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부순애물 채널

궤도




한 시간 이르다.


네가 이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는 시간보다 한 시간 이르다.


나는 따뜻한 커피를 받아 들고, 문을 열고 가게를 나선다.


너의 커다란 발자국이 보이는 것 같아서, 커다란 보폭을 흉내내며 걷는다.


가을이 오고 있는지, 거리엔 노란 은행잎들이 조금씩 떨어져 있다.


너의 햇살같은 갈기를 닮은 그것들을 따라, 나는 걷는다.


익숙한 마트엔 트럭에서 과일을 분주히 나르는 점원들이 보인다.


그 중 누군가는 나에게 인사를 한다. 너와 자주 들렀던 곳이니, 내 얼굴을 기억하는 것이겠지.


맞은편에는 내가 너를 끈질기게 졸라서 사 먹었던 핫도그 집이 보인다.


살이 쉽게 붙는 체질이라 안된다고 한사코 거부하면서도, 한 입 먹고나선 감동받은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던 네가 생각난다.


지나쳐서, 계속 걸어간다.


손에 든 커피가 차갑게 식어갈 때 즈음, 나는 지하철 역으로 내려가 개찰구에 카드를 댔다.


우리가 함께 갔었던 극장이 있는 쇼핑몰로 향한다. 


덩치가 워낙에 큰 너여서, 고를 수 있는 브랜드는 많이 없었지.


마네킹이 입고 있는 코트를 본다. 키도 크고, 짙은 가을의 산같은 깊은 눈을 한 너에게, 정말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불편해! 이런거 말고 츄리닝이나 보러 가자!’

‘너 트레이닝복만 똑같은게 색깔 별로 몇 벌인지나 알아? 그만 좀 사 입어!’


몇 달 전의 우리가 탈의실 앞에서 나눴던 대화를 떠올린다.


잘 어울리기만 하는데, 움직이기 불편하다며 탈의실 밖인데도 셔츠단추를 풀어 헤치는 너.


당황한 내가 네 큰 몸을 다시 떠밀어 탈의실 안으로 들여보냈던 모습이 스쳐, 살짝 웃었다.


매장을 나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재잘대며 미소를 띈 채 걷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그 사이로 우리가 남겼던 그림자를 따라, 계속해서 걷는다.


‘이걸로 주세요!’

‘너 진짜 또 산다고?’

‘아~ 살때 됐어! 그거 다 헤진지가 언젠데?’


막무가내로 점원의 손에 카드를 쥐어주며 호탕하게 웃는 너와 고개를 젓던 내가 있던 스포츠 브랜드 매장을 지나서, 걷는다.


‘귀엽네.’


진열되어 있는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는 나를 보며, 네가 말했었다.


‘이쪽 좀 봐봐.’


사랑스러운 것을 보는 얼굴로, 휴대폰으로 나를 찍는 너를 기억한다. 


한 번 떠올리기 시작한 추억은 화려한 불꽃놀이 처럼, 돌아갈 방법도 없는데 내 시선을 잡아 두기에 나는 잰 걸음으로 쇼핑몰을 빠져 나왔다.


“어이구, 오랜만에 오셨는데 혼자 오셨네요?”


그러던 나는 퍼뜩, 정처없이 들어가 앉은 식당에서 메뉴판을 건네며 수건으로 손을 닦는 익숙한 인상의 주인장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아, 네, 네. 이걸로 주세요.”

“얼마전엔 같이 오시던 분도 혼자오셔서 똑같은거 드시던데. 이게 가끔 땡겨요. 그쵸?”


주인장의 너스레 가득한 말에 나는 온몸의 피가 빠르게 돌며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을 느꼈다.


“혼자 왔다고요?”

“네~ 무슨 안좋은일이 있으신가, 손님처럼 얼이빠져서 오시더니 그릇은 싹싹 비우고 가시더라고요?”


너와 헤어지고 나서, 나는 계속해서 우리의 기억을 가운데 두고 빙빙 돌고 있었다.


멀어져야 했는데 마음은 먹어도 몸이 따라가질 못했다.


나는 그저, 네가 나를 볼까 두려워, 내가 너를 떠나지 못한게 들킬까 부끄러워서


조금 늦은 시간, 한참 이른 때에 우리가 다녔던 기억을 따라 걸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기억은 흐려지고, 나를 끌어당기던 인력은 사라졌을거야.


네가 좋아했던 브랜드를 잊고, 자주 가던 가게가 사라지고,


함께 보았던 영화가 기억나지 않고, 끝내는 너의 얼굴마저 잊어갔겠지.


그게 두려웠던걸까. 아니면, 이 궤도의 반대편에 네가 있길 바랬던걸까.


그래서 언젠가는, 서로 다른 속도가 맞물려 다시 만나게 될 순간을 기다렸던걸까.


돌아오는 길에, 나는 휴대폰을 들고 아직 삭제하지 못한 너의 번호를 누른다.


통화버튼을 누르면 네가 받을까. 손끝이 차갑다. 입끝이 달싹 마른다.


“안녕히 가세요!”


고개를 든 곳에 네가 서 있다. 트레이닝 복을 입고, 입에는 핫도그를 문 채로.


나를 보고 있다. 나도 너를 보고 있다.


너는 복잡한 표정을 짓다가, 입에 문 핫도그를 빼고, 한참을 나를 보다가 입을 연다.


“어, 그게, 맛있더라. 네 말대로.”


나는 웃는다. 간신히 울음을 참아내고 너에게로 다가간다.


“잘 지냈어?”


우주를 거니는 평행한 별처럼, 우리는 궤도를 벗어나 다시 함께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