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화




난 항상 보신적인 삶을 살아왔다.


내 가치를 올릴 수 있다 해도, 몸이 상할 정도로 험한 일은 한 발짝 뒤로 물러났고.

실수로 상처를 입으면 곪지 않도록 어떤 처치도 다 해냈다.


내가 가진 건, 누군가에게 바칠 몸뿐이었다.


상처를 입고 약해짐은 곧 몸의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다.


노예상은 병들거나 심하게 다친 노예를 소유에 남겨두지 않고, 항상 헐값에 팔아넘긴다.

그렇게 팔려나간 노예는 그리 오래 살아남지 못한다.


그렇기에 내 몸을 보전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 상처가 깊어도 너무 깊어... 이대로 방치했다간 밤이 지나기 전에 숨이 끊어질 겁니다.


평소 의원으로 불리는 중년의 노예는 내 등을 살펴보더니, 이내 혀를 내둘렀다.


나는 그의 값이 30금전을 넘을 정도로 유능한 자라고 알고 있으나, 내 상처를 고치는 것은 버겁다고 한다.


고통과 탈력감 속에 너덜너덜해진, 그런 희미한 의식 속에 있음에도 들려오는 말소리는 또렷했다.


그들은 내가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시체라고 한다.


- 자네의 의술로는 방도가 없는가.

- 이런 광범위한 열상을 잡으려면 달군 인두로 환부를 지져 봉합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술은 젖니도 다 빠지지 않은 남자아이에게는 고문과 다름이 없으니...


노예상과 의원이 대화를 나눌 때, 나는 겨우 손을 허우적거리며 뻗었다.


나는 손에 잡힌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말라비틀어진 입가를 천천히 움직였다.


“버틸 수... 있습니다....”

“.......”

“.......”


내 목소리를 들은 이들은 침묵에 빠졌다.

나는 다시 한번 숨을 혀와 턱으로 빚어, 목소리를 토해냈다.


“저는... 버텨낼 겁니다....”


갈라진 호소를 내뱉은 것을 끝으로, 다시금 현실으로 향하는 길을 잃었다.


내 몸은 거칠디거친 환상에 떨어졌다.


검붉은 피바다의 수면을 부유하며, 고통으로 채워진 물거품 속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렸다.


- 끄아아아아-!

- 아아아아악!


높고 매섭게 울부짖는 폭풍우는 내가 지른 비명이고.

나를 자꾸만 핏물 속으로 집어넣는 악마의 꼬챙이는 내 상처를 지지는 인두이다.


생 사경 속에서 헤매고 있음을 알지만, 현실이라는 뭍으로 헤엄쳐 나올 만큼 난 강하지 않았다.


겨우 입술만 움직여 힘겹게 호흡하고 있을 때.

사나운 늑대가 내 몸을 조각내어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듯한, 격통이 파도가 되어 연신 덮쳐와.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이 외로운 죽음의 바다로 빠뜨린다.


마음과는 달리 내 몸부림은 잦아들고, 죽음이라는 끝자락에 닿아감을 순응해 갈 때.


- 미안해....


누군가가 두 손을 내 손을 감싸 쥐었다.


그 손은 죽음이라는 바다로부터 서서히 날 수면 위로 꺼내주었고.


보드랍고 포근한 그 손결로부터, 따스한 순풍이 타고 흘러들어와.

걸쭉한 혈흔과 식은땀에 젖어 있던 몸을 씻어내렸다.


두꺼운 먹구름이 걷히듯 뻑뻑한 눈꺼풀이 떠지자.


- 미안해.... 나 때문에....


내가 지켜야 하는 여자아이. 지켜야 했을 아이는 하얀빛에 감싸여 쓰러져 있는 내 손을 꼬옥 감싸 쥐고 있었다.


난 그 아이의 눈동자를 보았다.


눈물이 고여 흘러내리고 있는 여자아이의 눈동자. 그 색은 항상 보아온 푸른 바닷빛이 아니었다.


여자아이의 눈동자는 선명한 ‘자주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 부탁이야.... 제발 살아줘....


자줏빛 눈동자가 영롱한 빛을 발하자.

세상은 회색빛으로 밝아지고, 그 사이로 선홍색 광명이 내리쬈다.


내 어리석은 눈이 일으킨 착각인 걸까.

아니면 또 다른 환상으로 이루어진 미몽인 걸까.


난 눈이 아릴 만큼 찬란한 붉은 광휘에 눈이 멀까 봐, 다시금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오늘 세 번째로 정신을 잃었다.




* * * * * *




“힐트. 눈을 떴느냐.”


내가 정신을 차리자, 곧바로 보이는 것은 노예상이었다.


내 몸이 눕혀진 곳은 나무관이 아닌 노예상의 방 침대이고, 내가 입고 있는 옷은 수의가 아닌 깨끗하게 다려진 흰 천 옷이다.


나는 덮은 이불을 걷은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움직일 때마다 살가죽을 칼로 베듯 따갑고, 손가락 마디 하나하나가 꺾이는 것처럼 뻑뻑했다.


하지만, 아직 움직일만 했다.

아니, 그래야만 했다.


노예상은 내가 식은땀을 흘리며 애써 움직이는 걸 보더니, 수염으로 가려진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 애쓰지 않아도 된다.”

“전 괜찮습니다...”

“내게 거짓말을 하려는 게냐.”

“아닙니다, 주인님. 전... 정말 괜찮습니다.”


나는 노예상에게 약해진 모습을 보여선 안 됐다. 그가 내 상처를 봤음에도 말이다.


“허억... 흑... 헉....”

“미련한 녀석.”


내가 겨우 침대맡에 앉고 가쁜 숨을 몰아쉬자, 노예상은 작은 나무 컵을 건넸다.


그걸 받아 들고 나무 컵 안에 든 물을 벌컥벌컥 마시자, 마른 목에 갈증이 조금 가시는 기분이 든다.


그렇게 허겁지겁 물을 마시고 컵을 돌려놓았을 때.


잊고 있던 누군가가 번쩍 떠올랐다.


“그 여자아이.”

“흠?”

“주인님께서 지키라고 명령하셨던 여자아이. 그 아이는 괜찮은 겁니까?”


내가 지켜야 했던 여자아이가 가장 먼저 생각났다.

환상에서도 그 아이가 나타났으니까.


“너는 죽음에서 되살아나고선 가장 먼저 여자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는구나.”

“제가 맡은 일이기에 그렇습니다.”

“.......”


내 말을 들은 노예상의 눈에 희미한 빛이 돌더니, 이내 사그라들었다.

그리곤 앉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 아이는 이제 신경 쓸 필요 없다.”

“.......”

“아쉬운 게냐.”


노예상의 말대로 난 아쉬워하고 있었다.


그 여자아이의 곁을 더는 지키지 못해서가 아닌, 내 쓰임새 하나가 줄었으니까.


하지만, 노예상은 수염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이내 생각지도 못한 말을 꺼냈다.


“널 사고 싶다는 자가 있다.”

“예?”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

몸이 너덜너덜해진 쓸모없는 노예인 나를 말이다.


전혀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이제 쓰임새를 다하고 천천히 낭비될 거라고 체념하고 있었으니까.


노예상은 내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놀란 반응이 재밌기라도 한 듯, 점잖은 웃음을 지으며 입구를 향해 손을 휘적거렸다.


철컥- 철컥-


그러자, 걸음마다 철럭거리는 쇳소리와 울리며 거한이 좁은 문을 비집고 들어왔다.


“르노 도브레스 경이시다. 너는 예를 다하여 인사드리거라.”


내가 보았던 그 어느 장정보다 건장한 체구. 치열한 전투에서 얻은 흉터. 맹렬하게 이글거리는 투사의 눈빛.

그리고 가슴에 박힌 말발굽의 인장.


르노 도브레스, 그는 내 생에 처음으로 마주한 기사였다.


나는 그로부터 덮쳐오는 위압감에 침대 위에서 떨쳐 일어나, 곧바로 무릎을 꿇고 예를 갖추었다.


“미천한 노예가 고귀한 전사께 예를 올립니다.”

“허... 아직도 날 고귀한 전사라고 높여주는 이가 있었군. 그것도 한창 칭얼거릴 어린아이가 말이야.”


그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더니, 무릎을 굽혀 내 등에 난 상처를 살펴본다.


“이토록 등이 찢길 만큼 깊은 부상에도 살아남아 내 앞에 무릎을 꿇다니. 타고나진 않았으나.... 그래, 길들어진 것인가. 아이야, 고개를 들 거라.”


그의 말에 따라 고개를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르노 경의 눈빛은 내가 마주하기 힘들 만큼이나, 형용할 수 없는 위력이 담겨 있었다.


“네 이름은 무엇이지.”

“힐트입니다, 르노 경.”

“검자루라... 썩 괜찮은 이름을 받았군. 해는 세고 있는가?”

“예. 나고 자란 고향에서 다섯 번, 상단의 마차 기둥에서 두 번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내가 대답할 때마다 르노 경의 얼굴이 화색으로 물 들어간다.


“고작 나이 일곱에 기개만을 가지고 집채만한 늑대를 잡았다라- 유일신께는 미천한 몸에게도 그분의 축복을 아끼지 않으시는구나.”

“그저 감읍할 따름입니다.”


연신 감탄성을 흘리던 르노 경은 무릎을 털고 일어나더니, 노예상에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상단주, 늑대의 숨을 빼앗은 단검을 직접 볼 수 있겠소?”

“그대는 원한다면, 보게 될 것이오.”


노예상은 늑대의 피가 말끔하게 닦인 단검을 르노 경에게 건넸다.


르노 경은 창문으로 새어든 빛에 검날을 비추어 보더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뭉툭해지지 않은 날, 짐승의 발악에 휘어버린 얇은 검신... 늑대는 일격에 절명했을 터.”

“정확하오. 늑대는 폐동맥이 끊겨 즉사했소.”

“유일신 에덴세이시어-! 놀랍군.”


르노 경은 격정적인 감탄을 보여주고는, 이내 내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붙여 앉았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저자세를 지켰다.


“날 붙잡는 한 가지의 맹점은, 저 아이가 너무 길들어졌다는 거라네. 맹목적인 복종이야말로 치명적인 극독이 되는 법이니.”

“나는 저 아이를 길들인 적이 없소. 저 아이가 길들어지길 자처한 것이지.”


노예상이 흘린 첨언의 일부분은 옳았다.

난 살아남아 가치를 인정받기 위해서 복종하는 걸 택했으니까.


하지만, 그는 그것이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상단주, 이 아이와 독대를 나누고 싶소.”

“자리를 비워주어야겠군.”

“그리 해주시오.”


상단주가 자리를 비우고, 나와 르노 경. 둘만이 방에 남았다. 그리곤 약간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너를 힐트라고 불러도 되겠지?”

“영광입니다.”

“나 또한 영광이다, 힐트.”


그는 내게 신분을 따지지 않았다.

귀족으로서도, 명예로서도 거리낌이 없이 나를 바른 자리에 앉혀 눈을 맞추었다.


난 그의 시선이 거북한 탓에, 눈을 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내 반응에도 개의치 않는지, 자신의 꽉 낀 허리끼를 조금 풀고 편안하게 앉는다.


“힐트.... 너는 내가 기사인 줄 알겠지. 허나 그건 틀린 추측이다.”

“.......”

“난 기사가 아니다. 명예가 박탈당한 과거의 기사일 뿐이지.”


명예가 박탈됨은 곧 기사 작위를 잃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누구나 숨기고 싶을 가장 수치스러운 사실을, 르노 경은 가장 천한 노예에게 숨김없이 밝히는 것이다.


무슨 의도인지 읽히지 않았지만, 나는 입은 닫고 귀를 열어 조용히 경청했다.


“비록 내가 발을 딛고 나아갈 전사로서의 명예로운 길은 끊어졌으나, 내 핏줄로 이어진 계보만큼은... 내가 살아있는 한 끊이지 않는다. 끊기게 두지 않을 것이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계보.

혈연으로 맺어져 내려지는 사람의 역사를 상징하는 뜻했다.


르노 경은 어째서 나 같은 노예와 핏줄에 대하여 논하려는 걸까.

호기심이라는 고질병이 스멀스멀 도지기 시작한다.


내 입술이 의지와 상관없이 씰룩대자, 르노 경은 뜸을 들이지 않았다.


“상단주에게서 힐트 너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충실하고 수용적이며 주어진 일을 무조건적으로 해냈다지. 그것이 너의 뼈와 살을 이룬 복종심일 터이고.”

“.......”

“네가 여자아이의 경호를 맡았을 때. 너는 죽음을 무릅쓰고 늑대와 맞서 싸워 그 아이를 지켜냈다지. 내 눈에 보이는 그것은 복종심에 기인한 요행이 아니야. 아무리 충직한 노예여도, 강건한 기사여도, 당도한 죽음을 목도하는 순간 의지는 갈대처럼 꺾이니 말이야. 그러나, 힐트 너는 죽음에 맞서 누군가를 지켜냈다. 꺾이지 않고 굳건하게 말이다.”

“.......”

“그것이야말로 네가 가진 힘이다. 내 두다리를 지탱하고 늑대 앞에 맞서게 한 그 힘! 꾸며지거나 길러지지 않는, 네가 타고난 순수한 용기!”

“.......”

“난 너의 심지에 들러붙은 복종심이 아닌, 그 심지를 이룬 용기를 읽어냈다. 힐트, 너는 그것을 불살라 싸울 불씨를 가지고 있고.”


르노 경의 담담한 어조는 곧게 이어져 나가며.

마지막 한 문장으로 맺어졌다.


“나는, 네가 나의 계보를 이어주길 바란다.”


그 말에 전율이 흘렀다.


르노 경은 날 노예로 삼는 것이 아닌, 내 후견인이 되어 주겠다는 뜻이니까.


르노 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손에 핏줄이 잡힐만큼 꽉 쥐고 있던 것을 건넸다.


그건 바로 단검이었다.


“힐트, 나의 명예를 이어주겠는가?”


르노 경의 말에는 무겁고도 단단한 힘이 담겨 있다.


빛나는 눈빛에도, 올곧은 몸가짐에도 전부 묻어나는 그 강렬한 힘.

그것이 바로 르노 경이 품고 있는 ‘확신’이었다.


왜인지 나는 그 전사가 품은 확신에 부응하고 싶었다.


나를 낳은 핏줄에게 버림받았고. 또 한없이 미천하기에.


내가 쓸모있다는 것이 아닌, 그의 확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원하신다면, 르노 경의 뒤를 잇겠습니다.”


몸소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 * * * * *




봄이 가고 나무가 초록 잎을 품어 여름을 알리고 있다.


내가 르노 경에게 팔려 떠는 날.


노예상은 마지막으로 나와 마차 기둥 앞에서 나란히 앉아 있었다.


“이로써, 너는 내 손에서 팔린 거다.”

“.......”


그는 명부에 적힌 내 이름을 촛불로 지졌고, 검은 먹이 녹아내려 지워졌다.


주름이 잡힌 노인은 왠지 아쉬운 표정으로 먹이 지워진 종이 조각을 매만진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내 얼굴을 지그시 보았다.


“뭘 그렇게 보느냐. 무언가 또 궁금하더냐?”

“예, 주인님.”

“날 주인이라고 부르기 말거라. 난 이제 네 주인이 아니다.”

“...그렇습니까.”


노인은 피식 웃으며 내 허리춤에 걸린 단검을 보았다.

단검은 그가 내게 준 보수이기도 했다.


난 마지막으로 떠나기 전, 그에게 묻고 싶은 게 남아있었다.


“하나 물어보아도 괜찮겠습니까.”

“말해 보거라.”

“르노 경께 절 얼마에 팔았습니까.”

“...징그러운 놈.”


노예상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푹 내쉬더니.


“5 동전.”

“예?”

“넌 5 동전에 팔렸다.”


내가 생각지도 못한 낮은 가격을 말했다.

살짝 어이가 없어 눈을 부라리고 있으니, 그는 끌끌 목을 긁는 웃음소리를 흘린다.


“나는 미련이 남을만한 것은 비싸게 팔지 않는다. 내 손에 들어온 금전이 큰 만큼 아쉬워하게 되는 이치다.”

“.......”


나는 노예상의 주름진 얼굴을 다시 보았다.


그는 날 강압적으로 기르지 않았다. 밥을 적게 주어 굶기지도 않고, 채찍을 들고 있어도 휘두르지 않았고, 노예들 사이의 일을 중재하지도 않았다.


그저 노예를 사고, 노예를 팔 뿐.


심지어 난 노예상 노인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내가 날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름을 모르듯이 말이다.


노인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내 볼을 잡고 읊조렸다.


“네 가치를 잃지 말아라. 더욱 값비싸지고, 누구에게도 널 팔아넘기지 말아라. 그것이 어깨 너머로 보여줄 수 있는 마지막 가르침이다. 가슴 깊게 새겨 두거라.”

“...알겠습니다.”

“이제 가거라. 내 마차에 기름일랑 묻히지 말고.”


난 그의 말에 따라서 마차를 떠나 걸어나갔다.


맞지 않는 면 옷과 가죽 배낭, 그리고 허리띠에 걸친 단검. 무엇하나 맞지 않았지만.


제일 맞지 않는 것은 따로 있었다.


“말을 타본 적이 없다?”

“그렇습니다.”


안장의 끈을 조이던 르노 경은 황당하다는 듯이 되물었다.


난 사실대로 말했다. 난 말을 타본 적도, 끌어본 적도 없다. 마차를 끄는 짐말에게 해맞이풀*(사람 머리 높이로 자라는 말먹이 풀)을 꺾어다 먹인 적은 있어도, 갈기에 손을 대본 적도 없다.


“너는 길리엔에서 태어난 하피네 제국인이지 않나?”

“그렇습니다만.”

“어째서 하피네 인이 말을 타본 적이 없다는 것이지?”


나는 할 말이 없었다.

내가 하피네 제국인인 것도 맞고, 하피네 인은 머리카락이 날 때부터 말과 소통을 하며 말과 살아온 기사의 민족이라는 걸 안다.


근데 정말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말을 타본 적이 없다.


르노 경은 푸석한 머리를 긁적이더니, 난처한 눈빛을 돌려보낸다.


“그럼... 어쩔 수 없군. 머지않은 거점까지는 태워가야겠어. 말들은 자신의 등 위에 오를 줄도 모르는 자에겐 가차가 없으니 말이야.”

“...신세를 지겠습니다.”

“그래야겠지. 나는 채비를 마치고 있을 테니, 마지막으로 근처를 돌아보고 오거라. 기억에 남는 이가 있다면 작별 인사도 남기고.”

“알겠습니다.”


그의 말에 따라 나는 잠시 마차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렇다고 작별 인사를 남길 이는 없었다. 있어봤자 내게 글과 지식을 알려준 현인인데, 그는 지난 겨울에 걸린 혀마름병*(침샘이 말라 혀가 굳는 독감)으로 급격하게 기운을 잃고 요양에 전념하고 있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건.


내가 지켰던 여자아이였다.


흉터가 남은 몸이 회복되고, 나는 제일 먼저 그 여자아이를 찾아보았다.


하지만, 마차들 어디에서도 그 여자아이는 찾을 수 없었다. 수발을 들던 여시종들조차 내게 알려주지 않았다.


노인의 말대로 나는 아쉬웠던 걸까.


잘 모르겠다.


두두두두-

두두두-


내가 생각에 잠겨 길을 걷고 있을 때.

작은 둔덕을 너머로 수십에 가까운 말발굽 소리가 땅을 두들겼다.


이례적인 소리에 이끌려, 수풀로 가려진 언덕 위로 올라가 보자.


“그 아이...”


그 여자아이가 보였다.


그리고 수백 명의 예복을 갖춘 이들과, 또 수백 명의 갑옷을 갖춘 이들이 천막과 깃발이 드리운 초원에 도열하고 있었고.


그들은 모두 여자아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나는 수풀에 기대어 청력에 집중했다.


그곳에선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그들 중 백색의 갑옷을 차려입은 자가 여자아이 앞에 무릎을 꿇는다.


“황녀 전하, 이곳에 황실의 광휘를 입은 신들이 당도했나이다. 백금 기사단, 뇌조 기사단, 병원 기사단, 회색곰 기사단, 청색 갈기 기사단, 순례 기사단, 적도 기사단, 도서관 기사단, 그리고 황금 말굽 기사단. 신실한 아홉 기사단이 전하의 부름에 답하였사옵니다!”

“사절기 의회의 4인의 수호자들께서는 자줏빛 씨족에 대한 변함없는 믿음을 천명하시었사오며, 전하의 신민들은 황실의 선정과 구원을 바라고 있사옵니다.”

“섭정 회의는 ‘다과회’를 위시한 공화파의 농간에 이끌려 제 신민들을 우롱하고 제국을 무너뜨리고 있사옵니다.”

“오직 황녀 전하만이 선대 폐하의 뒤를 이어 제국을 이어 나갈 수 있사옵니다!”


- 황녀 전하-! 나아가 주소서! 신들은 뒤따르겠나이다!


그들은 목청을 높여 읍소하고 있었으나.


여자아이는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표정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요...?”

“...선대 폐하께서는 황녀 전하께 모든 권위를 일임하셨사옵니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거예요? 언니는요? 다들...”


그 아이는 천천히 뒷걸음치고 있었다.

몸을 돌려 당장이라도 도망치려고 하지만, 주름진 손에 붙잡힌다.


망토를 덮어쓴 그 손의 주인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황녀 전하. 시기는 적기에 닿았사옵니다. 거병하시옵소서.”

“아르망.......”

“신 아르망 드 베넝과 대마법 원로원 또한 전하를 지지하오며, 영광의 길을 뒤따르겠나이다. 황실이 써 내린 7만 년의 계보의 뒤를, 자줏빛 씨족의 명예를 이어가 주소서.”


그는 내게 세상을 가르쳐준 늙은 현인이었다.


눈물을 터뜨린 여자아이는 고개를 어딘가로 돌렸다. 누군가를 찾듯이 말이다.


하지만, 그 아이가 찾는 사람은 없었는지. 이내 시선을 자신의 발밑으로 맞추고. 그 풀밭에 눈물을 흘려냈다.


아르망이라 불린, 그 늙은 현인은 아이의 손을 떠받들고 인장이 걸린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리곤, 앞서 나아가 초원이 울릴 정도로 커다란 목소리를 울려 퍼뜨렸다.


“신, 아르망 드 베넝은 대마법 원로회의 의장이오. 이사벨 시세닐 뮐레모리아 드 하피네 황녀 전하의 충직한 후견인으로서. 전하의 뜻을 고하리라. 너희 신민들은 자줏빛 왕좌를 되찾아 제국을 평화로 평정하라-!”


- 유일신 에덴세이시여! 이사벨 황녀 전하를 살펴주소서!


함성은 점차 커지며 평원을 메우고, 황금색 말이 그려진 깃발은 바람에 따라 맹렬하게 펄럭였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깨달았다.


왜 저 여자아이가 그리도 값비쌌는지를 말이다.




3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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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ㄴㅇ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