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릭터의 세부 설정이 다를 수 있습니다.

*재미있게 읽어주신다는 것만큼 감사드릴 만한게 또 없습죠

*개추는 잊지 말아주시고

*루시아 만세




설국을 걷는 산타클로스

 

 

 다온하람

 

 

 

 설국(雪國)이었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에 파도 부서지는 소리마저 얼어붙은.

 

 끊임없이 몰아치는 겨울의 한기에 얼어붙은 바다 위, 어스름한 달빛이 구름을 빠져나와 눈보라의 품으로 투신한다. 달빛을 모조리 집어삼키는 눈보라 탓에 바다 위의 시야는 그다지 밝지 않았다.

 

 소리라곤 공기를 찢는 듯한 바람 소리밖에 없는 가운데, 얼음을 두껍게 덮은 눈밭 위로 사박거리는 발소리가 울린다. 눈보라의 휘장 너머로 흐릿한 인영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후우.”

 

 후레아의 입에서 뜨거운 숨결이 흘러나온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꽁꽁 싸맨 두꺼운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한기는 그녀의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제 모습을 내려다보던 후레아의 입에서 픽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빨간 털옷 위를 장식한 흰 털과 껴입을 대로 껴입은 탓에 둥글어진 실루엣은 영락없는 산타클로스였다. 불만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도 없는 바다 위로 눈을 털어내며 걷는 모습은 영 산타클로스에게 어울리는 모습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끌고 있던 썰매 위에 걸터앉았다. 눈보라가 약해지고 있었다. 곧 눈이 그치고 해가 뜨겠지. 그때까지 편히 쉴 요량으로 앉아 주머니를 뒤졌다. 곧 그녀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통조림이나 보온병, 하물며 핫팩도 아닌 한쪽 구석이 구겨진 쪽지였다.

 

 그녀는 쪽지를 펼쳤다. 익숙한 글씨체가 그녀를 반겼다.

 

 

 곧 찾아올 크리스마스 파티에 나의 산타를 초대합니다. 와줄 거지? 기대해. 우리도 기대하고 있을게.

-널 사랑하는 루시아가.

 

 

 편지 어디에도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단지 ‘나의 산타’라는 모호한 지칭과 루시아의 동글동글한 글씨체가 있을 뿐. 다만 그녀는 다른 것에 더 신경이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후레아는 다시 쪽지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고이 집어넣었다. 그녀의 머릿속에는 단 한 단어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우리.’

 

 후레아는 걸어온 길을 돌아보았다. 좁은 시야를 가득 메운 눈 사이로 말뚝처럼 박힌 검은 물체가 보였다. 눈보라가 아무리 휘몰아쳐도 그것을 놓칠 순 없을 것이다. 그건 슬픔을 통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니까.

 

 동사한 시체들이 몸을 비튼 채 눈밭 곳곳에 쓰러져 있다.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죽어간 그들은 앞으로도 그렇게 남아 있을 것이었다. 제 삶을 완결짓지도 못한 이들의 얼굴이 후레아의 동공에 비친다. 곧 그녀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혹독한 추위 속에서 온기를 갈망하는 그곳은 설국이었다.

 

 

-

 

 

 앞으로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후레아의 예상대로였다. 곧 눈보라는 멈췄고, 해가 떴고, 비교적 따뜻해진 공기에 만족하며 그녀는 계속해서 걸었다. 이동에 걸리는 시간만 한나절이라는 것 또한 그녀의 예상대로였다. 하지만 단 하나, 루시아의 거처에 관해서는 그녀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가고 말았다.

 

 설국의 밤은 다행히 맑았다. 하지만 이게 정말 날씨가 맑아서인지, 아니면 추위 속에 쓰러져 정신을 잃은 채 환상을 느낄 뿐인지 후레아는 진지하게 고민해 보았다. 곧 전자가 옳다는 결론이 나왔지만 여전히 눈앞의 광경은 이질적이었다.

 

 얼어붙은 해변가 너머에는 벌거벗은 가로수가 쭉 늘어져 있었다. 가로수 사이사이마다 놓인 얼음 조각상들은 투명한 빛을 쏟아낸다. 그 위로는 나뭇가지 밑으로 드리워진 줄조명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그녀는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도사린 설국의 황량함을 살라 먹은 그곳엔 길이 있었다. 제대로 꾸며 놓은 길이. 그녀의 발걸음이 길을 향해 움직였다.

 

 곧 얼음 조각상의 사이에 선 후레아는 제가 꽤 우스운 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곳곳이 얼어붙은 산타복을 껴입은 채 고글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괴한. 그녀는 뒤돌아 썰매의 상태를 확인했다. 곳곳에 낀 고드름이 눈에 들어왔다.

 

 ‘괴상한데.’

 

 그때 들려온 달각거리는 소리에 후레아는 고개를 돌렸다. 깔끔하게 턱시도를 차려입은 해골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해골과 턱시도와 깔끔한 걸음이라. 퍽 괴상한 조합에 후레아의 고개가 살짝 돌아갔다.

 

 해골 집사는 말없이 손을 들어 얼굴을 훑는 시늉을 해 보였다. 무슨 뜻인지 알아챈 후레아는 고글과 마스크를 치우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해골 집사는 허리 굽혀 인사하고선 따라오라는 손짓과 함께 앞장서 걸어갔다.

 

 곧 후레아는 이 길이 꾸며질 수 있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저 언덕 너머에서 나무를 캐고 있는 것은 모두 언데드였다. 시체가 넘쳐 나는 게 설국이다. 노동력이라면 어디서든지 충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후레아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고개를 가로젓고 해골 집사의 뒤를 따라 계속 걸었다.

 

 조각상은 아름다웠다. 대부분 뭔가 알 수 없는 것들이었지만, 개중에는 꽤 수준급의 작품도 끼어 있었다. 저 루돌프라든지, 얼음 나무라든지, 당근이라든지, 메이스라든지…….

 

 후레아의 발걸음이 멈췄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해골 집사는 그 자리에 서서 후레아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파르르 떨렸다. 며칠 전, 돌연 편지를 들고 그녀를 찾아온 유령을 만났을 때만큼.

 

 메이스, 당근. 그리고 다음은? 후레아는 고개를 홱 돌려 주위를 샅샅이 훑었다. 조명을 받아 밝게 빛나는 얼음 조각상 위로 묘한 음영이 겹친다.

 

 “배, 나비, 메이스, 당근…… 설마.”

 

 혼잣말을 중얼거린 후레아는 곧바로 길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다. 백색으로 점철된 설국의 역사에는 그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단지 후레아가 그들의 그림자라도 널어 두려고 둔 자그마한 의자만이 나란히 음영을 드리우고 있을 뿐. 지금까지는.

 

 후레아의 볼을 스치는 공기는 차가웠다. 아니, 뜨거웠다. 설국의 모든 광경들이 그녀의 발걸음을 스치며 열과 함께 저 너머로 사라져 간다. 시간을 넘어 달리는 듯한 느낌에 후레아는 초조해하며 숨을 멈췄다. 당장이라도 설국으로 되돌아가 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곧 드러난 저택을 향해 후레아는 거침없이 달렸다. 그 뒤로 달려오는 해골 집사의 눈물 어린 달각거리는 소리도, 그녀의 주위로 세워진 수많은 얼음 조각상들도, 설국의 추위조차도 그녀를 따라잡을 순 없었다.

 

 계단을 단숨에 뛰어오른 후레아는 커다란 문의 문고리를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리고 그것을 당기려는 순간, 그녀의 몸이 얼어붙었다. 만일, 이 모든 것이 거짓이라면. 저 너머에 있는 것이 그저 설국의 일부일 뿐이라면.

 

 그녀의 손이 문고리를 미끄러져 떨어진다. 후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돌아보았다. 넓게 펼쳐진 수평선은 없고 차가운 빙판만이 그녀를 응시한다. 공허한 설국.

 

 그 순간 후레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귓가에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그녀는 다시 문을 바라보았다. 마치 창 너머를 밝게 비추는 달빛처럼 그것은 은은하게 그녀를 향해 번져 오고 있었다.

 

 그 소리는 문 안에서 오고 있었다. 시끌벅적하고, 웃음기가 가득 찬, 그런…….

 

 마치 모닥불의 온기처럼 그녀를 데우는 소리에 그녀는 다시 문고리를 손에 쥐었다. 양손으로 붙든 문고리가 떨어질세라, 조심스레 당기는 그녀의 시선 앞으로 빛의 선이 그어지기 시작한다.

 

 설국의 밤으로 과거의 불꽃이 찾아왔다.

 

 “카드! 그 카드 숨기는 거 봤어! 나 봤다고!”

 

 “저는 카드를 숨긴 적이 없는데요 페코?”

 

 “아하하하하하!”

 

 “어어! 어어어! 존댓말 집어치우고 너 거기 움직이지 마, 노엘! 잡아! 저거, 어, 튄다, 저거 튄다! 어어어!”

 

 “아하하하…… 어?”

 

 설국의 한기를 밟고 선 그녀를 보고, 웃음으로 달아오른 저택의 열기는 정적 속에 사그라드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쉽게 꺼지지 않는 불씨처럼, 새로 시작되는 열기는 후레아를 향해 손을 뻗었다.

 

 “얘들아.”

 

 툭 떨어지듯 나온 말소리가 조용한 저택에 울려 퍼진다. 후레아의 등 뒤로 불어닥치는 찬바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굳어 있었다. 그녀의 눈앞에서 노엘이 눈물을 떨구고 있었다.

 

 “후레아?”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각기 떨어진 자리에 선 셋은 현관 앞에서 찬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는 그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한순간 불꽃이 튀듯이. 노엘이 비명에 가까운 울음을 터뜨리며 후레아를 향해 바닥을 박찼다. 이어서 페코라와 마린도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녀를 뒤따랐다.

 

 이것이 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는 양팔을 벌렸다. 두꺼운 털옷 위로 느껴지는 그들의 감촉은 여전히 따스했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생생했고, 현실이라기에는 너무 따뜻했다. 하지만 그 온기는 설국에서 얼어붙었던 눈물을 녹이기엔 충분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설국의 저녁, 등 뒤로는 여전히 한기를 묵묵히 감내하면서도 후레아는 그들을 꼭 끌어안았다.

 

 

-

 

 

 문이 닫히고 몇 시간이 지나서야 그들의 울음은 멎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 여파는 아직 남았는지 카드를 쥔 그들의 손은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얼굴에 계속해서 찾아오는 불청객의 이름을 듣고 나면 그 정도의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만 좀 웃으라고 페코.”

 

 “거울 필요하지 않니? 아, 원 카드.”

 

 마린이 내려놓은 카드를 본 노엘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후레아는 피식 웃곤 시계를 찾아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하지만 시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밤하늘의 빛을 받아서 뿌리는 유리가 천장을 덮고 있을 뿐.

 

 달이 높았다. 자정이 된 걸까. 시간에 대해서 생각하던 그녀의 팔뚝에 툭툭 건드리는 감각이 전해져 왔다. 고개를 돌리자 노엘이 부드러운 얼굴로 카드 더미를 눈짓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웃고는 탁자 위에 쌓인 카드를 내려다보았다.

 

 조커가 겹쳐져 있었다.

 

 “아―하! 꼴찌군요, 후레아 씨!”

 

 후레아는 노엘의 웃음을 잠시 잊기로 했다. 파산을 맞이한 자에게 주어지는 가혹한 비웃음의 세례 아래 그녀는 기쁨과 분노 중 어느 쪽에 제 몸을 실어야 할지 고민했다.

 

 곧 카드가 다시 돌아간다. 제 앞에 떨어지는 카드를 바라보던 후레아의 머릿속으로 잊고 있던 이름이 스쳤다.

 

 “맞다. 루시아는?”

 

 “으응? 몰라 페코. 늘 저녁에는 없는 페코 같던데.”

 

 문법을 묘하게 파괴하는 단어에 후레아는 피식 웃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루시아를 떠올렸다. 어떻게 이 아이들을 여기로 데리고 온 걸까? 언데드의 힘을 빌린 것일 테지만, 그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을 것이다. 문득 숙연해지는 기분에 그녀는 고개를 내렸다.

 

 조커가 또다시 겹쳐져 있었다. 그녀의 차례였다.

 

 “페―코 페코 페코 페코!”

 

 모멸에 찬 웃음소리 속에서 후레아는 저 머리에 언젠가 당근 대신 썩은 나뭇가지를 끼워 주겠다고 다짐했다.

 

 다시 카드가 돌기 시작할 즈음, 페코라의 귀가 쫑긋 섰다. 곧이어 후레아도 들릴 정도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박거리는 소리가 창밖의 작은 바람소리를 뚫고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거 혹시 루시아의.”

 

 “루시아!”

 

 “루시아아!”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셋은 카드를 내팽개치고 현관으로 달려나갔다. 집에 돌아온 어미를 맞이하는 아기새 같은 광경에 어리둥절한 기분도 잠시, 그녀는 그들을 따라 소파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설국이 펼쳐졌다. 설국의 한기 위에 선 루시아는 두꺼운 털옷에 싸인 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로 부벼대는 넷의 모습을 지켜보던 후레아는 그냥 웃기로 했다. 이런 세상에서 사이가 가까워지는 것은 이상하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으니까. 그녀는 앞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루시아가 그녀를 알아챈 건 곧바로였다. 삽시간에 밝아지는 표정에 그녀는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은 느낌이었다.

 

 “후레아!”

 

 “루시아아!”

 

 후레아는 양팔을 펼치고 루시아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쁨의 비명이 공기 속을 가로질렀다.

 

 루시아의 작은 몸을 끌어안은 후레아는 곧장 그녀의 볼에 얼굴을 비비기 시작했다. 징그럽다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녀는 그의 멱살을 잡고 설국 한가운데에 던져줄 생각이었다.

 

 “오랜만이야! 편지 받았는지 확인을 못 해서 불안했었는데, 와 줬구나.”

 

 “안 올 수가 있겠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여기 네가 있다잖아! 근데 이렇게, 이렇게…….”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 후레아를 감싸 안으며 루시아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셋을 돌아보고선 속삭였다.

 

 “괜찮아. 여기 있어.”

 

 

-

 

 

 새로운 햇살이 내려왔다. 설국의 무자비한 그것이 아닌 창문을 넘어 조심스레 들어오는 따뜻한 햇살임을 느낀다. 후레아는 침대에 누운 채 눈만 떠 천장을 바라보았다. 나무판자나 흙이 아닌 새하얀 천장이었다.

 

 복도로 나온 그녀는 2층의 방을 스쳐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고 부엌에서 달그닥거리는 소리만이 들려오고 있었다.

 

 꽤 특이한 광경이었다. 프라이팬 앞에 서서 심각한 표정으로 내용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루시아와 그 옆에서 허둥대는 해골 하나 정도면 특이하기에 충분하다.

 

 “좋은 아침.”

 

 “아, 후레아! 좋은 아침.”

 

 루시아가 뒤를 돌아보는 틈을 타 급하게 불을 줄인 해골은 있지도 않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득 뼈를 뼈로 쓸어내리는 감각이 궁금해졌지만 묻지는 않기로 했다.

 

 어쨌든 좋은 아침이었다. 약간 어색한 동작으로 의자에 걸터앉은 후레아는 루시아에게 물었다.

 

 “뭐 하고 있었어?”

 

 “파티 준비. 진짜 다 모이게 되었으니까 초대장대로 파티를 벌여야지.”

 

 후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파티라. 그 규모는 잘 모르겠지만 그녀에게는 뭐가 되었든 성대한 파티일 것이다. 그녀는 기대로 밝게 물든 표정으로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소파에서 올려다보는 천장은 하늘이 그대로 보여 좋았다. 맑게 갠 하늘 위에서 햇빛이 구름을 노랗게 물들인다. 오랜만에 보는 광경에 후레아는 한참을 그곳에 앉아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다가오는 루시아의 손에 고개를 도로 내린 것은 나머지 셋이 2층에서 내려올 때쯤이었다. 넓은 탁자에 놓인 접시 위에는 베이컨으로 추정되는 고기가 몇 가지 열매와 함께 놓여 있었다. 되살린 해골 중에 고기를 잘 다루는 사람이 있었다고 루시아는 설명했다.

 

 ‘이것저것 대단하네.’

 

 “그럼 이 저택은 어떻게?”

 

 “버려져 있던 걸 좀 보수했지. 운이 정말 좋았어.”

 

 그날의 행운을 상상하기라도 하는 것인지 루시아의 얼굴이 흐뭇한 미소로 물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후레아는 베이컨을 썰어 입에 넣었다. 오랜만에 맛보는 짭조름한 맛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뒤처리는 해골이 맡았다. 노동 착취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해골의 몸짓은 신나는 듯했다. 주인을 따르는 것 자체에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는 루시아의 설명이 뒤따랐다.

 

 “편리하네.”

 

 “그런 약속이니까. 자, 얘들아! 이제 우리도 일하자! 파티 때 맛있고 좋은 거 준비하려면 지금부터 일해야지!”

 

 보드게임을 하고 있던 셋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할 일이라는 것은 결국 해골의 보조가 전부였다. 마린과 노엘, 페코라는 각자 해골의 뒤를 따라 다른 방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 수북이 쌓인 장식들을 보니 꾸밀 것들을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후레아는 그녀의 앞으로 내밀린 털옷을 보고 상황을 이해했다. 루시아는 약간 미안하다는 웃음을 지으며 문을 가리켰다.

 

 “우리는 바깥일을 해야지.”

 

 후레아는 맡기라며 가슴을 두드리고는 털옷을 받아들었다.

 

 또다시 설국이 펼쳐진다. 차디찬 바람은 하늘을 맑은 것이 아닌 그저 빈 것으로 보이게 했다. 뺨을 에는 한기에 익숙한 아픔도 잠시, 그녀는 저택 뒤편으로 향하는 루시아를 따라 걸었다.

 

 산길은 수북하게 쌓인 눈더미 사이로 나 있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눈더미는 흙먼지 탓에 군데군데 더러워져 있었다. 다행히 길은 미끄럽지 않았다. 뿌듯하다는 듯 가슴을 툭툭 치는 해골을 향해 루시아는 싱긋 웃어 주었다.

 

 인력이 넘치는 것은 시체가 많아서겠지. 그녀는 복잡함을 느끼면서도 길의 편안함에 감탄하며 루시아를 뒤따랐다. 곧 경사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루시아가 걸음을 멈췄다. 꼭대기에 도착한 것이다. 조금 떨어져 걷던 후레아의 얼굴 위로 햇빛의 막이 내려온다. 차차 내려오는 햇살에 그녀는 살짝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얼어붙은 바다를 바라보았다.

 

 희미하다. 햇빛은 강렬했지만 눈밭의 순백색은 공고한 성처럼 빛을 모조리 막아낸다. 칙칙한 눈밭의 모습에 후레아는 말없이 고글을 내렸다.

 

 “좋아, 이제 할 일을 알려줄게. 어렵지 않을 거야. 저기 앞치마 입은 아이 있지? 따라가면 다 알려줄 거야. 루시아는 이쪽으로 갈게.”

 

 빠르게 설명을 마친 루시아는 숲속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고글 탓에 갈색으로 변해 버린 시야 속에서 그 무엇보다 어두운 나무 사이의 검정 속으로 그녀는 사라져 갔다.

 

 앞치마를 입은 해골을 따라가자 고소한 냄새가 풍겨 오기 시작했다. 곧 그녀는 할 일이라는 게 고기를 훈연하는 것이라는 걸 알았다. 그것이 따뜻한 모닥불 앞에 앉아 가끔씩 고기만 확인하면 되는 일이라는 것도. 그녀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일은 꽤 어이없는 방향으로 끝나게 됐다. 그게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지만.

 

 후레아와 해골들은 망연자실한 눈으로 눈밭 위를 구르는 훈연기를 내려다보았다. 애당초 나뭇가지를 엮어 만든 조악한 것이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은 어쩌면 예정된 수순이었을지도 모른다.

 

 “근데 고기랑 같이 넘어지는 건 너무하지…….”

 

 옆에 있던 해골이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두개골을 떨어뜨렸다. 간신히 그것을 받아낸 후레아는 해골에게 머리를 넘겨 주었다.

 

 “새로 올릴 고기는 없어요?”

 

 해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쉬운 눈길로 고기를 다시 내려다본 그들은 곧 하나의 합의를 이끌어냈다. 일단 치우고 쉬자는 것이다. 고기를 먹는 당사자이자 제공자의 역할을 맡은 후레아였지만, 흙투성이 눈밭을 구르는 고기를 친구들에게 먹이고 싶진 않았다.

 

 곧 그녀는 산길을 내려가게 되었다. 일이 한 시간은 더 일찍 끝났으니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노을이 가져다준 그림자가 내리막길의 끝까지 드리운다. 기이할 정도로 길어진 그림자의 카펫을 걸어 내려갔다. 설국의 차디찬 바람 아래에서 걷는 길은 생각보다 길었다.

 

 “다녀왔습니다.”

 

 저택의 문을 열며 말했지만 대답은 없었다. 노을의 그림자가 드리운 집안의 풍경만이 그녀를 응시할 뿐이었다.

 

 조용했다. 죽어 버린 낯선 광경에 당황한 표정이 얼굴을 메웠다. 문을 닫는 소리가 유난히도 시끄럽다. 문을 닫기 직전 단말마처럼 휘몰아친 설국의 바람을 마지막으로, 고요가 찾아왔다.

 

 후레아는 현관 앞에 굳은 채 거실을 바라보았다. 양옆으로 세워진 짤막한 벽이 그녀의 시야에서 차지하는 면적은 그다지 크지 않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감옥에라도 들어온 기분이었다.

 

 위화감에 떨리는 발을 들어 내디딘다. 유리가 반사한 섬광이 시야를 유린한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집안은 한층 더 어두워져 있었다.

 

 “얘들아?”

 

 그녀는 천천히, 그리고 이내는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지르밟는 소리는 주위의 침묵에 살해당한 듯 그녀의 발밑에 누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길게 늘어진 복도를 타고 놓인 다섯 개의 문. 복도를 타고 기는 어둠은 불 꺼진 전등 아래서 천천히 기어 다닌다. 고요한 어두운 복도의 끝에 서서 후레아는 홀로 노을의 잔재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불안을 잠재우려 입을 열었다. “얘들아?” 조용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어둠 속으로 발을 들인다. 노을은 가시고 불 꺼진 복도 사이로 발소리만이 축축 늘어진다.

 

 복도 정중앙에서, 후레아는 걸음을 멈췄다. 떨리는 시선이 잠시 어둠에 휩싸인다. 뇌리를 스치는 섬광에 그녀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눈을 떠, 어두운 복도를 바라볼 때.

 

 “나 왔어.”

 

 “루시아?”

 

 “루시아!”

 

 시간이 되면 뻐꾸기가 튀어나오는 시계처럼, 그들은 반사적으로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당황한 후레아의 옆으로 커다란 발소리가 스친다. 그녀는 잠시 멍하니 서서 방금 있었던 일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계단 뛰어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온다. 후레아는 왜인지 계단에 떨어져야 할 햇살이 오히려 주위를 어둡게 만들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그곳으로 다가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떠밀리듯이 걸음을 옮겼다. 코너가 가리고 있던 시야가 차차 넓어진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그 안을 확인하듯이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자그마한 루시아를 둘러싼 세 친구들이 환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달라붙고 있었다.

 

 아기새처럼. 어머니에게 그러는 것처럼.

 

 그 순간, 루시아의 시선이 후레아의 눈동자를 담았다. 잠시의 침묵 끝에서 후레아는 그녀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실마저.

 

 바깥에서는 설국의 차디찬 바람만이 위령제를 지내고 있었다.

 

 

-

 

 

 크리스마스 이브의 밤, 크리스마스까지 겨우 두어 시간 남짓 남은 시간, 루시아는 불도 켜지 않고 거실에 서서 화려하게 꾸며진 저택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벽 한쪽을 가득 채운 나뭇잎 꽃다발과 나뭇잎 깃털, 나뭇잎 리본에 나뭇잎 방울. 모조리 나뭇잎으로 만들었다는 것에 루시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소파에 가 앉았다. 푹 꺼지면서 엉덩이부터 등까지 푹신하게 안아 주는 것이 편안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렇지 않았다. 자조하고 있는 것 같기도, 슬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표정으로 그녀는 크리스마스 트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꽤 괜찮다고 생각하지 않아?”

 

 루시아는 조곤조곤 말했다. 그 정도로도 충분히 잘 들릴 만큼 집안은 고요했다. 곧 발소리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후레아였다.

 

 “어디서 난 거야?”

 

 “되살린 아이들에게 부탁했어. 튼튼한 애들 위주로.”

 

 “꽤나 고생했겠는걸. 이런 세상에서 크리스마스 트리 찾기라니.”

 

 “그치? 장식품도 정말 많이 고생했을 거야. 망가지거나 얼어붙거나 그런 것들이 많으니까.”

 

 루시아의 말투는 잠잠했다. 죽음처럼 고요히, 그녀는 움직이지 않고 크리스마스 트리만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후레아는 천천히 걸어와 그녀의 곁에 섰다.

 

 “좀 더 일찍 올 거라 생각했어.”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의의 의미로 받아들인 후레아는 곧바로 질문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녀의 턱밑으로 솟아오르는 루시아의 정수리 탓에 그녀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루시아는 소파에서 일어나 털옷을 걸치고선 그녀를 바라보았다. 후레아는 그 표정이 안쓰럽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털옷을 껴입은 둘은 말없이 설국의 산길을 걸었다. 해가 떠 있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서늘한 설국의 광경에 후레아는 익숙함을 느꼈다. 동시에 그것은 불안이었다. 제발 아니길 하는 간절함이었다.

 

 산꼭대기에 서자, 어둠을 향해 펼쳐져 있는 얼어붙은 바다가 보인다. 행복을 집어삼키는 아가리 같은, 더없이 우울한 풍경에 잠시 멈춰 선 후레아에게 루시아가 물었다.

 

 “이렇게 된 첫날을 기억해?”

 

 “기억해. 기억할 수밖에…….”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일터가 있는 방향으로 둘은 천천히 걸었다. 조급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후레아는 제 발걸음을 무언가가 막고 있는 것 같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았다. 루시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세상이 이렇게 됐는지 생각해 봤어?”

 

 “아니.”

 

 즉답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루시아는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루시아도 그래. 지진 한복판에서 진원이 뭐고 지진파가 뭐고 그런 걸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에게 중요한 건 뭘 잃었고 뭘 지켰느냐지.”

 

 루시아는 걸음을 멈췄다. 아직 숲의 어둠이 눈에 익지 않았던 탓에 후레아는 루시아가 왜 멈췄는지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에서 루시아의 실루엣이 꿈틀거렸다.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시아에게 조금만 유예를 주지 않을래?”

 

 “유예라고? 무슨.”

 

 후레아의 목소리가 멎었다. 어둠의 휘장이 걷히자 루시아의 뒤로 펼쳐진 광경이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루시아가 걸음을 멈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울고 있는 이유도, 그녀가 유예를 달라고 한 이유도.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루시아의 뒤로 솟은 세 개의 흙더미를 보고 만 후레아는 침묵으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

 

 

 언데드. 죽었다가 살아난 자를 뜻한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로는 그게 전부였다. 돌려 말하면, 그 부작용이 있을지 없을지 후레아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었다.

 

 찡한 이명이 울린다. 그녀는 어깨에 덮고 있던 담요를 침대에 내팽개치고 탁자에 엎드렸다. 수마가 몰려왔지만 눈을 감기가 어려웠다. 어둠 속에서 무슨 꿈을 꾸게 될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죽은 걸까? 후레아는 고개를 가로젓고 그런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녀는 확정된 사실을 아무리 부정해 봐도 돌아오는 건 없음을 지난 다년간의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갓 떠오른 태양이 구름을 비집고 후레아의 앞에 빛을 떨군다. 그녀는 그제야 아침이 밝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창백한 아침의 빛에 눈이 부시다. 그녀는 눈을 감으려다가 고개만 돌려 방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녀의 귀로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바람이 창문을 흔든 건 아니었다. 그녀가 낸 소리도 아니었다. 그녀는 소리의 방향을 짐작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문이 벌컥 열렸다.

 

 “메리 크리스마스페코!”

 

 “해피, 아, 메리 크리스마스!”

 

 “아야.”

 

 후레아는 새빨개진 눈을 깜빡거렸다. 어정쩡하게 서서 박수를 치는 시늉을 하는 토끼 하나에, 말을 틀려서 박자까지 놓쳐 버린 해적 하나에, 그 해적에 발을 밟혀 비틀대는 기사 하나. 정적이 그들 사이를 서늘하게 스쳤다.

 

 “어어, 고마워.”

 

 “아, 응.”

 

 페코라가 총대를 메기로 한 모양이다. 그녀는 빠르게 고개를 꾸벅이고선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둘을 끌고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후레아는 그들이 남아 있던 자리를 한참 바라보다가, 웃어야 될지 말아야 할지 모르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크리스마스였다. 현기증에 후레아의 걸음이 비틀거린다.

 

 

 

 어쨌거나 그들은 후레아의 속을 알 리가 없었고,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거실에 나가자마자 눈을 말똥말똥하게 뜨곤 수다를 떨면서 식사를 하는 네 사람이 보였다.

 

 후레아는 계단 위에 서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곧 그녀를 알아챈 노엘이 손을 흔들며 빨리 오라고 말했고, 그 탓에 그녀는 넷의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쓰러지지 않기 위해 애써야 했다.

 

 어떤 맛인지도 모를 식사를 마치고, 후레아는 소파에 앉아 멍하니 넷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루시아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따끔하다. 후레아는 눈을 비비며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파티는 저녁이니 생각도 정리할 겸 잠이라도 잘 생각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계단 난간을 쥐려는 순간, 그녀의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왜 그렇게 놀라는 페코야?”

 

 후레아는 그제야 자신이 페코라의 발소리에 당황했음을 알았다. 왜? 언데드라서? 무엇이 증명된 것도 아닌데? 그녀의 시선이 페코라의 주황색 눈동자를 마주했다.

 

 “뭐 생각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뒤에서 나타나니까 그렇지.”

 

 “에구.”

 

 “좀 자려고 올라가려던 참이었어. 잠을 좀 설쳐서.”

 

 “엥? 혹시 방음이 잘 안 됐나? 이상하네. 아, 아니다. 어여 올라가서 자 페코.”

 

 후레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단을 올라갔다. 하지만 인기척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무렵, 뒤에서 페코라가 작게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야 페코.”

 

 후레아는 아주 잠시, 시간을 몇 조각으로 쪼갠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시간 속에서 페코라는 수 겹의 면으로 분해되어 차례차례 흘러가는 것만 같았다. 짤막한 순간은 곧 끝이 나고, 그녀는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곧장 방에 들어온 후레아는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녀의 귓가에선 페코라의 말이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었다. 메리 크리스마스.

 

 눈이 아프다. 머리가 어지럽다. 잠을 안 잔 탓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잠은 오지 않았다. 후레아는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좁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당연히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럼에도 커튼을 뚫고 손을 뻗는 빛에 호응해 후레아는 그 모습이나마 계속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을까? 나름대로, 이 정도면. 메리 크리스마스를 들을 수 있는 이런 생활이라면 충분히…….

 

 눈을 감았다가 뜬 순간 강렬한 빛이 그녀를 덮쳤다. 활짝 열린 커튼 사이로 차디찬 햇빛이 그녀의 눈앞에서 번쩍거렸다. 그녀는 황급히 이불을 끌어올려 머리 끝까지 덮었다가, 상체를 홱 일으켜 세웠다.

 

 “어?”

 

 주위를 마구 돌아보던 그녀는 곧 결론 하나를 도출해 낼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꽤 오래. 아직도 아픈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그녀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살짝 열린 문 바깥에서는 떠들썩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아…….”

 

 맞다. 그랬었지. 그녀는 멍한 얼굴로 문을 열고 거실로 내려갔다. 때마침 벌칙을 받는 것인지 마린이 울상이 된 얼굴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귀하의 그 카드에 관해 차회에선 삼가 대자대비를 소청해도 괜찮을런지요…….”

 

 그다지 고급지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게 어휘 탓인지 말투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실없는 생각을 하며 후레아는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그녀는 확인을 원했다. 어둠 속에서 커튼 너머로 비치는 미약한 빛으로라도 떳떳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애당초 그들은 그녀가 눈을 감고 있기에 반짝이지 못할 뿐일까? 그녀의 시선을 눈치챈 루시아가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오, 깼어?”

 

 “나, 나 이제 후레아 왔으니까 이 말투 안 해도 되지? 맞지? 이야, 잘 왔다 후레아! 잘 잤어?”

 

 후레아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대답했다.

 

 “응.”

 

 “목소리 들어 보니까 푹 잤나 보네. 어때. 같이 할래?”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노엘과 루시아가 비켜 준 자리에 앉은 후레아는 마린의 노련한 손놀림을 목격할 수 있었다. 순식간에 트럼프 카드를 섞고 패까지 나눠준 그녀는 턱 소리가 나도록 카드 뭉치를 내려놓았다.

 

 “이번엔 안 당한닷!”

 

 게임은 호기로운 외침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리고 후레아는 시시각각 울상으로 변해 가는 마린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급기야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한 그녀는 카드를 두 손에 쥐고 노엘과 페코라를 바라보았다.

 

 “준비됐어 페코라?”

 

 “물론이지 노엘!”

 

 일부러 과장된 톤으로 주고받은 둘은 씩 웃으며 카드를 뽑았다. 일부러 보라는 듯이 눈썹을 위아래로 들썩거리고, 페코라는 노엘과 함께 카드를 내려놓았다. 조커 한 장 위로 또다시 조커가 겹친다. 루시아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하하하하, 하?”

 

 곧 그녀의 웃음은 사그라들었다. 급속하게 창백해지는 루시아의 안색을 향해 마린은 상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천천히 올라간 마린의 손이 카드 한 장을 뽑아 올린다.

 

 “하!”

 

 조커 한 장이 더 튀어나와 카드 더미 위에 떨어졌다. 일련의 과정 끝에 후레아가 게임의 규칙에 대해 숙고할 무렵 루시아는 예의 비명을 질렀다.

 

 “도돈동 돈돈돈…….”

 

 어쨌거나 벌칙은 항상 있었다. 기묘한 자세로 페코라의 인사말을 외치고선 핼쑥해진 표정으로 돌아와 앉은 루시아에게 후레아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원래 이렇게 노니?”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게임이 순한 맛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레아는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로 했다.

 

 게임은 계속되었다. 카드 게임에서 보드게임으로, 그리고 수다를 떨다가 또다시 뭔가 새로운 게임으로. 할 게 없으니 게임을 개발하기도 한다는 루시아의 첨언에 후레아는 그제야 그녀들이 가져온 몇몇 기묘한 게임의 출처를 알아낼 수 있었다.

 

 창백한 겨울의 햇빛은 눈을 녹일 듯 타오르는 노을이 되어 떨어진다. 카드나 보드게임을 옆으로 밀어 두고 수다를 떤다. 후레아는 조용히 웃고, 대답하고, 때로는 먼저 나서 입을 열었다.

 

 빛은 강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노을이 지기 전 마지막 발악을 끝으로 밤은 찾아왔다. 파티를 준비하자며 루시아가 마린과 페코라를 데리고 사라졌을 무렵, 후레아는 잠시 저택 바깥에 나와 있었다.

 

 바람이 휘몰아치고 눈발이 치솟는다. 꽤 격렬한 일상적 풍경에 후레아는 친숙함을 느꼈다. 그리고 곧 불안이 그녀를 집어삼켰다.

 

 바람이 또다시 분다. 후레아는 입김을 불어 보았다. 후우, 하고 튀어나온 새하얀 입김이 바람에 흩어진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후레아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은 맑았다. 구름은 한기가 얼려서 다 떨어뜨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는 뒤로 돌아 저택을 바라보았다. 밤의 어둠 속에서 홀로 밝은 빛으로 반짝거리는 모습은 등대와도 같았다. 곧 그녀는 비유를 정정하기로 했다. 그것은 뭐라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그저 집이었다.

 

 “진짜일까, 아니면…… 아니어도…….”

 

 후레아는 눈두덩이를 두 손으로 문질렀다. 어둠이 찾아온 끝에 빛이 탄생한다. 다시 저택을 바라본 그녀는 그곳에 말없이 한참을 서 있었다.

 

 “후레아!”

 

 “노엘?”

 

 털옷을 껴입은 노엘이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후레아의 팔을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붙잡은 그녀는 몸을 부르르 떨면서 말했다.

 

 “뭐 해, 추운데. 그렇게 오래 서 있으면 감기 걸려.”

 

 “아, 응.”

 

 후레아는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녀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그곳에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그녀를 본 노엘은 곧 살그머니 손을 놓았다. 그리고 주머니에 양손을 꽂아 넣은 채 그녀의 곁에 나란히 섰다.

 

 “그럼 들어갈 때까지 여기서 잡담이나 하자.”

 

 후레아는 피식 웃었다. 의연한 듯이 말하고는 있지만 그녀의 몸은 너무나도 확연히 떨리고 있었다. 털옷 한 겹으로는 부족하다는 걸 모르는 걸까? 그럴지도 모르지. 후레아는 옷을 한 겹 벗어 그녀의 어깨에 얹어 주었다.

 

 “고마워.”

 

 헤헤 웃는 그녀의 모습에 후레아는 차마 그녀처럼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미미한 미소만으로 응답했다.

 

 둘의 침묵 사이로 바람은 옅게 불어왔다. 달이 차차 올라오며 별빛도 점차 선명해지고 있었다. 완연해진 저녁, 저택은 주황빛을 사방으로 흩뿌리며 후레아의 시선을 묶어둔 채였다.

 

 “후레아.”

 

 돌연 노엘이 말을 꺼냈다.

 

 “밖에서 많이 힘들었지? 아, 지금에야 꺼내는 건 조금 이상하려나.”

 

 “괜찮아. 안 이상해.”

 

 고개를 끄덕인 노엘은 말을 이었다.

 

 “묘하게 힘들어 보여서. 몸살이라도 난 건지, 아니면 밖에서 겪은 일이 떠오른 건지…… 이미 루시아랑 다른 애들도 다 눈치챘을 거야.”

 

 “아.”

 

 “혹시 어디 아프면 말해. 여기엔 의사도 있대. 그러니까 루시아의 해골 말야.”

 

 의사라. 아픈 걸까? 후레아는 고개를 떨듯이 살짝 끄덕였다. 그래. 아픈 것일지도 모른다. 치료조차 고통스러울 병에 걸린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버려 두면 상처는 곪으리라. 끝없이, 저도 모르게.

 

 후레아의 눈동자가 노엘을 향했다. 그리고 다시 정면을, 이어서 위를 향했다. 달이 맑았다. 바람은 잦아들었고 구름은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다. 그야말로 겨울바람만치 깨끗한 하늘이었다. 그 하늘 아래서 그녀는 그들의 곁에 서 있었다.

 

 하지만, 별은 빛난다.

 

 “노엘, 하나 물어봐도 될까?”

 

 “응?”

 

 “그때, 한참 전에 말야, 내가 수술 끝나고 나서 네가 날 도와줬을 때.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해?”

 

 노엘은 잠시 기억을 뒤지는 듯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그 모습을 후레아는 숨쉬는 것조차 잊고 바라보고 있었다. 곧 대답이 돌아왔다.

 

 “미안, 기억력이 나빠졌나 봐. 딱 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아, 루시아도 왔었지. 근데 그 이상은 잘…….”

 

 “괜찮아.”

 

 후레아는 다시 은은하게 미소지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미소라기보단 슬픔을 담은 인사였다. 무언의 작별이었다. 곧 그녀는 노엘을 스쳐 저택을 향해 걸었다.

 

 “가자, 노엘. 많이 춥지, 설국은.”

 

 후레아의 옆으로 한기가 몰려온다. 어쩌면 그것은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순간 길게 펼쳐진 시간 속에서 그녀는 마린과 페코라와 노엘을 떠올렸다. 달처럼 빛나는 그들을.

 

 그래, 달처럼. 저 빛나는 달처럼. 그 무엇보다도 밝게 빛나는 밤하늘의 달처럼.

 

 설국의 차디찬 바람이 깊게 불어온다. 그 속에서 후레아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놓았다가, 쓰다듬듯이 스쳤다.

 

 

-

 

 

 파티는 끝을 맞이했다. 불 꺼진 저택 밖으로 걸어 나온 후레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묵직한 눈길 사이로 난 줄조명과 그 아래서 빛나는 얼음 동상. 여전히 달빛은 맑았고 별빛은 가는 실로 이어진 그물 같았다.

 

 해골들이 주위를 돌아다니며 눈을 쓸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을 스쳐 얼음 조각상 아래로 향했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고개만 슬쩍 끄덕여 인사했고, 루시아도 그 정도면 괜찮다는 듯 자연스레 그녀의 옆에 와서 섰다.

 

 “파티는 어땠어?”

 

 “괜찮았어. 식사는 잘 못 했지만, 수다 떠는 것도, 작게나마 선물을 교환하는 것도, 그냥 한 이불 덮고 누워서 뒹굴대는 것도…… 전부.”

 

 “그치?”

 

 둘은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늘 그들을 괴롭히던 설국의 한기도, 눈보라도, 지금만큼은 양보하겠다는 듯 말끔한 하늘이 영롱한 어둠을 품는다. 그 덕에 별빛이 빛나고, 달빛이 내리는 밤에 그들은 나란히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있을 수 있었다.

 

 침묵은 꽤 길게 이어졌다. 후레아의 안에서 말들이 소용돌이쳤지만 결국 나오는 건 새하얀 입김이 전부였다.

 

 겨우 후레아가 말을 골라내어 입을 열려고 할 즈음, 루시아가 먼저 말을 꺼냈다.

 

 “단지 행복만 바라볼 수는 없을까?”

 

 많은 것이 담긴 말이었다. 후레아는 고개를 내려 루시아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표정은 너무나도 평온했다. 인위적일 정도로 평온한 얼굴로 그녀는 그런 말을 하고 있었다. 후레아는 저도 모르게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무겁네.”

 

 “맞아. 너무 무거워. 들고 있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질문이야. 묻는 루시아도, 대답할 후레아도. 하지만 이것만큼 중요한 질문이 어디 있겠어? 비록 언데드라도, 시체가 움직일 뿐이라도, 그 아이들은 너와 대화하고 웃고 먹고 놀고, 그런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거야. 이런 세상이라도 말야.”

 

 후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너무 멀리 와버린 세상을 원망했다. 루시아를, 자신을, 그리고 죽어 버린 셋을 이렇게까지 바꿔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선택을 해야 했다.

 

 “이런 세상이라도, 맞아.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른 것들에 슬퍼할지라도 우리의 일에 대해선 아직 웃을 수 있을 테니까. 윤리, 걱정, 그런 것들은 다만 속에 품을 뿐 행복을 좇을 순 있겠지.”

 

 후레아는 다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맑은 밤하늘이 거울이 되어 그녀를 비춘다. 그녀는 별에게 시선을 주었고, 별은 다시 그녀에게 빛을 주었다. 되돌아온 빛에서 그녀는 웃고 떠드는 친구들의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후레아는 입을 열었다.

 

 “루시아.”

 

 “응?”

 

 “달이 스스로 빛나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지?”

 

 루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별은 스스로 빛을 내지. 그것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내가 여기 있음을 나로서 빛으로 온 세상에 외치는 거야.”

 

 “하지만 달은 그렇지 않지.”

 

 루시아의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들은 달처럼 빛났다. 별보다 밝게, 화려하게, 따뜻하게, 밤의 설국을 밝혀 주는 등불이 될 그 모습으로. 하지만 후레아는 타들어가는 등불의 심지를 무심히 지켜볼 자신이 없었다.

 

 “루시아,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

 

 루시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단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달을 쫓아 시선을 옮길 뿐이었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에 비치는 달빛의 찬란함을 본 순간 후레아의 입이 멈춰 버렸지만, 그녀는 질문해야만 했다.

 

 “우리의 친구는 돌아온 거니? 아니면…… 만들어진 거니.”

 

 세상이 멈춰 버린 것 같았다. 짧은 시간일 뿐이었지만 길고 긴 침묵을 거쳐, 루시아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녀는 별을 바라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파삭, 작은 소리가 들려왔다. 눈이 떨어지는 걸까? 눈을 덮은 나무가 우는 걸까. 하지만 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하나 무너지면 또 다른 하나가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후레아의 시선이 움직이며 설국을 수놓는 빛을 담는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은하수에서 별빛의 눈물이 떨어져 내린다. 그리움과 미안함과 고마움을 안고 떨어져 내리는 달빛이 그들을 축복하는 아래, 별빛은 죽어서 태어난 자를 비춰 주었다.

 

 파삭, 파삭, 꽃잎 흩어져 공중을 비산하듯. 그들은 은은한 별빛 아래서 잠에 든다. 그 아래에는 발자국만이 남아 그들을 그리워할 뿐이었다. 후레아는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며 그 모든 광경을 눈에 담으려 애썼다.

 

 눈물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진다. 설국의 추위 속에서 흘리는 눈물은 흔적조차 고통스럽다. 하지만 추위로 난도질당해 얼굴이 쓰라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다만 계속 울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들은 달빛처럼 빛났다. 달빛을 잃어버리고 나면 밤의 어둠만이 남겠지. 등불조차 없는 설국에 앞길을 비춰 줄 존재는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별빛이 네게 남을 거야, 후레아.”

 

 “루시아?”

 

 파삭. 후레아의 시야 구석에서 빛이 반짝였다. 텅 비어 버린 자리에는 떨어진 눈꽃 몇 송이만이 그녀가 존재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미소를 간직하고 있었을까? 후레아는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었다. 타오르는 심지를 바라보기란 힘든 일이지만, 등불 없는 설국의 밤은 너무 고요하니까.

 

 가없이 처량한 울음소리가 설국의 하늘을 향해 흩어진다. 눈물은 곧 투신해 눈 속에 저를 묻고, 차가운 바람만이 눈물의 흔적을 쓰다듬는다.

 

 

-

 

 

 저택은 비었다. 불 꺼진 줄조명 아래서 얼음 조각상은 어둠을 품었다. 나뭇잎으로 만든 장식은 하나둘씩 떨어졌다. 발자국은 어디선가 불어온 눈보라가 흩어 버렸다. 자연히 그들의 흔적도 옅어져 간다.

 

 새벽, 후레아는 무덤 앞에 서 있었다. 마린과 페코라와 노엘의 무덤 뒤에 루시아의 잠자리는 별다를 것 없이 놓여 있었다. 다만 그 앞의 작은 함을 후레아는 조심스레 주워들었다.

 

 함은 차가웠다. 후레아는 발갛게 변한 손으로 뚜껑을 열었다. 작은 쪽지가 있었다. 그녀는 함을 도로 내려놓고 쪽지를 펼쳤다.

 

 

 안녕, 후레아.

 

 이 무덤을 발견했다는 건 이미 많은 게 끝난 후일 거야. 루시아가 되살린 루시아가 네게서 정답을 찾고, 네 곁에 아이들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마 후자일 거야. 네가 여기서 루시아의 편지를 읽고 있다는 건 그런 의미일 거라고 생각해.

 

 우선 네게 미안하다고 해야 할 것 같아. 너무 무거운 질문이고 대답이었을 테니까. 그 아이들이 되살아나려면 결국 루시아의 손을 거칠 수밖에 없어. 그 순간부터 페코라와 마린과 노엘은 루시아가 아는 페코라와 마린과 노엘이 되어 버리지. 하지만 그걸로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어. 하지만 루시아로서는 판단을 내릴 수가 없더라구. 헤헤.

 

 후레아, 넌 어떻게 생각하니? 그 아이들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것만으로 족했을까? 아니면 그건 그저 루시아가 벌이는 잔혹한 인형 놀이일 뿐일까? 지금 죽어가는 나도 잘 모르겠어. 판단은 루시아가 되살릴 루시아에게 맡길 뿐이지.

 

 하지만 너라면, 그리고 되살아난 루시아라면 어떻게든 정답을 낼 수 있을 거야. 그것이 우리에게 비극일지라도, 그들에겐 안온한 죽음이나 삶이 될 수 있게 말야.

 

 혹시 네가 틀렸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루시아는 루시아를 믿어. 너라는 좋은 친구를 둔 루시아의 안목을 믿어. 그러니까 괜찮아. 괜찮아.

 

 후레아, 만일 루시아가 우리의 존재가 인형 놀이일 뿐이라고 판단한다면, 그렇다면 네가 가야 할 길은 많이 힘들 거야. 등불 없는 길일 것이고 바람 없는 뱃길이겠지. 방송 직전에 컴퓨터가 고장난 느낌일지도 모르겠고 말야.

 

 하지만 너에게 우리는 별빛이 될게. 그렇게 해서 널 비출게. 너무 흐릿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라도 있을게. 우리를 위해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이것밖에 없네.

 

 부디 네 길 앞으로 따뜻한 햇살이 내려오기를. 그리고 함께할 별빛이 네게 찬란하기를.

 

-설국의 크리스마스에 찾아온 나의 산타에게, 루시아가.

 

 

 글씨 위로 반점이 퍼져 나간다. 그것이 그녀의 눈물방울이라는 것은 곧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편지지를 앞으로 치우면서 눈물을 닦아냈다. 눈물이 지나간 자리로 스치우는 차디찬 바람이 날카로웠다.

 

 흐릿한 시야를 소매로 계속해서 닦던 후레아는 어느샌가 하늘이 환히 빛나는 것을 눈치챘다. 여명의 시간, 설국의 추위를 잡아먹을 듯 태양이 눈보라를 뚫고 하늘을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구름을 붉고 푸르게 물들이는 새 아침, 후레아는 다시 편지지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편지를 접고, 주머니에 들어 있던 쪽지와 함께 작은 함에 고이 집어넣었다.

 

 “나도 널 믿을게, 루시아.”

 

 그녀는 함을 두 손안에 꼭 품은 채로 걸었다. 숲을 나서자 완연히 밝아 오는 아침의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발갛게 물들였다. 그녀는 불 꺼진 길로 걸었다. 저택이 있는 곳으로 걸었다. 언제나 태양이 별빛을 위해 길을 닦을 동쪽으로 걸었다.

 

 영원히 별의 자리를 마련해 둘 하늘을 향해, 산타클로스는 설국 위를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