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자의 부계는 송나라 왕실이나 상나라 지배층과 일치하는가


공자가 아버지 숙량흘의 집에서 길러지지 않았고 모친 안징재가 공자에게 숙량홀의 묘지가 어디인지조차 알려 준 적이 없다는 사실을 들어 공자가 숙량흘의 자식으로 인정받지 못했음은 물론 실제 혈연상의 아들도 아닐 것이라는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어떤 이들은 야합을 중국의 남방 여러 소수민족의 청년남녀들이 노래를 서로 주고 받은 후 마음에 드는 짝과 은밀히 밖에 만나서 행하는 프리섹스와 비슷한 개념으로 설명한 후 공자도 이러한 만남들 중 하나의 결과로 태어나 공자의 진짜 아버지가 누군지도 어머니 안징재도 모를 것이라 한다.


만일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는 상나라 수도 은허 발굴에서 순장자나 중소규모의 묘가 아니라 송나라 왕실의 선조라 여겨지는 상나라 지배층의 대규모 묘에서 피순장자를 고DNA를 측정하여 그 결과가 공자가계의 적통인 내공의 주요한 유형과 일치한다면 적어도 공자 혈연에 대한 하나의 오해는 해결될 것이다. 또한 사마천이 사기에서 언급한 야합이라는 단어의 개념에 대해서도 비교적 보수적인 다수 견해가 틀리지 않았다는 유력한 증거가 될 수 있다. 


<사기, 공자세가>에 의미심장한 구절이 있다. 공자가 죽기 일주일 전, 병문안을 온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자신이 꿈을 들려 주며, 해석을 덧붙인다. "天下无道久矣,莫能宗予.夏人殡于东阶,周人于西阶,殷人两柱闲.昨暮予梦坐奠两柱之闲,予始殷人也" 라고 말한다. 번역하자면, "천하의 도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나, 나의 주장을 들어주는 실현하는 이가 없다. 하나라 사람은 죽은 뒤, 관을 동쪽 계단 위에 두고, 주나라 사람은 관을 서쪽 계단 위에 두지만, 은나라 사람은 두 기둥 사이에 놓는다. 어제 밤 꿈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내 관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나는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음이다."


공자가 일생 동안 추구하는 것은 은나라를 멸망시킨 후, 서주 초기 주공이 세운 종법질서와 도덕(인의예지신)의 회복이었다. 주나라를 세운 세력은 이전의 은(상)나라가 행한 귀신을 숭배하고 점복을 즐겨하며 왕공귀족이 죽은 후 많은 노예나 포로를 순장시키는 등의 비합리적인 요소를 배척하여 인간 중심의 합리주의적 질서를 수립하고 이를 통치원리로 삼음으로써 여러 주변 세력을 포섭하여결국 상나라를 멸망시켰다. 공자가 임종하기 전에 그가 일생 동안 진력한 서주 초기 종법체계와 예법질서의 회복은 이미 불가능한 것이고 이는 일종의 하늘의 섭리로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하늘의 섭리를 이길 수 없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섭리를 부단히 직접적으로 듣고 그 명령을 따르고자 했던 은나라 사람들을 비판했던 자신도 결국 하늘의 섭리 앞에 선 외로운 단독자와 같음을 발견했다고 볼 수 있다. 


공자가 도덕의 모든 덕목 가운데, 가장 강조한 것은 "효"이고, 그가 "효"를 강조한 이유는 추상적이고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가까운 곳은 존재하는 구체적인 혈연에 대해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 한 자기 조상에 대한 사랑부터 시작해서 그 사랑의 대상을 사회와 국가로 확장하여 나갈 때만이 그 사랑 혹은 "仁"이라는 덕목의 진실성이 담보될 수 있다고 믿은 까닭이고 인간이 서로를 아끼고 존중하는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기초와 그 실행에 대한 준비작업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자애와 부모에 대한 자식의 효도로부터 비롯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유가의 가장 전통적인 처세의 원리는 그 시작이 항상 혈연에 대한 사랑에서 기초한다.


공자는 자신이 송나라 귀족의 후손, 즉 상나라 유민의 후손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그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상나라인들의 신념체계와 도덕을 부정한 주나라 주공에 일생 경도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자신의 근본을 부정하는 일생의 노력이 죽음의 앞에 서서 무망한 것임을 깨달았고 어쩌면 그는 일생동안 그가 설파한 논리들 속에 숨은 이러한 긴장을 꾸준히 의식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유가와 대비되는 사상가로서 노자와 함께 도가의 시조로 유명한 장자가 있는데, 장자는 은나라의 유민들이 위주가 된 송나라 출신이다. 송나라 사람들은 은나라와 마찬가지로 춘추전국시대 다른 국가와 비교해서 유달리 점복을 좋아했다고 한다. 장자의 일화가 기록된 <장자>에는 여러 차례 걸쳐 공자와 유가들의 유위(有爲; 허례허식)를 비판하고 조롱하는 내용이 나온다. 공자는 일생 동안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펼칠 기회를 찾고 계속된 좌절 속에서 끓임없이 이상을 펼치려는 노력했다. 그러나 공자의 이러한 분투를 장자는 은나라 사람들처럼 역시 신탁에 중요한 결정을 의지했던 그리스인들의 비극에서 hubris(신의 뜻을 거역하는 영웅들의 교만이나 자만)를 범하는 영웅들이 펼치는 가련한 몸짓과 같이 천도를 거스르는 행위로서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지적하였다. 그러므로 공자가 자공에게 죽음을 앞두고 한 고백은 마치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의 말로처럼 처연하게 들린다.   

    

만일, 상나라 지배층과 공자의 부계혈통이 일치한다면, 공자의 이 실존주의자의 독백과 같은 백조의 노래가 사실임을 유전자 분석으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고, 동아시아 세계의 가장 위대한 사상적 지주의 사상 분석에도 유용한 것일 수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2. 공인옥은 진실로 공자가문의 후손인가?


이 질문은 현재 공자의 후손으로 일컫는 이들이 과연 공자의 후손들인가를 해명하는 데 핵심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현재 공자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거의 모두 중흥조 공인옥으로부터 나왔다고 할 수 있고 이 공인옥과 이들 후손의 하플로가 이전 공자의 부계와 일치하지 않으면 현대 공자 후손들의 하플로로 공자의 부계하플로를 추단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밝히기 위해서 공인옥 이전에 공자 집안 후손 묘에서 나온 DNA가 있어 그것을 분석해서 현대의 공인옥 후손들의 DNA와 비교하거나 혹은 소수라도 남아 있다면 공인옥 이전에 분가해서 공자의 후손이라 자처하는 이들 중 비교적 가계가 확실한 이들의 DNA와 비교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라 할 것이다.

 

3. 공자가계의 남종과 북종은 부계 하플로가 일치하는가?


중국의 남북지역 한족들간의 항시적으로 있는 논쟁 중 하나가 누가 정통 화하족인가라는 문제이다. 북방지역의 한족들은 남방지역의 한족들은 남만의 후손들이 한족을 참칭한 것이라거나 혹은 북방에서 전란을 피해 남방으로 피란을 가서 거기에 원래 살던 남월이나 묘족 등에 너무 많이 혼혈되었기 때문에 정통 한족이라 부르기 어렵다고 한다. 반면 남방지역의 한족들은 북방의 한족들이 원래 한족이 아니라 흉노, 선비, 거란, 여진, 몽골 등 많은 북방의 야만인들이 정주하면서 한족으로 동화한 것이라 화하족의 정통은 자기들에게 있다고 한다.


공자가계의 남종과 북종 간에는 다행히 이런 불필요한 논쟁은 없는 것으로 보이나, 절강성 衢州(구주, 취조우)에 자리 잡은 남종은 여전히 자신들이 더 정통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는 북방의 산동성 곡부에는 공자 문묘는 있으나 공자가문의 적손이 없고 대만의 공수장은 공자가문의 적손은 맞지만 문묘가 없는 대신 자신들은 공자의 75대 후손으로 일찍이 1944년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에서 "大成至圣先师南宗奉祀官"을 역임했던 공상해(孔祥楷)도 있고, 문묘도 있기 때문이라 한다. 공상해는 공가남종의 대표로 원 세조 쿠빌라이 시절 북종에게 연성공의 작위를 양도했던 정통 공자가문의 적손인 공수의 후예이다. 


만일 공자가문의 적손이라 널리 공인된 북종의 후예로서 대만으로 이주한 공덕성의 아들인 공수장과 남종의 대표인 공상해의 자손이 유전자 검사를 받아서 그 부계 하플로가 일치한다면 적어도 공인옥의 후예로서 동일한 공씨 가문에서 갈라졌다는 역사적 사실은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로서 이들이 공자와 같은 부계 하플로인지는 다시 공인옥에 대한 진실검증 문제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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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복단대학에서 조사한 공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공씨들의 Y-DNA Haplogroup을 수집한 결과로


동아시아에서 가장 흔한 O3(현재 ISOGG 기준 O2)이 낮고 너무 분포가 다양하게 나와서 유력 후보는 아니고


가장 범위가 좁게 나온 C2나 Q1로 좁혀질 듯 한데 거기다가 서주의 분봉국인 붕국(현재의 산서성 윈청시로 관우의 고향이라고 전해지는 하동 해현이 바로 이곳)의 통치자 붕백(倗伯)의 유골 부계하플로가 Q1로 나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