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건 꿈이었다. 끝내 피해자를 구하지 못해 얻은 PTSD로 인해 발현된 악몽.


꿈속 세상에는 두가지의 집만이 존재했다. 불타는 초가집과 그에 대비되게 멀쩡한 나의 집.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집으로 돌아가면 꿈에서 깰 수 있다는 것을.


그러나 꿈에서라도 못 구한 사람들을 구하고 싶었다. 그래서 초가집을 향해 달려나갔다. 어차피 꿈이니까.


사실 이런 이유들은 달려가는 도중에 붙인 궁색한 변명이었다. 나는 불타는 초가집을 보자마자 달려나갔으니까.


내가 소방관이라는 것을, 사람을 구해야 한다는 의무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자 어느새 내 몸에는 방화복이 입혀져 있었다.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을 뚫고 들어가자 새까맣게 탄 시신들 가운데 덜덜 떨고 있는 소년이 보였다.


"누, 누구세요...?"

"허억... 허억... 구조대입니다."


동화책에서 보던 영웅이라기엔 투박하고 지친 모습이었지만, 그럼에도 소년은 그를 동화책의 영웅 따위보다 더 고결하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희망을 품었지만, 이내 쿠르릉 소리와 함께 입구쪽이 무너져내리자 더 큰 절망에 빠져버렸다. 


"여, 영웅 아저씨... 우리 어떡해요...?"

"..."


입구가 무너진 이상 두명 모두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무너진 입구를 뚫고 나가려고 해봤자 더 크게 무너지며 둘다 압사당해 죽고 말겠지.


한명이라도 살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방화복을 입은 상태에서 불이 꺼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


현대의 집이었으면 몰라도 초가집이라면 불은 금방 꺼질 것이다. 다만 한쪽은 불이 꺼질 때까지 버틸 수 없겠지만.


나와 소년 중에 한 명이 살아야 한다면 단언컨대 그건 소년일 것이다. 나는 소방관이고, 여긴 꿈이니까.


소방관은 자신이 입고 있는 방화복과 방독면을 벗어 소년에게 입혔다.


"아, 아저씨는요...?"

"전... 괜찮습니... 콜록!"


소년에게 방화복을 다 입힌 순간, 집에 붙어 기생하고 있던 불이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이상하다. 꿈일게 분명한데 왜 뜨거울까. 정신이 멍하다. 아, 여긴 꿈이 아니구나.


*


결론만 말하자면 환생했다. 기억을 잃지 않은 채, 불을 다룰 수 있는 불의 정령으로 말이다. 


전생과 달리 여성체로 태어난건 좀 그랬지만 그래도 화재로부터 사람을 구할 수 있는 건 만족스러웠다.


"불의 악마다!!"


동족인 불의 정령들이 불을 지르고 다니는 년놈들이라 화재를 진압하러 온 나까지 싸잡혀 욕먹는건 좀 슬펐지만.


게다가 큰 화재가 날때마다 내가 나타나서 그런지 내가 화재의 원흉이라는 오해도 사고 말았다. 덕분에 최근에는 불의 마왕이라는 이명도 붙어버렸다.


솔직히 간지는 나는데 마왕이라는 이명이 붙어버리니 용사 놈들이 틈만 나면 기습을 해와서 좀 많이 곤란했다.


이젠 용사의 용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날 지경이었다. 그런 내게 오늘도 용사가 찾아왔다.


"불의 마왕! 네년을 죽이고 아저씨께ㅡ"


내가 전생에 마지막으로 구한 소년이, 내가 준 방화복을 입고 용사가 되어서 말이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 난 네년 같은 악마 새끼를 본 적이 없다!"


오랜만에 만난 소년은 날 기억하고 있지 못했다. 사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한 거다.


평범한 인간, 그것도 남자였던 전생과 달리 지금은 불의 정령이자 여성체가 된 상태니까.


완전 180도 달라진 모습인데 알아보는 게 이상한거지. 그거와 별개로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지만.


"구조대... 라고 하면 기억이 나실까요?"


*


열린 결말 오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