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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화


양이 많아서 분단해서 올리고 있음


하편 이후로 이야기 더 있는데, 천천히 올리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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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나스의 지하로 들어간 여행자는 엔죠가 건네준 백야국 장서를 들고 게시의 서로 천천히 다가갔다.


오는 길 중간마다 몇몇 멜뤼진들이 여행자가 든 석재로 된 책에 흥미를 보였지만,

여행자는 그때마다 별거 아니라며 겨우겨우 그들의 시선을 피해 게시의 서에 도착했다.


“엔죠란 녀석은, 예나 지금이나….”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사람, 아니.. 마물은 언제나 이런 식의 결말을 좋아했었다.


그렇기에 그의 농간에 놀아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든 여행자는,

묵직한 무게감의 백야국 장서를 천천히 게시의 책 위에 놓았다.


‘...’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럼 그렇지, 마물 따위의 말을 믿는 게 아니었어….”


그렇게 게시의 서 옆에 비치된 의자로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겨 의자에 착석한 여행자는,

게시의 서 위에 올려진 백야국 장서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근데, 어째서 백야국 장서인 거지?

그 녀석, ‘방출’이니 뭐니, 이상한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고….”


여행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엔죠의 뜻을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혼잣말을 몇 분 동안 중얼거린 여행자는, 이내 머리를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


“으- 그 녀석,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책상 위에 엎어진 여행자는, 곁눈질로 게시의 서를 물끄러미 쳐다봤지만,

게시의 서는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미동이 없는 게시의 서를 보게 된 여행자는, 밀려오는 화를 참지 못하고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게시의 서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럼 그렇지, 그놈을 믿은 내가 바보지. 

어휴, 그냥 느비예트에게 돌아가야-”


라고 외치며 백야국 장서를 회수하려 하던 때였다.


“..어?”


장서를 회수하려 손을 뻗은 여행자는 

방금까지 느껴진 딱딱한 촉감과는 다른 이질감에, 서둘러 손을 책에서 떼었다.


“뭐, 뭐야?”


책에서 느껴진 건 감촉이 아니었다.

여행자의 손은 장서의 끄트머리에서 천천히 사라졌다, 다시 손을 떼면 돌아왔다.


책에 있는 건 감촉이 아니라…. ‘흡수’에 가까웠다.

마치 다른 세계의 이방인을, 자신의 세계로 인도하는 것처럼-


여행자는 백야국 장서 내부로 자신의 몸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빠르게 깨달았고,

불안하지만 호기심 가득한 마음으로, 천천히 자신의 머리를 장서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정보 한번 괴팍하게 주네.”


...여행자는 조금 불만이 쌓인 것 같았지만,


그렇게 천천히, 끝이 없는 심연으로 자신의 몸을 내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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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비예트? 이게 무슨….”


느비예트는 과학자를 폰타인 과학원으로 보낸 후, 폰타인 성의 사람들에게 최대한 높은 곳으로 대피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피 명령을 통보해야 할 집,

푸리나의 집에 노크했다.


그의 노크를 듣고 나온 푸리나는 갑작스러운 느비예트의 방문에 당황했지만,

평소와는 다른 느비예트의 진지한 모습에 부담감을 느낀 그녀였다.


“푸리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넌 여기 있으면 안 돼. 어서 성 위쪽으로 대피해.”


푸리나는 갑작스레 찾아온 것도 모자라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는 느비예트가 좋게 보이지 않아 심술이 났다.


“난 안가. 무엇보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도 안 해줬는데, 

다짜고짜 와서 대피하라니 그건 무슨 말이야?”


느비예트는 고집불통인 푸리나를 바라보며 턱에 손을 올리며 이야기했다.


“푸리나, 다름이 아니라….

폰타인에 새로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어쩌면 예언은 새 발의 피였을지도 몰라.”


느비예트의 대답에 더더욱 지금 상황이 알 수 없어진 푸리나는,

답답하다는 듯 느비예트에게 이야기했다.


“느비예트, 지금 상황을 요약해서 말해줄 수-”


“...그건 올라가면서 이야기하지. 시간이 얼마 없다 푸리나.”


이대로 푸리나와 실랑이를 계속했다간 그녀를 구할 수 없다고 판단한 느비예트는,

푸리나의 손목을 잡고 폰타인 광장에 배치된 엘리베이터로 그녀를 끌었다.


“느비예트? 놔! 이거 놓으란 말이야!”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당황한 푸리나는 

호숫가의 오리처럼 꽥꽥대며 소리 질렀지만,

느비예트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엘리베이터 안으로 옮겼다.


“느비예트, 설명-”


“푸리나, 천리의 징벌이 지금 폰타인을 향해 오고 있다.”


그렇게 또다시 느비예트의 입에서 나온 알 수 없는 말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푸리나는-


느비예트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푸리나?”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진 느비예트는, 

잔뜩 화난 얼굴로 씩씩대는 푸리나를 쳐다보았다.


“적당히 해! 아까부터 알 수 없는 말만 늘어놓고, 뭐가 그렇게 급한 건데?”


잔뜩 화가 난 푸리나를 보게 된 느비예트는, 

그녀 사과하며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사전 설명이 부족해서 미안하군,

폰타인 상공에 정체 모를 기둥 하나가 폰타인 쪽으로 떨어지고 있다.

폰타인 과학원의 과학자들이, 기둥이 만약 폰타인쪽으로 떨어진다면….

폰타인의 절반이, 지도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하더군.”


느비예트의 설명을 듣게 된 푸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다,

팔짱을 끼고 볼을 잔뜩 부풀리며 볼멘소리로 느비예트에게 이야기했다.


“진작 그렇게 설명해줬으면 됐지.”


푸리나의 볼멘소리에 자신의 행동을 반성한 느비예트는, 

푸리나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미안하군. 조금 감정적으로 대했던 것 같아 사과하지.”


푸리나는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느비예트를 보고 있는 것 또한 부담스러웠기에,

느비예트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고개 숙일 필요는 없어. 그냥 다음부터 안 그러면 되지.”


그렇게 푸리나의 말을 듣게 된 느비예트는 다시 고개를 들어 푸리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침울한 표정을 보게 된 푸리나는, 활기찬 표정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그렇게 문이 열리고 도착한 멜모니아궁은, 이미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렸다.


잿빛의 강 출신 사람 중 한 명이 소매치기하는 사소한 해프닝이 있었지만,

특별 순찰대대원이 빠르게 제압해 소매치기범을 묶어두고 있었다.


그렇게 시끌벅적한 멜모니아궁 외부를 돌아다니던 느비예트와 푸리나는,

비교적 한산한 멜모니아궁 뒤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멜모니아궁 뒤편엔 클로린드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고,

느비예트와 푸리나가 도착한 것을 본 클로린드는, 모자를 벗어 둘에게 짧게 경례했다.


“느비예트님, 의뢰할 것이 있다고 해서 왔습니다.”


클로린드는 경례를 마친 후, 모자를 정리하며 느비예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느비예트는 클로린드의 대답에 푸리나에게 왼손을 들어 잠깐 나가 있어 달라고 손짓했고,

푸리나는 느비예트의 손짓을 이해하고는 계단 위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클로린드씨, 라이오슬리씨와 약간 친분이 있던 것 같습니다만….”


“메로피드 요새의…. [방주]를 구해달라는 말씀입니까?”


느비예트는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자신의 목적을 알고 있는 클로린드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생각보다 소문이 빨리 퍼진 모양이군요.”


“그럼, 조속히 메로피드 요새로 이동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뒤를 돌아 움직이려는 클로린드를 본 느비예트는,

클로린드를 잠깐 멈춰 세웠다.


“잠깐, 혹시 시간이 된다면,

밖에서 제 의뢰를 해결하고 있는 여행자도 찾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여행자는 아마 오똔산에서 활동하고 있을 테니,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면 여행자를 반드시 성으로 데리고 와 주십시오.”


클로린드는 자신을 불러세운 느비예트의 추가적인 의뢰를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두 번째 의뢰도 받게 된 클로린드는, 서둘러 메로피드 요새로 뛰어갔다.


“...느비예트, [방주]라니?”


그녀와 이야기가 끝난 후, 푸리나를 다시 데리러 오려던 느비예트였지만,

푸리나는 계단 근처에서 그들이 하는 대화를 엿듣고 있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궁금증이 생긴 푸리나를 무시할 수 없던 느비예트는,

푸리나에게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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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고 깊은 심연으로 떨어지던 여행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심연이 점점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여행자는 점점 빠른 속도로 추락하고 있음을 느꼈고,

반대로 심연은 그런 여행자의 두려움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

끝없는 우주를 보여주며 여행자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렇게 점점 더 깊고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던 여행자는, 

이내 끝을 알 수 없는 별바다로 빠져드는 느낌을 받았다.


‘풍덩-!’


폰타인의 물과는 다르게 숨이 쉬어지지 않는 물이란 것을 눈치챈 여행자는,

수면 위로 팔과 다리를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빠져나가려 했고-


그렇게 수면 위로 도달한 여행자는 거친 숨을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쿠헥- 콜록, 콜록.”


중간중간 숨을 쉬지 못해 마시게 된 물이 여행자의 입안에서 흘러나왔다.

바닷물의 짠맛도, 물의 깊은 맛도 아닌 그저 무미 무취의 정체 모를 액체….


기분 나쁜 맛의 액체는 여행자가 자신이 마신 양 만큼을 토해내기 전까지,

여행자의 입속에서 끝을 모르고 새어 나왔다.


그렇게 한바탕 속을 게워낸 여행자의 시선이 도달하게 된 곳은,

바다 위의 한 외딴 섬 위에 놓인,

매우 큰 유적 같은 건축물을 보게 되었다.


연하궁의 건축 양식과 굉장히 비슷했던 유적은

석재로 둘러싸인 웅장하고 화려한 건물이었지만,


관리가 오랫동안 된 것 같지 않은 듯 건물 주위를 보랏빛 넝쿨들이 휘감고 있었다.


여행자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을 그 건축물 쪽으로 향하게 하며 헤엄쳤다.


천천히, 호흡을 유지하며 가까스로 도달한 건물은, 

여행자가 물 위에서 본 것보다 훨씬 컸다.


“우와….”


눈앞에서 일어난 불가사의한 현실에 감탄하게 된 여행자는,

자신의 몸을 힘겹게 일으켜 문 앞에 있는 발판을 밟고 몸에 남은 물기를 훌훌 털었다.


‘쾅-!’


발판을 밟고 조금 뒤,

무엇인가 큰 소리로 움직이는 듯한 소리와 함께 

여행자는 자신의 눈앞에 있는 거대한 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느꼈고,

그렇게 망설임 없이 천천히 건물 안쪽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문이 열리고 보인 풍경은 굉장히 놀라웠다.


여기저기 형체만 남은 사람들의 속삭임,

어두운 밖과는 다르게 태양처럼 빛나는 오벨리스크들이 천장에 하나씩 매달려있는 거대한 광장.


그러나 그런 밝은 빛과는 대비되는 생기 하나 없는 내부.


여기저기 금이 간 벽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보랏빛 넝쿨들이 내부까지 침투해 있었다.


여행자는 천천히 발을 건물 안쪽으로 내딛기 시작했다.


이곳저곳 부서지려는 발판들이 여행자를 종종 위험에 빠뜨렸지만,

천장의 오벨리스크가 밝게 빛나는 덕분에, 여행자는 어렵지 않게 위험한 부분을 피해 건물 중심부로 도착했다.


건물 중심부는 게시의 서와 비슷한 책 한 권이 스탠드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여행자는 이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무언가에 홀린 듯 책을 빠르게 펼치기 시작했다.


“뒤집힌 세계의 기원, 제1장?”


여행자는 책의 목차를 천천히 살피며 책자를 넘기기 시작했다.


누가 쓴 것인지 알 수 없던 책자는, 티바트가 생기기 전의 역사 일부를 담고 있는 듯했다.


[...그리하여 그들의 세계가 막을 내리고, 일곱 가지의 힘이 세계를 뒤집어 놓았느니라.]


그들의 세계, 일곱 가지의 힘.


정황상 마신 전쟁보다 훨씬 이전의 일을 다루고 있는듯한 내용이었다.


이들이 말하는 일곱 가지의 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던 여행자는, 

이내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불, 물, 풀, 얼음, 번개, 바위, 바람….”


지금 일곱 집정관의 체제처럼, 일곱 가지의 원소를 지칭하는 말로 보이는 일곱 가지의 힘.

그러나 그 이전, ‘세계를 뒤집어 놓았다’라는 정확히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었다.


여행자는 천천히 느비예트가 자신에게 이야기해 줬던, 고대용의 이야기를 곱씹기 시작했다.


과거에 일곱 원소를 지배하던 용들이, 모종의 이유로 힘을 빼앗겨

힘을 빼앗은 찬탈자에 의해 일곱 원소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이야기….


여행자는 그와 동시에 엔죠가 조금 전 말해주었던 ‘방출’이라는 개념에 대해 이 이야기를 대입하기 시작했다.


천천히 이론을 자신의 정보에 대입하던 여행자는,

이내 엔죠가 말했던 ‘너라면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의 말에 담긴 의미를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이런 것까지 예상했을 줄이야.”


여행자는 엔죠의 이론을 생각하며 천천히 책을 더 넘기기 시작했다.


[뒤집힌 세계의 힘은 위험하고, 극단적이다.

힘의 근원을 제거하는 별바다의 힘과는 다른 성질의 힘.]


그렇게 두 번째 장의 내용을 확인하고 빠르게 다음 장, 

또 다음 장으로 책을 넘기던 여행자는-


[하늘에서 내려온 뒤집힌 이치가, 만물을 부정하고 숙청했다.]


‘한천의 못’과 굉장히 유사한 점이 많은 [뒤집힌 이치]의 목차를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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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린드는 에피클레스 오페라 하우스 뒤쪽으로 가 메로피드 요새로 가는 통로 위에 올라갔다.


‘드르륵-’ 하는 돌끼리 쓸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내려가던 엘리베이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메로피드요새의 입구로 그녀를 데려갔다.


클로린드는 평소처럼 안내원에게 “라이오슬리를 만나러 왔다”라고 말하며,

수속절차를 기다리다 하늘의 기둥에 대해 천천히 생각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기둥.

갑작스레 폰타인 상공에서 나온 기둥은 폰타인 시민들을 당황하게 하기 충분했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왜 갑자기 생겨난 걸까?


..그러나 그녀가 아무리 생각해도 기둥이 생긴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포칼로스’의 계획 때문에 생긴 [한천의 못]이었기 때문에,

느비예트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은 원인조차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사색에 잠겨있는 클로린드를 마중하러 온 라이오슬리는,

심각한 표정의 클로린드를 두 눈으로 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클로린드? 평소랑 다르게 아주 진지한 얼굴인데.”


갑작스레 등장한 라이오슬리를 본 클로린드는 

자신의 모자를 고쳐 쓰며 짧게 인사했고-


라이오슬리에게 조용히 말했다.


“여기서 말할 내용은 아니야. 

잠깐 네 사무실로 갈 수 있을까?”


클로린드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상황임을 인지한 라이오슬리는,

클로린드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내며 자신의 사무실로 걸어갔다.


그렇게 라이오슬리의 사무실에 도착한 클로린드와 라이오슬리는,

자연스럽게 2층의 탁자에 둘러앉았다.


라이오슬리는 능숙하게 찻잔을 클로린드에게 들이밀었지만,

클로린드는 손으로 그의 행동을 제지했다.


“차를 거절할 정도면, 상황이 그렇게 좋진 않은 것 같군?”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클로린드가, 라이오슬리에게 여기에 자신이 온 목적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없으니 짧게 이야기하지.

라이오슬리, 너의 [방주]가 필요해.”


라이오슬리는 [방주]라는 소리에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지만,

자신이 바라보는 클로린드의 눈동자에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라이오슬리는 본능적으로 일반적인 상황이 아님을 눈치챘고,

클로린드에게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클로린드, 방주는 지금 점검 중인데….”


“한시가 급해. 얼마나 오래 걸리지?”


라이오슬리는 다급 해하는 클로린드의 태도를 보며 곤란해했다.

그녀의 태도는 이해가 갔지만, 이쪽의 상황도 녹록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마침 방주의 점검 날도 오늘로 끝이긴 했지만,

지금 당장 필요하다고 꺼내 쓸 정도의 상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음, 두 시간이면 충분할 것 같은데.”


라이오슬리는 클로린드의 눈치를 슬쩍 보며 이야기했다.


그런 라이오슬리의 태도를 본 클로린드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 빨리는 안되나? 당장 폰타인의 절반이 날아갈 위기인데.”


클로린드의 말을 들은 라이오슬리는 손을 턱에 올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폰타인의 절반이 날아간 다라….”


그녀의 말에 사색에 잠긴 라이오슬리는, 

클로린드의 얼굴을 바라보며 하나의 해결책을 제시했다.


“음, 15분이면 될 것 같네.”


라이오슬리의 말을 들은 클로린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에게 질문했다.


“2시간이라며?”


클로린드의 질문에 라이오슬리는 헛기침을 하며 그녀의 눈을 마주 보았다.


“메로피드 요새 인원을 전부 동원한다면, 못할 것도 없긴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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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구나.”


느비예트의 계획에 관해 전부 듣게 된 푸리나는, 

그의 계획을 천천히 정리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민들을 전부 대피시키는 게 먼저고,

그다음 예언의 날 때 사용했던 라이오슬리씨의 [방주]에, 

폰타인 시민들을 태워 대피시키는 게 마지막 계획이다.”]


푸리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계획에 대해 의문점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느비예트의 일 처리는 언제나 신뢰할 수 있었기에,

그의 말을 듣고 멜모니아궁 뒤편의 벤치에 앉아 대기했다.


그렇게 그의 계획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무렵,

하나의 궁금증이 생기게 된 푸리나였다.


푸리나는 느비예트에게 자신의 궁금증을 이야기했다.


“...느비예트, 지금까지 멜모니아궁에 도착하지 못한 폰타인 시민들이 있어?”


느비예트는 벤치에 앉아있는 푸리나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다,

그녀에게 대답했다.


“아직…. 푸아송 마을 사람들이 전부 오지 못했다.

하지만 오전에 잿빛의 강 지하의 가시 장미회 회원들에게 소식을 전달해 

지금쯤 구조작업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푸리나는 느비예트의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처럼, 또 한 번 푸아송 마을 사람들을 구하지 못할 줄 알았다.


푸아송 마을 사람들에게 푸리나는 달갑지 않은 존재겠지만,

푸리나는 그들과 생각이 달랐다.


그들도 백성이니까.


푸리나는 신의 직위를 내려놓은 지 꽤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단순한 연민이었을까?

아니면 속죄일까?


...사실 그녀에겐 명분 따위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생명의 소중함, 자신의 죄에 대한 부끄러움이 아닌-


그저, 자신이 사랑하는

자신이 지켜온 나라의 백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푸리나는 조용히 사색에 잠겨 예언의 날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재판대 위로 올라갔던 날,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의심했던 날.


그녀는 다시, 

아니 그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는 상황에 직면한 폰타인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 느비예트에게 질문했다.


“느비예트, 나비아 혼자선 푸아송 마을 사람들을 전부 구출하려면 버겁겠지?”


...갑작스레 자신에게 다가와 말을 건 푸리나의 태도에 위화감을 느낀 느비예트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당연히 그러겠지.

...푸리나, 설마?”


느비예트의 대답에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푸아송 마을로 뛰어가기 시작한 푸리나는, 

다급한 느비예트의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 전속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푸리나?”


당황한 느비예트는 주변의 그림자 수사청 대원에게 자신이 없어도 [방주]에 모든 사람을 태우라 명령했고,


그림자 수사청 대원은 짧게 경례하며 푸리나를 따라 달리는 느비예트를 바라보았다.


“두 분은 어딜 가시는 거야…?”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대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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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 모르겠다. 대체 나에게 뭘 보여주고 싶었던 거야?”


그렇게 책의 마지막 장까지 읽게 된 여행자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싸며 괴로워했다.


여행자가 얻어낸 정보는 다음과 같았다.


심연과 일곱 원소의 힘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심연은 본디 태초부터 존재했던 힘이었지만, 

그 힘을 증폭시켜 교단을 만든 건 알베리히 가문이었다.


...그리고 알베리히 가문은 일곱 원소와 대응되는 심연의 힘을 구축해냈다... 정도였다.


터무니없이 적은 정보에 머리가 아파오던 여행자는,

스탠드 위에 올려진 책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엔죠녀석…. 한천의 못을 막을 방법이 여기 있다고 나에게 책을 준 게 맞긴 한가…?”


엔죠는 자기 자신을 [별종]이라고 칭했던 적이 있다.

다른 심연교단조차 자신과 그렇게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고 한 적도 있었다.


그렇기에 반대로 여행자의 여정을 지켜보는 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엔죠를 다른 마물들보다 신뢰 하지 못했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덮고 주변으로 시선을 옮긴 여행자는, 천천히 천장을 바라보았다.


천장에는 오벨리스크 하나가, 다른 빛들과 다르게 위태롭게 매달려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곧 떨어질 것같이 아슬아슬하게 진자운동 하던 ‘백야’의 빛은, 여행자가 높게 뛰면 잡을 수 있을 듯, 없을 듯한 위치에 매달려있었다.


여행자는 책을 바닥에 내려놓고 힘차게 뛰며 오벨리스크의 빛을 훔치려 했다.


“이얏!”


그렇게 수어 번의 시도 끝에 빛을 손에 쥐게 된 여행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품속의 빛을 보게 되었다.


“후- 이게 뭐라고 이렇게 힘드냐….”


그렇게 품속에 은은하게 빛나는 백야의 빛을 손에 넣은 여행자는,

이내 이 빛이 자신이 볼 수 없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행자는 손안에 있는 빛을 들어 주변을 비추자, 조금 전에는 볼 수 없던 스탠드 뒤의 통로가 하나 보였다.


사람 하나가 겨우 비집고 들어갈 만한 통로를 본 여행자는,

홀린 듯이 자신의 몸을 집어넣어 반대편 방으로 나오게 되었다.


“...이건?”


반대편 방은 세계 각국의 뒤집힌 신상들이 진열대에 진열된 인형처럼 정갈하게 배치되어 있었고,


심연 사도와 비슷한 형태의 조각상이 방 중심부에서 붉은빛 구체를 손에 쥐며 불길한 힘을 내뿜고 있었다.



이거,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몬드에서 봤던 뒤집힌 신상….”


심연의 마물들이 일곱 신상을 훔쳐 자신들의 유적에 거꾸로 매달았던 그 사건-


...무엇보다 다른 신의 신상들마저도 전부 거꾸로 매달려있었다는 게 여행자에겐 큰 충격이었다.


여행자는 마른침을 삼키며 천천히 정중앙의….

신상이라 부르기엔 조금 불결한 조각상에 다가갔다.



여행자는 붉은빛의 구체를 보며 책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뒤집힌 규칙의 못은, 본질적으로 별바다의 힘과 대비되는 힘이다.

우리는 층암거연 밑에서 이 못에 대해 연구한 적이 있다….”]


여행자는 천천히 붉은빛의 구체에 손을 뻗어 구체를 어루만졌다.


따뜻함, 차가움.

지독함, 상냥함.


서로 반대되는 개념들이 여행자의 몸을 천천히 좀먹는 듯했다.


여행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얼굴을 찡그리며 붉은빛의 원천에 손을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빛을 분해하는 것은 어둠이다….

반대로 어둠을 제거하는 것은 빛이요. 

그러나 그 둘은 항시 공존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세계가 뒤집혔다고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여행자는 붉은빛 가운데에 넣은 자신의 팔을 잔뜩 찡그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침식’


이라는 뜻에 걸맞게 자신의 손이 점점 검은색으로 물들어감을 느꼈다.


“윽-!”


갑작스레 찾아온 고통에 놀란 여행자는 붉은빛의 원천에서 손을 빠르게 떼었다.


붉은빛의 원천에서 손을 뗀 여행자의 팔은 천천히 검은빛에서 원래의 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의 상태를 본 여행자는 곰곰이 생각했다.


우선 자신의 눈앞에 놓인 이 붉은 빛은, 일곱 원소와는 다르다.

어쩌면…. 알베리히 가문의 유산 중 하나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붉은빛으로 다가가고 있었고,

자신이 읽었던 책의 정황상, 눈앞에 놓인 저 힘의 원천이….


[한천의 못]의 통제권을 빼앗을, 유일한 희망이라고 본능적으로 믿고 있었다.


“엔죠 녀석, 대단한 걸 나한테 주려고 했구나.”


그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여행자는, 다시 자신의 손을 붉은빛의 원천에 넣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다른 각도로 힘에 접근했다.


‘방출’


일곱 원소의 기본 원리는, 자신의 몸에서 힘을 끌어 발산하는 개념이다.


...그렇다면, ‘심연’의 원리는?


당연히, 반대되는 개념의 ‘흡수’ 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엔죠의 뜻을 완전히 이해한 여행자는,

자신의 몸을 힘의 원천에 맡기기 시작했다.


천천히 밀려들어 오는 힘이 자신이 몸에 넣었던 원소들과 충돌하는 느낌을 받게 된 여행자는,


중간중간 돌처럼 자신의 반대편 팔이 굳거나,

벼락에 맞은 듯 몸을 부르르 떨거나,

극독약을 마신 것처럼 고통에 울부짖다가,

강풍에 부닥친 것처럼 몸을 휘청이다가-


흐르는 물처럼, 자신의 몸 안의 원소들이 잠잠해짐을 느꼈다.


[“...우리는 우리의 터전을 되찾을 것이오, 만물을 기만한 신들을 심판할 것이니-”]


흐르는 새로운 힘의 성질을 만끽한 여행자는, 이내 숨을 고르며 두 눈을 똑바로 떴다.


[“...지금부터 우리는 이 힘의 원천을, ‘공허’라고 부르겠나이다-”]


정신을 차린 여행자는 천천히 자신의 손을 펴 자신의 손이 검은지 확인하다-

바닥에 비친 물웅덩이에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자신의 한쪽 눈은 붉은빛으로 빛나고 있었고,

자신의 오른손은 평소와 같았지만, 이질적인 느낌의 힘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방주(teyvat)’의 규율을 전면으로 부정하는,

일곱 원소와 대응되는 힘- ‘공허’를 얻게 된 여행자였다.


공허 – 별빛의 힘의 기본 구조는 간단했다.


상대에게 상해를 입히는 것이 아닌, 상대의 힘을 무력화 시키는 데에 정통한 이 힘은,

상대의 힘을 자신에게 ‘뺏어온다’라는 개념이었다.


여행자는 기본적인 이 ‘공허’ 의 힘의 원리를 자세히 알지는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이 힘을 어떻게 다루는지는 어렴풋이 느꼈다.


“...이 힘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행자는 여전히 엔죠의 뜻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얻은 지 얼마 안 된, 

그것도 일곱 원소와 반대되는 힘으로 어떻게 한천의 못을 막을 수 있을지 몰랐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값진 것이겠지.”


여행자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유적을 천천히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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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오슬리의 방주가 완성된 것을 본 클로린드는, 라이오슬리를 재촉하며 그에게 물었다.


“이대로 멜모니아궁 상공에서 얼마나 오래 날 수 있어?”


라이오슬리는 그녀의 질문에 허공을 바라보며 계산하며 중얼거리다-


“반나절 이상은 떠 있을 수 있어. 그 이상은 안 돼.”


라고 그녀에게 대답했다.


클로린드는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표시를 그에게 보여주었고,

라이오슬리는 똑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주의 출항 준비를 마쳤다.


“일단 메로피드 요새 인원 전부를 태울 거야.

폰타인 전역의 모든 사람을 태울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야.”


라이오슬리의 말을 들은 클로린드는 고개를 숙여 그에게 인사한 후,

발길을 돌려 메로피드 요새를 나가려 했다.


라이오슬리는 그녀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끼며 나가려는 그녀를 막아섰다.


“넌 안타?”


라이오슬리의 대답에 고개를 저은 클로린드는,

자신은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았다며 메로피드 요새를 떠났다.


“...참 별난 양반이네.”


라이오슬리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 메로피드 요새 인원을 모두 모아 천천히 [방주]를 출항시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