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투명한 액체를 담은 교보문고의 향이다. 글 하나로 평소에 관심이 가던 룸 스프레이다. 사람에게 쓰는 것이 아니나 서점에 갈 겸 하여 한 번 뿌려 보았다.


그곳의 향이 진하게 퍼졌다. 새 책을 사는 흥분, 새로운 서적을 향한 들끓는 마음이 솟구쳤다. 동시에 서점에 들어가기 직전에 한 번 더 뿌리며 허우대 멀쩡한 글쟁이의 꼴값을 떨었다.


모르는 타인의 대회 상품이라고 하지만 나의 선택으로 지른 이것은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서점 안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걷는다. 이곳은 나만의 갤러리아이다. 물욕의 유혹을 머금은 묘령의 여인들이 명품을 탐내듯 나 또한 얕은 지식과 백지에 적힌 활자를 바랐다.


'코스모스'가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었다가 이내 들어온 근대 문학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그곳에 평생 가볼 일 없는 프라하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쭉 읽다가 한국 근대 문학을 보고, 이번엔 철학과 자연과학을 결합한 책 등을 읽기 시작했다.


내 몸에 남은 향수와 함께 이곳에 점점 동화 되어 미친 듯이 독서를 했다.


깜빡깜빡... 전등이 별안간 몇 번이나 눈을 감았다 떴다. 별 싱거운 일이네.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스피커에서 나오는 평화로운 음악이 그제야 들렸다.


나는 보던 책을 내려놓고 있다가 갑자기 나는 짙은 살냄새에 놀라서 향수를 뿌렸다. 강렬한 향이었다. 생전 처음 맡아보는 향이었다.


뭐야? 누가 땀이라도 흘렸나? 요즘 더워지긴 했잖아.


어느 순간 책에 대한 욕구가 뚝 끊겼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발걸음을 돌리다가 우연히 눈에 들어온 '인권'이라는 책을 들었다. 간결한 문장과 격한 어구가 섞인 묘한 책이다.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주장에 대한 논거가 흐릿하나 말 하나에 담긴 뜻이 심장을 격하게 두드렸다. 내 기분이 이상하여 닫다가 곰곰이 글을 곱씹었다.


[모계사회를 중점으로 한 현 세태는 퇴락의 길로 들어섰다.] 이런 말이 존재 하는 지 의심스러웠다. 너무 기분이 이상해져서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들었다가 떨어뜨렸다.


"무거워..."


크다. 핸드폰이 크고 무거웠다. 심지어는 그립톡에 스티커로 장식한 밝은 노란색의 아이폰이었다. 내 것이 아니었다.


나는 아픈 손목을 보았다. 얇은 피부에 근육이 없이 마르면서 푸르스름한 정맥이 안에서 숨 쉬고 있었다.


내 몸이 아니다. 무릎에 힘이 풀린다. 얼른 핸드폰을 줍고 발길을 돌리자 모자를 푹 눌러 쓴 여인들이 나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묘하다. 왜... 그보다 크다. 모든 것이 크다. 그들은 각자 할 일을 하며 곁눈질로 뜸하게 볼 뿐이었다. 불순한 의도도 없이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그저 여자란 존재가 얼마나 크고, 매서운 것인가! 위압감에 허둥지둥 놀라서 큰 문을 열려고 하자... 기압의 차이로 잘 열리지 않았다. 어깨와 팔꿈치가 부러질 듯 아파온다. 이 간단한 것조차 힘겹게 미는 현상이었다.


나는 바닥과 내 몸이 낮은 걸 알 수 있었다. 다리에 힘을 주면서 서서히 밀었으나 이내 휙 열렸다.


"괜찮으세요?"


툭 튀어나온 거대한 골반, 마르지만 셔츠를 뚫을 듯한 가슴, 떡 벌어진 어깨와 두껍게 붙은 근육에 숨이 훅 막혔다.


"아 네..."


가슴팍에 붙은 명찰은 이곳의 점원인 것 같다. 그저 호의나 접객의 일부인데 잠시나마 공포가 들었다.


나는 얼른 튀어나와 밖을 관찰했다. 어느새 변해버린 거리에 땅거미가 드리웠고, 남녀란 존재가 완전히 뒤바뀐 세상이었다.


여성들은 남자의 가녀린 어깨를 잡아 자신의 남자를 자랑하듯 거리를 거닐었다. 남자들은 흐트러진 모습이 없을 정도로 단정한 모습이었다. 경찰들은 전부 여성이었으며, 거리에 붙여진 포스터엔 늘 남자들의 헐벗은 모습만이 있었다.


이게 무슨...?


잠시 벙쪄 있었다. 나는 길 한 가운데 서서 이곳의 광경을 지켜보았다.


머리 하나 차이. 20에서 30센티. 보통의 키 차이였다. 상당히 다른 점이 있다면 여성들은 규격화 되어 있었다. 옷이며, 머리의 형태며, 행동 거지마저 경제 활동이라는 중요한 일원으로 살기 위한 규칙이 있었다.


반대로 남자들이 화려했다. 굽, 화장, 액세서리, 다채로운 색감, 행동 패턴... 그들은 무언가 자신을 뽐내기 위한 존재로 변해 있었다. 외모는 제각각이었으나 애인의 사랑을 받는 남자들은 여리고, 귀여운 것이 보통이었다.


이게 말이 되는 걸까? 뭐지? 나 뭐 하는 거야?


남자의 육감.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단어였다. 문득 이상해서 가만히 서서 한참을 있다가 다시 걸었다가 반복했다. 그리고 셀카를 찍으며 뒤를 보는데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다.


사슬이 몸을 묶은 듯 나는 굳은 몸을 억지로 활력을 불어 넣었다. 멀리 보이는 지하철 7번 출구를 향해서 걸어갔다.


그러다 땀이 흐르고, 다리가 부러질 듯 아파오는 걸 깨달았다. 출구는 자꾸 멀리 도망 가는 듯 했다. 아... 내 몸으로 멀리 가는 건 불가능하다.


저 괴한에게 무슨 일이라도 당할 지 몰라 버스 정류장에서 오는 아무 버스를 잡고 올라탔다. 가슴에 닿는 곳에 버스 카드를... 왜 이리 높아?


자리를 텅 비었다. 나는 출구에 가장 가까운 쪽에 앉으려다 버스 손잡이를 보고 잡으니 겨우 닿는 수준이었다.


이해를 못 한 채 앉아 있으니 곧장 그 여자가 탔다. 검정색 마스크에 모자를 눌러 쓴 거구의 여인. 180? 정도의 키로 추정하나 덩치가 상당히 좋아 보였다. 후드티를 입고 있어 자세한 건 모르겠다.


이런 빌어먹을! 좋은 날 이게 무슨 일이야? 상품으로 뭘 보낸 거야? 그 향수를 뿌리고 이상해졌어. 여긴 어디야?


처음 보는 곳까지 버스를 타고 쭉... 쭉... 중간에 타는 손님은 아무도 없는 지옥이다. 당장 등 뒤에 앉은 여자를 볼 자신도 없다가 일단 벨을 누른 후에 냅다 뛰어 내렸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평소 버릇처럼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후회했다. 아 시발 여기면 더 위험한데?


골목을 우회할까? 단 3분도 달리지 못해 천천히 뛰다가 골목 반사경을 보았는데 바로 뒤에서 매섭게 달려오고 있었다.


"저기요!"


여고생이다. 너무 평범한 목소리에 안심하고 뒤를 돌자 검은색 거대한 괴한이 내 앞에 달려와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쳤다.


"헥... 헥... 아 겨우 잡았네. 왜 도망가고 그래요?"


불규칙한 담벼락의 벽돌이 등을 때린다. 체력 소진과 불안감으로 딱 굳은 나는 "사...살려주세요..."라고 본능적으로 말문을 텄다. 논리적 사고가 멈추며 생존의 본능만이 남아 있었다. 투쟁심이나 분노는 여자 앞에서 불가능이라면서 원초적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하아... 시발 잠시만."


여인은 나를 내려 놓고는 모자랑 마스크를 벗었다. 예쁘다. 청초했다. 동그란 두 눈, 긴 머리카락, 깨끗한 피부와 미소가 잘 어울릴 것 같은 미녀였다. 예상 외의 상대에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니 제가 당신에게 관심이 있어서... 개씨발. 여자가 남자 좀 좋아해서 쫓아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녀는 나에게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다. 저 외모라면 누구라도 사귈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세상은 얼마나 뒤틀려 있어서 저런 인물도 나라는 존재를 스토킹 하는 걸까? 거울을 보자. 흠... 많이 잘생겨지긴 했네.


"야! 뭐라고 말 좀 해봐."


호랑이의 앞발 같은 손이 어깨를 움켜 쥔다. 아프다. 눈물이 나올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나느...는....


"저... 저도 관심 있는데 번호... 주시겠어요?"


이런 선택을 했다. 무슨 용기일까?


내 말에 여자는 당황한 듯 보였다.


"어... 네. 저 이 번호인데... 혹시 이번 주 토요일 시간 되세요?"


뻔뻔하며, 기묘하다. 이 흐름에 나는 그저 몸을 맡길 뿐이었다.


"네. 영화도 좋고, 산책도 좋아요."


"아 근데 꽃가루 때문에 데이트 힘드시려나?"


이 여자는 뭐냐? 첫 연애하는 남자 같은 아둔함이다. 오히려 내가 기민해진 것 같았다.


"그럼 실내 데이트 하죠."


도리어 나에게 주도권이 몇 마디로 넘어왔다. 여인은 바보 같이 웃으며 자신의 번호를 건넨 후에 카톡을 하며 다음 데이트를 잡기 시작했다.


"그럼 이번 주에 봐요."


... 희한하다. 정말로 이런 세상에 온 것일까? 주머니에서 교보문고 향수를 꺼냈다.


한참을 보다가 투명한 부분을 가로등에 비춰서 보자 안에 숨겨진 글씨가 빛나며 나를 약올렸다.


[주의: 사용 시 사용자가 원하시는 세상으로 이동합니다. 돌이킬 수 없습니다.]


하하. 젠장. 책 보려다 책에 들어온 꼴이 되버렸네. 아까 보니까 여기 여자들 많던데... 확실히 재밌네.


- 대회 참가 후 일어난 일. 후기 끝 -

대회 상품 쩔더라. 암튼 재밌었습니다. 잘 사용 중이에요. 향 원하던 거라 너무 맘에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