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genshin/101139779?p=1 - 이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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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비예트, 상황은?!”

 

“좋지 않아. 너도 어서 피해야-”

 

느비예트와 푸리나는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재앙에 맞서 시민들을 대피시키고 있었다.

 

느비예트는 자신의 힘으로 물 원소 장벽을 만들어 수계 늑대의 진격을 늦추려 했지만, 

원소 공격이 통하지 않는 수계 늑대들은 그의 물 원소를 가볍게 뚫으며 시민들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공중에 혈흔이 흩뿌려졌다. 그들의 눈앞에서 시민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아, 안돼…!”

 

푸리나의 눈앞에 잘게 잘린 시민의 발목이 툭 하고 떨어졌다. 

떨어진 발목의 절단면에서 검붉은 피가 서서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

 

“푸리나, 어서 멜모니아궁으로 올라가!”

 

느비예트는 겁에 질린 푸리나를 바라보며 그녀를 어떻게든 대피시키려 노력했다. 

 

푸리나는 온 힘을 다해 수계 늑대를 막아내는 느비예트를 혼자 둘 수 없었지만,

느비예트는 자신이 희생당하더라도 그녀를 지켜내고 싶어했다.

 

“느비예트, 저 늑대들 공격이 안 통하는 것 같아, 이제 어떡해?”

 

푸리나의 얼굴은 어느새 새파랗게 질려있었다. 

그렇게 그들이 힘겹게 늑대를 막아내는 와중에도, 

희생당하는 시민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푸리나, 어떻게든 막아볼 테니 어서-”

 

“느비예트! 옆에!”

 

순식간에 단단한 물의 장벽을 파괴하고 뛰어온 수계 늑대가 

느비예트에게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려는 그때였다.

 

‘쉭-’

 

붉은빛의 무언가가 느비예트의 눈앞으로 지나갔다. 

 

찰나의 순간-

 

그를 덮치려던 수계 늑대는 순식간에 두 동강이 나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아슬아슬했네. 둘 다 괜찮아?”

 

여행자는 자신의 오른손에 붉게 빛나는 검을 고쳐 쥐며 푸리나와 느비예트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도 늦지 않았다. 둘 다 무사했다.

 

느비예트와 푸리나는 여행자의 등장을 반겼다. 

막막했던 순간, 순식간에 나타나 수계 늑대들을 물리치는 여행자는 그들에게 있어 마치 구원자와도 같았다.

 

“고맙습니다. 여행자, 그보다 푸리나를-”

 

“아니. 느비예트, 나도 여기에 남을게. 아직 구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푸리나, 고집부리지 말고-”

 

느비예트는 그녀와 말다툼 할 시간이 없다고 느꼈다. 

이곳은 너무 위험했다. 고작 수초 만에 목숨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늑대들은 원소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고대용의 권능을 넘겨받은 자신의 공격마저도 가볍게 뚫고 들어오는 저 수계 늑대들을 

그녀가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그렇기에 느비예트는 푸리나를 [방주]에 태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살아남지 못하더라도, 갈 곳 잃은 시민들을 한데 묶어 통솔할 사람 한 명쯤은 필요했다.

 

그는 이렇게 생각하며 푸리나의 두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느비예트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녀의 눈빛은 겁에 질려있지 않았다.

 

조금 전에 본 창백한 얼굴과 흔들리는 눈동자는 분명 약간의 두려움이 남아있었지만,

어느새 자신의 운명을 굳힌 듯, 푸른빛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푸리나.”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건 아니야. 믿어줘.”

 

느비예트는 이 모든 일의 끝이 좋지 않을 것이라는 걸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의 깨달음에 굵은 비가 조금씩 어깨를 적시기 시작했다. 

이윽고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지기 시작했다.

 

“...여행자. 그녀를 지켜주십시오. 저는 라이오슬리씨를 돕겠습니다.”

 

느비예트의 간곡한 부탁이었다. 

뒤를 돌아 여행자를 쳐다보는 느비예트의 눈 밑으로 투명한 물방울 같은 게 떨어지고 있었다.

 

“알겠어. 일단 빨리 남은 사람이라도 방주에 태워.”

 

여행자는 그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다가오는 수계 늑대들을 향해 검끝을 고정했다.

 

그렇게 여행자가 시간을 끄는 사이,

느비예트는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뒤편에 있는 엘리베이터에 탑승하려고 했던 그때였다.

 

“...시간이 없어. 지금 남은 인원이라도 모아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모습을 보인 사람은 다름 아닌 라이오슬리였다.

 

저번 한천의 못 사건 이후로

다시 한번 자신의 방주가 필요할 수도 있다고 느낀 라이오슬리는,

언제든 방주를 사용할 수 있도록 멜모니아궁과 연락책을 구축해 놓았다.

 

그도 방주가 필요할 날이 오늘이 될 것으로 생각한 건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새 그의 방주는 멜모니아궁 상공에서 부유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와 느비예트를 바라보던 라이오슬리는 

눈을 돌려 그의 뒤에 남아있는 푸리나와 여행자를 바라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그나저나, 저 둘은?”

 

“라이오슬리 씨, 조금만 더 시간을 벌어주실 수는 없습니까?”

 

“뭐? 지금 그걸 말이라고-”

 

라이오슬리는 느비예트의 대답에 기가 찬다는 듯 팔짱을 끼며 그의 두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느비예트의 두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의 눈빛을 본 라이오슬리는 느비예트가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뱉은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5분. 놈들 속도를 보면 그 이상은 너무 위험해.”

 

“...알겠습니다.”

 

라이오슬리는 느비예트의 제안을 수락했다. 

 

5분도 사실 아슬아슬했다. 

당장 출발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대피시킨 사람들마저도 전부 살해당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느비예트의 판단을, 여행자와 푸리나의 결의를 믿었다.

분명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느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느비예트와 라이오슬리는 엘리베이터로 푸리나가 부축한 부상자들을 수송하며 멜모니아궁으로 올라갔고,

폰타인 광장에 남겨진 그녀와 여행자는 서로의 등을 맞대었다.

 

“..푸리나, 왜 안 따라갔어?”

 

여행자의 질문이었다. 

푸리나는 여행자의 질문을 이미 느비예트에게서 비슷하게 들었던 적이 있다.

 

[“푸리나, 너는 여전히 폰타인 사람들에게 있어 물의 신이다. 그러니 네가 살아남아서-”]

 

[“또 그 소리야? 내가 이대로 도망쳐버린다면, 내가 지켜온 모든 것들이 무너진다구!”]

 

“...내 손으로 지켜낸 것들이 이렇게 파괴되는 걸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푸리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어느새 푸리나와 여행자 주위로 금빛의 수계 늑대들이 천천히 모여들고 있었다.

 

그중 한 놈은 입으로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뼈들을 뱉어내고 있었다.

 

‘덜그럭-’

 

땅바닥에 떨어진 뼈가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여행자의 귀를 스쳤다. 

 

여행자는 천천히 오른팔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이질적인 감각이 자신의 팔이 확실하게 힘을 끌어내었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푸리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이 늑대들, 원소 공격이 안 통하니까-”

 

여행자는 진심으로 그녀를 걱정해 그녀가 빨리 탈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달랐다.

 

“이대로 내가 도망친다면, 백성들이 날 뭐라고 생각하겠어?”

 

푸리나는 어느새 고개를 돌려 여행자를 힐긋 쳐다보고 있었다.

 

“...푸아송 마을 사건 이후로, 죄책감을 느끼는 거라면-”

 

“그렇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을 구해야 하는 거 아냐?”

 

그녀의 의지는 이미 불타고 있었다. 이미 죽음은 예상한듯한 눈치였다.

 

여행자는 그녀의 눈빛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정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들의 눈앞엔 한눈에 보기에도 많은 숫자의 수계 늑대가 점점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사냥하려는 포식자들처럼, 그들의 목숨을 천천히 조여왔다.

 

“늑대들은 내가 막을 테니까, 최대한 많은 사람을 구해줘.”

 

“걱정하지 마. 살롱 멤버들이 도와줄 테니까.”

 

푸리나는 어느새 세 마리의 살롱 멤버들을 불러 구석구석까지 수색해 사람들을 구조하고 있었다.

 

여행자는 그런 그녀의 모습에 안심이 되었다. 

 

물론 그녀도 위험한 것은 매한가지였지만, 

이대로 간다면 그나마 폰타인 사람들 대부분을 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여행자의 착각이었다. ‘예언’이 실행된 ‘결과’는 쉽게 행복을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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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뭘 하고 있었지?”

 

노인은 태엽 장치 앞에서 강렬한 기시감을 느꼈다.

 

분명 자신이 뭔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왜 그랬는지, 무엇을 위해서였는지에 대한 기억이 송두리째 사라진 기분이었다.

 

노인은 천천히 자신이 이전에 했던 일들을 생각하다,

어렵지 않게 자신이 왜 태엽 장치를 만지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맞다, 그녀의 ‘운명’을 지워서 없었던 일로 만들어 버리려고 했었나.”

 

노인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태엽 장치를 만지며 작업을 재개했다.

 

왼쪽, 오른쪽으로.

 

태엽은 천천히 돌아갔다. 언제나 그랬듯 째깍거리는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고 있었다.

 

노인은 한참을 태엽을 조작했다. 

이리저리 움직여도 보고, 눌러도 보며 세계의 운명을 조작하고 있었던 그때였다.

 

“..잠깐.”

 

노인은 이상함을 느꼈다.

그는 기시감을 느끼며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녀의 운명을 지웠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그녀의 운명은 아직 버젓이 남아있었다. 

그는 운명의 잔재를 바라보며 다시 그녀의 운명을 지우기 시작했다.

 

“...”

 

노인은 곰곰이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붉은 머리의 청년을 발견했다.

 

“자네, 뭔가 이상함을 느끼지 않았나?”

 

노인은 기시감을 느끼며 청년에게 질문했다.

청년은 그런 노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야기했다.

 

“이상함이라니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노인은 청년의 대답에 더욱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초조해진 노인은 잡고 있던 태엽을 내려놓고 천천히 생각했다.

 

“뭔가, 뭔가 이상해. 마치 세계의 시간이 뭔가에 의해 되돌아오는 느낌이야….”

 

노인의 대답을 뒤에서 조용히 듣던 청년은 마른침을 계속해서 삼켰지만,

다행히도 노인은 그의 모습을 신경 쓰지 않고 주위만 서성거릴 뿐이었다.

 

“...아니, 괜찮을 거다. 

애초에 운명을 지운다는 건, 세계에서 추방된다는 의미이니까, 이제 곧 세계가-”

 

노인은 중얼거리며 다시 태엽을 잡고 풀어헤친 주변의 운명을 천천히 정렬하기 시작했다.

 

오른쪽, 왼쪽으로-

 

청년은 그런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의 예상보다 노인의 촉은 훨씬 뛰어났다.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그 시계’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들킬지도 몰랐다. 

 

그렇기에 청년은 좀 더 시간을 끌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시계를 빼돌렸다는 사실을 들키기 이전에,

지상에서 단서를 모으는 여행자를 위해서라도 그는 노인을 막아야 했다.

 

.

.

.

 

 

“...푸리나, 괜찮아?”

 

두 자릿수의 수계 늑대를 처리하고도 그들의 진격이 멈추려고 하지 않았던 때였다.

 

푸리나는 어느새 광장에 남아있는 생존자들 대부분을 

멜모니아궁으로 가는 엘리베이터로 인도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여행자, 무리하지 말아줘. 난 아직…. 괜찮아.”

 

여행자는 붉은빛의 힘을 계속해서 사용해가며 수계 늑대들을 하나둘 쓰러트렸지만,

끝을 모르고 달려오는 수계 늑대의 공격이 점점 힘에 부치기 시작했다.

 

“내가 봤을 땐 우리 둘 다 상태가 안 좋은 것 같은데-”

 

푸리나도 여행자 못지않게 힘을 많이 쓴 듯했다.

 

어느샌가 생기있던 그녀의 피부는 점점 창백해졌고, 

금방이라도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지팡이를 짚고 간신히 서 있었다.

 

여행자는 이대로 가다간 끝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원소가 통하지 않는 수계 늑대들도 까다로웠지만, 

어느새 시간은 라이오슬리가 약속한 5분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푸리나, 더 시간을 끌 수 없어. 앞으로 1분이야.”

 

“하지만 아직-”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너도 알고 있잖아.”

 

“...”

 

물론 여행자도 그녀의 말을 따라 더 많은 사람을 구해 ‘운명’에 버젓이 한 방 먹여주고 싶었지만,

수계 늑대들은 조금씩 자신들의 수를 늘려가고 있었다.

 

천천히 진격해오는 수계 늑대들은 처음에 그 수가 많지 않았지만,

점점 운명에 저항하려는 여행자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계속해서 차원 문을 열고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라이오슬리와의 약속이고 뭐고, 목숨마저도 부지하기 힘든 상황이 올 것이다.

 

“푸리나, 가자. 얼마 안남았어.”

 

“...”

 

그녀는 끝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여행자와 푸리나가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폰타인 성 곳곳에서는 비명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가자.”

 

여행자가 푸리나를 부축했다. 그녀의 손은 힘없이 여행자를 따라왔다.

 

여행자도 계속 들려오는 비명을 모른 채 해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살아야 했다. 살아서 그 잘난 ‘운명’에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렇게 그들은 멜모니아궁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의 입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그들의 뒤에선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저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여행자와 푸리나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여행자는 끔찍한 뒷맛에 기분이 더러웠지만, 

어떻게든 그녀를 엘리베이터까지 끌고 왔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이제 더 이상 그녀가 죽는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

이대로 방주에 탑승하면 자신의 승리라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쾅-!”

 

무언가가 크게 터지는 굉음과 함께 수많은 먼지와 잔해들이 그들의 머리 위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야?”

 

푸리나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쏟아지는 먼지에 눈이 가려져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설마.’

 

여행자는 큰 소리에 시간을 돌리기 전에 있었던 일을 생각해냈다.

 

‘금빛의 날개, 무너진 멜모니아궁.’

 

“일단 몸을 숨기자! 밖은 너무 위험해!”

 

여행자는 쏟아지는 먼지를 피해 푸리나의 손을 잡아 건물 안으로 끌었다.

 

“우왓-!”

 

푸리나는 갑작스러운 여행자의 손짓에 힘없이 탑승장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그녀가 안으로 끌려들어 가는 그 순간, 주변의 잔해가 무너져 입구 앞으로 “쿵!”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약 그녀를 그대로 놔뒀었으면-

 

여행자는 끔찍한 상상을 하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천천히 문밖 틈새로 보이는 폰타인 성의 최상층을 바라보았다.

 

“설마…. 그 소린가?”

 

여행자의 예상이 맞다면 이 굉음은 아마도 라이오슬리의 방주가 폭발한 소리일 것이다.

 

“...뭐가 크게 ‘펑!’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괜찮은거겠지..?”

 

푸리나는 갑작스럽게 들린 큰 소음에 당황스러워했다.

 

여행자는 이미 이 소음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를 불안에 떨고 싶게 하지 않았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괜찮을 거야.”

 

여행자는 순간 시간이 반복되기 전 그녀의 모습이 머리를 스쳤다.

 

끔찍한 피비린내와 붉게 물든 바닥에 차갑게 뉘어져 있던 그녀.

 

순식간에 끔찍한 기억이 떠올랐다. 하지만 눈앞의 그녀는 아직 살아있었다.

 

여행자는 천천히 오른손을 올려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차갑게 식어있던 그녀의 몸에 대한 기억이 여행자의 뇌리를 스쳐서일까,

아니면 겨우 구해낸 그녀의 모습에 감격해서일까.

 

무슨 이유였는지는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저 자신이 왜 그녀를 구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만들고 싶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이 먼저 뻗어 나갔던 것 같았다.

 

“여행…. 자?”

 

갑작스럽게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온 따뜻한 손길이 당황스러웠던 푸리나는 여행자의 손을 툭 하고 쳐내었다.

 

“...미안.”

 

여행자의 사과였다.

물론 그녀는 여행자의 손길이 싫지는 않았지만,

순식간에 느껴진 머리 위의 촉감이 당황스러워 반사적으로 쳐내었을 뿐이었다.

 

“아, 아니…. 미안. 그냥-”

 

푸리나의 사과에 순식간에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던 순간이었다.

 

“쿵-”하는 소리와 함께 멜모니아궁으로 향할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푸리나는 당황한 얼굴로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나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엘리베이터 문은 굳게 잠겨 작동하지 않았다. 

 

“하필 이럴 때 고장이 나네! 그러게 내가 맨날 점검 좀 자주 하라고 그랬는데!”

 

푸리나는 잔뜩 짜증 난 목소리로 엘리베이터 문을 쿵쿵 발로 차고 있었다.

 

여행자는 그녀가 엘리베이터 문을 여는 사이, 

입구의 문을 막아 수계 늑대가 들어올 통로를 확실하게 막고 있었다.

 

...이 행동으로밖에 있는 사람들을 더 이상 구하지 못할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렵사리 구한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어떻게든 끝까지 살려내고 싶었다.

 

그녀에겐 비밀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라도 이해를 해주겠지.

 

여행자는 “휴-”하고 손을 탁탁 털며, 

뒤를 돌아 푸리나에게 이야기하려던 그때였다.

 

“여행자! 문이 열렸-”

 

푸리나는 뒤를 돌아보며 여행자를 바라보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뒤쪽에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삐걱거리며 먼지를 잔뜩 흩뿌리던 엘리베이터의 문은 어느새 절반 정도 열리고 있었다.

 

그 순간.

 

여행자는 뒤이어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보이는 보여선 안 될 존재를 보고 말았다.

 

“푸리나, 뒤에-!”

 

여행자는 순식간에 칼을 허리춤에서 빼내려고 했다.

 

...그러나 수계 늑대의 발톱이 더 빨랐다.

 

여행자가 허리춤에서 칼을 꺼내려고 하면 할수록, 

수계 늑대의 발톱은 그녀의 허리춤을 더욱 깊게 파고 들어갔다.

 

“...!”

 

붉은 피가 그녀의 허리춤에서 천천히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여행자는 붉은빛으로 빛나는 검을 수계 늑대의 머리를 향해 던졌고,

순식간에 날아간 검은 수계 늑대의 머리에 정확히 꽂혔다.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금빛의 액체가 붉은 혈흔과 엉켜 사방으로 흩뿌려졌다.

 

“푸리나!”

 

여행자는 비명을 지르는 수계 늑대를 뒤로 쓰러진 푸리나에게 허겁지겁 다가갔다.

 

새빨간 피가 그녀의 허리춤에서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나왔다.

수계 늑대의 발톱은 이미 그녀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미안…. 여행자….”

 

푸리나는 자신의 허리춤에서 새어나오는 피를 필사적으로 막고있었다.

 

“푸리나, 푸리나? 내 말 들려? 정신 좀 차려봐-!”

 

상처는 너무 컸다. 그녀의 숨이 점점 꺼져가고 있었다.

 

푸리나는 필사적으로 허리춤에서 나오는 피를 틀어막고 있었지만,

자그마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오는 혈액은 이미 새하얀 장갑과 바닥을 붉게 적시고 있었다.

 

“....”

 

여행자는 그녀의 목숨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꼈다.

 

“...푸리나, 제발 단 한마디라도….”

 

여행자는 머리끝까지 끓어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분노했다.

 

마치 운명이 자신을 기만하는 듯한 느낌도 받았다. 분노보다 불쾌함이 점점 더 커져갔다.

 

“...이런게 어딨어,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이런게?”

 

최선을 다했는데도 결국 그녀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에 절망감을 느꼈다.

 

“푸리나, 대답이라도 해줘, 제발...”

 

여행자는 고개를 돌려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바라보며 숨을 뱉어내길 바랐다.

 

그러나 그녀의 숨은 어느새 멎어있었다.

 

파도와같은 순수한 분노가 밀려오고 있었다. 

 

내 목숨까지 바쳐가며 어렵게 얻은 기회인데,

죽어가는 목숨과 맞바꿔 얻어낸-

 

...시계, 시계가 아직 있다면, 상황이 달라질지도 몰라.

 

여행자는 밀려오는 분노 사이로 떠오르는 파편 같은 기억을 찾아내었다.

 

“...회중시계.”

 

여행자는 왼손을 자신의 주머니에 밀어 넣어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그, 그래. 그렇지, 아하하, 하하하. 이게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네!”

 

여행자는 광적으로 주머니를 뒤져대며 중얼거렸다.

 

여행자는 자신의 정신이 좀먹혀감을 느끼며, 

손가락의 신경을 곤두세워 회중시계만이 가진 특유의 감촉을 필사적으로 찾았다.

 

은빛의, 둥그런, 왼쪽에 태엽이 달린 회중시계-

 

“...찾았다.”

 

여행자는 서둘러 회중시계의 태엽을 돌렸다. 

회중시계는 ‘찰칵-’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천천히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행자는 쓰러진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천천히 자신의 허리춤에서 칼을 꺼냈다.

 

피로 얼룩지고, 날이 조금 무뎌진 검.

 

여행자는 자신의 검을 천천히 바라보다,

어느새 검 위에 투명한 물방울들이 툭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게 어딨냐고, 이런 게….”

 

여행자는 잔뜩 흐릿해진 시야로 칼을 거꾸로 집어 천천히 자신의 복부에 날을 세웠다.

 

‘...죽음이 마지막…. 퍼즐인가.’

 

그렇게 여행자가 사색에 잠긴 사이, 

겨우 막아놨던 입구의 문이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다.

 

‘...이대로 시간이 돌아가지 않고 정말 죽어버린다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여행자는 순식간에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푹-’

 

섬뜩한 소리와 함께 강렬한 고통이 피부로 전해지고, 온몸에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모든 게 헛것이 아니었다면, 한 번 더 기회가 있다면-’

 

흐릿해지는 시야를 끝으로 자신의 배를 바라보던 여행자는 

붉게 물들어가는 바닥과 부서진 문틈 사이로 

금빛 눈동자를 번뜩이는 수계 늑대들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모두를, 구하고 말거야.’

.

.

.

 

 

“...여행자? 여행자!”

 

‘...돌아왔나?’

 

여행자는 기시감을 느끼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모험가 길드의 캐서린 씨,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페이몬….

 

자신의 몸이 돌아옴을 느낀 여행자는,

살아있음에 안도감을 느끼며 한숨을 푹 쉬었다.

 

‘...다시 돌아왔어. 못 돌아오면 어쩌나 긴장했는데.’

 

여행자는 시간을 되돌리기 전, 무엇이 문제였는지 천천히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행자? 내 말, 안 들려?”

 

여행자는 천천히 문제의 원인을 분석해나갔다.

 

우선 해결해야 할 과제는 크게 두 가지.

 

첫째는 모든 사람의 구원이었다.

 

궁극적인 목표이자, 시계를 던져준 정체불명의 청년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를 구할만한 증거가 너무 적었다. 

 

그렇기에 여행자는 첫 번째 목표를 조금 미루고, 

우선 재앙의 근원에 대한 탐색을 마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두 번째.

‘재앙’의 원인인 수계 늑대가 어디서 나타났는지에 대한 조사였다.

 

[“...예언만이 남은 ‘결과’.”]

 

청년의 대답이었다. 

그도 이 괴물들이 왜 폰타인 성을 습격했는지 자세히 아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여행자는 청년의 대답을 곱씹으며

이전에 엔죠가 자신에게 전해준 책자에서 ‘심연 괴물’ 항목을 직접 읽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여행자는 공교롭게도, ‘수계 늑대’의 기원을 읽었던 기억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수계 늑대를 창조해낸 그 마녀라면, 무엇인가 알고 있는 게 있지 않을까?’

 

여행자는 순식간에 목표를 파악했다. 

그리고 자신의 기억 저편을 뒤지며,

마녀와 우연히 만났던 기억들을 천천히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가물가물한 기억이 기시감과 겹쳐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게 방해했지만,

여행자는 예언의 날 당일, 

자신이 ‘마녀’와 대화를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잿빛의 강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여행자? 나 화났…. 어? 어! 여행자! 갑자기 어디 가는 거야!!”

 

갑자기 대화 도중 말없이 달려나가는 여행자를 본 페이몬은 이상함을 느끼며 

여행자를 따라가려 했지만,

순식간에 멀어져 버린 여행자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

.

.

 

“모나, 마녀회 사람들을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해?”

 

잿빛의 강 구석에 있는 한 테이블에 앉아 차를 마시던 모나는,

갑작스럽게 나타나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대는 여행자의 모습에 사래가 들리고 말았다.

 

“켁, 켁- 여행자,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기침을 너무해서 눈 끝에 살짝 눈물이 맺힌 모나가 여행자에게 따지듯 물어보았다.

 

갑작스럽게 다가온 것도 모자라, 터무니없는 요구를 들이미는 여행자의 태도가 오늘따라 이상하게 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녀회’라니.

 

모나는 마녀회의 ‘마’를 듣자마자 자신의 스승님을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할망구의 친구들을 만나고 싶진 않은데….”

 

모나는 살짝 어지러움을 느끼며 왼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녀의 표정은 어느새 곤란하다는 듯 두 눈을 찡그리다가, 

여행자의 진지한 표정을 힐긋 쳐다보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모나, 부탁이야. 만나야 할 사람이 있어.”

 

여행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나에게 집요하게 질문했다.

 

물론 여행자는 이 이야기가 그녀에게 실례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아니라면 ‘마녀’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여행자는 천천히 그녀의 얼굴에 자신의 눈동자를 들이대며 애원했고,

모나는 여행자의 눈빛을 조심히 바라보며 

흔들리지 않는 눈빛의 여행자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녀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찻잔에 담긴 차를 옆에 흐르는 수도에 확 부어버린 후,

찻잔을 뒤집어 티스푼의 뒷면으로 찻잔을 “틱 틱 틱” 빠르게 세 번 쳤다.

 

“...모나? 뭘 하는 거야?”

 

“조금만 기다려봐.”

 

모나는 여행자의 질문에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이야기했다.

 

그런 모나의 행동을 보게 된 여행자는 그녀의 행동이 평소와는 다르단 걸 깨닫고 

조급한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리고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잠자코 모나의 반응을 보며 기다리던 여행자는,

몇 분 동안이나 그 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는 모나의 모습을 보며 하품을 했다.

 

“모나, 언제쯤-”

 

지루함을 기다리지 못한 여행자가 입을 열려던 순간,

모나가 두들긴 찻잔이 순식간에 공중으로 떠오른 것을 보게 된 여행자는 화들짝 놀랐다.

 

“으왓, 깜짝아!”

 

공중으로 떠오른 찻잔은 어느새 나타난 뜨거운 주전자 옆으로 천천히 다가갔고,

주전자는 찻잔에 조금씩 분홍빛의 액체를 따르기 시작했다.

 

“...여행자, 나는 이만 가봐도 되는 거지?”

 

모나는 여행자와…. 공중에 뜬 찻잔의 반응을 힐긋 바라보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나, 잠깐-”

 

여행자는 갑작스럽게 자리를 뜨려는 모나를 막으려 했지만, 

순식간에 모나는 자리를 정리하고 계산을 마쳤다.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미안!”

 

그녀는 순식간에 잿빛의 강 밖으로 빠르게 달려나갔다.

 

“모나! 모나아아!”

 

순식간에 자리를 비워버린 모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행자의 뒤편에서,

굉장히 높은 톤의 목소리가 공중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손님을 불러놓고 기다리게 만들어놓고, 도망가기까지 하다니. 요즘 아이들은 예의가 없구나?”

 

여행자는 공중에 울려 퍼진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잠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여행자의 눈앞에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찻잔 하나가 빠르게 훅 다가왔다.

 

“우왓!”

 

여행자는 갑작스럽게 들어온 찻잔에 중심을 잃고 쓰러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야…. 아파라….”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정신을 못 차리던 여행자의 앞에, 

찻잔의 옆에 있던 주전자가 천천히 다가오며 물었다.

 

“그래서? 마녀를 보고 싶다고 한 이유는 뭐야?”

 

여행자는 공중에 뜬 주전자와 찻잔을 바라보며 예언의 날 때 만나게 된 마녀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을 상상하며 대조했다.

 

뜨겁게 퍼져나가는 차의 온기.

여전히 따뜻한 기운을 내뿜는 주전자.

 

그러나 자신이 그때 들었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에는 어느 정도의 차이가 존재했다.

 

“...당신은 누구죠?”

 

여행자의 질문이었다.

여행자의 질문에 공중에 떠오른 찻잔은 “흐응-”하는 소리와 함께 약간 기울어졌다.

 

마치 보이지 않는 존재가 목을 축이는 듯, 

공중에 엎질러질 듯 말듯한 찻잔이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찻잔 안에 담긴 분홍빛 액체의 양이 눈에 띄게 줄어있었다.

 

여행자는 찻잔의 기울어짐을 집중해서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마녀잖아. 보면 모르겠니?”

 

여행자는 찻잔 안의 액체가 줄어들기 전 의문의 목소리와 지금의 목소리에 어느 정도 차이가 생겼다고 느꼈다.

 

마치 메마른 식물에 물을 주는 것처럼, 의문의 목소리에 약간의 생기가 되돌아온 느낌이었다.

 

여행자는 생기가 돌아온 그녀의 대답에 조금 더 집요하고 정확하게 질문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말을 이었다.

 

“...당신의 이름 말이에요. 

그리고 수계 늑대를 창조한 창조자가 마녀회의 구성원 중 한 명이라고 들었는데요.”

 

여행자는 마녀의 대답에 그녀에게 질문을 돌려 말했다간 원하는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며 확실하게 자신의 뜻을 전달했다.

 

마녀는 여행자의 첫 질문인 “이름”에는 크게 동요하지 않았지만,

수계 늑대라는 이야기를 듣자 입이 있을법한 위치로 옮겨지던 찻잔을 멈칫하고 공중에 세웠다.

 

“...꽤 당돌한 아이네, 좋아. 별것도 아니니까 말해주도록 할까.”

 

마녀는 말을 끝마침과 동시에 찻잔과 주전자를 탁자 위에 살포시 올려놓고,

자신의 옆자리에 배치된 의자를 뒤로 쓱 빼며 여행자에게 이야기했다.

 

“...뭐해? 언제까지 그렇게 바닥에 주저앉아있을 거야?”

 

“...아, 감사합니다.”

 

여행자는 마녀의 호의에 감사함을 표하며 그녀가 옮긴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여행자가 자리에 앉은 것을 확인한 마녀는, 

자신이 들고 있던 찻잔에 주전자 속에 담긴 분홍빛의 차를 컵에 따라 여행자의 탁자 앞에 놓아주었다.

 

“마셔, 귀한 손님들한테나 대접하는 꽃잎으로 만든 차거든.”

 

여행자는 마녀의 대답에 자신의 눈앞에 놓인 찻잔에 담긴 분홍빛의 차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찻잔 속에선 김이 올라와 여행자의 코끝을 스쳤다. 

여행자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차 속에서 느껴지는 향을 음미했다.

 

“어, 이건….”

 

여행자는 찻잔 속의 김에서 어딘가 그리운 향기를 맡게 되었다.

 

분명 이전에, 까마득히 오래된 기억 속에서 이 차에서 피어나는 향기와 비슷한 냄새를 찾아내었다.

 

“저기, 혹시 이 차…. 뭐가 들어갔는지 알 수 있을까요?

어딘가…. 그리운 향기가 나서요.”

 

여행자는 알 수 없는 그리운 향기에 차의 정체를 알고 싶었다.

 

마녀는 여행자의 질문에 천천히 주전자를 공중으로 올려 찰랑찰랑 소리를 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 차? 글쎄. 이름을 물어보는 건 자주 들어봤는데, 그립다는 사람은 처음 보네.”

 

이윽고 마녀는 깊게 숨을 뱉으며 다음에 나올 말에 대해 조금 생각하다,

찰랑거리는 주전자를 탁자 위로 툭 하는 소리와 함께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여행자를 충격에 빠지게 했다.

 

“...말린 인티바트 꽃잎으로 우려낸 차야.”

 

.

.

.

 

시간이 한 번 더 되돌아옴을 느낀 청년은 손톱을 씹으며 초조함을 느끼고 있었다.

 

딱 딱 딱.

 

청년은 이와 손톱을 부딪치며 여행자에게 회중시계를 넘겨준 행동을 조금씩 후회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다간 어르신께 들키는 건 시간문제겠군.’

 

이대로 가다간 자신이 회중시계를 여행자에게 넘긴 것을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자신이 운명의 시계를 만진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다고 생각한 청년은,

어떻게든 운명의 시계 통제권을 가져 오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운명의 시계는 노인이 꽉 잡고 있었다. 아니, 계속해서 붙들고 있을것이 분명했다.

 

청년은 조용히 머리를 굴리며 노인의 뒤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딱 딱 딱.

 

다시 한번 이빨과 손톱이 부딪히는 소리가 태엽과 태엽이 맞물리는 소리에 맞춰 공중에 울려 퍼졌다.

 

“...거 참, 나의 행동으로 나올 결과가 그렇게 두려운 건가?”

 

딱딱거리는 소리를 들은 노인이 불안에 떨고 있는 청년을 뒤돌아 바라보며 윽박질렀다.

 

청년은 그의 호통에 화들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추스르고 뒤돌아 노인에게 대답했다.

 

“..어르신, 어르신이 뭐가 두려운 것인지는 잘 압니다. 

하지만 지상의 흐름은 여전히 온전합니다. 그러니 그만두심이-”

 

청년은 이제라도 그의 태엽 조작을 멈춘다면 상황이 조금 나아질 것이라 생각하며 노인을 설득하려 했고,

노인은 청년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용히 과거를 회상하는 듯, 허공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네가 태어날 때보다 한참 전의 일이었지. 우리가 아직 이 세계에 도달하지 않았을 때였어.”

 

노인은 천천히 과거를 회상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청년을 뒤돌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그가 살았던 세계는 티바트는 따위일 정도로, 크게 발전한 문명을 보유하고 있었다.

 

[“인류를 위해, 약속된 미래를 위해.”]

 

그들은 별을 탐구했다. 과거를 구축했다, 미래를 예측했다.

 

그들의 왕국은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영원한 금빛의 왕국은 세계로, 우주로 뻗어 나가 운명을 개척하며 미래를 약속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문명을 확장하던 금빛의 문명은, 

하루아침에 등장한 정체불명의 위협에 모든 것이 무너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한순간에 모든 것을 한 줌의 재로 만드는 위협.

 

그들은 자신의 세계가 파괴되어가는 와중에도,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행동이 반복될수록, 세계의 파괴가 점점 가속화되었다.

 

그렇게 그들이 ‘위협’의 행동 양상과 조건을 알아냈을 땐-

 

이미 그들의 세계는 파괴되어, 마지막으로 남은 자들만이 우주를 떠돌았다.

 

그들은 파괴되어가는 자신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새 문명의 발전이 거의 없는 척박한 땅에 도착해 개척을 시작했다.

 

그들은 그 땅을 방주(teyvat)라 명명하며, 자신들의 규칙을 그 땅 위에 새겼다.

 

[“-운명을 개척하고, 죽음을 기만하리라.”]

 

“자네는 아는가? 우리 동포들이 어떻게 죽어 나갔는지를.”

 

회상을 마친 노인은 비릿한 과거의 맛을 음미하는 듯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입을 우물거렸다.

 

“눈앞에서 사랑하는 이가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것을 본 적이 있나?

갈기갈기 찢어진 몸에서 튄 고깃조각이 입속으로 들어와 짙은 비린 맛을 느껴본 적이 있나?”

 

“어르신, 하지만-”

 

“그래서 자네가 문제인 거야.

에게리아 그 머저리가 금기를 범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란 말이다!”

 

노인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열변을 토하며 청년의 대답을 가로채며 화를 냈다.

 

청년은 그의 모습에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희망을 완전히 잃었다. 

그렇게 그를 설득하려면…. 조금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청년은 노인의 모습에 진정하라고 손을 위아래로 내렸다. 

그의 모습을 본 노인은 그제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자네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나는 우리의 동포를 위해 위협을 막아야 해.”

 

노인은 진정된 가슴을 부여잡고 자신의 눈앞에 있는 수많은 태엽을 천천히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그는 침착한 눈빛으로 정교하게 제작된 태엽의 끄트머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게 섭리와 규칙을 거스른다고 해도 말이다.”

 

청년은 그의 말에 동의하는 척 고개를 끄덕이며 의문을 가졌다.

 

정말 노인 말이 사실이라고 한들, 세계의 흐름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마치 이렇게 될 것이란 걸 예상한 듯, 

운명의 시계는 평소처럼 톱니바퀴를 부딪치며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할 뿐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계 늑대.

예언이 ‘실행’되어버린 폰타인.

 

청년은 이 모든 것이 노인의 태엽 조작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이것이 노인을 설득할 증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 점점 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어르신이 세계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건 확실하다.’

 

.

.

.

 

“...어째서 그 꽃이-”

 

“...본론부터 이야기하자.”

 

마녀는 여행자의 질문에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여행자의 질문을 제지했다.

 

여행자는 마녀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아 몸을 조금 움츠렸지만,

여행자의 모습을 본 마녀가 이내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를 이었다.

 

“...일단 네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 하지 않겠어? 

호기심이 많은 건 좋지만, 그러다간 중요한 것들을 잊고 말 거야.”

 

여행자는 마녀의 대답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맞는 말이라고 느꼈기에, 움츠러든 자세를 고쳐앉고 경청할 준비를 했다.

 

마녀는 여행자가 의자를 끌어당겨 바른 자세로 앉는 것을 확인한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글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간단하게만 설명해 주셔도 돼요. 전 그분을 만나고 싶으니까요.”

 

여행자는 마녀를 보챌 생각은 없었지만, 

조금 있으면 놈들이 들이닥칠 시간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흐응-, 만난다고 다 될 일이 아닐걸?”

 

마녀는 조급해하는 여행자의 대답에 흥미로움을 느끼며 여행자를 초조하게 만들기 시작했다.

 

여행자는 그런 마녀가 조금은 원망스럽게 느껴졌지만, 

어렵게 얻은 기회인 만큼 그녀를 불편하게 하고 싶진 않았다.

 

“...죄송합니다. 재촉하려던 건 아니었어요.”

 

마녀는 여행자의 대답에 “쿡”하고 웃으며 공중에서 찻잔 하나를 더 꺼내 주전자 속의 내용물을 천천히 따르기 시작했다.

 

찻잔 속에 가득 찬 내용물은 여행자의 앞에 놓인 찻잔 속의 색보다 훨씬 금빛에 가까웠다.

 

“...그래도 운이 좋네. 내가 수계 늑대를 창조한 사람과 친하거든.”

 

“...진짜요?”

 

여행자는 마녀의 대답에 얼굴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 공중에 떠있는 찻잔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물었다.

 

마녀는 여행자의 대답에 찻잔을 살짝 위아래로 움직여 고개를 끄덕이는 듯한 행동을 보여주었다.

 

이윽고 찻잔의 내용물이 조금씩 비워졌다. 

그렇게 절반 정도 비워진 찻잔이 다시 탁자에 놓일 때였다.

 

“그전에, 수계 늑대를 왜 물어보는 거야? 뭔가 문제라도 있어?”

 

마녀는 여행자의 질문을 곱씹다 질문의 내용이 “누군가를 알아야 한다”라는 사실로 귀결됨을 깨달았고,

흥미가 생긴 그녀는 여행자에게 역으로 질문했다.

 

여행자는 마녀의 질문을 예상하기라도 하듯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마녀는 “응, 그렇구나.”라며 여행자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신기하네. 네 이야기가 전부 사실이라고 믿기는 힘들겠지만,

그게 사실이라면 꽤 골치 아플 것 같은데.”

 

“뭔가 아는 게 있나요?”

 

마녀는 여행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여행자가 시간을 되돌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금빛의 원소가 통하지 않는 수계 늑대’라는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다.

 

“짐작 가는 게 몇 개 있는데, 들어볼래?”

 

마녀의 대답은 여행자를 흥미로워하기에 충분했고,

마녀는 여행자의 머리 위에 찻잔을 빙글 돌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일단 그 수계 늑대는 그 사람이 만든 건 아닐 거야.

모든 티바트의 생물들은 원소의 법칙에 구애받아. 

그게 설령 세계 외의 존재라고 해도 말이야.”

 

여행자는 마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강림자인 여행자도 원소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 것이니까.

 

“음…. 조금 터무니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한번 들어볼래?”

 

여행자는 마녀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대답에 응했다.

 

아무리 터무니없는 이야기라도, 그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해낼 자신이 있었다.

 

마녀는 여행자의 눈매를 찻잔으로 쓱 훑었다.

금방이라도 내용물이 쏟아져 얼굴로 튈 것 같았지만, 

따뜻한 온기만이 여행자의 눈동자를 천천히 스쳐 갔다.

 

“...그 수계 늑대. 이 세계의 생물이 아닐지도 몰라.”

 

“...그게 무슨 소리죠?”

 

“생각해봐. 그 수계 늑대가 어디서 오는지 알아본 적 있어?”

 

“균열을 열고 나왔던 걸 본적은 있는데-”

 

“아니, ‘어디서 오는지’알고 있냐구.”

 

마녀의 대답에 여행자는 이전의 일을 되짚어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그들이 열고 나온 차원의 형태는 보랏빛이 아닌 금빛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일반적인 수계 늑대라면 심연에서 오겠지만, 

그 녀석들의 본거지도 모르면서 ‘균열’이라고 말하면 알 수가 없겠지?”

 

마녀의 말이 옳았다.

여행자는 눈앞의 현상에 시선을 빼앗겨 수계 늑대의 근본적인 서식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만약 이 세계의 생물이 아니라면 어떡하죠?”

 

여행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마녀는 여행자의 질문에 “흠.”하며 조용히 생각하는 듯 다시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여행자는 다시금 초조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글쎄, 그건 네가 알아서 해야겠지.”

 

“...그렇군요.”

 

마녀의 대답을 맞받아친 여행자는 다시 말이 없어졌다.

 

또 한 번의 정적에 주머니 속 회중시계의 똑딱거림이 점점 켜졌다.

 

똑딱 똑딱 똑딱.

 

“...이전에 마녀회에서 토론했던 내용이 하나 있는데….”

 

먼저 이야기를 꺼낸 건 다름 아닌 마녀였다. 

여행자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녀에게 집요하게 질문했다.

 

“무슨 이야기죠?”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야기하면 안 되는 내용이었는데.”

 

“뭐든 좋으니 이야기해주세요.”

 

마녀는 아차 하는 듯 여행자의 대답에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여행자의 집요한 물음에 마녀는 결국 

“이래서 눈치 빠른 사람은 골치 아프다니까.”라며 입을 열었다.

 

마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지금의 여행자에게 새로운 가설을 제시했다.

 

“...여행자, 혹시 ‘붕괴’라는 개념을 알아?”

 

“‘붕괴’?”

 

마녀는 여행자의 반응을 바라보며 여행자가 ‘붕괴’라는 개념을 처음 접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마녀는 진지한 눈빛으로 찻잔을 바라보며 사색에 잠긴 여행자의 잔에 주전자 속에 있는 액체를 천천히 풀었다.

 

찻잔 속에서 고동치는 물방울은 이내 검은빛으로 바뀌었고,

검은빛의 액체는 수조 안의 물감처럼 천천히 찻잔 안을 뒤덮기 시작했다.

 

“간단하게 설명해 줄게. ‘언젠간 이 세계에 닥칠 수도 있는 위기’ 정도랄까.”

 

마녀는 찻잔 옆에 놓인 조그마한 티스푼을 찻잔 속에 넣고 천천히 젓기 시작했다.

 

“‘붕괴’라는 재난은, 어느 세계에서나 나타날 수 있지.

그리고…. 그 세계에 맞는 형태로 출현해 문명을 차례로 파괴해 갈 거야.”

 

검은빛의 물방울은 천천히 찻잔 속에서 자신의 영역을 넓히며

찻잔 전체가 탁한 색으로 물들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네가 시간 여행을 정말 했다면, 내게 말해준 ‘운명의 부재’가 정말 그녀에게 나타났다면-”

 

마녀는 말을 이으며 찻잔 속의 내용물을 천천히 젓다가,

찻잔 속의 액체가 완전히 탁해지자 티스푼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불가능한 일도, 아니겠지?”

 

여행자는 귓가에 속삭이는듯한 마녀의 대답에 순간 두 눈을 번뜩였다.

 

붉은 머리의 청년이 말해주었던 “운명의 시계”에 대한 개념.

죽음을 먹이로 시간을 되돌리는 “회중시계’

시간을 되돌리기 전 모나가 했던 “존재하지 않는 운명의 자리”.

 

그리고, 마녀가 이야기해준 ‘붕괴’의 개념.

 

어느 하나 겹치는 것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여행자는 이 ‘붕괴’라는 개념이 모든 사건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천의 못으로 폰타인을 멸망시키려던 계획은 이미 실패했고,

“운명”을 지워 “결과”로 예언이 실행된 것처럼 꾸민 것이 지금의 상황이야.

 

그럼, 수계 늑대의 등장이 “세상의 재앙”이라면, 

그들이 마녀가 말해준 “붕괴”라는 게….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야.’

 

그렇게 여행자가 마녀에게서 들은 정보를 취합하는 순간, 잿빛의 강이 또다시 크게 진동했다.

 

“...벌써…!”

 

여행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미 시작된 재앙은, 여행자에게 악몽처럼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여행자는 시간이 없음을 느끼며, 

잽싸게 자신의 허리춤에 매달린 검의 상태를 가볍게 점검하고 잿빛의 강 출구로 뛰어나가려 했다.

 

그때, 분주하게 준비하던 여행자에게 마녀가 조용히 속삭였다.

 

“여행자, 아직 질문 하나가 더 남았는데. 듣고 갈 거야?”

 

“죄송해요. 시간이-”

 

“내 이름 말이야. 듣고 싶지 않았어?”

 

여행자는 마녀의 대답에 흠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행자의 뒤쪽엔 공중에 뜬 찻잔과 주전자가 뜨거운 김을 내며 조용히 윙윙대고 있었다.

 

“...시간이 없어요. 빨리-”

 

“내 이름은-”

 

마녀는 공간을 열어 조심히 찻잔과 주전자를 집어넣는 듯, 

균열 사이로 찻잔과 주전자를 천천히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윽고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황금의 마녀’, 라인도티르야.”

 

“잠깐, 방금 뭐라고-”

 

이상함을 느낀 여행자가 뒤를 돌아보았을 땐, 

공중에 떠오른 티스푼만이 바닥으로 “짤그랑-” 소리를 내며 떨어질 뿐이었다.

 

여행자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바로 엔죠가 건네준 그 고서에서 그녀의 정체를 읽어본 적이 있다.

 

그녀는 여행자에게 거짓말을 했다.

 

수계 늑대를 창조한 건, 자신이 잘 아는 사람이 아니라-

 

‘본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