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고도가 충분히 내려가자 나는 낙하산을 풀고 소총을 난사했다. 때아닌 날벼락, 아니 총알 비에 놈들이 혼비백산하며 흩어진다.


타다다다당!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불시의 기습을 받은 적들이 쓰러졌다. 두 놈을 처리하니 곧 땅에 발이 닿았다. 


아쉽게도 슈퍼 히어로 랜딩 같은건 없다. 그 짓을 했다간 온몸의 뼈가 박살날걸? 대신 몸을 둥글게 말고 바닥을 구르는 편이 더 좋다. 


난 이걸 전신 골절당하고 나서 깨달았지. 아 그립네. 생각해보면 그것도 다 추억이야. 아니면 좆같은 기억을 추억이라고 자위하는 건가?  


"기습이...!" 


뒤늣게 한 녀석이 다른 이들을 보고 외친다. 어깨에 찬 견장을 보니 분대장인가? 다들 똑같은 복장에 방독면까지 쓰니 구분하기가 힘들단 말이지. 


 놈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머리에 총알 한 방을 갈겨줬다. 그리고 그 이후는 쉬웠다. 당황한 놈들은 별다른 저항도 못 하고 추풍낙엽처럼 쓰러질 뿐이었다. 


타타탕!


컥...!   


마지막으로 서 있는 놈까지 쓰러트리니 피아 식별기에 뜬 신호는 나 말고 없었다. 


더 이상 적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무전기를 켰다. 


"여기는 코멧 4, 구역 장악 완료."


-알았다 코멧 4, 집결하겠다.


보고를 마치고 나니 시간이 좀 남았다. 


그래서 남는 시간 동안 시체를 하나씩 뒤졌다. 몇몇은 아직 살아있는지 손을 꿈틀거리며 총을 쥐거나 나를 밀쳐내려고 했다. 


뭐 죽어가는 사람의 완력 따위, 총도 필요 없다. 칼로 머리를 후벼 파주면 그만이니까.


"어디 있더라... 여긴가... 아 찾았다." 


분대장 놈의 군장을 뒤지다 내가 찾던 걸 발견했다. 투명한 지퍼백에 든 하얀 가루. 


나는 거기에 묻어있는 피를 닦고 파우치에 곱게 챙겨 넣었다. 


이게 뭐냐면 전투 마약이다.


이놈들이 속한 제국은 은하 남부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을 만큼 거대한 국가다. 그만큼 군대도 비대했다. 


하지만 몸이 크면 움직임이 굼뜨기 마련이다. 사람 네명만 모아나도 그중 하나는 병신이라던데 이 새끼들은 그만큼 폐급도 많겠지.


즉결 처분이나 정신 교육도 한계가 있다. 그렇다고 하나하나 공들여 세뇌하자니 그건 예산과 시간이 문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해답이 바로 이 논 드레드 전투 마약이다. 감정 억제제와 통각 차단제의 역겨운 블렌딩으로 탄생한 궁극의 전투 자극제.


 이걸 한번 들이키면 이제 막 성인이 된 어리버리한 청년도, 모두에게 환한 미소를 짓는 마을 최고 미소녀 꽃집 아가씨도, 24시간 장난칠 생각만 하는 개구쟁이 꼬마도 냉혹한 살인 병기로 돌변한다. 


설령 가족들을 찔러 죽이라는 명령에도 망설임 없이 따르며 심장이 멈출 때까지 전투를 이어 나갈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약! 뭐 보는 쪽은 끔찍하지만.


몸이 반토막 났는데도 팔로 땅을 기며 총을 쏘아대는 모습은 지금도 가끔 꿈에 나온다니까.


물론 나는 이걸 빨 생각은 추호도 없다. 부작용을 생각하면 입에도 대기 싫었다.


이건 일종의 부수입이다. 암시장의 약쟁이들에게 내다 팔면 꽤 짭짤했으니까. 


총기도 마찬가지다. 접철식 개머리판과 기계식 조준기가 달린 화약식 화기, 온갖 하이테크 무기들이 즐비한 이 시대에선 보기 힘든 올드한 컨셉의 무기다. 


물량이 많아서 그리 비싼 가격은 못 받겠지만 그래도 다섯정이면 여자 끼고 물 한발 뻴 돈은 나왔다. 


아 나는 이제 못하지만. 애초에 계속 남자로 남았어도 할 생각 없고. 


저벅저벅


"또 개짓거리하고 있냐? 그거 군법 위반이라는 거 알고 있을 텐데? 자꾸 그러면 회사에서도 커버 못 쳐줘."


"저도 먹고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또 윗선에서 복지 줄인다, 퇴직금 삭감한다 지랄하는데, 노후 준비는 스스로 해야죠."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건성 건성 대꾸했다. 


짜증나네 좀 늦게 오지. 평소에는 굼뱅이 같으면서.


 직장 상사가 좆같은건 여기나 거기나 어떻게 똑같냐?


아, 군 상관이 아니라 직장 상사다. 우린 정규군이 아니라 용병이었으니까. 


우리뿐만 아니다. 내가 속한 나라, 연합의 군 병력 대부분은 용병이다.


생각해보면 연합도 꽤 웃긴 국가다. 어떤 나라가 군대를 민영화한단 말인가? 


기원을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나? 제국의 억압과 통제에 반발한 대기업들이 독립해서 만든, 인간이 아닌 오직 돈을 위해 돌아가는 성간 단위 기업 국가. 그게 연합이다.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에나 나올 설정이지만 여기선 그나마 정상적인 축에 드는 국가 중 하나라는 게 참 우습구만. 


뭐 초능력자에 스페이스 나치, 미친 살인 기계 군단, 우주 닌자도 있는데 그 정도면 평범한 건가?  


"개소리 그만하고 이동할 준비 해. 거물이 떴다."


"거물? 이딴 변방 깡촌에 말입니까?"


이 행성은 자원도 뭣도 없는 돌덩어리일 뿐인데. 이 전투도 그냥 제국과 접경 지점이라 그냥 기습적으로 찔러본 거고.


그런데 거물이라고? 이거 못 참지. 지하에 비밀 기지라도 있는건가? 


"대체 어떤 놈입니까? 총통이라도 뜬겁니까?"


나는 대장에게 놀랍다는 투로 말하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으어어..."


좀비가 내는 것 같은 신음과 함께. 아래 있던 시체가 내 팔목을 텁 잡았다. 


놈이 나를 노려본다. 생각해보니 놈들도 이름이 따로 있었다. 


임모탈, 


공식적인 칭호는 아니고 우리가 제국 보병들을 부르는 멸칭이었다. 


말 그대로 죽지 않는 자들, 방독면과 롱코트로 개성을 가리고 오직 명령에만 복종하는 고기 인형들. 


10명을 죽이면 100명이 그 100명을 죽이면 1000명이, 똑같이 생긴 놈들이 계속해서 몰려온다. 


죽이기는 어찌나 힘든지  머리가 반쯤 날아가도 비틀거리며 걸어온다. 참 어울리는 별명 아닌가? 


"죽... 배, 신... 자..." 


깨진 렌즈 안, 핏발이 선 눈이 나를 노려봤다. 뭐 감흥은 없다. 이런 일을 한 두 번 당해봤어야지.


"거 어차피 곧 뒤질 거 곱게 가세요. 지랄하지 말고."


상대가 내 말에 눈을 부릅뜬다. 내 말에 반응한 걸까? 아니면 타이밍이 좋았던 걸까? 뭐 후자겠지. 


"배신, 배신자에게... 죽음을..." 


"지랄. 내가 왜 배신자야? 난 애초에 그쪽에 발붙인 적도 없구만." 


배신자? 난 여기서 태어난 적이 없는데 뭐가 배신자라는 걸까? 


씨발, 갑자기 예전에 살던 세계의 기억이 떠올랐다. 


이딴 좆같이 섹시한 몸이 되기 전, 이런 미치광이 같은 미래 세계가 아니라 그나마 평범했던 시기의 나.


이젠 기억도 잘 안 난다. 내 원래 이름도, 원래 가족도.


나를 정의하던 모든 게 잊혀졌다 생각하니 화를 참을 수 없다. 내가 원해서 이딴 미친 세계에서 개고생 중인 것도 아니고. 


"이 개 씹새끼가..." 


 빡쳐서 놈의 손을 쳐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권총을 뽑아 놈의 대가리에 대고 쐈다. 


탕... 탕...!


몇번이고 총을 쏜다. 놈이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그대로 굳어버릴 때까지. 


사격이 멈춘 건 내가 한 탄창을 다 비워내고 나서였다. 


"후... 씨발년이. 애미가 없나? 아니면 애비가 여러 명인 건가?" 


이놈들 엿 같은 게 한 번에 안 뒤진단 말이지. 정말 이름값 톡톡히 한단 말이야.


"... 놈들을 상대할 땐 확인 사살을 철저히 해라. 죽고 싶냐?" 


"안 죽었으면 된 거 아닙니까? 제가 저것들에 당할 머저리도 아니고. 게다가 그런 말은 좀 도와주고 나서 하면 안 됩니까?" 


"어이가 없군. 너 같은 녀석이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남았는지 원... 그리고 이렇게 혼자서 잘 해결할 텐데 뭐 하러 널 도와줘?"


애미, 그냥 자기도 뒤질까 봐 무서워서 그런 거면서 핑계는. 


애초에 부대원중 여자는 나 혼자인데 좀 살갑게 대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지 부인 앞에서는 설설 기면서.


씨발 생각하니까 빡치네. 맨날 막내라고 갈구고, 여자가 벼슬이냐고 갈구고. 누구는 이딴 꼬라지로 살고 싶어서 사냐고요. 


그냥 밤에 몰래 가서 덮친 다음 사진 찍어서 와이프한테 보내버릴까? 


아 그건 좀 너무 갔나. 첫 경험인데 저런 놈이랑 하는 건 좀... 게다가 임신하면 어떻게 해. 여기 육아 휴직도 안나오는데. 


"다 요행과 행운이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그 거물이 뭡니까?" 


"궤도 위성이 워 메이커를 식별했다. 북쪽의 숲에 숨어있다더군." 


대충 화를 죽이고 능청스러운 척을 했다. 


내 말에 놈은 품에서 데이터 패드를 꺼내서 내게 보여줬다. 


워 메이커라? 게다가 이 근처네?


"휘유~ 거물은 거물이군요. 그런 대단한 양반이 여기까진 무슨 일이랍니까?" 


 제국은 무지막지한 소모전을 주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다른 국가들은 전선에 투입하기도 버거운 전력을 하나의 전장에 투입하고, 소모한던 소리지. 


기술력이 떨어지니, 아니 떨어지는 건 아니지만 그걸 전 군에 보급할 인프라가 부족하니 넘쳐나는 인구빨로 밀어붙이는 거다. 


게다가 무식하게도 대규모 전투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모두 평등하게 1계급씩 특진한다. 운 좋으면 사관 학교에 눈길 한번 안 주던 이등병이 별을 달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물론 그 전에 대부분 뒤져나가겠지만, 솔직히 견장에 별을 다는 것 보다 하늘 위의 별을 따는 게 더 쉽겠지.  


하지만 그 하늘 위의 별 따기를 해낸 이들이 바로 워 메이커, 전쟁이 만들었고, 이젠 전쟁을 만드는 이들이다. 


"좋군요. 좋아." 


"뭐가 좋아 미친놈아. 우리 다 뒤지게 생겼구먼."


내가 손을 싹싹 비비자 보스가 내게 핀잔을 줬다. 애미, 과장은. 생각보다 겁이 많단 말이지 이양반. 생긴건 고릴라면서.  


그나저나 그냥 소규모 분쟁인 줄 알고 가볍게 생각했는데 그런 거물이 왔을 줄이야. 잡으면 성과금을 챙겨 주려나? 아마  현상금도 걸려 있을 텐데. 


"그런데 왜 이런 곳까지 온 겁니까? 여기 지하에 뭐 슈퍼 로봇 같은 거라도 있나?" 


"개소리 작작 해라. 그건 아직 윗선도 모른데.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그쪽에 강하했던 베타 분대가 쪽도 못 쓰고 당했으니까."


"그럼 저희끼리만 갑니까? 다른 팀은요?"


"일단 공수부대 중에선 우리 팀만 간다. 대신 정규군 특수 작전단이 처리한다더군. 우리는 길만 터주면 된다나?" 


"또 그 새끼들입니까? 허 참. 후방에서 꿀이나 빨던 놈들이..." 


"어쩔 수 없지 않나. 아니면 걔들이랑 맞짱이라도 뜰 거냐?" 


특수 작전단 애들이랑 드잡이질이라? 미친 소리네. 내가 속한 공수 PMC도 일반 땅개들보단 정예 취급이지만 정규군은 급이 다르다.  


정규군, 그중에서 특수작전단은 우리 같은 PMC 나부랭이가 넘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까. 


정부가 군대를 민영화했다 하더라도 정부 소속 군대가 없는 건 아니다. 


기업 간의 분쟁이나 반란을 방지하겠다는 명분 하에 기갑, 함대, 항공 전력은 정규군이 독점하며 민간 기업들은 철저한 제한 하에만 사용할 수 있었다.


민수용 경항공기나 소형 전술 차량을 하나 사려고 해도 수많은 서류들을 결재해야 했으니까. 아니면 정부에서 돈을 주고 파일럿이랑 기체를 대여하거나. 


뭐 이건 경쟁 기업에 대한 테러나 암살, 심지어 두 대기업이 이권을 두고 국지전을 벌인 사건 때문에 그런 거긴 하지만.


하여튼 PMC 따위가 아무리 잘나가봤자 정규군이랑은 비비지도 못한다.


은행을 뒷배로 둬 재정이 빵빵한 뱅크 가드나 5대 전쟁 기업도 정규군 앞에선 어린애 장난질일 뿐이니. 


하지만 그 정점은 km 단위 함선들이 즐비한 성간 우주군도, 수십 톤의 강철 괴수 무리도 아니다. 


연합의 모든 사람이, 어쩌면 외국인들까지 정규군의 정점은 특수작전대라고 할 거다. 아마도. 


온갖 강화 수술과 최신형 가젯, 심지어 그 비싼 파워 아머로 무장한 전장의 스페셜리스트들, 단 한명 만으로 역사를 바꾸는 이들. 


그만큼 대우나 관리도 각별했다. 강습 보병 한명에게 들이는 비용만 따져도 호위함 한 대 값이었으니까. 


"쯧. 언제 출발합니까?" 


"개리랑 윈스턴이 복귀 중이다. 걔들 오면 출발하지. 


나는 결국 혀를 차고 일어났다. 그놈들이 나선다면 뭐 일은 쉬워지겠네. 전차도 숫가락 하나로 뚜따하는 놈들이니


 챙겨둔 마약과 총기류들은 모두 내버려 둬야 했다. 걸리면 귀찮아지니까. 


그놈들 유도리가 1도 없는 FM의 화신들인데다 정부 소속이다. 결렸다간 귀찮은 꼴이 될 게 뻔해.  


뭐 위치는 기억해 놨으니 끝나고 챙겨가면 되겠지.


"그래서 그 자식 목에 걸린 현상금은 얼마입니까?" 


"글쎄? 누군지를 몰라서. 그래도 한 50억은 될걸? 연합 크레딧으로."


"쏠쏠하네요. 그거 그냥 걔들 주기 아깝지 않습니까? 어차피 정부 소속이라 안에서 돌고 돌 텐데."


"너... 설마? 또 그 짓을 할 생각이냐? 난 안 갈 거다. 니 미친 짓에 어울려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에이. 그러지 마시고. 제 몫의 3분의 1은 대장 드리죠." 


대장이 넌더리가 난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돈으로 꼬셨다. 어차피 3분의 1을 빼도 내겐 꽤 큰 돈이었으니까. 


"후... 알겠다. 애들 오면 물어보지." 


대장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난 그게 연기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사람 참 뻔해. 아마 내 돈까지 떼어주겠단 말을 듣고 이미 결정했겠지. 그도 그렇게 그는 돈에 미친 연합의 사람이었으니까.


***


소중한 사람들의 희생과 자신의 행운만으로 여기까지 도망쳐왔다.


이제 곧 자유다. 연합과 접촉하고 항복한다면 보호를 받을 수 있다. 기나긴 추격전의 끝이 보였다.


하지만 그 요행도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나무 뒤에서 숨어서 슬며시 머리를 내밀었다. 고개가 나무 밖으로 나오자마자 탕! 하고 사격이 날아왔다. 


"큭...!" 


반사적으로 고개를 머리를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간 총탄이 헬멧의 머리 위로 긴 흔적을 남겼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충격에 비틀거리면서도 이를 꽉 깨물었다.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전투복의 센서와 감지기도 모두 먹통이다. 


마치 목이 졸리는 거 같은 느낌이다. 숨이 턱턱 막히고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이딴 곳에서..." 


돌파구가 없어 답답하고, 결말이 이미 확정됐다는 사실에 짜증 나고, 무력한 나 자신에게 화가 났다. 


수많은 전장을 헤쳐나왔다. 죽을 뻔한 고비도 수없이 넘겼다. 하지만 그 중 지금처럼 답이 안 보이는 상황은 없었다. 


"이대로 있다간 여기서 죽을 거야." 


마음을 다잡기 위해 혼잣말했다. 


답은 없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상대가 어디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결국 움직여야 하는 쪽은 나였으니까. 


지옥의 이지선다였다. 여기서 공포에 떨며 고사하던가 헛된 발버둥 끝에 도살당하던가. 하지만 뭘 고르던 배드 엔딩이라면 발버둥 정도는 쳐봐도 되겠지.  


우우 윙...!


전투복 발바닥의 추진기가 불을 뿜으며 내 몸을 허공으로 날려 보낸다. 탕 탕하고 연달아 날아오는 사격이 팔과 허벅지의 장갑을 스쳐 떨어트렸다. 


하지만 그 덕분에 탄도 계산기가 상대의 위치를 찾아냈다. 전방 400m 바위의 틈...!


"찾았다...!"


충격에 몸이 흔들렸다. 비행 궤도가 불안정해진다. 사격은 계속 날아오고, 추진체의 잔량은 앞으로 5초.


그 정도면 충분하다. 


챠캉!  카가가가강!


왼 팔목에 달린 덮개가 떨어지고 전체인 블레이드가 사납게 울부짖는다. 분자 분해 역장이 밝은 스파크를 튀기며 타오른다. 


상대는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당황한 걸까?


"끝이다!" 


그렇게 외치며 놈을 바위 채로 갈라버렸다. 쿠쿠 쿵 하는 소리와 함께 서로 기대어 있던 바위가 반으로 갈라져 떨어졌다. 


"뭐야... 너무 쉽잖아." 


뭔가 허무했다. 제국 권역부터 계속 달라붙었던 녀석이다. 함정을 파도, 맞상대해도 패주하기만을 반복해야 했던 녀석인데 이렇게 쉽게 죽었다고? 


"설마?" 


경험에서 나오는 날 선 감각이 경종을 울린다. 곧바로 센서들을 확인했다. 시체는 어디 있는 거지?


센서들이 잔해들 사이에서 총이었던 것을 찾아낸다. 하지만 시신은?


"시체가 없어? 그렇다면 어디에? 크윽...!" 


갑자기 몸이 붕 떠오른다. 목이 갑갑해. 기도가 막혀서 산소가... 


"나 원 참. 워 메이커라고 해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너무 쉽군." 


나무의 그림자 사이에서 하얀 바디 슈트를 입은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헬멧 한가운데 박힌 붉은 렌즈가 섬뜩한 색으로 빛난다. 


"설마... 컥...! 레이, 븐..." 


들어본 적 있었다. 초능력자만 모아서 만들었다는 총통 직속의 특수부대, 레이븐.


군 내부에서도 소문만 돌 뿐이고 타국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제국은 어째서 나를 잡기 위해 이런 괴물까지 파견한 걸까?


"워 메이커라는 이름이 울겠어 티라스 대령. 8집단군 최연소 장성도 별거 없네." 


독사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휘감았다. 달콤하지만 너무 달콤해서 기분 나쁜 목소리다.  


"나, 난...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 어."


억울했다. 너무나도 억울했다 25살 짧다면 짧은 삶을 오직 제국에 충성하는 데 바쳤는데 왜 내가 반역자 소리를 들어야 하지? 


어째서 내 동지들은 그렇게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거지?


"나도 알아. 당신이 배신자가 아니란 거."


"그렇다면... 왜, 나를...! 반역자로 몰아간 거지!" 


"정치라는 게 참 어렵거든. 뇌 텅텅 빈 병신이 가문 빨 하나로 날아오르기도 하고, 백 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를 너무 뛰어나단 이유로 잘라내야 하기도 하고. 뭐 본인 재능을 탓해야지 어쩌겠어?"


"겨우, 그딴...! 이유로...! 웃... 기지 마...!"


재능, 너무 뛰어나서? 고작 그딴 하찮은 이유로, 고작 정치 싸움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이 희생됐다고? 


어차피 우리가 소모품인 건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인류를 수호하기 위해선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렇기에 치열한 전장에서 최후까지 싸우다 죽길 원했다. 하지만 고작 그딴 하찮은 이유로 죽는다고?


"운이 없었다고 생각해. 뭐 죽이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뭐...?" 


"승승장구하다 몰락한 노예를 제 입맛대로 길들이고 싶어 하는 변태들이 많거든. 귀족 나리 중에선. 나도 취향이 특이한 편이지만, 참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꺽...!" 


경악할 새도 없이, 레이븐이 내 목을 더 강하게 조른다. 조금의 숨이라도 쉴 수 있었지만, 지금은 완전히 기도가 막혔다. 


-경고 치명적인 부상을 확인. 자극제 주입 중. 즉시 의무병을 호출하십시오. 경고. 


전투복의 AI가 삑삑거리며 경고음을 냈다. 곧 내장된 주사기가 허벅지를 찌르며 각성제를 주입한다. 


하지만 물리적으로 기도가 막혔는데 약물을 주입해서 무슨 소용일까? 오히려 의식을 길게 늘려 고통만 연장할 뿐인데. 


"좀 자고 있어." 

  

그 여자가 비웃는다. 분했다. 부하들의 복수도 못 하고 이렇게... 


아아... 정신이 점점... 흐릿해져서... 이대로 끝인가? 


모두 미안해요...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탕! 


의식이 완전히 암전하기 직전 날카로운 사격 음이 공기를 찢는다. 


그리고 몸이 허공으로 털썩 쓰러진다. 흐릿한 시아로 놈이 팔을 매만지는 게 보인다. 저 붉은 건 피인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


오 명중이다. 이 거리에서도 초탄에 명중이라니 난 역시 대단해. 


"후... 이제 어떻게 하죠? 뭔데? 왜 그래요?" 


내가 견착을 풀고 보스한테 말했다. 


엥 뭐야? 왜 굳어있어? 이 양반이 겁은 많이도 이렇게 질린 적은 없는데?


다른 이들도 그의 태도를 보고 당황한 눈치였다. 


"씨발... 레이븐이잖아... 우린 다 뒤졌다..."


보스가 그 하얀 녀석을 보다가 정말 망했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저게 뭔데? 대단한 녀석이야?


"대체 저게 뭔데요? 레이븐? 야. 니들은 들어 본적 있냐?" 


"아니."


"내가 너랑 동기인데 알겠냐?" 


나머지 둘한테 물어봤지만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하 씨 도움 안되는 것들, 보스도 걍 굳어 있을 뿐이고.


그래서 레이븐이 대체 뭐냐고 이 씹덕아....



난 안볼듯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