있던 사나운기세의 스핑크스 고양이수인이 몸을 일으켰다. 


"어머 씨발!"

"나와 이년아. 내가 이태원 핫핑크 섹시비치의 정수를 보여줄게!"


그렇게 웃고 떠들며 한참이 지나고나서야 모임이 끝났고, 우리는 차가운 새벽공기가 내린 술집 바깥으로 나섰다. 조용했다. 술에 취해 몸도 가누지 못하는 대부분의 수컷들은 택시를 잡겠다며, 2차를 가겠다며 삼삼오오 헤쳐 몇 명 남지 않았다. 


"괜찮아?" 


레오형이 흑곰수인과 내 곁으로 다가와 물었다. 나도 술을 꽤나 마셔 정신이 없는데, 레오형은 처음 그모습 그대로 단정했다. 나는 형 앞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몸을 곧게 폈지만, 이내 땅과 하늘이 제멋대로 돌아가는 느낌에 휘청했다. 그런 나를 레오형이 먼저 잡아 주려 했지만, 내가 느낀건 아까의 푸근하면서도 따뜻하고, 단단한 흑곰수인의 품이었다. 


"많이 드셨네예. 댁이 어디십니꺼." 

"어, 아냐. 동생. 내가 데려다줄게." 


말도 잘 나오지 않지만, 흐릿한 시야에 나를 안고 있는 흑곰수인과 그 옆에 레오형이 들어왔다. 


"아임니더. 지가 데려다 드리겠심더." 

"하하하!" 


레오형이 크게 웃었다. 


"고집이 세네, 동생. 첫눈에 반한 사람처럼." 

"맞심더." 


도대체 이 수컷이 뭐라고 하는건지, 나는 그냥 몰려오는 어지러움에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때는, 집이었다. 나는 입이 쩍쩍 달라붙는 갈증을 느 끼며 간신히 몸을일으켜 냉장고를 열고 물을 꺼냈다. 시계를 보자 오후 두시다. 그리고, 갑자기 울려대는 전화기에 나는 깜짝놀라 있다가 전화 를 들었다. 


'단후어너ㅣㄱ' 


한번도 보지못한 번호와 이름이었다. 내가 이렇게 저장을했다고? 나는 아리송해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아, 이제야 받네예." 


전화기로 들려온 목소리에, 어제의 왕게임이 기억났다. 


"어, 어, 제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요?" 

"기억 안나십니꺼? 지가 데려다주면서 큰일날까봐 번호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꺼." 

"그, 그랬나요?" 

"그리고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오늘 밥먹자고 하셨는데, 그것도 기억 안나십니꺼?" 

"아, 그...그랬죠?" 

"와 진짜 섭섭합니다. 내 혼자 설레가지고 잠도 제대로 못잔거지예." 

"아, 아니에요! 나도 기억나요. 음...그럼 우리..." 


나는 헐레벌떡 세면대로 가 푸석푸석한 얼굴에서 눈꼽을 떼며 말했다. 숙취가 남아있었지만, 아득히 느껴지는 심장고동이 기분좋았다. 거울에 비치는 햇살이 참 맑은, 좋은 날이었다.


"혜화에서, 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