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지난 이야기
벨 아저씨가 왔다갔다
그 아저씨, 알아먹기 힘든 얘기만 해댔다


*



'딸랑'


"어서오세요."


"저 또 왔습니다."



누가 들어온고 하니 멋쩍게 뒷통수를 긁는 젊은 남성이었다.


누구더라.



"저번에 꽃 사갔는데 기억 안 나세요?"


"아!"



막내 점원님과 내가 동시에 소리쳤다.


그야 최근에 꽃 사간 사람은 별로 없지 않았던가.



"친구분이 창업하신다는!"


"꽃 선물! 맞으시죠?"


"예. 알아보시는군요. 페페로미아."



반가워서 덥썩 손을 잡았다.



"잘 오셨어요! 그후에 어떻게 되셨어요? 싸운 사이였다면서요?"


"선배, 일단 이 분 자리라도 후딱후딱 내드리죠."



선배란 호칭이 딱히 틀리진 않은데 새삼스레 입으로 불리니 낯간지러운 측면이 있었다.


부끄럽기도 하고.



"앉으세요. 차라도 내드릴게요.

얼그레이 괜찮으시죠?"


"찻값 안 가져왔는데요."


"쟤가 사는 거니까 앉으세요!"


"아무리 그래도 코 묻은 돈으로 차를 얻어마십니까."



코 묻은 돈?


아하. 내가 산다고 착각했구나.


나는 손가락으로 우리 신입 점원을 가리켰다.



"'제가'가 아니라 '쟤가'라고요. 저 신입 돈에서 뺄 거에요."


"? 선배?"



후배님께서 눈이 동그래지셨다.


뭐.


내가 너 때문에 한 고생이 한둘이 아닌데.


이 정도는 내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라는 심정을 담아 후배님을 쏘아보았다.


후배님, 얼굴이 어리둥절하니 전혀 못 알아먹은 듯했다.


답답한지고.


나는 주먹을 들어올렸다.


속뜻은 다음과 같았다.


'이 고사리 손 같은 주먹으로 네가 푸는 괴수 퇴치하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후배는 움찔하더니 "폭력 반대반대! 사, 사면 될 거 아니에요!" 라했다.


뭘로 알아들은 거야 대체.



"그 친구, 처음에 가니까 여간 껄끄러워하더군요.

반기지도 않고, 그렇다고 야멸치게 내쫓지도 않고."


"그야 싸웠으면 그렇겠죠."


"서로 화해는 하고 싶어하면서도 말 꺼내기가 민망한 분위기였고요."



후배도 관심 많았는지 차를 우리면서 열심히 듣고 있었다.



"그래도 선물 덕에 용기내서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손님이 후배에게 꾸벅 허리를 굽혔다.


나는 다소 실망스러웠다.



"뭐야 그뿐이에요? 화해의 키스는?"


"남자인데요. 그 친구 놈."



남자라고? 오히려 좋아.


무심코 떠올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 아니, 안 좋아.


뭔 '오히려'야, '오히려'는.


나 빙의 전에 이런 거 안 좋아했잖아.


왜 이래 대체.


정신 차리자.


빙의 전의 나를 되새겨보자.


빙의 전의 나를.


나는... 나는 어땠더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추천해주신 덕분입니다. 오랜 친구인데 겨우 화해할 수 있었어요.

그 녀석도 엄청 기뻐했습니다. 화분."



거듭 감사를 표하는 손님에, 우리 가게 막내는 쑥쓰러워했다.


뺨에 살포시 손을 얹는 건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려는 거겠지.


어라? 고개 숙인 막내의 목 뒷쪽에 이상한 문양이 있었다.


뭐지 이거.



"제가 뭘 했다고요."



손님은 그러다 얼마 안 있어 갔다.


내줬던 차도 안 마시고.


인사만 하려고 들렀다니 어지간히 고마웠던 거겠지.


이미 우려버린 차는 버릴 수도 없었다.


내가 마시기로 했다.



"으음, 이 맛 참...."



혀끝에 남은 맛을 음미하였다.


곱씹을수록, 차에 대한 평가가 확고해졌다.



"찻잎이 아까운 맛이네요." 


"죄송해요."


"제가 지금까지 쓴 찻잎이 말이죠.

같은 찻잎으로도 이렇게 근사한 차를 우릴 수 있는데, 제가 지금까지 우린 건 뭐였을까요.

정말이지 얼마나 근사하고 화려한 맛인지-."


"감사합니다."


"하도 화려해서 뱉고 싶은 맛이네요.

차가 은은해야지, 화려하면 됩니까?

설탕 양이 이게 뭐에요."


"죄송해요."



신입 점원이 영 기운이 없어보이길래 모 요리 방송 흉내를 내봤건만, 씨알도 안 먹혔다.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야 죄송하다는 둥, 감사하다는 둥 하는 인사도 평소였으면 "감사감사yo" 따위로 말했을 거 아냐.


푹푹 한숨을 쉬는 꼴에, 나도 덩달아 한숨이 나왔다.


아! 참고로 맛이 없다는 건 거짓말 아니다.


이 차는 설탕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땅에 버리면 개미가 모이겠다 싶었다.



"말해봐요. 왜 얼굴이 개운하질 않아요?"


"그냥... 저 손님 보고 옛날 생각했어요.

옛날옛날엔, 마법소녀 처음 시작할 땐, 사람들이 저한테 저렇게 꾸벅꾸벅 인사하고 고마워하고 그랬는데."



화법이 그대로네.


침울 한 거 아닌가?


근데 한숨은 쉬잖아.


음. 어렵다.



"그랬어요?"


"그땐 구조에 전념했으니까요."


"이를테면?"


"경우야 왕왕 있죠.

활활활 타는 건물 속에 있던 사람들이라던가,

식량 찾으러 나섰다가 곰을 만난 사람들이라던가,

안식처를 구하고자 떠돌다가 조난을 당한 사람들이라던가."


"근데 왜 지금은 구조 안 하는 거에요?"


"... 옛날에 제가 직접 만든, 사람들을 모으던 안식처가 있었어요.

이 마을 말고요. 거긴 사람도 많고, 귀신도 많던 마을이었어요.

언니랑 단둘이 살던 오두막을 중심으로 으쌰으쌰 힘내서 만든 마을었어요.

호수도, 강도 없지만 우물을 파서 물을 낑낑 끌어올리는 마을이었어요.

기술자가 많았거든요. 우물 정돈 금방 만들었죠."



소녀가 감상에 젖어서, 잔잔한 미소를 띄웠다.



"거기 아침이 되면 마을 중앙에 설치해둔 스피커로 시간을 알려요.

스피커 담당이던 두 분은 원래 오페라 배우셨는데, 아침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한구절을 부르셨어요.

물론 1인 다역이었어요. 스피커 담당은 남자, 여자 한명씩이었으니까.

그러면 그날 분의 셰익스피어를 들으면서 마을의 빵집을 제일 먼저 향했어요.

그날 먹을 빵을 사야 했으니까요."


"마을에 화폐가 유통됐다고요?"



듣기론 대화재인가 뭔가 때문에 이곳 북쪽은 반 아포칼립스 상황 같던데 뭐가 유통돼?


화폐?



"네. 제가 그렇게 시켰어요.

절 믿고 따라주라고. 다들 고마운 분들이라 그렇게 해줬고요."



아하... 비범한 아이로세.



"빵집의 아샤 아주머니는 친절해서 항상 저보고 무료로 주시려고 했어요.

마을의 은인이니까 빵 정도는 그냥 받으라고.

저는 '누나한테 얌체라고 때찌때찌 당해서 안돼요' 라고 핑계대고 은화 몇잎을 두고 나왔어요.

그래도 아주머닌 고집이 세서, 꼭 집에 와서 봉투를 열어보면 작은 크루아상이 덤으로 딸려있었어요."


"그 마을 어쩌고 왜 여기 있어요?"


"좋은 마을이었어요.

우물 물을 길러올 때면 언니들이 모여선 마을 남자 누구가 마음에 든다고 꺄꺄거리고.

좋다고 헤실헤실대던 언니랑 마을 오빠랑 어떻게 이어줄까 함께 작당모의도 하고.

모두 착하고, 발전도 잘 되어가고."



이 녀석, 마을은 어쨌냐고 물었더니 동문서답이었다.


그러고보니 애초에 이 얘기 시작하던 것도 구조 활동 왜 멈췄냐에서 시작하지 않았나?



"근데 왜 여기 있냐니깐요, 그렇게 좋은 마을이면."


"여기 있을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렇게 훌륭한 마을이면서?"


"다들 죽거나 소멸했거든요."


-마을에서 살던 귀신 중에 하나가 악령으로 변한 거다 먀.

그대로 주위에 이들을 집어삼킨 거고."



입때껏 묵묵히 있던 검은 고양이 요정이 거들었다.


?


마법소녀도 있고 요정도 있는데 그 악령한테 다 쓸리게 뒀다고?



"그때 저랑 껄룩이는 근처로 인명 구조하러 갔는데... 돌아와보니까 뭐... 그렇게 된 거죠.

그후로 구조는 관뒀어요."



그거 말하려고 여기까지 돌아왔구나.


긴 사유였다.



"그래서 연구를 빠밤빠밤했어요.

성불 외의 방법이라도 어떻게든 악령이 되는 것만큼은 막아야 한단 걸로."


"언제는 연구 잘 모른다 했잖아."


"시작했대도 말단인, 현장파였으니까요.

언니가 확립한 이론을 실제 망령들한테 시험해보고 결과 확인해서 슉슉 보고하는 게 제 임무였어요.

가끔은 언니도 했지만 주로 제 일이었죠."


"그걸 왜 지금, 갑작스레 말하는 거에요?"


"다 끝나면 저 투옥시킬 거잖아요.

이 마을에도 감옥 정도의 설비가 있단 건 알고 계실 테고."



뭣.


이 마을에 감옥도 있다고?


모텔에 학교에, 이젠 감옥이야?


코딱지만한 마을이라고 얕봤는데 뭐가 많기는 엄청스레 많네.



"투옥 때 저 변호 좀 해달란 거에요.

정상참작쯤으로."


"그럴 생각 없는-."


"싫다면 기지 위치 안 알려줄 거에요.

저희 연구단 기지 위치."


"알려주려고요?!"


"네."



마을 곳곳을 뒤져도 아저씨는 털끝조차 보이지 않았다.


여우가 몇번이고 마법을 다시 써도 이 마을에 있다는 결과뿐이었다.


그와 동시에 차분히 어림해보았다.


괴수를 풀어놓는 게 특정 세력의 의도된 활동이라면, 그런 비밀 세력이 태양 아래에서 당당히 활동할 리 없다고.


이 마을 어딘가에 필시 숨어지내는 곳이 있으리라고.


그렇다면 거기가, 내가 찾아보지 않은 이 마을의 유일한 장소가 아닐까.


거기가, 아저씨가 있을 만한 유일한 장소가 아닐까.


막내 점원께선 그 기지의 위치를 알려준다고, 그리 말하고 있었다.


 

"대신 몇개 조건만 지켜주세요."


"어려운 거에요?"


"네."



뭐야 김새네.


이거 알려줄 의지가 없단 거 아니야?


왕창 어려운 조건 내걸고 수행 못하면 '못 지키는 사람한테는 기지 못 알려줍니다' 같은 말 하려는 거잖아.



"어렵지만 간단해요.

되도록 살생은 하지 말아주세요."



아 그쪽.


조건이 아니라 약속이구나.


괜히 겁먹었네.



"알았어요.

당초부터 살생은 자제할 생각이었어요."



이건 장담할 수 있었다.


그야 게임속 인물이래도 지금은 내 눈앞에 있는데 죽이면 꺼림칙하잖아.



"또 있어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제 언니만큼은 반드시 무사해야 해요.

언니는 다치면 안 돼요. 절대절대."



이건 장담 불가능했다.


다치는 것조차 안 된다고?




"... 노력해볼게요."


"안 돼요. 절대로 부상 입히면 안 돼요.

상처 입혔으면 저 다시 언니랑 괴수 풀고 나쁜 짓 할 거에요."



완고한 소녀였다.


분명히 연구직이든 뭐든 반항을 할 텐데, 상처 없이 제압이라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였다.


입술이 삐죽 나왔지만 이 고집 센 소녀도 양보할 마음은 없어보였다.

 

타협해야했다.



"하아, 그렇게 할게요."


"자."



소녀가 자그만 주먹에서 새끼손가락만 펴서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보다 더 작은 손가락을 내밀어 화답했다.



"약속이에요? 손가락 꼭꼭 걸었으니까."


"네네. 알았다니까요."



소녀는 기지 위치를 내일 알려주겠다고 했다.



"제가 직접 데리고 갈게요."



나도 수긍하였다.



"한데 언니는 어떻게 생긴 분이에요?

생김새를 알아야 조심하든 말든 하죠."


"저랑 닮았는데 머리 모양만 달라요. 말총머리에요.

아, 요샌 안경 쓰기 시작했어요. 눈 간수 좀 잘하지."



얼씨구?


퍽도 알기 쉬운 설명이네.



"그것만으론 모르겠는 걸요."


"사진으로 보여드릴까요?"



이 마을 사진도 있어?


없는 거 빼고 다 있는 마을이네.


진짜 유사 아포칼립스 상황 맞나? 여기.


소녀가 품에서 꺼낸 사진을 받아들고 '헉'하고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당황하여 목소리가 떨렸다.



"이, 이, 이 피곤해보이는 분이 언니에요?"


"네. 저랑 우리 언니."



사진 속엔 자못 닮은 두 자매가 웃고 있었다.


짙은 속눈썹, 그리고 속에 숨겨진 분홍색 눈.


갸름한 달갈형 얼굴.


조금 왜소하지만 딱 여고생다운 신장과, 그에 걸맞지 않게 흉포한 몸매.


틀림없이 내가 아는 그 인물이었다.



"우리 언니 예쁘죠?"



소녀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예쁘... 기야 하지.


이 정도 예뻐야 주인공 유혹할 테니까.


이 정도 예뻐야 할 수 있는 거니까.



"히로인이란 건...."



사진 속 여성은 내가 빙의한 이 게임 내 히로인 중 한명, 

죽은 남동생을 그리워한다는 피폐계 히로인,

[마법소녀 소냐]였다.




*




마음이 꺾인 건 그대로였지만 이젠 두문불출의 경지까진 행하지 않았다.


부활해서 돌아온 아빠 덕이었다.


새벽의 찬 공기에 잠이 깬 나는, 옆에서 곤히 자고 있던 아빠를 보았다.



'불완전한 부활이라 하루에 20시간은 자야 한단다.'



아빠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실제로, 아빠는 집에 있으면서도 대부분의 시간은 수면으로 때우셨다.


그래도 기뻤다.


곁에 있어준다는 점만으로.


목이 탔다.


물을 마시고자 방문을 열었더니 마루엔 우리 가겜 점원 둘이 부산을 피우고 있었다.


하나는 여장 발키리 마법소녀. 내가 좋아하는 점원.


다른 하나는 고깔모자 마법소녀. 내가 싫어하는 점원.


보니 가방을 챙기고 있었다.


고깔모자 소녀는 꼴도 보기 싫었다.


고개를 획 돌리고 물어봤다.



"어디 가세요?"


"싸우러 가요."



호전적인 답변이었다.


발키리라는 자기 소개에 걸맞는 호전적 답변이었다.


얼추 사정을 들으니 잘만 되면 마을에 나타나던 악령이 훨씬 줄을 듯했다.


자연발생하는 경우만 남을 테니까.


변신을 못하게 된 지금의 내게 가능한 마법은 텔레파시 정도다.


전력에 도움이 안 되겠지.


그래도 본래는 내가 맡았어야 하는 일인데.


뿌리는 내가 맡던 일인데.


미안한 마음도 들었고, 분한 마음도 들었다.



"다녀오세요."



함께 가요가 아니라, 다녀오세요.


둘은 속뜻을 짐작하고, 내게 동행을 권하지 않았다.



"참, 선배 마법 쓸 줄 알아요?

대포만 삐슝삐슝하는 거 같던데."


"알긴 알아요. 전투 중에 쓰려니까 너무 어려웠지만."


"완전 허접허접인데요?

혹시 선배 마법식에만 집중한 거에요?"


"네."


"안 되죠. 우리 마법의 근간은 마음이잖아요.

간절히 바라야죠."


"그쪽이 더 중요한 거에요?

마법식 생각하다 머리 꼬여서 대충 했는데."


"강한 마법일수록, 어려운 마법일수록 마음이 더 중요해요.

마법식은 그냥 연산 보조용 도구고요."



새벽녘 퍼런 햇빛을 받으며 떠나는 이들이 떠들었다.


둘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둘은 자기들끼리 얘기하느라 바빠서 내겐 신경쓰지 않고 있었다.



"마음이라."



그저 멀찍이에 시선을 걸어두고 멍하니 중얼거렸더니 삐약이가 튀어나왔다.


뭐라고 한마디 할 법도 한데 입을 굳게 닫고 있었다.


딱히 할 말 없단 거겠지.


아직 삐약이에게 토라져있었기에 나도 잠시 가만히 있었다.



"삐약아."



침묵으로 일관된 분위기는 선호하는 편이 아니라, 얼마 못가 깨버리고 말았지만.



"나도...."


-'나도', 뭐냐 삐.



말을 하려다 멈췄다.


뭘 물으려 했던 건지도 확실치 않았다.



"됐어. 가게 문이나 열자."




*




기지라고 거창하게 부를 만도 했다.


우리 가게 막내께서는 날 끌고 마을 뒷산으로 향하셨다.



"진짜 기지 안까지 들어가려고?"



내가 말했다.


한때는 몸담고 있던 조직인데 배신하는데 협력해도 되겠냐는 뜻이었다.



"네.

약속 지키는지 확인해야죠.

선배한테만 맡기긴 불안하기도 하고요."


"내 어디가 불안하단 거야."


"선배 은근히 애 같은 면이 있어서 불안해요."



나 완전 상남자인데 뭐라는 거야.



[얘가 바로 봤네. 너 은근 애 같은 면이 있어.]


"얼씨구, 너까지 그러기야?"


[저 고양이 녀석한테 물어보든가. 똑같이 답변할 테니.]



검은 고양이 요정은 말도 마라는 듯 콧방귀를 뀌었다.


산 중턱에 이르러서 소녀가 마법으로 땅을 팠다.


파보니 지하로 향하는 작은 문이 있길래 열어재꼈다.


문 안쪽에는 사다리가 있었지만 상남자는 사다리 따위 타지 않는 법이었다.


뛰어내렸다.



"선배 그러다 다쳐요!"



후배가 걱정해주는 소리가 들렸다.


사다리 아래는 외길이었다.


관리가 잘된 듯 깨끗한 길.


좌우로는 이름모를 액체가 차있는 관이 즐비해있었다.


관 내부에는 각각 기괴한 생물이 있었다.


이를 테면 강아지인데 얼굴 반쪽이 해골이라던가.


더 나아가자 넓은 실내가 나왔다.


순백색 타일로 천장이며 벽을 장식한 실내.


바닥은 언뜻 보니 유리 바닥이었다.


투명하여 속이 내비치는 유리 바닥 아래엔 또 평평한 흙바닥이 있었다.


새삼, 애니메이션의 한 대사가 생각났다.


'밑바닥에도 바닥이 있단 걸!'


실로 이 광경 그 자체라 입을 감추고 키득거렸다.



[뭐가 그리 우스워?]


"몰라도 돼. 히히."



나는 멋대로 그 흙바닥에 '바닥의 바닥'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바닥의 바닥'에는 방금의 액체 관이 불규칙하게 놓여있었다.


저기도 괴물 담겨 있는 거겠지?



"헬헤임 쪽 분석은 그렇게 하면 끝날 거 같고,

요툰 샘플 c 분석은 끝났나?"


"아뇨 아직... 데이터가 적잖습니까."


"어떻게든 긁어모아서 결과 내봐야지.

나오는대로 쇼리사르 샘플이랑 조합해보자."


"데이터 돌려놨으니 축출까지 시간 좀 걸릴 텐데요."



실내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연구 가운을 입고 있었다.


수가 많지는 않았다.


스무명 전후?



"다들 바빠서, 우릴 눈치 못 챈 거 같아요."



어느샌가 날 쫓아온 후배가 말했다.



-살금살금 지나가자 먀. 괜히 소동이라도 일면 골치 아프다 먀."


"응."



응이라고 말하고 몇분 되지도 않아서 쿵하고 넘어졌다.


누군가 발을 건 것이었다.



"아야!"



아파라.


충돌한 이마가 빨개졌다.


원망스러워서 뒤를 째려보니 내 왼발이 내 오른발을 걸고 있었다.


이건 왼발이 잘못했네.



[하아, 저 천치.]



아파서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일어섰다.


연구소가 싸늘한 기류로 변한 것 같아 좌우를 둘러보았다.


연구원 전원 나를 보고 있었다.



"앗."



넘어진 것 때문에 들켰구나.



"침입자다! 대피해!"


"적은 마법소녀다! 대피하고 스위치 내려!"



스위치?


무슨 스위치?


썰물 빠지듯 연구원이 사사삭 달아났다.


연구원 대다수가 피신하자 한 연구원이 벽에 달려있던 붉은 색 버튼을 눌렀다.


절대 누르지 마시오라고 써져있는.


순간 유리 바닥이 꺼졌다.


중심을 잃고 아래로 추락하였다.


유리 아래의, 무질서하게 액체 관이 늘어져있던 그 흙바닥으로.


'바닥의 바닥'으로.



'쿠웅'



어둡고 퀴퀴한 흙바닥이었다.



"으으, 엉덩이 아파."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엉덩이를 살살 매만져주었다.



"선배! 조심조심하셔야지 경솔하게 구시면 어떡해요!!"



고깔 모자 소녀는 노발대발하였다.



-애 같은 구석이 있다니까는.


[애 너무 괴롭히지 마라.

애는 애다.]



두 요정은 말리는 시누이였다.


나는 듣는둥 마는둥하였다.



"다시 위로 못 올라가나?"


"이 흙바닥엔 마력 억제 약물을 곳곳에 쫙쫙 해뒀어요.

마법이 불가능한 것까진 아니지만 비행 마법으로 올라가기는 힘들걸요?"



비행 마법 따위,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허세를 부리고 싶은 기분이라 있는 척 하였다.



"그, 그래요? 아쉽네.

난 떨어져도 마법으로 날아서 올라갈 계획이었는데."


[조석을 굶고 이를 쑤신다는 게 이런 말이로군.]



내 태연함과 자연스러움을 어필하고자 손수 휘파람까지 불어보였다.


뭐가 그리 불만스러운지, 후배는 고개를 가로로 저었다.



"거짓말 되게 못하시네요."


"어쨌든 다른 방법은 없어요?"


-저 끝에 사다리 있다 먀.


"노란색 사다리에요. 어두워서 잘 안 보이시겠지만."



고깔 모자 소녀의 손가락 끝을 보니, 과연 뭔가 있긴 있었다.


사다리인지는... 침침해서 확신 못하지만.



"뭐야! 

그 스위치인가 뭔가도 별 거 없네요, 그러면!

사다리 타고 올라가면 되니까.

완전 허접이네!"



우쭐해져서 만면에 미소가 올라왔다.


후배는 철없는 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허접허접이 맞죠.

어디까지나 '사다리를 탈 수 있으면'이지만."



어디선가 괴생물이 꼬여들었다.


신체 일부가 용암처럼 흘러내리는 불그스름한 당나귀, 날개가 한짝만 달린 폐가수스, 드워프의 몸에 소 얼굴이 달린 괴물....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 그 관 속에 들어있던 애들이잖아!"


"사람 냄새 맡았다고 모인 거에요."


"쟤들 뚫고 가야 해요, 우리?"


"네.

실패작이라지만 무스펠도 있고, 요툰도 있고, 엘프도 있고 하니까 주의하세요."


-다른 것도 있다 먀. 지하의 헬헤임쪽 애들이나 다크엘프들이나... 더 뭐 있더라? 먀.


"알았으니까 그만 겁 줘!"



으으 싫은데 난, 저런 거.


어두컴컴한 시야에 다 담지도 못할 만큼, 괴물들은 득시글거렸다.



*


앞으로 필요한 화는... 3화... 힘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