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안톤 멜리니코프(Антон Мельников). 

계급은 상사지만, 현재 9중대의 중대장직을 맡고 있다. 


그리고... 나, 아니 우리는 층암거연 지하에 갇혀 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해야 할까.


풀치넬라 집행관에게 층암거연 지하광구 조사 임무를 하달받았을 때부터?

리월 주민과 천암군의 환영을 받으면서 지하로 내려갔을 때부터?

지하에서 낙석으로 중대장이 즉사하는 걸 직접 봤을 때부터? 

미지의 위험에 동료들이 하나씩 죽고, 중대장이 소리소문없이 사라졌을 때부터?

아니면... 한 달 전부터 보급이 끊겨 물버섯몬으로 식수를 해결할 때부터?


정체를 알 수 없는 종소리를 들은 이후, 생전 처음 겪어보는 이 위험은 점차 거세지고 있다. 

처음 내려왔던 64명의 대원 중, 이제는 5명만 남아있다. 


위관급 이상의 장교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때문에 가장 높은 계급- 상사인 내가 임시 중대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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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지도 못하고, 마실만한 것도 없다. 

전에는 끔찍하게 맛없어서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버섯몬도, 이제는 없어서 못 먹는다.


먹지 못하니 배고프고, 배고프니 자꾸 졸리다. 


나만 이런 상태라면 차라리 편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내 옆에 있는 중대원 모두 같은 상황이다. 


이제는 이럴 좆같은 환경에 분노할 힘도, 거대한 공포 앞에서 벌벌 떨 힘도 없다. 

아무도 입을 열지는 않지만, 모두들 곧 닥칠 운명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이대로라면 굶어 죽거나, 갑옷을 입은 미친 기사에게 무참히 썰리는 죽음뿐이다. 

... 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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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벅꾸벅 졸다가 문득 잠이 깼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것이지?


...


인기척이 들려온다. 누구일까.

철없는 한 모험가가 운없게도 여기까지 내려온 것일까. 

아니면 그 미친 기사가 우리의 야영지를 찾은 것일까.


발소리가 점차 커지고 있다. 우리를 향해 오는 것일까.


...


확실하다. 저 발걸음은 우리를 향해 전진하고 있다. 


...


...끝이구나. 


...


...


...



"여행자! 우인단 야영지에 누가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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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중대의 야영지를 찾아온 것은 흑뱀기사가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철없는 모험가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길을 잃은 츄츄족도 아니었다. 


'금발의 여행자와 그 옆을 떠다니는 작은 요정'.

사람들은 흔히 그들을 이렇게 부르곤 했다. 


"여행자! 우인단이 어째서 이런 곳에 있는 걸까? 허브, 달콤달콤꽃이랑 더불어 어딜가나 다 있는 녀석들이야!"

"... 상태를 보니 모두 굶어죽기 직전인 것 같아. 우선 음식을 조금 먹이고 물어보자."



한 시간 정도 후, 야영지에 남아있던 5명의 대원 모두 대화가 가능할 정도로 의식을 차렸다. 


허겁지겁 버섯고기말이를 먹고 나서야 안톤은 자신 앞에 있는 사람이 여행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여행자와 작은 비행 인간이라면... 풀치넬라님이 절대 마주치지 말라고 했던 자들이 아닌가?'


그동안 수백명, 많게는 수천명의 우인단을 죽인 여행자는 우인단에게 아주 큰 위협이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수백개의 위관의 휘장이 그것을 증명하며, 동시에 모든 우인단에게 '여행자는 작전 수행중인 요원을 가처없이 죽일 것'이라는 명령이 전달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어째서 여행자가 그에게 음식을 준 것일까? 안톤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여행자라고 불러도 되겠나?"  "네, 그러세요."


"...어째서 우릴 도와준 것이지?"


"이봐, 그건 우리가 할 말이야! 우인단이 층암거연에는 대체 무슨 일이야?" 

"페이몬 말이 맞아요. 여기는 어떤 목적으로 내려왔죠?"


'심문하고 죽이려는 것인가?' 안톤은 잠시 생각했다. 

하지만 어차피 음식을 받지 못했으면 여기서 죽었을 운명. 때문에 금발의 여행자가 그에게 음식을 준 것은, 적어도 지금 당장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안톤은 입을 열였다. 

"우리는 우인단 9중대. 풀치넬라의 직속 부대지. 목적은 층암거연 지하광구의 위험요소를 탐사하기 위함이다."


"흐음... 여행자, 얘내 말을 믿을 수 있어야 말이지. 혹시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닐까?"


"... 그런 것 같지는 않아, 페이몬. 그리고 다른 목적이 있다고 해도... 고작 굶고 병든 5명으로 뭘 할 수는 없을 거야."

"그럼, 대체 왜 여기서 굶주리고 있던 거에요?"


"한달 전부터 보급이 끊겼어. 3주 전부터는 통신이 두절됐어. 

2주 전에는 중대장이 실종됐어. 아마 죽었겠지. 1주 전부터는 식량이 고갈되고, 식수도 물버섯몬으로 해결하고 있어."


"으!! 그 맛대가리 없는 버섯몬? 그걸 대체 어떻게 먹은 거야?!" "페이몬, 조용히 해..."

"보급이 끊겼다고?" 


"맞아. 계속 보급이 오지 않아 보급소로 몇몇 대원들이 갔는데, 그들 모두 죽었어. 

나 역시 떨어지는 돌들을 피해서 간신히 살아돌아온 거야."


"흠..." 

"여행자. 혹시... 부탁을 하나만 해도 될까?" "무슨 부탁이요?"


"우린 지금 병들고 굶주려서, 보급소에 갈 힘조차 없어. 

혹시 보급소의 상황을 대신 가서 봐줄 수 있을까? 지도를 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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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뒤, 여행자와 페이몬은 보급소를 둘러본 후 나쁜 소식만을 가지고 우인단 야영지에 돌아왔다.


"어떻게 됐지? 혹시... 뭔가 발견한 것이 있었나?"


여행자는 안톤에게 희망을 줄 법한 무언가를 전혀 찾지 못했다. 희망을 줄 만한 소식 역시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여행자는 보급소에서 발견한 한 분실된 문서를 보여줬다. 


[…옥경대 비서 측의 긴급 명령: 최근 군옥각에서 벌어진 악질적인 긴급 사태는 「우인단」이 위험하고 믿을 수 없는 조직이라는 걸 증명한다…

…이에 스네즈나야와의 협력 협정은 폐기하고, 층암거연의 탐사 업무는 리월 칠성이 전적으로 책임진다…

…앞으로 모든 천암군 병사들은 「우인단」의 그 어떤 사람과도 교류할 수 없으며, 목격 시 그 자리에서 체포해 중히 처벌한다!…]


"보면 알겠지만, 우인단과 리월 사이의 관계가 파탄났어요." 

"대, 대체 무슨 일이..."


'악질적인 긴급 사태'라는 것은 분명 타르탈리아가 황금옥에서 깽판을 치고, 오셀을 깨워서 리월을 말아먹으려고 한 사태를 의미할 것이다. 응광이 군옥각을 떨구는 초강수를 두지 않았더라면, 모락스의 도움 없이는 리월이 멸망했을 수준의 위기였다. 


하지만 안톤을 비롯한 9중대는 그 사건이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지하로 파견된 부대였다. 때문에 그 소식을 알 길 역시 없었으며, 더군더나 그들은 리월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탐사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에 리월 시민과 천암군의 환호를 받으면서 지하로 내려갔다. 때문에 지금 그들이 보고 있는 문서는 그들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 잠시만. 

부대원들에게 소식을 전달해주도록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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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천암군을 위해 싸웠고 동맹이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이제 동맹같은 건 없어. 9중대는 독 안에 든 쥐야." 

"그럼, 우린 리월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거야?!" "오히려 반대로 우인단인 우리가 배신한게 아닐까..."

"아니야! 출발 전에 대위가 이번 원정은 타산도 음모도 없이 리월 사람들을 지키러 온 것이라고 했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우리가 음모에 당한 건가? 그렇다 해도...궤멸상태인 우리가 어떻게 통제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분실된 문서를 접한 우인단의 반응은 저마다 달랐다. 하지만 그들 모두 이 상황에 혼란을 느낀 것은 변함이 없다. 


이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임시 중대장인 안톤은 결국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한명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철수를 해야 하는가? 아니면 여왕의 명령에 따라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하는가?'


견디기 어려운 시간이 지난 후에, 안톤은 입을 열었다. 


"...9중대는 철수한다. 책임은 전부 내가 지도록 하지."


일병 라도미르는 안톤의 말에 반박했다. 

"다닐라의 말대로, 우린 리월 사람들이 재앙에 침식되지 않게 지켜주려고 온 거야! 허무하게 떠나선 안돼!"


"하지만...리월 사람들은 더 이상 우인단의 보호가 필요하지 않아. 더군더나 반기지도 않지."


"..."


"뿐만 아니라, 여기에 계속 머무는 행위는 남은 전우들을 해치는 짓거리밖에 되지 않아."


"..."


"탐사를 계속 하려고 해도 장비도 전부 고장났고, 예비부품도 모두 소실했어.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지?"


"그.. 그럼.."


"임시 9중대장으로써 다시 말한다. 철수한다. 

천암군에게 들키지 않고 최대한 조용히 철수하는 것으로 임무를 변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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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은 뒤숭숭한 막사 내부의 분위기를 뒤로 하고 여행자에게 다시 갔다. 

"소식을 전해줘서 고마워, 여행자. 최대한 빨리 철수하도록 하지. 모험에 방해가 됐다면 정말 미안해."


"잘 생각했어요. 여긴 위험하니 최대한 빨리 올라가는 게 좋을 거에요. 감옥에 갇힌다 한들 여기보다는 안전할 거에요."


"그래.

아 참! 이건 소소하지만... 보상이야. "


안톤은 여행자에게 부대의 남은 모라와 원석을 줬다. 지상에서는 귀중한 물건이지만, 어차피 이 곳에서 나가지 못한다면 그림의 떡일 뿐인 물건이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여행자는 다시 발걸음을 돌리려 했다.


"...잠깐!" "음?"


"여행자, 그 옷... 정말 괜찮은가?" "뭐가 괜찮다는 것이죠?"


"반팔에 배꼽이 다 드러나는 옷이라니...  

밖에서는 시원하겠지만 지하에서는 돌에 긁히기라도 하면 상처가 쉽게 날 거야."


"괜찮아요. 전 이게 편하거든요." 


그 말을 끝으로, 여행자와 페이몬은 야영지를 떠났다. 


"... 미친놈이군." 안톤은 속으로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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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영지를 찾아온 손님은 며칠간의 식량과 물, 그리고 장비 조금을 나눠주고 다시 떠났다. 


여기서 탐사임무를 계속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이지만, 탈출에는 가능성을 걸어볼 만한 양이기도 하다. 


비록 죽은 자들은 이 세상에 더 이상 없겠지만, 남은 자들은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것이 9중대의 이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to be continued)


시간되면 계속 써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