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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른바 범재凡材였다.


온갖 문파의 후기지수라 할 인물들은 죄다 검기상인의 경지에 이른 절정고수.


개중에는 검강을 일으키는 초절정고수 또한 즐비했다.


화산파에 입문하여 5년.


밥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수련에 몰입한 결과, 나의 경지는 일류였다.


범인치고는 괄목할 성장이라고는 하지만, 나와 동시에 입문한 이대제자들은 대부분 절정의 벽을 넘은 고수들. 황금세대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심심치 않게 그들의 검과 무공에 섞여나는 은은한 매화의 향기는, 그들이 제대로 된 화산파의 고수임을 증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장문인께서는 나에겐 충분히 고수가 될 자질이 있다며 장담하셨지만, 나는 여전히 일류무인이었다.


검을 휘두르고, 초식을 펼쳐보아도 매화향은 커녕, 나는 것은 실컷 까지고 짓무른 손에서의 비릿한 혈향 뿐이었다.


난 이 세계의 이방인. 알고 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굴러온 돌.


그런 내가 이 세상에 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쯤은.


그렇기에 화산파의 무공을 대성하고자 했던 것은, 일종의 자기합리화였다.


내가 이곳에 있어도 된다고, 나는 이곳에 어울리는 인물이라고 자기자신을 설득할 증거.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다시 봄.


흐르던 물이 얼고 녹으며 돌산인 화산에도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와중에도, 나는 꽃 한 송이 피어올리지 못했다.


"으아아아...!!!"


채앵ㅡ!


사형. 사저. 그리고 사제가 피어올린 매화가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혈매화가 되어 쓰러져갔음에도 여전히ㅡ


"겨우 이 정도인가!"


"크읏..."


나는 매화를 피어올리지 못했다.


불타오르는 민가와 고통받는 이들의 비명.


사술에 빠져 사경을 헤매이고 계신 장문인을 위해 사파들로부터 문파를 지키는 것도 이제는 너무 힘들었다.


텅텅 비어가는 단전과 부들거리는 다리.


지친 숨과 부러진 손가락 탓에 마구 흔들리는 검 탓에 펼칠 수 있던 초식조차 흐지부지되어갔다.


포기하고 싶었다.


이것도 저것도. 모두 다. 내려놓아버리고 싶었다.


이젠 쉬고 싶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풀리고, 눈이 사르르 감겨져왔다.


그리고 내게 내려쳐지는 적의 검.


이제 끝이구나. 포기할 때였다.


"으... 아아아...!!"


흐려져가던 정신을 일깨운 것은 작은 기합이었다.


"사매...!! 위험...!!"


부모가 큰 빚을 져버린 탓에 팔린 뻔 한 것을 데려온, 작디 작은 소녀.


그 소녀가 새하얀 무복을 휘날리며 검을 잡고 달리고 있었다.


분명 아직 검을 가르치지 않았음에도, 자신보다 클지도 모르는 검을 들고 달리는 그녀의 모습엔 한 점 망설임이 없었다.


굳게 말아쥔 손. 그리고 서서히 붉게 달아오르는 검신.


채앵!


내 목이 떨어지기 직전, 내 앞을 막아선 것은 작디 작은 소녀의 등이었다.


나와 몇살 차이나지 않을 텐데도, 내 앞에선 그녀의 등은 너무나도 작아보였다.


"사매...! 으윽..."


경지가 일천한 그녀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기에, 막아보려 몸을 일으켰지만, 뼈가 부러진 듯한 격통에 자꾸만 힘이 빠졌다.


"사저... 아니, 언니...!"


너무 큰 힘의 차이에 소녀의 팔은 마구잡이로 떨려댔고, 검기가 실린 검에 소녀가 든 검은 천천히 잘려나가고 있었다.


"여기는... 내게 맡기고... 얼른 도망쳐...!"


채앵ㅡ!


뚜둑.


"으읏..."


소녀가 있는 힘껏 검을 밀어내자, 살짝이지만 거리가 벌어지며 호흡할 틈이 생겼다.


온 힘을 실어 밀어낸 탓인지 그녀의 왼쪽어깨가 빠진 듯 덜렁였다.


"나를... 구해준 건 언니였으니까... 이젠 내가 구할 차례야..."


소녀가 그리 말하며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조금씩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입가가 말하는 것조차 힘들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너한텐... 너무 위험ㅡ"


"그건...!! 내가 정하는 거야 언니... 그러니까, 나만 믿고 도망쳐줘..."


소녀는 그리 말하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며 걸어갔다.


만용이다.


자신과 격차가 심한 상대와 무리하게 싸워 목숨을 잃을 뿐인, 손해밖에 없는 싸움이다.


"으... 아아아아...!!"


"어째서...!"


그런데도 그걸 알고 있음에도 그녀는 어째서, 싸울 수 있는가.


어째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릴 수 있는가.


[ 무武는 뭐라고 생각하느냐? ]


화산파에 처음 입문했을 적, 장문인이 내게 물었던 질문이다.


나에게 무武란 사람을 해치는 도구. 혹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호신.


그저 그뿐이었을 뿐이었다.


처음엔 나를.


나아가서는 나의 친구와 동료를.


더 나아가서는 문파와 사제, 사형들을 지키기 위한 그저 무기.


"으아아아...!!"


그런 내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지킬 대상이라고만 생각했던 소녀가 검을 휘두르며 이길 수 없을 상대에게 돌진하는 것이었다.


그저 지키기 위해서.


자신보다 강한 포식자에게 덤비는 만용.


다만, 나는 보았다.


그녀가 굳게 말아쥔 검에서 조금씩 피어오르는 검염劍炎을.


그리고 내 코에 스치는, 향긋한 매화의 향을.


그녀의 경지에선 보일 수 없을 기예를, 화산파의 무공의 진수를, 그녀는 잠깐이지만 한계를 뚫으며 보여주었다.


"잡스러운 기예를...!!"


채앵ㅡ! 


"흐윽...!!"


처음부터 끝까지 소녀를 가지고 놀던 사파의 고수의 일검에, 소녀가 들고 있던 검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검날의 파편이 뺨에 스치며 피가 흐르고, 탈골된 한 쪽 팔에 얼굴을 찡그렸지만 그럼에도 소녀는 멈추지 않았다.


부러진 칼날. 짧은 사정거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소녀는 계속해서 달려들었다.


그녀의 단전이 텅텅 비어 더 이상 검염이 피어오르지 않고, 삔 발목 탓에 더 이상 뛰기도 힘들어졌음에도 계속.


"언... 니..."


"크하하하! 아주 신파를 찍는구나!"


이윽고 모든 기력이 탈진되어 내 품에 쓰러질때까지, 소녀는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그녀의 몸을 불살랐다.


그제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무武란..."


사람을 해치는 도구도, 자기 자신을, 다른 이를 지키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는 것을.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용기. 그 자체가 무武라는 것을.


그런 당연한 깨달음을, 나는 이제서야 알 수 있었던 것인가.


이제 내가 할 것은 간단했다.


그저 손잡이를 잡아, 열 뿐.


"으읏..."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내공으로 보조해라.


다리가 떨려온다고? 검으로 지탱해라.


내가 할 것은 그저, 검 손잡이를 잡아 들어올릴 뿐.


그런다면, 내 자신의 용기가ㅡ


내 자신의 불꽃이ㅡ


검을 붉게 타오르게 할 테니.


검을 들어올리자, 검신을 둘러싸는 붉은 불꽃.


화산파만의 검기, 검염劍炎.


그리고 은은히 나기 시작하는 매화향까지.


화산파의 비전무공.


"화염신공火炎神功. 염매화炎梅花."


그리고 산산히 부서지는 마음 속의 벽.


나는, 오늘. 


절정이라는 벽을 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