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층암거연에서 사라진 중대- https://flatsun.tistory.com/3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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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1)- https://arca.live/b/genshin/96906680?

탈출(2)- https://arca.live/b/genshin/96984543?

탈출(3)-https://arca.live/b/genshin/97074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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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이따금씩, 따사로운 햇빛을 기대하며 흙을 이겨내고 올라온 새싹을 가혹하게 내치기도 한다.



제 1갱도에서 간신히 나온 대원들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따사로운 햇빛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이 나오자마자, 천암군의 창끝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맞이하였다. 


기진맥진한 상태였던 대원들에게는 천암군의 포위를 뚫고 탈출할 여력은 남아있지 않았다. 

남은 선택지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투항하는 것이었다.

 

잠시후, 천암군은 복면을 하나씩 가져와 차례대로 그들의 머리 위에 씌웠다. 

그러고서는 그들을 묶어 일렬횡대로 끌고 가기 시작했다.  


'우리를 즉결처분하려는 것일까...' 안톤은 생각했다. 


이내 그는 체념했다. 

"...이것도 운명이면 운명이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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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안톤은 속박이 풀린 채로 의자에 앉아있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그가 있는 방은 어두컴컴했으며, 이따금씩 불안해보이는 전등이 깜빡거리며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하였다. 


그의 앞에는 군복을 입은 두명의 장교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옆에는 한 명의 이국적인 외모를 가지고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안톤이 정신을 차린 것을 확인하자, 왼쪽에 앉아있었던 덩치 큰 남자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다른 언어였기에, 무슨 말인지 안톤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덩치의 말이 끝나자, 옆에 서있던 남자가 노어로 말을 하기 시작했다. 통역을 하는 것일까.  

"안톤 멜리니코프. 계급은 상사, 9중대 소속, 본인이 맞습니까?"


"... 네." 안톤이 답했다. 


안톤의 대답을 들으며 그리 대답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덩치는 피식 웃더니 종이를 꺼내며 천천히 그것을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지껄임을 한참동안 기다린 후, 통역이 귀찮다는 듯이 건성으로 말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통역을 기다린 시간만큼이나 긴 시간동안 통역의 말을 들으면서 안톤은 자신의 상황을 직시할 수 있었다.


"...

(중략)

...

따라서, 당신과 당신의 부대가 리월에 중대한 해악을 끼칠 수 있는 잠재적인 위험요소인 것을 고려하여,

...을 추가적으로 고려하여,

...할 수 있음을 고려하면,

..."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안톤과 9중대가 기소당한 죄목은 국가전복죄이다. 


한 차례 우인단에 의해 멸망의 위기를 겪은 리월에서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고, 9중대가 층암거연에 파견된 이유 또한 겉으로는 시민의 보호로 위장한 흑색작전을 위함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흑색작전이 무엇이었는지는 9중대도, 리월에서도 꾸며낼 수 없었다. 


9중대가 철수하면서 가지고 올라온, 조악하기 짝이 없는 장비를 가지고서는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상상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9중대를 그냥 잠재적인 위험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에 따라, 

....에 따라, 

....에 따라,

...

(중략)

...

최종적으로 25년의 노동형을 선고합니다. 동의합니까?"



안톤은 제대로 번역되지 않은 듯한, 고유명사가 남발되는 미사어구 가득한 문장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문장- 즉 25년의 노동형을 선고한다는 것만큼은 귀에 분명히 들어왔다. 


"아니, 대체 왜..." 즉결재판을 한다고 한들, 자신 옆에 변호사, 하다 못해 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조차 없는 이 상황에서 안톤은 결과를 납득할 수 없었다. 


때문에 안톤은 반박하려 했다. "9중대는 분명 리월시민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의 문장이 끝을 맺기도 전에, 덩치 옆에 앉아있었던 다른 장교가 말을 잘랐다. 


이번에는 통역을 거치지 않고, 서투르지만 분명한 어조였다. 

 

"동의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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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났을까. 


안톤은 기진맥진해 있었다. 더 이상 입을 열 힘조차 없었다. 


그 동안 안톤은 제자리에 앉은 채, 그가 들었던 선고문을 듣고 또 다시 들었다. 

그 뒤 "동의합니까"라는 질문에 안톤이 답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 선고문을 또 다시 반복할 뿐이었다. 


안톤은 손짓, 발짓으로라도 자신의 상황을 표현하며, 자신이 층암거연에 파견된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자들은 아무래도 그것에는 관심이 없는 듯 보였다. 

그들은 안톤의 '네'라는 답에만 반응하는 듯하는 무감정한 기계처럼 행동하였다. 


선고문을 읽고 안톤에게 물어보는 것을 반복하다가- 배고파질 때 즈음이 되어서야, 그들은 식사를 하러 갔다. 




몇 시간이 흘렀을까. 


몇 시간이 또 흘렀을까.


...


...


...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안톤의 앞에 앉아있는 장교들은 그 동안 열 번에 가까운 식사를 한 듯 보였다.

아침, 점심, 저녁...


또 다시 


아침, 점심, 저녁...

 

그동안 안톤은 전혀 먹지 못했다. 

비가 올 때 낡은 천막에서 새는 물방울만으로 간신히 목을 적실 뿐이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한계가 오고 있었다. 

탈수증상이 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몸에서는 점점 열이 나기 시작했고, 눈은 움푹 들어간 것이 스스로도 느껴지기 시작했다. 

피부는 점점 푸석해졌고, 입 안은 점점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안톤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황당무계하며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그의 상황이었지만, 이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 이외에는 선택지란 없었다.




이내 안톤은 짤막하게 다섯 글자만을 내뱉고는,

"... 동의합니다."

활짝 웃으며 무언가를 적는 듯하는 덩치의 모습을 보며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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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이 지난 것일까?


점차 희미해지는 시간감각 속에서, 안톤은 눈을 다시 떴다. 


이번에는 그를 처음으로 맞이하는 것은 군복을 입은 남자가 아니라, 군데군데 얼룩진 하얀색 벽지였다. 


주위를 둘러본 안톤은 오른팔에 수액이 꽂혀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왼쪽의 탁자에는 알 수 없는 약재들이 놓여 있었다. 


잠시 후, 가운을 입은 군의관이 들어와 안톤의 상태를 확인했다. 

간단한 확인을 마친 군의관이 어눌한 노어로 안톤에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탈수와 영양실조로 인한 입원입니다. 다행히 조치를 취했으니, 며칠 후면 퇴원할 수 있습니다."




안톤은 안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의사의 말에 포함된 "다행히"라는 말에 다분히 저의가 있음을 느꼈다.


과연 그는 의사로써 진심으로 환자의 쾌유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부품으로써의 쾌유를 바라는 것일까.


하지만 그가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딱히 없었다. 

그저 조용히 회복하고, 그의 앞에 놓인 운명이 너무 가혹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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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사흘이 지났다. 


층암거연에서 탐사로 입은 각종 상처를 비롯해 탈수, 영양실조에 시달렸던 안톤은 거의 회복을 마쳤다. 

사흘 전에 처음 본 의사는 안톤에게 오늘 퇴원할 예정이니, 떠날 준비를 하라고 알려주었다. 


하지만 안톤은 딱히 챙길만한 짐이 없었다.

그의 소지품은 이미 그가 체포될 때 모두 압수당했기 때문이다. 


임무 명령서, 우인단 휘장이며 군복까지 모두 압수당한 상태였다. 

 

하지만 천암군이 빼앗지 않은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죽은 동료들의 군번줄이었다.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같은 군인으로써의 존중의 의미인 것일까?

그 생각을 하며, 안톤은 자신의 유일한 소지품인 군번줄을 만지며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씩 낮게 읊조리기 시작했다. 


"크루프, 루크, 미하일, 빅토르, ... "


그들의 이름을 절반쯤 불렀을 때였다. 

병실의 문이 벌컥 열리더니, 며칠 전 심문실에서 보았던 두 장교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도 덩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어나."





자신을 찾아온 두 장교와 함께, 안톤은 병원 밖을 나가고 있었다. 


그 때, 안톤은 우연히 자신을 치료한 의사가 어디론가 바쁘게 발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그를 본 의사는 애써 그의 눈을 피하면서도- 가벼운 눈인사와 함께, 한 마디만을 말하고 다시 제 갈 길을 갔다. 

"... 행운을 빕니다."




안톤은 그 말의 의미를 나름대로 곱씹으며,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병원 밖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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