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의 설정이 일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웹소설 4편 분량에 불과하니 읽어주세요.

***개추는 잊지 않았겠지?

 

 

 

 

 두두두두두두! 거친 대지를 박차고 달려나가는 유령의 형상이 시야를 뒤덮는다. 거친 먼지가 그들의 발밑으로 질주하고, 포효하는 유령들의 아가리에선 쉴새 없이 지옥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유령들이 질러 대는 악 받친 소리는 그대로 바람이 되어 그들의 등 뒤를 떠밀어 준다.

 

 목표는 거대하게 솟은, 혹은 납작하게 찌그러진 건물. 시공간의 이지러짐으로 인해 변해 버린 KFP 건물을 향해 유령의 대군이 돌진하고 있었다.

 

 “돌겨어어억!”

 

 그리고 그 사이에서, 커다란 낫을 등에 짊어진 채 목청 높여 소리치는 한 여자가 있었다. 우아한 상복 같은 드레스가 바람에 나부끼고, 지옥의 연기를 휘날리는 유령마를 재촉하며 칼리오페는 다시 한번 소리쳤다.

 

 “너희는 이미 죽은 몸! 돌격해라! 그리고 결계를 부숴라! 성공한다면 곧바로 환생이다! 지옥에서 꺼내준다는 말이다!”

 

 유령들의 포효가 가일층 거세진다. 공기마저 떨리는 느낌에 칼리오페의 뒤를 따르던 세 소녀는 팔뚝을 쓸어내렸다. 그중 하나, 군데군데 더러워진 주황색 유니폼을 입은 소녀가 짜릿하다는 듯 식은땀과 함께 미소를 짓고 말했다.

 

 “대단한데, 칼리.”

 

 칼리오페는 키아라에게 피식 웃는 것으로 화답했다. 그때 유령에게서 이질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무려 수천 기에 달하는 유령들이 일제히 우우우, 하는 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신호였다.

 

 “이나.”

 

 “응.”

 

 결계가 가까워진다. 일그러진 시공간이 곧 그들을 덮칠 것이다.

 

 칼리오페에게 대답한 소녀, 이나니스는 조용히 외고 있던 주문을 펼치기 시작했다. 네크로노미콘, 광기의 마법서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거대한 눈이 그들을 주시하는 듯하다.

 

 “우으으, 이건 역시 소름이 돋는데.”

 

 삼지창을 양손으로 붙든 소녀가 중얼거렸다. 구라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그곳에 거대한 존재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당연하게도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흐린 하늘과 보랏빛의 보호막이 있을 뿐이었다.

 

 “온다, 준비해.”

 

 칼리의 조용한 한 마디. 그녀를 뒤따르는 세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결계에 진입하는 순간은 마치 다이빙하는 감각과도 같았다. 익숙하지 않은 세계로 몸을 던지는 오싹한 느낌. 키아라는 어깨를 문지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공기는 각면으로 나뉘고, 유리된 시공간 속으로 가지각색의 빛이 거무죽죽하게 흘러내린다. 시공간을 망가진 조각보처럼 누벼 만든 듯하다. 오직 그들만이, 그들이 밟은 수 제곱미터에 불과한 땅만이 멀쩡한 모습을 붙잡고 있을 뿐이다.

 

 “돌겨어어억!”

 

 칼리오페의 외침에 유령들이 일제히 포효한다. 마구잡이로 달리고 있던 그들의 모습이 차차 진형을 갖추기 시작한다. 칼리오페 일행을 밑변 중앙에 둔 삼각형 진형이다. 일사불란한 유령 군단의 모습에 구라와 키아라가 감탄하는 사이, 칼리오페가 눈살을 찌푸렸다.

 

 파삭, 최전열의 유령의 몸뚱이가 오그라든다. 아니, 팽창한다. 일그러진 시공간에 몸을 내맡겨 버린 유령의 몸이 그 시공간에 맞춰 변화하는 것이다. 휘어지고, 꺾여 부러지고, 접합하고, 팽창하고.

 

 하지만 유령 군단은 멈추지 않았다. 각면의 경계선을 뚫고, 시꺼먼 대지를 밟고, 지옥의 연기를 곳곳으로 흩뿌리며, 그들은 손을 뻗어 결계를 찢어발겼다. 시공간의 접합면이 떨어져 나가며 한순간 정상적인 풍경이 그들의 눈앞에 펼쳐졌다.

 

 한순간에 불과한 광경은 곧 사그라든다. 하지만 유령 군단들은 제 몸을 불살라 찰나의 순간을 계속해서 이어 나간다.

 

 견디지 못하고 스러지는 유령의 형상이 그들을 스친다. 저 뒤로 나자빠지는 유령들을 뒤로한 채 그들은 끊임없이 달렸다. 칼리오페가 계속해서 소리치고, 이나가 쉼 없이 주문을 외우는 사이, KFP 건물은 시시각각 가까워진다.

 

 우우우우우! 포효 속에서 그들은 사그라진다. 불꽃처럼 격렬하게 제 몸을 내던져 결계를 찢는다. 그 한순간의 틈을 잇고 이어 만들어낸 거친 가시밭길 위로 유령마가 질주한다.

 

 마침내 마지막 한 명의 유령마저 지옥의 연기로 화하고, 멀쩡한 KFP 건물의 모습이 드러난 찰나의 순간, 유령마는 그 틈새로 몸을 날렸다.

 

 이내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줄어든다. 진땀에 젖은 네 소녀는 말에서 내려 말끔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왜 이렇게…….”

 

 키아라의 말에 대답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 일하던 곳에서 쫓겨나고, 돌아와 보니 이런 별세계가 펼쳐져 있으니 오죽할까.

 

 게다가 일어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왓슨이 사라진 것이다. 이상 현상, 그리고 실종 사건에 왓슨이 시간 여행자라는 사실은 두 가지 일을 결부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참혹한 기분을 느끼기에도 더없이 적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참. 인생 살고 볼 일이지.”

 

 다만 그녀는 키아라였다. 금방 활기를 되찾는 에너지 넘치는 소녀. 금방 되돌아온 그녀의 모습에 칼리오페는 쓰게 웃으며 등에 메고 있던 낫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그럼, 난 여기서 혹시 모를 결계의 수축을 막을게. 지옥에 있는 유령들은 아직 많으니까.”

 

 “괜찮겠어?”

 

 걱정 어린 이나의 말에 칼리오페가 대답했다.

 

 “솔직히 같이 들어가고는 싶지만, 뭐. 누군가는 바깥에서 주위를 경계해야 하지 않겠어?”

 

 “그건 그래. 좋아. 맡길게. 칼리.”

 

 “오케이! 가자, 얘들아! 든든하신 사신님이 지켜주신다니 우리는 걱정 없을 거야. 그치?”

 

 구라의 농담에 칼리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칼리이이이이.”

 

 “그래, 그래, 키아라. 이번엔 봐주지 뭐.”

 

 마지막으로 키아라를 꽉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준 뒤, 그녀는 낫의 자루로 땅 위를 쿵 찍으면서 손을 흔들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세 소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결계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전히 허공을 가로지르는 수 갈래의 실선을 경계로 온갖 시공간이 혼재되어 있다. 불과 삼 미터만 앞으로 나아간다면 다시 그 지옥이 펼쳐지는 것이다.

 

 “대체 이런 건 왜 생긴 건지.”

 

 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만 뻗으면 결계가 닿을 거리까지 다가온 그녀는 번쩍거리는 경계 너머의 광경을 바라보았다.

 

 정적. 거리는 변하지 않고, 경계 너머에서 흔들리는 시공간의 편린만이 거무죽죽한 빛을 토해낼 뿐이다. 계속해서, 변하지 않고. 칼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결계는 왜 세워졌을까? 당연히 접근을 막기 위해서겠지. 하지만 그렇다면 왜 조용히 숨어 결계를 세우지 않고, 일부러 나 여기 있소, 하며 KFP 건물을 여기까지 가져왔을까?

 

 이건 마치.

 

 칼리의 표정이 점점 딱딱하게 굳어 간다. 그녀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내밀어, 경계면으로…….

 

 툭. 손끝이 닿았다.

 

 

-

 

 

 “건물 자체는 그다지 문제가 없어 보이는걸. 상가에서 떼어 온 것 치고는 말야.”

 

 이나의 중얼거림에 키아라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가 주목한 것은 뒤의 문장이었다. 그녀의 치킨집만 건물에서 떼다 이런 외딴 장소에 떨궈 놓을 줄 누가 알았을까.

 

 하지만 그들이 주목해야 할 것은 앞의 문장일 것이다. 적어도 1층은 멀쩡하다. 테이블도, 천장을 받치는 기둥도, 주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튀김기도, 그 안을 가득 채운 기름도. 하지만 그 사실 자체는 멀쩡하지 않다는 걸 모두가 안다.

 

 “어째 하나도 더러워진 게 없다? 되게 깨끗하네.”

 

 “직원들의 힘이지.”

 

 시시껄렁한 대화를 나누는 둘을 뒤로하고 이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기둥, 테이블, 의자, 모든 것이 정상이었다. 아무래도 1층에는 남은 게 없는 듯했다. 정적을 배경 삼아 흐릿한 그림자만이 그녀를 기웃거릴 뿐.

 

 이나는 서늘한 기분에 제 머리의 촉수를 만지작거렸다. 더한 것도 봤는데, 이런 것쯤이야. 가슴을 쓸어내린 그녀는 뒤돌며 말했다.

 

 “얘들아.”

 

 허공으로 날아든 말이 바닥으로 추락한다. 이나의 눈동자가 텅 빈 공기를 훑었다.

 

 서늘한 그림자 위로 기는 세 음절의 말은 갈 길을 잃는다.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다시 목소리를 내 보았다. 얘들아? 아무도 없다는 듯 싸늘함만이 전해져 온다.

 

 끼이이익, 마치 그녀의 뼈 마디마디가 소리를 내는 듯. 서늘하리만치 조용한 홀 위로는 소리의 잔향만이 굴러다닌다.

 

 잠시 숨을 멈췄다. 완전한 정적.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이토록 컸던가?

 

 그녀는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이블, 천장을 받치는 기둥, 주방 한쪽 벽면을 가득 채운, ‘텅 빈’ 튀김기. 이나의 어깨가 흠칫 떨린다.

 

 ‘여긴 안 돼.’

 

 그녀는 곧바로 달리기 시작했다. 한 걸음, 기둥 없는 홀과 의자 없는 테이블. 두 걸음, 주방 한쪽 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튀김기 하나. 세 걸음, 2층으로 향하는 계단, 그리고 네 걸음.

 

 열린 창문에서 들어온 바람이 휑한 실내를 쓸고 지나간다.

 

 

-

 

 

 “어, 키아라?”

 

 구라의 시선이 텅 빈 홀에 내던져졌다. 방금까지 테이블이 가득 차 있지 않았나? 의자만이 기약 없는 기다림을 갖고 그곳에 있을 뿐이다.

 

 “와, 잠깐만, 아, 이건 조금 아닌데.”

 

 당황도 잠시, 그녀의 머리는 곧바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후퇴? 어림도 없다. 남은 선택지는 둘. 남느냐, 나아가느냐. 그녀의 선택은 후자였다. 그녀는 삼지창을 앞으로 내세우며 외쳤다,

 

 “앞으로!”

 

 하지만 그녀가 실제로 밟은 길은 ‘아래로’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다만 2의 앞에는 마이너스 표시를 붙여야 할 것이다.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위를 올랐다. 그것이 실제로는 아래를 향한다는 것도 모른 채.

 

 

-

 

 

 2층의 복도도 깔끔했다. 정확히는 그녀의 기억 속에 남은 모든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항상 먼지가 남아 있는 저 구석의 쓰레기통과 같이. 키아라는 걱정스런 얼굴로 계단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력만으로는 뒤지지 않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조심스레 걸음을 내디뎠다. 한 걸음, 한 걸음, 변하지 않는 풍경에 그녀는 안심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코너를 도는 순간, 그녀는 그 생각을 취소해야 했다. 2층도 기억과 같다고? 아니었다. 적어도 축축한 동굴이 딸린 치킨집을 좋아한 기억은 없었다. 뒤편을 더듬던 발바닥이 쑥 가라앉는다.

 

 “씨발!”

 

 기겁하며 앞으로 넘어지듯 엎드린 키아라는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등 뒤에 있어야 할 바닥이 사라지고 끝없는 어둠만이 그녀의 시선을 받아치고 있었다.

 

 망설임은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이 바닥이 점점 사라져 간다. 그녀는 그 무언의 명령에 따르기로 했다. 한두 걸음쯤 움직여 뒤돌아봤을 땐 비린내 나는 동굴의 벽면만이 있을 뿐이었다.

 

 

 

 꽤 오래 시간이 지난 듯했다.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은 하나같이 비린내가 났고, 걸어가는 길은 미끄러운 돌로 덮여 있었다. 그 탓에 그녀는 몇 번이나 넘어질 뻔한 위기를 맞닥뜨려야 했다. 욕지거리를 계속 입에 달고 다니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테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시간을 의식조차 못하고 계속 걸어간 끝에 어두운 동굴 속으로 한 줄기 빛이 비쳤다. 키아라는 반색하며 걸음을 빠르게 했다.

 

 폴짝폴짝 돌의 틈을 뛰어넘어 도착한 그곳엔 커다란 광장이 있었다. 우선 비린내가 나지 않는다는 것에 그녀는 감사했다. 그리고 바닥이 평평한 대리석이라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했다. 하지만 그녀를 재촉하듯 사라져 가는 등 뒤의 동굴은 그런 마음을 깔끔하게 지워 버렸다.

 

 “으, 제기랄. 대체 무슨 일이 생겼길래 이런 데에 휘말린 거람.”

 

 투덜거리는 그녀의 귀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멈칫, 그 자리에서 정지한 채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보는 키아라의 눈에는 단지 광장의 풍경만이 보일 뿐이었다.

 

 …….

 

 작은 소리. 키아라는 한손검과 방패를 빼들고 조심스레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향했다. 뭔가 튀어나오기라도 하면 베거나, 태우거나, 방패로 찍어서 해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예상은 모두 빗나가고 말았다.

 

 “아메?”

 

 그녀의 눈앞에 보인 것은 혼절한 채 신음을 흘리는 금발의 소녀, 시간 여행자 왓슨 아멜리아였다.

 

 

 

 왓슨이 깨기까지는 두 시간이 더 걸렸다(왓슨의 회중시계로 알 수 있었다). 비몽사몽한 채 깨어난 그녀는 첫 번째로 주위를 둘러보았고, 두 번째로 당황한 얼굴로 키아라를 바라본 다음, 세 번째로 크게 소리쳤다.

 

 “도망쳐야 해!”

 

 “알아. 말해봐. 무엇으로부터?”

 

 “미래의 나로부터!”

 

 “그럴 줄 알았다.”

 

 멍해지는 왓슨의 얼굴은 꽤 볼만했다. 하지만 추측이 맞았다는 괜찮은 즐거움도 잠시, 키아라는 크게 숨을 내쉬고는 표정을 굳혔다. 심각한 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으니.

 

 키아라는 우선 그녀를 구하러 오게 된 경위부터 왜 이곳에 키아라 하나만 남았는지를 설명했다. 왓슨의 수용은 꽤 빨랐다. 그녀는 간단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그녀의 말을 한 줄로 요약하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KFP 건물이 움직이는 성이 되어서 쫓아왔더니 다 흩어지고 너만 내 앞에 있다?”

 

 “뭔가 좀 빠진 것 같긴 한데, 아니다, 다 들어갔나? 어쨌든 그래. 나가는 길은 알…… 리가 없나? 다 태워 버리면 어떻게 나가는 길이 뚫릴까?”

 

 속사포로 말하는 키아라의 앞에서 왓슨의 얼굴이 거무죽죽하게 죽어 갔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애초에 다른 시공간이야. 타임머신은 반쯤 망가졌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는 돌아가겠지.”

 

 왓슨은 무릎을 털며 일어났다. 그리고 그녀는 눈을 찌푸린 채 강당의 중앙 언저리를 노려보았다. 키아라가 보기에 그건 허공일 뿐이었지만, 그녀는 손가락을 모아 곧게 펴고 팔을 뒤로 끌어당겼다.

 

 잠시 후 그녀는 허공을 찔렀다. 다만 그녀의 손끝은 허공의 어느 점에 들어서부턴 눈에 띄게 떨리기 시작했다. 마임을 하는 거라면 꽤 실력자라고 키아라는 실없는 생각을 했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손끝에서 시작된 균열이 점점 벌어진다. 그녀는 양손으로 틈을 양옆으로 확 찢었다. 균열이 옆으로 쭉 열리며 마치 밤하늘 같은 공간이 드러났다.

 

 “미래의 내가 곳곳에 배치해 둔 시공간이야. 타임머신이 아직 완전히 망가진 건 아니라서 망정이지. 으으.”

 

 그녀는 팔이 아프다는 듯 얼굴을 찡그린 채 설명했다. 현실의 시공간을 떼어내 다른 시공간에 이식했다는 말부터, 갑작스레 물건이 사라지고 구라와 이나가 보이지 않게 된 것도 시공간의 분리에 의한 일이라는 것까지.

 

 “어렵군.”

 

 “어렵지. 하지만 나가는 길은 조금 더 쉬울 거야. 헤맬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나가고 나서부터 생각하자구.”

 

 “잠깐, 다른 애들은.”

 

 “나가서 길을 찾아보면 돼. 타임머신을 뺏겼지만…… 미래의 내가 만든 틈을 이용하는 건 가능할 테니까.”

 

 키아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이곳에 죽치고 있어 봐야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으니까. 하지만 친구들을 두고 먼저 나가야 한다는 현실은 그녀의 발목을 붙잡아 우울의 늪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가자.”

 

 키아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왓슨은 고개를 마주 끄덕이고 찢어진 틈새를 비집고 들어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통로라기보단 우주처럼 보였다. 숨도 쉴 수 있고 중력도 제대로 작용하지만,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주위는 텅 비었을 뿐 밤하늘처럼 빛나는 별들만이 어둠 위를 수놓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하지만 만끽할 시간은 없다. 왓슨은 망설임 없이 키아라를 안내했다. 점점 하강하는 기분이 든다.

 

 갈림길이 많은 듯했다. 물론 벽이고 뭐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곳이었지만, 왓슨은 자주 고민하는 듯 잠시 멈춰 몇 갈래 길을 살펴보곤 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변화가 찾아왔다. 단지 밤하늘 위의 별이라고만 생각했던 빛의 입자들이 별자리를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정확히는, 현실의 물체를 본뜬 듯한 별자리를.

 

 “저거 내가 사서 1층 홀에다가 가져다 둔 건데.”

 

 “좋은 징조야. 시공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면서 저 입자들이 그곳의 물체를 모사하는 거지.”

 

 “흐음.”

 

 그녀는 손가락을 펼쳐 하나씩 접었다. 총 세 개를 접은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키아라는 더 이상 불안해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차가우리만치 냉철한 얼굴로 왓슨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잠시 후, 말하고 싶지 않았다는 듯 망설이며 말을 꺼냈다.

 

 “……방금 말 안 한 건데, 동시에 나쁜 징조기도 해. 현실의 물체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거니까. 이를테면 장애물 같은 거.”

 

 “아야.”

 

 왓슨이 말을 끝마치자마자 키아라는 팔꿈치를 건드리는 둔탁한 감촉을 느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저 멀리 탁자 형태의 별자리가 흘러가고 있었다.

 

 “우리 주방에 식칼이랑 그런 거 있는데.”

 

 “조심하면 되지. 자, 가자.”

 

 “어어, 잠깐만. 내가 먼저 갈게.”

 

 키아라는 방패를 내밀며 씩 웃었다.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냐면서. 왓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불사조 님 등짝 한번 보자.”

 

 키아라는 킥킥대며 앞으로 움직였다. 그녀는 앞으로 다가오는 물건들을 방패로 쳐내면서 왓슨이 가리키는 대로 길을 걸었다.

 

 가는 길은 순조로웠다. 좋은 징조라던 별자리도 이제는 명확한 물체의 모습을 띨 정도였다. 원래 공간에 가까워진다는 것은 왓슨의 설명이 없어도 알 수 있었다.

 

 여전히 어두운 밤하늘 속을 부유하듯 걷고 있다. 물체의 형상은 또렷해져도 별자리가 사라져 가는 사방은 어둠에 점점 물들어갔다. 그러던 와중, 키아라는 왓슨을 불렀다.

 

 “아메.”

 

 “어.”

 

 “구라랑 이나는 괜찮겠지? 아프진 않겠지?”

 

 “아마 그럴 거야. 이상한 함정 같은 건 별로 없을 테니까. 괜찮을 거야. 키아라.”

 

 “으응.”

 

 그녀는 헤헤 웃으며 왓슨을 돌아보았다. 흐릿해진 별빛이 드리운 역광 속에서 왓슨은 별빛만큼이나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녀의 뒤통수를 향해 날아드는 커다란 튀김기만 없었어도 그 미소는 꽤 괜찮게 보였을 것이다.

 

 키아라는 아메를 끌어안고 방패를 내밀었다. 하지만 턱도 없다는 듯 튀김기는 삽시간에 방패 째로 그들을 밀어냈다. 팔을 타고 내달리는 충격에 신음을 뱉기도 잠시, 곧 키아라는 발바닥을 받쳐 주던 감각이 사라졌음을 느꼈다.

 

 키아라와 아메는 추락하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별빛이 빛을 되찾고 어두운 윤곽들은 점점 흐릿해져 간다. 연기처럼 흩어지는 형상은 마치 몇 시간 전에 봤던 유령의 마지막 순간 같았다.

 

 온갖 물체가 그들의 몸뚱이를 치고 지나가는 것도 잠시에 불과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들은 별다른 충돌 없이 어느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곳에서 그나마 괜찮은 점을 찾으라면 지면에 부딪치는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키아라는 미묘한 눈으로 그들이 떨어진 방향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해봐야 별빛만 산재해 있는 곳이었지만.

 

 왓슨은 키아라의 그림자 아래에서 일어났다. 당황한 건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안해, 아메. 버텼어야 했는데…… 아메?”

 

 “아, 잠깐, 이건…… 안 되는데. 젠장.”

 

 “아메?”

 

 키아라는 왓슨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앞에서 별은 너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시간의 별빛. 동시에 추억의 별빛은 그녀의 눈앞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불사조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만큼이나 별빛은 많고 밝았다. 눈앞에 펼쳐지는 옛 기억의 향연에 키아라의 입술이 차차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젠가 처음 죽었다가 되살아났을 때, 처음으로 인간을 만났을 때, 친구가 되었을 때, 누군가를 사랑했을 때, 다시 죽었다가 되살아난 곳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셀 수 없는 시간을 거쳐 지금에 도달하기까지의 족적이 그럼에도 찬란히 빛난다.

 

 ‘그랬던가?’하고 던지는 물음 뒤에 숨은 광휘의 따스함이란, ‘그랬었지,’하고 되새기는 악몽을 덮어 주는 담요가 되어, 그 안락함에 키아라는…….

 

 ‘아메.’

 

 별빛을 향해 홀린 듯 손을 뻗던 키아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한가할 때가 아니다. 비상 상황이라고 해야 정확할 테니. 그녀는 고개를 돌려 왓슨을 부르려 했다.

 

 갑자기 왓슨이 벌떡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녀의 옷자락이 들려 올라가는 사이로 왓슨의 별빛이 흔들거린다. 밤이었다. 별빛은 밤을 남기고 사라졌다.

 

 “가자.”

 

 키아라는 건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다시 뒤에 섰고, 왓슨은 앞에서 길을 안내했다. 별빛은 도로 빛을 되찾아 간다. 왓슨의 별이 남기고 간 밤의 어둠이 무색하게.

 

 별빛의 쇠퇴는 생각보다 빠르게 찾아왔다. 다시 키아라가 방패를 내세운다. 물체들이 날아다닌다. 이번에는 후방도 예의주시한다. 그런 것들을 잊지 않는다.

 

 왓슨의 걸음이 멈췄다. 밤에 겹쳐 오는 여명 같은 현실을 바라보던 키아라가 왓슨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다시 역광이 드리운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진다.

 

 “여기야.”

 

 “아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왜? 하는 듯한 눈빛으로 받아친다. 키아라는 때가 되었음을 눈치챘다.

 

 “넌 이 시간의 아메가 아니구나.”

 

 그녀의 말이 가져온 파급은 곧장 나타났다. 인간에게서 표정이 그렇게 없어질 수 있을까? 하물며 마네킹이라도 그런 얼굴이 되진 못하리라. 마네킹은 인간에게서 만들어진 것이니까.

 

 반대로 말하면 왓슨의 얼굴은 무생물의 그것을 향해 시시각각 변해 갔다. 키아라는 뒷걸음질을 치려다가 멈춰 섰다. 어쩌면 단 한 걸음 뒤에 왓슨이 유도한 어느 시공간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런 위협을 무릅쓰고 싶진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

 

 “떠본 건데 맞았네. 넌 딸꾹질을 한 번도 안 하더라. 세 시간, 이제는 네 시간이 넘도록 말야.”

 

 키아라는 경계하는 얼굴 위로 간신히 웃음을 띄워 보았다.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는 미소를 거두고 한손검을 꺼내 들었다.

 

 “딸꾹질이라…… 그래…… 맞지…… 그 시절엔 그랬었나…….”

 

 왓슨은 픽 웃었다.

 

 “맞아. 그랬었지. 그렇게 됐지. 전체적으로 말야.”

 

 이어지는 왓슨의 행동은 재빨랐다. 휘리릭 탁 하는 소리가 키아라가 인지한 전부였을 정도로. 어느새 그녀의 손에 들린 권총은 이미 장전이 끝난 상태였다.

 

 무표정한 만큼 말도 없었다. 찰나의 단위로 쪼개진 시간 속에서 키아라의 눈동자가 왓슨을 비췄다.

 

 총성이 일었다. 키아라의 눈은 여전히 왓슨을 향하고 있었다. 예정된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과 어차피 되살아나리라는 생각이 이어지는 사이에는 어쩔 수 없는 간극이 존재했다. 그래서 키아라는 반응하지 못했다.

 

 그녀의 눈앞을 가로막은 바닷물의 장벽에.

 

 총알은 바닷물의 소용돌이 속에서 힘을 잃고 가라앉았다. 동시에 바닷물의 장벽이 무너지며 그들의 옷을 흠뻑 적셨다.

 

 “구라?”

 

 왓슨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 개입했지? 시간이라는 독자적인 공간에 왜 구라가? 결론은 곧 도출되었다. 하지만 아메보다 빠르진 못했다.

 

 그들의 발밑의 밤이 쭉 갈라지는 것과 동시에 두 소녀의 인영이 훅 가라앉았다. 바닥을 한 바퀴 구른 끝에 균형을 잡은 왓슨은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다섯 명이 있었다. 칼리오페와, 이나와, 구라와, 방금 떨어진 키아라와, 딸국질을 하는 왓슨 아멜리아가.

 

 “히끅.”

 

 “……하!”

 

 왓슨은 주위를 둘러보며 코웃음쳤다. 결계 안이었다. 돌려 말하자면 아메도 왓슨이 설치한 ‘감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그녀의 눈동자에 차가운 빛이 서렸다.

 

 “뭔가 이상하긴 했지. 굳이 저 건물이라는 것도, 아메가 사라진 것도. 또 이 결계가 날 내보내질 않더군. 그래서 곧장 애들을 찾으러 들어갔더니 뭐. 역시나였지.”

 

 칼리오페가 거대한 낫을 꼬나쥐며 말했다. 최전열이라. 왓슨은 시선을 돌려 아메를 바라보았다. 가둬 놓았을 텐데?

 

 “멀리 떨어뜨려 놨을 텐데.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아메는 눈을 반쯤 감은 채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냥 왔어. 칼리가 부르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서.”

 

 “그냥…… 왔다고? 그냥? 그 멀고 복잡한 시공간을 뚫고?”

 

 아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왓슨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단지 그녀의 공격에 대비를 할 뿐이었다.

 

 “그래, 됐어. 좋아. 이렇게 된 거니까.”

 

 키아라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 올리는 것과 동시에 총탄이 방패에 틀어박혔다. 그것이 개전을 알리는 소리였다. 가장 먼저 튀어나간 것은 맨 앞에 서 있던 칼리오페였다. 낫이 공중을 석둑 잘라내는 소리가 왓슨의 등줄기를 긁어내렸다.

 

 왓슨은 반사적으로 총을 들어올렸다. 하지만 그녀가 방아쇠를 당기기까지의 간극을 구라는 놓치지 않았다. 바닷물이 총을 감싸고 그녀의 손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나려 했다. 이나의 촉수가 그녀의 발목을 막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엉덩방아를 찧는 그녀의 앞으로 칼리오페의 낫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렇게 찾아온 정적은 너무 빠른 전투의 끝을 고했다. 오히려 다행인 일이었지만, 왓슨으로서는 비참할 뿐이었다.

 

 “칼리, 잠시만.”

 

 곧 아메가 다가와 그녀의 앞에 섰다. 칼리오페가 물러나는 동시에 이나의 촉수가 그녀의 몸을 옭아맸다. 왓슨은 허탈한 표정으로 아메의 얼굴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저와 같은 얼굴로 미소를 짓고 울음을 터뜨리고 종막에 다다라선 얼룩져 알아보기 힘들 얼굴을.

 

 “나라고 불러야 하나?”

 

 “아멜리아라고 불러. 어차피 너희들끼리는 왓슨이나 아메 정도로밖에 안 부르니까.”

 

 “그래. 좋아. 아멜리아, 왜 이런 일을 했어?”

 

 “진부하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려다가 촉수에 묶인 팔을 보고 한숨을 푹 쉬었다.

 

 “그전에 하나 대답해 봐.”

 

 “뭘?”

 

 “넌 진짜일까?”

 

 “뭐?”

 

 영문을 모르겠다는 투의 대답에 아멜리아는 예상한 듯 입술을 짓씹었다.

 

 “또 하나 대답해 봐. 난 몇 살일 것 같지?”

 

 “잘 모르겠는데.”

 

 “먼 미래에 알게 되겠지. 반복에 반복에 또 반복을 거쳐서 네 머리가 어느샌가 어떻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될 때쯤 말야.”

 

 아멜리아의 말은 아무래도 아메에게만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중얼거렸다.

 

 “그래, 어떻게 되어버렸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이제 와서야. 믿을 것은 나 하나뿐.”

 

 아멜리아는 고개를 확 쳐들어 아메와, 그 뒤에 선 넷을 노려보았다. 그녀의 눈에 어린 것은 혐오감이었다. 아메가 뒷걸음질치는 순간, 그녀는 씹어 뱉듯이 말했다.

 

 “추억을 모독할 바에야.”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이상한 낌새를 느낀 칼리오페였다. 하지만 그녀는 느렸다. 아멜리아가 어금니 안쪽에 박아 놓은 독약 앰풀을 씹어 으깨는 것보다 빠르긴 어려웠다. 그녀의 낫도, 구라의 바닷물도, 이나의 촉수도.

 

 다만 키아라의 불은 아니었다.

 

 “아악!”

 

 아멜리아가 비명을 지르며 목을 비틀었다. 그녀가 토해낼 기세로 입을 벌리자 일그러진 독약 앰풀이 떨어졌다. 반쯤 증발한 독액이 앰풀 안쪽을 시꺼멓게 뒤덮고 있었다. 키아라의 불이 그녀의 볼 안쪽을 태워 버린 것이었다.

 

 “엄살 부리지 마. 따끔한 정도로 조절했거든.”

 

 아메의 옆으로 걸어 나온 키아라가 아멜리아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탁한 푸른빛이 도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이를 악무는 그녀를 향해 키아라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염병할, 뭐가 뭔지 참. 일단 나랑 같이 가자, 아멜리아.”

 

 “어디로?”

 

 “걱정하지 마. 평범한 방(usual room)일 뿐이니까.”

 

 아멜리아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어쩌겠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그녀의 뒷덜미를 잡는 키아라의 모습에 그녀의 이가 떨리기 시작했다. 간신히 꺼낸 것은 겨우 두 마디에 불과했다.

 

 “고문하려는 거구나.”

 

 키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등 뒤에 서 있던 넷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을 뿐이었다. 그들이 물러나는 가운데 키아라의 몸 위로 불길이 일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불길이 다가온다. 하지만 뜨겁지는 않았다. 그저 눈앞을 가리는 푸른 불꽃만이 기세를 더해 그녀를 잡아먹으러 올 뿐이다. 그것은 안대였다. 참담한 미래를 가려 주는 일말의 배려. 아멜리아는 다급하게 외쳤다.

 

 “날 고문해서 뭔가 알아내려는 거겠지! 아니, 애초에 그럴 필요도 없겠지! 어차피 너희들은!”

 

 불꽃이 폭발하듯 피어오른다. 동시에 아멜리아의 마지막 말이 뛰쳐나왔다.

 

 “미쳐 버린 내가 꿈꾸는 환각일 뿐이니까!”

 

 

-

 

 

 불길이 살라 먹은 시야가 점차 되돌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평범한 방의 악명을 익히 들어온 그녀로서는 앞으로 펼쳐질 풍경이 얼마나 끔찍할지 알고 싶지 않았다.

 

 애당초 환각일 뿐인데. 그랬었나, 싶었던 기억들을 끄집어낸 내 머리가 억지로 일으킨 모습일 뿐인데.

 

 ‘모독하지 마.’

 

 “눈 떠, 아멜리아.”

 

 푹, 소파가 꺼지는 소리. 앞에 앉은 듯하다. 구경이라도 하려는 건가? 부스럭거리는 소리. 뭐지? 비닐을 여는 건가? 그렇다면 고문 도구가 그 안에 들어 있겠군. 그리고 어디선가 아스라이 스며드는 향.

 

 코코아 향. 아멜리아는 눈을 번쩍 떴다. 방의 풍경은 단출했다. 창문 달린 파스텔 톤의 벽, 아담한 탁자 하나, 그리고 그들이 앉은 소파 둘. 덧붙여서 키아라가 가져온 쟁반과 간식거리.

 

 “여긴…….”

 

 “말했잖아. 단지 평범한 방일 뿐이야.”

 

 아멜리아의 몸짓이 딱딱하게 굳었다. 양팔을 일부러 팔걸이에 딱 붙인 채 그녀는 부자연스런 동작으로 고개를 들었다. 키아라는 여유롭게 코코아를 홀짝이고 있었다.

 

 “왜……?”

 

 “미래에서 왔다고 해도 그 뿌리는 아메니까. 추억을 공유하는데 그런 짓을 할 수가 있겠니. 와, 날 그런 개새끼로 본 거야?”

 

 킥킥대는 키아라를 앞에 두고 아멜리아는 멍한 표정으로 코코아를 내려다보았다. 그 앞에 놓인 쿠키도, 작은 메모지도. ‘글루텐 프리임.’

 

 “하.”

 

 왓슨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쏟아졌다. 곧 그 웃음은 멈추지 않을 듯한 광소로 변질되어 갔다.

 

 “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절규하듯 웃음을 터뜨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키아라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아멜리아가 터뜨리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제 스스로를 묶은 듯, 소파에서 몸을 떼지 않고 허리를 숙여 미친 듯이 웃어 댔다.

 

 그녀의 머리 아래로 반짝임이 흘러간 것은 환각이었을까. 키아라는 코코아가 담긴 머그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톡, 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아멜리아의 웃음이 뚝 멎었다.

 

 “넌 환각일 뿐이야.”

 

 “치킨집 하는 불사조는 웬만한 환각으로는 안 나올걸.”

 

 “그런데 왜 이런 걸 준비한 거지? 회유하려고? 이 미친 수렁에 날 끌어당기려고?”

 

 키아라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무슨 일이 있었나 듣고 싶어서.”

 

 아멜리아의 한쪽 눈썹이 확 올라갔다. 하지만 키아라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코코아 잔을 들어 홀짝일 뿐이었다.

 

 시간은 침묵 속에서 느리게 흘러갔다. 그동안 아멜리아는 시선을 허공에 묶어둔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침묵은 길었다. 키아라가 코코아 잔을 다 비우고 다리를 꼰 채 쿠키를 와삭거릴 때가 되어서야 아멜리아의 시선이 조금 움직였다. 그녀 앞에 놓인 코코아 잔을 향해서였다.

 

 아직도 김이 피어오른다. 키아라의 불이겠지. 언젠가 이런 적도 있었던가? 그랬던가? 그녀는 홀린 듯 두 손을 뻗어 머그잔을 감싸 쥐었다. 따뜻했다.

 

 “……일흔 여섯 번째야.”

 

 침묵을 깨트린 건 코코아 잔을 든 아멜리아였다. 키아라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뭐가?”

 

 “내가 너희들과 추억을 쌓은 횟수.”

 

 다르게 말하자면, 시간을 돌린 횟수였다.

 

 “너희들은 분명히 수명이 있어. 구라도, 너도, 칼리도, 이나도 다. 불사조? 사신? 안 죽어? 웃기지 말라 그래. 너희들은 분명히 죽어. 난, 난 미래에서 가져온 클론으로 연명하고 있지. 이 몸은 이제 삼백 번쯤 갈아치운 참일 거야. 그 끝에서 내가 뭘 느꼈는지 알아?”

 

 키아라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하길 원했다는 듯, 아멜리아는 고개를 들어 키아라를 노려보았다. 입가에는 쓰디쓴 미소가 걸려 있었다.

 

 “더는 추억을 쌓을 수가 없어. 계속해서 반복하니 모든 것이 인형 같더군. 아니, 인형이 맞았어. 내 뇌가 만들어 낸 환각. 죽음이 가까워진다면 쾌락을 느끼게 하는 분비 물질이 나온다고 하더군. 하지만 난 차마 죽음을 선택할 순 없으니, 이런 게 내 주위에서 알짱거리는 게 아니겠어?”

 

 아멜리아는 돌연 숨을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

 

 “잃기 싫어서 영생을 택했어. 하지만 모독을 바란 적은 없어.”

 

 “아메.”

 

 키아라의 부름에 그녀는 반응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그런 것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불씨가 타오르는 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코코아를 가리킬 뿐이었다.

 

 “식기 전에 일단 마셔. 쿠키도 먹고.”

 

 “너.”

 

 “많이 힘들 땐 이런 거라도 먹어야지.”

 

 식어 가던 코코아가 다시 따뜻해지는 것을 느낀 아멜리아가 눈밑을 꿈틀거렸다. 그녀는 코코아를 입에 가져가지 않았다. 하지만 키아라는 개의치 않았다.

 

 “음, 일단, 뭐라고 해야 할까.”

 

 그녀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비난? 힐난? 뭐든지 익숙할 뿐. 세월의 바람은 그녀의 감각을 무디게 깎아 놓고 지나갔다. 무서우리만치 무감각한 바람에조차 분을 느끼지 못하게 된 건 언제였을까.

 

 ‘그러고 보니 너희에겐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없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멜리아의 손이 움찔 떨렸다. 코코아 위로 파문이 일었다. 키아라는 무슨 말을 할까.

 

 “조금은 고마워.”

 

 예상하지 못한 말에 아멜리아의 표정이 멍하게 변했다. 쑥스럽다는 듯이 웃는 키아라의 얼굴에서는 그녀가 두려워했던 것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대신 다른 게 보였다. 그녀의 볼을 가로지르는 물기의 흔적.

 

 “그렇게 많이 우리에게 돌아왔다니, 이건 좀 슬프면서도 기분이 좋은걸.”

 

 “울어?”

 

 “아, 이건.”

 

 키아라는 눈물을 닦고 히죽 웃으며 쿠키가 쌓인 접시를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키아라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또 한 방울, 눈물이 그녀의 볼을 적신다.

 

 “우리가 죽는다는 건 정말이니?”

 

 아멜리아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구나. 큼.”

 

 이번엔 키아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아멜리아의 얼굴은 복잡했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죽을지 알까? 그게 평안할지라도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얼마나 슬퍼할지 알까?

 

 환각일 뿐인데.

 

 “안아봐도 될까?”

 

 “아니. 오지 마.”

 

 애초에 키아라는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을 본 그녀는 엉거주춤하게 일어서면서 뒷걸음질을 치려 했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무언가에 묶인 듯 제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온기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한 손에 코코아를 든 채, 아멜리아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키아라의 정수리를 곁눈질했다. 흐트러진 주황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어깨에 살포시 올라와 떨고 있었다.

 

 아멜리아는 젖어 드는 어깨의 감각에 흠칫했다. 키아라는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묻은 채 나지막이 말했다.

 

 “고생 많았어.”

 

 아멜리아는 그녀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정작 움직이는 것은 그녀의 입이 전부였다. 떨리는 목소리가 기어 나온다.

 

 “아니야.”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리고, 우리가 죽는다면 네가 우릴 기억해주면 좋을 것 같아. 하지만.”

 

 “잊을 수가 있을 것 같아!”

 

 버럭 소리치는 아멜리아의 모습에 키아라는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눈물을 닦아내고 아멜리아를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차가운 공기를 쥐고 있던 두 손은 아멜리아의 팔을 타고 올라가 어깨에서 멈췄다.

 

 키아라는 약간 힘을 뺀 손으로 아멜리아의 양어깨를 붙잡고 말했다.

 

 “알아. 하지만 언젠가 추억이 흐려져, 그랬던가, 하고 떠올릴 날이 올 거야. 그건 너도 잘 알겠지.”

 

 그 말을 듣는 그녀의 얼굴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녀는 떨고 있었다. 부정하려는 듯 입을 뻐끔거리지만 곧 그녀는 그럴 수 없음을 알고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그걸 바라지는 않을 거야. 네게 우리가 남는다는 건 정말 중요한 일이니까. 그래도 네가 힘들다면, 버틸 수가 없다면, 추억은 한쪽에 묻어둬도 좋아. 가끔 꺼내 봐도 좋을 만큼만.”

 

 “아니야, 안 돼. 잊지 않으려고 내가, 얼마나…….”

 

 “중요한 건 기억이 아니라 그날 있었던 일이지. 그리고 그날 있었던 우리의 존재야. 우리는 네가 힘들어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만일 그 추억이 네게 힘들 정도로 아름다운 것이었다면,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거지.”

 

 발갛게 변한 키아라 눈이 호선을 그렸다.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아멜리아는 자신이 코코아 잔을 아직도 잡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키아라의 불꽃에 힘입어 따뜻한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마치 영원히 온기를 잡고 있으리라는 듯이.

 

 하지만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 또한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새삼 상기한 순간, 아멜리아의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우리는 아직도 너에게 환각일 뿐이니?”

 

 키아라가 물었다. 아멜리아의 입술이 열렸다가, 다시 닫혔다. 그리고 다시 열렸다. 아, 작은 소리가 샜다. 그리고 다시 다물었다가 입술을 뗀다. 그제야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아메.”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를 만들어. 우리보다는 쪼오금 못해도 충분히 좋은 친구들로. 그리고 다시 추억을 쌓아. 그리고 그때는 우리처럼 끙끙 앓지 마.”

 

 “하지만 너희를 잊게 될 텐데?”

 

 “말했잖아. 완전히 잊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너는? 칼리는? 이나랑 구라는? 조각밖에 남지 않을 날들은?”

 

 “기억 속에 잠들겠지. ‘그들’에게 휴식을 줘. 그리고 네게도.”

 

 아멜리아는 입을 다물었다. 키아라의 입술이 그리는 저 호선이 그녀에게는 인사처럼 보였다. 그걸 그녀는 의도한 걸까, 아닌 걸까.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제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것을 하기로 했다.

 

 아멜리아는 머그잔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코코아는 따뜻했다.

 

 

-

 

 

 아멜리아의 울음소리는 방 밖에서도 잘 들릴 정도였다. 그것이 실패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는 것쯤은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히끅, 내가 저렇게 된다고?”

 

 다만 한 명은 조금 떨떠름한 표정이었다. 장난스레 미심쩍은 눈길을 보내는 구라의 뒤통수를 한 대 후려준 후, 망가진 회중시계를 내려다보았다. 타임 머신이었다. 물론 반쯤 망가졌을 뿐, 어느 정도 기능은 남아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칼리오페와 만나 다른 아이들을 구출할 수 없었겠지.

 

 “근데 이상하단 말야. 난 정말 눈앞이 깜깜하게 변하니까 죽을까 봐 무서워서 떨고 있었거든? 근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텅 빈 방에 내려 주던데.”

 

 이나가 촉수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눈을 깜빡거리고 있던 구라도 놀란 듯 소리쳤다.

 

 “나도 그랬어! 떨어지니까 바다가 있더라.”

 

 “죽이려고 한 거 아니었나?”

 

 “흠.”

 

 칼리오페의 침음. 아멜리아의 울음소리에 떫은 표정을 짓고 있는 아메를 제외하고 세 명의 두뇌가 회전한 끝에, 구라가 느릿느릿하게 답을 내놓았다.

 

 “그러고 보니까…… 총을 맞을 뻔했던 게…… 키아라 말고 또 있었나?”

 

 키아라는 불사조였다.

 

 세 명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리고 동시에 아멜리아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문을 향했다. 잠시 정적이 흐르고, 이나의 입에서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와.”

 

 

-

 

 

 아멜리아가 방에서 나온 것은 꽤 시간이 지난 뒤였지만, 붉어진 눈시울은 가라앉지 않은 모양이었다. 쭈뼛거리며 키아라에게 밀려 걸어 나오는 그녀를 향해 네 쌍의 시선이 쏟아졌다.

 

 일단 그녀는 무릎부터 꿇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바로 행동에 옮기려 했다. 갑자기 달려든 구라가 적당한 자리를 막아 버린 탓에 그러진 못했지만.

 

 “나쁜 년아! 내가 무서운 거 싫어하는 거 알면서도 이런 데에나 데려오냐?”

 

 고사리 같은 손으로 팔을 툭툭 두드려 대는 감촉이 유난히 아팠다. 장난일 뿐이라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지만.

 

 “미안해.”

 

 “어, 생각보다 진지하네, 그래, 응…….”

 

 ‘이게 아닌데.’

 

 “그래도 그건 못 참지!”

 

 ‘이게 맞나?’

 

 다시 달려들어 제 몸에 매달리는 구라의 애 같은 모습에 그제야 아멜리아는 피식 웃었다. 아메가 다가와 구라를 떼어낼 때까지 그녀는 살며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웃는 걸 보니 제대로 해결했나 보네.”

 

 “이런 걸 하면 뭔가 해줘야 하지 않을까?”

 

 칼리오페의 입에서 흘러나온 앓는 소리에 키아라는 반색하며 다가갔다. 실제로 이미 그녀는 양팔을 벌리고 있었다. 서로를 끌어안는 둘의 모습에 아멜리아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메.”

 

 이나의 목소리였다.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자, 늘 그랬듯 편안한 분위기의 친구가 그곳에 있었다. 도합 일흔 여섯, 이제 일흔 일곱 번째가 되는 친구의 모습임에도 그녀는 여전히 가슴속에 파묻힌 추억의 잔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가는 거야?”

 

 아멜리아는 고개만 끄덕였다. 이나도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다만 살포시 웃으며 그녀를 껴안아줄 뿐이었다. 그녀는 아멜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네가 많이 힘들었다는 걸 이제 알아. 그래도 키아라와 대화를 나눴으니 너도 이젠 잘 알겠지. 작별의 시간이라는 걸.”

 

 어깨가 젖어 드는 감각에 아멜리아는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갑자기 옆에서 끼어든 세 명이 그녀를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커다란 이불이라도 덮은 듯, 갑갑해도 따뜻한.

 

 훌쩍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메웠다. 특히 키아라가 그랬다. 불사조는 어울리지 않게 눈에서 눈물을 자주 흘리는 재주가 있었다. 아멜리아는 그들을 마주 끌어안아 주었다.

 

 “너희를 언젠가 잊게 되겠지만, 곧 그래야겠지만.”

 

 울음소리를 차차 낮추는 친구들에게 그녀는 인사 대신 부탁을 남기기로 했다.

 

 “조금만 더 기억하게 해줘.”

 

 끄덕. 어깨를 누르는 턱의 감촉과 눈물의 축축함에 아멜리아는 눈을 감았다.

 

 

-

 

 

 타임머신을 손에 든 채, 아멜리아는 고개를 들어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입을 열어 무언가를 물으려다가, 이내 그만두기로 했다. 아마 첫 번째의 추억을 만드는 중이겠지.

 

 그녀는 그저 자신과 똑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그래서 그녀의 앞으로 내밀어진 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타임머신 내놔.”

 

 “아, 고장났었지.”

 

 그녀는 주머니에 들어 있던 작은 금속 조각을 꺼내 그녀에게 건네었다. 그것을 받아 드는 아메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것만 끼우고 어떻게 모양만 잡아 주면 멀쩡하게 돌아갈 거야.”

 

 “예비품은 없어? 히끅.”

 

 “딸꾹질은 여전하네.”

 

 피식 웃는 아멜리아를 본 아메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미래의 자신이라는 존재는 익숙했지만, 이런 유의 상황은 낯선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침묵을 지켰다. 다행히 아멜리아는 다음 말을 준비해두고 있었다.

 

 “내가 그런 일을 했는데도 그 애들은 많이 울어 주네.”

 

 결계가 사라지고 KFP 건물이 돌아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황량한 바위 위로 바람이 불어닥칠 뿐이었다. 그 광경을 보며 아메는 대답했다.

 

 “너는 내가 도착할 지점이니까.”

 

 “아니, 거쳐 갈지도 모를 지점일 뿐이지.”

 

 아메는 피식 웃으며 정정했다.

 

 “너는 결국 나니까.”

 

 아멜리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흐릿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저런 애들을 또 친구로 사귀긴 어렵겠지?”

 

 “그렇겠지.”

 

 “넌 앞으로 어떡할 거야?”

 

 “살아가겠지. 혹은 죽거나. 내 삶을 완결한다는 의미에서.”

 

 삼백 번 남짓. 그녀의 몸뚱이가 새것으로 바뀌고 낡아 떨어지길 반복한 횟수였다. 아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의미라면 이견은 없을 것이다. 그녀나, 그녀의 친구들이나.

 

 “잘 가. 다시 보지 말자구.”

 

 그것이 단순한 축객령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메의 어깨를 툭툭 건드려준 뒤 회중시계를 들었다.

 

 그녀의 모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가동음이 꽤 시끄럽다는 것을 알고 있던 아메는 이미 귀를 막은 뒤였다.

 

 공간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밤하늘처럼 펼쳐진 시꺼먼 허공 사이로 점점이 들어가 박힌 별들이 빛을 내고 있었다. 하지만 아멜리아의 얼굴에 역광을 드리우기에는 너무 옅은 빛이었다. 단지 그녀의 주위를 빛내 줄 뿐이었다.

 

 햇빛이 날아와 그녀를 비춘다. 유난히 밝게 물든 그녀의 피부가 점점 흐릿해진다. 별빛은 작별을 고하고, 어둠은 물러나 길을 비켜주고, 햇살은 그녀를 통과해 그림자를 살라 먹고…… 균열과 함께 밤은 사라졌다. 낮의 환한 공기만이 부유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