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 원신문학)폰남충 라이오슬리와 닐루가 연애하는 글(상편).txt - 원신 채널 (arca.live)


*본 소설은 모두 픽션입니다.

*주의: 캐릭터의 대한 각종 음해성 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4)

닐루는 그날 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통 오지 않았다.

돈 많은 외국의 공작이 만나보길 원한다니 솔직히 꿈만 같았다.

그렇게 돈 많은 남자 한 번 제대로 잡기만 한다면 모라를 펑펑 쓰면서 전 세계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비싼 명품 컬렉션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꿈에 그리던 생활을 망상하니 괜시리 기분이 좋아졌다.

혹여나 정말 사기당하는 게 아닌가 의심도 했었지만 상관없다. 그냥 맞선만 보고 오는 건데 뭐.

아주 오랜만에 설렘과 행복이란 감정을 느끼며 닐루는 곤히 잠에 빠졌다.



5)

며칠 뒤

"닐루 씨, 이쪽이야!"

"아, 시그윈 씨!"

시그윈은 미리 선착장에 도착해 있었다. 닐루가 보이자 그녀는 더듬이와 손을 흔들며 폴짝폴짝 뛰었다.

시그윈을 찾아 두리번두리번 걸리던 닐루는 그 모습을 보고 헐레벌떡 뛰어갔다.

"시간 딱 맞춰 왔네?"

"후...뭔가 벌써부터 설레고 긴장되네요."

"아직 폰타인에 도착도 안 했는걸..."

"베이다 항구 행 배가 곧 출발합니다!"

뱃고동이 필요 없을 정도의 쩌렁쩌렁한 뱃사람의 외침이 항구에 울렸다. 시그윈과 닐루는 서둘러 배에 탑승해 자리에 앉았다.

"저, 시그윈 씨. 저번에는 죄송했어요. 제가 워낙 힘든 일이 많아서 그만 실례를 범했네요..."

얼레, 이 여자 좀 보소. 더듬이 잡아 채면서 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뻔뻔하게 앵기는 꼴이라니, 라고 시그윈은 마음속으로 생각했지만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뭐 어차피 공작을 감당하려면 그 정도 깡다구는 있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리고 적어도 사과는 할 줄 아는 년이니 몇백 살은 더 먹은 자신이 너그럽게 용서해주어야겠다고 시그윈은 생각했다.

"아니에요 닐루 씨. 닐루 씨 같은 분을 힘들게 만든 주변 사람들이 잘못한 거죠."

"시그윈 씨...!"

닐루는 시그윈의 나긋나긋한 위로에 감동받은 듯 눈망울이 그렁그렁했다.

"우, 울지 마요! 화장 다 번지겠어요."

시그윈은 울먹이는 닐루를 토닥이며 공작의 매서운 스트레이트 펀치에 눈물 흘리지나 않으면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6)

베이다 항구를 지나 바다 이슬 항구까지 오는 길은 먼 길이었지만 시그윈과 닐루는 서로 화장품과 피부 미용, 맛있는 향토 음식들 같은 이야기를 하며 즐겁게 시간을 때웠다.

"의외로 닐루 씨랑은 코드가 잘 맞는 것 같네. 덕분에 오는 길이 심심하지 않았어."

"헤헤, 고마워요. 그런데 의외라니 그게 무슨..."

"아, 폰타인이다! 밖을 봐!"

시그윈이 배 안에 조그맣게 뚫어 놓은 창을 가리키며 화제를 돌렸다. 둘은 갑판 위로 나가 위풍당당하게 지평선을 그리며 솟아 있는 거대한 폭포수를 구경했다.

"와아, 진짜 대단해요! 살면서 이런 광경은 처음 봐요!"

"폰타인에 온 걸 환영해! 레일 보트를 타고 폰타인성까지 가는 데 또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오오오...춤에 대한 영감이 마구마구 떠올라요! 여기가 좀 더 넓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순수한 소녀처럼 눈을 초롱초롱 밝히며 흥분하는 닐루를 보고 시그윈은 이제 이 여자의 어느 쪽이 본모습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바다 이슬 항구에 배가 정착했다.

시그윈은 해맑게 내려서 이곳저곳을 신기한 눈길로 쳐다보는 닐루를 보고 외국인들 눈엔 폰타인도 참 신기하게 보이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닐루 씨, 함부로 돌아다니면 안 돼! 폰타인은 법률이 엄격해서 외국인은 여행 수속 절차를 꼭 받아야 하거든..."

이어서 복잡한 수속 절차도 척척 마치고, 근처에서 파는 수정 소라 케이크를 사 먹으며 클레멘타인선도 기다리고, 아이벨의 열정적인 가이드를 들으면서 폰타인성에 도착했다...닐루가 아이벨에게 계속 이것저것 물어봐서 그녀가 당황스러워했다는 것만 빼면 순조로웠다.




7)

"폰타인성은 정말 크네요...길 잃기 딱 좋은 것 같아요."

호텔까지 무사히 닐루를 데려다줬지만 시그윈은 어째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닐루 씨, 내일 데리러 올 테니까 구경하더라도 호텔에서 멀리 가지 마세요. 아시겠죠? 향신료 냄새 없애는 비누로 몸 꼭 구석구석 깨끗하게 씻으시고요."

"네에, 시그윈 씨. 호텔까지 데려다 주셔서 감사해요. 음? 어디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아 좀! 수메르에서 살던 것처럼 행동하다간 잘못하다 수사청에 끌려간다고요. 폰타인의 명물인 심판을 직접 체험하고 싶지 않으면 밥은 얌전히 호텔에서 드세요, 제발!"

"네 네, 조심할게요. 걱정하지 마시고 빨리 들어가세요."

다른 건 모르겠고 닐루가 심판대에 오르는 일만큼은 없어야 할 것이었다. 미팅 상대가 아니라 죄수 신분으로 만나게 되면 그것만큼 세기의 코미디도 따로 없을 것이니 말이다.

일단 당장의 불안감은 뒤로 하고 시그윈은 얼른 메로피드 요새로 향했다. 미팅을 준비해야 할 건 닐루뿐만이 아니라 공작도 마찬가지니, 사전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한다.




8)

시그윈은 그 길로 빠르게 메로피드 요새로 돌아갔다.

"공작님, 들어가도 될까요?"

집무실 문을 콩콩 두드렸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공작님? 엥, 문이 잠겨있네."

"공작님은 멜모니아궁에 보고서를 제출하러 가셨어요. 저녁에나 오실걸요."

교도관의 말에 수첩을 꺼내 안에 붙어있는 작은 달력을 확인하자 정말 월간 보고서 제출 및 회의가 잡혀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돌아올 때 여유롭게 간식이라도 좀 사 들고 돌아올걸, 하고 시그윈은 후회했다.




9)

그 시각 닐루는 시그윈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은 채 호텔에 대강 짐만 던져두고 폰타인 맛집 탐방을 시작했다.

우선 아까 맡았던 군침 도는 튀김 냄새를 따라 홀린 듯이 걸어갔다. 걸은 지 몇 분이나 지났을까 사람들이 둘셋 줄 서 있는 가게를 발견하고 일단 줄을 서 사장이 한창 튀김을 만드는 걸 지켜봤다.

튀김옷을 입힌 생선이 챠르르르 소리를 내며 기름에 깊숙히 빠지자 닐루의 침샘에서 폭포수같은 침이 고였다. 생선을 튀기는 통 옆에는 길쭉하게 자른 감자 조각을 튀기고 있었다. 닐루 사전에 맛없는 튀김이란 없다. 분명 맛있을 거라 생각하며 하염없이 차례를 기다리는 게 고역이었다.

얼마 안 되어 닐루의 차례가 왔다.

"사장님, 앞에 분들이 시켰던 거로 부탁드릴게요."

"음? 외국인 손님이신가? 하하, 피시 앤 칩스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게 해드리죠."

사장은 능숙한 솜씨로 생선 필레와 감자를 튀겨서 신문지와 기름종이에 싸 주었다. 노릇노릇하게 잘 익은 튀김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왔다.

"자, 소금하고 식초, 소스는 입맛에 맞게 쳐서 드세요."

닐루는 한껏 기대에 부풀어 튀김을 크게 배어 물었다. 바삭하고 짭잘한 튀김에 새콤한 소스까지 궁합이 꽤 괜찮았다. 하지만 이걸로 만족하기엔 뭔가 좀 아쉽다... 폰타인 음식의 정수가 겨우 이 튀김 쪼가리라면 실망을 금치 못할 것이다.


닐루는 근처에서 다른 식당을 찾아봤다. 다행히도 멀지 않은 곳에 레스토랑을 찾을 수 있었다.

'폰타인 가정식 전문'이라 써진 간판에 닐루는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웨이터가 내놓은 메뉴판을 잠시 골똘히 지켜보더니 말했다.

"폰타인 양파 수프랑 폰타인 푸아그라, 오리 콩피, 송어 아망딘, 항구 트뤼프, 라자냐랑 폰타에 풍선귤 타르트 주문할게요."

"손님, 혹시 다른 일행이 있으신가요?"

"아뇨, 저 혼자인데요."

웨이터는 닐루와 자기가 적은 메모를 수 차례 번갈아 쳐다보고는 뭐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사라졌다.


이윽고 한상 가득 차려진 만찬에 닐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뭐부터 먹어야 할 지 고민하기도 전에 닐루의 손은 이미 바쁘게 요리들을 입속에 집어 넣고 있었다. 달큰하고 걸쭉한 수프에 쫄깃한 내장, 감칠맛이 끝내주는 고기 육즙, 시원하게 목구멍을 넘어가는 폰타...수메르 향신료가 없어서 그런지 살짝 느끼하고 어색한 것 같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런 담백함과 재료 본연의 맛이 아주 매력적이었다.


마지막 디저트 접시에 묻은 크림까지 싹싹 핥아 먹고 있는 닐루에게 웨이터가 다가와 계산서를 건넸다.

생각해보니 가격을 생각 안 하고 맘껏 지른 것 같지만, 이 정도 지출은 감수해야 할 부분이다...


하지만 정작 닐루의 지갑에서 나온 돈은 계산서의 70퍼센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닐루의 이마와 목덜미에서 식은 땀이 주르르 흘렀다.


돈을 넉넉히 챙겨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비상금 봉투는 호텔에 던져두고 온 짐짝 안에 고이 잠들어 있을 것이다.

수메르 물가와 폰타인 물가도 제대로 비교해보지 않은, 아니 하다못해 메뉴판에 적힌 가격표조차 대충 보고 넘겨버린 우리의 어리석은 닐루 양은 일생일대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주머니에 팬티 속까지 뒤적거려봤지만 돈이 나올 리 만무하다.

이쯤 되면 웨이터도 슬슬 낌새를 눈치챘을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닐루를 유심히 지켜보던 웨이터가 미간을 찌푸리며 오만상을 쓰더니 닐루에게 물었다.

"손님...혹시 돈이 없으신가요..?"

"아, 아니요...있는데...있어야 하는데..."

벌써 주방까지 소식이 전해졌는지 커다란 식칼을 든 주방장이 성큼성큼 걸어나오면서 소리쳤다.

"뭐? 내 가게에서 감히 무전취식을 해?"

"음...그러니까 저기, 일단 있는 돈만 받고 나머지는 외상으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내 가게에서 무전취식을 해?"

"아뇨, 엄밀히 말해서 무전은 아니고..."

"무전취식을 해?"


좆됐다.


닐루는 진짜 좆됐다고 생각했다.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방법은 작은 쿠사나리 화신이 와도 찾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황을 더 최악으로 몰고 갈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의 빡통 닐루는 지혜의 신도 입을 틀어막고 경악할 그 방법을 택했다.


"어, 저 씨발년이! 동네 사람들! 무전취식범이 도망친다! 잡아라!"

바퀴벌레처럼 엄청난 순간가속으로 튀어나간 닐루는 앞만 보고 일단 무작정 달렸다.

소화시킬 틈도 없이 전속력으로 달리다 보니 옆구리가 당기고 위가 경직됐는지 체한 듯 속에 통증과 답답함이 느껴졌다.

"무전취식 도둑 잡아라!"

뒤에서 헉헉대며 주방장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뒤를 돌아보자 주방장은 지쳤는지 멈춰서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거의 다 따돌렸다고 생각한 그때였다.


누군가 닐루의 머리채를 휘어잡고는 확 꺾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그녀의 명치 부근에 묵직한 주먹을 꽂아넣었다.

닐루는 숨이 턱 막히고 위장이 꿀렁 하는 기분이 들더니 내용물이 위로 확 쏠렸다가 막힌 변깃물이 내려가는 꾸르륵 소리와 함께 그것들이 같이 내려가며 뱃속이 진정되는 것을 느꼈다. 까스활명수를 마신 것 같이 시원했지만 동시에 무언가가 목 밖으로 치밀고 올라왔다...

"끗...크어어어어억!"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자길 붙잡은 사람의 얼굴에 직통으로 용트림을 내뱉고 말았다.

방금 막 소화시킨 요리와 단전 깊은 곳에서 올라온 향신료 향이 뒤섞인 염병할 꾸릉내가 퍼졌다. 

"윽...무슨 냄새가...!"

"죄, 죄송!"

말을 끝마칠 새도 없이 남자의 주먹이 닐루의 안면을 수 차례 가격했다. 좀 얼얼하긴 했지만 그닥 아프진 않았다. 다만 남자가 그대로 머리채를 사냥한 토끼 들어올리듯이 번쩍 치켜들자 찌릿한 고통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 

"드디어 잡았다, 이 도둑년!"

뒤이어 주방장이 헉헉대며 닐루를 따라왔다.

"도와주셔서 감사...헉, 아니, 공, 공작님이 여기 왜?"

"안녕, 아드리앙. 그냥 지나가던 길인데 말이지. 못 볼 사람이라도 본 것 처럼 왜 그래?"

공작? 이 사람이 공작이라고? 설마 사진 속의 그 공작은 아니겠지?

닐루의 얼굴에 만감이 교차했다.

폰타인에 공작이 한둘도 아닐텐데 설마 그 사람이겠어? 아니겠지? 그냥 별명일 수도 있잖아. 아니면 무슨 은어 같은 거라든지...

닐루는 온갖 생각을 다 하며 힐끗 고개를 돌려 곁눈질로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각도가 안 좋아서 잘 보이지 않았다.

"에이, 그냥 이런 곳에서 공작님을 뵐 줄은 몰랐으니까 그랬죠. 아무튼 이 도둑년은 제가 데려다 수사청에 넘겨버리겠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진짜 낯선 외국 땅에서 감옥에 들어가게 생겼다. 닐루는 뭐라도 변명거리를 잡으려고 애썼다.

"잠, 잠시만요! 도망칠 생각은 없었는데, 사장님이 칼을 들고 쫓아와서 어쩔 수 없었다고요!"

"아, 이건 요리하다가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고요...흑흑..."

임기응변으로 꽤 그럴듯한 변명에 혼신의 눈물연기까지 완벽하게 소화한 닐루는 이게 먹혀들기를 간절히 빌었다. 기도가 어느 마신에게라도 닿았던 걸까? 남자는 손을 풀고 닐루의 머리채를 놔주었다.


그러나 닐루가 안도의 기쁨을 맞이하기도 전에 주먹이 거세게 닐루의 옆구리를 강타했다.

"어디서 여자가 재수없게 울고 지랄이야? 뚝 안 그쳐?"

아무래도 내가 단단히 오해했구나, 닐루는 생각했다.

간을 맞았는지 옆구리가 효자손으로 맞은 것처럼 후끈후끈하니 저렸다. 그래도 버틸만은 해서 울음을 그치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런데 주방장은 그걸 보고 눈이 휘둥그레해지면서 당황했다. 닐루는 왜 그런지 알 틈이 없었다.

"아무래도 양 쪽 말을 더 들어봐야할 것 같은데 말이야, 안 그래?"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경찰관의 눈에 띠기라도 하면 곤란할 테니 저쪽 상점 뒷편 골목으로 가지."


주방장은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남자의 뒤를 따라갔고, 닐루도 그 뒤를 따랐다. 눈치가 보여서 아직 얼굴도 제대로 확인을 못 한 그녀는 이렇게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 진짜 공작일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이 무슨 신의 장난인가.

골목길에서 고개를 돌려 둘을 바라본 남자의 얼굴은 틀림없이 사진 속 공작이었다.

충격에 빠진 닐루의 표정이 굳었다. 며칠 전에 시그윈에게 받아놓은 공작의 사진과 대조해볼 필요도 없었다. 남자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닐루가 가지고 있던 실날같던 희망은 산산조각났다. 아까 그렇게 쳐 맞았는데 꿈일 리도 없다.

검회색 머리칼에 강렬한 이목구비, 결정타로 눈가의 흉터까지...의심의 여지 없이 아주 완벽하게 똑같았다. 

"자, 얘기를 계속해 보자고. 이 아가씨가 밥을 먹고 돈을 안 내자 요리하던 아드리앙 씨는 그대로 칼을 쥔 채로 나와 아가씨를 타박했고, 아가씨는 겁에 질려 도망쳤다...내가 이해한 게 맞나?"

"마, 맞습니다, 공작님."

"저, 근데 사실 돈이 아예 없던 건 아니구요, 음식값 계산을 잘못해서 가지고 있는 돈보다 많이 음식을 시켜버려서 그만..."

"그래, 아가씨. 근데 한 번만 더 말끝을 흐리면 배에 잽이 날아갈 거야."

닐루는 머리를 긁적였다. 이 사람 정말 공작 맞아?

"하지만 음식을 시켰는데 돈이 부족해서 다 못 내는 것도 처벌 대상이야, 이국의 아가씨. 그 정도는 상식이잖아."

"음, 호텔에 모라가 더 있는데 그것까지 가져오면 음식값은 낼 수 있어요."

"좋아, 아드리앙 씨는 내가 알기로 출소한 지 아직 채 2년이 되지 않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맞나?"

"네, 네. 맞습니다, 공작님."

"그런데 또 칼을 들고 사람을 위협하다니, 전이랑 똑같은 죄를 짓고 감옥에 가면 이번엔 형량이 배가 될 텐데 말이야. 정말 안타깝게 됐군."

"어,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제 잘못은 맞지만,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공작은 턱을 만지작대며 멍한 표정의 닐루와 겁에 잔뜩 질린 주방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양쪽 다 죄가 있으니 공평하게 처벌받는 게 마땅하지만, 띨띨한 외국인 아가씨도 나름 열심히 살고 있는 아드리앙 씨도 이런 일로 심판대에 서긴 싫잖아?

"예, 예. 물론입죠."

"이 아가씨가 못 내는 음식값의 부분은 내가 때우도록 하지. 그럼 됐나?"

"그치만 정말 그렇게 해도 괜찮겠습니까?"

닐루와 주방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안타까운 사람 둘 구제한다고 생각하지, 뭐."

이 사람, 의외로 대인배에 따뜻한 면모도 있네.

닐루는 그렇게 생각하며 공작이 값을 대신 치르는 걸 지켜보았다. 의외로 괜찮은 남자일지도 모른다...

"대신, 죄를 지었으면 죗값은 치러야 하니...공평하게 내 주먹 한 방씩 맞는 걸로 퉁 치자고."

"예? 공작님? 잘못 들었습니다?"

"싫으면 지금 당장 밖에서 순찰중인 멜뤼진 경관을 데려올게."

"아, 아뇨...그럼 살살 부탁드립니다..."

주방장이 눈을 질끈 감고 이를 꽉 물었다.

공작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주방장의 두꺼운 뱃살에 풀 스윙 펀치를 깊게 꽂아넣었다. 그러자 주방장은 숲멧돼지 멱 따는 소리를 경쾌하게 내더니 이내 바닥에 몸을 마구 뒹굴고 침을 질질 흘리며 광란의 댄스를 추기 시작했다.

다음은 닐루의 차례였다.

닐루도 눈을 질끈 감은 채 뱃살에 힘을 꽉 주었다. 마치 충치를 뽑기 직전에 갖는 마음의 준비와도 같았다.

이윽고 버섯몬의 박치기처럼 묵직한 한 방이 배에 포탄처럼 박히는 것이 느껴졌다.

"호고오옭..!" 

뭔가 꼴불견스러운 신음을 낸 것 같지만 배에 힘 꽉 주니 그럭저럭 버틸 만 한 펀치였다. 주방장은 엄살을 피웠던 걸까.

눈을 뜨자 살짝 당황한 표정의 공작이 눈에 들어왔다.

"아가씨, 아까 그렇게 맞았는데 멀쩡한 것도 그렇고 맷집이 엄청난데."

닐루는 그제서야 마음 한구석에 치워두었던 의문점이 풀리는 걸 느꼈다.

시그윈, 그 씨발 안면몰수 더듬이 꼬맹이가 갑자기 체력 운운한 건 다 이거 때문이었나?

닐루는 굳이 공작이나 되는 사람이 수메르까지 와서 맞선을 보려던 거에는 다 이유가 있었음을 깨달았다. 폰타인에 아마 이 사람의 펀치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없었을 거다.

"아하하하..."

닐루는 괜히 멋쩍게 웃었다. 뭐라고 반응해줘야 할 지 몰랐다.

"아무튼간에 이제 나도 가봐야 하니 이걸로 마무리하지. 그럼 이만."

공작은 겉옷을 툭툭 털더니 골목길 밖으로 걸어갔다. 중간에 공작은 그녀가 신경쓰였는지 고개를 슬쩍 돌려 쳐다보았는데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하곤 이내 모습을 감췄다. 


머리는 다 풀어헤쳐지고 얼굴이랑 배는 새빨개진 채로 닐루는 잠시 우두커니 제자리에 서서 공작이 떠나간 길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곧이어 극심한 현자타임이 찾아오자 맞선이고 나발이고 다 포기하고 돌아가고 싶어졌다.

평생 못 볼 꼴은 맞선 보기도 전에 다 보여줬는데 이제 맞선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세상 살면서 이렇게 우스운 일도 다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웃음이 멈추자 이번엔 울컥 하는 기분이 들더니 눈물샘 끝까지 눈물이 차오르며 격하게 소리 내어 울고 싶어졌다.

그 감정마저 어떻게 억누르자 이제 남은 것은 독기밖에 없었다.

그 독기에 가득찬 눈빛을 한 채 닐루는 이를 악물며 다짐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끝까지 간다.


더 이상 파국으로 치닿을 거리도 없다.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분명 평생 후회하겠지. 어차피 모 아니면 도다. 아마 거의 99퍼센트로 도겠지만 일단 부딪히고 보자.


닐루는 터덜터덜 호텔로 돌아갔다. 벌써 날은 어둑어둑해져 가고 있었다.




10)

"공작님, 저 왔어요."

라이오슬리가 요새에 도착해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뒤에서 시그윈이 종종걸음으로 걸어왔다.

"시그윈 씨, 일찍 왔네. 내가 알기론 내일까지 휴가일 텐데."

"네, 그래서 내일 아주 야무지게 시간 좀 써보려고요."

"그래? 이거 궁금해지는데. 무슨 계획이라도 있나?"

"계획 당연히 있죠. 내일은...공작님 여자 소개시켜주는 날이 될 거에요."

"뭐? 아니 잠깐, 이렇게 빨리? 내일 할 일은 어떡하고?"

"이미 다른 교도관분들께 다~얘기해놨답니다. 모두 공작님이 여자 만나러 하루 쉰다니까 기뻐하던데요."

"아니, 그러니까...윽..."

"내일 스케줄 확인해봤는데, 하루 쉰다고 전혀 문제 없거든요. 준비해야 될 게 많으니까 오늘 밤에 잠 자지 말고 기다리고 있으세요."

"마음의 준비부터 안 됐다고..."

그날 밤 라이오슬리의 집무실에서 시그윈은 입을 옷, 헤어스타일, 인상 펴기, 하지 말아야 할 말 등등 사소한 것까지 하나하나 라이오슬리에게 가르쳐주었다. 닐루에 대한 정보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수메르의 인기 아이돌이라...근데 어떻게 생겼는지는 왜 안 가르쳐 주는 거야?"

"그 편이 재밌잖아요. 적어도 못생긴 사람 데려오진 않았으니 안심하세요."

"근데 솔직히 수메르인들 몸에서 나는 향신료 냄새 말이야, 그 냄새 나는 적응 절대 못할 것 같아."

"요즘은 체취 없애주는 비누도 많이 나왔어요."

"그나저나 인기 아이돌 같은 사람을 대체 어떻게 데려왔대?"

공작의 질문에 시그윈은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말을 꺼냈다.

"음, 그게 말이죠..."





 11)

다음 날

닐루는 퀭한 얼굴로 창문을 열었다. 어제 일 때문에 통 잠이 오지 않아 자다 깨다를 반복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악몽까지 꿨다. 공작이 닐루 같은 여자는 쳐다보기도 싫다고 말하며 그녀를 성 밖 호수로 멀리 던져버리는 꿈이었다.

최악의 컨디션이었다. 거울 앞에 선 닐루는 옅게 내려앉은 다크서클에 생기를 잃은 눈동자, 좀 부은 것 같은 얼굴, 손에 잡히는 말랑한 뱃살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어제의 다짐과는 다르게 영 자신감이 나질 않았다. 공작이 분명 자신을 알아볼텐데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사람은 첫인상이 가장 중요하다는데 식당에서 돈 안 내고 도망치다 잡히고 얼굴에 트름까지 거하게 내뱉어버리다니.

보자마자 쌍욕을 박고 자리를 나가버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아니다, 안 때리면 다행이겠지.

닐루는 자신이 이 자리에 나가는 게 맞는지조차 의문이 들었다. 지금이라도 도망친다면 자존심은 지킬 수 있지 않을까?

그녀는 수백 번 고민하면서 어찌저찌 화장까지 마치고 시그윈이 준 옷까지 잘 차려 입었다. 폰타인 양식의 고풍스런 옷이었다.




시그윈과 약속한 시간에 맞춰 호텔 앞에서 기다리면서 닐루는 될 대로 되라며 자기암시를 걸기 시작했다.

아무 문제 없을 거야. 그냥 뻔뻔하게 있으면 공작도 못 알아보겠지. 그냥 닮은 사람이었거니 하고 생각할거야.

얼마 지나지 않아 시그윈이 그녀를 데리러 왔다.

"닐루 씨, 안녕? 아니, 밤에 제대로 못 잤어? 이, 이상한 게 보이는데..."

시그윈의 시야에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의 괴이한 기운이 비쳤다. 멜뤼진으로서 그동안 봐 온 과로하고 스트레스받는 죄수들보다 더 진한 기운이 보이고 있었다. 분명 어제 무슨 일 있었겠거니 싶었지만 엄청나게 뿜어져나오는 기운에 쉽사리 말을 걸기가 어려웠다.

"니, 닐루 씨...어제 뭔 일 있었어?"

닐루는 시그윈의 말에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아니요, 아무 일도 없었는걸요?"

"그, 그렇구나..."

시그윈은 계속해서 일렁거리는 기운에 닐루가 거짓말하고 있는 것임을 단박에 눈치챘지만 뭐라고 할 수도 없었다. 대체 무슨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심각한 일이 있었길래 이러는지 추측하는 것 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갑을 도둑맞았나? 아니면 바지에 똥이라도 지렸나? 설마...벌써 심판 날짜가 잡힌 건 아니겠지?

열심히 나름대로 추측에 몰두한 시그윈의 뒷통수로 닐루의 살기 가득한 시선이 날아왔다.

어쨋거나 둘은 열심히 걸어 약속 장소인 카페까지 도착했다.


"자, 조금만 앉아서 기다리면 공작님이 도착하실 거에요. 공작님은 제가 마중 나갈 테니 닐루 씨는 마음의 준비나 하고 계세요."

닐루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이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기 시작했다.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고 심장이 쿵쾅댔다.

조금 기다리니 멀리서 시끌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제가 말한 거 명심하시고요, 예?"

"아이고, 알았다니까. 등 좀 그만 떠밀어..."


그리고 마침내, 공작이 코너를 돌아 모습을 드러냈다.


"어디 테이블이야?"

"3번 테이블! 빨리 가! 닐루 씨 기다리고 있잖아!"

둘이 속삭이며 대화하는 것도 다 들리고 있었지만 닐루는 미처 공작을 향해 얼굴을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갑자기 어제의 일이 선명하게 눈앞을 지나가며 엄청난 수치심이 몰려들었다. 젠장, 얼굴이 화끈거리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뻣뻣한 인형마냥 테이블만 주시하고 있던 닐루의 앞에 라이오슬리가 다가가 맞은편에 앉았다.

"으흠...혹시 그쪽이 닐루 씨?"

닐루는 얼굴이 더욱 화끈거리는 걸 느끼며 고개를 더 푹 숙였다. 아마 귀까지 빨개졌을지도 모른다.

"저기...닐루 씨?"

"네, 네에..."

닐루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목소리로 고개를 고장난 태엽 인형처럼 천천히 꺾었다.


그리고 결국 그와 눈이 마주쳤다.


라이오슬리는 고개를 다 들지도 못한 새빨개진 닐루의 얼굴을 벙찐 표정으로 보다가 마침내 깨닫고 말았다.


"...어제 그 무전취식..?"

"..."


다음 편에 계속 -



2편으로 끝낼려 했는데 자꾸 길어진다 아오

검수를 안해서 어색한 부분 있을지도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