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5gYREY8kLR - 본래 가사는 독어인데 영어 버젼으로 가져옴

요제프 하이든,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창세기 1장에서 2장의 이야기를 다룸.


Investigationes in ARBITRIUM inter Aeternitatem et Finitatem, in Conceptu Contrastus.

영원과 유한 사이에서 중재/권위/판단/자유/(자유)의지의 탐구, 대비와 대조의 개념 안에서.

Investigations in ARBITRIUM between Eternity and Finity, in the Concept of Contrast.

(in brevi, ARBITRIUM)

(축약, ARBITRIUM)

(in short, ARBITRIUM)

De Defectione et Judicio.

결함과 판단에 관하여.

About Defection and Judgement.

De Aeternitate Dei, Infinitate Animae, et Finitate Hominis.

신의 영원함, 영혼의 무한함, 그리고 인간의 유한함에 관하여.

About Eternity of God, Infinity of Soul, and Finity of Man.


I. Praefacio.

I. 서론.


   성경은 수많은 비밀들을 담고 있으며, 이는 피상적으로 드러나지 아니한다. 그 연유로 수많은 이들이 읽고도 그 저의를 인식하지 못하고 곡해하는 일이 굉장히 잦다. 은총의 박사가 지적한 대로, 이는 조명이 요구된다. 조명과 올바른 방향을 통해 우리는 그 저의를 인식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리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예수가 나오는 부분을 읽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며 신약 성경만을 주구장창 읽으며 오류에 빠진다. 그 이유는 바로 뿌리를 자르고 나무를 기르는 격이기 때문이다. 구약을 제대로 인식해야만 그 토대 위에서 신약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고, 또한 구약의 신비로운 저술들 안에 수많은 보물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구약 중에서도 그 첫 다섯 권, 오경에는 이후 성경들의 기본이 되는 개념들이 등장한다. 오경으로 충분하지만, 오경이 있기에 이후 성경이 존재하며, 성경의 모든 책들은 오경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 오경 중에서도 창세기에 이 오경들이 의존하여 존재한다. 첫 책인 만큼, 신비롭고 어려운 원인론적 설화인 텍스트 안에 우리가 놓치는 수많은 개념들과 하느님과 세계의 면모가 드러난다. 지금부터 창세기를 통해서 그리스도교의 기본 골자와 하느님과 세상, 세상의 원리 그리고 인간을 고찰하며, 우리 인간이 뭇 생물체와 독보적으로 다르도록 해주는 단 하나의 요소, '판단', 특별히 지성적 요소로의 판단의 속성이 어떠한 것인지 탐구해보자.

  글에 앞서 그리고 글의 제목에 있어서, 라틴어 단어 'Arbitrium'이 선택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단어 'Arbitrium'이 갖는 넓은 스펙트럼의 뜻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 일맥상통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넓은 스펙트럼이 갖는 번역 불가능성, 그리고 단어 하나의 제시를 통한 통합성이 바로 그러한 연유이다. 'Arbitrium'은 크게 세 가지 뜻이 있다. 첫 번째 뜻은 바로 중재, 혹은 권위이다. 중재라고 함은 양자를 동시에 고려하여 양자를 위해 내려진 판단이고, 이는 권위성을 띤 자가 행하므로 권위의 뜻 역시 동시에 지닌다. 두 번째 뜻은 바로 의지, 특별히 자유 의지이며, 그렇기에 자율이나 자유의 뜻 역시 지닌다. 은총의 박사의 <자유의지론>이 (<Liberum Arbitrium> 또는 <Liberum Voluntatis Arbitrium>. Free Will 또는 Free Decision of the Will.) 이러한 단어를 채용한 데에는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마지막 뜻은 바로 판단. 공적인 판단(Judicium. Judgement. 판사의 판결, 감정가의 감정 등.)부터 사적인 판단 또는 판단 일반 (Decisio. Decision.) 양자의 뜻을 동시에 가지며, 중재 또한 하나의 판단임을 비추어본다면 연관이 있다. 이러한 여섯 가지 뜻들, 비슷하게 묶는다면 세 가지이지만, 각 개별 정의들을 나열했을 때의 이 여섯 가지 뜻들을 모두 놓칠 수가 없기에 판단을 뜻하는 다른 단어들을 제치고 이 단어를 선택하게 되었다. 중재, 권위, (자유)의지, 자유(자율), 공적 판단, 판단 일반 이 여섯 가지 뜻들이 모두 제각각 하나의 요소로 이 글 안에서 하나의 일치를 이루므로 해당 단어를 선택했으며, 그러한 점에서 일반 명사가 아닌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제시를 하게 되었다. 저 여섯 가지 정의들을 하나로 묶을 완벽한 단어가 따로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정 하나의 뜻으로 정해야 하겠다면, 판단이 제일 광범위한 것으로 보이므로, 글 또한 <판단론> 혹은 <판단에 대한 탐구> 정도가 적당할 것이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판단과 인간의 판단이 어떻게 맞물리며 이야기가 세상에서 전개되는지,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어떤 것들이 보여지고 또 암묵적으로 제시되는 지, 그러한 흐름과 논리들이 어떻게 존재하는지 탐구해보자.


II. De mundo.

II. 세상에 대하여.


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창 1, 1~2)


  세계의 태초에는 공허였다.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있는 공허와 심연. 어둠이 심연을 덮고 있었고, 명확히 하느님과 분리되어 존재했다. 존재 그 자체는 스스로의 존재를 분유하기 시작했다(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보기 좋다고 평하였다. 美와 善에 대한 첫 번째 진술이다. (중세 신비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이 표현이 틀렸으며, 존재 자체의 근원으로 우리 언어의 한계로 존재 그 자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고 했다.) 善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며, 美 역시 보기만 해도 善이 직관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공허를 자신으로 채우기 시작했다. 영원이 유한과 결합되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빛의 창조가 이 점이 역동적으로 드러난다. 빛이 세상에 들어옴으로 어둠을 밝혀내어 어둠을 쫓아냈다. 땅은 분명 어둠에 덮여있었지만, 빛이 몰아내고 등장하게 된다. 존재는 쭉 유한계에 부어진다. 신플라톤주의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출되어 이 세상에 쏟아지기 시작했다. (유출되다는 수동적인 표현으로 능동성이 결여되어 우리와 온전히 맞는 표현은 아니다. '유출시키다'가 우리에게 가까울 것이다.) 유한, 본질적으로 뭔가 결함을 안고 있는 것에, 무언가가 채워지기 시작한다. 결함된 존재에 존재를 부어서 채운다. 이어 사람이 창조된다. 심연 위를 돌던 영은 진흙덩이에 들어가서 생명을 부여한다. 성경은 이렇게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한다. 영은 곧 하느님이고, 하느님 자신이 진흙덩이에 들어간 것이다. 세계는 이렇게 운동이 부여되었다.


주 하느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에 동산 하나를 꾸미시어, 당신께서 빚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셨다. 주 하느님께서는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흙에서 자라게 하시고, 동산 한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자라게 하셨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 첫째 강의 이름은 피손인데, 금이 나는 하윌라 온 땅을 돌아 흘렀다. 그 땅의 금은 질이 좋았으며, 그 고장에는 브델리움 향료와 마노 보석도 있었다. 둘째 강의 이름은 기혼인데, 에티오피아 온 땅을 돌아 흘렀다. 셋째 강의 이름은 티그리스인데, 아시리아 동쪽으로 흘렀다. 그리고 넷째 강은 유프라테스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데려다 에덴동산에 두시어, 그곳을 일구고 돌보게 하셨다. (창 2, 8~15)


  에덴, 히브리어로 기쁨, 환희. 세상을 만들고 나서, 에덴을 따로 두어 거기에 사람과 사람을 위한 것들을 두었다. 철저히 하느님은 인간을 우위로 두고 활동한다. 유의해야 할 점은, 에덴은 이전까지의 세상과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이다. 에덴에서는 강들이 흘러나와 바깥 세상을 적셔서 풍요롭게 한다. 에덴 동산은 존재 자체로 세상에 생명을 주고, 하느님 역시 존재 자체로 세상에 생명을 주었다. 에덴이라 함은 결국 하느님이며, 에덴 동산이 기거한다는 사실은 곧 하느님 안에 기거한다는 사실이다. 생명은 하느님에게서만 오며, 에덴은 생명을 흘려보내는 곳인 원천으로, 에덴은 곧 하느님 품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의 나무와 선악의 나무가 존재하는 것이다. 선악의 나무, 영생의 나무가 에덴 밖에 있으면 원죄 사건도 없었을 것이라는 반박은, 이러한 점에서 성립할 수 없는 피상적인 반박임이 드러난다. 선과 악, 그리고 영생이 하느님 밖에 있다, 혹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는 논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 품인 에덴 동산 안에서 기거하며 배우자를 얻고, 알몸임에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떳떳하고 행복하게 살았다. 이 점 안에서 고대 저자는 문학 안에서 어렵게 한번에 하느님과 세계를 설명해낸다. 인간은 본디 결함자임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에덴으로 불러져서 생활할 수 있게끔 한다. 

  여기서 결함 없이 창조하면 되지 않느냐는 반박이 종종 나온다. 그러나 우리는 안다. 결함이 없는 것은 유한하지 않으며, 완벽한 것, 곧 신이다. 결함 없는 창조는 곧 또 다른 유사 - 신의 창조이며, 이렇게 될 경우 창조는 의미가 없게 된다. 신인데 동시에 피조물이 되고, 또한 그 신이 유사-신으로 쓴 이유는, 하느님은 영원한데 반해 그 신은 시작이 있는 무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한인데 시작이 있다는 것은 영원의 입장에서는 결함이다. 곧 자기 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존재와 진선미의 최고봉에는 하느님 뿐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있을 수 없다. 자신이 자신을 낳는 행위 그러나 시작이 없어야 한다. 이는 아무리 초월계의 논리가 우리와 다르더라도 이는 불가하고, 가능하더라도 불필요한 것임이 직관된다. 또한, 설령 그러하더라도, 완전함 그 자체에게 다시 흡수 당할 것이다. 빛 앞에 어둠이 없는 이유와 같다. 이로써 일신론이 요청된다. 천신들(천사들)도 그런 연유로 우리보다 상위일 뿐 피조물로 존재하게 된다.

  인간은 에덴을 일구고 돌보며 그 안에서 생명을 받아 유지한다. 결함이 있지만, 그 결함은 곧 하느님 현존과 함께함으로 채워진다. 인간은 결함이 있는 동시 완전하다. 인간은 존재의 충만함을 받아서 기쁨 안에서 지내게 된다. 고대의 저자는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하는 삶이 어떠한 지를 서술해낸다. 존재의 충만함과, 자신에게 알맞는 협력자를 만난 기쁨, 에덴에는 이름대로 기쁨으로 가득 차 있다. 사람은 알몸임에도 불구하고 치부를 느끼지 않는다. 치부는 어디서 오는가? 우리의 결함에서 온다. 죄를 행함, 약점 등에서 오는데, 곧 결함이다. 알몸은 나약하다. 우리의 육체가 얼마나 손쉽게 손상되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인류가 의류를 만들어 알몸을 보호했다는 점을 보면 알몸은 우리의 결함이다. 그러나 서로가 서로의 결함을 봄에도 불구하고 서로 부끄러워하거나 하지 않고 행복을 직관한다. 서로의 결함을 앎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빈 자리를 메우고 극복하여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기쁨은 사랑 안에서, 사랑을 통해서, 사랑으로부터 나온다. 우리가 善을 누릴 때 보는 기쁨, 모두 사랑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고로 하느님은 사랑이시며, 세상을 사랑하기 위해서 창조했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협력자와 함께 사랑으로 기쁨을 누리며, 하느님 안에서의 행복은 바로 참 행복으로, 眞에 대한 진술이다. 고대 저자는 이렇게 행복론을 설명한다.


그러자 뱀이 여자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 너희 눈이 열려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될 줄을 하느님께서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자가 쳐다보니 그 나무 열매는 먹음직하고 소담스러워 보였다. 그뿐만 아니라 그것은 슬기롭게 해 줄 것처럼 탐스러웠다. 그래서 여자가 열매 하나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자, 그도 그것을 먹었다. 그러자 그 둘은 눈이 열려 자기들이 알몸인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서 두렁이를 만들어 입었다. (창 3, 4~7)


  행복한 나날들을 보내던 어느 날, 뱀이 찾아와서 유혹을 한다. 뱀은 하와를 적극적으로 꼬드기며 말한다. 선과 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취하라. 하와는 유혹에 넘어가 열매를 취하고 아담에게도 주어 아담도 열매를 취한다. 그러자 그들은 눈이 열려 몸을 가린다. 결국 이들은 범죄하였고 에덴에서 나가게 된다. 

  어떤 이들은 이 사건을 두고 이렇게 해석한다. 인간이 무지몽매한데 선악과를 취함으로 이성을 얻게 되었고 이성이란 좋은 것이기에 이는 행복한 범죄 (felix culpa)이며, 이성을 취하기 위해서는 범죄를 해야한다는 이상한 도식이 도출된다는 주장을 한다. 전선한 하느님이 인간을 무지몽매하게 만들었다는 점도 이상하고, 범죄를 해야 이성을 얻는다는 점도 이상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우리는 다시 텍스트로 돌아가보자. 하와는 판단력을 발휘해서 선악과를 취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판단을 한다. 이는 바로 이성의 활동이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행위이다. 이에 인간이 무지몽매하다는 평가는 거짓이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할 줄 알고 있었다. 뱀은 거짓말과 간계로 인간을 속여넘긴 것이고, 인간은 자기 자신 본연의 결함에 걸려 넘어지고 만다. 하느님이 부족함을 채워주고 있었지만, 누가 채워준다는 것은 곧 채워줌을 받겠다는 상호 동의이다. 인간은 그 채워짐을 거부하고, 결함을 보충 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결함을 채우고자 했지만, 그 대가는 가혹한 것이었다. 서로의 결함을 보고도 행복했던 인간은, 옷으로 스스로의 결함을 가리기 시작했다. 진정한 교류와 소통이 끊기고, 결함을 가리고 스스로를 '포장'하는 '거짓과 위선'이 들어왔다. 인간은 신적인 판단을 얻은 대가로 스스로의 결함을 너무나도 명확히 직시하게 된다. 

  이렇게 인간은 자신을 채워주던 하느님을 거부하게 되면서 하느님 품을 동시에 거부하게 된다. 인간은 에덴 밖으로 내쳐지긴 했지만, 인간은 내쳐진 것이 아니라, 에덴 밖을 선택한 것이다. 이에 의해 하느님은 그러한 인간의 행동을 '존중'하였고, 에덴에서 내쳐짐과 나섬은 동시에 이루어지며, 인간은 유한계로 발을 딛게 된다. 인간의 창조는 여기서 끝난다. 세상 만물이 창조되어 유한계에 존재할 때, 인간은 이렇게 유한계에 발을 딛게 된다. 유한계로의 등장, 바로 인간 창조의 끝이다. 고대인의 서술은 이러한 개념들을 한번에 전달하고자 설화를 몹시 복잡하게 짰다. 일신론, 하느님과 함께 할 때의 인간의 상태 (지복직관), 하느님의 본성, 인간 본성과 본연, 하느님과 단절된 인간, 그리고 세상의 창조를 한번에 다루고자 이러한 복잡하고 한참 돌아가는 방식을 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짧은 3장의 글들을 다각도로, 잘게 자르면서 보아야 한다. 

  인간 창조의 이야기에 대해 살펴볼 때, 이러한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창조는 어디에서 이루어진 것인가, 그것도 특히 인간의 창조의 무대는 어디인가? 창조의 장소는 바로 두 군데에서 진행이 된다. 하느님의 초월계와, 공허의 유한계이다. 창조는 하느님에게서로부터 유출된 것이고 하느님 안에는 모든 것들이 들어있다. 1장은 이 점을 명확히 하기에 창조의 무대는 초월계에서 유한계로 존재가 부어져서 유한계가 풍요로워지는 과정을 그리나, 2장에서는 초월계에서의 추방을 그린다. 이 연장선에서 에덴이 하느님의 품이라면, 하느님의 인간 창조는 도대체 어떻게 진행된 것인가? 인간의 유출은 인간의 판단 하에 선악과를 취한 인간 의지의 산물인가? 그렇다면 인간의 창조는 인간의 의지인가? 이렇게 창세기 1장과 2장은 서로 충돌한다. 그렇다면 이 충돌에 대한 이해는 바로 다른 시각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선악과 사건은 곧 하느님과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이다. 하느님의 성질 대한 통찰과 인간만이 갖는 창조물들 중에서의 독보적인 위치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갖는 한계성과 그로 인한 인간이 지니고 있는 교만에 대한 통찰이다. 창조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의지이다. 그러나 2장에서의 추방은 인간의 의지가 섞여있다. 고로 모순이 발생하는데, 2장은 창조 안에서 한계와 회복, 즉 구원의 필요성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국 선악과 사건은 인간의 한계, 그 중에서도 교만에 대한 통찰이며, 그 교만의 근원은 바로 '판단'에 있음을 알려준다. 이를 통해 판단의 위치가 하느님과 함께 인간 위에 있음을 정립하고, 인간은 판단을 통해 상대방 위에 올라서려고 하며, 그 본성은 결국 하느님과의 단절을 이야기하게 된다는 교만에 대한 적대적인 교훈이 담긴 설화이다. 하느님 안에서 모든 풍요를 누리고 있었음에도 더 갖고 싶어서 교만을 부림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 결과로 이어지므로, 부추김을 통해 교만이 자극되더라도 우리는 善을 택해야 한다는 교훈이 담긴 복잡한 이야기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그것이 자신에 반하는 행위더라도 그것이 발생된 한 '존중'하며, 교만을 통해 하느님을 저버린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비참한지, 그리고 인간이 그러한 비참함을 피하기 위해서는 판단이 아니라, 원초적인 그 모습, 서로 나체임에도 불구하고 치부를 느끼지 않는, 상호 간 사랑으로 삶을 살아야 하고 에덴에서의 완전함과 행복을 하느님의 구원을 통해 얻어야 한다는 주장을 고대인은 이를 설명하기 위하여 아주 복잡한 서사를 짠 것이다.

  창세기가 제시하고자 하는 철학은 이러하다. 영원한 하나의 부동의 원동자적 신, 그 본성이 사랑이며, 사랑을 위해서 세상을 창조했는데, 이는 필연적으로 존재의 부분적 분여를 통해 일어났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부분적 분여는 곧 영원의 부분을 나누어 준 것으로, 필연적으로 끝이 전제되며, 곧 죽음이다. 인간은 그러한 창조로 인해 결함을 갖고 있고, 자유의지와 이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자유의지와 이성 모두 결함의 지배를 받기에 우리 모두 결함된 자유의지와 이성을 갖고 있으며, 생명도 부분적으로 지닌다. 이러한 결함은 완전자인 하느님을 통해서만 완전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죽음을 면케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 자신이 그 결함을 채워줌으로 가능하다. 인간은 자유의지로 하느님을 택함으로 행복과 사랑, 생명을 얻는다. 하느님 안에는 그러한 것들이 있고, 하느님을 택할 경우 그러한 것들을 우리가 얻게 된다. 하느님을 택해야 하는 당위성이 제시된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가 제시하는 신론과 인간론의 이야기이다.


주 하느님께서는 사람과 그의 아내에게 가죽옷을 만들어 입혀 주셨다. 주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사람이 선과 악을 알아 우리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으니, 이제 그가 손을 내밀어 생명나무 열매까지 따 먹고 영원히 살게 되어서는 안 되지.” 그래서 주 하느님께서는 그를 에덴동산에서 내치시어, 그가 생겨 나온 흙을 일구게 하셨다. 이렇게 사람을 내쫓으신 다음, 에덴동산 동쪽에 커룹들과 번쩍이는 불 칼을 세워,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 (창 3, 21~24)


  인간은 에덴 밖으로 나가게 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기쁨 밖으로 나가게 된다. 곧 고통의 세계로 인간은 나오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빈 손으로 나오진 않는다. 하느님의 사랑은 가죽옷으로 나타난다. 알몸으로 내치지 않고, 인간이 온갖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가죽옷을 입혀주신다. 아까도 말했듯, 인간은 에덴을 스스로 나선 동시에 내쳐진다. 하느님을 거부했기에 인간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들이 끊긴다. 하느님은 자신을 거부한 인간들을 '존중'하고, 그들을 파멸시키는 대신 가죽옷을 입히고 그들의 선택을 '존중'하여 에덴 밖으로 내치신다.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거부한 동시, 하느님 품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덴에 대한 갈망 속에서, 기쁨과 善에 대한 갈망 속에서, 인간은 고통을 처음으로 마주한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 너는 네 남편을 갈망하고 그는 너의 주인이 되리라.” 그리고 사람에게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나무에서 열매를 따 먹었으니, 땅은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사는 동안 줄곧 고통 속에서 땅을 부쳐 먹으리라. 땅은 네 앞에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돋게 하고 너는 들의 풀을 먹으리라.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 (창 3, 16~19)


  인간은 이렇게 삶 안에서 고통을 마주하게 된다. 삶의 모든 곳이 고통이다. 유한한 세상의 결함들을 수없이 마주하는 것. 말한 대로 다 이루어지는 그런 곳이 아닌, 얻고자 하면 수고와 고통과 시간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세상. 바로 우리의 세상이다. 그러한 본연적 결함들을 이고 있는 세상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 고통을 마주하며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것, 바로 삶이다. 고대인은 완전함과 부족함을 이렇게 대비하면서 세상을 설명한다. 세상의 고통의 이유는 왜 존재하는가? 세상이 불완전한 탓이고 그러한 세상에서 우리가 살기 때문이다. 우리가 더 나은 세상, 온전한 세상을 바라는 것은 우리가 온전함의 기쁨을 겪지 않고도 미리 알기 때문에 온전함을 희망하는 것이고 이러한 점을 한번에 설명하기 위해 에덴 동산 추방의 설화가 있다. 에덴에서의 온전함의 기억 때문에 우리는 온전함을 부족함 속에서 갈망하는 것이다. 이 에덴에서의 기억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관념으로, 완전함, 무한함, 영원함 등의 관념으로 존재한다. 이 관념이 우리에게 있음의 이유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이 하느님과 떨어져 존재함으로 본질적인 악에 마주하게 되는 것이다. 악에 대한 이해가 여기서 나온다. 부분적 분유에서 나온 부족함들, 즉 완전 善에 비해서 부족한 만큼이 악으로 제시된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가 하느님에게서 나왔다는 점을 미리 짚었기에, 善 역시 하느님에게서 나왔음을 알고, 善만이 진정한 절대 본질로 제시됨을 알게 된다. 악은 善의 결여로 존재하며, 비본질적, 우유적인 실체로 제시된다. 악은 결코 본질이 되지 못한다. 부족한대로 우리 위에 하나의 극복할 수 없는 '무거운 짐'으로 우리 위에 군림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은 이 '무거운 짐'을 이고 가는 과정인 것이다. 이 '무거운 짐'은 절대로 내려놓을 수 없는, 극복할 수 없는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결함으로 우리의 삶의 표상은 희랍 신화에서의 아틀라스에게서 볼 수 있다. 그런 즉 창세기에서 제시하는 삶에 대한 정의는, 고통이 아닌, 고통을 대면하는 것이 바로 삶이라는 것이다. 고통을 대면하는 과정이 곧 삶이고, 이러한 삶에 대한 태도는 바로 그런 고통을 대면하면서 작은 선이라도 선을 조명하는 것이 바로 삶의 태도이다. 세상에서 살면서 우리는 에덴을 꿈꾸지만 에덴에 갈 수 없다. 우리는 이 세상에 갇혀있다. 변화와 죽음의 지배를 받는 세상에서 우리는 영원함과 생명을 꿈꾸나, 얻을 수 없다. 이 점을 고대인은 불칼과 커룹이 생명나무를 지키어 다시는 갈 수 없게 되었다고 서술하며 창세기 3장이 끝난다.


III. De Homine.

III. 인간에 관하여.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그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뜨렸다. 주님께서 카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 (창 4, 3~7)


  아담과 하와는 두 자식을 낳고, 이들은 커서 각자 소출을 내어 하느님께 돌려드린다. 그러나 카인의 제물은 왜인지는 몰라도 거부당했다. 카인은 크게 실망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를 타이르신다. 그러나 카인은 하느님을 거부하고, 아벨을 살해한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서 다시 한 번 죄를 저지른다. 창세기는 죄의 본성을 고찰한다. 에덴에서 아담은 자신도 잘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남 탓을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선악과를 취했다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데 말이다. 카인 역시 주장한다.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죄의 본성은 바로 이 뻔뻔함이다. 책임 회피, 뻔뻔함. 아님을 알면서도 자신에게 돌아올 탓을 줄이기 위한 '포장, 거짓, 위선'이다. 카인 역시 하느님께 저주를 받고 떠돌이가 된다. 이렇게 죄는, 인간 세상에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한다. 악에 짓눌리는 인간은 그 본연의 불완전함 때문에,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선을 저버리고 악을 택한다. 에덴의 선악과 사건은 이렇게 반복된다. 인간은 점점 하느님에게서 멀어진다. 창세기 5장에서 그 점이 드러난다. 아담은 900년을 산데 비해, 그 자손들은 수명이 크게 단축된다. 비정상적으로 큰 숫자는 그 만큼의 충만함을 의미한다. 하느님과 함께 하던 삶의 수명은 무한이었고,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생명으로부터 멀어짐에 따라 생명인 수명이 점점 줄어든다. 세상이 점점 악으로 치닫는다.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인간 세계에서 악행은 계속 자행된다. 


주님께서 그 향내를 맡으시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셨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창 8, 21~22)


  사실 하느님은 창조의 모든 과정을 다시 할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편이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리 말씀하신다. 인간을 통찰하시고, 그대로 인정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내리며 다시 한번 인간을 믿기로 하신다. 그러면서 종말에 대한 약속을 하신다. 하느님이 세상을 사랑하였기에, 그 세상을 파멸하는 대신 더 가꾸기로 하신 것이다. 창세기의 인간론은 여기서 확실히 드러난다. 스스로 선을 갖고 있지만 스스로의 한계 때문에 악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 창세기의 인간론이다.


IV. De Deo.

IV. 하느님에 관하여.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그리하여 너는 복이 될 것이다. 너에게 축복하는 이들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리겠다.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아브람은 주님께서 이르신 대로 길을 떠났다. 롯도 그와 함께 떠났다.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 그의 나이는 일흔다섯 살이었다. (창 12, 1~4)


  창세기의 세계관과 인간관에 대해 다루어보았다. 이제 창세기의 신관을 다시 한번 조명해야 한다. 결국 창세기는 신과 인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여태 하느님에 대해 탐구한 결과, 하느님은 존재이자 존재의 근원, 생명, 眞, 善, 美, 영원, 완전함, 기쁨, 사랑, 그리고 판단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개념들을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은 어떻게 드러나고 또 어떻게 일하시는가? 에덴 동산의 설화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같이 되는 것에는 판단과 영생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여태 영원함과 생명을 통해 다른 부분들을 이해하였다. 이제는 판단에 대해 이해할 차례이다. 하느님의 판단은 성경 처음부터 나온다. 세상 창조, 가죽옷, 아벨의 제사, 카인의 표징, 노아의 홍수, 무지개 등 모두 하느님의 판단이다. 참된 진리 그 자체이기에, 가장 올바른 판단은 하느님의 것이다. 주어진 것들 안에서 가장 최선의 판단을 하느님은 하신다. 인간 역시 그 지혜를 받아서 주어진 것들 안에서 최선을 선택하려 한다. 판단은 본디 하느님의 몫이다. 진실된 판단은, 수많은 것들이 고려되고 그 안에서 참 거짓이 도출되어, 그 어느 반론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바로 하느님만 가능한 것이고, 그렇기에 판단은 하느님의 몫이다. 하느님은 영원하시며 전지전능하신 분으로, 판단에 있어서 모든 것들을 그 과정에 넣으시기에 무류하시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의 판단은 우리의 판단과는 궤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관점 역시 다를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아브람의 부르심이다. 잘 살고 있는 아브람을 불러다가, 현재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이 일러주는 곳으로 가라고 하신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그런 도박을 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아브람은 충실히 따랐다. 주님을 믿고 따른 대가로 아브람은 아브라함이 되며, 불임이던 아내는 자식을 얻고, 하늘의 별들처럼 많은 자손들을 얻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아브람의 관점과 하느님의 관점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현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고생길에 나아가는 것에 대해, 아브람의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사실 안주해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버리고 떠나는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은 곧 '지혜로움'으로 시간 안에서 드러나게 되며, 그 순명 역시 의로움으로 드러나고 또 인정받게 된다. '아브람이 주님을 믿으니, 주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움으로 인정해 주셨다. (창 16, 6)'


아브람의 아내 사라이는 그에게 자식을 낳아 주지 못하였다. 사라이에게는 이집트인 여종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은 하가르였다. 사라이가 아브람에게 말하였다. “여보, 주님께서 나에게 자식을 갖지 못하게 하시니, 내 여종과 한자리에 드셔요. 행여 그 아이의 몸을 빌려서라도 내가 아들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아브람은 사라이의 말을 들었다. (창 16, 1~2)


  그런데 사라이는 하느님을 의심하였다. 인간의 판단과 하느님의 판단이 인간 자유의지에 의해서 갈라지는 부분이다. 인간적인 판단으로 아브람은 이스마엘을 얻지만, 사라이는 이 판단과는 다르게 결국 아들을 얻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사의 진행에 있어서 인간의 판단 역시 유효함을 본다. 그것이 하느님의 판단과 반하는 방향일지라도, 인간의 판단 자체는 유효하다. 여기서 인간적인 판단과 신적인 판단이 갈린다. 아무리 신적인 판단의 지혜를 얻어간들, 인간은 그 결함으로 인해 최선으로 보이는 선택을 하지만 그것이 항상 최선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나 신적인 판단은 그 모든 우연성에도 불구하고 하고자 하는 바가 도출이 된다. 하느님의 판단과 행위는 그 결실을 얻어내고야 만다. 세상 창조 때에는 말로 즉시 얻어냈지만, 인간 세상 안에서는 천천히 얻어진다. 우여곡절 끝에 하가르와 이스마엘은 도망쳤다가 복귀하고, 사라이도 하느님이 약속하신 대로 아들을 얻게 된다. 하느님은 아브람과 사라이 사이에서 자손들의 번영에 대한 약속을 했지만, 이스마엘에게도 그 약속을 해주는 관대함을 보여주시며, 땅과 후손의 약속을 천천히 이행하신다. 하느님의 속도가 인간의 속도와 다르고, 관점도 다름은 이후에도 계속 나타난다. 


"네가 네 아들, 네 외아들마저 서슴지 않고 바쳐 충성을 다하였으니, 나는 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창 22, 16 공동번역)


  힘들게 얻은 아들을 인신공양하라는 하느님. 아브라함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군말 없이 믿고 행한다. 이에 하느님은 그를 말리며 말씀하신다.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하느님이 하고자하는 것은 그 결실을 맺고야 만다. 단적으로 후손의 약속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의 善의 이행이다. 창세기를 더 읽어보면 에사우와 야곱을 지나, 요셉까지 이야기가 흘러가지만, 악은 계속해서 등장한다. 야곱은 자기 형을 상대로 사기를 치고, 요셉의 형제들은 요셉을 팔아버린다. 인간적인 판단 하에서는 이들에게 자기 행실에 대한 죗값을 응당 물리는 것이 정당해보인다. 그러나 하느님은 이들에게 화해와 용서를 선물하신다. 선을 이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우연적 요소들로 속도가 늦춰질 뿐, 선은 이행된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판단이고 개입이다. 이들이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움직이시어 선을 이루어낸다. 그렇지 않았다면 에사우는 진작에 야곱을 죽였을 것이다. 그러나 복수와 보복 대신 하느님은 더 큰 선을 이루어내신다. 야곱과 에사우는 화해하였고, 요셉의 이집트 노예행은 유대민족의 생존계기가 되어 돌아왔다. 


V. De Defectione et Judicio.

V. 결함과 판단에 관하여.


요셉에게 말을 전하게 하였다. “아우님의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이렇게 분부하셨네. ‘너희는 요셉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너의 형들이 네게 악을 저질렀지만, 제발 형들의 잘못과 죄악을 용서해 주어라.′’ 그러니 아우님은 그대 아버지의 하느님의 이 종들이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 주게.” 요셉은 그들이 자기에게 이렇게 말한 것을 듣고 울었다. 이어 요셉의 형제들도 직접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말하였다. “이제 우리는 아우님의 종들일세.” 그러자 요셉이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다는 말입니까? 형님들은 나에게 악을 꾸몄지만, 하느님께서는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습니다. 그것은 오늘 그분께서 이루신 것처럼,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여러분과 여러분의 아이들을 부양하겠습니다.” 이렇게 요셉은 그들을 위로하며 다정하게 이야기하였다. (창 50, 16~21)


  요셉의 고백에서 우리는 판단의 위치를 다시 알 수 있다. 자신이 하느님의 자리에라도 있느냐는 말은, 진실한 판단의 위치를 드러낸다. 형들은 복수당할까 두려워했지만, 요셉은 판단과 복수 모두 하느님의 것이라고 말하며, 당신들의 악행을 하느님께서 선으로 바꾸셨다, 그것은 큰 백성을 살리시려는 것이었다고 말한다. 이 것이 바로 섭리라고 하는 것이다. 섭리란, 하느님이 하고자 하는 바가 이뤄지는 것으로, 그 어떤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으로 취해지는 것이다. 하느님의 개입은 하느님의 판단을 기본으로 이루어지는 바, 인간의 판단을 아득히 넘어서는 지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기에, 그를 바탕으로 판단하신다. 과거와, 현재와, 현재 우리의 자유의지로 인해 일어나는 모든 선택들의 가능성에서 갈라져 나오는 수많은 미래의 가능 세계들을 한번에 보면서, 이 세계에 개입하신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한 눈에 보면서, 현재 이 순간에 직접 개입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성 보에티우스가 말한 대로, 하느님에게는 무한한 현재만이 존재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인간의 모든 선택들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은 또 인간을 통해서 개입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하느님이 그냥 바로바로 개입해서 다 해결해버리면 되지 않느냐, 근데 그러질 못하는거를 보아하니 신은 무능하거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러지 않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개입을 할 수 있지만, 그렇게 개입하게 되버리면 우리 세계가 붕괴하게 된다. 왜냐하면 영원무한이 유한에 직접적으로 바로바로 개입하는 것 자체가 유한의 본질이 훼손되는 행위이기 때문이고, 이러한 유한은 파괴되고 영원무한으로 대체되기 때문이다. 영원계의 법칙과 유한계의 법칙은 분명 다르다. 그 연장선 상에 있지만, 같지는 않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의 연결신학이 이러한 근거에서 말한다. 원과 삼각형은 직선이 될 수 있으며, 정n각형은 원이 될 수 있다 등의 주장이 이러한 점에서 기인한다. 유한하고 변화하는 것들은 영원한 것들 앞에서 유한한 채로 버틸 수가 없기에, 영원한 것들로 대체된다. 이 둘은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무한의 직접적 즉각적 개입은 곧 유한 세계의 파멸로 이어지며, 이는 곧 묵시록의 종말로 이어진다. 하느님이 이 세상의 모든 선과 악을 영원히 심판하기 위해 이 유한 세상에 직접 내려오는 사건이 바로 최후의 심판이자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유한한 세계는 하느님의 온전한 현존을 버틸 수가 없기 때문에, 하느님은 세상에 개입하려면 다른 방식을 써야한다. 바로 유한 세계의 법칙들을 '존중'하면서 개입하는 것이다. 바로 사람과 사람의 마음을 통해서 개입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이 유한 세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유한 세계가 파멸하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느님은 사랑으로 창조하셨고 또 이 세계를 너무나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은 유한 세계를 '존중'하신다. 원죄설화에서 선악과를 취한 인간의 행위를 '존중'한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하느님이 유한 세계의 법칙을 존중하며 유한 세계의 법칙 안에서 스스로를 제약하면서 세상에 개입하시고, 이는 필연적으로 시공간의 지배를 받게 된다. 인간은 당장은 모르지만, 지나고 나서야 하느님이 함께 했음을 깨닫는 이유가 이러한 경우에서이다. 헤겔 철학에서 이성의 간지와 비슷하다. 요셉도 이것이 벌어진 악에 대해서 이를 선으로 다시 뒤바꾸려는 하느님의 계획이었음을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닫는다. 이처럼 섭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하느님이 활동하는 것이다. 때문에, 삶에서 드러나는 우연과 필연의 복합적인 얽힘에서, 우연성의 연속 안에서 필연을 읽어내는 것이고 그 필연, 즉 하느님의 필연적 개입은 역시 사람을 통해 이루어지며, 이는 사람의 자유의지에 달려서 행해진다. 즉, 하느님의 뜻을 알고 행하는 자, 하느님의 도구로 쓰임받고자 하는 자들의 마음을 통해서 그들을 움직여 세상에 개입하고 그렇게 천천히 뜻을 이루어가기 때문에 당장은 알 수 없고 지나야만 알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섭리이고 그렇기에 오묘하다고 하는 것이다. 신은 인간의 자유의지로부터 발생하는 모든 유한 행위를 존중하며 그 안에서 현재와 미래 안에서 최선을 향해 세계의 유한적 한계 안에서 조율해나가고 있고, 그런 방식에서 우리는 최선인 현재 세계를 긍정할 수 있다. 

   악 역시 그러하다. 악의 원인에 대해서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의인과 악인의 구별을 위해, 선만 있으면 재미없으니까 세상에 변화와 운동을 주기 위해서, 선을 조명하기 위해, 도덕적 성취를 위해, 등) 모두 부분적으로만 맞을 뿐 정답이 없다. 악의 원인에 대한 문제는 결국 답이 없다는 점이고,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악을 허용했고 참아주고 있다는 것 뿐이다. 유한 세계는 기본적으로 악을 머리 위에 이고 있다. 유한을 존중하며 활동하시는 한, 하느님은 그러한 악을 이용해서 선을 도출해내기도 하지만, 그러라고 악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악은 선이 부족한대로 있었고,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모르는 것이다. 이에 악은 허용된 형태로 존재하며, 그 목적 또한 하느님의 정신 안에 있으므로, 우리는 악에 대해서 하나의 신비로 접근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온전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악에 대한 탐구는 결국 하느님의 신비에 그 종착점을 찍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한계 밖에서는 신비로 존재하며, 그 신비에 하느님이 기거하신다. 하느님의 최상의 세계, 즉 에덴동산이나 낙원 즉 천국은 하느님과 함께 영원계에 있으며, 유한계에서는 유한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역사하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악을 창조하신 것은 아니다. 악은 어디까지나 선이 부족한 만큼의 구멍에 불과하므로, 내가 앞서 말했듯 그리고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지적한대로 (https://arca.live/b/catholicno1/90810941?category=%EC%B9%BC%EB%9F%BC&p=1) 창조에 있어서 그러함은 필연이며, 존재하는 악에 휘둘려 악을 행해서 악을 발생시키는 것은 행위자의 탓이다. 하느님이 카인에게 말했듯, 죄악이 우리 앞에서 죄를 짓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니, 그것을 잘 조절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간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세계의 확실한 존재를 긍정해야 한다. 유한계에서는 각자의 결함들을 또 다른 유한이 보조하고 있는 꼴로 존재한다. 가장 큰 예로 태풍이 있다. 태풍이 없어지면 좋을 것 같지만 태풍은 지구를 유지하는 데에 있어서 고유한 역할이 있다. 거기에 휩쓸리는 인간이 마주한 악은, 그야말로 우유적인 것이다. 유한은 스스로 존재하지 못해 이렇게 결함을 다른 결함자로 보완하며 결함이 이렇게 맞물리고, 이는 지극히 유적이며,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악에 대해서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경계는 여기까지, 즉 선의 결핍이라는 설명이 최선이다. 신비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카인의 제물이 외면 받은 것도, 이유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살인자를 살인했다고 죽이지 말라는 하느님의 의지도 나타난다. 하느님은 선과 악 모두를 오묘하게 이용하며 세상에 개입하시고, 그리스도인들은 그러한 섭리의 일부가 되고자 단순하게는 하느님의 도구되길 바라며, 이러한 점을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들은 섭리에 따르길 바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러한 존중을 동반한 역사하심은 창세기 전반에 걸쳐 나타난다. 부활절 제 1독서와 제 2독서에 창세기가 나오고, 이후 다른 독서들에서도 창세기가 조금씩 보이는 것은 우연이 절대 아니다. 결함성이 드러난 순간 그것은 완전성에 의해 회복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헤겔 철학 중 '법철학강요'에서 타죄 신화를 즉자적 원초와 대자적 분열, 그리고 치유를 통한 통합으로 해석한 것과 비슷하다. 결함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우리 모두를 무거운 짐으로부터 회복하고자 하는 것, 바로 이 구원경륜은 창조 때부터 준비되어있었으며,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의 순명을 통해 섭리의 특징과 그 이유를 더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결국 판단의 주인은 하느님이며 판단의 성질 또한 그러하고, 인간은 하느님의 판단을 모방할 뿐, 절대 그처럼 될 수 없다는 것이 판단에 대한 의미이다. 판단과 복수 모두 하느님의 것이고, 이점은 신명기와 복음서, 히브리서, 로마서에서도 직접적으로 다시 나타난다. 복음 안에서 예수님이 “서로 판단하지 말라”고 하신 점 역시 여기서 기인한다. 인간은 전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도 없을 뿐더러, 판단함에 있어서 인간이 스스로 하느님이 되고자 하여 복수 등을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지점을 더 명확히 하고자, 판단하지 말라, 남의 눈에 있는 티를 뭐라 말고 네 눈의 들보를 치워라, 서로 사랑하라, 원수를 사랑하라, 내가 본을 보인 것이다 등의 말을 하시는 것이다. 판단 대신 어차피 서로 결함자이니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고 서로를 채워줘라하는 말이다. 

   그런데 판단이 무작정 유보되지는 않는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서 이미 대신 판단을 해놓으셨다. 바로 율법과 예수님의 가르침 등이다. 그래서 우리가 용인하고 또 주장할 수 있는 판단은, 바로 이러한 점들 안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명시적으로 오류적인 부분들을 하느님의 판단에 의거하여 지적하되, 그것은 그 오류성들이 극복되면 다시 사랑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점이다. 판단과 사랑은, 오류성의 극복을 통한 통합이지, 오류도 인정하라고 사랑하라고 떼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류성에 대해 하느님은 이미 우리를 위해 판단을 해놓으셨기 때문이다.



VI. Conclusio.

VI. 결론.


그때 주님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잘 알아 두어라. 너의 후손은 남의 나라에서 나그네살이하며 사백 년 동안 그들의 종살이를 하고 학대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네 후손이 종이 되어 섬길 민족을 나는 심판하겠다. 그런 다음, 네 후손은 많은 재물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너는 평화로이 네 조상들에게로 갈 것이다. 너는 장수를 누리고 무덤에 묻힐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사 대째가 되어서야 여기로 돌아올 것이다. 아모리족의 죄악이 아직 다 차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연기 뿜는 화덕과 타오르는 횃불이 그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갔다. 그날 주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이집트 강에서 큰 강 곧 유프라테스강까지 이르는 이 땅을 너의 후손에게 준다. (창 15, 13~18)


   지금까지 창세기에서 나타나는 인간관, 신관, 세계관, 그리고 판단을 통한 복수와 섭리에 대해 알아보았다. 성경의 첫 책인만큼, 성경의 이야기들은 이러한 관점들에서 시작되어 흘러간다. 그리스도교 신앙 안에서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창세기라는 이 한 책에서 많은 부분이 드러난다. 이후의 책들은 모두 이 부족한 점들을 채우기 위한 후속인 것이다. 하느님 신비 안에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나누어서 바라보며, 우리에게 없는 악을 조명하는 대신 우리가 가진 선을 조명해가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 진정한 행복과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다 버리고 찾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내면을 비우면 그제서야 하느님께서 우리 내면에서 역사하신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지혜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것처럼, 십자가의 '지혜'이다. 다른 이들에게는 '어리석음'이겠지만, 이 어리석음이 우리에게는 가장 큰 지혜와 행복이라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다. 또한, 우리는 처음에 말했듯, 악이라는 ‘무거운 짐‘을 머리 위에 이고 있지만, 예수께서 이리 말씀하신다. “무거운 짐 진자 모두 내게 오라. 나의 멍에는 가볍다.” 결국 인간 실존의 궁극적인 해결은 예수를 통해서만 가능함이 파악되고, 이는 창세에서부터 계획된 구원경륜임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차남인 동시에 장남이다. 장남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상태에 있으면서도 그 행복을 인식하지 못하는 더 탐내고 욕심을 부리는 아담인 우리이고, 차남은 그 아담이 집을 나서서 밖에서 고생하는 우리이다. 나의 이 부족한 글을 보고, 조금이라도 하느님을 찾아보려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작은 마음에, 이 글을 마칩니다.


Q.E.D. 

Quid Est Deus?


╋ 기도합시다.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하느님, 놀라우신 섭리로 저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셨으니 한처음에 세상을 창조하신 위대한 업적과 마지막 때에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제물로 희생되신 놀라운 구원을 깨닫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하느님, 사람을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저희가 굳건한 마음으로 죄의 유혹을 물리치고 영원한 행복을 얻게 하소서.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비나이다.)
◎ 아멘. (부활 성야 미사 제 1독서 후 기도)


참고문헌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주석성경


2024.03.28. 성 목요일 밤 ~ 성 금요일 새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