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화



저는...”

 

 

나는 누워있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나리께서 끼고 계신 가락지를 바라옵니다제게 끼워주시옵소서.”

 

 

나리는 한번 너털웃음을 짓더니나를 한번 바라보시고는 표정을 굳히셨다.

 

이내 재물을 탐하려 한 말이 아님을 깨달으시곤 잡고 있던 손을 그대로 거두셨다

 

나는 이불 속으로 숨어들어간 나리의 손을 다시 잡았다그 손에 맥없는 거부의 움직임이 담겼지만그의 움찔하는 움직임이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의 손을 더 세게 붙들었다

 

 

나리를 잃어버리면저는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부모도 버린 몸천한 저를 사랑으로 거둔 것은 오직 나리뿐이셨습니다살아서도죽어서도 나리를 따르겠나이다.” 

 

 

이내 미약한 저항을 포기한 나리는 체념하듯이 말했다.

 

 

“...내게 가락지는 없어짝을 잃어버린 것은 가락지가 아닌 그저 반지일 뿐이야...”

 

그렇다면 제가 나리의 손을 꼭 쥐고 있겠습니다제 손가락이 나리께서 주신 반지의 짝이 될 테니까요그러면 되겠지요?”

 

 

그 말에는 그도 마음이 동했던 모양이다

 

 

죽을 사람이 산 사람의 발목을 잡아서는 안 되는데...”

 

 

그러나 착잡함은 완전히 거두지 못한 채로.

 

 

그렇게... 하자꾸나...”

 

 

서방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이 끼고 있던 가락지를 끼워주셨다.

 

 

...

 

 

그게무슨... 소리냐돌아...가셨다고...?”

 

돌아가셨습니다저만이 외로이쓸쓸하게 돌아가신 서방님의 곁을 지켰지요.”

 

 

나의 주인님나의 서방님곽환의 죽음을 전해들은 그 여자는 충격받은 듯이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아아...! 아아...!!”

 

 

그 모든 것이 가식일 뿐.

 

여기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방에서 온갖 향락을 즐기다가어떻게든 부고를 듣고 단숨에 달려온 것이겠지.

 

전 부인이라는 인연을 이용해서 가문의 부스러기라도 어떻게든 얻어먹으려고.

 

흘리는 눈물도산발이 된 머리도그것을 쥐어뜯는 손아귀도모두 슬픔을 가장한 것일 뿐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면눈앞에서 절규를 내뱉는 이 여자의 슬픔이 진심이라 느낄뻔 했다.

 

나는 한껏 경멸을 담아 그 여자에게 내뱉었다.

 

 

그만 일어나시지요여기선 보는 눈도 없습니다.”

 

 

그렇게 뱉은 말속에는 가시 정도가 아니라칼날이 담겨 있었다

 

마치 숭고한 기도를 방해받은 신실한 사제처럼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은 채그 여자는 표독스런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네년,..”

 

그런 천박한 말로 저를 부르지 마시지요마님.”

 

 

그러자 그 여자는 더욱 노호하여 거세게 비난을 퍼부었다.

 

네 이년어딜 감히 그 따위 언사를...”

 

마님께 감히 저는 그럴 말을 할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왼손을 들어올려 보였다.

 

그 손가락에 끼워진 그 이와의 징표가 선명히 빛을 반사했다

 

그 여자의 손가락에도 빛바랜 같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원래는 그 여자와 나눴던 가락지였겠지물론

 

악귀같은 얼굴로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던 그 여자의 얼빠진 표정이 볼만했다.

 

서방님께서도 그걸 보셨다면조금은 통쾌하셨으려나...?

 

 

이제서방님의 정실은 저니까요.”

 

아니다... 낭군께서 그럴 리가 없다... 거짓말이다... 사랑하시는 낭군님이...”

 

 

그리고는 내 손을 붙들었다

 

공허한 텅 빈 눈으로나를 노려보는 그 년은손톱이 살을 찢어 피가 날 정도로 그 손을 거세게 쥐고 있었다.

 

 

네가네가... 내 낭군님을 홀렸구나내가 없는 틈을 타서낭군님의 마음을 홀려서...” 

 

 

거칠게 손아귀에서 벗어난 손은그대로 공중에서 휘둘러졌다

 

살이 거세게 부딫히는 소리가 나면서 그 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더러운 입으로 내 서방님을 능욕하지 마!!”

 

 

이제 와서 정실 부인인 척사랑하는 연인을 보낸 비탄에 빠진 여인을 연기하는 것이 구역질날 만큼 역겨웠다.

 

분노로 몸이 덜덜 떨릴수록 이상하게도 머리만큼은 차가웠다.

 

 

서방님께서 그렇게 병마에 싸우며 고통스러워 할 때넌 뭘 했어네가 그분의 피가래를 받아내고씻을 힘도옷을 갈아입을 힘도 없어하는 그 이의 수발을 조금이라도 들어보기라도 했어하다 못해 외로워하는 그분의 손을 붙잡아주기라도 했냔 말이야!!”

 

 

빨갛게 달아오른 뺨을 한 손으로 쥔 채로 그녀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난 낭군님을 위해서이 세상을 헤집고 다녔다마침내 그를 구할 약을 구해왔단 말이다...”

 

그래그럼 그 잘난 도술인지 주술인지로 이미 돌아가신 서방님을 다시 살려내 봐살려내서 당신이 구한 그 약으로 서방님의 불치병을 고쳐보란 말이야만에 하나 그러면 당신이 했던 그 멍청한 말을 전부 믿어줄게아니어짜피 서방님과 함께 하려했던 몸뚱아리당신의 말이라면 따르는 충직한 하인이 돼줄게.” 

 

 

그녀를 저주하듯 내뱉었건만그 말은 내게도 박히는 비수였다.

 

서방님이 없는 세상이란 것을 내 스스로 말해버린 것이니까.

 

돌아올 수 없다이미 강을 건너버렸다.

 

 

서방님께서는 어떤 유산도 남기지 않으셨으니까당신의 몫도내 몫도 없는거야...”

 

 

비릿한 만족감으로 얻는 소소한 쾌락도 그런 크나 큰 슬픔을 덮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더 이상 이 년에게 분노할 가치조차 느낄 수 없었다.

 

바닥에 꼴사납게 엎어져 있는 그것을 뒤로 하고 나는 말했다

 

 

해가 뜨기 전에 조용히 사라져서방님에 대한 조그만한 애정이라도 남아 있다면 말이야.”

 

 

더 이상도망친 전 부인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싶었다

 

주저앉아 있던 그녀는조용히 일어섰다

 

그녀가 입을 열었을 때풀죽은 목소리가 들릴 줄만 알았다.

 

그렇지만그녀의 입에서는 섬뜩하고 엄중한 경고의 말이 들려왔다

 

 

서방님을 살려낸다면네 모든 것을 바치겠다고...?”

 

 

약간이나마 그녀에 대한 동정을 느꼈던 것이 허황된 것이었다

 

 

헛소리 그만하고 사라져!!”

 

 

그러나 그녀에게서는 뜻하지 못한 소리가 들려왔다.

 

 

하하하하....”

 

 

충격에독설에 결국 실성해버린 것일까?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상함을 느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네년이네 입으로 스스로 그렇게 약속한 거다?”

 

 

달빛에 비친 그녀의 모습은 귀기어려서바로 방금 전까지 어렸던 분노를 잠시나마 잊고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녀는 내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말했다

 

 

낭군님의 씨앗을 네가 품고 있구나.”

 

 

그 여자는 소름끼치는 미소로 나를 응시하며 말했다.

 

 

네년도 쓸모가 있겠어.”

 

 

그녀는 왔던 것처럼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졌다한바탕 악몽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

 

 

그날 그녀가 한 말 때문이었을까.

 

서방님을 따라 죽으려는 마음을 접었다

 

혹시나그분의 씨앗이 내 몸에서 자라고 있다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스스로에게 느껴진 태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서방님께서는 아무것도 남기시지 않으셨다는 그 말은 거짓말이 되었다.

 

그 분께서 남긴 보물은이만큼 훌륭하게 잘 자랐는걸.

 

 

어머니도와주세요!!”

 

 

갑자기 들려온 아들의 다급한 목소리에나는 문을 열었다

 

그 이를 닮은 아름다운 얼굴.

 

나와 서방님의 사랑스러운 아들.

 

그리고아들의 뒤에는...

 

몇 년 전 축객령을 내렸던그 여자가 서있었다.

 

 

오랜만이네.”

 

 

그녀는 음산한 미소와 함께아들의 머리칼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기억하고 있겠지네년이 했던 말.”

 

... 아들한테서 손 떼!!”

 

그럴 수야 없는걸낭군님을 살리면 무엇이든 하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녀는 한번 키득거리며 웃더니아들의 목을 감싸 안고는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낭군님과 많이 닮았네다행이야네년을 별로 안 닮은 것은.”

 

무슨 생각인거야...?”

 

있지네년은 가볍게 농담하듯이 말했지만사람을 살리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이미 썩어버린 살과 몸을 되살릴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살아있는 사람의 육신을 빌린다면 몰라도.”

 

 

그리고 그녀의 감싸쥔 손이 불안해하는 아들의 얼굴을 쓸어내리며 그녀는 말했다.

 

 

약속을지켜야지?”

 


...

 

 

봄이 오고 꽃이 피었습니다낭군.

 

마치 무릉도원의 경치와 같지요.

 

추울 일 없는 낙원과도 같은 곳이니 말이에요.

 

기억이 나지 않으신가요?

 

괜찮습니다.

 

어짜피 전부 한바탕 봄의 꿈일뿐이니까요

 

생각하지 말고소첩을 꼭 안아주소서.

 

그래도 적어도 이제 하나는 잊지 않으시겠지요.

 

소첩과 맺은 백년의 가약이 낭군의 손가락에제 손가락에도 있으니 말이에요.

 

이 아이의 이름이요?

 

굳이 이름을 붙일 것이라도 있나요?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근본없는 아이니까 말이에요 후훗...

 

방향이라...

 

여자의 이름치고는 섬뜩한 느낌이에요.

 

어쩐지 정숙한 남편을 홀릴 요부의 이름 같기도 하니 말이에요.

 

서방님의 뜻을 따르겠나이다만...

 

소첩이 저 바다 너머에 사는 이민족의 말을 조금 알고 있나이다

 

그 방식대로 읽으면 어떨지요?

 

아아역시 서방님이옵니다.

 

그렇다면 이 아이의 이름은...

요시카(芳香)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아아이제는 기침 하실 필요가 없나이다

 

건강한 몸에이 청아의 보살핌이라면 어떤 병도 함부로 서방님의 몸을 침범하지 못 할테니까요.

 

부디앞으로도 강녕하시길

 

낭군의 곁에는...

 

오직 이 청아만이 있을 테니까요




요시카랑 곽청아 관계가 이랬으면 어땠을까 싶어서 한번 적어봤음


+ 후반부 약간 수정했음. 수정 전에 재밌게 봐준 얀붕이들한테는 미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