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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일 전 금발의 여행자가 9중대에 들렀다 떠난 이후로, 잔존한 대원들은 충분히 쉬고 장비를 정리했다. 


어차피 철수작전은 성공하든 실패하든- 하루나 이틀, 늦어도 사흘 안에 끝날 것이다. 

그리고... 철수에 성공하지 못하면 여기서 죽는다. 


때문에 9중대는 최대한 빨리 나가기보다는, 쇠약해진 몸을 조금이라도 회복시킨 후에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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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9중대가 층암거연 지하광구에서 철수를 하는 날이다. 

이 곳으로 파견온지 반년이 조금 넘은 시점이다. 


그 짧은 시간동안 64명의 중대원 중 신원이 확인되는 대원은 고작 5명으로 줄었다. 

그들의 손에 들려진 피묻은 오십여개의 군번줄들이 상황의 참담함을 여실히 보여준다. 


군번줄조차 찾지 못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 없는 대원은 3명...

하지만 그들이 이 지옥같은 곳에서 홀로 살아있을 확률 따위는 없다.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들까지 데리고 나가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56개의 군번줄을 다른 대원들에게 나눠준 뒤, 안톤은 마지막으로 장비를 확인했다.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장비를 확인하자."


버섯닭꼬치 15개, 홀호어 구이 30개, 

낡아떨어진 텐트 1개, 침낭 4개, 

9중대의 부대 깃발,

발파용 드릴 3개, 곡괭이 5개,

지혈용 약초 소분, 응급처치 도구 소량,


... 그리고 모르핀 5병. 




변변한 의료도구 조차 없는 그들이었지만, 모르핀만큼은 충분히 있었다. 


감염을 막기 위한 항생제조차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극한의 상황에서, 모르핀은 더 이상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주입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내리는 사형선고이다. 


대원들은 스스로 다른 대원의 발목을 잡지 않기 위해,

탈출 중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처했을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 스스로 모르핀을 한 병씩 챙겼다.


그 과정에서 대원들은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는지, 그들 앞의 운명이란 어떤 것인지를 다시 상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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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하기 전, 마지막으로 점호. 

상사, 안톤."


"일병, 라도미르." 

"상병, 다닐라."

"상병, 테무르."

"하사, 마시코프. 열외 0, 총원 5명."


"...좋아. 철수 전, 원칙을 다시 얘기하도록 하지."


"첫째, 철수 과정에서는 모두가 함께 움직인다. 

 둘째, 부대 잔존과 관련되지 않은 모든 요소는 배제한다. 

 셋째, 내가 죽으면 가장 계급이 높은 사람이 임시 중대장을 맡는다."


"마지막으로, 질문이 있나?"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안톤은 자신이 들고 있던, 이미 죽은 동료들의 군번줄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

그럼, 출발하지."



9중대의 야영지가 있는 곳은 지하연못 동남쪽이었다.


그들은 임시 주요 갱도를 통해 지하연못까지 내려왔는데, 며칠 전 그 곳으로 향하던 통로가 폭발로 인해 막히게 되었다. 때문에 그들은 거연 주요 광갱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하였다. 


허나, 거연 주요 광갱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하연못의 최하층을 지난 다음에 몇십미터 이상으로 수직으로 나있는 절벽을 타고 올라가야만 했다. 거듭된 탐사로 9중대는 이 길이 위험천만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이 아는 한- 이 좆같은 곳을 벗어날 방법은 그 길을 어떻게든 뚫는 것 뿐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오히려 그들의 철수 계획에 있어서 더 큰 변수는 중간에 어떤 마물을 만나느냐의 문제였다. 


신의 눈이 없는 일반인이더라도 버섯몬은 조금만 숙련되면 능숙하게 잡을 수 있다. 

(괜히 모험가 길드의 책자에서 물버섯몬을 응급 식수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츄츄족의 경우는 신의 눈이 없다면 상대하기 어려운 놈들이다. 


심연메이지의 경우는 신의 눈이 있더라도 상대하기 어려운 놈들이다. 


... 그리고 흑뱀기사는 신의 눈이 있는 웬만한 사람들에게도 재앙수준으로 강력한 마물들이다. 

그동안 지하광구에 머무는 동안 9중대에서 나온 희생자들의 과반수는 흑뱀기사와 잘못 조우해 생긴 것이다.  


다행히 그들은 그동안 이 경로를 탐색하면서 심연메이지,  흑뱀기사와 같은 큰 위험요소를 발견하지 못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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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히도...


그들의 예상과 달리 지하연못의 최하층에는 심연메이지가 두마리 있었다. 

심연메이지가 같은 자리에 2마리 이상 있는 경우를 목격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흰색 로브를 입고 바닥을 얼리며,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꼬락서니는 대원들에게 혐오스러울 정도로 무섭게 보였다. 


'아니 씨발 대체 왜 저새끼들이 저기 있는 건데?! 저번 탐사까지는 아무것도 없었잖아?!' 

'조용히 해 테무르! 쟤내들이 들으면 좆돼!' 

'대장! 지금이라도 철수할까?' '해볼만하지 않을까? 그래도 그 미친기사는 없는 거 같아...'


우선 안톤은 심연메이지들이 보이는 위치에서 숨을 죽이고 기다리기로 하였다. 굳이 불필요하며, 불확실한 싸움을 할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시간 후...


메이지들이 알 수 없는 괴성을 내면서 서로에게 대화하는 걸 지켜보자니, 대체 언제까지 이걸 보고 있어야 하는지도 의문이 들었던 안톤이었다. 


'저 새끼들은 무슨 언어로 대화를 하고 있는 걸까' 대원들은 속으로 생각했다. 

'시발 란란루 소리 빼고 문자로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없네' 

'근데 쟤내 맨날 츄츄족 따까리로 데리고 다니지 않나? 다 어디갔지?'

'듣다 보니 묘하게 중독성이 생기는 거 같아...' '이 새끼를 심연으로...'


한 시간동안 똑같은 소리만 듣다보니 경계심이 조금 사라질 법도 해서, 대원들은 그들의 정체에 대한 무성한 추측들을 귓속말로 주고받을 뿐이었다. 




그 순간. 




"란- 란- 루- "



"...?"



"읭!"




심연메이지 하나가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곧이어, 다른 하나도 "윙!" 소리를 내며 모습을 감추었다. 


'좆됐군.' 


대원들은 이 생각을 하며, 싸울 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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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큰 소리를 전혀 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연메이지가 대체 어떻게 그들의 인기척을 알아차렸는지는 대원들이 알 길이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둘 다 잡지 못하면 무조건 죽는다. 


다행히 그들은 심연메이지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기에,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비록 그들에게는 icd 없는- 환상적인 불부착을 자랑하는 화륜이나, 평타에 불부여를 붙여주는 사기급 공뻥 장판은 없었지만... 화승총을 다루는 테무르가 있었다. 


"라도미르는 테무르를 뒤에서 보호하고, 다닐라는 테무르와 떨어져서 주의를 끌어!

앞에서 막는 역할은 나랑 마시코프가 한다!" 안톤이 소리를 질렀다. 


풍권돌격대였던 안톤은 심연메이지의 얼음공격을 흡수하고 다시 되받아치는 방식으로 어느정도 시간을 끌 수 있었고, 

번개해머를 가지고 있던 마시코프는 초전도 반응으로 약하게라도 메이지의 실드를 깔 수 있었다. 




하지만 심연메이지 역시 이것을 알고, 최대한 텔레포트를 해가며 오히려 마시코프와 안톤의 주의를 끌었다. 


그들은 처음부터 가장 성가신 상대- 자신들의 카운터였던 테무르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고... 첫 희생자는 테무르를 보호하던 라도미르였다.


심연메이지의 공격은 순식간에 이루어졌다. 

잠깐 지팡이를 돌리자, 하늘에서 얼음덩어리가 1초에 하나씩, 라도미르를 향해 떨어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바닥은 물이라서 얼음덩어리를 맞은 라도미르는 그대로 얼어붙었고, 다음 공격을 피할 시간도 없이 그 자리에서 공격을 받고 쓰러졌다. 


그 다음 목표는 테무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빠르게 복귀한 다닐라가 바위보호막을 펼쳐, 테무르가 화승총을 조준할 시간을 주었다. 


"빨리 쏴! 얼마 못 버틴다고!" "잠깐만, 잠깐만..."

 

"탕!"


"철컥... 탕!"


...


...


...


테무르는 열발 가까이 되는 총알을 사용한 뒤에야 간신히 심연메이지 한 마리의 실드를 벗겨냈다. 

실드가 사라진 심연메이지는 순식간에 구부정하게 쓰려졌다. 


"처리는 우리가 한다. 테무르, 넌 다른 놈을 노려. 마시코프!"

안톤과 마시코프는 실드가 벗겨진 틈을 타, 곧바로 쓰러진 메이지의 머리를 따버렸다. 



한 마리만 남은 심연메이지는 수의 열세를 파악하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는 "읭!" 소리만을 내고 곧바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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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도미르! 라도미르!" 전투가 끝난 후, 안톤은 쓰러진 라도미르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움직일 수 있겠어?"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날카로운 얼음에 직격당한 라도미르는 이미 피를 너무 흘렸다. 

"추워... 피를... 너무 많이..."


"망할!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있어, 어서 지혈할 도구를..."

하지만 심연의 마법으로 입힌 상처는 좀처럼 아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몇 시간 후에도 라도미르의 상처는 전혀 아물지 않았다.


하지만 출혈은 출혈대로 지속되어, 상태는 더욱 위험해져만 갔다. 

대원들은 가진 도구와 지식을 활용해 조금이라도 라도미르의 목숨을 연명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오고 있었다. 




시간이 점차 지나자 대원들은 어렴풋이 느꼈다.

여기서 무엇을 한다고 한들, 라도미르가 다시는 빛을 보지 못할 것임을....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은 자신의 대원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사고로 잃었으면 잃었지, 스스로 동료의 목숨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지? 하루, 몇시간?

... 여기서 더 지체하면 다른 전우들도 위험할텐데...'


라도미르는 더 이상 중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죽더라도, 다른 대원들만큼은 살려보내고 싶었다. 


결심을 한 라도미르는 입을 열었다. 


"중대장..." 

"라도미르! 움직이지 마, 상처가 덧난다!"


"먼저 가요... 다른 대원들은 살아야지..."

"안돼! 너만 여기서 두고 갈 수는 없어!"


"..." 

"살 수 있어. 걱정하지 마."



"...

아니요, 전 틀린 거 같아요."


달그락달그락.... 퐁!


푸욱- 


"라도미르!"


라도미르는 빠르게 모르핀을 주사했다. 

치사량을 한참 넘은 양으로써, 그 시점부터 라도미르는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 있었다. 


뒤늦게 그걸 본 안톤은 라도미르를 채근했다. 

"라도미르! 어째서..."


"..."

"살 수 있다고... 어째서 스스로 포기하는 거야..."


"미안해요... 대신 내 말 좀 들어줘요..."

라도미르는 품에서 종이 한장을 꺼냈다.


"이거, 내 집주소... 

살아 돌아가면... 가족을 대신해서..."


그 말을 끝으로 라도미르는 눈을 감았다.






벌써 한 명이 또 죽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 사람들은 계속 앞으로 가야만 한다. 


대원들은 라도미르의 시신을 묻고, 묵념을 하였다.

 

하지만 누구도 그 자리에서 쉽사리 떠날 수 없었다. 






무거운 공기 속에서, 안톤은 입을 열었다. 


"...가자."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