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To. 인류


그 동안 잘 지냈어, 인류? 문명의 화신인 내가 너희에게 직접 모습을 드러낸 지 벌써 100일이 지났네. 벌써 한 해의 끝인 12월이 되었고, 거리의 상점들은 슬슬 크리스마스를 준비하고 있어.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에는 참 많은 일이 있었지. 기독교의 기념일인만큼 유럽인들이 각별히 챙겼던 게 기억나. 프랑크 왕국, 헝가리 왕국 등 크리스마스에 맞춰 세워진 나라도 몇 있었는걸. 아무리 많은 것을 잊었다고 해도, 로마 제국에서 살고 있을 때 봤던 최초의 크리스마스 기념식은 아직도 기억이 나. 로마의 크리스마스 기념식과 오늘날 내가 살고 있는 미국의 크리스마스는 많이 달라졌지만 크리스마스가 인류에게 특별하고 소중한 기념일이라는 점은 결코 변하지 않았어.


크리스마스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를 좀 하자면, 너희들은 내가 그동안 방송에서 보여준 모습을 보고 '문명의 이중성'이 반영된 거라고 하지만 사실 그게 내 본성은 아니야. 세계의 '분위기'에 맞춰 내 성격도 변화하는 것일 뿐이지. 문명이 고통을 받을 때마다 나한테도 그 고통이 전해지고, 그에 따라 내 성격마저 변화해. 21세기에는 대규모의 전쟁이 그리 없어서 그나마 나았지만 기원전 12세기라던가 기원후 5세기, 특히 13세기에는 크로니, 파우나, 사나 그리고 베이가 크게 앓아누운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줬어.


20세기 초반에도 마찬가지였지. 문명의 발전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에 맞춰 점점 강력해지는 무기체계, 그로 인해 끊임없이 참혹해지는 전장, 그리고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같은 사상의 난립으로 어지러워지는 문명 사회는 아무리 나라도 슬슬 감당하기 힘들어졌어. 그 즈음 난 독일에서 현재의 거주지인 미국으로 이동했어. 당시 유럽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게 곧 유례가 없는 큰 전쟁이 일어날 것만 같았거든. 아니나 다를까, 내가 독일을 떠난 지 2년만에 정말로 큰 전쟁이 벌어졌어. 그 때도 어김없이 가슴 속의 욱신거림이 커졌지. 문명의 수호자 직책을 내려놓으면 이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될까 생각도 했고, 끊임없이 다투는 너희가 밉다고도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 해의 크리스마스가 나의 그 부정적 생각들을 지워주었어. 앞으로 수 년 동안 불탈 거라고 예상했던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에서 일시적으로 불길이 멈추고 한 줄기의 빛이 내려온 거야. 군사력과 거대 제국들이 지배하는 광란의 시대에 영향을 받아 잠시 부정적인 분위기에 사로잡혀 있었던 나에게 이 날은 너무나도 특별한 크리스마스였어. 내가 전장과 가까운 곳에 있지도 않았고 이 일이 언론에 소개되는 것도 일주일 이상 늦었지만 난 그 자리에서, 가슴 속에서 본능적으로 순간의 따뜻함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어. 뭘 말하고 있는지 알지? 맞아, 1914년 겨울에 있었던 '크리스마스 정전.' 양측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참호에서 나와 서로를 대면한 그 날이야.


내 성격이 험악해지고 몸이 아파오는 것도 너희 탓이지만, 반대로 내가 상냥하고 건강한 화신으로 있을 수 있게 하는 것도 너희야. 위에서 말했듯이 나는 세계의 '분위기'에 따라 성격과 상태가 결정돼. 크리스마스 정전이 있던 날 내 마음은 환기되었고, 시간이 조금 걸렸지만 이때부터 세계도 차츰 광기에서 벗어나고 자유와 인권이라는 개념에 점차 눈을 뜨기 시작했어. 너희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나 역시 지금의 고통이 지나가면 평화로운 나날이 다시 찾아오리라 믿고 2021년까지 버텨왔어. 여전히 인류 문명 곳곳에 위험한 불씨가 남아있는 가운데, 곧 즐겁고 거룩한 크리스마스인만큼 부디 평화로운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기를 바랄게. 1914년의 크리스마스를 잊지 않는 한, 나 또한 결코 문명의 수호자 직책을 놓지 않고, 인류 문명의 미래가 완전히 암전되는 그날까지 너희를 끝까지 지켜나갈 테니까.


- From, 나나시 무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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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쓴 팬픽이니 참가에 의의를 둔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같은 거 잘 모르고 나한테 크리스마스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게 크리스마스 정전인지라 이것과 관련지어 무메이의 팬픽을 써봤고, 여기서 무메이에게 '세계에 큰 전쟁과 살육이 있을 때마다 무메이에게도 감정 변화와 신체적 고통 등의 영향이 간다', '무메이는 수메르, 로마, 헝가리, 독일 등 원할 때마다 or 기존에 거주하던 문명의 상황이 위험해졌다고 판단될 경우 마음대로 거주 문명을 옮길 수 있으며 현재는 미국에 120년째 머물고 있다'는 설정을 붙여보았음.

원래는 상품 때문에 자유 부문으로 올리려 했는데 진짜 도트 애니메이션, 종이공예, 뮤직비디오 이런 게 올라와서 양심상 팬픽에 올렸고, 어쨌든 재밌게 읽어줬다면 고맙겠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