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화




이곳에 그녀를 지켜줄 사람은 없다.


그녀의 군단병들이 꼬나 쥔 창대는 충실한 방벽이 되어줄 듯하나, 촘촘하게 세워진 철창의 창살이다.


그녀를 비호 하는 기사들의 장검은 앞길을 막는 무엇이든 베어낼 듯이 날카로우나, 그녀를 위협하는 적을 위하여 뽑히지 않는다.


시민들의 함성은 그녀의 선치와 번영을 바라는 염원이지만, 동시에 불신과 원념이 뒤섞인 비명이기도 했다.


그러한 모순으로 치장된 거대한 개선식에서.

자줏빛 예단에 몸이 감싸여, 흰말 위에 올라 선대들의 이름을 본뜬 가도를 가로질렀다.


길고 긴 개선식이 마지막 직선 행로에 닿자.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성문 앞에서 말몰이가 우렁차게 성벽으로 목소리를 드높인다.


- 제국의 강직한 수문장은 들으라! 이사벨 시세닐 뮐레모리아 드 하피네 황녀 전하께서 이르시니! 너 수문장은 수도성의 성주이자, 황궁의 지배자, 제국의 주인께 성문을 개문하라!


- 황녀 전하께서 뜻하시오면! 그리되리라-!


마지막 남은 자줏빛 씨족의 핏줄이자.


반역자 수백만의 피로서 내전을 종식시키고 하피네 제국을 재건한 냉혈의 황녀.


이사벨 황녀의 앞에서, 굳게 닫혀있던 아홉 성의 강철 대문이 차례대로 열렸다.


부우우우-!


- 황녀 전하께서는 영원을 누리시리라!

- 유일신 에덴세께서 전하를 보우하리!

- 전하께서 이끄는 제국 군단은 무너지지 않으리!


이사벨의 흰말이 발굽을 안으로 들이밀자.

수만에 달하는 신민들이 앞다투어 황녀와 그녀의 군단을 향하여 만세를 부르짖었다.


- “““ 우리는 제국의 적을 가로막는 산맥이오!

우리는 황제 폐하의 적에게 몰아치는 파도이니!

그분의 군단인 우리를 경배하라! ”””


군단병들이 합을 맞춘 경쾌한 군가가 쐐기처럼 바람을 가르고, 흩날리는 황실의 깃발이 선봉이 되어 나간다.


모두가 하늘을 떠받들 듯이 황녀의 가장 영광스러운 시대를 찬양할 때.


“.......”


이사벨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머리 위에 흩날리는 오색의 종이 조각은, 불타고 남은 잿가루인 걸까.


나팔수들이 힘차게 불어대는 승전 나팔은 시체 위를 맴도는 까마귀의 울음인 걸까.


그녀의 백성과 반역자의 피에 물든 홍색 융단은 가도를 타고 올라.

이 길고 긴 귀향길의 종지부를 찍는 것일까.


“.......”


이내 이사벨의 말은 거대한 궁전 앞에 도달했다.


금박과 대리석이 벗겨져 까만 벽돌만이 터를 이룬 황궁.

그 궁정의 내전 안으로 들어서자.


한 날의 신기루처럼 함성 소리는 침묵했다.


고요했다.

귀를 간질이는 이명이 들리지 않았다.


응접실은 휘황찬란한 휘장이 기둥을 자줏빛으로 칠했고, 그 사이를 걷는 나의 구둣발 소리만이 공허하게 울렸다.


“아....”


...드디어 집에 돌아왔다.


“아하하...”


그녀의 입가는 잘은 미소를 지으며 웃었고.

눈가는 또르르 흘러내리는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울었다.


열 해를 세어, 겨우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그녀 곁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하하하하-”


그래서 웃었다.


제관과 왕좌도, 군단과 황궁도, 승리와 명예도.


그리고 제국까지도.


과거에 잃었던 그녀의 정당한 권리를 되찾았건만, 정작 이사벨은 여전히 외톨이다.


“본녀를 지켜줄 자가 없는 게냐...”


이사벨의 목소리는 싸늘한 벽에 가로막히며 메아리쳐 되돌아왔다.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녀는 주먹을 불끈 쥐면서 또다시 소리쳤다.


“날 지켜줄 사람은 없느냔 말이다!”


- 카가가가각-!


그녀의 슬픔과 분노만큼이나 선명한 빛이 비산하더니.

내전에 무수한 갈래의 자색 마력이 가시처럼 돋아났다.


“왜... 아무도 없는 거야....”


그 자색의 빛무리는 이사벨이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자, 작은 알갱이로 쪼개지고 나뉘어 흔적도 없이 사그라들었다.


역시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사벨은 어두운 공허에 휩싸여 빛을 받지 못했다.


등허리까지 내려오는 금발 머리카락이 엉성하게 엉켜있고.

손으로 가린 자색 눈동자에는 희미한 안광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왔다.


신께서 직접 조각한 듯한 이사벨의 아름다운 미모는 망가진 미소만이 강박적으로 지어졌다.


망가진 현악기가 똑같은 비음을 되풀이하듯이. 이사벨은 똑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나를... 나를 지켜줄 사람이 필요해.... 군단도 기사단도 원로원도.... 전부 믿을 수 없잖아.... 날 지켜줄 구원자가....”


내전은 끝났다.

남은 건 한 줌의 잿더미가 된 황실뿐이니, 그녀를 거머쥐려는 권세와의 아귀다툼은 필연적이다.


홀로 남은 황녀, 이사벨은 늑대 떼에 둘러싸여 무력하게 유린당할 것이다.


그렇기에 이사벨은 자신을 지켜줄, 황실을 지켜줄 그녀만의 근위대가 필요했다.


과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칠만한 이가 남아있을까?


“있어....”


적어도, 이사벨은 기억 속에는 단 한 명이 존재했다.


“그 남자아이....”


공화파에게 황궁이 불타고 아버지와 언니를 잃은채 홀로 은거했던 유년기.


그 암울했던 시절을 곁에서 지켜주었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던졌다.


이사벨은 그 남자아이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아이가 죽음을 헤맬 때, 곁에 앉아 간절히 살아남기를 기도했으니까.


“힐트....”


이사벨은 남자아이의 이름을 곱씹었다.


늑대가 우글대는 숲속에서 길을 잃은 자신을 지켜주길 원하고 있으니까.




* * * * * *




“.......”


나는 길을 잃었다.


르노 경은 홀로 북 대륙의 산맥을 넘어 되돌아온 겨울과 맞서러 갔다.


나는 홀로 중앙 대륙으로 돌아가는 보급선에 몸을 싣고, 작은 항구 도시 ‘물망초 곶’에 상륙했다.


작은 봇짐과 내 검만 가지고 선착장에 내린 나는 한참을 그곳에서 맴돌았다.


내가 고개를 돌린 곳마다 길이 있었고, 그곳 중앙에 걸린 커다란 표지판의 목판마다 가리키는 행선지는 제각각이다.


지금껏 내 삶에는 절대적인 이정표라는 게 있었다.


내 이정표는 노예 상단의 마차 바퀴였고, 르노 경의 발자국이었다. 이제는 어느 곳에도 익숙한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생전 처음 길을 잃으니, 두려움이 엄습한다.


내 인육을 탐하며 달려들었던 마물들 앞에서도 떨지 않았는데.

난 지금 두려움에 어깨를 떨고 있다.


이정표에 앉아, 수평선 너머로 저물어 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구를 기다리고 있니?”


온화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머리 위에 바구니를 얹은 중년의 여성이다.

손톱에 낀 검은 흙 때와 치맛자락을 실로 덧대 수선한 부분이 보면 평범한 주민 같았다.


“내가 장사를 할 동안 계속 해안을 보고 있었잖니.”

“.......”

“후후.... 나는 장터에서 생선 매대를 운영하는 메델이란다. 네 이름은 뭐니?”

“힐트입니다, 메델 부인....”

“힐트, 남자다운 이름이네.”


여인은 선착장 장터에서 생선과 말린 채소를 파는 메델 부인이었다.


내가 선착장 표시목에 앉아, 배들이 드나드는 해로만 빤히 보고 있던 걸 특이하게 여기셨다.


“저 바다 너머에서 누가 오길 기다리고 있니?”

“...예.”


부인의 물음이 워낙 당황스러워서 대답을 고르지 않고, 그냥 그렇다고 했다.

나는 르노 경의 지시를 기다리는 것과 같았으니까.


부인의 눈매는 살며시 가로로 그이며 서글서글한 웃음기를 머금는다. 그 눈웃음에선 따스한 온정이 느껴졌다.


“해가 진 바닷바람은 얼음장처럼 시리단다. 밤을 보낼 침소는 마련해뒀니?”

“아뇨.”

“그러니.... 그럼, 우리 집에서 하룻밤 정도 묵는 게 어떠니? 마침 우리 맏이가 쓰던 방이 남았거든.”

“.......”


뭐라 대답이나 거절하기도 전에, 메델 부인이 손이 팔을 꼭 잡아 이끌었다.


선착장과 도시를 지나, 지붕이 낮은 가옥이 해안가에 줄을 지은 마을.


‘갈매기 부리’에 도착했다.


“괜찮으니 사양 말고 들어오렴.”


기와지붕이 쌓인 가정집에 다다르자, 메델 부인이 손짓하며 안으로 들어오라며 재촉한다.


문 옆에 놓인 생선 걸이에서는 말린 대구들이 바다 내음을 풍기고, 뱃사람의 액운을 내쫓고 만선을 기원하는 노란색 천이 흩날린다.


집 뒤편은 텃밭에는 소먹이 풀과 청 채소를 기르며, 둥근 항아리마다 식초에 삭힌 어육과 채소가 담겨있다. 불을 땐 아궁이 옆은 장작과 마른 짚이 수북이 쌓여 있다.


흔한 마을의 흔한 집이었다.


“다녀오셨어요, 어머니. ...근데 부두에서 뭘 또 낚아 오신 거예요?”


문 안으로 들어서자, 귤빛 눈동자를 가진 여자아이가 빗자루로 바닥의 먼지를 쓸고 있었다.


“이 아이가 부두에서 덩그러니 앉아 있었지 뭐니? 밤에 묵을 곳이 없는 것 같아서 하룻밤만 재워 주려구.”

“몸집을 보기에는 전혀 아이처럼 보이진 않는데요....”

“무슨 소리니? 덩치가 이렇게 커도 얼굴이 이렇게 여린데?”

“하아....”


그 소녀는 빗자루를 손에 들고 다가오더니, 고개를 겨우 올려 표독스러운 눈빛을 쏘아 보낸다.


“너 이름이 뭐라고?”

“...힐트.”

“으으.... 이 흉터들은 뭘 하다가 생긴 거야? 군인은 아닌 것 같은데...?”


소녀는 내 몸에 남은 전투의 흔적을 보더니 미심쩍은지 자꾸만 캐묻는다.

이런 험한 자국들이 맘에 들지 않은 걸까.


팔이며 배며, 내 몸을 자꾸 만져대는 것이 그리 기분 좋진 않았다.


한참을 내 몸을 덥석덥석 잡아보다가, 기분이 풀렸는지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온다.


“난 루리에라고 불러. 우리 집에서 머무는 동안은 아무것도 부수지 말고.”

“루리에- 너보다 어린아이에게 쌀쌀맞게 굴지 말렴.”

“엔리 오빠보다 머리 네 개는 더 큰데요? 얘 덩치를 봐요!”

“너도 참.... 보고도 모르겠니? 씻을 물을 받아주렴. 엄마는 방부터 봐야 하니까.”

“무슨 식객한테 목욕까지.... 아- 알겠어요.”


루리에는 메델 부인이 눈살을 찌푸리자, 그제야 날 풀어주었다.


난처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루리에는 특이한 여자아이였다.

나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다가온 또래의 여자는 처음이니까.


“내 딸이 격식이 없어서 미안하구나.”

“그리 신경 쓰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우리 딸이 종종 저러거든, 특히 자기랑 비슷한 나이대 남자애들이라면 더 주책이 심해져.”


- 다 들려요!


“...여튼 네 집처럼 편하게 쉬고 있으렴.”

“감사합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호의였다.

어느 여관이나 오두막을 가더라도, 대가를 지불하지 않고 난롯불을 쬘 수는 없다.


하지만 메델 부인은 흔쾌히 집에 초대해 난로 옆자리에 나를 앉혔다. 그리 풍족한 집안이 아닌데도 말이다.


난 그런 궁금함을 역시 참을 수 없었다.


“갈매기 부리 마을의 전통이라고 보면 된단다.”

“.......”

“우리 마을은 북 대륙으로 향하는 순례자가 지나는 마을이거든. 전통적으로 순례자들을 돕게 되면서, 이방인들을 집안으로 들이는 게 익숙하단다.”


오랜 세월을 이어온 전통.

그것이 남을 돕는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전통이란 한 사람의 계보와도 엇비슷했기에 이해할 수 있었다.


“숭고한 전통이군요.”

“얘야..., 우리는 그저 힘을 보태는 사람들이란다. 이방인들은 항상 우리의 안녕을 빌며, 위대한 고행을 대신해 주니까.”


메델 부인은 미소와 함께 내 호기심을 풀어주었다.


난 주방에서 분주히 요리하는 부인을 바라보았다.

긴 철판에 반죽과 생선을 굽고, 둥근 솥에는 토끼 다리를 발라 소금에 절여둔 살과 밭에서 딴 채소와 향채 등을 넣고 찌개를 끓인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루리에가 내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목욕 준비가 됐으니까 따라와.”

“응.”


그녀의 뒤를 따라 후덥지근한 증기가 피어난 욕실에 들어갔다.

따뜻한 물으로 씻는 건 오랜만이다.


북 대륙에서는 물가의 얼음을 깨서 씻거나, 아예 얼음 그대로 몸에 문질러서 씻었다.

그마저도 물이 있어서 가능했지, 산맥 너머의 용암 대지에서는 잿닢갈대*(척박한 땅에서 자라는 내열성 식물)로 몸에 핏자국과 검은 때를 긁어내는 것으로 목욕을 대신했다.


“몸솔이랑 비누는 여기 있고. 수건은 욕실 바깥에 둘 테니.... 어- 너 지금..., 뭐.... 꺄아! 뭐하는 거야앗!!”

“응?”


루리에는 대뜸 내게 소리를 지른다.


내가 또 뭔가 잘못했나?


“너, 너 왜 내가 보고 있는데 옷을 벗어!”

“씻어야 하니까.”

“이... 이 변태야! 여자 앞에서 알몸을 보여주는 게 취미야?”

“취미는 아니야.... 이게 잘못된 거야?”

“잘못이고 뭐고.... 너 정말 자각이 없니?”

“응.”


나는 남에게 알몸을 보여주는 게 잘못인지 정말 몰랐다.

누군가에게 부끄럽지 않았고, 지적받지도 않았으니까.


루리에가 빨간 앵두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길길이 화를 내는 걸 보고 눈치챘다.

누군가의 앞에서 옷을 벗는 게 잘못된 행동인가보다.


“미안, 다시 입을게.”

“됐어! 이미 다 보여줘 놓곤.... 나가 있을 동안 얼른 씻기나 해!”

“응.”


한바탕 화를 낸 루리에는 욕실 문을 쾅- 닫으며 빠져나갔다.


그렇게 혼자가 되자, 나는 더운물이 욕조 위까지 찰랑이는 탕에 몸을 담궜다.


노곤해지는 몸을 풀면서 몸솔으로 몸을 문지르는 동안에도, 문틈에서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아무래도.

긴장감이 풀리면서 일어난 착각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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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려진 상식과 달리 중세시절의 개인 목욕 문화는 로마시대 이후로도 존속되었습니다.

인구가 밀집되고 상수도가 건설되지 않은 일부 도시를 제외하면, 자연적으로 수자원을 안정적으로 공급 받을 수 있는 도시나 마을 공동체에서는 허브를 이용한 욕탕 문화도 잘 발달했었죠. 비누는 말할 것도 없이 모든 문화권에서 잘 사용됐습니다.

음식도 마찬가지로 전쟁이나 흉작으로 인한 피해를 입지 않는 이상 곡물과 채소 나무 열매나 콩, 그리고 육류와 해산물과 같은 재료로 매우 풍족하고 다양한 먹거리를 즐겼습니다.


그리고 정식 연재를 바라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건 계획 중이긴 합니다.

아무래도 이 소설이 350편 분량으로 잡은 거라 커뮤니티에서 연재를 계속 이어나가긴 힘들겠죠ㅋㅋ...

자세한 건 나중에 알려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