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바스.


이나즈마의 라이덴 쇼군에게 반갈죽 당한 뱀의 마신.


현재의 이나즈마로부터 수천년쯤 더 전에 와타츠미 섬을 통채로 물 위로 끌어올리고 이나즈마를 위협을 정도로 강성했던 신이지만, 결국에는 죽어서 뼈만 남긴 채 패배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이런 오로바스를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섬이 있으니, 바로 와타츠미다.


와타츠미가 오로바스를 믿는 이유는 단순한데, 바로 오로바스가 원래 그들의 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나즈마의 주민들이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 라이덴 쇼군을 믿는 것이 아니라 그냥 이나즈마에서 태어나 자연스레 번개 신의 신도가 된 것과 비슷한 맥락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점이 있다.


분명 마신전쟁은 2000년 전 즈음에 끝났고, 와타츠미는 진즉에 이나즈마의 일부가 되었는데도 아직도 오로바스를 열렬히 신앙하고 있다는 점이다.


신앙이야 원래 변하기 어렵다지만, 와타츠미의 신인 오로바스가 직접 '나루카미는 큰 봉우리 같은 나라, 문화와 생활 양식을 본 받겠다'라고 말하면서 아예 건축 양식과 이름 작명법. 기타 생활에서 쓰이는 것들까지 전부 다른 이나즈마와 다를 바가 없는데도 유독 신앙만은 극렬히 통합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유저들은 이런 것을 '전라츠미 수준 ㅇㅇ' '그 섬' 이라면서 까기 바쁘지만. 나는 여기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와타츠미 섬을 보자.


(사진은 퍼온 것)


일단 보기에도 뭔가 뭔가스러운 분위기가 팍팍 풍기는데, 인위적으로 오로바스가 만들어 물 밑에서 일으켰다는 사실에 걸맞게 자연적으로 생성된 섬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지형이 인상적이다.


이런 섬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식량 문제인데, 실제 게임 스토리 상에서도 식량 문제는 여러 번 언급될만큼 와타츠미의 식량 사정은 극히 좋지 못하다.


끽해야 무나 좀 자라는 토질로는 막부와 정면 승부를 벌일 정도로 많은 와타츠미 섬의 인구를 부양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오로바스가 나루카미의 국토를 침범한 이유도 더 기름진 토양을 원해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바로 독점이다.


기본적으로, 한정된 공간에 한정된 자원이 놓여지면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것은 '경쟁'이다. 경쟁을 통해서 한정된 자원을 차지하지 못하면 도태, 더 쉽게 말하면 굶어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헌데, 아무리 식량 사정이 개판이어도 와타츠미 섬에도 나름 질서가 잡혀있고, 시장도 있으며, 축제를 열만큼의 여유도 있기 때문에 그 다음 단계를 봐야 한다.


그 다음 단계는 독점과 통제인데, 이는 전근대 시대에 왕이나 영주들이 금주령을 내리듯 생존에 필수적인 물자들을 자신들의 권위와 권력을 이용해 독점하고, 사람들에게 배분할 수 있도록 통제를 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와타츠미 섬에서 이런 권위를 가진 자는 오로바스였을 것이고, 오로바스가 오로/바스가 된 다음에는 아라히토가미 무녀, 즉 산고노미야 코코미의 일족에 이 권위가 이양되었을 것이다.


산고노미야 가문의 권위가 강력하다는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데, 산고노미야 일족의 궁궐인 산호궁은 그 자태로 볼 때 나루카미 성의 성과도 맞먹으며, 아예 섬 자체가 산호궁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흔히들 못 사는 나라일수록 지도층의 사치가 커진다는 말이 있는데, 와타츠미는 그 속설과 완벽히 들어맞는다. 지도층도 못 먹는 것이랑 지도층은 잘 먹는 것 사이에는 많은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여기서 우리는 산고노미야 코코미의 직책이나 여왕이나 공주도 아닌 '무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무녀라는 것은 곧 신내림을 받은 여인이라는 것인데, 여기서 이 '신'이란 당연히 오로바스를 의미할 것이다. 


그런데 그 무녀가 국정을 도맡는 신정일치 체제 속에서, 신이 죽은 것은 지도층의 정통성이 통채로 날아갔다는 것과 다름없다.


그렇다면 혁명 비슷한 것이라도 일어나야 정상이겠지만. 여기서 산고노미야 가문은 유서 깊은 수단인 '갈라치기'를 시전했다. 뭐, 젠더에 관한 것은 아니고, 죽은 신을 위해서라도 저 나루카미 놈들과 쉬이 화해해선 안 된다는 프로파간다를 주입한 것이다.


지금까지 숱한 죽음을 봐온 할매조차 전쟁 그만하자가 아니라 이대로 전쟁 끝나면 우리 가오가 안 산다고 지랄하는 것을 볼 때, 이 프로파간다는 매우 성공적으로 먹혀들었으며, 그에 따라 유일하게 와타츠미가 나루카미와 차별될 수 있는 구심점인 '신앙'에 대해 교조주의적인 경향이 강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게다가 원신 세계 속에서는 마신이 죽은 게 진짜 죽은 것도 아니고, 물 위를 걷는다거나 하는 기적도 충분히 일으킬 수 있으니 신이 죽었다는 것은 의외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여기서 산고노미야 일족의 스탠스가 중요해지는데, 일단 저들도 오로바스가 반으로 갈라진 이상 가장 중요한 식량도 자급하지 못하는 와타츠미가 섬 하나를 두 개로 만드는 라이덴 쇼군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일단 숙이고 들어는 가되,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유지할 수 있도록 신앙의 자유와 고도의 자치권을 요구했을 것이고. 그 당시 마코토가 결정권자였는지 에이가 결정권자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요구는 받아들여져 와타츠미는 이나즈마의 자치령이 되었다.



근데 일단 과거사가 과거사이다 보니 이나즈마와 와타츠미는 생활 양식이나 언어, 문자 등은 공유해도 신앙에 대해서만큼은 끝내 합의하지 못했다.


산고노미야 일족도 라이덴을 섬기게 되면 자신들의 권력 기반이 싸그리 날아가고 산호궁 철거당할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 백성들을 선동해가며 오로바스 신앙에 더 광신적으로 매달리게 되었을 것이고 말이다.


종합해보자면, 와타츠미가 아직도 오로바스 신앙에 매달리는 이유에는 산고노미야 가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아마 이 가문이 아니었다면 와타츠미는 진즉에 라이덴 쇼군의 발 닦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구심점과 최고 권력 기반이 없으니 다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에 돌입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애초에 자원 자체가 너무나도 적은 와타츠미로서는 문자 그대로 멸망이나 다름없다.


산고노미야 가문은 이런 백성들의 두려움을 이용하여 죽은 신에게 아직까지 제사를 지내며 와타츠미의 생활 기반을 꽉 틀어쥐고 있으니, 아마 라이덴 쇼군이 와타츠미를 그들의 신과 같이 반으로 가르지 않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저렇게 살아갈 가능성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