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념글 모음

아스모데우스는 자기 계획을 낱낱이 풀어 설명했다.


별자리의 연회에 침입하는 방법.

침입한 후 자신들이 저지를 만행.

그 뒤의 여파까지. 


듣는 마왕들의 표정은 실시간으로 창백해졌고, 문장을 끝맺었을 땐 회담장은 그야말로 뒤집어진 상태였다. 


말도 안 된다고, 개죽음이라고. 호전적인 벨레드조차 난색을 표할 정도니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였는지 짐작이 가지 않는가. 


그러나 아스모데우스가 혓바닥을 놀릴수록 분위기는 반전되기 시작했다. 


- 그날, 창세신들이 없다는 정보를 입수했습니다. 적어도 개인의 무력으로 우릴 압도할 존재는 없겠죠.


신화급 성좌들의 부재.


- 에덴은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 어째서지!?

- 메타트론과 미리 말을 맞춰뒀거든요. 아가레스가 보증할 수 있습니다. 


에덴 최고위 천사의 배신.


- 그리고 그날, 외신들이 쳐들어올 겁니다. 전력이 분산되겠죠. 


이계의 신격의 침입.


생각지도 못한 정보들을 줄줄이 늘여놓으며 방청객들을 총체적 난국에 빠뜨린 아스모데우스가 혀로 입술을 훔치며 속삭였다.


- 이 정도면 해볼 만 하지 않겠습니까?


가히 사탄에 버금갈 간계였다. 산전수전 다 겪은 마왕들의 마음조차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게 만들었으니.


호전적인 마왕들은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았기에, 아스모데우스의 의견을 지지했다. 


보수적인 마왕들은 그럼에도 존재하는 리스크를 경계하여 아스모데우스의 의견에 반대했다. 


원탁이 분열되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논쟁이 격화되자 그 원인을 제공한 아스모데우스는 유유히 회담장을 빠져나갔다. 


'어처구니없는 녀석이군. 수습할 생각도 안 하고.'


말없이 이것저것을 생각해 보던 아몬도 얼마 안가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시끄럽군.'


과거 조용했던 오로성을 그리워하며, 아몬이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이 이어지고 유리창에 스며든 별빛이 길을 만들었다. 


그 끝자락에 한 여인이 있었다.


별빛을 받아 영롱한 색을 비추는 보라색 머리카락.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턱선. 작은 얼굴을 오밀조밀 채운 눈,코,입. 


절세미인이라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는 외모다. 하지만 아몬은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표현하자면, 그것은 마치 디저트가 빠진 코스 요리였다. 맛은 훌륭하나 뒤끝이 개운하지 않은, 반쪽짜리 만찬. 


[설화, '성좌 포식자'가 고개를 갸웃거립니다.] 


미식가인 아몬에겐 그것이 심히 거슬렸다. 


[지금 한가롭게 방송이나 보고 있을 땐가?]


거슬림은 아몬의 질문에 아스모데우스가 반응하면서 사라졌다.


[아직도 이야기가 안 끝났나요?]


눈매가 휘어지고 입술이 호선을 그렸다. 미소라 부를 만한 것이 자리 잡자 풍미가 제자리를 찾았다.


[설화, '성좌 포식자'가 군침을 삼킵니다.]


'때론 감정이 설화의 풍미를 좌지우지하기도 하는군.'


흥미로운 연구 주제라 생각하며, 아몬이 답했다.


[현재 진행형이다. 갈피를 못 잡고 있더군.]


[하여튼, 다들 유난이라니까요.]


[폭탄을 떨구고 내뺀 놈이 할 말은 아니다.]


[후훗, 그 말도 맞네요.]


아스모데우스가 방송창을 종료했다. 이유 모를 미소가 여전히 걸려 있었다. 저 녀석은 늘 저랬다. 아무도 감당 못 할 발언을 툭 던져놓고선 정작 자신은 태연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니, 아몬을 비롯한 마왕들은 그녀의 사고 흐름을 따라잡기 바빴다. 그 과정에서 알게된 마왕의 선견지명은 냉철한 아몬마저도 가끔 그녀를 경외하게 만들 정도로 뛰어났다. 


이번에도 다를 바 없었다. 아스모데우스는 피라미드의 꼭대기에서 자신들을 내려다보고 있었고, 아몬은 마계의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으니까. 


[설사 네 계획이 성공해도 후폭풍은 감당하기 버겁다.]


[압니다.]


[성운들이 들고 일어나겠지. 최악의 경우, 전쟁까지 벌어질지도 몰라.]


[그것도 압니다.]


상대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이제 와서 놀랄 것은 아니나, 황당한 감정은 숨길 수 없어 눈썹이 살짝 들썩였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순간의 망연함에 내뱉은 문장. 그것을 들은 아스모데우스의 기백이 날카로워졌다. 


심기를 건들였나. 


- 쩌쩌적. 


서열 6위의 격에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으나, 아몬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어떤 단어가 마왕의 심기를 건드렸는지'가 궁금했다.


감정도, 설화도, 운명도.

본래라면 아몬 앞에선 한낱 음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 오만하고도 엄격한 식탁에 음식으로 올라오지 않고 호기심의 관점에서 다루어지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스모데우스는 아몬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아몬이 답을 내놓기도 전에, 아스모데우스가 선수를 쳤다.


['이렇게까지 한다'라 . . . 반대로 묻죠, 아몬. 이렇게까지 하지 않고 <게티아>의 숙원을 이룰 수 있을까요?]


숙원. 


성운의 '결'을 갈취하고, 밤하늘을 어둠으로 물들이는 것. 


그것은 아몬이 한 번도 맛보지 못한 이야기이며, 동시에 죽기 전에 꼭 맛보고 싶은 설화였다. 


최고의 미식을 원했기에 아몬은 기꺼이 아스모데우스와 협력했고, 지금 이 자리에 이르었다.


그러니까 숙원은 아몬에게도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매사 엄숙한 아몬이 쉽게 입에 담지 못할 정도로. 


아스모데우스가 말을 이어갔다. 


[메타트론이 우리 편에 선 이상, 성마대전은 무의미합니다. 하염없이 '승'을 기다리는 것은 아가레스가 말했듯 성운들에게 대비할 시간을 주는 짓이나 다름없고요.]


[그래서 허를 찌르겠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의중은 이해했다. 다만, 네 계획엔 허점이 많아.]


아스모데우스가 어디 한번 들어 보겠다는 듯 팔짱을 꼈다. 아몬은 거리낌 없이 자기 생각을 밝혔다. 


[먼저 연회를 주관한 관리국이 네 행패를 가만히 보고만 있진 않을 거다.]


특히 도깨비들은 성좌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마왕 살해 시나리오도 정규 시나리오에 편입하는 자들이다. 


자신들의 고객을 지키기 위해 마왕들의 앞길을 방해할 놈들이지. 적어도 아군은 아니었다. 


[창세신을 비롯한 각 성운의 최고위 신들이 뒤늦게라도 강림한다면 손쓸 도리가 없겠지.]


신화급 성좌들 중에서도 하계에 관심을 가지는 이들이 많다. 그들 중 한 명이 강림한다면 전황은 순식간에 불리해진다. 


혹여 퇴로라도 차단 당할 시 전멸. 운좋게 살아남아도 사지가 멀쩡하게 붙어 있진 못할 것이다.


[무엇보다 마왕 놈들은 이해타산적이다. 너를 따르는 것도 거대 설화의 지분을 양보한 것에 대한 대가야. 마음속으론 너를 달갑지 않게 여기는 놈들이 태반이다.]


그 와중에 배신이라도 일어난다면? 

게티아는 자연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이처럼 아몬이 제시한 세 가지 근거 모두 합리적이었다. 아스모데우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몬의 주장을 정리했다.


[한마디로 설득력이 부족하단 말이군요. 마왕들을 이끌어낼 설득력이.]


[치명적인 약점이지. 네 계획은 마왕들 과반수가 참전한다는 전제 하에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 머릿수에서 밀리면 답도 없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겠지.]


제아무리 상성에서 밀려도 동격의 마왕 셋이 모이면 고위천사 한 명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 고만고만한 설화급 성좌들도 한데 뭉치면 처리하기 번거롭다.


고로, 아스모데우스의 계획이 성공하기 위해선 마왕들의 협력이 필수였다. 절대적인 숫자가 부족한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아몬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들을 움직일 자신이 있나?]


[설득해야죠.]


[어떻게?]


아스모데우스가 집게손가락을 들었다.


[일단 관리국은 걱정할 필요 없어요. 대도깨비도 막을 수 없는 거물이 그 자리에 있을 예정이라, 관리국도 꽤 애를 먹을 겁니다.]


[ . . . 설마 너, 외신의 가호를 받고 있나?]


[가호는 좀 그렇고, 대충 호의를 샀다 정도로만 퉁치죠.]


딱 봐도 이계의 언약 비스무리한 것을 맺은 듯한 그녀의 발언에 아몬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미치겠군. 어쩌다 이런 년이랑 엮여서.]


[유유상종이란 말 모릅니까?]


[머리가 아프니 잠시 닥치고 있어라.]


아몬이 아스모데우스의 설화를 넘보지 않는 이유가 이래서였다. 


잔뜩 뒤틀리고, 자극적인 향신료로만 범벅된, 먹으면 탈이 날 것 같은 설화.


[설화, '성좌 미식가'가 눈앞의 만찬을 거릅니다.]


먹게 된다면 아마 그날이 자신의 ■■, '최후의 만찬'에 닿는 날일 것이다. 


아스모데우스가 중지 손가락을 펼치며 말했다.


[다만, 신화급 성좌들에 대한 대책은 강구해야겠군요. 거기에 대해선 나도 확답을 내릴 수 없는지라.]


아스모데우스가 골머리를 썩히는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다만, 고민은 길게 가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등장한 남자가 복안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내게 대안이 있다.]


아몬과 아스모데우스의 시선이 역안의 남자, 아가레스에게 쏠렸다. 바닥에 떨어진 잿가루에 아몬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 전에 담배 꽁초부터 어떻게 해 보시오.]


[너무 깨끗하게 살면 건강에 해롭다.]


[변명말고 당장 치우시오.]


아몬의 닦달에 아가레스가 손을 휘저어 꽁초를 소멸시켰다. 나름 고위 마법인데, 쓰임새가 영 하찮았다. 


[어서 듣고 싶군요. 그 대안이란 것에 대해.]


담배 한 모금을 깊게 빨아들인 아가레스가 느긋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파티에 참석하기 위해 초대장이 꼭 필요하진 않아.]


.

.

.


위법적인 첫문장으로 시작한 이야기. 그 전문을 다 듣고 난 후, 두 마왕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그거, 바르바토스에겐 허락 받은 건가요?]


[허락이 필요한가?]


[ . . . ]


정말 순수한 되물음에 오히려 아몬과 아스모데우스 쪽이 할 말이 없어졌다. 아무튼, 실현 가능성만 따지면 괜찮은 그림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아스모데우스의 전략을 살리면서도 퇴로도 확보할 수 있으니, 이제 남은 것은 다른 마왕들을 설득시키는 일뿐이었다. 


그리고 이 방면에서 타고난 악마의 혓바닥이 아몬의 눈앞에 있었다.


[어떤가?]


[뭐, 좋습니다. 그 방법이라면 충분히 먹히겠군요.]


악마의 통찰력과 화술.

그야말로 환장의 조합이었다. 


물론 그사이에 낀 괴팍한 미식가도 단연 정상은 아니었다. 


[재밌겠군.]


앞으로 펼쳐질 인외마경에 기대하는 모습을 보면 말이다. 논의를 마친 세 마왕이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와중, 아몬이 문득 질문했다.


[그나저나, 연회는 언제 열리나?]


아스모데우스가 성류방송을 키더니 이내 대답했다.


[곧.]



*



아스카 렌과 대화를 마친 김독자는 파티장 한구석에서 사색에 잠겼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이 떠올린 문구를 되세겼다. 


- 그 순간, 그녀는 그 세계가 완전히 자기 손을 떠났음을 깨달았다. 


피스랜드의 창조주에서 만화가로 격하당한 아스카 렌의 특성. 


그녀는 자신이 만든 세계를 망각했다.  


그리고 피스랜드는 결말을 맞이했다. 


김독자가 주변을 살폈다. 야마타노 오로치를 물리친 화신들이 술잔을 손에 쥔 채 웃고 떠들고 있었다.


"카야, 맛있네!"

"아, 치사하게 누나만 마시기야?!"

"아직 덜 자란 꼬마들은 빠져."

"누나도 아직 미성년자거든!"


그들 틈새에서 재앙퇴치에 기여한 일행들 또한 술을 얻어 마셨다. 시스템상 외부인에 불과한 김독자 일행도 오늘만큼은 이 세계의 명예 주민이었다. 


문득 창밖을 바라보자, 외성 꼭대기에서 키리오스 로드 그라임이 자기 고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달빛을 머금은 청색 머리카락이 별하늘처럼 반짝였다. 피스랜드 세계관의 주인공다운, 고고한 위용이였다. 


김독자는 머릿속에서 자신이 바라본 경광들을 한데 엮어보았다. 


많은 이들의 희생이 있었으나 세계를 위협하던 재앙은 끝내 쓰러졌다. 살아남은 자들이 축배를 들고, 세상에서 가장 강한 소인이 자신이 지킨 고향을 바라봤다. 


그것이 '피스랜드'의 결말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게 전부인 걸까?'


이야기가 작가의 손을 떠났다고 해서, 피스랜드라는 세계의 시간이 여기서 멈추는 것인가?


아니다. 


'결말 이후에도, 소인들은 계속 살아갈 것이다.'


그것이 피스랜드의 에필로그였다. 멸살법과는 다르게 행복한 후일담이였다. 김독자는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오래간만에 멸살법의 마지막을 장식한 문장을 되세김질했다. 


-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은 살아남을 거란 사실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의미심장한 문장이었다. 멸살법이 완결된 이후 지구는 유료화되었고, 김독자는 멸살법을 읽은 덕에 살아남았으니까. 


하지만 김독자는 '살아남는 것'에 안주할 생각이 없었다.


욕심 많은 독자에게 제 인생의 전부라 할 수 있는 소설의 후일담을 볼 기회가 주어졌다. 여기에 혹하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가뜩이나 멸살법에 각별한 마음을 가진 김독자였기에, 그의 소원이 작금의 목표로 정해지는 것은 마치 사과가 아래로 떨어지는 것처럼 불가항력이었다. 


그는 이 소설의 에필로그를 보고 싶었다. 


적어도 독자의 마음은 그러했다. 


그렇다면 작가는? 


이야기의 창조주이자 등장인물에게 누구보다 많은 애정을 . . . 유중혁을 굴리는 걸 보면 가끔 애정이고 자시고 가학심 밖에 없는 사람처럼 보이긴 했지만, 아무튼 적어도 자신이 만든 세상에 애착은 있겠지.


그렇다면 그는, tls123은 현실이 되어버린 자신의 소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어쩌면 현재의 아스카 렌처럼 자신이 멸살법을 썼다는 사실조차 망각한 채, 첫번째 시나리오에서 죽었을지도 모른다.


자기 상상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현실에 끔찍한 죄악감을 느끼거나, 혹은 나처럼 현실에서 나타난 등장인물들을 보며 미약한 환희를 느꼈을 수도 있다. 


전부 추측인 까닭은 김독자가 tls123에 대해 아는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 . 굳이 찾자면 연결고리는 있지. 


tls123이 누군지 아는 듯한 마왕. 

원작과 제일 판이한 성격과 행적을 보이는 마왕. 

일단 부정했으나, 어쩌면 본인이 tls123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아직 남아 있을 정도로 작가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마왕.


아스모데우스.


'한번 만나 보고 싶다.'


조금만 이야기하다 보면 가닥이 잡힐 것 같은데. 하지만 정식으로 그녀와 마주하기 위해선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별과 일개 화신 사이엔 너무나 먼 간격이 있었으니까.


대신 작가와 독자 사이의 간극은 없다시피했다. 


"야, 여기서 뭐 하냐?"

"네가 알 필요 없어."

"쳇. 너 또 뭔가 이상한 짓 꾸미고 있지."

" . . . "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표절작가였다.


김독자가 묵묵부답으로 대응하자 한수영은 대화할 맛도 없는 놈이라고 궁시렁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머리를 살짝 기울이더니 속삭였다.


"정말 없냐?"

"없어."


[화신, '한수영'이 '거짓간파 Lv 6'을 사용합니다.]

['포커페이스 Lv 3'가 발동됩니다.]


"근데 포커페이스는 왜 쓰는데."

"너라면 안 쓰겠냐?"


의외로 답변이 되었는지 한수영은 더이상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창밖을 둘러보더니 지붕에서 비올라를 켜는 키리오스를 보곤 헛웃음을 흘렸다.


"무협옷에 바이올린이라. 진짜 정신 나간 설정이야."

"바이올린이 아니라 비올라."

"그게 그거지, 이 멸살법 오타쿠 새끼 같으니라고."

" . . . "

"하여튼, 세계관을 짤려면 최소한 납득이라도 가게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해야지. 기본이 안 되있어. 기본이."

"소설의 완성도가 그 소설의 원작자를 폄하할 이유는 될 수 없어. 나는 오히려 독창성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양산형 소설들보다 피스랜드가 더 좋은걸?"


적어도 좋은 이야기를 쓰기 위해 노력은 했잖아. 


김독자의 말에 한수영이 짜증을 부렸다.


"그놈의 양산형 타령 . . . ! 그리고 나 표절 작가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

"꿈에서 기억나는 걸 그대로 옮겨적었다는 변명을 내가 믿을 것 같아?"

"아니 씨 . . . 아! 답답해 죽겠네! 거짓간파로 확인도 해봤잖아."

"도망친 아바타에게 나눠준 기억이 그거라면, 거짓간파도 소용이 없겠지."

". . . 됐다. 내가 졌다, 졌어. 네 마음대로 생각해."


한수영이 술을 들이켰다. 김독자도 이미 몇모금 들이킨 상태였다. 취할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무심코 흘러나온 목소리에 '술김에 그랬다'는 변명을 붙이기엔 적절한 도수였다. 


그래서일까. 김독자는 흘러가듯이 말했다.


"작가가 이야기를 다시 쓸 기회를 준다는 건 무슨 뜻일까?"


표절작가긴 해도 작가니까. 독자인 자신보단 tls123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하지 않을까 싶어서. 생각없이 던져본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한수영의 무언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녀는 잠시 고민하는 듯 싶더니 전에 없던 진지한 말투로 답했다.


"자신이 적은 결말이 마음에 안 든게 아닐까?"

". . . 좀 더 자세히 설명해봐."

"왜, 글 쓰다보면 그럴 때 있잖아. 등장인물들이 살아 숨쉰다는 느낌. 분명 정해진 스토리는 없는 데 손이 제멋대로 움직여. 그렇게 관성대로 가다보면 -"

"가다보면?"


한수영이 관자놀이에 원을 그리며 말했다.


"태반이 맛탱이가 가버리지. 하지만 . . . 아주 가끔씩 작가 스스로도 놀랄만한 걸작이 나오기도 해."

"차이가 너무 큰걸?"

"원래 졸작과 명작은 종이 한장 차이야. 회귀자란 흔해빠진 소재를 갖고 누군가는 졸작을 쓰지만 천재 미소녀 작가님은 주간 조회수 1위를 먹지."


결국 자기 자랑으로 끝났군. 김독자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tls123은 원작의 결말에 만족하지 않았다는 추측은 상당히 그럴듯 했으니까. 


김독자가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난 한수영이 짐을 주섬주섬 챙겼다.


"가려고?"

"여기 있어 봐야 더 이상 할 것도 없어. 가서 배후 계약이나 마저 끝낼거야."


고양이처럼 날랜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준비를 마친 한수영이 연회장을 떠나며 덧붙였다. 


"나 간다. 필요할 때 아니면 찾지 마."


김독자는, 그녀가 완전히 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나는 하던 일이나 마저 해볼까."


[성좌들이 당신의 혼잣말을 좋아합니다.]


손에는 술잔이 들려 있었다. 방해꾼이 사라졌으니 보상을 독식할 차례였다. 


.

.

.


밤사이에 '여덟 개의 목숨'을 얻은 김독자는 일행들과 함께 지구 시나리오로 복귀했다.


그리고 본부에 도착하자마자 유상아에게 난데없이 구원교주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렇군요. 니르바나가 . . . "


유중혁의 표정이 굳었다.


"이번 회차까지 따라왔군."


"저도 몇 번 마주쳤는데 중혁씨를 찾는 눈치였어요."


"그 녀석은 내 동료가 아니다."


니르바나가 들으면 광분할 대답이라 생각하며, 김독자는 자신이 없는 동안 광화문 본부가 어떻게 대처했는지를 브리핑 받았다. 


"동훈이와 리카온 씨가 힘써 준 덕에 피해 규모를 줄일 수 있었어요."


듣자 하니 페러사이트에 감염되었다가 간신히 회복한 리카온과 세뇌 스킬의 후유증에서 벗어난 은둔한 그림자의 왕, 한동훈이 활약한 모양이다. 


"동훈이가 개설한 네트워크망으로 구원교주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추적했어요. 리카온 씨는 바람의 길로 구조작업과 서포트에 힘썼고요."

"서포트요?"

"유승이를 서포트 했어요. 저희 중에 구원교주와 정면에서 맞설 수 있는 사람이 유승이 밖에 없어서 . . ."


유상아가 면목 없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사실 추적조도 41회차의 신유승이 자원한 데다, 강함으로 따지면 그것이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다만, 정신적으로 많이 몰려 있던 사람에게 다시 의지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이를 눈치챈 김독자는 유상아를 위로했다.


"상아씨는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그러니 주눅 들 필요 없습니다."

"고마워요, 독자씨."


가늘게 눈을 좁힌 채, 두 사람을 지켜보던 유중혁은 천막으로 들어온 인물과 시선을 교환했다.


". . . 안녕, 대장? 그리고 예언자 아저씨."

"어 . . . 안녕."

" . . . "


41회차의 신유승과 유중혁이 서로를 눈에 담았다. 한쪽은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한쪽은 매사 무뚝뚝한 터라 대화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숨막힐 듯 어색한 공기를 깨뜨린 것은 뒤따라 입장한 정희원이었다. 


"뭐야, 언제 돌아왔어요?"

"방금 도착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요?"

"소환 위치가 랜덤이라 이곳저곳에 떨어졌을 겁니다."

"이런. 빨리 찾으러 가야겠네요."


그렇게 정희원이 41회차의 신유승을 이끌고, 텐트 밖으로 나서는 찰나, 대지가 진동했다. 


인상을 찌푸린 유중혁이 먼저 밖으로 나갔다. 


"김독자."

"왜?"

"사냥 시나리오의 난이도가 이 정도였나?"


김독자가 유중혁이 바라보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평선 너머로 거대한 괴수들이 쓰나미처럼 몰려들고 있었다. 


"미친. 다들 전투 준비!"

"전위는 어디 갔어!"


경악하는 화신들 너머로 등장한, 마치 범람의 재앙 때를 떠오르게 하는 군세에, 김독자가 침음을 삼켰다.


"아니 . . . 이벤트성 시나리오가 이럴 리가 없어."


뭔가 잘못됐다.


변고를 느낀 김독자가 부러지지 않는 신념을 꺼냈을 때, 유상아가 중요한 정보를 전달했다.


"사냥 시나리오는 이미 끝났어요. 하지만 그 뒤로 괴수들이 계속 몰려오는 이유는 저도 잘 . . . "

"일단 저 괴물들부터 처리하고 이야기하죠."


일행들은 최전방에서 괴수들을 상대했다. 같은 장소는 아니지만, 서울시 곳곳에 떨어진 일행들도 각자의 능력을 살려 무난하게 괴수들을 막아 냈다.


물론 개중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자랑하는 것은 41회차의 신유승과 유중혁이었다. 둘은 마치 서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합을 맞춰나갔다. 


그렇게 일련의 사투가 종지부를 찍었을 때, 재앙의 시발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서울시 화신들은 강하군요. 강해도 너무 강해. 그러니 밸런스 패치가 필요하겠죠?]


중급 도깨비가 손가락을 튀기자 시나리오가 갱신되었다.


<메인 시나리오 #8 - 최강의 희생양>

분류 : 메인

난이도 : S

클리어 조건 : 밀려드는 괴수들로부터 살아남으시오.

제한 시간 : -

보상 : ???

실패 시 : 사망 


화신들의 이목이 집중된 것은 추가 클리어 조건이었다.


1. 서울돔 화신의 절반이 사망할 것.

2. 서울에서 가장 강한 '한 명'이 사망할 것.


화신들의 시선이 방금까지 미친 듯이 괴수들을 학살하던 41회차의 신유승과 유중혁에게로 향했다.


[마왕, '격노와 정욕의 마신'이 상황을 주시합니다.]