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genshin/101061100?category=%EC%B0%BD%EC%9E%91&p=1 - 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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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모니아궁이….”

 

여행자는 멜모니아궁의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없었다.

멜모니아궁은 완벽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말 그대로 ‘폐허’였다.

 

여행자는 멜모니아궁으로 추측되는 건물들의 잔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너진 대리석의 벽돌 뒤로 보이는 희미한 형체의 금빛 프로펠러.

정황상 라이오슬리의 방주마저도 파괴된 듯했다.

 

“...방주가 추락했어.”

 

여행자는 상황의 심각성을 파악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곤 머지않아 위화감을 느꼈다.

 

‘비명이 들리지 않아…. 설마….’

 

불길한 예감이 여행자의 머리를 스쳤다. 여행자의 직감은 최악을 가리키고 있었다.

 

여행자는 현실을 애써 부정하려고 노력했다. 

“설마, 설마….”라고 중얼거리며 시체만이 가득한 폰타인 성의 내부를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욱신거리는 왼 어깨를 붙잡고 한참을 뛰어다니던 여행자는, 

자신의 등 뒤에서 풍겨오는 서늘한 감각을 느꼈다.

 

“여행자! 뒤에!”

 

“-!”

 

순식간에 큰 발톱이 날아와 여행자를 덮쳤다.

 

여행자는 있는 힘을 다해 수계 늑대의 발톱 공격을 겨우 피했다. 

만약 페이몬의 외침이 없었다면 여행자는 이미 고깃조각이 되어있을지도 몰랐다.

 

“비켜-.”

 

여행자는 순식간에 자신의 오른팔을 불태워 수계 늑대의 턱에 주먹을 날렸다.

 

섬뜩한 소리와 함께 턱이 박살 난 수계 늑대는 그대로 고꾸라져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여행자, 괜찮아?”

 

“...덕분에 살았어.”

 

여행자는 페이몬의 대답에 겨우 정신을 차리며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킨 후,

성 내부의 생존자를 천천히 탐색하기 시작했다.

 

‘하다못해 단 한 명이라도 살아있었으면.’

 

여행자의 바람이었다. 신이 있다면 믿고 싶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여행자는 폰타인 성 내부를 구석구석 살폈다. 

 

온갖 곳에서 악취가 났다. 

생활 쓰레기와 음식물에서 나는 냄새 따위가 아닌, 

생물이 죽어가는 악취가 여행자의 코를 찔렀다.

 

여행자는 있는 힘껏 자신의 코를 틀어막았다. 

숨을 쉴 때마다 자신의 입속으로 피가 한가득 들어오는 듯한 비릿한 맛이 계속해서 느껴졌다.

 

여행자는 어느새 폰타인 성을 반 바퀴 돌며 생존자를 수색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발견한 시체들이 하나같이 하반신이 없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았다.

 

“...취향 한번 고약한 녀석들이네.”

 

...분명 그 늑대들의 짓일 것이다.

 

여행자는 몰려오는 혐오감을 참고 성 내부를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생존자를 수색하며 폰타인 성을 걷던 바로 그때였다.

 

“...여행자, 저거….”

 

페이몬의 시야에 발견된 것은 피투성이의 웅덩이였다.

 

“뭔가 발견한거라도 있어?”

 

여행자는 페이몬의 대답에 웅덩이의 중심부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

 

여행자는 잠시 침묵했다. 피투성이의 웅덩이 위에는 둥그런 무언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여행자는 이 물건의 정체를 알고 있다. 

아니, 알면서도 애써 부정하려고 노력했다.


“...모자.”

 

폰타인 성 안에서 모자를 쓰는 시민들은 매우 많다.

신사와 숙녀,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려는 용도로 사용되는 모자는, 

그 수와 형태가 수천여 가지는 되었다.

 

여행자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눈앞에 놓인 모자의 생김새를 보며 절망했다.

 

피 웅덩이 위에 떠 있던 모자의 주인은-

 

“...이거, 푸리나거 아니야?”

 

페이몬의 대답에 여행자는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실감 나지 않기 시작했다.

 

“...설마.”

 

여행자는 피 웅덩이 위에 놓인 그녀의 모자를 천천히 집어 들었다. 

확실히 그녀의 것이었다.

 

군청색의 모자 위에 수없이 놓인 장식들.

 

그녀의 모자는 군데군데 피로 물들어 갈색빛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괜찮아. 아직 모습이 발견된 건 아니니까, 찾으면 될 거야. 찾으면….”

 

여행자는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피 웅덩이 주변을 둘러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밖으로 흥건하게 피를 흘리는 건물을 찾게 되었다.

 

“...”

 

여행자는 마른 침을 삼키며 빠르게 건물의 문 앞까지 뛰어갔다. 

 

건물의 문은 짐승이 할퀸 자국이 군데군데 나 있었고, 

‘문’이라는 기능을 더 이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어 있었다.

 

여행자는 문 안쪽을 살펴보려 했지만, 

불타는 연기와 강렬한 빛 속에서 그림자를 드리운 내부는 쉽사리 어둠을 걷어주지 않았다.

 

‘이곳에서 뭔가 끔찍한 일이 있었어. 대체….’

 

여행자는 문을 천천히 열어 온 대기에 퍼지는 짙은 피비린내를 맡았다. 

 

죽음의 냄새.

 

조금 전까지 거리에 퍼진 냄새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수십 명은 죽어야 날 것 같은 짙은 피비린내가 여행자의 입속을 맴돌고 있었다.

 

그렇게 열린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이 붉은색으로 얼룩진 바닥을 천천히 비추던 그때였다.

 

“우욱-!”

 

여행자의 두 눈엔 하반신이 없는 사람들과 아이들, 그리고-

 

‘그녀’의 시체를 보게 되었다.

 

여행자의 위 속에서 두려움이 들끓었다. 

서늘할 정도로 차가운 감각이 온몸을 짓눌렀다.

 

“우웩, 콜록-!”

 

여행자는 참지 못하고 두려움을 쏟아냈다. 

바닥의 붉은빛 액체가 위산에 섞여 혐오감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갑작스레 빈속을 게워내는 여행자의 모습을 본 페이몬은 두려움을 느끼며 말을 절었다.

 

“....여행자? 왜 그래?”

 

“페이몬, 오지…. 마….”

 

여행자의 두 눈이 떨렸다. 식은땀이 여행자의 얼굴을 빠르게 적셨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여행자는 애써 눈 앞에 펼쳐진 현실을 부정하려 했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을 부정할수록 점점 비참해지는 것은 자신이었다.

 

붉은빛으로 물들었지만, 여전히 빛나는 그녀의 머리카락.

양손에 쓰인 검은색과 흰색의 장갑-

 

여행자는 말끔하게 잘려나간 그녀의 허리춤 아래로 금빛 혈액이 조금 굳어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금빛의 비릿한 혈액의 맛이 여행자의 입가에 다시 맴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불쾌한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느낌이었다. 

 

...꿈인가? 현실이 아닐까?

이전에도 이런 지독한 악몽은 수도 없이 꿔왔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것 아닌가?

 

‘아니야, 꿈인가? 지독하기도 하지. 빨리 깨어났으면-’

 

여행자는 이전에 페이몬에게 장난삼아 들었던 말이 있었다. 

 

[“꿈인지 아닌지 알아보려면, 뺨을 때려보면 알 수 있어!”]

 

여행자는 순간 자신의 어깨에 묶여 겨우 흘러나오는 피를 막은 수풀을 바라보았다.

페이몬이 묶어준 것이었다. 이것을 보자마자 그녀에 대한 왠지 모를 신뢰감이 생겨났다.

 

‘그래, 페이몬은 거짓말을 한 적이 없어, 그러니까-’

 

여행자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오른쪽 뺨을 손바닥으로 한 대 쳤다.

 

“짝-!”

 

얼얼한 감각이 얼굴로 서서히 퍼져갔다.

 

이상하다. 분명 이정도로 끔찍한 게 현실일 리가 없잖아.

 

“짝-!”

 

스스로 한 대 더 때렸다. 이전보다 더 아픈 쓰라림이 뺨 전체를 적셨다.

 

“...여행자?”

 

페이몬의 걱정 어린 한마디가 귓가를 스쳤다. 그러나 여행자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얼얼한 감각때문일까.

아니면 먹먹한 귓소리 때문일까?

 

“짝-!”

 

그런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계속해서 자신의 뺨을 때릴때마다 아픔이 점점 커져갔다.

 

“...어라, 보통 꿈이라면 아프지 않을텐데...?”

 

여행자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더 이상 일어날 힘조차 남지 않았다.

 

어느샌가 뜨거운 액체가 자신의 뺨을 적시고 있었다.

 

“어째서….”

 

이제야 깨달았다. 눈앞에 보이는 건 현실이다.

 

하지만 비현실적이다. 

 

아니 애초에, 내가 겪고 있는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이 현실이 맞긴 한 걸까?

 

그래, 수메르때처럼 꿈일까?

 

꿈이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여행자, 대체 뭘 봤길래-”

 

페이몬은 점점 미쳐가는 여행자를 바라보며 겁에 질렸다. 

 

하지만 그녀는 여행자가 무서운 게 아니었다. 

 

그저 여행자가 바라보고 있는 문 안쪽의 상황이,

그들이 생각했던 ‘최악’을 보여주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용기가 나지 않았다.

 

“....”

 

한참을 “아니야”만 반복하던 여행자는 고개를 푹 떨구며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았다.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니, 꿈이어야 했다.

 

여행자는 다시 한번 문 안쪽의 처참한 광경을 두 눈으로 바라보았다.

 

비릿하게 풍겨오는 강한 피비린내.

다른 시체들 사이에 뒤섞인 ‘그녀’.

 

“우욱-!”

 

순식간에 몰려온 혐오감이 여행자를 다시 한번 덮쳤다.

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여행자는 쓰디쓴 신맛이 자신의 입속에 맴도는 것을 느꼈다.

 

여행자는 한동안 흐려지는 시야를 붙잡고 계속해서 혐오감을 뱉어내었다.

 

어느새 정신을 차린 여행자는 바닥을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흥건한 바닥이 자신이 뱉어낸 위액과 섞여 밝은 빛의 붉은색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빈속을 게워낸 여행자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져 갔다. 

왼쪽의 어깨에선 이미 치명상일 정도로 혈액이 쏟아져나왔다.

 

손가락 끝이 차갑고, 뱃속이 얼얼했다. 당장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았다.

 

“...당신이 여행자입니까?”

 

점점 흐려져 가는 시야를 붙잡던 여행자는 먹먹한 소음 속에서 한가지의 목소리를 찾아냈다.

 

페이몬인가? 

아니다. 그녀는 이렇게 굵은 목소리를 가지지 않았다.

 

남성? 라이오슬리? 리니?

아니다. 그들의 목소리와는 다르다. 혹시 생존자인가?

 

여행자는 점점 강렬해지는 목소리에 흐려지는 정신을 겨우 붙잡고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여행자? 맞습니까?”

 

자신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히 남성의 목소리였지만,

우아하고 기품있는, 현실과는 사뭇 동떨어진 목소리였다.

 

여행자는 흐릿한 시야를 뒤로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천천히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누구?”

 

“...직접 만나 뵙는 건 처음이네요.”

 

뒤편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사람은 다름 아닌 붉은 머리의 청년이었다.

 

여행자는 반사적으로 청년의 인상착의를 훑었다.

 

붉은 머리, 새하얀 피부.

 

천으로 된 새하얀 색의 옷을 입고 있는 청년은,

확실히 폰타인 성의 시민이 아니라고 느껴졌다.

 

“...당신, 폰타인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여행자는 갑작스럽게 나타난 남자를 경계했다. 

순식간에 오른손을 허리춤의 검에 가져다 대자, 

붉은 머리의 청년은 양손을 들어 여행자에게 손사래 치며 이야기했다.

 

“여행자, 전해드릴 말이 있습니다.”

 

청년은 갑자기 검을 빼든 여행자에게 두 손을 들며 항복했다. 

 

여행자는 두 손을 든 그의 허리춤을 빠르게 훑었다.

청년은 별다른 무기를 숨긴 것 같지 않아 보여 경계를 풀던 그 순간이었다.

 

“무슨 말을…. 윽-!”

 

지끈거리는 통증이 머리에 전해져왔다. 아무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다.

 

여행자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검을 내리꽂아 몸을 지탱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의식이 점점 여행자를 어둠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거봐요, 무리하지 마십시오. 시간이 없습니다.”

 

“...빨리 말해.”

 

여행자의 대답에 붉은 머리의 청년은 자신의 품속에서 동그랗게 생긴 물건을 꺼내며 여행자에게 건네주었다.

 

여행자는 여전히 청년을 의심하며 검을 바닥에 고정한 후, 

오른손으로 공중에 던져진 물건을 건네받았다.

 

“이건….”

 

여행자가 건네받은 물품은 다름 아닌 은빛의 회중시계였다.

 

똑딱, 똑딱, 똑딱.

 

똑딱거리는 소리와 함께 천천히 초침이 움직이는 회중시계는,

한눈에 봐도 꽤 값이 나가 보였다.

 

“필요할 겁니다. 가지고 계세요.”

 

여행자는 받아낸 회중시계를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평소에 봐왔던 회중시계와 조금 다른점을 알아내었다.

 

똑딱, 똑딱, 두근-, 똑딱-

 

마치 심장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똑딱거림과 동시에 회중시계가 천천히 맥동하고 있었다.

 

그 힘은 희미했지만, 확실히 심장의 두근거림과 비슷한 느낌의 맥동이었다.

 

“이게 왜 필요한 거야? 이 시계가 뭔데?”

 

“여행자,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전부 믿지 않아도 좋습니다.

...들어보시겠습니까?”

 

“...말해봐.”

 

여행자는 청년의 간곡한 부탁에 자신의 오른손 위에 놓인 회중시계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기분 좋은 파동이 천천히, 조금씩 희미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청년은 시계를 만지작거리는 여행자를 바라보며 조용히 한숨을 쉬다가,

이내 여행자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행자, 예언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 모든 것을 되돌리려고 당신에게 온 겁니다.”

 

여행자는 청년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여행자가 자신의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말을 이어갔다.

 

“지금 말하기엔 복잡하지만, 언젠간 모든 걸 설명하겠습니다. 그러니-”

 

청년의 목소리가 떨렸다. 여행자는 그의 호흡을 천천히 눈으로 좇았다. 

 

어딘가 먹먹해 보이는 그의 말투. 

그리고 자신이 내뱉은 말을 정말 상대가 믿어줄까 싶은 확신이 없는 목소리.

 

여행자는 그의 생각을, 마음을 천천히 읽고 있었다.

그를 믿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또 못 믿을 건 또 뭔가.

 

갑작스레 나타나 뭔가를 강요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기억 속에 있어 좋지 못한 사람 들 뿐이란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청년은 조금 달랐다.

 

한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 망설이지만 확실한 목소리-

 

그렇기에 여행자는 청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금이나마 그를 믿게 되었다.

 

“여행자. 시간을 짊어지고, 운명을 구해주세요.”

 

“...싫다면?”

 

청년은 여행자의 단호한 대답을 예상하였다. 

그는 스스로 말재간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수단과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전 당신이 거절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무엇보다 그도, 

자신이 사랑하는 지상 위의 백성들이 이런 식의 최후를 맞이하는 것은 원하지 않았다.

 

“‘그녀’의 운명을 구할 사람은 당신밖에 없습니다.”

 

“‘그녀’라면….”

 

여행자는 그의 대답에 무심코 자신이 조금 전 바라보았던 문 안의 참상을 되돌아보았다.

 

짙은 피비린내.

 

여행자는 순간 자신이 자각하지 못한 냄새가 코 안쪽까지 찔러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여행자, 당신이 포기한다면-”

 

“할게.”

 

청년은 여행자의 단호한 대답에 조금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여행자를 어떻게든 설득시켜야 했지만,

흔쾌히 자신의 제안을 수락한 여행자의 태도가 오히려 의아하다고 느꼈다.

 

“...여행자. 길고, 어둡고, 힘겨운 싸움이 될 겁니다. 

그 누구도 당신의 노고를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그러니-”

 

“상관없어. 지금 내 뒤에 있는 사람도…. 그랬었거든.”

 

그는 여행자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그러나 여행자의 입가에서 슬픔이 묻어나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분명 여행자는 뒤를 돌아 문 안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눈을 바라보지는 못했지만, 분명 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말이야, 네가 날 속일 사람이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겠지.”

 

여행자는 다시금 고개를 돌려 청년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의 예상대로 여행자의 눈빛엔 슬픔이 담겨있었다.

 

“그렇지?”

 

청년은 여행자의 각오를 느꼈다. 

흔쾌히 받아준 만큼, 자신도 노인을 빠르게 설득해야 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뭘 해주면 되는거야? 다시...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는거야?”

 

여행자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어딘가 기대되는 말투.

그러나 그만큼 슬픔에 잠긴 목소리.

 

청년은 여행자를 실망시키고싶진 않았다. 하지만 그도 정확한 해결법을 몰랐다.

 

운명이 지워지면, 다시 재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천리’의 권능이 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단인 자신조차도 힘을 제대로 쓸 수 없는데, 

일반인인 여행자가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까?

 

청년은 여행자를 이 거대한 소용돌이에 끌어들인 것을 잠시나마 후회했다. 

 

물론 여행자에게 있어 이 모든 일을 잊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운명은, 너무 잔혹했다.

 

...그러나 청년은 반대로 여행자의 입장을 생각했다.

 

오히려…. 여행자에게 있어 이 끝없는 순환의 굴레는,

그냥 폰타인을 버리고 여행을 떠나는 운명보다 훨씬 잔혹할 것이다.

 

‘...젠장,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어르신을 설득하는게 더-’

 

청년은 그렇게 한참을 생각하다, 눈앞의 여행자가 비틀거리는 것을 보게 되었다.

 

“...여행자? 괜찮아?”

 

건물 뒤에서 한참을 숨어있다 나온 페이몬이 쓰러지기 직전인 여행자를 붙잡았다.

 

여행자의 얼굴은 몰라보게 창백해져 있었다.

수풀에 묶인 왼 어깨 사이로 피가 멈출 줄 모르고 흐르고 있었다. 

꽉 묶인 풀이 순식간에 풀어진 것 같았다. 

이대로 가면 폰타인은커녕, 여행자도 구하지 못할 것이다.

 

“거기 빨간 머리 양반! 이 사람 좀 구해줘! 빨리!”

 

청년은 페이몬의 대답에 부랴부랴 달려와 여행자를 부축했다.

그는 여행자의 손목에 맥을 짚었다. 맥동이 점점 사그라들고 있었다.

 

이대로는 안 된다. 적어도 ‘시계’를 사용하려면, 죽기 전에 태엽을 돌려야 한다.

 

그는 재빠르게 여행자의 오른손에 쥐어진 회중시계의 태엽을 돌리며 소리쳤다.

 

“여행자, 정신 차리십시오. 제 말 들리십니까?”

 

그는 여행자의 귓가에 대고 소리쳤다. 

그러나 여행자의 두 눈빛은 천천히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여행자? 장난치는 거 아니지…?”

 

어느새 페이몬은 울상이 되어 여행자의 팔을 힘껏 흔들고 있었다. 

 

청년은 여행자의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뒤로 돌려 여행자가 지나온 거리의 바닥을 바라보았다.

 

“...”

 

바닥엔 일직선으로 핏방울이 떨어져 굳어있었다. 

그리고 그 핏방울들은 자신의 시야 밖까지 나 있었다.

 

그는 설마 하는 생각에 반대편 바닥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반대편 바닥도 마찬가지로 핏방울들이 조금 삐뚤빼뚤하게 떨어져 있었다.

 

“이 몸으로 한 바퀴를 돈 겁니까…?”

 

청년은 그제야 여행자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의 제안을 흔쾌히 승낙했는지 알 수 있었다.

 

여행자는 청년을 믿지 못한다는 말투로 그를 쏘아붙였지만,

반대로 그만큼… 절박했을 것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다 꺼져가는 여행자의 숨소리를 들으며, 여행자의 귓가에 천천히 속삭였다.

 

“...여행자, 첫 번째는 태엽을 돌린 다음-”

 

태엽이 천천히 공중에 흩어진 금빛의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그 시계, 정체가 뭐야?”

 

페이몬의 질문이었다. 그러나 그에게 시간이 없었다.

 

‘시계’에는, ‘먹이’가 필요했다.

 

청년은 여행자의 손 끝에 쥐어진 회중시계의 끄트머리에 묶인 날카로운 체인을 천천히 들었다.

 

그는 여행자의 목덜미에 체인을 가져다 대었다. 

여행자의 목에서 붉은 피가 조금 흘러나왔다. 여행자는 아직 숨을 쉬고 있었다.

 

“저기…. 뭐 하는…. 거야?”

 

“-두 번째는, 죽음을 먹이로 줘야 합니다.”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옷으로 붉은색의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부디 기억해 주시길.”

 

페이몬은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을 잠깐 믿지 못했다. 

 

그가 여행자의 목을-

 

회중시계는 짙어진 금빛의 연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너! 여행자한테 대체 무슨 짓을-!”

 

페이몬은 화가 난 나머지 울음을 터트리며 청년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청년은 마치 이렇게 될 것이라고 미리 알기라도 한 듯,

아무런 감정 없이, 아무런 표정 없이 붉게 물들어가는 바닥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여행자? 여행자!”

 

페이몬이 여행자를 애타게 부르고 있었다.

 

여행자는 멍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다, 페이몬의 외침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무슨 일이….”

 

여행자는 갑작스럽게 쉬어지는 숨과 눈을 찌르는듯한 밝은 빛에 어지러움을 느끼다,

금방 또렷해진 시야 앞에 캐서린과 페이몬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여행자. 또 멍때리고 있었지!”

 

여행자는 일어난 상황에 이질감을 느꼈다. 

분명 자신도 죽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런데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여행자, 방금 의뢰 이야기하고 있었잖아! 여행자, 혹시 어디 아파?”

 

“어? 아, 아니.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여행자는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이 상황을 어디선가 본 적 있다고 느꼈다.

 

여행자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펴보았다.

 

평화로운 폰타인 성.

아름답게 지저귀는 새 소리.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캐서린.

 

“...돌아왔어?”

 

“여행자, 괜찮은 거 맞지…?”

 

페이몬은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여행자의 태도가 오늘따라 더 이상하다고 느꼈다.

 

“캐서린 씨, 의뢰 내용이 수계 늑대를 잡아달라는 내용인가요?”

 

여행자는 자신을 걱정하는 페이몬을 제치고 시간이 돌아왔음을 알아보고 싶었다.

 

‘정말 돌아온거라면, 의뢰의 내용이 분명 같겠지?’

 

여행자의 질문에 캐서린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신기하다는 듯한 말투로 여행자에게 이야기했다.

 

“..어떻게 알았어? 벌써 소문이 다 났나 보네?”

 

‘...진짜로 돌아왔구나.’

 

여행자는 캐서린의 이야기에 자신이 다시 과거로 돌아왔음을 확신하며 

자신의 손을 주머니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자 주머니의 위쪽에서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여행자는 손에 꼭 들어오는 크기의 둥그런 무언가의 테두리를 만지작대다, 

이내 태엽으로 느껴지는 구조물에 손가락이 닿음을 느꼈다.

 

여행자는 주머니에서 주먹 쥔 손을 꺼내어 천천히 폈다. 

손안에는 은빛으로 빛나는 복잡한 문양의 회중시계가 놓여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이야기가, “죽음”이었는데, 그럼 설마-’

 

여행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죽었고, 이 “시계”가 날 과거로 돌려놓은건가.’

 

여행자는 천천히 손 위에 놓인 회중시계를 구석구석 살폈다.

 

은빛으로 빛나는, 정교한 형태의 회중시계. 청년이 준 그 시계였다. 

 

시계는 처음 받았을때처럼 옅은 파동을 내뿜으며 맥동하고 있었다.

 

“여행자? 그런 건 어디서 난 거야?”

 

어느새 페이몬은 신기한듯한 표정으로

여행자의 손 위에 놓인 회중시계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전에 너 없을 때 의뢰 하나를 받았었거든.”

 

여행자는 대충 둘러대며 이야기를 이었다.

페이몬의 반응을 보았을 때, 시간을 되돌려 이곳에 도착한 의식은 자신밖에 없는 것 같았다.

 

“캐서린 씨, 미안하지만 이 의뢰는 거절할게요.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요.”

 

여행자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캐서린을 바라보며 의뢰를 정중히 거절했다.

 

캐서린은 평소와 다른 여행자의 모습에 조금 당황한 모습이었지만, 

평소처럼 살갑게 작별인사를 해주었다.

 

“어? 어, 알겠어. 그럼 다음에 보자!”

 

페이몬은 여행자의 태도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오늘 뭔 일 있는 거야?”라고 볼멘소리를 하며 여행자의 뒤를 따르려던 그때였다.

 

캐서린과의 이야기를 끝마친 여행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폰타인 성 내부를 달렸다.

 

갑작스레 속도를 내며 달리는 여행자를 발견한 페이몬은 여행자의 뒷모습을 보며 소리쳤다.

 

“어디 가는 거야 여행자! 말이라도 해주고 가라구!”

 

페이몬의 다급한 외침이 뒤에서 들렸다. 하지만 여행자는 그녀의 외침을 듣지 못했다.

 

여행자는 청년의 이야기를 천천히 회상하며 폰타인 성을 달리고 있었다.

 

‘운명, 운명이라면 분명-’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 중에 운명에 관해 정말 잘 아는 사람을 떠올렸다.

 

‘아직 폰타인을 안 떠났을 텐데….’

 

여행자는 기억을 더듬어 그 사람이 있을법한 구역을 샅샅이 살폈다.

 

서점, 태엽 공방…. 그 사람이 있을 만한 구역을 최대한 찾아보던 여행자는,

마지막으로 가시 장미회의 거점에 도착했다.

 

가시 장미회의 거점에 도착한 여행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식탁 위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그‘사람’을 발견했다.

 

“아, 모나! 아직 폰타인을 떠나지 않았구나!”

 

“오? 여행자! 여긴 어쩐일이야?”

 

모나는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했다.

평소라면 여행자가 먼저 찾아올 일이 없었기에, 모나는 여행자의 방문이 더 기쁘게 느껴졌다.

 

여행자는 다짜고짜 모나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밀어대며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모나, 운명의 자리를 지금 봐줄 수 있어?”

 

“우왓-!”

 

모나는 갑작스레 얼굴을 들이민 여행자가 조금 당황스러워 의자를 살짝 뒤로 빼려던 그 순간,

의자 다리가 철 바닥 사이의 틈새로 끼어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우당탕-!’

 

우렁찬 소리가 잿빛의 강 전체에 울려 퍼졌다.

 

주변의 사람들은 큰 소리에 소리의 근원을 쳐다보았고,

순식간에 이목이 쏠린 모나는 자리에서 후다닥 일어나 여행자에게 따졌다.

 

“아! 아파라, 여행자! 얼굴을 막 들이대면 어떡하냐구!”

 

모나는 자신의 등을 쓸며 “으으-”하고 미약한 신음을 내며 여행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미안, 좀 급해서….”

 

여행자는 갑자기 들이민 자신의 얼굴 때문에 당황한 모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사과를 받은 모나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붙잡고 

쓰러진 의자를 다시 똑바로 세우고 그 위에 앉았다.

 

그녀는 그대로 ‘후-’하고 아직 뜨거운 차를 천천히 마셨다.

 

여행자는 그녀의 목덜미를 바라보며 

그녀의 목구멍으로 차가 천천히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이 위대한 점성술사를 찾아온 이유가 뭐야?”

 

나왔다. 이 특유의 거만함….

 

여행자는 모나의 질문에 자신이 뭘 질문해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하다,

모나의 반대편에 있는 의자를 하나 빼내어 자리에 앉고 그녀에게 용건을 말했다.

 

“모나, 누군가의 운명의 자리를 좀 보고 싶은데.”

 

단도직입적인 여행자의 질문에 살짝 당황한 모나는, 

여행자의 대답을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다.

 

“여행자, 이전에도 말했지만, 누군가의 운명의 자리를 보는 건 실례-”

 

“알아. 모르고 질문한 거 아니야.”

 

모나는 여행자의 단호한 태도에 다시 한번 놀라며 여행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는 여행자의 두 눈을 바라보며 

여행자가 장난삼아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게 아니란 것을 느꼈다.

 

‘다른 사람의 운명을 엿보는 건 자제 하려고 했는데….’

 

그렇게 여행자와 한참을 눈빛을 교환하던 모나는, 

크게 한숨을 ‘휴-’하고 쉬며 이야기를 이었다.

 

“그래,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한 번쯤은 들어줄게.”

 

모나는 말을 끝마치고 공중에 왼손을 올려 손가락 끝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래서, 보고 싶은 운명의 주인은 누구야?”

 

모나가 수점반을 어느 정도 구축해냈다. 

공중에서 응집되는 차가운 기운이 여행자의 피부에도 전해져왔다.

 

여행자는 거의 완성되어가는 수점반의 모습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리곤 천천히, 조심히 모나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말을 꺼냈다.

 

“대상은…. 푸리나야.”

 

여행자의 대답에 모나를 포함한 주변의 모두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모나는 말 없이 수점반을 만들어내다, 여행자의 대답에 순간 넋이 나갔다.

 

“...여행자, 진심이야?!”

 

주변의 사람들마저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마저도 여행자에게 제정신이냐며 역으로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당당했다.

 

“...모나, 부탁이야. 사람들의 목숨이 걸려있어.”

 

모나는 여행자의 진심 어린 부탁에 다시 한번 여행자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 바라보았던 눈동차처럼, 여행자의 눈빛은 굳건했다.

 

모나는 여행자의 변함없는 태도를 보며 한 번 더 한숨을 쉬고는 

망가진 수점반을 다시 복구했다.

 

“...알겠어. 시작할게.”

 

모나는 다시 한번 손가락 끝을 집중해 운명의 자리를 천천히 구축해내기 시작했다.

 

여행자는 그녀의 손가락 움직임을 바라보며 집중했다. 

무언가 실마리라도 나오길 빌고 있었다.

 

모나는 한참 동안 손가락을 움직이며 수점반을 돌렸다.

그러나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녀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 갔다.

 

“...어? 어? 이상하다…?”

 

한참 동안 수점반을 돌리던 모나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이었다.

 

누군가에게 들으라고 한 말이 아닌 혼잣말에 가까운 말이었지만,

여행자는 모나의 말을 듣고 다시 그녀에게 따지듯 질문했다.

 

“모나, 그게 무슨 말이야? 이상하다고?”

 

모나는 여행자의 대답에 뭐라고 답변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설명하려고 해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확히는, 예상 밖의 결과에 놀라 말을 더듬고 있었던 것 같았다.

 

모나는 조용히 여행자의 귓가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 대며 속삭였다.

누군가가 들으면 곤란할 만한 내용을 알려주려는 듯, 모나는 그 어느 때보다 신중했다.

 

“...여행자, 운명의 자리가 없어.”

 

여행자는 모나의 대답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당황한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대답을 들은 여행자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모나의 손목을 잡고 끌기 시작했다.

 

“잠깐?! 여행자, 차는 다 마셔야-!”

 

“모나, 미안. 나중에 차는 얼마든지 사줄테니 지금은 잠깐 따라와 줘!”

 

모나는 여행자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생각보다 강한 여행자의 손힘에 결국 여행자를 따라 잿빛의 강 으슥한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모나, 조금 더 자세히 말해줘. 운명의 자리가 없다니?”

 

여행자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헉헉대며 모나에게 질문했다.

 

모나도 마찬가지로 숨을 몰아쉬며 캑캑대다가, 이내 호흡을 되찾고 말을 이었다.

 

“후-, 여행자. 암만 찾아봐도 푸리나씨의 운명의 자리가 보이지 않아. 

내 수점반에 문제가 있나 없나 다른 사람 것들도 찾아봤는데, 

확실히 그녀만 운명의 자리가 없어.”

 

모나의 점성술 결과는…. 이상했다.

 

티바트의 모든 생물은 저마다의 별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티바트의 별 하늘은, 그런 생물들의 별자리를 비추며 운명을 속삭이고 있었다.

 

이것이 일반적인 티바트 생물의 운명이다. 그러나-

 

“...여행자, 그녀에게서 미래가 보이지 않아.”

 

모나는 계속해서 수점반을 구축해 푸리나의 운명의 자리를 찾고 또 찾았지만,

수십 수백 번을 반복해도 도저히 찾을 수 없었다.

 

혹시나 잘못된 운명의 자리를 찾은 건 아닐까 수어 번 더 검사했지만,

확실히 푸리나의 운명의 자리는 수점반에 잡히지 않았다.

 

“...물의 신이라서 그런 건가? 아니야, 그럴 리가….”

 

모나는 초조해졌다. 스스로 혼잣말을 계속 반복하며 수점반을 더 빠르게 돌려대고 있었다.

 

여행자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대론 끝이 없겠다고 생각해 질문을 바꾸었다.

 

“모나, 그러면 대상의…. 미래도 볼 수 있다고 하지 않았어?”

 

모나는 여행자의 대답에 분주하게 움직이던 손가락을 멈췄다. 

그리곤 여행자의 질문에 답변했다.

 

“불가능할 거야. 미래를 보려면 운명의 자리가 필요해.”

 

“...1시간 정도의 미래도 볼 수 없어?”

 

여행자는 초조했다. 모나가 좀 더 명확한 해답을 내기를 원했다.

물론 여행자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 무리한 요구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행자는 절박했다. 자신에게 있어 유일한 희망은 그녀뿐이라고 생각했다.

 

얼마 후 폰타인은 이 세상에서 통째로 사라질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모나는 여행자의 무리한 요구에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고 조금 찡그린 얼굴로 사색에 잠겼다.

 

“모나, 아니, 위대한 점성술사님! 제발!”

 

여행자가 두 손을 모아 모나에게 부탁하자, 

그녀는 살짝 당황한 듯 여행자의 진심 어린 말투에 기세가 눌렸다.

 

“어…. 그, 운명의 자리가 없는 사람의 미래를 본 적은 한 번도 없는데….”

 

여행자는 모나의 자신감 없는 소리에 그녀를 살짝 도발해보기로 마음먹었다.

 

“모나, ‘위대한’ 점성술사라며, 이런 것쯤은 할 수 있지 않아?”

 

모나는 고개를 들어 신경에 거슬리는 말투로 질문하는 여행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의기양양하다가도, 

진심으로 부탁을 하려는 듯한… 기묘한 미소가 그녀의 두 눈에 들어왔다.

 

“알았어, 해볼게. 근데 결과는 장담 못 한다?”

 

“고마워.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으니까, 보이는 것만 이야기 해줘.”

 

결국, 여행자의 도발에 넘어간 모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점성술에 도전했다.

 

모나는 수점반을 천천히 조작했다.

 

위로, 아래로, 반대로.

 

모나는 수점반을 뒤집어 천천히 1시간 뒤 그녀의 미래를 예측하기 시작했다.

 

여행자의 예상보다 모나의 미래 예측은 꽤 길어졌다. 

 

“...모나, 힘들면 안 해도-”

 

여행자는 살짝 나른한 눈빛을 모나의 손에서 그녀의 얼굴로 옮기던 그때였다.

 

모나의 얼굴이 평소와 다르게 창백했다.

 

여행자는 모나의 표정을 보며 심각함을 느꼈다. 

 

그녀와 만나고 지금 이 순간까지,

그녀가 이렇게까지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보여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모나, 모나? 무슨 일-”

 

“...여행자, 어째서….”

 

모나는 순식간에 수점반을 손에서 내려 겁에 질린 얼굴로 여행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모나? 설명 좀 해줘. 뭘 본 거야…?”

 

모나는 여행자의 대답에 다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진정하기까진 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여행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나를 기다렸다.

 

그렇게 모나는 한참 동안 가쁜 숨을 진정시키곤 여행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여행자, 대체 폰타인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

 

여행자의 예상과는 다르게 모나의 질문이 먼저 날아왔다.

 

갑작스럽게 날아온 질문에 여행자는 자신의 오른손을 이마에 짚으며 고개를 찡그리며 사색에 잠겼다.

 

‘...내가 미래에서 보고 온 사실을 그녀에게 전해줘야 할까?’

 

여행자는 잠깐 고민했다. 물론 자신의 행동에 큰 의미는 없을 것이라고 느꼈다.

 

어쨌거나 폰타인은 절망에 휩싸일 것이기에, 

그녀에게서 사실을 숨기는 행위는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라고 느꼈다.

 

“...모나, 네가 어디까지 본 건진 모르겠지만….”

 

여행자는 힘겹게 심호흡하며 무거운 마음으로 입을 천천히 열었다.

여행자는 자신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진실을 알려야만 했다.

 

“오늘 오후, 폰타인의 모든 사람이 죽어.”

 

모나는 여행자의 대답에 이미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여행자, 그렇다는 건. 네가 미래를 알고 있다고 생각해도 되는 거겠지?”

 

여행자는 모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미 여행자가 어떤 상황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여행자, 질문 하나만 할게.”

 

하나의 질문이 더 날아왔다. 이번에는 그녀가 자신을 추궁하는 듯했다.

 

모나는 자신의 오른손으로 모자를 눌러쓰며 얼굴을 감췄다.

 

그녀의 표정은 더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떨리는 입술만큼은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푸리나씨를, 왜 죽이려고 해?”

 

“...뭐?”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여행자의 이마에선 식은땀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대체 왜?”

 

눌러쓴 모자를 천천히 되돌려놓은 모나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있었다.

 

여행자는 모나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반대로 그녀가 왜 그런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싶었다.

 

“...모나-”

 

“대답해줘.”

 

모나는 진심이었다. 

어느새 그녀의 눈동자는 점점 불안에 떠는 듯 갈 곳을 잃고 마구 요동쳤다.

 

여행자는 점점 두려움에 잠식되어가 되어가는 모나를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재빠르게 그녀에게 해명했다.

 

“내가 그녀를 죽일 이유가 없어.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여행자는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당연하다는 듯 그녀에게 반론했고,

모나는 여행자의 대답을 듣다가 이질감을 느낀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야기했다.

 

“...여행자, 내가 본 미래에선, 그녀는 살아남지 못해.”

 

“...왜?”

 

“...그녀의 죽음 중에서, 네가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가는 때도 있어.”

 

여행자는 모나의 대답에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녀에게 따지듯 질문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폰타인을 지키려-”

 

“...여행자, 내가 본건 미래야. 당장 네가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는 보장이-”

 

“아니, 절대 그럴 일 없어.”

 

여행자는 모나의 대답을 부정했다. 

자신과는 관계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힘차게 가로젓기도 했다.

 

모나는 그런 여행자의 모습 속에서 

이전에 리월에서 만났던 한 사내의 얼굴이 잠깐 비쳐 보였다.

 

그녀가 이전에 리월에 있었을 때,

한 사내의 미래를 점쳤던 적이 있었다.

 

[“...당신은 죽어. 운명은 거스를 수 없거든.”]

 

모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순식간에 얼굴이 굳어진 사내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사내는 그녀의 말을 믿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녀의 말을 믿고 싶지 않았다는 표현이 더 들어맞았을 것이다.

 

[“겁주지 마세요, 저는 그래도 그 배를 타야 한다고요!”]

 

모나는 사내를 말리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알고 있었다.

자신이 그의 운명을 막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사내를 떠나보낸 지 며칠 뒤, 그의 부고 소식이 들려왔다.

 

모나는 예측하고, 대비하고, 이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저 사람, 저 사람이 그 사람이 죽는다는 걸 예언한 사람이래!”]

 

[“뭐라고? 아이고, 무서워라. 마녀가 따로 없네!”]

 

그녀에게 돌아오는 비난의 화살만큼은 예측하지 못했다.

 

모나는 고개를 숙여 땅바닥에 죽죽 그려져 있는 돌바닥의 무늬를 천천히 바라보며 사색에 잠겼다.

 

[‘바꿀 수 없고, 거스를 수 없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서 운명이구나.’]

 

점성술을 시작하기 전 그녀가 밥 먹듯 중얼거리던 문장이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있어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중얼거리던 그 한 문장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그랬기에 모나는, 여행자에게 자신이 보게 된 미래를 숨기고 싶지 않았다.

 

부정하고 싶은 여행자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모나가 바라본 수많은 미래의 모습은-

 

온갖 방법으로 푸리나를 잔혹하게 살해하는 여행자의 모습만이,

수점반의 물방울 속에서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도 수점반에 잡힌 ‘미래’가 터무니없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여행자가 그럴것이라니, 

다른사람도 아닌 여행자가 그렇다는 사실은 모나에게 있어서도 믿지 못할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는 수점반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운명’이라는 것은, 언제나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여행자는 심각한 표정의 모나를 바라보았다. 혼란스러워하는 눈치였다.

 

“모나, 나는 어떻게든 그녀를-”

 

여행자가 말이 없는 모나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반론하려던 그때였다.

 

‘쿵-!’

 

큰 소리가 지상에서 울려 퍼졌다. 

이 정도 크기의 소음이라면, 분명히-

 

여행자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고 느끼며 순식간에 자신의 검을 챙겨 잿빛의 강을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잠깐, 여행자! 어딜 가는 거야!”

 

모나는 갑작스레 검을 챙겨 밖으로 뛰쳐나가려는 여행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모나의 얼굴색은 어느새 의심보다는 두려운 색으로 번져가고 있었다.

 

여행자는 모나의 외침에 잠깐 멈칫하고 뒤를 돌아보며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미안, 차는 다음에 살게.”

 

인사를 마친 여행자는 끝이 없어 보이는 출구 쪽 계단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자는 잿빛의 강 아래에 덩그러니 놓여진 모나가 마음에 걸렸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었다.

 

...곧 파멸이 찾아올 것이다.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